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판과 이레


어머니꼐서 갑자기 출애굽기를 읽으시다가 질문을 하셨습니다.

불이 떨어지는데 우박과 함께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무섭지 않은가 말이죠?

성경에서 찾아보니

(출 9:23, 개역) 『모세가 하늘을 향하여 지팡이를 들매 여호와께서 뇌성과 우박을 보내시고 불을 내려 땅에 달리게 하시니라 여호와께서 우박을 애굽 땅에 내리시매』
(출 9:24, 개역) 『우박의 내림과 불덩이가 우박에 섞여 내림이 심히 맹렬하니 애굽 전국에 그 개국 이래로 그같은 것이 없던 것이라』

이 구절이였습니다.

대뜸 그 말을 듣자마자 이렇게 답했습니다.

어머니 무서운게 아니라
그것이 구원하는 방법인데 다른 방법을 하지 않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라고 말입니다.

즉 심판 속에서의 구원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왜 나아만 장군에게 7번 똥물에 씻으라고 했는줄 아십니까?

한 두 번은 참고 씻을수 있겠지요.

그런데 왜 꼭 7번이냐 말입니다.

6번째 까지 담가보면
모릅니다.

그런데 7번째는 단순히 숫자 개념이 아니라
너는 병고침 받을 자격이 없다 라는 겁니다.

병고쳐 봤자
또 병드는 존재라는 겁니다.
즉 갇혔다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갇힌 몸에 병든 몸에
대신 똥물을 뒤짚어 쓴 자가 있다는 겁니다.

맞습니다. 장대높이 달린 인자를 쳐다보는 원리입니다.

불과 우박이 뒤썩였다는 것은

너무 너무 또렷한 현실이다 라는 겁니다.
뭐가? 심판이 말입니다.

그 심판을 아주 부드럽게 그리고 맹렬하게 속도 강도를 높이는 윤활제 역할이 우박입니다. 흐름이 갑자기 잽싼 물쌀처럼 빠르다 라는 겁니다. 이것이 아주 아주 또렸한 현실이다는 겁니다.

그 앞에서 빵깨이(소꿉놀이) 살고 있는 인간들의 삶이란 비로소 허상 허깨비로 드러난다는 겁니다.

즉 실상과 허상의 대조를 아주 명료하게 보여주는 대립상태이다는 겁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것들이 유물론적으로 작용해서 아무리 봐도 허상같이 안보입니다.
즉 거기에 해당되는 나 라는 존재조차도 허구로 보이질 않습니다.
나 라는 존재는 너무 너무 또렷한 겁니다.

그런데 불 속에 들어가서 보니까
모든 것이 다 타버리는 그 불속에서의 시선에서는 불 바깥이 모조리 허구라는 겁니다.

그 불 속에 예수님이 있어서 너무 너무 또렷하고 명료해서 춤을 덩실덩실 추며 노래를 부르는 겁니다.

심판 속이 이렇게 명료할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 똥물이 비로소 7번 만에 핏물인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내가 죽인 그 예수님의 피였는줄, 평상시 무시했던 그 피인줄, 그때서야 알게 되는 겁니다.

그 속에서 평안이 오는 겁니다. 곧 법이 아닌 은혜 말입니다.

나를 죽이시는 그 분이 나의 평화를 빼앗아 버리고 나의 평안을 모조리 강탈해 버리고
자신의 평안을 심는 상황이

나의 빵깨이 같은 삶을 걷어치우고 자신의 평안으로 심는 것이 바로 이레입니다.

나를 위한 따로 국밥같은 평안은 허구로 밝혀지고 그 허상이 모호하고 그림자처럼 안개 같이 사라져야 함을 명료한 심판 앞에서 날라가 버려야

비로소 내가 주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날 사랑하셨음을 보게 됩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했다는 그 증거물이 단 한 톨이라도 남아 있는 이상
모든 시선은 거기에 집중됩니다. 허구입니다.

그 허구를 실상이 날려버려야 합니다.

그래서 심판만이 명료한 겁니다.

베드로가 이웃을 몇 번 용서해 줘야 하느냐 라고 예수님께 묻습니다.
자신은 7번 정도 했는데 과연 어느 정도까지 해야 기준이 될수 있냐 라는 것입니다.
곧 숫자 문제요 양의 문제입니다.

즉 지난 번에 말했던 시공간을 몸에 장착하고자 하는 우상을 만들어내는 겁니다.

예수님은 아예 시도조차 못하도록 몸에 장착하고자 하는 그 시공간 곧 몸을 깨뜨려 버립니다.

7번이 아니라 7 곱하고 70번 하라고 말입니다.

즉 불가능한 소리를 한 겁니다.

바로 그겁니다. 불가능한 용서를 할 생각 조차 하지 말라는 겁니다.
이것은 이웃사랑 하지 말라는 소리입니다.
또한 예수 믿지 말라는 소리입니다.
충성 봉사 하지 말라는 소리입니다.
그 어떤 것도 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냥 막사세요.

그럼 어쩌란 말이냐?

그 불가능한 용서를 할 생각 말고 그 반대로 불가능한 용서를 받으세요.
이것이 이레 의 의미입니다.

불가능한 용서를 7에 70번인 490번을 받아야할 정도로 너는 무한대의 용서가 아니면 안될 정도의 죄인이다는 겁니다.

아니 그 정도로 저를 무시하는 겁니까? 바로 그겁니다. 무시 받으라 곧 심판받으라 라는 소리입니다.

490번 정도로 용서 받아야 할 죄인 중의 괴수로 새롭게 창조하시는 겁니다.
용서로 말입니다. 이레로 말입니다.

그래서 7번 똥물에 씻기시는 겁니다.

이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이냐 하면 정작 나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선악체제 즉 법체제에서는 무시 맞음), 예수님 자신의 피를 흘리셨다는 그 피와의 만남으로 인도하시는 사랑이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여기서 다윗은 뿅 가버립니다. 금식도 회개도 눈물도 기도도 하지 않습니다.
막먹고 막마시고 막춤추고 막노래 부릅니다.

(삼하 12:20, 개역) 『다윗이 땅에서 일어나 몸을 씻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갈아 입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경배하고 궁으로 돌아와서 명하여 음식을 그 앞에 베풀게 하고 먹은지라』
(삼하 12:21, 개역) 『신복들이 왕께 묻되 아이가 살았을 때에는 위하여 금식하고 우시더니 죽은 후에는 일어나서 잡수시니 어찜이니이까』
(삼하 12:22, 개역) 『가로되 아이가 살았을 때에 내가 금식하고 운 것은 혹시 여호와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사 아이를 살려주실는지 누가 알까 생각함이어니와』
(삼하 12:23, 개역) 『시방은 죽었으니 어찌 금식하랴 내가 다시 돌아오게 할 수 있느냐 나는 저에게로 가려니와 저는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리라』
(삼하 12:24, 개역) 『다윗이 그 처 밧세바를 위로하고 저에게 들어가 동침하였더니 저가 아들을 낳으매 그 이름을 솔로몬이라 하니라 여호와께서 그를 사랑하사』
(삼하 12:25, 개역) 『선지자 나단을 보내사 그 이름을 여디디야라 하시니 이는 여호와께서 사랑하심을 인함이더라』

(울어도 못하네 눈물 많이 흘려도 겁을 없게 못하고 죄를 씻지 못하니 울어도 못하네
십자가에 달려서 예수 고난 보셨네 나를 구원 하실이 예수 밖에 없네
힘써도 못하네 말과 뜻과 행실이 깨끗하고 착해도 다시 나게 못하니 힘써도 못하네
참아도 못하네 할 수 없는 죄인이 흉한 죄에 빠져서 어찌 아니 죽을까 참아도 못하네
믿으면 하겠네 주 예수만 믿어서 그 은혜를 입고 오직 주께 나가면 영원 삶을 얻네
)

주님의 피를 만났다고 외칩니다. 여디디야

내 행함 내 믿음이 날라가 버리고(그것은 모호한 허구입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만났다는 그 즐거움에 더 이상 자기자신을 기억할 필요조차 없을정도로
피 앞에 매몰되어 버렸습니다.

바로 이 언약을 기준으로 이스라엘은 행함의 차원이 아닌 잘했건 못했건 상관없이
심판이 퍼부어 집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빵깨이 다 날라가버립니다. 곧 육체(자아)도 다 날라가 버립니다.
날라가도 상관없는 피와의 만남이 있기에
다윗언약을 기준으로 해서 이스라엘 민족 국가 나라는 삭제 당해 버립니다.
삭제 당해 이제는 끝났는줄 알았는데, 어 없어진줄 알았는데
예수님이 오셔서 새이스라엘을 세워버립니다.
날라간 이유가 새로운 것이 있기 때문이였습니다.

자 이렇게 되면 하나님 나라 운동을 하던 바리새인
묵시운동을 하던 유대인

이 얼마나 착하고 평생을 하나님 말씀 어기지 않겠다는 그 맹세를 지키는 것이
얼마나 악마적인 사고방식임이 예수님 앞에서 들통나 버리는 겁니다.

그 말씀을 어기지 않는 삶을 쥐고 있는 이상
예수님이 다 지켜서 주시는 선물은 무시 해 버리고, 거부하고, 싫어할 수밖에 없기 때문인 겁니다.

이것이 바로 처음자리를 인간이 확보할수 없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의 개념은 예수님이 사랑해서 세운 없는데서 생겨난 존재인 사랑의 개념
곧 첫사랑의 개념입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한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사랑해서 화목제물 곧 누가 죽어서 피를 흘렸다는 그 심판성의 사랑을 하셨다는 겁니다.

우리는 이 심판성의 사랑을 도저히 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사랑은 허구요 거짓이며 악마적입니다.
그 사랑을 주님 쪽에서 거부했다는 이유로 예수님을 죽여버린
인간의 사랑은 곧 도착적인 살인의지임이 십자가에서만 드러난 겁니다.

그래서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어딜 감히 인간의 사랑을 들이대느냐 라고 하시는 겁니다.

인간의 사랑을 불 속에 넣었다가 다시 끄집어 내어보면 다 사라집니다.
즉 허구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피 흘리심의 사랑을 불 속에다 집어 넣었다가 빼내보면
변함없이 그대로입니다.

당연하죠 심판이니까 도리어 불(지옥)이 감당이 불감당인 심판의 사랑이니까 도리어 불이 무릎 꿇을 판국입니다. 죽음과 지옥과 마귀가 도리어 무릎 꿇는 사랑인 겁니다.

그래서 7번이라는 이레 곧 평안을 주님 쪽에서 제시하시는 겁니다.
자신의 죽음으로 곧 대신 심판 받으심으로 이룬 평안인 화목입니다.
화목제물입니다.

어딜 감히 이 화목 제물 아닌 것으로 화평을 이루거나
병고침을 이루거나
싸움의 전쟁을 종료시키는 마감을

감히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죄를 위해서가 아닌

자신의 평화인 심판을 위해서 우리를 죄인 중의 괴수로 만드시는 겁니다.

자신의 평안인 7 이레를 위해서 말입니다.

이 이레 때문에 우리는 늘 불 속으로 들어가는

그 불가능한 사랑을 온 몸을 난도질 당하면서 까지 사랑받는

그 심판 받기로 작정된 자들입니다.


(고전 4:9, 개역) 『내가 생각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 같이 미말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이 십자가의 사랑이 아니고서는 다른 구원의 방식은 없습니다.

심판이 잉태한 불속에서 낳은 자식을 종말의 사람 곧 성도인

새이스라엘 새피조물입니다. 창조주가 십자가에 달리신 심판 주이시거든요.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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