예수님은 내 운명 - 십자가는 내 운명


 


예수님 제가 더럽지도 않나요? 사람들은 저보고 다들 마귀라고 피하고 돌을 던지는데?
저 걸레예요 걸레, 더러운 걸레라구요, 저는 창녀에요 창녀. 저를 떠나세요 저는 마귀입니다.



너는 내 운명

에이즈 라는 선악 곧 가까이 하면 죽고 멀리하면 사는 법칙이 사랑안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즉 죽음이라는 질병의 선악법칙이 사랑을 뛰어넘지 못하고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여 능히 뛰어넘는 것을 바로 고멜과 같은 교회에게 찾아온 한 남자의 이야기

 
십자가는 내 운명

하얀 눈과 같은 맑고 깨끗한 용서의 사랑이, 먹보다도 더 검은 저주받은 여인의 운명 속에 침투한다.

수 많은 남자를 거쳐가는 어디에도 정착 할 수 없는 여인의 운명 속에

모든 힘과
모든 선함과
모든 법과
모든 지식과
모든 지혜와
모든 거룩과
모든 성스러움과
모든 진리와
모든 사랑은
그녀를 이미 저주 받은 운명이기에
그녀를 더더욱 저주받은 운명으로 몰아가면서
그녀를 노리개로 취급하며 마음껏 다루어서 내뱉어버린다.

그러면 그럴수록 그 여인은 그 치욕스러운 수치를 더더욱 숨겨버려야 한다.

항상 그녀를 무시할만한 근거를 가지고 덮쳐온다. 힘이 있다는 이유로, 남자라는 이유로, 이웃사랑 이라는 이름으로 겁탈하고, 선함이라는 거룩을 앞장세워 어떤 저항도 못하도록 저항하면 할수록 수치만 더욱더 늘어간다. 그녀는 오로지 나쁜 여자일 수 밖에 없다.

오로지 자포자기만이 살아남는 길 이다.

문제는 그런 자신에게 용서가 찾아오면 문제가 된다는 것이다. 이 아름다운 세상은 용서가 아니라 아름다움을 유지하고 위해 그녀는 영원히 저주 속에 머물러야 아름다움이라는 질서가 유지된다.

이제 어떤 누구도 그 저주받은 여인에게 용서의 눈길을 보낼 이유도 없을뿐더러 그랬다간 같은 에이즈 라는 사회악을 유통시키는 혐의로 같은 범죄자가 되어야 한다.

마을을 질병 소굴로 만드는 죄
가정의 질서 사회의 질서 국가의 질서를 파괴한 죄

그런데 불가능한 일이 벌어졌다.


바보가 나타났다.


바보에게는 법도 거룩도 지식도 지혜도 힘도 통하지 않는다.

이 저주받은 여인을 어느 누구도 이뻐하지 않거늘
그냥 이뻐 보여서 뿅하고 다가가는 어리석은 자가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녀의 모든 행동 하나 하나가 마냥 이뻐 보인다.

모든것이 이뻐보인다. 선하든 악하든 저주스럽든 악마적이든 죽을전염병을 옮기든 말든
국가의 악이든 마을을 초토화 시키는 재수없는 악 그 자체이든 가정 파괴범이든 말든
마냥 이뻐보이고 사랑스러워 보인다.

이 바보의 눈을 뜨게 할려고 모든 것이 동원된다. 정신차리도록 뺨도 때려보고 찬물을 끼어얹기도 하고 멀리 떨어지도록 쫏아내기도 하고. 법으로 가두어 감옥 속으로 쳐넣기도 하고, 깊이 감추어진 수치의 지옥 속으로 숨겨넣기도 하고, 이 바보의 소리도 없애버리기도 하고

엎친데 덮친데 모든 그녀의 저주가 이 멍청한 바보에게로 전이가 되면 같은 저주의 운명 속으로 들어간다.

그렇게 저주의 운명으로 몰아버렸거늘
맹렬한 바보의 사랑은 모든 것을 가루로 깨뜨린다.

무식하게 자기 유익 하나 챙기는 것 없이 오로지 그 저주 속으로 그 지옥 속으로 오로지 죽음 속으로 오로지 죽음의 질병 속으로 달려간다.

잃어버린 자기 사랑을 찾고자 목숨걸고 찾는다.

이제 모든 더러움과 저주의 어둡고 차가운 새카맣게 검고 검은 막막한 이 여인의 운명을
하얗고 맑은 흰 눈이 살포시 내려와 따스하게 녹아들어 온기가 퍼져 모락모락 피어나는 김으로 눈 깜짝할 사이 아무도 눈치 못채겠끔 지워서 날려버린다.

누구도 지울수 없었던 저주를

이 저주 속으로 들어와서 같은 운명으로 취급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마냥 흰 눈으로 녹여버려 지워 버렸다,

저주는 이제 찾아볼수 없는 오직 하얀 도화지 속의 이 바보의 발자취만 새겨져 있다.
흰 눈 속에 덮쳐진 죽음의 운명은 이 어리석은 사랑에 의해 지워져 버린다.

오직 이 바보의 발자취만 선명하게 흰 눈 밭에 뽀드득 뽀드득 남겨져 있다.


2006.01.18 23:44  김대식 / 에이즈 걸린 마귀 괴물 같은 창녀를 사랑하신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보며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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