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18. 영과 육으로 쪼개는 희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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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재 p46-47 영혼과 육체를 치료하신 예수님 (누가복음 4장 31-44절)

어린이 매일성경 2008년 1-2월 (고학년 4-6학년)
성서유니온 http://www.su.or.kr 1월 14일 날짜 QT

영과 육으로 둘로 쪼개는 예수님 나라
 
치료라는 의미를 몇 년전 출애굽기 공부에서 살펴봤는데 병주고 약주는 의미에서 치료라는 의미를 설명했습니다. 즉 우리가 생각하는 치료라는 개념은 성경과 맞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죄요 우리가 생각하는 병을 염두한 치료입니다. 즉 죄의 기준과 병의 기준이 자아라는 나를 기준으로한 선악의 개념에서의 병과 죄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죄와 병의 기준을 인간의 선악의 판단에서의 기준에 두지 않습니다. 오히려 바로 그런 생각 자체가 죄와 병이 됩니다.

그렇기에 치료는 바로 우리의 선악을 건드림으로써 새로운 의미로 다가와야 합니다. 이 선악을 건드리는 것은 무엇일까요? 선악을 건드리고 공격하고 시비걸고 전쟁을 걸어오는 것이 뭘까요? 그것이 바로 희년인데 바로 은혜입니다. (마치 함이 안 벗은 자기를 기준으로 벗은 수치를 노출한 노아를 정죄하듯이 선악의 판단을 유발케 하는 것이 바로 은혜이다.)

이 은혜란 영의 일입니다. 그 반대의 육의 일은 선악을 사수하는 겁니다. 그 육을 사수하는 것을 시비걸고 공격하는 일이 바로 영의 일입니다.

결국 육을 유지하도록 보수하고 개선하고 고치는 것이 치료가 아니라,
아예 육을 지워버리고, 새로 마련한 영(그리스도의 형상)만을 소망 토록하는 것이 바로 치료라는 겁니다.

그래서 없던 병도 걸리도록 하시고 없던 죄도 덮쳐서 갇히도록 합니다.
그래서 졸지에 포로되고 소경이 되고 눌리고 갇혀버려서
없던 고아, 없던 과부, 없던 나그네로 일부러 만들어서
그런 잃어버린 자에게 딱 맞는, 죄인에게 딱맞는, 고아에게 딱 맞는, 과부에게 딱 맞는, 나그네에게 딱 맞는, 사랑의 용서의 왕이 필요한 겁니다.

의인과 건강한자에게 구원자와 의사가 필요 없듯이 피조물에게만 창조주가 필요한 겁니다.

바로 이것을 감행하시고자 기존의 사고방식인 선악의 사고방식을 뚫어버리는 것이 바로 치료입니다. 즉 자유자입니다.

이것을 이 교재가 구원의 뿔이라고 아주 정확하게 표현한적이 있는데(1월6일자 큐티) 이 뿔은 마치 뭐든지 다 박살내고 뚫어버리는 예리한 송곳과 같습니다.

(히 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죄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눅 20:17)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그러면 기록된 바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함이 어찜이뇨』
(눅 20:18) 『무릇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저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라』

(마 21:42)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
(마 21:4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마 21:44)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저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

자 그렇다면 인간들이 영혼의 의사가 되고싶어서 나오는 의미가 아니라, 영적인 아버지가 되고 싶어서 나온 크고자 하는 주님의 사고방식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출발한 이 깨뜨리는 구원의 뿔인 뭐든지 다 뚫어버리는 치료의 의미는
뭔가를 둘로 나누고자 두 패로 가르는 차이성을 드러내는데 목적이 있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출발한 하나님 나라 는 인간들의 하나님 나라 운동인 묵시 운동과 다릅니다.
인간의 하나님 나라 운동은 종교운동으로써 기독교문화로 세상정복이라는 탐욕을 추구하면서 동시에 사람들의 원하는 메시야를 제시하는 마귀의 시험 내용과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는 영과 육을 둘로 나누어서 그 차이성을 드러내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여기서 치료의 의미는 마귀를 쫏아내고 병든 육체를 치료함이 목적이 아니라. 천국에는 이런 병들거나 치료할 육체 라는 것이 필요 없다는 것과 동시에 마귀를 이길 필요 없이 이미 마귀는 어두움의 세력으로써 빛되신 예수님과의 차이성을 드러내는 소품일 뿐이며 마귀의 사고방식인 선악을 아는 자는 결단코 천국에서 분리시키겠다는 것이 바로 천국을 증거하시는 예수님의 목적입니다.

즉 우리가 생각하는 천국이란 나의 구원을 위한 천국이니 우상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천국은 바로 그런 선악의 판단을 일체 천국에서 제거하겠다고 이미 이 지상에서 천국이 활동하면서 분리작업을 벌리고 있다는 겁니다.

그럼 누가? 이 선악을 아는 자이고 누가? 이 은혜를 아는 자인가를
인간이 아닌 천국이 직접 이 땅에서 부지런히 나누고 있다 라는 의미에서 치료라는 겁니다.

누가 은혜를 아는 자 인가?

즉 편애와 미움은 인간이 해석할 권리도 없고 소관도 아니며 해석불가능입니다.

바로 그런 불가능한 이 편애와 미움을 가르는 일을 천국이 직접 내려와서 실행하고 있다는 겁니다.

여기서 중요한 [치료]의 의미는
없던 병과 없던 죄를 덮치도록 해 놓고

누가 이 병과 죄에 뛰어들었느냐? 이 사랑이 누구인지 아느냐?
누가 제물이 되었으냐? 누가 나의 고아됨 과부됨 나그네됨 잃어버림 됨에 뛰어들어서
대신 고아 과부 나그네 되신 잃어버림을 당한자가 누구인가 라는 것을
목적으로 달려들고 덤벼드는 것이 바로 치료다 라는 겁니다.

그래서 구약 이스라엘 출애굽기에서 괜히 없던 물없는 곳으로 인도 당하고
없던 양식 없는 곳으로 인도 당하고
없던 원망할만한 곳으로만 인도 당하는 겁니다.

그래놓고 우리 속에 누가 먼저 뿌린 그 선악의 씨앗을 들추어내고
그것과 차이가 나는 주님의 살과 피인 고난의 씨앗을 광야에서 심으십니다.

즉 먼저 마귀가 심은 그 씨앗의 실체를 다 들추어내시는 겁니다.
그리고 다시 이스라엘에게 고난의 십자가 씨앗을 심으십니다.

여기서 마귀가 심은(마귀의 3가지 시험) 씨앗의 실체가 드러나는 것을 원치 않아서
애굽으로 돌아가고자 했던 자들은 다 자기 챙기기(시험)에 빠져서 죽게 됩니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병주고 약주고 하는 식으로써 여호와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자신의 형상을 새로 창조하시는 겁니다. 이전 것이 지나간 새 피조물 창조. 즉 이전 것이 뭔지 확실하게 그 차이성을 드러내겠다는 겁니다.

예를들어서 10명의 문둥병자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예수님에게 고침을 받고자 했습니다. 예수님을 단순히 자기 병 고쳐주는 자로 이용한 자는 고침을 받고 자기길로 가버립니다. 그러나 단 한명인 사마리아인은 나는 고침받을 자격이 없는 죄인임을 비로소 예수님의 고치심을 통해서 안 겁니다. 즉 예수님이 대신 그 병을 짊어졌다는 것을 예수님의 믿음이 심겨져서 알게 된 겁니다. 그 나머지 9명의 문둥병자는 예수님의 병고침으로 인해서 마귀가 심은 씨앗의 실체를 들추임을 당하는 겁니다. 즉 자기들은 병고침이 마땅하다는 거죠, 즉 의인이고 원래 건강한 자인데 고침 받아서 이제 다시 건강한자가 되었다고 구지 구원자가 필요없는 구원자도 자기를 위한 구원자이기에 우상으로 여긴 진짜 하나님은 선악을 아는 바로 자기자신이 하나님인 것이 예수님으로 인해서 비로소 들통이 난 겁니다.

자 이렇게 치료자는 곧 의사는 병자와 건강한 자를 나누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구원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의인과 죄인을 나누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누구에게 뛰어드시는지를 통해서 사랑을 완성하십니다.

곧 사랑은

(롬 13:8)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언약 완성입니다.

이것이 인간 제사장이 못하는

예수님만이 하시는 제사의 목적입니다.

인간의 제사장은 법을 지키면 지킬수록 그것이 죄가 되는 줄 추호도 모릅니다. 그 자가 바로 다윗입니다. 그 다윗에게 비로소 긍휼이 덮치니까
그 긍휼의 대상인 죄인이 되어서 비로소 알게 됩니다.

똑같은 식으로 자기 열심만으로만으로 율법을 완벽하게 지킨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었던 사도바울이 비로소 알게 됩니다. 의인이 아닌 철저하게 사망의 몸에 철저하게 갇혀버린
포도가 된, 눌려버린, 소경이 된, 철저하게 어두움에서 아무런 희망이 없는
곤고한 자가 되었을때에 비로소 빛과 은혜가 그 차이성으로써 드러남으로써
비로소 다윗의 고백을 새롭게 성령으로 인해 알게 됩니다.
즉 그 이전에 알던 것이 철저하게 자기를 속였다는 것을 알게 된 겁니다.

이것이 다윗에게서 정직한 영(성령-새로운 마음)이 없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됨으로써
긍휼을 바라는 겁니다.

이 새로운 마음은 그리스도의 편애에 달린 문제입니다.
이 편애는 그냥 오는게 아니라.
그리스도 자신이 직접 지독한 미움 속에 철저하게 놓여져야 하는 겁니다.
마치 요셉의 편애의 옷이 진짜 편애의 옷인지를 알려면 철저하게 미움으로 인해
갈기 갈기 찢겨지는 사건만이 덮쳐져야 하는 겁니다.
그 차이성으로써 편애의 옷은 찢겨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의 새로운 옷이라는 겁니다.

그리스도의 형상은 죽음이 묻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그런지 안 그런지 알려면
죽여봐야 아는 겁니다. 죽어도 상관 없는 것이 그리스도의 형상입니다.

이것을 치료의 하나님이 직접 실행하겠다는 겁니다. 자작극으로써 말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예수님이 왜 하나님과 마귀의 세력(인간+마귀)에 의해서
고래등 싸움에 새우등 터지는 식으로 중간에 낑겨야 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성도들 모두를 다 그렇게 만들겠다는 겁니다. 그럼으로 인해 그리스도의 형상이 증명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일부러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하필이면 바리새인 눈에 띄이도록 하여서
반드시 법에 의해서 중간에 낑겨 심판받아 죽을 수 밖에 없는
완벽한 법의 칼에 벗어날 수 없는 솔로몬 재판의 두동강 나야할 아기의 운명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이 중간에 낑긴 자의 저주의 운명에
누가 뛰어드는가?

똑같이 예수님이 중간에 낑긴 운명으로써 우리의 저주의 심판에 뛰어드시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이 십자가의 지혜만이 펼쳐진 사랑의 나라가 바로 예수님 나라 천국입니다.

이 천국은 사람들이 올때까지 멍청하게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직접 이 땅에 뛰어들어서 이런 어러석은 지혜로 두 패로 나누고 있습니다.

사랑의 마음(곧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 빌립보서 2장=십자가의 어리석음)이 심겨진 편애인지
아니면 선악의 마음이 심겨진 미움인지를

두패로 나누는 영과 육의 분리가 바로 천국이 하는 일입니다.
희년 곧 기쁜 소식인 은혜의 날은 바로 이 영과 육이 분리가 되는 날입니다.

영이란 이 육의 사고방식을 일체 허용하지 않는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이것 때문에 예수님이 죽으셨습니다.
죽어도 일체 거부하겠다는 겁니다.

그 뒤에 나오는 모든 사건이 이것 때문에 예수님은 지독한 미움을 받게 되는 동기가 되는 겁니다. 즉 인간의 선(의로움)을 일체 허용치 않는 예수님. 이 선악의 실체를 들추어 내시는 것이 바로 영이 하는 일입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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