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강 물(죽음)에 빠지러 뛰어드시는 예수님

제물이 될려고 세례 받는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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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강 차이성의 사랑 vs 일치성의 행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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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대편에 서서 예수님의 어리석은 지혜인 십자가의 용서를 목격하는 목격자


차이성 :

이것이 얼마나 쓰잘데 없는가를 보여주기 위해(차이성) 목숨 걸어버림 - 허무하고 어리석고 미련한 모습 (무시,미움)

마치 예수님 나라(세계)가 침투하여야만 비로서 가치성이 없음을 알게 됨

그래서 죄인을 부르러 옴

일부러 가난한자 병자 고아 과부 나그네 잃어버린자 무시받는자 갇힌자 속에 뛰어듬


반면에 일치성:

이것이 얼마나 가치가 있는가? 그래서 목숨 거는게 아니라 보람을 추구
(나의 믿음과 행함의 가치성을 추구하기에 인간과 인간의 비교에 빠져버림, 남보다 우월한 보람을 자기챙기기에서 더더욱 일치성을 추구 그 일치가 된 나를 더더욱 고수하는 모습)

그래서 오늘 오후 설교의 기능성이라는 의미는

나의 가치성(일치성)을 찾지 않고 기능적인 면을 (창세전에 심은 그 기능의 역할만) 철저하게 써먹겠다는 것임 누구를 위한? 예수님 자신의 영광을 위한 소모품 도구

이것이 가치성(일치성)을 추구하는 자들에게는 아주 매정하고 냉정한 도리어 사랑 없는 모습으로만 비추이게 됨 - 싫어함을 유발케 하심

그래서 내가 내 자신을 사고방식의 전환인 교체를 추구하는게 아니라(갇혀 있기에).

주님이 뛰어드심으로써 우리를 교체하시는 제물된 어리석음 미련한 지혜만이

유일한 교체되는 길임 (차이성)

그래서 인간의 지혜는 철저하게 이 차이성을 극대화 하기 위해서 철저하게 동원되는 것임

도리어 무가치한 무익한 종, 죄인 중의 괴수, 미말의 구경꺼리, 찌꺼러기, 잃어버림을 당한 자, 물에 빠진자, 세리, 강도, 소경, 문둥병자, 갇히고 포로된자, 개같은 이방인, 흑암의 백성, 사망의 그늘에 주저 않은자, 죽은 자와 방불된 자들 등등의 [없음]이 이 믿음되신 예수님(없음에 뛰어드신)에 의해 눈이 띄여지고 (빛을 보고), 꽂힌자, 빛을, 생명을, 사랑을 꽂아서 당해버림


반대로 나의 가치가 있는 자로써 소경이 절대 아니라 제대로 볼줄 안다고 라고 본다고 하는 자들(일치성)을 도리어 예수님이 소경 만들어 버리심

(요 9:41)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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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재 p38-39 예수님의 세례 (누가복음 3장 18-38절)

어린이 매일성경 2008년 1-2월 (고학년 4-6학년) 성서유니온 http://www.su.or.kr


미움(죽음)에 뛰어드는 예수님  (제물 되러 오신 예수님)

지난 시간에 세례요한의 회개케 하는 물세례에 대해서 약간 언급했습니다.

그러나 책 교재는 이런 요한이 예수님을 높이는 일을 했기에 우리도 이런 예수님을 높이는 일을 하자 라고 자꾸 나의 숙제를 짐지우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반대로 예수님을 높일려고 하지 말고 그 반대인 예수님에 의해서 낮아지는 낮추시는 일을 당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숙제요 그 낮추심에 당해야할 입장에 놓였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이 회개는 세례와 연결이 된 의미입니다.

대부분 세례를 연합이라는 단어의 뜻을 적용시켜서 우리가 예수님과 연합 되어야한다. 그래서 세례요한도 그런 시각에서 보고 있지만 정작 세례요한은 예수님과 자신과의 차이점을 강조 합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그러나 종교는 그 차이성을 말하는게 아니라. 자꾸 일치성을 주장하면서 우리 숙제로 자꾸 만들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게 사기요 거짓입니다.

그래서 회개란 울고 불고하는 것도 아니요 반성하는 것도 아니요 옷을 찢는 것도 아닌
사고방식의 전환을 말하는 겁니다. 즉 무슨 사고방식을 뭐 어떻게 전환한다는 말인가 라는 입장에서
주님은 지금 세례요한을 통해서 뭔가를 빠뜨리고 참수시킬려고 합니다. 우리의 사고방식과 우리 속에 있는 뭔가를 지적하고 들추어내고 수셔댄다는 겁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죄인데
우리는 그 죄를 나의 행함의 여부에서 생긴 죄라고 여기기에 그것 마저도 자기의 숙제로써 죄를 해결하겼다고 하는 행위들이 바로 예수님을 높이겠다는 사고방식입니다.

우리가 전에 베드로의 용서에 대해서 공부했듯이 7번 용서보다 무한대의 용서를 예수님이 말씀하심은 인간의 용서는 자기가 할줄 아는 자기의 가능성으로써 신과 합일할려는 일치성을 자기의 행위에서 도출하여 일치할려고 하는 반면에
예수님은 그 반대로 바로 그런 베드로의 사고방식이 이미 죄에 빠져서 나온 선악의 사고방식이기에 7번 용서에서 8번 그리고 수가 점점점 많아지는 용서의 고수를 추구한다는 자체가 선악과를 따먹은 죄악에 갇혀 버린 생각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그 사고방식을 전환시키고 교체시키고 바꿔치기 하는 방식이
바로 베드로가 용서를 하는게 아니라 예수님이 용서를 해야만이 베드로가 용서를 받을 수 있다는 겁니다.
이것은 베드로에게는 용서 자체가 나올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을 예수님이 말씀해 주시는데
그 예수님의 생각을 고지곳대로 받아들이는 모습이 일체 없는 겁니다.
왜냐하면 나도 용서 할 수 있는데요? 라고 용서 그까이꺼 대충 하면 하는 거지 내가 안해서 그렇지 그거 왜 못해? 맘 만 먹으면 할수 있는데 라는 그런 사고방식에 이미 푹 빠져있고 젖어 있다는 겁니다. 다른 생각을 일체 할수 없을 정도로 그 생각에서 벗어날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자신은 하나님과 가까이 갈 수 있는 일치성을 추구할 수 있다고 본 겁니다.

그러나 주님은 용서 개념은 오로지 예수님만이 하는 의미입니다. 바로 그런 베드로의 마음을 교체 시키겠다고 다가오시는 유일한 교체시킬수 있는 분입니다. 즉 이 말은 어떤 누구도 못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베드로는 지금 용서 당해야 할 입장에 놓여 있지 남용서할 권리나 처지나 입장이 전혀 없는 겁니다. 이 전혀 없다는 것을 주님은 차이성으로써 증거 하십니다.

그 차이가 바로 7 곱하기 70입니다 (마 18:22). 즉 무한대입니다. 무한대의 용서를 할 입장이 못되면 용서 라는 개념 조차 꺼낼 생각 말고 차라리 그 무한대의 용서의 대상만 되라고 하시는 겁니다. 이것을 고지 곳대로 받아들이면 베드로의 자존심이나 존재감을 도대체 어떻게 될까요? 와르르 무너지는 겁니다. 이것 때문에 사람들은 용서하고픈 입장이 되고프지 용서 받는 입장은 죽어도 정말 정말 때려죽어도 하고 싶지 않은 입장입니다. 용서 지키기만 하고픈 생각 뿐이고 다른 생각은 아예 모르는 단절된 상태이다는 겁니다. 사랑도 마찬가지

결국 회개란 회개 할 사람을 처음부터 따로 예정해 놨다는 겁니다. 즉 사고방식을 전환 시키는 일에 당함을 입는 자를 따로 처음부터 작정해 놓았기에 어떤 일이 닥쳐서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원래 회개하는 자로써 이미 태어난 겁니다. 사고방식이 바꿔치기 당할 자로써 이미 태어났다는 거죠. 그런 자의 특징은 일치성을 예수님과 자기에게서 찾는게 아니라. 그 반대인 차이성으로써 아 이렇게 해서 예수님은 내 때문에 죽으실 수밖에 없구나 난 그 죽음을 똑똑히 보고서 그 죽음을 증거하기 위해 죽는 예수님과 차이나는 그 반대의 부정한 짐슴이 되어야 하는 구나 라고 사고방식이 교체당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노아의 정결 제사에서 우리는 부정한 짐승이고 예수님은 정결한 짐슴으로써 그 희생 때문에 부정한 짐승이 살게 되는 원리가 되는 모든 성경의 의미가 일관성 있게 성령의 일로써 그 사랑의 십자가의 용서가 덮쳐 오는 겁니다.

예수님과의 차이성을 아는 자는 항상 내가 주님과 비교해서 난 정말 아니요 주님이 옳았군요 라고 주님의 불쌍히 여겨주심의 대상이 되는 반면에

예수님과의 일치성을 주장하는 자는 항상 예수님과의 비교가 아닌 사람과의 비교에서 우위점에 높아지고자 하는 높은 자리를 선점하고픈 무거운 짐에 얽매이고 그 타인을 그 경쟁에서 이기지 못하면 자기를 학대하는 식이 되는 피곤함에 사로잡혀 있게 되는 겁니다.

바로 이런 일의 대가들이 바리새인이요 오늘날 교회 목사와 장로와 교사들이 자기들도 못하면서 남에게 연자 맷돌을 머리에 씌우는 식이 되는 겁니다 (마 18:6).

바로 이런 사고방식을 교체 당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낮추시는 그 일에 일방적으로 당하는 것이 정작 유대인이 아닌 고아 과부 나그네와 같은 자들이 그 낮추시는 일에 동참하는 자들입니다.

자 그럼 오늘 그 세례요한이 베푸는 회개케하는 물세례에 누가 뛰어들겠다고 나서냐 하면 바로 예수님이 세례를 요한에게 받으시겠다는 내용이 오늘 공부할 내용입니다.

왜 우리가 절대로 낮아질수가 없느냐 하면? 낮아지면 반드시 무시 받습니다.
그래서 고아 과부 나그네입니다.
뭐하나 이 땅에서 기댈것이 없는 모든 것을 빼앗김을 당한자와 같은 잃어버림을 당한자들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잃어버림의 모습에 누가 뛰어드느냐?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럴 필요성이 있나요?
그래서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말립니다.
주여 어찌 저에게 세례를 받으시는 겁니까? 도리어 제가 예수님에게 세례를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은 지금은 허락하라
눅 3:21-22
(마 3:13-17) 이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로서 요단강에 이르러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 하신대 / 요한이 말려 가로되 내가 당신에게 침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신대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 예수께서 침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즉 예수님은 죄인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죄를 회개하는 물세례에 그것도 죄인인 인간 곧 요한에게 세례를 받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죄인의 세계에 뛰어들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죄 없으면서 죄인이 받는 세례를 받음으로써 죄인에게 합세하게 된 겁니다.

그리고 정작 모든 죄인이 당연히 받아야 될 지독한 미움을 예수님을 그 저주의 미움을 받고자 죄인의 세계에 뛰어든 겁니다. 하늘의 영광 다 버리고서 말이지요.

바로 그런 사고방식이 하늘에게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 내 기뻐하는 자다 라는 음성이 들릴정도로 보시기에 좋았더라 라는 겁니다. 이 사고방식이 말이죠.

왜냐하면 정결한 자가 부정한 자의 부정함을 씻는 길은 오직 정결한 자가 부정한 자를 대신해서 그 저주에 뛰어드는 그 길 외에는 다른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히 9:22)

(요일 4: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곧 화목제물 되심 뿐입니다.

바로 이 사고방식인 참 사랑의 모습 참 아들(제물)의 모습이 이제 본격적으로 모든 인간의 죄를 뚫어버리는 뿔이 되는 겁니다. 이런 사고방식으로써 모든 것을 교체해 버리겠다는 겁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다 라는 것은 결국 제사를 원치 않고 상한심령을 바라는 유일한 자비 곧 사랑이 십자가에서 화목제물 될 아들이요 이 제물을 흠향하시는 겁니다. 유일한 사랑입니다. 분명히 강조 합니다. 다른 사랑 없습니다.

이 예수님의 세례 받으심을 통해서 예수님은 죄인의 세계에 뛰어들므로 인해서 이제 죄인의 세계는 이제 예수님의 숙제에 의해서 당하는 일 밖에 나타남 뿐이고, 모든 것이 뚫혀서 실체를 들추어냄을 당하는 일만이 남아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족보는 제사장의 계열로써 증거가 되고 제물되신 예수님이 부정한 인간 제사장 계열의 흠을 감당하는 생명의 원천으로써 하나님의 출처를 역으로 회복해 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희년 곧 회복 곧 처음의 자리를 되돌려 놓는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를 회복하시는데 마치 이런 영의 일인 믿음의 일은 이삭의 제물됨으로 부정한 아브라함을 믿음으로 살리므로서 거꾸로 (시간의 순차적인 계보가 아닌) 역으로써 믿음이 모든 것을 (흠있는 제사장들이 엉터리로 잘못 드린 제사의 참된 의미(사랑)를 회복케 하는) 근본의 자리로 되돌려 놓는 겁니다.

그리고 본격적인 미움받을 짓만 골라서 하는데 왜 미움을 받을 수 밖에 없는가 하면? 인간 속에 있는 실체를 들추어 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마귀의 실체입니다. 예수님의 실체가 드러나는 곳에 마귀의 실체도 드러납니다.

정작 우리가 차이성으로 접근하지 않고 일치성을 접근한 이유가 바로 이 마귀가 우리 인간을 장악했기 때문이며 감사하게도 이 외부에서 뛰어들지 않았다면 우리는 까마득하게 몰랐던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받은 세례는 참사랑의 모습으로써 죄인의 세계에 뛰어듬으로서 우리 죄를 반드시 해결하시겠다는 것이 바로 사랑이다는 겁니다. 사랑이란 죄를 일체 허용하지 않습니다. 반드시 해결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해결도 못하면서 왜 사랑한다고 말만하고 실천도 제대로 한 적도 없이 남과 늘 비교해서 남을 의식하는 사랑의 실천을 해놓고 우려먹듯이 자랑을 하는 이유가 바로 차이성이 아닌 일치성을 시도하기 때문이요 이 차이성을 알려주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무시하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자 예수님은 무시받는 잃어버림을 당한자 곧 세상으로부터 없다 라고 무가치한 존재로써 취급받는 고아 과부 나그네 속에 뛰어드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머리 둘 곳 없으신 모습으로써 죄인의 친구가 되셨고 그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고 그 죄인을 가두어 버린 죄의 세계의 실체를 들추어 내십니다.

이런 예수님은 우리는 고마워 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미워 하고 싫어했습니다.

우리가 고아 과부 나그네 이면서도 정작 고아 과부 나그네가 되기 싫어서 그들을 외면했는데

도리어 예수님 마저도 고아 과부 나그네의 모습으로 오시니 너무 너무 싫어서 죽여버린 겁니다. 내가 일치하고픈 예수님은 고아 과부 나그네의 모습이 아니길 바랬는데
나와 차이만 나는 고아 과부 나그네의 모습이 되시길래 나는 죽일 수밖에 없고
그 차이성 때문에 내 속의 있는 죄를 나도 본적도 없는 죄의 실체를 들추어낸 겁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용서입니다.
나의 실체를 들추어 내지 못하는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래서 뛰어 드신 겁니다.

그래서 제물이 되신 겁니다.

이삭이 제물이 되어야 비로소 아브라함의 눈 비늘이 벗겨지는 겁니다.

자 예수님이 외부에서 내 속에 뛰어 들지 않으시면 내 속에 있는 죄를 우리는 알 길이 없습니다. 하늘 영광 다 버리고 하나님의 자리까지 다 버리시고 죄인과 같이 된 이 모습이 바로 생명나무의 모습이고 정작 나의 참 모습은 피조물 자리 버리고 하나님과 같이 된 예수님과 정반대의 길만 추구하는 이 차이나는 모습이 나의 실체입니다. 이 실체는 예수님의 뛰어드심 때문에 비로소 알게된 고마운 일인 겁니다.

그래서 세례받으시는 이유는 내가 물에 빠지기 싫고 싫어버린바 되는 미움을 받는 것을 나는 죽기를 두려워서 외면했으나 참사랑은 죽어도 상관 없는 넉넉한 사랑으로써 든든하고 안정감있게 하늘영광 다 버리고 와도 상관 없을 정도로, 나의 손에 죽어도 상관 없을 정도로 처음부터 모든 것을 내어 주실려고 오신 겁니다.

이 차이성으로써 구지 내가 내 자신을 챙길 필요성이 전혀 없었음을 예수님과의 차이성에서 발견하고 사고방식을 전환 당하는 것이 바로 세례요 회개인 겁니다.

내가 내 자신을 챙길 필요성이 없다는 것이 바로 선악을 알 필요성이 없었는데 괜히 알아버리는 바람에 괜히 하나님과 같이 된 나 (유일신) 만을 애지중지 챙길려고 쓸데없는 수고함으로 무거운 짐을 스스로 지고 있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지킴에 빠진 사랑이 없는 죄의 실체인 겁니다. 외부에서 뛰어든 사랑만이 우리를 건지신 겁니다. 세례도 회개도 결국 십자가의 지혜를 말하고자 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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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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