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강 막힌 것을 뚫는 십자가(희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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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뚫는 기쁜소식(은혜의 해=희년) (학부모용)



(눅 4: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눅 4:19)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그냥 포로됨에서 자유 가 아니라

그냥 눈이 먼것에 다시보게함이 아니라

그냥 눌린 것에서 자유케 함이 아니라.

반드시 포로됨의 내용물, 눈이 먼것의 내용물, 눌린 것의 내용물을

십자가의 사랑(은혜의 해)이라는 송곳에 꼬챙이 처럼 그 뚫혀진 내용물을 주렁 주렁 달아서

지유와 다시보게함과 놓이게 된 해방됨을 증거한다.

그 내용물이 바로 우리 곧 주님의 자녀다. 우리가 뚫혀진 꼬챙이에 매달린 모습이다. 그것이 기쁜소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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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재 6 구원의 뿔 (눅 1:67-80))
뿔 (해방자) 뭐든지 다 뚫어버림 안 뚫혀버리는 것이 없음 - 희년 (하박국)
여리고성도 뚫어버리고 죄도 뚫어버림 - 포로됨을 뚫어버림 포로가 되어야 뚫는자를 봄


교재 5 요한이 태어났어요 (눅 1: 57-66)
누가 복음 5, 6공부. p24-25 p26-27
교재 : 어린이 매일성경 2008년 1-2월 (고학년 4-6학년) 성서유니온


오늘은 교재 5, 6번입니다.

사람은 저마다 이름이 있습니다. 그 이름은 곧 그 사람의 운명을 말해주기도 합니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이름을 좋게 할려고 하고 또 중간에 바꾸기도 합니다.
왜? 운명이 뒤 바뀌어 지니까

그런데 오늘 요한의 이름을 두고 사람들과 서로 충돌하게 됩니다.

먼저 성경은 항상 인간들의 행위들을 언급하고 난 뒤에 항상 그 정반대가 되는 주님의 행하심을 대비시킵니다.

그래서 엘리사벳이 아이를 낳으니 이웃과 친족들이 외치기를
주께서 저를 크게 긍휼히 여겨심을 듣고 함께 즐거워 했습니다.
여기서 긍휼히 여긴다는 뜻은 불쌍히 여겨서 용서해 주었다는 겁니다.
무엇을 용서했을까요? 불임여성이라는 것이 여자에게서는 일종의 저주입니다.
그 저주를 풀어 주었다는 뜻입니다.
그 은혜에 사람들은 눈으로 확인하고 복받았구나 라고 즉 그 전에는 아이에 대한 복이 없었다는 뜻이였고 이제는 복받았다고 누가 봐도 즐거워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팔일이 되니 아이를 할례하러 왔는데 친족들이 다들 아버지의 이름을 따라 사가랴 라고 이름을 짖고자 했습니다.

엘리사벳은 아니다 요한이라고 할 것이다 라고 하니 친족들이 요한이라는 이름은 우리 가문에는 없다 라고 합니다. 소위 다 이유가 있어서 이름 속에 가문의 영광을 집어넣고 돌림자를 넣듯이 그렇게 지었다는 뜻입니다. 결국 집안 가문의 뜻을 따라서 이름을 정하고 그 가문의 운명을 뒤 따른다는 의미인거지요.

그래서 친족들이 그럼 아이의 아빠인 사가랴 제사장에게 물어보자 라고 하니
사가랴 제사장이 호종이 말대로 연필과 종이를 달라고 하여서 이름을 적는데 요한이라고 적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모두 깜짝 놀라고 이상하게 여기게 되는 이유는 사가랴의 제사장 입이 열려서 말을 하게 되니 하나님을 찬양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그 찬양을 내용을 듣고 다들 마음에 두고 이 아이가 장차 어떻게 될까 라고 생각하면서 이 소문이 온 동네 다 퍼지면서 다들 두려워했습니다.

무엇 때문에 두려워 했을까요? 찬양의 내용 때문입니다. 그 찬양의 내용은 이겁니다.

교재 26-27 쪽의 6과 내용입니다.

사가랴의 찬양은 곧 성령 충만하여 외치는 예언입니다. 눅 1:68-80

68 주님을 찬양하라 주께서 백성에게 찾아와서 저희 죄에서 구원하시고 해방시키셨도다.(희년)
69 그 해방자가 바로 다윗의 집에서 나실 우리를 위하여 일으키실(보내실) 구원의 뿔(힘)이다.

(시 18:2)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70 선지자의 예언대로
71 우리 원수에게서와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구원하시는 구원이라
72 우리 조상을 긍휼히 여기시며 그 거룩한 언약을 기억하셨으니
(눅 1:73) 『곧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 맹세하신 맹세라』
(눅 1:74) 『우리로 원수의 손에서 건지심을 입고』
(눅 1:75) 『종신토록 주의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섬기게 하리라 하셨도다』
(눅 1:76) 『이 아이여 네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라 일컬음을 받고 주 앞에 앞서 가서 그 길을 예비하여』
(눅 1:77) 『주의 백성에게 그 죄 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하리니』
(눅 1:78) 『이는 우리 하나님의 긍휼을 인함이라 이로써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눅 1:79) 『어두움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취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 하니라』
(눅 1:80)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 들에 있으니라』

자 왜 놀라고 두려워 했을까요? 이름 때문입니다.

즉 이 이름 때문에 사가랴 제사장이 입이 열리게 되는데
이름에는 가문의 영광이 담겨져야 하는데 이 이름은 그 반대입니다.
주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서 모든 인간의 이름을 물에 빠뜨려야 하는 이름이기 때문입니다.즉 요한이라는 이름이 중요하다는 말인가요? 예수님이 가시는 길이 중요하다는 건가요? 아니면 친족들이 말하는 가문의 영광이 중요하다는 건가요?

예수님이 가시는 길, 주의 길이 중요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가랴의 제사장의 찬양은 곧 마리아의 찬양과 같은 전쟁 요청입니다. 원수가 등장하고 그 원수와 전쟁을 벌리는 구원자가 등장하며 그 구원자의 전쟁으로 인해서 언약이 성취 되는 일에 세례요한이 딱 걸려들었다는 겁니다.

이 전쟁을 세례요한이 뿌뿌뿌 라고 외치는 겁니다. 주의 길을 예비하면서 뿌뿌뿌
자 뿌뿌뿌 라고 하니 무엇이 기억이 나나요? 우석이가 잘 맞추었네요
가나안 전쟁의 여리고성 전쟁이지요 뿌뿌뿌 라고 나팔을 부르니 그냥 무너지는 겁니다.

그냥 뿌뿌뿌 하는게 아니라 반드시 나는 죄인입니다. 나는 광야에서 원망만 했는데 주님은 나를 용서하시기 위해서 피를 흘렸습니다 라고 어깨에 무엇을 맨다? 법궤=언약궤=증거궤

즉 3가지 원망한 증거 깨어진 십계명 두돌판 아론의 싹난 지팡이 만나를 담은 항아리
그 원망의 3가지 증거를 안에 담고 뚜껑을 덮어서 무엇을 뿌린다? 피를 뿌리지요 그래서 용서 받는 겁니다. 죄에서 해방 되었다 라고 외치는 겁니다. 뿌뿌뿌

나는 죄인입니다. 광야에서 원망만 했는데 이런 죄의 증거를 피로써 덮으셨군요 라고 회개를 하면서 뺑뺑이 돌지요 하루에 한 바퀴식 6일 동안 그리고 7일째는 7번 돌아서 13번 돌고 뿌뿌뿌 즉 회개를 하니까 여리고성이 무너지는 겁니다. 뿌뿌뿌

세례요한이 바로 이 역할을 하는 겁니다. 회개케 하는 일로써 사람들을 죄인만들기를 하는 겁니다. 죄인이 안되면 구원자가 필요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요한이라는 아기의 이름을 예수님과 상관이 없는 이름을 지어서 육의 생각을 계속 계속 이어 갈려고 합니다. 아이가 잘 자라서 영웅이 된다든지 복을 받은 자가 된다든지 그런 이름들 말이지요

그런데 회개케 하는 주의 길을 예비하는 뿌뿌뿌 이름을 지으니까 다들 두려워 떠는 겁니다.
육이 개입을 할 수가 없는 영의 일이 벌어지는 겁니다.

자 왜 이런 이야기가 누가복음에 초반에 나오냐 하면 예수님의 탄생에 반드시 육의 개입을 일체 다 빼버리기 위함입니다. 마치 할례처럼 말이지요 단절입니다.

인간이 보태거나 도움이 되어서 예수님의 탄생이 연결이 되는게 일체 없는 모든 접촉점을 다 차단 단절 분리 되어서 태어나는 영의 일로서만 예수님이 태어나는 겁니다. 그 상대적인 인간의 일은 다 단절되기에 하등 도움이나 개입이 일체 없다는 겁니다.

이 일에 세례요한이 동원되는 겁니다. 할례란 육의 통로, 육의 개입, 행함을 철저하게 차단하고 영이 홀로 일을 다 처리하는 겁니다. 그래서 요한은 세례를 통해서 모든 인간을 불뱀 물려서 죽게된 죄인이라는 것을 환자라는 것을 물에 빠져 죽게된 자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모든 인간들을 물에 빠뜨리는 겁니다 그래야 구원자가 누구인지를 보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요한이 태어남 조차도 사가랴의 찬양 조차도 모두 육의 차단입니다.
행함이 일체 없다는 겁니다.

결국 앞으로의 세례요한이 하는 일은 곧 주의 길을 예비하는데 우리가 생각하는 좋은 의미가 아니라 그 반대로 우리가 싫어하는 방식으로만(육의 차단=성령의 일) 골라 골라서 (마치 광야에서 원망할 수밖에 없는 길로만 인도하듯) 모든 육을 거부하는 할례 곧 끊어버리는 일을 합니다.

여기서 잃어버림을 아는자, 끊쳐짐을 아는 자, 죄인임을 아는자(하나님과 끊어졌다는 것을 아는자, 철저한 단절), 심판받아야함을 아는 자, 마땅히 죽어도 지옥가도 상관 없음을 아는 자 가 나타나고 (왜? 예수님을 제대로 봤기에, 심판의 주)

그 반대로 선택받아야 한다는 자, 구원 받아야만 한다는 자, 내가 의인이다는 하는 자, 마땅히 천국가고 다시 살아나 부활 받아야 한다는 자 (왜? 예수님을 믿었기에 구원 준다고 해서, 구원의 주를 믿었기에)

그런데 이제 앞으로의 예수님이 이 둘을 가려내는데 팔을 어긋맞게 축복과 저주를 하듯이 역전이 일어나는 겁니다. 지옥가도 마땅한 죄인임을 아는 자와 천국 마땅히 가야할 구원받은 복받은 자로 두 패로 쭈욱 나누시는 겁니다.

그런데 지금 누가복음에서 그 대상이 누구다고요? 이방인입니다. 그러니 이미 정해놓고 가는 겁니다. 그럼 요한이 하는 일은 왜 이 분인가? 라는 것을 증거하는 겁니다.

그 분이 누구인가를 보기 위해서 물 속에서 보자 라는 겁니다. 심판 속에서 보자, 지옥 속에서 보자, 잃어버림 속에서 보자, 끊쳐짐을 당하는 속에서 보자, 지독한 미움을 받음 속에서 보자 라고 합니다. 그래야 누구인지 왜 그 분인지 안다는 겁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은 보라 세상 죄 지고 가는 어린양을 보라 라고 합니다.
그 어린양이 누구이고 왜 죄를 지셔야만 하는 가를 보게 되는 겁니다.

아무 죄가 없는데 말이죠. 왜 죄의 저주라는 심판을 받고 사형수가 당하는 십자가의 형벌을 받아야만 하는가? 그 이유는 내가 물 속에 빠져 있기에 내가 내 죄에서 빠져나올수 없기에 지옥에서 심판 속에서 빠져 나올수 없기에 나를 건지고 대신 지옥으로 빠져버리시는 겁니다. 그래야 그 차이가 확연하게 드러나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구원을 딸랑 소유하고 치워버리는 겁니다. 어차피 예수는 다시 부활 할것이라는 계산을 미리 하기에 그 부활도 소유가 되는 거죠. 그럼 구원의 정당성을 빼도박도 못하게 알리바이를 형성해서 나중에 딴소리 못하도록 성화를 말씀을 지키기를 통해서 예수도 나를 구원 하지 않으면 안될걸 이라는 사랑을 자기 쪽에서 추구해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다 차단하는 이유가 주님 쪽에서만 사랑을 출발하시는 겁니다. 여기에 동원되는 것이 바로 요한인 거죠. 정작 지독한 미움과 마땅한 저주의 죽음을 물 속에서 느껴라 라는 겁니다. 광야 속에서 느껴라 라는 겁니다. 느껴보면 아 맞구나 백번 지옥가도 마땅함을 비로소 아는 겁니다. 왜 광야에서 원망만 했기에 그래서 회개가 나옵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라고

우리는 착각을 하기를 죄인이라는 고백을 맘만 먹으면 할수 있다 회개를 맘만 먹으면 할수 있다고 여기는데 천만의 말씀입니다. 죄인이라는 고백은 광야에서 철저하게 직접적으로 하나님을 원망을 했다는 증거가 확보 되고 그 위에 피가 뿌려져야 나오는 겁니다.

그것도 없이 회개를 어떻게 한다는 겁니까? 그래서 요한은 회개케 하기 위해서 광야 속으로 다 빠뜨리는 겁니다.

왜 이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교회 안에서 우리는 나를 알아달라 라는 짓 외에는 할줄을 모릅니다. 저도 마찬가지이구요 그저 날 인정해 줘 사랑해줘 라는 땅거지 같은 앵벌이와 같습니다. 그래서 역시 마찬가지인 되도 않는 인간을 교회에서 말씀을 증거토록 합니다. 그것이 바로 목사요 교사입니다. 그런데 목사와 교사 본인들이 또 날 알아달라고 외칩니다. 그 모습을 보면 역겹지요. 그러나 정작 목사와 교사가 되어 보시면 역겨운 짓만 골라서 합니다. 그렇기에 죄만 나온다는 것을 보고 아 그래서 예수님은 다르구나 라는 차이성을 보게 되는 겁니다. 목사와 교사는 결국 왜 우리가 끊쳐져야만 하는가를 포로된 자인가를 알려주고 구원자가 왜 예수님이고 왜 버림을 받는가를 말해야 하는 겁니다. 그것을 안 하면 예수님이 하십니다. 여러분도 누구에게 예수님에 대해서 알려줄때에 바로 남이 아닌 나 자신과 예수님의 차이성을 알려주는 겁니다. 그 차이성을 세례요한은 증거하는 겁니다.

(세례란 할례의 의미이기도 하지만 연합이라는 하나됨을 말한다. 그러나 세례의 의미를 알려면 정작 철저하게 분리되고 극과 극으로 단절 끊쳐짐 즉 도저히 하나가 되지 못하는 철저한 멀어짐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할례 곧 수치를 굴러가게 하는 내 스스로가 죄를 해결하고 죄를 가리우고자 하는 모든 행함을 무용지물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무화과나뭇잎은 소용이 없다. 그 수치를 대신 당하는 자 곧 그 수치는 십자가 이다. 그 수치에 뛰어드는 자 내 수치를 끊어서 굴러가게 하고 대신 내 수치를 대신 당하는 자 그래서 요한은 주의길을 예비하는데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 곧 제물 될 자 내 수치 내 죄 때문에 대신 제물 될 자. 대신 저주 받을 자. 곧 어린양의 살과 피가 나의 수치를 멀리 멀리 굴러가게 한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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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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