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강 미아 예수 찾기 vs 어린 예수님이 찾아낸 고아된 부모 구출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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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강 : 고아 부모를 건져주시는 어린 예수님의 십자가 지혜 (학부모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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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상반된 대비된 말씀 서로 안 통함 극과 극 대조됨

(눅 2:48) 『그 부모가 보고 놀라며 그 모친은 가로되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

(눅 2:49)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


(눅 10:38) 『저희가 길 갈 때에 예수께서 한 촌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
(눅 10:39)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 아래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눅 10:40)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가로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지 아니하시나이까 저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
(눅 10:41) 『주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눅 10:42)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눅 23:26) 『저희가 예수를 끌고 갈 때에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이 시골로서 오는 것을 잡아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를 좇게 하더라』

(눅 23:27) 『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 오는지라』

(눅 23:28)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눅 23:29) 『보라 날이 이르면 사람이 말하기를 수태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하리라』

(눅 23:30) 『그 때에 사람이 산들을 대하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며 작은 산들을 대하여 우리를 덮으라 하리라』

(눅 23:31) 『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 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 하시니라』

수태치 못한 자 - 불임여성 - 과부같음 = 사랑(남편)(종교문제)
해산치 못한 배 - 집 - 안식처가 없는 버림받은자 = 나그네=주인이 없음(정치)

먹이지 못한 젖 - 자식 = 고아 (경제 기업)

이런 고아 과부 나그네가 된 자만이 구원의 복이고

나머지 고아 된적 없고 과부 된적 없고 나그네 된적 없는 자가

바로 애굽 나라의 사람이고 그 사람들의 자식과 그 자식들을

다 심판해 버리는 장자의 재앙

이 심판의 날에 구원이 될수 없다고 하는 겁니다.

애굽의 사고방식을 심판한 날이 바로 구원의 날인 유월절

애굽의 사고방식은 영웅을 찾아내고 기다리고 기다리던 보고팠고 보고싶었던 만나고 싶었고 만나고픈 영웅을 왕으로 삼아서 그 왕을 자기들이 세우고 자기들이 사랑하고픔에 안달이 나 있는 상태 (마 5:46,47)

유월절 사고방식은 인간의 이런 사랑을 모두 거부 단절해 버리고

주님 쪽에서의 편애인 피만 발라버림

그 피외에는 다 거부, 죄인 만들어 원수 만들어 피를 발라버림.
그래서 잃어버린 자를 찾고 고아 과부 나그네 물에 빠진 자를 건지고자

십자가로 무조건 달려가심

앞뒤 안 가리고 무대포로 그냥 밀어붙이심

인간 사랑 거부 오직 예수님 자신의 사랑 곧 십자가의 피로 모든 것을 뚫어버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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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재 9 예수님의 어린 시절 (누가복음 2장 40-52절)

누가복음 9공부 p34-35
교재 : 어린이 매일성경 2008년 1-2월 (고학년 4-6학년) 성서유니온

잃어버린 미아가 된 고아 예수

보통 유명한 사람이나 영웅이나 위인들을 사람들이 생각할때에 그 위인의 어린시절이 어떠했는가에 대해서 궁금해 합니다. 그래서 그 위인전기문을 통해서 내린 결론들은 항상 이렇게 말합니다.

될 성 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 될 성 싶은 나무는 떡잎 때부터 알아본다
즉 영웅은 어릴 때부터 남달랐다. 반드시 크게 될 사람인줄 어릴때부터 알아볼수 있다

라는 뜻으로써 영웅을 찾아내는 그 기쁨에 많은 사람들이 기대감을 걸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성경에 있는 예수님의 어린 시절이 바로 이 부분만 언급 되어 있다는 것에 매우 섭섭해 합니다. 그리고 아주 난해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렇게 되니 어린이를 키우는 부모님의 입장에서는 열 두 살 아이 예수에 대한 이 짧은 기록으로 예수님을 따라하기란 무리가 됩니다.

또 예수님의 개인의 생애에 대한 기록을 찾는 사람들에게는 너무 허무하게도 별로 자료로 삼아 참고할 입장도 되지 않은 무지 무지 짧은 생애입니다. 가장 중요한 어린 시절을 파악하기란 불가능한 겁니다. 그러니 흉내 조차도 못내는 식이 되는 겁니다. 결국 가능성을 주지 않는 겁니다.

자 그럼 이 본문의 의미는 뭘까요?
누가복음 1장에서 모조리 천사들이 일을 다 처리 합니다.
인간은 그 천사들이 벌리는 일에 당하는 입장 뿐입니다.

그리고 2장에서는 그 천사들이 벌리는 일에 당한 자들을 기뻐하심을 입은 자 또는 뚫혀버린자 라고 했습니다. 무엇에? 영의 일에
바로 그런 자가 지난 시간에 배운 성령이 임한 자입니다.
아무도 아기 예수님에 대해서 별 반응이 없었습니다. 즉 보고 싶어서 만나고 싶어서 무지 무지 기다리는 마음에 가득찬 자는 기다림을 지킨자가 아니라 기다림을 입음을 당한자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임해서 시므온 선지자와 안나 선지자 라는 분들이 아기 예수님을 보고 경배하고 찬양 합니다. 너무 너무 보고 싶었고 만나고 싶었고 오로지 이 아기 예수님을 기다렸고 그 기다림으로 자기유익을 챙기는 것이 아니라. 이제야 비로소 눈을 감을 수 있고 이제야 비로소 구원이 왔다 라고 외칩니다. 아기 일 뿐인데 말이지요.

또 시므온 선지자는 기다림의 도사들인 유대인 속에서 기다림을 지키기만 했지 만나고 싶어했고 보고 싶어 하지 않은 그 유대인 속에서 그 예루살렘 집이 있는 자들 속에서 나그네 였을 뿐입니다. 객입니다. 그 나그네인 시므온 선지자는 나그네이기에 주인이 어떤 일을 하는 줄 알게 됩니다. 평화의 주인이기에 그 평화를 이루고자 전쟁에서의 승리를 준다는 것을 선포 합니다. 단순히 나그네의 그냥 주인이 아닙니다. 마치 출애굽 때의 여호와를 보는 듯 노예를 끄집어 내는 애굽의 종 되었던 너희를 구원해 내는 여호와 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에나 아기에게 이스라엘의 비방받는 표적이 된다고 예언을 합니다.
아기에게 저주를 한 것일까요? 아닙니다. 분명히 축복 했습니다. 그런데 그 내용이 우리가 알아 먹을수가 없습니다.

(눅 2:28)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눅 2:29)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눅 2:30)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눅 2:31)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눅 2:32)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

(눅 2:34) 『시므온이 저희에게 축복하고 그 모친 마리아에게 일러 가로되 보라 이 아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의 패하고 흥함을 위하여 비방을 받는 표적되기 위하여 세움을 입었고』
(눅 2:35)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

비방받는 표적 곧 미움받을 짓만 골라서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고 찌르듯 한다는 겁니다.

즉 비방받는 표적이란 바로 십자가를 두고 말합니다. 여러사람의 마음을 다 수시고 뚫어버린다는 겁니다.

(고전 1: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고전 1: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고전 1:24)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고전 1:25)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유대인에게는 이것이 바로 거리끼는 스캔들이요 불륜이요 걸림돌입니다.
이방인에게는 어리석음 미련함 약함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사랑이다는 겁니다. 사랑으로 모든 것을 다 뚫어버린다고 시므온은 보게 됩니다.

자 그래서 시므온 선지자는 나그네 입장에서 평화의 왕을 보게 되었고
안나 선지자는 과부의 입장에서 그냥 남편이 아닌 약속을 성취하는 구원자 신랑을 보게 되었고

오늘 바로 예수님의 어린 시절인 열두살의 이 사건을 통해서 잃어버린 고아를 찾는 아버지를 보여주시는 겁니다.

자 우리가 잘 아는 유월절에(출애굽때에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르고 살코기를 밤새도록 뜯어먹고 한 쪽 애굽은 지옥의 심판을 당하고 그 심판 속에서 다른 한 쪽 이스라엘은 피와 살 때문에 죽음이 묻지 않는 날, 왜? 어린양의 살과 피의 희생 때문에 그날을 기념 1월 1월 새해에서 10일째날 어린양 잡고 14일째 간직했다가 피를 바르고 살코기를 밤새먹고 그냥 먹는게 아니라. 허리에 띠 띠고 발에 신발 신고 지팡이를 손에 잡고 급히 먹음. 무교병 쓴나물과 같이 먹음 맛도 없음 즉 쓰고 맛없고 즉 고통 스러움 고난에 어린양의 피에 연합케 하심. 고난에 참여) 12살 아이 예수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갔습니다. 해마다 부모가 절기를 따라 갔는데 왜 이 12살에 의미를 둘까요 그것은 12살이 중요한게 아니라 잃어버렸던 나이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예수님이 30살에 비로소 말씀을 전파 하시니까 그 나이 숫자 30을 의미를 두어서 따라할려는 자와 의미를 두는 자들이 많은데 30살이 중요한게 아니라. 말씀을 비로소 전파하기 시작한 때가 바로 30이기 때문입니다.

자 이렇게 잃어버린 사건이 그 나이에 벌어진 겁니다.

절기 행사를 잘 지키고 잘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하룻동안 찾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많은 친족들과 함께 잘 따라온줄로 알았는데 찾아보니 없어서 다시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갔습니다.

그래서 애타게 찾은 날이 2-3일 동안 찾아 헤매는 가운데 성전에서 찾았는데 아이 예수가 랍비 즉 선생들 속에 앉아서 묻기도 하고 듣기도 한 겁니다. 그리고 아이 예수의 물음에 듣는자들이 모두 아이 예수의 지혜와 대답에 감탄을 하고 놀라워 했습니다.

부모도 놀라워 하고서는 마리아가 묻습니다.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애타게 했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서 매우 걱정하면서 너를 찾았단다 라고 물으니

예수님이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라고 답변을 했습니다.

매우 시건방진 답변일까요? 아니면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하는 것에 대한 그것을 알지 못하는 부모에게 나무래고 야단치는 말일까요?

이것은 잃어버렸다 라는 부모의 관점인 애타게 찾아다닌 일에

예수님의 대답은 왜 찾았느냐 라는 겁니다.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몰랐느냐 라는 겁니다.

즉 아이와 아버지 와의 관계에
잃어버린 미아찾기 라는 단절이 부모에게 졸지에 생겨버린 겁니다.

그러니 당연히 찾는 겁니다.

그런데 에수님은 그 관계가 아주 든든하고 안정감 있고 푸근한 모습으로써 말씀을 나누고 묻고 답변하고 하는 그 여유만만의 지혜와 놀라움이 펼쳐지고 있는 겁니다.

마치 이 모습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실때에
많은 사람이 걱정하고 눈물까지 흘리고 안타까워 하고 불안해 하고 애타게 여기면서

(눅 23:26) 『저희가 예수를 끌고 갈 때에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이 시골로서 오는 것을 잡아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를 좇게 하더라』
(눅 23:27) 『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 오는지라』

졸졸졸 뒤 따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엉뚱한 소리를 합니다. 말이 안되는 소리를 합니다.
 
(눅 23:28)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눅 23:29) 『보라 날이 이르면 사람이 말하기를 수태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하리라』
(눅 23:30) 『그 때에 사람이 산들을 대하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며 작은 산들을 대하여 우리를 덮으라 하리라』
(눅 23:31) 『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 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 하시니라』

분명히 여자들이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안쓰러워서 자기 입장에서는 예수님은 저주 받았고 잃어버림을 당한 고아요 과부요 나그네 인데

예수님은 거꾸로 보시는 겁니다.

마치 12살의 아이 예수님의 대답처럼 말입니다.

즉 누가 미아요 누가 고아일까요? 누가 잃어버린 자일까요?

예수님이 미아요 고아일까요?

애타게 찾고 걱정하는 부모 일까요?

지난 시간에 제가 팔을 어긋맞게 해서 여러분에게 체인지 라는 액숀을 취한 것은
우리는 자꾸 내가 안좋게 보면 악 내가 좋게 보면 선, 항상 내 기준의 선악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 반대로 뒤 바꿔치기를 하시는 겁니다. 무조건 너의 기준의 반대

분명 찾는 자는 부모였고 미아는 예수님 인데
예수님의 답변은 오히려 누가 미아요 고아요 잃어버린 자 입니까?

교회를 다니는 것을 지키기만 했던 것처럼
유월절을 그냥 지키기만 한 겁니다.

여기에 예수님은 태클을 겁니다.
유월절이란 잃어버린 자식을 찾는 자가 바로 아버지 여호와다 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잃어버림의 고난 속에 동참해야 즉 물 속에 빠져서 쳐다보니
아버지 여호와가 누구를 찾는지 보게 됩니다.
너희 인간들의 죄 때문에 머리 둘곳 없는 독생자 예수님을 버려야만 했던
하나님의 마음을 보라는 겁니다.

너희들의 죄 때문에 잃어버림을 당한 예수님을 하나님 아버지는 찾는 겁니다.
잃어버린 고아를 찾기 위해서 대신 고아가 되어주신 겁니다.

아버지와의 관계를 새롭게 잊게해주는 통로가 되기 위해서
대신 고아 과부 나그네의 자리에 뛰어드신 겁니다.

그러니 그것도 모르고 예수님의 처지가 안타까워 울고 따라가는 여자에게
위로를 해주는게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이 그 여자들을 안타까워 하는 겁니다.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희 자식을 위해 울라
오히려 자신은 미리 고아 되었고 미리 나그네 되었고 미리 과부된 모습이니

앞으로 닥쳐올 심판이 얼마나 무서우면
관계가 끊어진 상태가 얼마나 심각하면
아이를 가지지 못해서 심판때에 아이있는 집에 아이가 죽어가는(애굽의 장자재앙)
그 날에 눈물 흘릴 필요가 없고 (왜? 이미 미리 다 흘렸기에)
해산한적 없고 젖을 물린적 없으니, 그 슬픔이 없다는 겁니다.(마치 출애굽의 이스라엘의 노예로써, 죄인으로써 긍휼함을 입은 것처럼)

결국 우리를 물에 빠뜨리는 이유는
우리를 고아 과부 나그네 곧 죄인을 만드시는 이유는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듯이
죄인에게만 필요한 것은 구원자이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뿔은 모든 것을 뚫어버리거든요
그래서 이 사흘만에 찾은 미아 예수님은 너희들의 고아됨 너희들의 노예됨 너희들의 죄인됨을 다 짊어지시고자. 반드시 다 해결하시고자 대신 감당하시는 겁니다.

대신 고아 되고
대신 과부 되고
대신 나그네 됨에 뛰어드시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속에서의 지혜 곧 십자가의 피입니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아이 예수 때에 이런 모습을 보여주는 겁니다.
정작 아버지 없는 고아의 모습은 아이 예수를 근심하며 애타게 찾는 부모인 겁니다.

마치 기다림을 지키기만 했듯이 유월절을 지키기만 한 겁니다.

유월절이 뭔가를 예수님이 제대로 보여준 겁니다. 직접 죄인이 되셔서 십자가에 달려서 다 이룬 것처럼
직접 어린아이 때에 고아의 모습이 되셔서 너희들의 고아 됨을 해결할 분이 누구신가를 보여주는 것이 유월절의 의미이다고 보여주시는 겁니다.
즉 유월절도 모든 절기도 십자가에서 그 해석이 제대로 되는 겁니다.

유월절이라는 놀라운 계시의 비밀을 우리는 지키기 로만 때웁니다. 우리는 뭐든지 지키기 뿐입니다. 사랑도 믿음도 행함도 섬김도 다 지키기로 때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예 그 비밀을 그 계시의 말씀을 우리에게 심어버립니다.
꽂아버립니다. 그 비밀을 우리 마음판에 심어버립니다. 뚫어버립니다. 왜? 오죽하면 기껏 지킨 것이 자기 자랑입니다. 겨우 자기 챙기기 뿐입니다. 다 내어주는 사랑을 일체 없습니다.

뚫힘을 당하고, 기다림을 입음을 당하고, 사랑에 꽂혀버리고, 편애에 지독하게 내 전부를 다 빼앗아 버립니다. 나보다 나를 더 사랑하고자
어린 모습으로 고아가 되시면서 까지 우리의 생각을 바꿔치기 하실려고 한 겁니다.
어른이다고 부모다고 찾는다고 걱정하고 애타는 모습을 체인지 팔을 어긋맞게 해서
도리어 예수님이 너를 애타게 찾았고 보고싶어했고 만나고 싶어했다는 겁니다.

(요일 4: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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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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