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재 p54-55 안식일의 의미 (누가복음 6장 1-11절)

어린이 매일성경 2008년 1-2월 (고학년 4-6학년)
성서유니온 http://www.su.or.kr 1월 18일 날짜 목요일 QT

율법(헌 것)을 뚫는 새언약의 십자가(복음)

새로움의 집착과 새로움이 없는 죽음의 세계

지난 공부 16강부터 지난 주 20강 까지 정리를 해봄으로써 오늘 안식일의 의미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먼저 16강의 예수님께서 마귀의 3가지 시험을 통해 마귀의 실체를 들추어내시고 난 이후에 17강에서 희년을 선포함에 대해서 공부했습니다.

그러나 이 희년 곧 복음(영의 일=하나님의 일)은 반드시 누가 싫어한다 라는 어두움의 실체를 폭로하면서 누가 희년을 가장 싫어하는지의 내막을 알려줌으로써 그 상대적인 자가 희년의 대상으로써 정해진다고 합니다. 보통 우리가 교회에서 세뇌 당하기는 희년을 받아들이는 자가 희년의 대상이라고 마치 인간의 숙제인냥 배웠지만

그 반대로 희년의 거부자를 알려줌으로써 인간의 숙제나 인간의 선택권이 일체 없고 희년의 거부자로 인해 상대적인 긍휼의 대상자가 정해진다는 희년 스스로가 선택권으로써 발휘된다고 했습니다.

놀랍게도 과거에는 고아 과부 나그네 였던 이스라엘이 이제는 그 고아 과부 나그네를 무시하는 역으로 애굽나라의 모습을 갖추었다는 것을 희년은 폭로하면서

새롭게 고아 과부 나그네를 새로 창조해 내는데 그 창조가 바로 빛과 어두움을 나누듯이
창조라는 질서를 부각함에 있어서 무질서 라는 어두움이 구별되는 겁니다.

결국 혈통적인 유대인을 자부하던 자들이 빛을 싫어하는 어두움이였고
그 유대인들에게서 어두움을 취급받던 자들이 도리어 긍휼의 대상인 새창조물이 되는 겁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전혀 새창조물의 가치성이 일체 그들에게 없다는 것을
도리어 유대인들로 인해서 밝혀집니다. 맞습니다. 일체 없습니다. 그러나 새창조라는 사랑의 손길은 사랑이 편애를 해 버린 이상 누가 여기서 반론을 못 펼칩니다. 그것은 과거 유대인들이 격은바 였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도리어 역전이 되이서 유대인은 마치 애굽의 바로왕처럼 예수님의 피조물을 향해서 시기와 화냄을 펼치고 있는 겁니다.

자 이렇게 주님의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자작극에 유대인이 말려듬으로 인해서
희년 선포와 또 희년 거부 라는 상반된 충돌을 주님을 더더욱 차이를 드러내고 극대화 시킴으로써 과연 누구의 작품이 진짜 새것이고 누구의 작품이 짝퉁인지를 가려내고자
구별(거룩)의 작업을 본격적으로 드러냅니다.

이제 짝퉁의 진위는 뚫어버림을 통해서 알 듯이 예수님은 이제 이 희년을 통해서 모든 것을 뚫어버립니다. 심지어 예수님 편이든 마귀 편이든 가리지 않고 공정하게 다 뚫어버립니다.

의인인지 아닌지는 죽여보면 알 듯이 의인은 다시 믿음으로 살겠지만
악인은 믿음으로 다시 살 수가 없습니다.

결국 성경은 모든 해석의 기준이 죽음으로 해석을 하면 됩니다.
그 반대로 마귀는 모든 해석의 기준이 생명입니다.

정작 마귀가 죽음으로 해석을 할 것 같고, 바른 해석이 생명으로 해석 하면 된다고 우리는 알고 있겠지만 그것이 바로 선악과를 따먹은 하나님과 같이 된 선악의 사고방식입니다.

이것을 지금 예수님은 실체를 들추어 내고자 의도적으로 베드로가 막음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의 죽음으로 달려가시고자 하시는 겁니다.

죽음으로 해석 한다? 과연 옳은 것일까를 제발 여러분은 고민하고 생각해 보셔야 합니다.

참 재미 있게도 모든 학문과 모든 사상은 죽음을 해석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철학을 보면 선악으로 출발해서 선악으로 마쳐버리기에 선악에서 벗어난 적이 없듯이
죽음을 손 도 못대고 다 거부하게 됩니다. 오죽하면 죽음이라는 것의 비밀을 파악해 보고자 실제로 죽어 보는 자살까지도 서슴치 않고 했지만 죽음은 그런다고 호락 호락 비밀을 밝혀주질 않습니다. (결국 죽음도 모르면서 생명을 안다고 할 수 없도록 하신겁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라는 이 죽음은

하나님이 직접 내린법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인간은 단 한번도 이 법을 제대로 형벌 받은 적 조차도 없습니다.

그저 흙으로 와서 흙으로 돌아갔을 뿐
제대로 법 집행을 받는 심판대에 설 가치조차도 부여받은적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죽음을 알려면 제대로 하나님의 저주의 법에 그 형벌을 직접 받은 분에게 물어봐야 할 것입니다. 이 분은 바로 예수님입니다.

결국 죽음은 예수님 외에는 알 수가 없고, 예수님 외에는 죽음을 해석도 못할뿐더러 해석할 권리조차 없습니다. 이것은 생명도 그러하다는 뜻입니다. 죽음을 통과한 자만이 생명을 외치는 겁니다. (솔로몬의 지혜 이야기에서 생명과 죽음을 서로 놓고 싸움. 즉 죽음과 생명을 제대로 안 자는 저주의 심판을 아는자. 그것이 바로 사랑 뿐. 지혜자는 죽음으로(자기 스스로 낮아짐) 사랑을 도출)

그래야 선악을 주님만이 아는 것으로 족한 창조주의 영역을 우리가 구지 선악을 알 필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괜히 따먹어서 죄 아래 갇혀버린 것입니다.

자 이제 주님은 우리의 알 필요가 없는 죽음을 이제 교체하시고자 거두어 가시고자 직접 죽음을 맞이하러 오신 것입니다. (정녕 죽으이라의 죽음을 아는 자가 생명을 줌. 다른 생명은 없음)

이렇게 됨으로써 우리는 새로운 예수님의 죽음을 알아야 하는 겁니다. 그리고 성경 전체를 예수님의 죽음으로써 새롭게 해석해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희년입니다. (희년 곧 자유란 저주의 심판의 날)

예수님의 죽음으로 다 해석이 되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이 죽음은 십자가로써 그 비밀이 감추어졌는데 이 십자가가 지독한 버림(미움)와 지독한 편애(사랑)에 대한 고유권한을 확보한 새언약의 완성으로 인해서 어느 누구도 힐문을 못하도록 모든 입을 잠잠케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십자가 외에 알지 않기로 했다 라는 말은
나는 선악을 알 필요가 없는 존재가 되었다는 말이요( 누구로부터? 예수님의 피 외엔 없음)
예수 안에는 결코 정죄함이 없는 예수님의 세계에 이끌림 받은 사랑에 꽂혀버림을 당했다고 하는 겁니다.

자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이제 새롭다 라는 의미는 바로 새언약의 약속 성취를 기준으로 인해서
새로움을 반드시 헌것과 대조 시킴으로써 증거되는 겁니다. 마치 빛을 어두움을 통해서 증거하듯이 말입니다.
즉 평상시 사람들이 말하는 새롭다는 의미는 전혀 아니고, 예수님의 기준의 새언약인데 반드시 헌 것을 패기처분하고 찢어버리고 도말한 그 주체가 바로 새언약이요 기준입니다.

자 그럼 17강 뒤의 18강부터 희년이 희년 자신을 드러내는데 있어서 한쪽은 희년의 대상과 한쪽은 희년의 거부를 둘 다 배치 시킴으로써 희년의 의미를 드러내듯이
18강에 병고침의 기적을 통해서 병고침의 목적이 아니라, 또 귀신을 쫏아 내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정작 병든 자와 귀신들린자의 변화가 아닌 그 변화를 싫어하고 미워하는 세계까지 예수님은 깊게 깊게 파고들어서 들추어내심에 의해 진짜 마귀들은 바로 건강하다 라고 자부하는 자들의 사고방식까지 다 쑤시고 다니고 있다는 겁니다. (즉 죽은자와 방불한 고아 과부 나그네를 그 반대인 의롭고 건강한자를 동원해서 누가 그들에게 필요한 의사냐 로 증거하는 겁니다.)

더 놀라운 것은 사람이 악을 품어서 악한 행동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직접 미움과 편애를 새로 창조해 버림으로 인해서 반드시 영과 육을 쪼개고 나누는 결과로써 육은 영을 싫어하고 영은 육의 소욕을 거부하는 자신의 창조성을 일체 방해 받지도 않고 그 뜻대로 진행을 하시고 막을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19강에는 이것이 바로 육과 영을 가르는 일에 성령의 일이 세상을 두 조각냄으로써 여기에 동원되는 목격자가 바로 사람 잡는 십자가를 외치는 성령의 사람인 것입니다. 이런 자를 사람 낚는 어부라고 말씀 하시니까 마치 사람의 일인냥 사람 숙제로 기존 교회에서 문자 그대로 해석을 했는데 그것 보세요 주님의 창조하심에 걸려든 거죠, 결국 아무리 육은 이 영의 말씀을 인간의 신학으로 해석을 할려고 해도 결국 인간의 유익을 창출해 낼 뿐이지 주님의 십자가(새언약)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결국 헌 것을 고집할 수 밖에 없도록 만드시는 겁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 마저도 흉내내고 따라할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죽음 마저도 따라할려는 그야말로 말릴수 없는 마귀병에 걸려 있는 철저하게 자기에게 갇혀버린 존재입니다.

그리소 19강에서는 중풍병자를 소품(미끼)로 사용하여서 정작 죄를 다르고 있는 거짓선지자들의 세계를 폭로합니다. 죄를 하나님만 사한다 라는 그들의 신학에 사실상 자기들이 백성들의 죄로 인해서 먹고 사는 악마임을 자처하게 되는 실상을 주님이 까발라시는 겁니다.

진짜 의사라면 이 땅에 병이 없기를 바래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렇게 되면 자기 존재성이 사라집니다. 의사가 사라지게 되듯이 말이죠. 그렇게 되더라도 병이 사라지기를 바란다면 그 사람은 진짜 의사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의사는 세상에 없습니다. 반드시 자신의 의사됨을 드러내기 위해서 자동적으로 병자는 더더욱 많아야 하고 그 병자가 아니면 자기의 의사됨을 드러낼 수가 없습니다.

결국 선악에 인간은 감당을 못하고 역으로 선악을 이용해서 하나님 흉내를 모든 직업 모든 사고방식 모든 생활 속에서 이런 모순을 안고서 우리는 죄 아래 갇혀 있음을 시인해야 할 것인데도 불구하고 성령이 오지 않으면 그 시인 조차도 모순 되는 이미 거짓 속에 있기에
거짓이 아무리 진실을 말해도 거짓인 겁니다. 이미 권세 아래에 갇혀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신 분이 예수님인데 반드시 이 예수님을 인간 중에 가장 잘 믿는 자들인 성화된 자들인 최고의 믿음을 발휘하는 자들만이 예수님을 죽여야 하는 겁니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인간 중에 그래도 희망이 있게 됩니다.

그런데 인간 중에 최고라고 하는 자들이 예수님을 죽였기에
더 이상 우리는 인간에게 소망을 둘 필요가 없고
아무리 목사라도 늘 의심하면서 끝까지 판단을 해야 합니다.

다행히도 예수님이 다 완성 했기에 우리는 그들말을 일체 귀기울일 필요 없이 바로 예수님을 통해서 모든 내막을 파악하는 십자가를 통해서 이 세상을 하나씩 하나씩 해부하는 해부학 공부를 통해서 모든 내막을 알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20강 에서는 예수님이 자신의 죽음(곧 자기해체)를 통해서 이 세상의 모든 진위를 다 까발리고 공개해 버렸듯이, 율법을 쥔 인간들의 사고방식을 일부러 율법을 어기는 제자들의 미약함을 통해서 미끼가 되게 하심으로써 율법을 쥐었다는 자들의 속내를 폭로하심과 동시에 그 어두움과 차이가 나는 새언약의 모습을 드러내십니다.

그래서 헌 술과 헌 부대와 새 술과 새 부대는 이 둘의 차이로써 그 내막을 알수 있도록 하시는 겁니다.

결국 새롭다 라는 새것은 반드시 헌 것의 모든 내막이 왜 헌 것이고 거짓이고 지나가버리고 그림자이고 실상도 아니고 실체도 아니면서 가짜이기에 진짜같이 흉내를 낼 수 밖에 없는지를

헌것의 대조로써 새것의 진위를 밝히시는 겁니다.

여러분 놀랍지 않습니다. 이것이 지혜인데 지혜는 가짜 지혜를 들추어내시면서 자신을 드러내는데
지혜가 만약에 인간에게 판단의 여부를 받으면 이미 그것은 지혜가 아닙니다.
도리어 그 지혜를 판단해 버린 사람이 지혜가 되는 꼴입니다.

왜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신랑이 혼인잔치에서 손님과 함께 금식을 하는 꼴을 본적이 있으냐 라는 답변을
법을 쥐고 있는 바리새인이 왜 예수 당신과 제자들은 먹고 마시고 포도주를 즐기고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써만 보여주질 않으냐 왜 경건의 모습인 금식이 일체 없으냐라는 질문에 하신 것입니다.
또 덧붙여 진짜 금식의 의미는 신랑의 죽음에 같이 죽고자 하는 관계성에 놓인 의미라고 하시는 겁니다.

이 말은 무슨 말인고 하니 위의 답변도 새주인과의 관계성 진짜 금식도 새주인과의 관계성인데

정작 가짜 금식은 주님과의 관계성은 일체 없이 자신만의 신앙마일리지를 쌓기 위해서 따로국밥처럼 시킨적도 없는 금식을 자기들이 알아서 한다는 자체가 이미 관계성이 아니다 라고 폭로하시는 겁니다.

주님 자신이 맺은 관계성이기에 또 그런 관계성이기에 일부러 미끼로 사용하셔서 바리새인들의 정죄를 유도하시는 겁니다. 즉 그 말은 바리새인들은 주님께 정죄해도 됩니까요 라는 물음조차 물을 필요없을 정도로 이미 독자성을 뛰는 독보적인 존재로써 자신이 하나님도 필요 없을 정도로 즉결 심판하고 판단해 버리는 율법이라는 문자만 소유했다는 것을 예수님이 알려주심과 동시에 바로 이런 문자를 쥔자들이 바로 헌것의 대표적인 모습이다 라고 알려주십니다.

자 그럼 오늘 공부할 안식일도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새것을 알기 위해 헌 것을 내막을 다 알아야 합니다. 새것이 오기 까지는 이 헌 것을 얼마나 새것인냥 까불고 장난치고 모든 사람들을 장악해 버릴정도로 유세를 부리는지를 우리는 반드시 그 내막을 알고 우리 자신들 또한 이런식으로 하나님과 같이 된 모습을 다름이 아닌 교회에서나 거룩이나 선을 동원해서 이용해 먹었다는 것을 알아야 바울이 왜 자신이 곤고한 자였는지를 고백했고 또 바로 그 이전의 헌것의 진위를 주님으로부터 알려준 그 차이를 알고서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예수 안에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드디어 법에서 전남편에게서 해방된 희년을 누리게 되는 겁니다.

자 안식일을 헌 것을 쥔 자들의 해석과
안식일을 새 것을 쥔 예수님의 해석과의 차이를 알아야 합니다.

이 차이성을 모르면 여전히 우리는 헌 것의 안식을 주장하고 또 그것만 주장 할 뿐만 아니라 남에게도 강요함으로써 살리지도 못하면서 살린다고 떠벌리는 거짓선지자의 거짓평안과 거짓평강으로 일관하게 되는 겁니다.

그럼 안식일의 거짓 해석은 안식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문자 그래도 장악할려는 자들입니다.
참 재미있게도 그렇게 외치는 자들 속에서도 단 한번도 그들 말 그대로 지켰다고 자부할 만한 자가 아예 없다는 겁니다. 이것이 보통 신비로운게 아닙니다.

예를들면 사랑하라 원수도 이웃도 사랑하라 라는 성경말씀을 지킨적이 있는 자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이 말이 가장 잘 먹혀 드는 이유는
사람들 저마다 사랑 받고파 하는 그 입장에 놓여 있다는 심리를 역이용하도록 유도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예수님의 사랑 실천은 역으로 사랑의 실천이라기 보다는 무모하게 개죽음 당하고 죽는 것 뿐입니다. 자 이렇게 되면 사랑받고파 하는 심리도 통하지 않을뿐더러
사랑을 베품으로써 오는 뿌듯함이라던가 또는 받음으로써 오는 즐거움이라던가 이 둘이 서로 상호적으로 보완하면서 주고 받고 하는 모든 것들이 진짜 인간 살맛나는 세상으로 만드는 오늘날의 교회의 백태인데 정작 예수님은 죽어버리고 마시는 겁니다.

이게 무슨 사랑의 실천입니까? 그래서 성화론자들이 비웃는 겁니다. 아직도 십자가에 머무느냐 이 유치한 놈들아 라고 말이죠.

오고 가고 주고 받고 하는 인간의 활동상이 종교의 진면목인데
이런 종교를 깡그리 무시하고 그냥 죽음으로 내달려 버린다면
인간의 모든 행위를 거부한다는 꼴 밖에 안됩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랑은 없고 십자가의 죽음 만이 사랑 실천 완성이다 라고 하니깐요

그러니 거리끼게 하고 걸림돌이고 어리석고 미련하고 싫어버린바 되는 겁니다.

아무도 원치 않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만이 이것이 유일한 새것이다 라고 하시고 이 외의 모든 것은 헛 것
즉 우상이다 라고 하시는 겁니다.

이런 일방적인 주관적 독선이 어디있습니까?

자 그래서 안식일은 정작 법을 쥐었다고 하지만 남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죽이는 법으로써
실질적으로 예수님을 죽이는데 안식일의 해석이 동원되는 것이 인간의 해석입니다.
반드시 남이 아닌 예수님을 죽이는데 안식일을 동원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예수님은 그 반대로 그런 인간의 해석을 죽음 곧 헌 것인 헛것이라고 하고(성화론자들의 해석은 무조건 다 헛것임)
더 구체화 할려고 인간들이 예수님을 반드시 죽일 수밖에 없도록 안식일을 해석하시는 겁니다.

자 이것이 예수님의 안식의 해석의 차이입니다.

부연설명하면

어떤 성경의 의미이든 반드시 사람들로부터 미움받을 수 밖에 없는 해석을 못한다면 그것은 다 거짓입니다.

반대로 육의 해석은 단 한사람이라도 유익이 되도록 하는 인간의 열심이 담겨진 해석이 된다면 그것이 바로 마귀적인 해석입니다.

즉 위의 해석은 인간에게서는 불가능 하고, 밑의 해석 또한 인간의 선악의 틀에서 벗어난 해석을 할 재간이 없다는 겁니다. 반드시 남을 유익케 하고자 하고픈 마음에서 해석을 하니깐요

바로 예수님의 해석은 이런 인간의 선악의 취지를 거짓으로 밝혀주시는 배려로써 반드시 그것이 악하다 라고 알려주심과 동시에 안식은 바로 이런 선악에 갇혀버린 인간의 해석을 헌 것이라고 지적해주는 것이 참 안식의 모습이라고 하시는 겁니다.

바로 이 예수님의 취지가 인간들에게는 악하게 보이는 겁니다. 아무리 배려라고 하지만 그 배려가 절대로 배려로 안 보이고, 마치 모든 사람들이 있는 공개된 자리에서 자신의 수치가 들추어진 것에 대한 보복심으로 작용하도록 만들었다고 자존심 상한 것에 대한 복수심만 일깨우는 것이 도리어 사랑이다 라는 겁니다.

맞습니다. 사랑만이 그렇게 하지 사랑이 아니면 죄의 실체를 드러내지 못하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의 사랑은 그것은 안 건드리고 대충 대충 서로가 서로를 덮어주었다고
그래서 고맘다고 자기들끼리 이미 사랑으로 완벽보안이 되어 있는 겁니다.

주님이 필요 없을 정도로 자기들끼리 용서하고 사랑하고 다 해버리니깐요

결국 인간의 사랑이란 정치입니다.

이 정치의 힘이 진짜 사랑을 반드시 죽이도록 되어 있기에
더더욱 인간의 사랑으로 결집된 정치집단은 그 시대의 희망으로 자리 잡아야만 하는 겁니다.

사랑의 정치 집단 즉 사랑당, 행복당, 소망당 이것이야 말로 가장 마귀집단의 본부입니다.
인간의 사랑은 겨우 정치화입니다. 사랑으로 결집된 그 힘을 목적으로 하는 겁니다.
힘의 결집, 댓가성을 노린 행함과 지킴의 실천인 겁니다. 이유 있는 거죠
사랑에 무슨 이유가 있습니까? 조건이 있습니까? 이유없는 사랑이 이유되게 만드는 것이 인간의 창조성입니다. 다 거짓입니다. 그렇기에 힘을 목적으로 나를 건드리지 말라는 것이 목적인 겁니다. 그래서 힘을 결집하고 예수님은 그 반대로 마음껏 건드려라 라고 자기를 내어주심입니다. 이유 없습니다. 이 차이가 사랑이 인간 밖에서 와야지만 구별 됩니다.

바로 이런 인간의 힘의 결집으로 된 정치화된 사랑을 박살내는 것이 안식일의 주인입니다.

갑자기 주인이라는 의미가 나온다는 것은
어떤 힘의 결집이 일체 필요가 없는
그저 주어지는 결과로써 누구에게 주어진 관계성으로 따지게 되는 겁니다.
결국 이 주인의 여부로 안식의 의미가 달려있지
인간의 지키고 행하고의 문제가 아니다 라는 겁니다.
인간의 행하고 지키고의 문제가 바로 헌 해석이고
이제 새 해석의 안식은
바로 이 주인의 손에 달렸다 라는 거죠 그렇다면 이 주인에게 모든 사활을 걸어야 할 판국에 놓은 것인데 과연 과거의 해석으로 주도권을 가진 정치세력으로서의 안식 해석자들이 순순히 그 해석이 주인이 되도록 내버려 둘까요? 이게 바로 안식이라는 새 해석을 하시는 주인이 보여주는 새로운 해석입니다. 즉 저들의 가짜 안식이 내막을 반드시 유도하고 새것이 주인이 못되도록 하는 그들의 실상을 낱낱이 까발리는 겁니다.

(눅 6:1, 쉬운)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셨습니다. 제자들이 밀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벼서 먹었습니다.』
(눅 6:2, 쉬운) 『그러자 몇몇 바리새파 사람들이 말했습니다. "어찌하여 당신들은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까?"』
(눅 6:3, 쉬운)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습니다. "너희들은 다윗과 그 부하들이 굶주렸을 때, 다윗이 한 일을 읽어 보지 못했느냐?』
(눅 6:4, 쉬운) 『다윗은 하나님의 집에 들어가서 제사장들 외에는 그 누구도 먹어서는 안 되는 진설병을 먹고 자기 부하들에게도 주지 않았느냐?"』
(눅 6:5, 쉬운) 『예수님께서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다."』

진짜 주인이 나타나니까
이 주인공을 부각하기 위해 그 동안 가짜 주인행세 한 자들의 행패를 낱낱이 뒤엎고
변사또의 만행에 그동안 억눌렸던 자들이 암행어사 출도요 라는 그 소리로
모든 무릎을 꿇토록하고 뚫어버리도록 시원케 싹쓸이 합니다.

결국 변사또는 이 암행어사를 드러내기 위한 역할로써 그 악역의 역할을 톡톡히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 뒤엎어버리고 뚫어버리는 반전의 전쟁, 역전의 승리가 바로 희년을 완성하는 안식일의 주인이 주는 안식입니다.

날과 절기를 바로 이 예수님의 주인됨을 증거하는 그림자인데 어느새 그림자가 주객이 전도되어 주인행세를 함으로써
실체가 오니 그 모든 거짓을 다 밝혀버리는 진위를 가려내시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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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반위주(客反爲主)

객이 도리어 주인 행세를 함. 사물의 大小, 輕重, 前後을 뒤바꿈

주객전도(主客顚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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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렴청정 [垂簾聽政]

국왕을 대리(代理)해서 행하는 정치.

어린 왕이 즉위했을 때, 그의 어머니나 할머니가 대신 나라일을 보던 것을 말한다. 남녀가 엄히 구별되던 때이므로, 국왕 대신 일을 보던 여성들은 발[簾]을 내리고 그 뒤에서 정치를 행했기 때문에 수렴청정이라고 했다.

한국에서는 53년 고구려 태조왕(太祖王)이 7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르자 태후(太后)가 수렴청정한 것이 처음이다. 대무신왕도 11세의 나이에 즉위했으므로 대리정치를 했을 것으로 보이나 기록에 나타나 있지 않다. 그뒤에도 고려와 조선 시대를 거치면서 여러 차례 나타나는데, 특히 조선 후기인 순조 이후에는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경우가 많아 수렴청정이 많아졌다. 이 때문에 외척(外戚)의 세도정치(勢道政治)가 연이어 계속되면서 왕권이 약해지고 관리들의 부정부패가 심해지는 폐단이 생겼다.→ 섭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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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어려서 등극하면 대비나 대왕대비가 왕을 대신했는데, 유교 정치의 근본이 왕에 이한 통치이므로 형식적으로 왕을 앞에 않히고 그 뒤에 주렴[발]을 치고 그 뒤에 대비가 앉아서 명을 내려 정치를 하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신하들은 형식적으로 왕으로 부터 명을 받는 것 처럼 되지요.

수렴은 주렴[발]을 친다는 의미입니다.

살펴볼 단어 -  대리청정 섭정승


섭정 [攝政]

군주국가에서 새로 즉위한 왕이 어리거나 국가가 어려울 때, 왕 대신 국정을 처리하던 일이나 사람을 일컫던 말.

왕세자에 의한 섭정은 대리청정(代理聽政), 대비(大妃) 등과 같은 여자일 경우는 수렴청정(垂簾聽政), 신하일 경우는 섭정승(攝政丞)이라고 했다. 우리나라에는 백제 전지왕(支王)의 경우가 처음이다. 그러나 고구려와 신라시대에도 있었던 듯하다. 고려시대에는 섭정이라고 부르지는 않았으나, 몽골간섭기 등 전시대에 걸쳐 왕의 자리가 비었을 때 섭정과 비슷한 것이 있었다. 조선시대에도 섭정이 시행되었는데, 특히 대비에 의한 수렴청정이 많았으며, 말기의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은 10년 동안 섭정해 권력을 독점하기도 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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