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재 p50-51 죄를 용서하시는 예수님 (누가복음 5장 12-26절)

어린이 매일성경 2008년 1-2월 (고학년 4-6학년)
성서유니온 http://www.su.or.kr 1월 16일 날짜 수요일 QT

죄를 다루고 싶은 인간의 탐욕과 죄를 유발케 하시는 예수님
 
지난 시간에 [사람 잡는 십자가]라는 제목으로 죄인 베드로와 그 죄인 베드로를 도살장에 끌고 가서 잡고자 하시는 예수님과의 만남을 공부했습니다. 이것을 흔히 잘못된 만남이라고 말할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잘된 만남은 어떤 만남일까요? 그야말로 서로의 필요성을 충족시켜주는 만남이기에 필요충족이 전제되어야 인간의 선택과 상대방 예수님의 선택이 서로 상호간의 보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전제를 깡그리 다 무시해버리고 예수님 자신도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이 되는 운명으로 내달려가고, 예수님 자신의 제자들 또한 같은 길 외에는 다른 길이 없도록 막다른 골목길의 운명으로만 결정지어버리는 이런 전제성 외에는 일체 없는 만남, 그래서 이 만남을 그런 만남이 될 수 밖에 없도록 하기 위해 처음부터 이런 만남으로써 만나게 하십니다.

사람 잡는 십자가입니다.

마치 이것은 천국이 침노하듯이 예수님이 베드로를 잡는 식입니다.

즉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도 전에 미리 갈라먹기를 하고 마치 다 차지해버린냥 전쟁을 시작도 하기 전에 완성되었다고 전제를 하고 들어가는 식입니다.

그렇다면 가나안 땅은 이미 밥입니다.

이것을 의인화 해 보면 이해가 될 겁니다.

가나안 땅은 마치 베드로와 같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예수님 곧 약속의 나라 천국입니다.

이 천국이 가나안을 밀어붙입니다. 예수님이 베드로를 밀어붙입니다.

그렇다면 저절로 나올 수밖에 없는 고백이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라는 고백입니다.

절대 베드로 자체 내에서 나올수 없는 고백이요
영이 밀어 붙임으로써 당연히 터져 나올 수밖에 없는 육의 참패가 바로 저는 죄인입니다 라는 겁니다.

이것은 심판을 미리 인정한 자의 고백입니다. 결국 심판의 영을 미리 앞당겨 받아서 외치는 고백이 종말의 외침이요. 자기부인이라는 독특한 세계의 방언입니다. 절대로 선악의 세계에서는 나올수 없는 고백입니다. 이 고백의 선포가 바로 종말의 단체인 교회의 외침입니다.

이 심판을 미리 앞당겨서 맛본자가 바로 기생 라합의 외침입니다. 이것을 믿음이라고 성경은 주장합니다.

이 믿음이 배태시킨 기생 라합이라는 이방여인이 예수님의 계보에 들어가는 믿음의 족보가 되는 겁니다. 이 믿음의 족보가 떳다면 이제 육의 족보와 계보와 혈통들은 다 죽었다 라고 복창해야 할 판국입니다. 기생라합은 미리 믿음이 그를 굴복시켰기에 미리 심판을 받아서 살게 된 겁니다. 그 영광이 거짓말이라는 불륜의 지혜로써 선악의 판단을 유발케 하는 포장 속에서 알수 없는 비밀로 자리잡은 걸림돌이 되도록 하신 겁니다. 기생라합은 모르나 주님은 압니다.

결국 믿음이란 예수님의 형상 곧 소멸하는 불의 형상을 껴안을 수 있고 품을 수 있는 관계에 놓인 심판자가 졸지에 생긴 것을 말합니다. 소멸하는 심판의 불에 다 태움당해도 상관없는, 부정함을 끓어안고 저주를 품에 안아도 상관없는 철저하게 부정하게 보이는 모습으로 그래도 소멸하지 않도록 살려주시는 그 믿음이 자기 사랑 외에는 다 가짜로 몰아붙이는 것입니다.

이 일을 성령이 감당하시는 겁니다. 이 성령이 육의 소욕을 거부하고 그 순간에 성령의 소욕으로써 무릎 꿇게하고 외치도록 하는 겁니다. 베드로는 주님 앞에 무릎 꿇고 엎드려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를 떠나소서 라고 미리 모든 피조물들이 당연히 외쳐할 바를 앞당겨 외치도록 하는 겁니다.

(빌 2: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이제 예수님은 영의 일을 알려주십니다. 너는 나를 따르라 이제부터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자 여기서 우리가 그동안 이 부분을 놓고 많은 사기꾼들이 어떻게 사기를 쳤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사람 낚는 어부가 된 자들을 우리는 흔히 베드로와 같은 복음을 전하는 일에 전념하는 목사를 사람 낚는 어부로 주로 생각합니다.

오히려 그 목사들이 사람 낚는 어부가 되라 라고 일반성도에게 외치면 정작 일반성도는 먹고사는 일에 바빠서 그 어부의 일을 잘 못하고 도리어 늘 그런 지적을 하고 외치고 있는 목사가 사람 낚는 어부가 되는 자연스럽게 선입관을 가지게 되는 식이 목사로부터 세뇌 당하게 됩니다.

즉 모든 매사와 성경의 모든 명령어와 행함의 요구가 다 마찬가지입니다. 아주 커다란 이상형의 목적을 제시해 놓고 거기에 사람들을 자극하면 사람들은 맞다 맞어 그것이 옳은 일이야 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의 삶의 생활 속 행위는 그렇게 따라가지 못함을 알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그 결핍을 자기가 해야할 일을 대신해 주는 목사가 오히려 참으로 고맙게 느껴지는 겁니다. 목사는 이런식으로 꿩먹고 알먹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터특하게 되는 겁니다. 행함이란 결국 몰아붙이면 붙일수록 댓가가 따라오는 겁니다. 그러나 믿음이란 그 댓가를 노리는 육의 사고방식에 놀아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곤고함에 빠진 육의 한계를 들추어내는 식으로만 일을 합니다. 자 그럼 인간의 제사장은 반드시 한계가 드러나는 행동만을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갇힌모습니다. 선악이죠.

사람 낚는 어부 라는 타이틀로 얼마나 사기를 많이 쳤고 또 많이들 당해 왔나요

낚는 어부는 강한자가 되고 낚이는 사람은 약자가 되는 자연스럽게 종교적인 탐욕을 추구하도록 유발케 하시는 겁니다. 이것은 상대방이나 외치는 자나 둘 다 가능성으로 봤기에 그런 탐욕이 더더욱 기름끼언 듯 타오르게 되는 겁니다. 숨겨진 탐욕이 더 정당성을 가지고 감추어진 가면을 벗고 나타나는 드러나게 되는 모습입니다. 즉 선악으로 해석을 하니 선악을 유발케 하는 믿음에 걸려드는 겁니다.

그러나 사람 낚는 어부 라는 말은 불가능성의 의미입니다. 영의 일이라고 분명히 했습니다.
그렇다면 육은 불가능 합니다. 아니 드디어 육은 육의 본색을 드러내는 식으로 활동합니다. (육의 한계) 사람 낚는 어부라는 의미를 육의 방식으로 취급해 버리는 겁니다 (선악으로 해석 - 가능의 해석). 이것이 강자와 약자를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식입니다. 그래서 목사들이 자기의 권위를 강화하고 정당화 하는데 역으로 이용하는 식으로 교인들에게 탐욕을 부추기는 겁니다.

사람 낚는 어부란 주님의 심판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 될 수 있냐 라는 의미입니다.
주님이 받은 그 심판의 저주인 십자가를 질 수 있냐 라는 겁니다.

당연히 못 지죠 (이것을 할 수 있다고 대부분의 목사들이 가르칩니다 그래서 사기꾼이죠)

너는 할 수 없으나 주님은 하신다 라는 겁니다.(눅 18:27)
이것이 사람 낚는 어부 에 대한 주님의 해석입니다.
육은 못하나 영은 한다 라는 의미입니다. 즉 주님은 주님의 자신의 의만 낚겠다 라는 겁니다. 그래서 미리 심었던 기생라합과 미리 자신이 창세전에 심어 놓았던 베드로를 낚는 겁니다. 라합과 베드로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자신이 그들에게 발라 놓은 피... 이것이 예수님이 낚고자 하는 목적의 의미 입니다

여기서 주님이 하신다 라는 것은 자기자녀에게도 같은 운명을 때려 붓겠다는 겁니다.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짖겠다는 겁니다. 이전 것은 지나갔습니다. 즉 야곱은 이제 소용없습니다. 아브람은 의미 없습니다. 새피조물만 챙깁니다. 야곱이 아닌 이스라엘, 아브람이 아닌 아브라함 그렇다면 그들은 믿음이 어떻게 피로써 아브람(육)을 아브라함(그리스도의 형상)으로 짖는지는 피의 자취 곧 약속의 자취 곧 하나님의 열심을 추적하고 어떻게 교체하는지를 파악해야 하는데 성화론자나 자칭 아브라함 자손이라고 하는 바리새인이나 모두다 선악의 사고방식으로 해석을 하니 자기 숙제로 자기 열심히 약속의 자취를 파악할려고 달려들어서 엉뚱하게 사람을 관리하고픈 욕망으로 해석을 하게 되는 겁니다. 약속의 자취는 피의 희생 외에는 해석할 길이 없습니다. 즉 직접 제물이 되시어 피흘리고자 뛰어드시는 그분이 직접 독대로써 알려주지 않는 이상 인간은 반드시 자기 행함으로써 끌어당겨 해석하기 마련입니다. 이것이 바로 선악의 사고방식입니다.

이런 인간의 행함과 반드시 대조된 상대적인 차이성으로써 나타난 것이 인간에게서 도저히 나올수 없는 눈에 보이지 않는 예수님의 믿음이 바로 눈에 보이는 인간의 믿음과 차이나게 비언약과 언약을 배치시켜서 언약이 아무리 인간의 믿음이 방해를 해도 멈춘적 없이 도리어 그 방해를 유발케 하시면서 죄가 깊은 곳에 은혜의 승리는 더더욱 크게 활동을 하시는 겁니다.

이제 빼도박도 못합니다. 사랑의 화살이 꼿혀서 이제 질질질 끌려가는 운명 뿐입니다. 이것을 복된소식이라고 합니다.

(롬 8: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롬 8:33)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롬 8: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롬 8: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협이나 칼이랴』

(롬 8:36)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롬 8:37) 그러나 이 모든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롬 8: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롬 8: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결국 사람 낚는 어부란 이 명령어를 듣고 자기가 사람 낚는 어부가 되고자 하는 인간의 감추어진 욕망을 들추어내고 유발케 함으로써 주님 자신이 낚는 것이 무엇인지를 밝히고자 하시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반드시 베드로는 사단아 물러가라 라는 남들이 지적받지 못하는 죄를 지적받는 사랑의 관계성을 새롭게 보게 되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는 주님의 질문입니다. 이 질문이 명령어가 아닌 관계성으로써 다가오시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오늘 교재에서의 내용인 죄를 용서하시는 예수님 이라는 제목으로써 중풍병자를 예수님에게 데리고 가고자 하는 친구들이 지붕까지 뜯어내면서  침상에 누운 환자를 이동시키는 내용을 다루면서 갑자기 병고침이라는 인간의 관심사를 예수님은 죄 용서라는 의미를 새로운 차원에서 자신의 피의 의미를 낚고자 합니다. 그렇다면 이 피의 의미를 부각시키고자 의도적으로 피와 상대적인 죄를 유발케 해야하는데 그게 바로 바리새인들의 역할입니다. 그야말로 병자의 병을 고치고자 하는 사람들의 관심사가 졸지에 죄 용서라는 의미르써 부각시키시는 이유는(마치 부활의 의미를 나사로의 죽음과 그와 연관된 육체의 모든 혈통들을 철저하게 대조적인 배치로써 부활를 증거하시듯이) 예수님 자신은 병고치는데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병고침이 목적이 아니라 또 육 자체가 이미 병 자체인데 고쳐본들 소용없습니다. 주님은 육의 병을 오히려 심고 병을 유발시키는 자입니다. 오죽하면 예수님이 지나가는 곳 마다 예수님을 쫏아내고 바이러스가 퍼질까봐 비상방역대책을 세울 정도이니까 말이죠.

육의 병을 심어서 도리어 그 차이가 나는 자신의 피의 의미를 부각시키는 것이 유일한 목적입니다. 즉 약속(언약) 완성이 목적이지, 십자가 지혜를 이 땅에 못 밖는 것이 목적이고 그 기준으로써 도리어 모든 육체를 부정하는 것이 목적이지
육을 살리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마귀가 3가지 시험을 통해서 인간이 기다리는 메시야가 되어달라고 유혹한 내용입니다.
정작 육을 심판하고자 하는 기준을 이 땅에 심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것이 피입니다.

이 피의 공로 곧 십자가의 피 희생을 무시하는 자를 가려내고 두 패로 나누고자 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자 이런 예수님의 목적에 철저하게 소외된 자를 예수님이 부각 시킵니다. 그것이 피와 차이가 나는 선악에 철저하게 충실된 자들인 바리새인인데
얼마나 신기하게도 그들의 생각을 예수님이 끄집어 내십니다.
단순히 병고친 것 밖에 없는데 왜 죄 용서함을 받았다 라는 죄 용서라는 하나님의 영역을 인간인 예수가 저런 건방진 말을 할 수 있는가? 라는 속마음으로 한 내용인데
왜냐하면 이런 생각들을 정리해서 예수를 한방에 먹여야 자신들의 공로가 티가 나는데
속마음을 정리하고자 하는 그 과정 중에 미리 예수님이 그 생각을 소옥 빼어내어서
채소 오이 자르듯이 뚝 잘라서 속마음을 공개해 버립니다. (이것은 마치 두 청년 속에 들어간 귀신 마귀가 아직 때가 되지 않았는데 과정일 뿐인데 왜 벌써 와서 우리를 멸하고자 하느냐 라는 귀신의 하소연을 하는 그 성경 부분의 내용처럼 결국 인간이란 마귀와의 관계성에 놓여진 철저하게 갇혀버린 포로된 눈먼자임을 우리가 알수 있습니다.)

우와 이런 해커가 어디있겠습니까?

사실은 그 생각 마저도 주님이 심어서 나온 결과입니다.

덜컥 끄집어 내어서 정보를 공개해 까발려버리니, 바리새인(육)이 하는 행동은 그저 자기 방어만이 최선책으로서 드러나는 겁니다. 바로 예수님이 역으로 선방을 날리자 자신들을 방어하고자 강하게 밀어 붙여버립니다. 예수님에게 말려든 행돔만 나올 수밖에 없는 육은 육일 수 밖에 없는 모습으로만 일관되게 드러납니다. 그동안 거룩이라는 껍데기가 예수님이 시원하게 그 껍질을 벗겨내시니 하나도 낱낱이 공개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눅 5:20) 『예수께서 저희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눅 5:21)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의논하여 가로되 이 참람한 말을 하는 자가 누구뇨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눅 5:22) 『예수께서 그 의논을 아시고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 마음에 무슨 의논을 하느냐』
(눅 5:23)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눅 5:24)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매』

자 바리새인들이 이것만큼은 건드리면 가만히 두지 않겠다 라는 것을 예수님은 아주 자연스럽게 수시고 다니시는 겁니다. 주님은 사수할 것이 없는데에 비해서 인간은 이 영역만큼은 도저히 용서 못하겠다 라는 것을 주님은 그게 뭔데 껍데기일 뿐인데 라고 아주 가볍고 사뿐하게 뚜껑마개를 열어버리시는 겁니다.

이제 바리새인들은 두껑열립니다. 자 병고침의 문제가 졸지에 죄 용서라는 인간이 아무나 접근 못하도록 자기들만의 성역인냥 성곽을 쌓은 것을(가인의 이마표) 예수님은 아무것도 아닌 껍데기가 왜 설치고 다니냐 라는 둥 거룩 좋아하시네 라고 막 포장껍데기를 벗겨버리시는 겁니다.

자 이게 바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게 되는 인간이 씌우는 죄목이 되는 겁니다.
일종의 미신이 가득한 마을에 한 청년이 그 동네의 수호신이자 타부시하는 어떤 공간이나 물건을 무시하는 발언을 하자 마을의 안녕을 해친다는 이유로 동네사람들이 죽여버립니다.

자 이게 바로 예수님이 인간의 감추어진 두려움과 공포에 포로된 죄를 유발케 하시는 모습입니다.

병고치고자 하면서 정작 병을 고침을 받기 싫어하는 자들? 놀랍게도 인간 의사입니다.
죄를 씻고자 늘 제사를 드리면서도 정작 죄가 사라지기를 싫어하는 자들? 종교지도자이죠.
무지를 없애고자 늘 교육하면서 정작 무지가 없어지지 않기를 바라는 자들? 교육자
비거룩을 없애고자 늘 거룩을 사모하지만 정작 거룩이 오기를 철저하게 거부하는 자?
교회 성전을 세우고 사수하는 자들

우리는 이상하게도 그 사람이 종사하는 일이나 그 사람이 하는 주관심사가 되는 행동의 모습을 보면

의는 없지만 그 의를 대체하는 선악의 선으로 자신의 행동을 늘 정당시하는 모습으로 자기를 두루두루 포장을 하고 그 껍질을 단단하게 함으로써 자신의 행함과 삶을 정당하고 하고 있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그림자입니다.

그림자인 주제에 실체인냥 늘 자기 자신에게 세뇌 시키고 또 남까지 늘 세뇌 시키면서 육의 삶을 정당화 했는데 이런 자기 안에 갇혀버린 죄의 실체를 외부에서 깨뜨리고 찢어버리지 아니하면 정당 그는 빛을 알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요나를 스올의 가장 가운데인 뱃속에 집어 넣습니다. 자신이 지금까지 한 행동들이 이 깊은 바닷솟의 스올에서 한 치도 벗어난적도 없는 제자리 뛰기 한 것 뿐이면서도 자기의 의로움을 알아달라고 몸부림만 처절하게 뜀박질하고 있는 겁니다.

지금 현재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사들은 이런 인간들이 타부시 하는 특정공간이 사라지는 것을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장 큰 걱정을 하고 있습니다.(사사기를 보면 의도적으로 가뭄으로 인해 레위인들이 굻어죽게 되는 상활을 의도적으로 유발케 하니 오히려 거룩은 커녕 더 깊은 내막의 죄성을 다름아닌 거룩한 일에 종사하는 자들이 더 극성적으로 발산하게 되는 인생의 모순을 철저하게 보여줍니다. 즉 인간은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만 행함을 다름 아닌 왕이 있는 이스라엘만이 보여주는 철저하게 왕이 없는 이스라엘로써 증거되는 겁니다.)

인간의 손으로 세운 교회야 말로 가장 타부시 되는 마귀의 아지트 이며
인간의 손으로 세운 직분이야 말로 섬김을 가장한 오로지 섬김만을 앞세우면서 가장 갈취하는 영적인 겁탈자가 바로 수에 칠 가치가 없는 인생이라는 허구입니다.

다윗을 그래서 이 인생이라는 허구를 드러내는 도구로써 주님이 사용하시는 겁니다.
다윗은 다윗 스스로 이스라엘의 왕을 왕 답게 하고자 하는 노력이
도리어 사수하고자 하는 법을 자기와 일치성으로써 끌어당김으로 인해
정작 남이 아닌 자신이 사랑을 철저하게 짖밟아 버리는 육의 전형적인 소욕으로 인해
성령의 소욕을 철저하게 죽여버리는 자신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이런 다윗을 낚아야 합니다. 인간이 아닌 주님만이 낚아야 합니다. 다윗이 아닌
다윗에게 발려진 긍휼을 낚아야 하는 겁니다. 그 긍휼이야 말로 그 순간의 다윗에게 유일하게 산 소망이 되는 겁니다.

마치 다윗은 철저하게 법으로 무장할려다가 죽여버린 잃어버린 자들 3명 밧세바 - 욕심이 잉태한즉, 우리야 - 죄를 낳고, 이름없는 아기 -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는
이 사망의 권세에 갇혀버린 다윗을
다윗이 짖밟아 죽인 이 긍휼들을
주님이 다시 살려내지 않으면 다윗은 죄가 왕노릇 하는데서 빠져나올길이 없는 겁니다.
그래서 너희가 죽인 예수를 하나님 아버지가 다시 살리시는 겁니다.

이제 예수 안에는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

다시 죄를 생산하고자 법을 취하고 있는 성화론자들의 교회는 그야말로 인간의 종교성의 타부시 되는 바벨탑입니다.

자 왜 예수님이 바리새인의 그런 생각을 심으시고 들추어내시는
죄를 유발케 하는 일을 하시는 걸까요?

이 부정함이 아니면 정결한 십자가를 알길이 없습니다.

유일한 정결함은 죄인에게 뿌려진 피입니다.

이 유일한 사랑을 말하고자 모든 것은 차이성으로써 드러내시는 겁니다.

(눅 5:32)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사람들은 이상하게도 남을 의인을 만들고자 하지만 정작 자신이 그 의인을 만들려고한 그를 죽이고자 하는 살인의지 뿐인 인간의 속마음을 알길이 없습니다.

다행히도 예수님은 우리를 죄인 만드십니다. 인간은 그 반대로 의인만들고자 하지만 말이죠.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를 죄인 만들어 자신의 피만을 증거하고자 함입니다.

유독 인간만은 아무리 어제까지 예수님을 믿고 따라왔고 예수님이 가신 길만을 왔다고 자부해도

그 따라온 행함들이 목적이 될 수가 없기에 도리어 버리시는 겁니다.

그래서 이런 예수님이 미워서 죽일 수밖에 없는 겁니다.

다윗의 상황이 남의 상황이 아닙니다.
또 피할수도 없습니다. 애굽이냐? 아니면 인자가 달린 나무냐?

(요 3:12)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요 3:13)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요 3: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 둘 뿐입니다. 선택의 여지는 없습니다. 하나는 늘 애굽으로 되돌아가고자 하고, 하나는 어리석은 그 저주의 나무에 누가 왜 무슨 이유로 달렸는지를 알아갈 뿐입니다.

이 양쪽의 본향이 사람들 사이 구석 구석을 해매고 찾아서 가려내고 쪼개고 두 패로 갈라서게 하는 끝까지 이끄는 절대로 끊어지지 않는 줄입니다.

누구는 긍휼의 붉은 밧줄이 그를 평생 질질 끌고 다니고
누구는 진노의 밧줄이 그를 평생 질질 끌고 다닙니다.

그 기준이 되는 것이 바로 피의 형상 새피조물인 그리스도의 형상인 십자가의 형상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예수님 피가 우리를 이끌어 주지 않는다면 우리는 눈에 보이는 인간들의 힘이 결집된 타부시되는 교회가 사람을 이끌어 갑니다.

교회는 그 반대인 이끌림을 받는 자들이 누가 너를 이끄냐고 자기를 쳐다보는 자들이 아닌 자들의 종말의 단체 임에도 불구하고

교회야 말로 이끌자가 없어서 자기가 자기를 이끄는
끝났다고 종말을 외치는게 아니라.
어떻게 하면 이 땅의 소망을 극대화 하고 그 주체인 자기를 확대하고자 하는데 정신이 팔려 있는 목사들의 꾀임 빠져 있는 영적 겁탈꾼에서 빠져 나올수가 없는 곤고한 자임을 보게 됩니다.

주여 저희들을 다윗의 손에서 건져주시고
베드로의 손에서 건져 주시고
교회의 손에서 건져 주시고
목사들의 손에서 건져 주시고
장로들의 손에서 건져 주시고
교사들의 손에서 건져 주소서
교인들의 손에서 건져 주소서

그들은 죄인인 나를 위해서 피를 흘린적도 없는
한번의 열심으로 열 번의 갈취를 계획하는 자들입니다.

사랑도 없으면서 사랑이 있는 듯이 웃는 얼굴로 다가옵니다.

아니 그들의 모습이 정작 나의 참 모습입니다.

이런 나에게서 건져주소서

저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Posted by 김 대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