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예수님을 임금 삼고자 하는 마귀의 정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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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재 p40-41 마귀의 2번째 시험 - 임금삼기 (누가복음 4장 1-13절)

어린이 매일성경 2008년 1-2월 (고학년 4-6학년) 성서유니온 http://www.su.or.kr


예수님을 임금 삼고자 하는 마귀의 정체

지난 시간에 성령님께서 예수님을 광야에 인도하여서 40일 동안 먹지 못하도록 하시고 마귀에게 시험 받도록 한 내용을 공부했습니다. 마귀는 40일 동안 굶은 배고픈 예수님에게 가장 필요한 떡에 대해서 말하면서 네가 만약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덩이가 되게 하라 라고 시험 합니다.

여기서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이라는 조건을 붙입니다.

즉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이런 이런 조건이 되어야 아들 답다는 식입니다.

이것이 왜 중요하냐 하면 우리는 자식이든 부모이든 남편 아내 그리고 선생님 학생 등등의 이 모든 관계를 조건 충족으로써 따지게 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미 앞 부분에서 언급 했습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때에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다 라고
조건에 맞아서가 아니라 이미 변함없는 정해진 바로써 증거 됩니다.

이미 정해진 바로 증거 되었기에 이 정해진 관계를 말하기 위해서 동원되는 것이 마귀의 시험입니다.

즉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하늘 문 열고 이렇게 외치십니다.

(눅 3:22) 『성령이 형체로 비둘기 같이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왜냐하면 예수님의 세례는 곧 죄인의 세계 곧 물에 빠진 고아 과부 나그네의 세계에 뛰어드심입니다.

그렇다면 그 뛰어드심이라는 조건을 갖추었기에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기뻐하는 자다 라고 하늘 문 열고 외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 자신이 예수님을 제물로 삼으시는 제사장이신 하나님 자신의 믿음을 증거하시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이란 어떤 조건을 갖추어서 그 조건에 일치되는 것이 믿음이 아니라, 이미 창세전에 계획된 사랑의 지혜대로 실행이 된다는 것입니다.

창세전부터 예정된 일은 바로 이것 뿐입니다. 사랑입니다. 이 사랑이 처음이요 나중으로써 이 모든 것을 덮고 있다는 겁니다. 그렇기에 여기에는 어떤 조건이 있고 그 조건에 맞출 필요성이 없는 모습으로 구체화 됩니다.

그 반면에 마귀는 선악으로 따지기 때문에 조건에 일치해야 한다고 그 조건을 제시하고 그 조건에 맞는지 틀렸는지 판단의 여부를 가려서 아들인지 아들 아닌지를 선택하겠다고 합니다.

왜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 하며는
우리교회 학생인 상민이가 떡이 그럼 필요합니까? 필요 없습니까 라는 질문을 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동문서답을 하듯이 우리아이가 달라졌어요 라는 아이들의 행동을 이야기 하면서 떡은 하나의 소품이요 도구이고 정작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사랑이다 라고 했습니다.

그런자에게는 떡에 대한 것 보다 사랑의 관계성이 먼저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의미가 이해가 되지 않는 이유가 사랑도 떡을 먹어야 사랑 하든지 말든지 할 것 아니냐 라고 자기의 숙제로 보고 있다는 겁니다. (예배도 믿음도 사랑도 소망도 기도도 모든 것을 자기 숙제로써 자기가 어떻게 하느냐의 문제로 보고 있습니다. 사랑의 관계성을 모르기에 그 관계성도 자기가 맺느냐의 문제로 보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조건이 되어버리고 그 조건에 맞추어지는 사랑을 따로 해야 떡도 온다는 식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아이가 달라졌어요에서 나오는 아이들의 행동이 방금 배터지게 먹고도 또 달라고 때를 쓰고 정작 주면 또 안 먹고 그래도 달라고 엄마를 가지고 놀려고 한다는 겁니다. 즉 아이들에게는 사랑을 자기가 따내어야 한다는 죽음의 공포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버림받을까봐 늘 두려워 하는 그래서 미리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욕과 폭력) 사랑의 자기영역을 확보해 둘려고 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선택한 그 선택을(엄마를 선택 또는 아빠를 선택) 절대로 빼앗기지 않기 위해 투쟁을 벌리는 것입니다.

만약 빼앗기게 되면 조건을 맞추지 못해서 자기를 곧 죽는다 라는 공포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어린아이의 행동은 마치 남자 어른들이 전쟁터에서 투쟁하는 모습과 같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것을 더 원초적인 쌍둥이 뱃속에서부터 실행하십니다. (야곱과 에서)

그런 야곱이 모든 약탈에서 승리를 이루다가 최종적인 조건에서 와르르 무너집니다.
아무리 그 조건을 자기 쪽에서 맞출려고 해도 그 조건에 맞출수가 없어서
그동안 다 빼앗은 것을 도리어 형 에서에게 다 주면서도 또 불안해서 그 죽음의 공포를 벗어날 길이 없기에 도리어 꺽어야 하는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모습을 다 드러냅니다.
그것이 바로 얍복강에서의 전투인 씨름입니다. 형 에서에게서 보낸 자 인줄 알고
심히 두렵고 답답함과(창 32: 7) 겁냄을 (창 32:11) 해결하기 위해서
밤새도록 야곱은 그 어떤 사람을 놓아주지 않습니다.
반드시 죽이지 않겠다는 확답을 따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알고보니 에서가 보낸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자였습니다.
그렇게 되면 놓아주는게 아니라 더더욱 못 놓아줍니다. 복을 빌어주기 까지
절대로 죽지 않는다는 것을 보장해 줄때까지 절대로 그냥 보내지 않겠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힘의 사고방식인 조건에 맞을때까지 나의 결핍을 채워달라는 겁니다.
이런 뱀의 후손의 사고방식을 남성 성기를 중심으로한 허리뼈 환도뼈를 작살냅니다.
졸지에 여자로 만들어 버린 거죠.)

더군다나 천사는 야곱을 이기지 못할 정도로 놓아주지를 않음을 알고 환도뼈 허리를 작살해 버립니다.  그런데도 놓아주지 않고 반드시 나로 축복케 안해주면 안놓아주겠다는 말에 천사가 이름을 묻습니다. 야곱입니다. 그럼 다시는 야곱이라고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 이라고 부를 것이다 왜냐하면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기 때문이다 라고 이름을 개명 시킵니다.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

즉 여기서 천사는 창세전에 계획된 하나님의 계획을 심어버립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육의 사람인 야곱을 영의 사람으로 바꿔치기 하는 겁니다.
이 영의 사람이란 신도 사람도 갈구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사실은 이것이 바로 작년 1년 동안 우리 학생들과 공부했던 바로 편애의 옷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현상은 그 편애의 옷을 거꾸로 해석한 모습을 제가 발견 했습니다.
편애를 옷을 소유하고파서 자기 것으로 만들어 버리고픈 마음을 봤습니다.

이런 우리들처럼 야곱도 계속 착각을 하는 것이 바로 죽음과 죄와 저주와 두려움이 묻지 않는 이 편애의 이름을 또는 편애의 조건을 자기 쪽에서 채울려고 했기에 조건을 갖추고자 했던 겁니다. 그러나 그 조건을 자기 쪽에서 갖출수가 없어서 형 에서의 복수앞에 지래 겁먹고 자신의 편애의 이름을 그 복수심을 이기는 더 큰 것의 강한 힘을 확보하듯이 조건을 갖출려고 했습니다.

갖출필요성이 없다고 천사가 나타나서 오히려 더 쳐버립니다.
이제 지팡이만 의지하는 쩔뚝발이가 되어서 비로서 자신에게 꽂혀버린 이 이름의 의미를
지난 과거의 야곱의 이름의 속성과 비교하면서 살게 됩니다.

그 야곱의 속성은 결국 12 아들들 속에서 나타납니다. 그리고 새로운 이름의 속성은
그 12 아들의 속성과 어떤 차이로써 비교 되면서 나타나는지 야곱 자신이 믿어야 할 판국에 놓인 겁니다. 그리고 인간의 선택(이름)과 주님의 선택(이름)이 왜 차이나는지를 확인해야 합니다.

자 다시 돌아와서 떡이 필요한 것은 우리 보다 주님이 더 잘 아십니다. 그런데 주님은 마귀를 동원해서 떡 보다 더 중요한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십니다. 떡을 주는 자가 누구냐 하는 목적성입니다. 누가 주며 왜 주냐 라는 겁니다. 우리는 누가 주든 떡만 주면 되고 떡만 주면 왜 주는지 알 필요 없이 그 떡만 채우면 된다는 식입니다.

재미있게도 여기서 떡이 두 종류가 있다는 것을 예수님은 말씀 하십니다.
자기를 위하여 먹는 떡 과 예수님의 사랑을 알려주는 생명의 떡입니다.

결국 떡도 두 나무의 의미로써 동원되는 도구인 겁니다.
나를 하나님과 같이 되게 하는 떡인 선악과 나무와 같은 떡과
나의 죄 때문에 죄인인 나에게 뛰어드시는 고난의 떡인 생명나무와 같은 떡입니다.

이것이 오늘 배울 요 6장에 나타난 생명의 떡입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위한 떡을 말하지 않고
도리어 자기자신을 뜯어 먹으라고 유월절 어린양의 모습으로써 자신의 살과 피를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 하십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6장에 이런 사건이 벌어집니다.

오늘 마귀의 두번째 시험이랑 연관이 됩니다. 즉 첫 번재 시험의 떡과 둘째 시험인 임금은 곧 경제와 정치는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광야에서 3가지 원망이 증거로써 언약궤에 담기는 이유입니다. 만나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입니다.)

자 유월절의 의미(요 6: 4)를 다시 새로 각인 시켜 주고자 사건이 벌어집니다.

요 6: 2 예수님의 병자 고치심으로 인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그 기적을 보고 따라다니기 시작했습니다.(광야60만명) 오천명

예수님 쪽에서 먼저 빌립을 시험합니다. 즉 시비를 겁니다.

이야 엄청나게 사람들이 나에게 몰려 오는 구나 빌립아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많은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

빌립은 각 사람들에게 조금씩 돈을 받아서 떡을 사도 부족한 판국입니다. 어쪄죠?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도 여기 꼬마 아이가 보리빵 5개 와 물고기 2마리 뿐인데 이것으로 어떻게 이 많은 사람을 먹이겠습니까? 어쪄죠?

왜 빌립을 시험했느냐 하면 너희는 못한다 라는 것입니다. 불가능으로만 몰고간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사람들은 앉도록 하고 오병이어를 축사 하시고 앉은 사람에게 나눠 주시니까 원하는대로 마음껏 퍼주고 배불러서 더 이상 못 먹게 되어 남은 조각을 거두게 하니
열 두 바구니가 가득 찰 정도로 남았어요 그리고 남기지 말고 다 먹으라고 하십니다.

자 여기서 말도 안되는 일이 벌어졌지요
이런 기적은 우리 교회 다니는 자도 못 믿지만
세상 사람들에게 말 했다가는 웃싸꺼리만 됩니다.

여기서 더 중요한 것을 우리는 배워야 합니다.

자 막상 그 기적으로 배부름을 격은 자는
아 예수님 당신이야 말로 선지자 맞습니다. 라고 배가 부르니까 그렇게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반대로 보십니다.
너희들이 나를 억지로 임금을 삼을려고 하는 구나? 그래서 산으로 도망쳐 버립니다.

자 떡을 누구를 위해 먹었나요? 자기를 위해 먹었고

기적도 누구를 위해 봤다고 자랑 기념의 추억으로 봤나요? 자기를 위해 기적이 벌어졌다고 여긴 겁니다. 그래서 이제 예수님만 내 편으로 나를 위해서 임금 삼으면 만사 오케이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미리 그런 생각을 하실 것을 아시고
임금 삼고자 하는 사람들의 생각에 반대로 도망쳐 버립니다.
자 산으로 도망치도 또 다시 배를 타고 바다로 갔는데

세상에나 그 기적을 봤다는 것은 이제 모든 것을 올인했기에 집요하게 예수님을 따라 잡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만나서 따집니다. 랍비여 선생이여 언제 여기까지 왔나요
우리가 얼마나 당신을 찾을 줄 아십니까?

예수님은 너희가 나를 찾는 이유는 표적 십자가의 사랑(희생의 피)을 본 까닭이 아니라
떡을 먹고 배불러서 나를 임금 삼을려고 한다.

썩는 양식을 위해 일하지 말고 영생을 하는 빵을 위하여 일하라

즉 빵이 두 종류가 있는데 썩는 빵(땅에 쌓은 보물)과 영생을 하는 빵 (하늘에 쌓아둘 보물)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일을 합니까?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다.

그러면 우리가 당신을 믿게 행하시는 그 표적이 무엇이고 하시는 일이 무엇입니까?
기록되기를 하늘에서 저희에게 떡을 주어 모세가 우리에게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늘에서 내린 떡은 모세가 준게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가 주신 참 떡이 있는데 생명의 떡이다.

그럼 그 떡을 항상 주시옵소서

요 6:35-36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다.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그러나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 도다
요 6:37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쫏지 아니하리라
요 3:38-39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

자 여기서 예수님은 갑자기 자기의 뜻이 아닌 하나님 아버지 뜻을 이야기 하면서 자기를 소개하는게 아니라 아버지만을 증거합니다. 이게 남들이 보기에는 자기 뜻을 하나님의 뜻처럼 이야기 하고 있으니 도리어 못 믿을 만할 말만 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수군 수군 거립니다.

뭐 자기가 하늘에서 내려온 떡?
당신은 요셉의 아들인줄 여기 있는 사람 다 아는 판국에 어찌 하늘에서 내려왔느냐?

여기서 예수님은 동문서답 합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다 라고

남들이 보기에는 그저 우기는 이야기 밖에 안되도록 들립니다.

여기서 더더욱 논쟁과 다툼이 더 심해 집니다. 즉 이 말은 논리에 안 맞고
도저히 안 믿겨지는 이야기만 하셨고 불가능 한 것만 이야기 하기에 도리어 잔잔하게 말씀을 듣는 분위기가 아니라 싸움판이 나고 소동이 일어납니다.
왜냐하면 자기들이 지금까지 믿어온 그 하나님을 지금 예수님이 쑤시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내 살과 피를 먹어라 이 인자의 살과 피를 먹지 않는 자는 나와 상관이 없고 생명이 없다 라고 하니

제자들은 어렵도다 라고 했고

많은 사람들에게는 살과 피를 먹어야 한다고 하니 껄끄러운 걸림이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율법을 지켜온 거룩한 자들이 갑자기 살과 피를 먹어야 하는 살인자처럼 더러운 인간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자 이렇게 되니 예수님은 오히려 거봐 거봐 아무나 나에게 못 온다고 했잖아
나를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나에게 올수 없다

막 주님은 신나하셨는데

사람들은 그렇게 많이 따라 다니고 기적도 보고
또 배불리 먹어서 조금전 까지만 해도 임금을 삼고자 지독하게 따라다녔는데

다 되돌아 갑니다.

66절 다시는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왜일까요?

왜 광야에서 이스라엘이 다시 애굽으로 돌아갈려고 했을까요?

자기가 생각한 하나님과 단 하나도 안 맞는 겁니다.

자기를 위한 하나님이 아니기에

마찬가지로 자기를 위한 예수님이 아님을 알았기에

그래서 다 돌아갑니다.

예수님은 예수님 자기 자신을 위해서 이땅에 온게 아니라 마귀의 3가지 시험을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만 섬기라고 오로지 아버지 하나님에게만 올인 합니다.

자 우리도 돌아가야 마땅한데 참 다행이도 오히려 예수님만이 하나님만 섬기기에
우리는 왜 나는 하나님만을 섬기지 못하고 왜 자꾸 나 자신을 위한 하나님을 만들어 내는 우상을 쫏는지 그 차이성을 예수님 덕분에 비로소 알게 됩니다.

이거 아무나 지적 받고 그 차이성을 아는게 아닙니다.
편애 받은 자 만이 그 차이성을 비로소 알게 됩니다.
남들이 받지 못하는 이 빵이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내가 원하는 빵과 예수님이 직접 주시는 생명의 빵의 차이를 아는 것이
썩는 빵을 먹지 않고 영생을 알게 하는 빵을 먹는 자입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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