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재 p52-53 새로워졌어요 (누가복음 5장 27-39절)

어린이 매일성경 2008년 1-2월 (고학년 4-6학년)
성서유니온 http://www.su.or.kr 1월 17일 날짜 목요일 QT

일치성을 추구하는 인간교의 새로움과 차이나는 예수님의 새언약
 
인간의 종교성에서의 본능은 항상 신과의 일치성을 추구하는데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과 같이 된 인간의 죄의 진면목입니다. 즉 하나님과 일치하고픈데 전인생을 다 투자하고 있습니다. 모든 인간의 생각과 학문과 행동은 신 되기로 질주를 하는 겁니다. 종교란 신을 앞장세우면서 신을 꼭두각시로 삼을뿐 정작 주인공은 인간이 되고픈 것이 담겨진 것이 바로 바벨탑이라는 종교의 본성입니다. 이것이 국가 사회 가정에까지 인간은 자기고유의 영역을 침범받기 싫은 완벽한 성곽을 세우고 철통같은 수비로써 방어하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가인에게 주어진 이마표입니다.

어떻게 해서든 인간은 신과의 일치성을 보여야 그 신의 자리에서 군림하고픈 욕망에 활활활 타오르고 있습니다. 이런 성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주를 삼키듯이 이런 인간의 죄성만이 십자가의 사건을 유발케 되는 겁니다.

즉 인간의 일치성이 아닌 차이성으로써 사랑은 증거가 되는 겁니다.
인간의 인공적인 사랑은 일치성으로써 절대로 주님을 버리지 않겠다는 베드로의 고백에 나타납니다. 그리고 화목제물로써 하나가 되었다고 자신이 성경을 변증하는냥 떠들어댐으로써 정작 성경을 왜곡하고 있는 겁니다.

화목제물은 인간의 입술로써 외쳐지지 않는 오로지 예수님 자신의 숙제로써의 외침입니다. 

결국 같은 양상의 죽음으로써 증거되는 화목제물을 인간은 자기 쪽으로 땡겨서 변호만 할 뿐이지 죽음 속으로 뛰어든적도 없고 화목제물이 된적도 없으면서 화목제물을 일치성으로써 증거하는 겁니다.

여기서 거짓선지자와 참선지자의 차이성이 드러나는 겁니다. 참선지자는 화목제물을 차이성으로써 증거합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뽑힌 이유가 남들이 지적받지 못한 죄를 지적받고 이 죄를 지적받음으로써 흘려지는 피를 목격하게 되는 겁니다. 아 이거구나

그런데 거짓선지자는 이것을 자기 쪽으로 땡겨서 반드시 자기를 높이고자 하는데 이용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다들 속아주면 참으로 좋겠는데 하필이면 그 상황이 주님이 던진 미끼를 덮석 무는 결과가 됨으로써 인해 졸지에 여호와의 거룩한 전쟁에 늘 공격받는 대상이 되는 겁니다.

정작 구약에서 여호와의 전쟁의 대상은 애굽도 아닌 이스라엘이였고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전쟁에 참여하지 않음으로 인해서 정작 전쟁의 대상이 되는 겁니다.

그럼 거짓 선지자들이 외칠 수밖에 없는 내용은 무엇입니까?

간단합니다. 어떻게 하든지 간에 신과의 일치적인 모습을 내세우는 길 외에는 없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제자들이 늘 예수님 앞에서 자기들끼리 서로 누가 높냐 라는 싸움으로 일관했듯이 지금도 교회 안에서의 직분이 누가 서로 섬기느냐가 아닌 누가 직분으로써 서로 높은자이고 누구의 말빨이 더 큰 효력을 갖느냐에 미쳐있습니다.

여기에 동원되는 것이 성경의 지식들입니다.

결국 성경의 지식들이 자신을 낮추는데 동원되는 말씀의 운동력이 아니라
자신의 자리와 그 자리를 굳히기 하는데 동원되는 교리와 신학으로 자아의 시녀 노릇으로써 점점점 구체화 되는 정치로 발전하게 되는 겁니다. 물론 항상 교회를 허물어버리는 자를 정치적은 마녀사냥이라는 명목을 항상 명분으로써 내세움으로써 작용하는 겁니다.

자 그럼 높고자 하는 마음이 아닌 낮아지고 섬기는 마음이 되자 라고 또 명령어로써 행동하면 또 거기서도 누가 더 잘 낮아지고 섬기는 자인지를 또 경쟁하게 되는 겁니다. 항상 타인과의 비교인 셈입니다. 여전히 우리는 이런 선악의 죄에서 자발적으로 벗어날 길은 애초부터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겁니다.

자 그래서 오늘 살펴볼 공부내용이 바로 헌 술, 헌 부대와 새 술, 새 부대와의 차이성을 주님이 드러내시는 겁니다.

결국 새언약은 옛언약의 차이로써 알게 되지 그 차이성을 모르면 새언약의 예수님의 활동인 새언약의 완성이 모조리 또 우리가 행함으로써 따라잡기로 목사들에게 속을 수 있다는 겁니다. 여전히 옛언약을 추구하는 헌 술 헌 부대의 사고방식인 겁니다.

예수님은 행함으로써 새언약을 완성하신게 아니라 믿음으로써 새언약을 완성 하셨습니다.
오히려 육의 행함을 십자가에 못 밖고자 자신의 육을 십자가에 못 밖는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정작이 이 본이 되시는 모범은 모든 기독교 천주교 개신교 모든 종교는 다 빼버립니다.

걸림돌이거든요.

이 핵심을 빼버리고 신약의 명령어를 추구하게 되니 구약의 여전히 헌 술 헌 부대를 더 확대하게 되는 꼴이 되는 자기 의로움이라는 누룩을 퍼트리는 꼴이 되는 겁니다. 더더욱 일치성을 구약 보다 더 몇배로 질주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베푸시는 희년의 완성으로써의 자유를 줄 때가 되는 신랑의 혼인잔치날에서는 먹고 마시는 포도주를 즐기고 먹기를 탐하고 죄인에게까지 긍휼의 음식을 베푸는 그 자유한 날의 기쁨날 곧 긍휼의 은혜의 날인 희년의 완성자의 베품 에서는
정작 가장 잘 믿는 인간들의 모범은 금식으로 일관하면서 신과의 일치성을 추구함으로써 예수님의 희년 완성의 자유를 거부하고

또 정작 예수님이 원수들에게 신랑이 빼앗길 날이 되는 그 때가 금식(육의 죽음)날이 되어야 할 것이다는 말씀에는

정작 인간들에게는 미운놈을 드디어 심판한 날이다고 대대적인 페스티발이 되는 잔치가 되는 겁니다.

예수님 하나 그 한 인간을 죽이는데 있어서 모든 인간의 결집력과 일치성이 여기서 다 드러나게 되는 겁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인간들의 죄성을 들추어내시면서 자신의 피의 차이성을 드러내는 겁니다.

인간들이 철떡같이 믿고파 하는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주님은 십자가로써 교정시켜 주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한게 아니라
때려죽어도 사랑하기 싫어서 죽이고픈 마음이였다는 것을 십자가의 걸림돌만이 밝혀낸 겁니다.

그래서 이사야 53장의 말씀을 이루고자
남이 아닌 이 성경의 말씀을 역사 속에서 사라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모든 열정을 쏟아서 지켜오고 빼앗기지 않도록 지워지지 않도록 자손들에게 전수시킨 결과가

놀랍게도 남이 아닌 그들 자신이 예수님을 메시야를 자기들의 손으로 죽일 수밖에 없도록 하시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그들 속의 죄성 까지도 깊게 파고드는 십자가의 사랑의 피라는 의미만이 드러내시는 것인데

여기에 지금까지 인간의 실천력인 행동으로 전수하여 내려오도록 했던 공로를 오히려 가장 깡그리 무시하게 되는 결과가 되니
누가 가장 거기에 대한 반발이 일어나게 되는고 하니
선을 추구했다고 여기는 자들이 되는 겁니다.

이게 바로 예수님이 들추어내시고자 하시는 차이성입니다.

결국 인간은 하나님을 사랑하는게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신의 땀과 노력을 더 사랑한 겁니다. 결국 단 한번도 십계명의 1계명 조차도 지킬수 없고 지킨적도 없으면서 그 뒤의 내용들까지 보고 듣고 다루었다고 착각하도록 하신 겁니다.

이것이 결국 편애를 자기가 변경시켜 보겠다는 발상입니다. 편애나 미움은 주님에게서만이 일방적으로 표현되는 겁니다. 그것 마저도 십자가의 어리석은 피의 공로를 드러내기 위한 목적으로 마음껏 소품으로 사용하시는 겁니다.

자 이 내용을 아무리 제가 수백번 반복해 본들 소용없습니다.

그래서 실질적인 문제를 예수님은 언급하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일방적으로 퍼붓는 편애에 반드시 미움이 뭔가를 차이성을 드러내면서
미움을 통해서 편애를 증거하시고 사랑을 드러내시는 겁니다.

이것은 성경 전체에 나타난 언약의 틀입니다.

심판이 아니면 구원의 하나님을 알 길이 없고
십자가가 아니면 부활의 예수님을 알 수가 없고
죽음이 아니면 생명을 모르도록 감추어버렸고
차단이 아니면 들을 귀가 뭔지 모르도록 비유하시고
비언약이 아니면 언약이 뭔지 모르고
없음이 아니면 있음이 뭔지 모르고
소멸의 불이 아니면 새피조물이 뭔지 모르도록 하셨듯이
바로 오늘 금식이 아니면 혼인잔치의 먹고 마심이 뭔지 모르도록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신랑의 혼인잔치를 말씀하시면서 금식과 대조를 시키면서
비교를 통해서 예수님 자신의 일을 증거하십니다.

마치 이것은 주인공을 말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악당들이 나타나야 주인공이 누구인줄 알고 그 차이성으로써 주인공에 모든 의미를 두고자 하는 감독의 취지와 맞도록 하는 겁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바로 주인공이 내가 아니다 라는 겁니다.

나의 외부에서 나타나는 분이다는 겁니다.

이 의미를 모르기 때문에 십계명을 그것도 첫 계명부터 나 외에 라고 언급하시는 이유는
결국 인간은 자기 자신 외에는 주인공을 둘수 없다는 겁니다.

자기 자신만이 주인공인 인간이 하나님을 믿던 예수님을 믿던 또 믿음을 소유하고 행함을 성화되도록 갖추었다고 해도 결국 그것을 안해서가 아닌 도리어 했기에 자기자신이 주인공이 될 수 밖에 없다 라는 것을 전제로 하고

십계명은 올무를 우리에게 던짐으로써 유도하는 겁니다.

결국 모든 인간은 이 올무에 빠져들 수 밖에 없는 겁니다.
그래서 십계명이 맡은바의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는 겁니다.
즉 죄를 더하게 하기 위해서 십계명이 가입이 되는 겁니다.

어떤 누구도 자기 스스로가 죄를 못이겨서 죄 아래에 갇혔다 라는 소리를 못하도록
정작 내 스스로가 죄를 못이겨서가 아닌, 그렇다면 죄를 이기면 빠져나올수 있다 라는 가능성으로 보게 되는 거죠

그것이 아닌 주님 쪽에서 어떤 누구도 빠져 나올수 없도록 모든 인간에게 양심을 부었고
또 유대인에게는 율법으로 가두어 버린 겁니다.

주님이 가두었으니 당연히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혼인잔치에 초를 치면서 금식이라는 율법을 앞세울 수밖에 없도록 죄를 더하게 하는 죄의 유발에 걸려드는 겁니다.

이런 악역이 등장해야 주님 자신의 주인공 되심을 비밀로써 감추어진 모습으로써 드러내시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비밀을 알려면 정작 예수님을 미리 주인공으로만 볼게 아니라
그렇게 되면 일치성이니 마귀의 사고방식이고요
정작 그 반대편인 악역에 속한 바리새인의 입장에서 예수님을 미워하고 싫어버린바 되고 흠모할 모양이 일체 없는 모습을 판단하면서 예수님을 바라볼때에서 비로소
그 차이성을 알게 되는 겁니다.
놀랍게도 믿음이란 바로 아브라함부터 사도행전의 어찌할꼬 라고 한 유대인과 특히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인 예수 핍박자인 사도바울을 통해서 알수 있듯이
그들이 다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비로소 알게 되니
그들 또한 죽음 속에서 생명을 비로소 보게 되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소멸하는 불의 형상인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새창조요 새피조물인 새로운 사고방식인 새언약의 완성입니다.

그런데 정작 10명의 문둥병자 속에서 예수님이 두 패로 갈라버리니까

9명의 유대인 문둥병자는 자기가 깨끗함을 받았다는 것을 챙긴것에 족하는 사회 속으로 들어가 버렸고

정작 사마리아인 단 한 명의 문둥병자는 예수님을 죽음 속에서 만나게 되니
이 사마리아 문둥병자만이 예수님을 제대로 보게 되는 겁니다.

자신이 어두움인줄 비로소 알게 되니 빛 되신 예수님을 차이성으로 알게 되는 겁니다.
결국 이 차이성이란 자신에게서 절대로 나올수 없기에
그래서 차이가 드러나게 되고 이 차이가 외부의 작용인줄 아는 겁니다.

그러나 9명의 사고방식은 선함을 챙겨버리면 차이가 아닌 일치성으로써 이제 정상이라고 여기는 그 사회속에 그동안 못들어간 서러움을 이제 다시 해소하는 차원에서 결핍을 채운 것으로 족해 버린 겁니다. 이것은 마치 유대인의 천국관과 같고 우리가 살펴본 마귀의 3가지 시험 속에서 나타난 유대인들에게 심겨진 메시아 관과 같은

오늘날 모든 기독교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하나님 나라 운동과 성화론에 모든 승부를 걸 수 밖에 없는 겁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왜 단 한명의 사마리아인이 왜 편애를 받고
나머지 9명을 주님께서 미움으로써 진노의 그릇으로 만든지를 알 길이 없기에

그저 할 줄 아는 가능성을 계속 이을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 운동인 마귀 운동입니다.

자 이런 바리새인들이 그때에서도 펼치던 운동을 예수님은 반대로 십자가로 꼬로밖는 사람잡는 십자가 곧 지독한 미움의 길로 가시는 겁니다.

의도적으로 싫어버린바 된 모습이고
흠모할 모양이 없고
너무 너무 참담해서 고개를 돌릴 정도로 질고 속으로만 골라서 가는
요즘 표현으로 지뢰를 피해가는 행운이 일체 없는
지뢰만을 골라서 밟고 가는 운이라고는 일체 없는 저주의 길로만 골라가는 겁니다.

이것을 방관자 입장에서 보는 우리들에게 거리끼게 되는 사실이 되는 이유는
방관자가 아닌 직접적인 참여자로써 만들겠다는 사랑의 관계성이 우리를 살인자로 몰아가는 겁니다. 그래서 율법이 가입이 되는 것이고요

그 참여가 다름이 아닌 참 재수 더럽게도 없이 지뢰만 밟네 그려 라고 혀를 차는 방관자 우리에게 너 때문에 일부러 밟겠다 라고 십자가만을 외치시는 겁니다.

바로 이것이 이해가 안 되는 겁니다.

이 재수 더럽게도 없는 자의 외침이 다 이루었다 라는 외침이 왜 우리들에게 찔림이 되고 거리낌이 되는 뇌 속 뼈속을 깊이 파고드는 혼과 영과 육을 찌르는 평생의 걸림돌이요 스캔들의 불륜이 왜 되는고 하니?

바로 십자가 진 예수님이 그 지뢰밭을 걸어가는 재수 없는 지뢰만을 골라서 밟고 가는 예수님이 우리에게 화살을 꼿아서 뒤 따르도록 하기 위해서 미리 그 길을 틔여주시는 것입니다.

아 그럼 우리는 이미 주님이 재수 더럽게 없는 모습으로써 미리 터트린 그 자리를 밟고 가면 우리를 안 다치게 하는 사랑의 배려이구나 라고 착각할 겁니다. 그래서 할짖이 없으니 딴 생각을 하는 것이 성화인 겁니다. 화목제물을 그런 식으로 해석하는 겁니다.

그 반대죠
그것은 일치성이고 차이성으로써의 십자가 지뢰밭으로 해석으로 해야 합니다.

주님이 미리 밟은 그 지뢰터진 자리를 뒤 따르게 하시는 이유는
너 때문에 피 흘린 자리임을 똑똑하게 보라 라는 겁니다.
즉 내 구원 챙겨줄려고 하시는 목적이 아닌
그 자리에서 피의 공로를 보라는 겁니다.

물론 우리는 여전히 자기 관심에 빠져 있기에
그래서 예수님이 밟은 그 재수 없는 지뢰를 우리에게 더더욱 가중 시키시는 모습으로써
터트리십니다.

당연히 터트려야 합니다. 이게 사랑이거든요

우리는 터트려지는 속에서도 변함없는 피를 보게 됩니다.
자기를 챙기는 것이 도리어 시험이 되고 정작 터트리시는 그 속에서 피의 변함없는 관계성을 봄으로써 넉넉하게 이기는 사랑이 있다는 외부의 손이 있다는 것에
자기를 더 이상 기억할 필요 없을 정도로 잊어버리는 지워짐에
헌 술과 새 술의 차이를 알게 하시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신랑이 빼앗기는 날입니다.

신랑을 빼앗기는 날을 우리가 못 보게 되면
마귀가 심은 메시아 관에서 벗어날 길이 없기에
늘 종교적인 선악의 사고방식에서 하나님과 일치할려는 그 결핍성에서 빠져나올길이 없는 겁니다.

자 드디어 신랑을 빼앗기는 날에 비로소 금식이라는 죽음의 의미가 부각이 되는 겁니다.
신랑을 원수에게 빼앗기는 날에 죽음에 동참하고자 하는 자만이
유일한 신부입니다,

왜냐하면 신랑에게 모든 것을 받은 자는 신부 밖에 없습니다.
신부가 자발적으로 죽음에 뛰어드는 것이 아니라

신랑으로부터 즉 외부에서 유일하게 받은 것이(생명,사랑) 있기에
그 관계성 때문에 신부만이 죽음에 뛰어들수가 있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아가서죠

아버지도 어머니도 동네사람도 축하하러 온 손님도 어떤 누구도 뛰어들 수 없습니다.

신랑은 신부만을 땡기는 겁니다. 사랑이 땡기는 겁니다.
신부가 뛰어드는 열심 때문이 아니라 사랑 자체가 뛰어들지 않고서는 못배기도록 이미
신랑의 신부로서의 소모품이 되도록 사랑의 노예요 무익한 종으로써 뛰어들게 되는 관계성을 신랑이 유도하는 겁니다.

신부에게는 이유가 없습니다. 이유가 있다면 신부가 아닌 겁니다.

성화론자들을 제가 이해 못하는 이유는
신부의 조건을 온 갖 이유를 달아서 갖추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는 겁니다.
이게 바로 그들의 속성입니다. 가르친다 즉 위의 높다 라는 자리로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는 수요 공급의 원리로써의 정치와 경제가 종교(사랑)라는 이름으로 작용하는 겁니다.

이게 전형적인 사랑이 없는 우리 신랑되신 예수님과 차이나는 인간들의 신랑 흉내내기입니다.

신랑은 딱 둘 뿐입니다. 예수님이 설정한 신랑은 마귀냐 아니면 예수님이냐 이 둘 뿐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신부될 관심이 없기에 신랑 흉내를 내어서 피 흘린적도 없으면서 높고자 하기에 의도적으로 모조리 다 문둥병에 걸리도록 하시는 겁니다.(미리암과 구스여인 사건)

도금인지 정금인지 긁어보면 알 듯이
일부러 광야 속에 심판 속에 소멸하는 불 속에 집어 넣어보면
그 심판과 소멸하는 불이 도리어 정금을 더욱더 반짝 반짝 빛나게 영롱하게 모든 불순물을 제거하여서 헌 부대와 새 부대의 차이성을 극대화 시키는 겁니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을 위한 천국이나 지옥 따위는 없습니다. 결국 천국도 지옥도 예수님의 편애와 미움이라는 언약의 완성이라는 주님의 일하심을 드러내는 겁니다. 이 관계성을 모르기에 쓸데없는 남을 의식한 하나님 나라 운동이라는 둥 운동이라는 타이틀을 붙여서 남에게 자신이 예수님을 믿는다라는 것을 과시하는 겁니다.

이게 바로 육의 사고방식이고 옛 사람의 모습이고 이전 것의 모습이다.

이 이전 것이 뭔가를 제대로 알아야 그 차이성으로 이전 것이 지나간 새피조물을 알게 되는 겁니다. 새피조물을 이전것과 차이나는 개념이 없이 증거하는 성화론자를 보면은

마치 예수 안에는 결코 정죄함이 없는 그 차이성을 예수님이 외부에서 오기 전에 내 스스로가 내 안에서 무슨 일을 해도 모두다 정죄가 될 수 밖에 없는 율법(전 남편)으로부터의 고소와 송사를 받은적이 없이 도리어 송사를 하고 고소를 해 왔다는 입장에서 볼때에 성화론자들은 놀랍게도 고소자와 송사자의 모습과 같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바울의 이전의 모습입니다.

철저하게 고소자요 송사자로써 활동함으로써
에수님이 붙이신 스데반의 죽음과 맞딱드리게 하시는 겁니다.

이 죽음이 예수님과의 죽음 속에서의 만남으로써 이어지는 겁니다.

고소자로써 핍박받는

가해자로써 바울이 송사 고소하는 피해자 되시는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비로써 십자가의 불륜이 성사가 되는 겁니다.

이 불륜이 아니면 전남편으로부터 나올수가 없고
전남편으로써의 율법의 죽음? 또는 도말 또는 찢어짐이
율법과 관계성을 맺은 육체의 죽음을 같이 찢어짐을 당함으로써
새 언약의 관계성인 그리스도의 형상인 새피조물인 예수 안에서는 결코 정죄함이 없는
십자가의 지혜로써 완성된 은혜인 겁니다.

이 불륜을 이 어리석음을 이 부정함을 이 미련함을
도리어 율법을 사수하면서 또는 육체의 행함을 주장함으로써 반드시 믿음을 배격하는 자로써 등장 시키는 것 또한 사랑이 벌리시는 일이다는 겁니다.

그렇기에 사랑이 끊어지지 않는 이유는
그들이 나를 미워해서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발려진 이 십자가의 피를 공격함으로써
나를 도리어 일깨워 주는 겁니다. 이 피가 얼마나 고마우면 나를 미워해서 공격하는 것이 아닌 이 피의 가치성을 무효화 시키고자 공격하기에
더더욱 이 피의 형상에 이 소멸하는 불의 형상에 기름을 끼언져 주는 활활활 타오르도록 해주시는 사랑의 깊이와 높이와 넓이는 알게하시는 겁니다.

우리 스스로가 깊이와 높이와 넓이는 캐내는 것이 아니라 말이죠

그래서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이 된 운명을 기뻐 아니할수 없는 겁니다.

사랑만이 구주를 죽게 했듯이 사랑만이 나를 죽이시는 겁니다.

결국 새언약은 이 십자가의 죽음 속에서의 만남만이 새로운 사고로써 보이지 않는다면
이 새언약은 인간들의 상상의 유토피아로 치장될 것입니다.

도리어 십자가의 죽음 속에서의 만남이 새언약이다 라는 말에 기겁을 하고 아주 적극적으로 방해하고 공격하고 막고자 하는 자가 될 것입니다. 그 자가 바로 사도바울이였듯이

바로 이런 죄인을 주님은 부르시러 오신 겁니다.

자 이런 주님의 자작극에 인간은 싫어할 수 밖에 없고
따로 국밥으로 자신들의 자작극으로써 설정하는 것이 바로
인간의 손으로 이어지는 기독교요 교회입니다.

그들은 바로 자신들이 세운 교회에서 철저하게 갇혀 버리는 자신들의 감옥으로써 교회를 율법화 합니다.

이런 교회의 율법화 만이 그들이 먹고 사는 유일한 생존의 목적이 되는 겁니다.

이것을 주님은 아시고 아주 적극적으로 허물고자 다가오시고
그런 바벨탑을 세우는데 정신이 빠져버린 인간에게 자신의 육체를 허무는 유일한 십자가의 어리석은 지혜만이 우리를 눈뜨게 하는 겁니다.

이런 가치 전도가 된 죄의 소욕을 유일하게 시비거는 불륜인 십자가 (모든 매사를 주객 전도 시키는 것이 십자가)

그래서 오로지 악취가 나는 불륜으로써만 일 하시는 겁니다.

그러니 상대적인 차이가 나는 대상을 반드시 동원시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어두움을 동원해서 빛을 증거하시는 주님의 일하심 입니다.

그래서 그 차이로써 옛 술 옛 부대와 새 술 새 부대릐 차이성으로 자신의 십자가의 지혜를 드러내시는 겁니다.

(갈 6:14, 가톨릭) 『그러나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어떠한 것도 자랑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내 쪽에서 보면 세상이 십자가에 못 박혔고 세상 쪽에서 보면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갈 6:14, 쉬운)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말고는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세상은 나에 대해서 죽었고, 나는 세상에 대해서 죽었습니다.』

십자가의 은혜는 인간의 선악을 동원하지 않고서는 알 길이 없습니다. 서로의 소욕을 못 밖기 때문에 (갈 5:17)

예수님의 죽음이 나의 죽음의 세계 곧 죄의 세계를 허무는 유일한 불륜이고
그 허물어짐을 통해서 새로 세워지는 유일한 세계가 바로 불륜의 세계입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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