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강 기다리는것을 지킨자를 버리시고, 기다림을 입은 자를 되찾으심

약속=거룩=할례=세례=회개=믿음=예수님=십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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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강: 84살 과부 안나에게 애인이 생겼어요(학부모용)

성령을 입은 자 84살 과부 여자 안나가 시집 간데요,
신랑 예수님은 기다리도록 과부 만들었대요. 신랑을 기다리도록 말이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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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자에게 긍휼자가 (고엘=보호자) 생겼어요. 탕자를 찾는 자가 생겼어요

약속=거룩=할례=세례=회개=고아=과부=나그네=탕자=보호자=남편=아버지=기다림당함=기뻐하심입음=성령=믿음=예수님=십자가

아무도 여자라고 여기지 않음그런데 내 뼈중에 뼈요 살 중에 살이라고,
여자 중에 여자,가장 아름다운 여자, 가장 복된 여자로 새로 만들어 버림지독하게 편애하면서 자기 사랑을 꽂아버리고 뚫어버림 (십자가), 모든 죄(육)은 단절지독하게 찾아나서기에 집 멀리서 기다리고 기다리시는 그 아버지의 사랑 긍휼때문에
얼마나 보고싶었고 만나고 싶었고 기다리고 기다렸던지얼싸 안고 뽀뽀하고 손을 만지고 등을 두드리고 냄새나는 머리카락에 뽀뽀하고으스러지도록 꼬옥 껴안아 주고 지독한 고슴도치 사랑 = 누가요? 탕자? 노 , 찾았고 기다렸던 분 바로 아버지 예수님
(눅 15:20)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 돌아 가니라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눅 15:21) 『아들이 가로되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하나』(눅 15:22)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잃어버림을 당한자는 반드시 (아빠의,찾는자의 편애=불쌍히여기심,긍휼) 기다림을 입어서그 찾는자는 보고싶을수 밖에 없고, 만나고 싶어 할수 밖에 없음.이것이 99마리 양을 버리고, 한 마리의 잃어버린 양을 찾으시는 찾는자 곧 편애임

기다리는 자를 버리고, 기다림을 입은 자만을 지구 끝까지 찾아서 지독하게 편애하심

누가복음은 모조리 편애 뿐임. 이 편애를 설명하기 위해서 지독한 미움의 끊쳐짐의 이방인이 그 대상이 되는 것임(선민인 이스라엘은 오히려 버리고, 팔을 어긋맞게 하심)

(롬 9:13)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롬 9:15)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롬 9:16)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롬 9:18)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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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재 8 그리스도를 기다린 사람들 (누가복음 2장 21-39절)

누가복음 8공부 p32-33
교재 : 어린이 매일성경 2008년 1-2월 (고학년 4-6학년) 성서유니온

예수님이 태어난지 팔 일째 되는 날 할례를 받으면서 이름을 예수라고 지었습니다.
왜 예수 라고 지었을까요? 천사가 시켰기에

즉 인간의 생각이 개입할 수가 없었다는 뜻입니다. 마치 요한이라는 이름을 짖기 위해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정통(역사)를 깨뜨리고 그 역사적인 방식과 규칙과 법을 깨뜨리고서
이름을 지었듯이 같은 원리입니다.

자 그럼 이 이름이 어떤 역할을 하는가를 봐야 합니다.

놀랍게도 이 예수 라는 이름을 기다렸다는 자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목을 제가 그리스도를 기다린자 라고 하지 않고 예수님을 기다린자 라고 할려고 했으나 사실은 그 이름을 그들은 모릅니다.

마치 은행에서 순번표를 받기만 했지 그 순번의 내용을 모르듯이 말이죠. 그 이름을 모른채 그냥 기다린 겁니다.

자 여기서 또 기다린다는 의미가 뭔지를 먼저 살펴보면

그리스도인 이란 한마디로 말해서 예수님을 기다리는 자입니다.
예수님을 보고파 하고 예수님을 만나고파 안달이 나 있는 자입니다.

왜냐하면 보고 싶어서 기다리는 겁니다. 보고 싶지 않는 자에게는 기다림의 의미가 아무 쓸모짝도 없습니다. 오로지 기다리는 자만이 보고 싶어 합니다. 만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백날 교회 다녀도 예수님을 보고 싶거나 만나고 싶거나 기다리고픈 마음이 죽어도 없고 그저 예수님을 나의 유익에 이용할려는 마음 뿐입니다.

그래서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답답해 합니다. 아무 유익이 안되면 자기가 나서 버립니다.
자기가 나서서 행하는 자의 특징이 바로 기다리거나 보그프거나 만나고픈 마음이 없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바로 육의 생각이고
반대로 영의 생각 곧 성령의 일하심은 우리가 보기에는 답답해 미칩니다. 일을 그 따위 식으로 처리하면 안된다고 답답해 하는 겁니다.

왜 제가 이런 말을 구지 하느냐 하면 지난 주에 배운 게임과 연관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자 그럼 그들은 저절로 보고파서 기다린 것일까요? 아닙니다.

성령님이 임하였기에 기다리는 겁니다.

성령님이 임했다는 말은 인간의 마음에 성령을 소유 했다는 뜻이 아니라.
그 반대로 성령이라는 태풍의 바람이 그 사람의 마음을 싹 다 지워버리고 뚫어 버렸고 강타를 했기에 싹쓸이가 되었기에
뻥 뚫혀서 그 마음이 새로 생겨버린겁니다.
기다리고픈 마음이 없었는데 누가 기다리고픈 마음과 보고프고 만나고픈 마음을 누가 심었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소위 꽂혔다 라고들 표현 합니다. 즉 화살 과 같은 거부할수 없는 강하고 날카로운 것이 꽂혀서 뺄수가 없다는 겁니다.

거부요? 못합니다. 왜냐 태풍을 거부할 자는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기다리는 마음을 성령님이 심었는데
그 증거가 바로 상대적인 짝이 되기 때문에 기다리는 자입니다.

기다리고픔의 상대적인 의미는 바로 찾았다 찾는다 라는 의미 인데
누가 누구를 찾을까요?

바로 우리가 작년에 배운 내용을 잠시 살펴 보면

고엘의 하나님이라는 용어를 우리가 배웠는데
고엘의 뜻은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의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즉 고아 (아버지가 없는 아이)의 아버지
과부 (남편이 죽고 없는 홀로 남은 여자)의 남편
나그네 (집과 국가와 보호자인 주인 되신 임금이 없이 떠도는 떠돌이)의 임금 또는 주인

여기서 고아 과부 나그네는 이미 저주 상태이기에 어떤 것도 행할 수 없는 모든 것이 상실된 자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된 적이 없기에 행하고 나서고 새로 재혼하고 또 양아버지 새로 만들고 주인을 내가 모시면 된다고 착각을 하지만
그렇다면 그는 고아도 과부도 나그네도 된적이 없는 자인 겁니다.
자기 혼자 다 할수 있으니깐요

그러나 고아 과부 나그네는 자기 쪽에서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는 모든 것을 상실한 저주 받은자와 같은
외부에서 건져주지 아니하면 그냥 저절로 그 저주의 불 속에 다 타버리는 재와 같은
티끌과 같은 먼지와 같은 자를 두고 말합니다.

바로 이런 자들을 찾는 분이 있다고 해서 기다리는 자 라고 합니다.
찾는 자 때문에 졸지에 기다리는 자가 된 겁니다.

누구를 누가 찾는다고요?

찾는 자가 기다리는 자를 찾습니다.

즉 기다리기에 찾는게 아니라
그 반대입니다.
찾는 자가 생겼기에 기다리는 겁니다. 그것을 약속이라고 합니다.
즉 약속을 먼저 찾는 자가 했다는 겁니다.
그 약속을 듣고 기다리는 겁니다.

기다리는 자가 먼저인가? 찾는 자가 먼저 인가? 닭인가? 계란인가? 여기서 둘 다 아니다고 했습니다. 약속이 먼저입니다. 즉 피조물이 먼저가 아니라 창조주가 먼저입니다.
닭이든 계란이든 지금 이 순간 창조해 버리기에 우리의 호기심과 탐구는 의미가 없어져 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약속이 알려준 것이 바로 찾는 자가 있다는 뜻인데
이름은 모른채 그리스도 이다 구원자 이다 라는 표현으로써 약속이 되어진 겁니다.

그래서 제목을 예수님을 기다리는 자 라고 고치지 않고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자 라고 했고 그리스도 라는 약속을 기다린 겁니다.

그리스도는 이름이 아닙니다. 마치 할아버지가 이름이 아니듯이 할아버지란 아버지의 아버지 라는 뜻처럼 그리스도는 이름이 아니라 구원자 라는 뜻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 이라는 단어는 이름이 아닙니다. 하늘에 계신 단 한 분 이라는 뜻이지요. 너의 어머니 이름이 뭐니? 우리 어머니의 이름은 어머니입니다. 라고 하지 않듯이
그리스도 곧 너의 구원자 이름은 뭐니? 그리스도 요 라고 하지 않지요

이름도 모른채 기다린 겁니다. 이것은 구원자가 기다리도록 심은 마음이지
인간이 자발적으로 눈치채서 기다리고픈게 절대로 아닙니다. 이 말을 설명하고자 이렇게 길게 이야기 한 겁니다.

자 그럼 기다리도록 그리스도라고 불리우는 즉 구원자 라고 불리우는 자가 기다리도록 안달이 나 있는 상태의 마음을 심은 결과 로써 기다리게 된 겁니다.

그럼 무엇을 심었을까요? 바로 이것이 오늘 중요한 키 포인트 열쇠입니다.

기존의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은 반대로 가르칩니다. 기다리는 자가 되어라 라고 우리보고 지키고 행하고 명령어의 법을 따르라고 합니다.

그렇게 되면 억지죠 억지.

왜 제가 또 이 삐딱한 소리는 하느냐 하면 우리 교재도 이렇게 주장하거든요
우리도 안나와 시므온처럼 기다리는 자가 되자
이게 엉터리입니다.

예수님 곧 찾는 자가 기다리는 마음을 심지도 않아도 우리가 눈치채고 알아서
내가 다 알아서 해버리는 기다리는 법을 지키는 자 되는 것은
마치 불교와 같은 겁니다. 그런 종교는 사람을 다 망쳐버리는 위선자 되는 지름길입니다.

자 그런데 더 심한 억지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는 기다리는 마음이 애초부터 없기에
안기다리면 안기다릴수 없도록 만들어(창조해) 버리면 되는 겁니다.
말을 잘못 했는가? 안기다리고는 못배기도록 만들어 버립니다. 이제 이해 되죠

그게 바로 출애굽 사건입니다. 아무도 구원을 원치 않았습니다. 구원자를 부르짖는 기도를 한적도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아쉬울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무슨 구원이 필요하나요?

구원이 필요하다면 아쉬울게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일부러 물 속에 빠뜨리고
일부러 불 속에 집어 넣는 겁니다.
여호와가 구원의 하나님인지 아닌지를 알려면
무화과 나무 잎이 마르고 외양간 송아지 없고 열매 없고 식물이 그치는 그 광야 같은
심판과 같은 그 상황이 되어야 구원자가 누구인지 비로소 알게 되지
배부른데 주인이 뭐가 필요하나요? 그래서 고아 과부 나그네에게만 필요한 자가 구원자입니다.

그래서 가만히 있는 애굽 왕을 강퍅하게 만드시는 겁니다.
강퍅케 해야 주인이 새로 생깁니다.
왕이 새로 생깁니다.
아버지가 새로 생깁니다.
남편이 새로 생깁니다.
찾는 자가 새로 생깁니다. 그래서 기다리는 자입니다.

자 안나는 일부러 결혼생활 7년 밖에 안되고 나머지 인생은 과부 였다 라는 것을 강조 합니다. 그것이 바로 새남편이 그 안나를 기다리게 한 이유입니다.
안나가 믿음이 좋아서 기다린게 아니라.
남편을 없애 버리고 졸지에 과부가 되었기에
새남편이 기다리도록 만드신 것이다 라는 겁니다.

이런 이야기를 우리 학생회에서 이야기 하니 자꾸 제가 똘아이 취급 받는 이유는
분명히 말귀는 알아먹겠는데 자꾸 성경을 추잡스럽게 만드니까
찝찝해서 못견디는 겁니다. 고급 스러운 기독교를 지금껏 들어오다가
자꾸 불륜스럽고 추잡스럽고 뭔가 없어 보이고 기존에서 배워온 것의 반대방향인 빈티나는 식으로 공부를 하니까 자꾸 듣기가 싫어지는 겁니다.
지금의 모든 교육은 (학교, 사회, 종교, 세계 국가의 추세) 과거와 달라서
점점점 고급 스러워 지는데 그 반대의 방향으로 가니 답답할 노릇이지요.

아무튼 저는 이렇게 밖에 주장할 수 없는 이유는
바로 그런 예수님이 나를 찾았기에 저는 그 예수님만을 만났기에 예수님이 저에게 알려준 대로만 말할 뿐입니다.

(여기서 잠깐 추신 : 생각 난 김에
기다린다는 제목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아니다 그 반대다 라는 것을 설명할려면
내가 엄마 아빠를 사랑하는 것이 먼저가 아니라, 난 엄마는 사랑해요
그래? 너가 나를 사랑을 다 해주고 고맙다 라는 소리를 엄마가 했다면
야 내가 엄마를 사랑해주지 않으면 안되는 구나 라고 생각하면 그 친구는 사랑이 뭔지를 모르는 자입니다.
그 반대죠. 엄마가 나를 사랑했기에 내가 사랑하게 된 겁니다. 엄마나 나를 사랑해 주지 않으면 나에게는 사랑이 나올수가 없습니다. 이제 제 말의 취지를 아시겠나요?)

만약에 내가 예수님을 찾아내어서 눈치채고 알아내어서 기다린다면
이 교재와 똑같이 주장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반대입니다.

그리고 안나 뿐만 아니라. 시므온 선지자도 나그네로써 이제야 눈을 감을 수 있다 라고 안식의 주인이 졸지에 생기는 바람에 나그네가 외치는 겁니다.

(눅 2:26) 『저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눅 2:27)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전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눅 2:28)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눅 2:29)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눅 2:30)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눅 2:31)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눅 2:32)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

이방인(나그네 곧 소경된 자)에게 비추이는 빛 곧 주인이 생겼고 임금 왕 보호자가 생겨버린 겁니다. 그렇게 되면 이제 백성이 되고 나랏님의 다스림을 받는 통치를 기다리는 기다리는자가 된 거죠. 즉 그 전에는 그 반대였다는 겁니다.

그래서 기다리는 자는 지 혼자 기다림을 지켰다 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자는 정신병자입니다. 종교가 그렇게 정신병자로 만듭니다. 지 혼자 기다림을 지켜본들 무슨 소용 있나요?

즉 주인은 여전히 자기 자신인데, 왕이 필요 없는 자인데 기다림을 지켰다 명령어를 지켰다 이게 무슨 소용이 있냐 말이죠

결국 시므온 선지자는 나그네 로써 주인을 증거 합니다. 이 아기를 보고 나의 주인이다. 나의 왕이다. 나의 아버지다 라고 외치는 겁니다. 마치 지난 주 게임처럼 눈가리운 자에게 날 구원해 주세요 날 인도해 주세요 라고 하는 것과 같아요. 우리는 반대의 생각인데 말이죠
남들이 보기에는 이상한 겁니다. 마리아와 요셉도 기이히 여기죠

다음 시간에 공부할 유명한 이야기 예수님의 소년 시절의 교회성전에서 아이를 잃어버린 사건인데 바로 누가 고아의 아버지 인가? 라는 문제입니다.

즉 안나 라는 과부의 남편, 시므온 이라는 나그네의 주인인 나랏님
그리고 잃어버린 고아된 예수님의 아버지 (친히 잃어버림을 통해서 고아됨을 통해서 어버지가 누구신가를 보여줌)

이것을 누가복음 2장으로 말씀을 채우고 있습니다.

즉 우리는 아무것도 기다리지 않는다는 것을 지적해 주고
아무도 보고 싶어 하지 않는 다는 것을 들추어 주시고
아무도 만나고 싶어 하지 않는 다는 것을 푹 찔러 주셔서

이런 나를 물에 빠뜨려서 죽여서 새롭게 만들어서
그 새로운 마음 정직한 마음인 신령과 진정을 심으셔서

애타게 기다리고 있고
너무 너무 보고 싶어 하고
빨리 빨리 만나고픈 마음을 심고자 이 말씀을 우리에게 하시는 겁니다.

누굴 기다리고? 누굴 보고 싶어 하고? 누굴 만나고파 만드시는 것일까요?

물에 빠져 봐야 그 마음이 생기는 겁니다. 그래서 빠뜨리죠. 누가? 바로 구원자 예수님.

이것이 바로 기뻐 하심을 입은 자 뚫혀버림을 당한자입니다. 그렇기에 기다리는 겁니다.
죄인은 구원자를 애타게 기다리고, 환자는 의사를 애타게 기다리듯이 말이죠
그래서 죄인을 만드시는 겁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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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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