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강 유월절 잔치 (죄인 찾아낸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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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강 바꿔치기 당한 날
회개 - 나는 틀렸고 당신이 옳았습니다.

팔을 어긋맞게 바꿔치기 하신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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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재 10 예수님만 높여요 (누가복음 3장 1-17절)

누가복음 10공부 p36-37
교재 : 어린이 매일성경 2008년 1-2월 (고학년 4-6학년) 성서유니온 http://www.su.or.kr

예수님에게 꽃혀버린자 세례요한

사랑이라는 것을 표현할때에 이런 표현을 쓰기도 합니다. 콩깍지가 씌였다. 즉 이것은 거부 불가능하다 라는 뜻입니다. 자기도 모르게 어쩔수 없는 불저항 불반항적임을 누가봐도 모든 것을 빼앗겨 버림의 상태가 바로 사랑이다는 겁니다.

우리가 올해 처음부터 왜 물에 빠뜨리셔야만 하는가 에 대해서 공부를 하고 있는데 사실은 물에 빠뜨린다 라는 의미는 결론적으로 말해서 사랑만 바라보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랑도 좋지만 이것 저것 챙길것이 너무 많고 호기심에서 이리 저리 눈을 돌라고 싶을 정도로 모든 것이 먹음직 보암직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러운 하나님과 같이 될수 있는 선악과의 열매들이 너무 너무 널려 있고 하루라도 선악의 열매를 먹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을 정도로 중독이 되어 있습니다. 하루라도 선악의 열매를 못보면 대화가 통화지 않고 소통이 불가능하게 되면 왕따가 되어버리는 철저하게 갇혀버린 상태입니다. 하루라도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러운 선악을 아는 열매의 지혜를 쫓지 않으면 수준 낮고 유치하고 추잡하고 영원한 가난한 거지로 취급받고 무식한 인간으로 인간의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 되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법의 세계요 선악의 세계요 인간 지혜의 세계입니다. 한 없이 혼자만이 최고로 높은 하나님이 되고자 오로지 일인자를 향해서 달려가게 되는 법에 갇혀버린 인간입니다.

그러나 사랑의 세계는 어떨까요? 단 한번도 이 사랑의 세계를 격어본자가 없습니다. 그래서 너도나도 추상적으로만 생각 합니다. 그래서 종교가 탄생합니다. 위에서 언급한 치열한 경쟁의 바벨탑의 법의 도시, 신의 도시에서 탈락된 자들이 그냥 탈락 되었다고 선악과 먹기를 멈추는 것이 아니라 그 탈락 소외 왕따 당한자들끼리 또 다시 도시에서 다른 방식의 신되기를 멈추지 않고 시도를 합니다. 그래서 종교의 신을 인간이 만들고 우상화 합니다. 그 신은 한없는 사랑과 자비심이 가득한 최고의 신인 유일신이어야 합니다. 다양한 인간의 욕망을 채워주는 모든 것에 다양한 사랑도 다 퍼부어 주기에 다신사상도 결국 사랑이라는 근거로 인간을 보호해 주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들이 조작해 내고 만들어내는 사랑입니다.

이 사랑에 모든 인간은 빠져 버렸고 포로가 되어 버렸습니다. 마태복음 4장에서는 이것을 마귀의 3가지 시험 속에 나타난 메시야 사상이라고 합니다. 이런 가짜 사랑과 가짜 신을 마귀는 인간에게 심어버렸고 모든 인간은 이 우상에 빠져나올수 없도록 갇혀 버렸습니다.

바로 이런 환상을 환각을 깨뜨리는 것이 실제로 사랑의 세계에서 직접 내려온 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상당히 싫어하고 거부감을 느끼면서 계속 성경을 통해서 들어온 것은 추상적인 사랑인 인간이 조작해 내는 환각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사랑인데 이 사랑의 특징이 바로 전쟁이라는 부정적인 의미에서만 증거된다는 것입니다. 전쟁

이상하지 않나요? 왜 사랑을 꼭 전쟁이 아니면 증거되지 않는다고 할까요?
전쟁은 인간이 제일 싫어하는 겁니다. 그야말로 미움의 극도의 상태요 죽음과 피비린내 나는 증오요 환멸감입니다. 그것은 악마들이나 하는 짓이지 선악을 아는 인간은 그런 짖을 하고싶지 않은 고품격 엘레강스 럭셔리한 품성인 겁니다. 환경이 안좋아서 그렇지 환경만 잘 받들어 준다면 미움이나 질투나 전쟁같은 것은 충분히 미리 방지할 수 있다고 선악의 지혜는 자신만만하게 이 세상을 지금까지 지배하고 다스리고 충만해 왔습니다. 그런데 왠 전쟁? 왠 소동입니까? 그 데모 주동자는 법으로 질서를 잡아야 하는 겁니다. 이것이 지혜다움입니다.

왜 제가 이런 인간의 지혜를 언급 하는가 하면? 바로 누가복음에서의 성령 곧 천사들과 영의 일들은 이 인간의 지혜를 겨냥한 충돌로써 활동한다는 점입니다. 그렇기에 누가복음의 대상자인 이 이방인은 선악을 아는 지혜로 무장한 자와 같고 그런 선악의 지혜에 갇혔고 포로된 자들입니다. 쉽게 예를들면 애굽나라의 파라오 왕의 사고방식입니다. 우리도 그 파라오 왕을 부러워 하고 그 사람처럼 되고 싶고 그런 나라를 세우고 그런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고파 합니다. 그런데 이 파라오 왕을 적극적으로 공격하고 시비를 걸고 전쟁을 먼저 걸어오는 자가 있는 바로 비방받는 표적인 예수님이다는 겁니다. 아무도 시비 걸수 없는 위치의 세상의 최고의 지혜요 최고의 강국을 지금 예수님 딸랑 혼자 시비걸고 전쟁을 벌리시고 있다는 겁니다.

얼마나 이 전쟁이 우리가 보기에는 초라하기 짝이 없고 무모한 전쟁인가 하면
딸랑 한 명 vs 수 억의 창 칼과 방패와 말과 마병과 재물과 군사와 노예와 군수물자 등등
이것은 게임 조차도 언급할 수 없는 말할 필요조차 없는 전쟁입니다. 아니 전쟁이라고도 할수 없습니다. 상대가 공격이나 방어의 순간을 1초라도 서로 취하면 모를까 그냥 아무생각 없이 지나쳐서 지나가는 길에 찡겨 죽는 꼴이 되는 식이니깐요

즉 주님의 홀로의 전쟁에 상대적인 전쟁의 대상을 일부러 의도적으로 말도 안되게 비교가 되도록 부풀리고 뻥튀겨버리시는 겁니다. 누가 봐도 주님은 질 수밖에 없고 주님의 전쟁의 대상인 인간의 지혜의 세계는 강국처럼 의도적으로 부풀리고 뻥튀기고 강하게 만들어 버린 겁니다. 누가요? 인간 스스로가요? 아닙니다. 주님이 그렇게 하신 겁니다.

그래야 역전의 명수인 주인공이 빛이 나는 겁니다. 어둠의 세력이 강하면 강할수록
주인공은 더더욱 주인공의 진가를 발휘하게 되는 겁니다.

자 여기까지 이야기 하고 아주 중요한 그림을 다시 살펴 봐야겠습니다. 우리가 몇주전에 공부한 게임놀이의 그림이 아주 중요합니다. 이 게임의 그림을 저는 반대로 설명을 했습니다. 그 반대의 의미가 바로 구약의 여호와 전쟁의 방식이요 이스라엘이 행하는 전쟁입니다.

눈을 가리운 젖먹이가 (12살 꼬마 예수님) 눈 시퍼렇게 뜨고 어른다움으로써 건장한 체구로 도리어 걱정해 주고 안타까워서 찾아헤매는 어른을 오히려 미아 취급하고 자신이 찾지 아니하면 그 속에서 빠져 나올수 없다고 여겨서 되찾아 낸다는 겁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영의 일이란 육이 보기에는 반드시 거부감과 주객이 거꾸로 된 듯이 느껴지듯이 다가오는 겁니다. 그래서 성령은 불가능한 일만 제시하고 그것을 믿음의 문제로 다루고 있지 육의 일이나 육의 행함의 문제로 취급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것은 가능하니깐요 가능하다면 어디까지나 육의 일인 겁니다. 그래서 누가복음은 영의 활동은 곧 종말의 상태는 모든 것이 뒤바꿔치기의 방식으로만 진행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그림을 저는 반대로 보자라고 하는 겁니다.

자 그럼 다시 본론으로 들어가서 이 주님의 홀로 하시는 초라한 전쟁을 뭐 그리 대단하다고 이 전쟁을 예비하는 자가 있는데 우리가 배운 사가랴의 예언대로 세례요한이 주님의 전쟁을 6개월 앞서서 뿌뿌뿌 선포합니다. 너거들 이제 다 죽었다 라고 외치는 겁니다. 뿌뿌뿌 너희들은 이제 다 뚫혀버렸다. 이 예수님이 벌리시는 전쟁에서 살아남을자는 아무도 없다 빨리 투항하라 라고 종말을 외치는 선지자입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은 심판 속에서도 살아남은 옛언약의 모세 당시의 출애굽을 재현 합니다.
재현한다고 해서 그들이 살아남는다는 뜻이 아니라 이렇게 밀어붙인다는 뜻으로 모든 것이 뚫혀버린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물세례를 요단강에서 하는 겁니다.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푼다는 것은 지금의 예루살렘이 애굽나라와 같고 그 속에서 그 심판 속에서 그 포로되고 갇힌자를 해방케 하는 구원의 방식이 마치 출애굽처럼 실행이 된다고 알려주는 메신져 우편배달부로써 편지요 편지요 라고 외치는 겁니다.

결국 요한은 물세례를 행함으로써 앞으로 오실 분의 세례는 이 물세례에 족히 비교치 못하는 어떤 누구도 감당할 수 없는 성령세례(종말의 영의 세례)와 불 세례(불의 심판 죽음 속에서도 타지 않는 사랑으로 모든 것을 다 태워 버리는 불)로써 세례 곧 모든 것을 끊어버리고 종결시키겠다는 주님의 길을 예비 곧 미리 앞당겨 맛배기로 보여준다는 겁니다.

마치 홍해 라는 물세례를 통과했던 이스라엘이 광야라는 육의 차단(물없는 곳 양식 없는 곳 원망할만한 곳만 골라서 인도해서 떡으로 사는 것이 아는 말씀으로만 산다는 영 곧 약속의 자녀만들기)과 불뱀이라는 고난(육의 생고생을 넘어서 아예 고난에 적극적인 참여로 유월절 어린양의 피의 희생에 참예 곧 하나됨)을 동참케 함으로써 십자가로 몰아가서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못밖겠다 라는 겁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입니까? 저주요 심판이지??

네 맞습니다. 심판이요 저주입니다. 그래서 그 저주와 심판을 너가 마땅히 받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대신 감당한다는 겁니다.

야호 좋아라 대신 감당하니 난 안 당해도 되겠네 라는 것을 모두 차단하기 위해서
그 십자가에 동참케 함으로써 왜 대신 당하지 않으면 안되는 가를 똑똑히 보여주심으로써 우리의 사고방식을 바꿔치기 교체 시키는 겁니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아브라함이 말로만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게 아니라 믿음이 뭔가 라는 것을 직접 체험케 합니다. 그것이 이삭 바치는 제사입니다. 얼마나 마음이 찢어졌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아버지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을 바치는 십자가의 사건을 미리 보여주고 직접 체험케 하시는 겁니다. 기독교는 말로만이 아닌 직접적인 체험이요 실상입니다.
그렇다고 체험적이다 라고 하니 경험을 많이 쌓으면 된다고 여기는 자들이 많은데 그 체험이란 딱 하나 뿐입니다. 십자가의 피 체험 뿐입니다. 유월절 어린양의 피 체험만을 구약 이스라엘이 했던 겁니다. 신약의 새이스라엘도 이 십자가의 직접적인 실제적인 실상의 체험 뿐입니다. 말로만 때우는 것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다른 체험 또한 있을 수가 없습니다. 다른 체험은 무당이 될 뿐인 종교테크닉 기술자만 될 뿐입니다. 그래서 지키기로만 다 때우는 겁니다.

자 이 실제적인 성령과 불 세례를 미리 앞당겨서 맛배기로써 하는 것이 물세례인데 물에 다 빠뜨려서 죽음으로써 나는 악마의 세계에 빠져 있다는 것을 포로 되어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즉 죽음이라는 것은 원래 창조때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죄 때문에 죽음이라는 것이 찾아 왔고 그 죽음은 선악을 아는 지혜와 연관이 되어 있습니다. 선악을 몰랐다면 죽음이라는 것을 몰랐을 텐데 선악을 아는 지혜 때문에 죽음도 눈을 띄게 된 겁니다. 그 선악을 아는 하나님과 같이 된 나를 물에 빠뜨림으로써 죄아래 갇혔고 포로되었다 라는 것을 알려주시는 겁니다. 고아 과부 나그네 이다는 것은 애굽의 종 되었던 너희를 구원한 여호와를 강조하기 위함으로써 상대적인 보호자가 아니면 고아 과부 나그네로 영영히 남을 수 밖에 없는 상태임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래서 물에 빠뜨림으로써 고아 과부 나그네인 나의 모습을 제대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럼 외부에서 나를 건지는 자가 누구냐 라는 것을 보라는 겁니다.

자 이런 이야기는 이방인의 지혜에서는 있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악마는 없거든요. 설사 있어도 종교에서 협박용으로 마귀가 있고 지옥이 있는데 그것은 다 인간이 지어낸 것으로써 결국 인간이 만든 악마와 마귀는 인간이 극복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악마와 죄는 그렇게 호락호락 하지 않습니다. 마귀를 못 이기도록 주님 쪽에서 악마를 배치시켰습니다. 그럼 그 마귀는 예수님에 의해서만 처리가 되는 겁니다. 주인공 이시거든요. 사랑은 예수님이지 우리가 흉내조차 낼 수도 없답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은 내 뒤에 오실 예수님이 누구이신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예수님에게 꽂혀버려서 외치기 싫어도 외칩니다. 전쟁의 개시를 적진 속에서 뿌뿌뿌 라고 외치는 철저한 소모품이 되는 겁니다. 너거들 이제 다 죽었어 라고 적의 심장부에 들어가서 조용한 태풍의 눈에 들어가서 전쟁 전 초야의 고요를 깨뜨립니다. 뿌뿌뿌 

맑고 투명하게 비추이던 유리창 속의 화면들이 유리가 찌이익 쭈욱 갈려지면서 파편을 날리면서 양각나팔의 소리에 모두다 깨뜨립니다. 이것이 바로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자들의 평화가 되는 겁니다. 천사들의 전쟁이 시작이 되는 겁니다.

요한은 이 전쟁의 소식을 전하는 광야의 소리로써 회개의 세례를 전파 합니다.
회개란 사고방식의 전환입니다. 선악의 열매만을 먹는 자들에게 생명의 열매를 증거합니다.
생명의 열매 되신 예수님께로 방향전환을 요구하는 선악을 아는 자들에 대한 도전이요 시비걸기요 전쟁 선포입니다. 딸랑 혼자서 전쟁을 개시하는 겁니다.
선악을 아는 자는 이제 다 심판이다 라고 선언하는 겁니다. 도끼가 나무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

이사야서에 예언된 대로 이제 그 약속의 말씀이 요한에게 꽃혀서 증거됩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는데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은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질것이요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 라고 예언된 이사야의 예언이 성취가 되는 겁니다.

여기서 굽은 것이 곧아지고 첩경이 평탄케 되고 험한길이 평탄케 되고 굽이굽이 골짜기가 메워지고 라는 뜻은 회개의 의미와 연결된 왜곡된 것이 제대로 곧게 펴진다 라는 뜻으로써 죄에 대한 전쟁과 동시에 승리를 말하는 겁니다. 종말때에 그 승리의 영 온전함의 진리의 영을 모든 육체에게 부어준다고 합니다.

(욜 2:28)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렇다면 우리는 누가 곧게 펴고 누가 평탄케 하는지를 똑똑히 직접적인 체험을 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굽이굽이 골짜기 같고 첩경이요 험한길과 같은 고아 과부 나그네의 모습인 죄인임을 물에 빠진 자임을 물에 갇혀서 포로된 자임을 만들어 버리신다는 겁니다. 그래야 누가 나를 건지는 자인줄 보게 될 테니깐요

그래서 요한에게 세례받으러 오는 자에게 요한은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라고 우리를 모두 독사의 자식이라고 독사에게 갇혀버린자 취급 하십니다. 마치 불뱀에게 물려 죽게 된 자들과 같이 말이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라고

회개라는 철저하게 끊여진 자임을 직시하라는 겁니다. 아브라함을 내가 선택할 자격 조차 없다는 겁니다. 내가 믿음을 마치 선택권을 발휘해서 믿을 수 있는 나의 선택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도리어 전적불선택 에 해당된다는 겁니다.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던져 불에 던지우리라  라는 말씀은 그 나무에 그 열매만 난다는 겁니다. 이것을 인위적으로 우리가 바꿀수가 없다는 겁니다. 선악을 아는 자는 선악의 열매를, 생명나무 되신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은 자는 생명 곧 나 같은 죄인도 주님은 용서합니다. 라고 십자가의 지혜를 외칩니다. 이것이 좋은 열매요 상대적인 선악의 열매는 독사의 자식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요한에게 묻습니다. 그럼 우리가 무엇을 하면 되겠나요?

요한은 너희가 처음 모습으로 되돌아 가라고 합니다. (희년, 처음 자리로 되돌아 가기. 회복. 첫사랑. 사랑의 완성. 모든 것을 다 뚫어버림)

일반 평민은 옷 두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주고
먹을 것 두 그릇이 있는 자는 먹을 것 없는 자에게 나눠 주라고 합니다.

세리가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할까요?
세금을 거두어서 로마에 바치는 유대인의 원수인 매국노 세리에게는
정한 세금 외에는 더 거두지 말라

군인들이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할까요?
정한 월급 외에는 탐내지 말고 사람들의 재산을 강제로 돈 뺏지말고(삥땅치지 말며 그 당시는 거의 깡패나 조폭이나 군인이나 다 같은 수준이니까) 거짓으로 고소고발 하지 말라

자 희년 곧 사랑을 외치니까 왜냐하면 너희가 전에는 애굽의 종이였고
고아 과부 나그네 였던 자였다 그래서 착하게 살아라가 아니라 너가 원래 고아 과부 나그네 였는데 니가 도리어 그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무시하게 되니 그 고엘의 하나님의 복수와 구원의 뿔(모든 것을 뚫어버림)을 무슨 수로 감당할수 있겠는가 라는 뜻이다.

그래서 긍휼과 자비와 불쌍히 여기심을 외치니까 혹시 세례요한이 그리스도인가 라고 사람들이 웅성웅성 하니까 요한은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지만 즉 처음 자리인 고아 과부 나그네가 되어서 애굽의 종 되었던 너희를 구원하신 갇힌자를 해방케 하시는 여호와를 예비하는 자이지만

나 보다 더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신들메를 푸는 일은 제일 하급의 노예가 맡은 일이다. 비교 대상 조차도 안된다는 뜻이다.
철저한 나는 소모품이다. 무익한 종이요. 죄인 중의 괴수요. 노예 중에 노예다.
내 뒤에 오실 그리스도 곧 예수님은 성령과 불로써 세례를 주는데 그 의미는 너희의 모든 죄를 태워버리고 원래 자리로 되돌려 놓고 복수(고아 과부 나그네의 하나님)의 전쟁을 할 것이다.

그의 손에는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운다 라고 타작 마당인 십자가를 심판의 기준으로 삼았다고 하십니다. 왜 십자가가 타작 마당이냐 자기의 사랑의 기준으로 이 기준에 의해서 심판하시거든요.

그리고 눅 3장 18-20에 세례요한이 헤롯이 남동생의 아내 헤로디아와의 악한 일과 헤롯의 악한 일을 고발함으로써 옥에 갇히게 됩니다.

그리고 그 전에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예수님이 받으시니까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의 모습으로 내려와서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는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다 라고 합니다.

여기서 왜 순서가 뒤 바뀌었을까요? 분명 누가 봐도 예수님의 세례가 시간적으로 먼저이고 요한이 옥에 갇히는 사건이 뒤에 있는데 말이죠 이것은 의도적으로 세례라는 의미가 바로 이 세례요한의 길에 갇히 동참된다는 의미에서 예수님이 받는 세례가 뒤에 나타납니다. 즉 세례요한이 갇혀 죽게 되는 그 운명까지도 같이 함께 세례로써 받는다는 뜻입니다. 세례요한 또한 죄인입니다. 그 죄인에게 세례를 받으심으로써 세례 베푸는 자의 운명을 세례 받는자인 예수님이 대신 감당하는 겁니다. 마치 어린양에게 죄를 전가 시키는 것처럼 말이죠.

그리고 이 모든 희년의 시작은 바로 누가 벌리신 일인가 라는 관점에서 족보가 언급 됩니다. 이 일은 하나님이 벌렸고 하나님이 완성하신다 라는 것에서 어떤 누구도 바꿀수 없고 다 뚫혀버리는 입장에 놓였다는 겁니다. 무엇처럼? 족보처럼 말입니다. 사랑은 빈틈이 없이 제대로 회복하고 대충 회복하는 것이 없다는 철두철미한 완성의 승리를 미리 이렇게 기정사실화 하고서 이제 마귀의 실체를 들추어 내십니다. 마치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도 전에 다 갈라먹기 하듯이 말이죠.

자 결론적으로 세례요한은 이 주님의 성령의 일에 꽃혀서 오로지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증거하기 위해서 동원되는 소모품입니다. 주님을 높이고자 한다면 둘 다 같이 높여지지 않습니다. 주님은 높이고 자신은 철저하게 소모품이 되는 낮아짐 뿐입니다. 그런데 이게 왠 일일까요? 교재의 제목처럼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높이기 위한 모습인데 알고보니 예수님이 세례요한을 높이고(천사도 흠모하는 사랑의 일에 꽃혀버렸고) 오히려 예수님 자신이 낮아진 겁니다. 왜냐하면 세례요한의 운명에 자신도 뛰어드니까 높아진게 아니라 도리어 낮아진 겁니다. 왜요? 죽은 세례요한을 높이기 위해서 말이죠. 예수님이 낮아지지 않으면 세례요한의 그 운명에 뛰어들지 않으면 세례요한은 고아 과부 나그네의 모습에서 건짐을 받을 수 없는 겁니다. 그렇기에 세례요한 또한 물에 빠져서 누가 나를 건지는 자 인가를 봐야하고 믿어야 할 판국입니다. 본인이 낮아지고 예수님을 높였다는 낮아짐을 지킨게 아니라. 그 세례요한 또한 예수님이 건지기 위해서 그의 죽음 속으로 뛰어든다는 겁니다.

그러니 세례요한이 아니 외칠수가 없는 겁니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이 예수님을 외치면서 신들메 신발끈 풀기도 감당치 못하는
그야말로 노예 중의 노예인 겁니다.

이 노예들을 배치하시는 이유는 그 노예의 복수자가 누구인가를 보여주고자 함입니다.

주님 우리에게는 전쟁이 없습니다. 주님은 이 원수를 향한 전쟁을 승리하시고 그 전리품을 주시는데 우리는 그 전쟁도 모르고서 평화를 외치는 거짓 사랑에 빠져있습니다. 건져주시옵소서.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포로되고 갇힌 나를 건지시는 그 구원자의 손을 내밀어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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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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