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희년(복음)을 싫어하는 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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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재 p42-43 환영받지 못한 예수님 (누가복음 4장 14-30절)

어린이 매일성경 2008년 1-2월 (고학년 4-6학년)
성서유니온 http://www.su.or.kr 1월 13일 날짜 QT

은혜의 날(희년)을 원치 않는 어두움의 실체

간만에 제목이 참 마음에 듭니다. 교재책에서 난데 없는 희년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을 다루면서 [환영받지 못한 예수님] 이라는 제목을 다는 것이 앞뒤가 잘 안 맞지만 어쨌든 왜 그런 제목을 붙였는지를 교재를 통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또 지난 시간에 마귀가 심은 메시야관은 자기를 위한 임금삼기로 일관합니다. 이것은 구약의 큰 주제이기도 합니다. 정치(임금) 경제(먹는문제) 종교(축복 선택 편애)는 구약에서 나타난 마귀가 심은 인간들의 가장 큰 숙제요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그 문제를 푼 적도 없고 해결조차도 못했고, 도리어 주님이 심은 편애자를 중심으로해서 들추임을 당하고 거기에 대한 반응을 늦게나마 눈뜨고 거기에 대한 집착과 살인과 죄성이 도리어 유발케 되는 식으로 전개됩니다. 다시말해서 편애가 없다면 미움도 없습니다. 편애가 있음으로 인해서 미움도 자연발생이 되고 그 편애를 부각하는데 있어서 미움이 자연스럽게 반응하는 겁니다. 이것은 마치 빛이 있으면 어두움이 동원되어서 그 차이성을 드러내는 것과 같습니다.

자 그래서 지난 시간에 두 번째 시험까지 했는데 사실상 마지막 시험인 이 편애의 문제인 종교문제는 누가 복 받은자 인가 라는 문제입니다. 결국 자기 스스로 복받지 않고 저주 받아 마땅한 인간이다 라고 할 자는 아무도 없음을 밝혀 내는 것이 이 마지막 3번째 시험을 통한 마귀의 정체 들추기입니다.

예를들면 다윗이 이스라엘 왕이 되었다는 것이 마치 자신이 율법을 잘 지키고 자신이 나쁜점이 없는 거룩한 자이기에 되었다 라는 것이 아니다 라는 것을 의도적으로 주님은 까발려보시는 겁니다. 그래서 궁전 중앙에 마침 밧세바가 목욕하는 모습을 눈에 띄이도록 하시는 거죠. 이렇게 되면 마치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과 나무의 모습과 같은 양상이 되는 겁니다.

자 그럼 생명의 나무는 바로 이 선악과 나무의 차이성으로써 증거 되는 겁니다. 결국 다윗은 타국의 왕들이 지적받지 않고 마음대로 해도 아무도 시비 걸지 않는 그 위치임에도 불구하고 간선하시고 따지시고 매를 대시고 나무래시는 여호와 하나님과의 관계성인 사랑을 주님 스스로가 이렇게 죄를 유발케 해서 증거하시는 겁니다. 어떻게? 차이성으로 말이죠.

그러나 우리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어서 마귀가 심은 메시아관에 의하면 그런 하나님이 아니라(죄를 유발케 하는) 내가 율법을 지켜서 거룩하시고 선하신 하나님에 가까운 거룩함을 행하고 지킴으로써 하나님과의 일치성을 추구하는 거룩해질려고픈 욕망을 추구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모든 조건들이 성경의 명령어도 그러하고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 레 11:45 / 벧전 1:16) 인간의 양심도 그러하고 모든 인간의 사고방식도 이러하고 심지어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과 같이 되었기에 모든 학문 모든 종교 모든 진리도 다 이러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아니다 라고 태클을 걸고 나서시는 분이 있는데 예수님 뿐이다는 겁니다. 즉 예수님만이 마귀의 정체를 알려주시고 죄를 해결할 자인데, 인간이 율법을 지켜서 또는 명령어를 지켜서 죄를 해결할 길이 있다고 하는 것은 마귀에게 심겨진 생각이라는 것을 예수님이 밝히시는 겁니다. 그 밝히시는 일에 다윗이 걸려듭니다.

다윗은 모든 인간이 생각하듯이 자기가 선택받은자로써 당연히 율법을 사수하고 지키고 유지하였고 그것이 자신이 선택받았기에 자신의 숙제요 자신이 믿는 하나님의 생각과 일치하다고 여긴 겁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다윗의 생각을 박살내고 깨뜨리시는 겁니다. 어떻게? 편애가 아니라, 지독한 미움으로써 증거하십니다. 너 그런 생각을 해? 오냐 너 한번 지독한 미움을 받아봐라 라고 한순간에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라고 밧세바를 취하지 않으면 안되도록 궁전 중앙에 목욕하도록 했고 결국은 취하도록 하고 그것이 발단이 되어서 우리야 장군을 죽도록 고의적으로 살인 계획을 아주 아주 거룩하게 자신의 손 하나 안까닥거리고 더 잔인하게 죽이도록 모함하고(반드시 왕의 권력이 동원됨 - 왕 체제) 그로인한 죄의 자각으로 인한 회개를 주님은 의도적으로 회개와 금식을 거부하시고 도리어 죄책감을 더 가중하도록 아이를 살리시는 것이 아니라 죽여버리시는 겁니다.
(여기서 죄 문제를 왜 잉태하고 낳고 장성이라는 마치 그 반대인 생명의 의미를 다루듯이 표현했는가? 정작 생명이 잉태 낳고 장성이라는 것이 딱 어울리는데 말이다. 이것은 죄 또한 생명처럼 외부에서 덮쳐진 외부의 문제라는 것이다. 생명을 인간의 자기 행동의 여부로써 달린 문제로 보는 착각을 심지어 여성의 임신이나 아기 태어남이 여성의 자기 하기나름에 달렸다는 문제가 전혀 일체 없는 다 외부의 문제로써 벌어진 사건이라는 것이다. 마치 죄의 소원처럼)

왜 죽여야만 하는가? 다윗 속에 있는 마귀가 심은 하나님을 박살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예수님을 하나님 아버지께서 버리시는 이유입니다.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다윗은 비로소 아이의 죽음, 우리야 장군의 죽음, 밧세바의 인생을 짖밟아 버림을 통해서 자신과 아주 멀게 여겨졌던 죄가 바로 코 앞에 있었음을 새로 인식하게 됩니다. 아니 자기 자신이 죄덩어리가 되어서 여호와의 눈 앞에서 뻔히 다 밝혀질 일임이 눈보듯 뻔한데도 불구하고 여호와의 눈 앞에서 벌어졌다는 것입니다. 이제 다윗은 죄의 근원을 찾습니다. 그것은 놀랍게도 자신이 아니라 자신 속에 다른 자신임을 알게 된 겁니다.

(롬 7:21)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롬 7:22)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롬 7: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롬 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주님이 창조한 적 없는 선악의 법을 아는 악마가 내 속에 있다는 것을 알고

그 악마가 율법을 지키고 사수하고 그런 자신을 철두철미하게 방어하고 챙길려는 그 모습을 비로소 보게 됩니다. 아니 보게 됨을 당합니다. 누가 보이도록 불(심판과 저주) 속에 뛰어 든 겁니다. 누가요? 밧세바와 우리야와 이름도 없는 아기입니다. 선악과를 따먹고 눈이 밝아진 자신의 수치를 자기 스스로 가릴려고 했던 것이 바로 율법 지키기 구원 챙기기 그 율법으로 행하는 판결 재판하기 라는 것을 다 박살내고, 정작 그런 무화과 나뭇잎은 소용없고, 내 스스로가 수치를 가리는 것이 아니라. 그런 수치는 들추어 내고 정작 피로 가리우는 피옷을 입히시는 겁니다. 그렇기에 무화과 나뭇잎이 벌거벗겨지는 과정과 또 피옷을 입히기 위해서 희생의 피를 유발케 하는 어리석은 지혜와 결합케 하여서

곤고함 뿐인 (창조물이 아닌 괴물) 인간을 새로 창조하시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안에 있는 결코 정죄함이 없는 새피조물이 된자입니다.

결국 다윗은 자기 스스로 끌어들여서 지킨 율법과 이스라엘 왕다움 이런것들은 자기 죄를 해결하는데 일체 도움이 된게 아니라 도리어 더더욱 자기 죄를 가리우고 그 수치를 더더욱 감추기 위해서 동원된 주객이 거꾸로 된 모습이다는 것을

외부에서 다가온 피옷을 통해서 알게 되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할례의 의미입니다.
할례를 지켜서 할례가 아니라, 바로 그런 사고방식을 끊어버려서 할례입니다. 즉 육의 사고방식 (선악과 사고방식)을 영의 사고방식 (십자가 사고방식) 으로 교체 당하는 겁니다.

그래서 다윗은 비로소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사함을 받는 자가 행복하다 라고 믿음의 의미를 새롭게 조명하고 아브라함도 새롭게 보게 된 겁니다. 아브라함 자체에서는 믿음이 없다 라는 것을 제대로 본 겁니다. 여기에 사도바울도 자신도 같은 입장이 되어 보니 다윗의 고백과 아브라함의 고백이 다 예수님께서 교체시켜서 나온 결과임을 보게 된 겁니다. 이것이 바로 할례입니다. 즉 예수님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할례인데, 예수님 없이도 할례라는 규정을 지키면 할례가 되는 줄로 착각한 겁니다. 마음판의 할례도 예수님 없이도 가능하다고 본 거죠. 그러나 예수님이 아니면 마음판의 할례 개념도 해석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지금 바울은 말하고 있는 겁니다. 왜냐? 무화과 나뭇잎을 벗기고 입히실 가줏옷은 예수님이 흘리신 피 외에는 없거든요.

자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서

이 희년의 완성도 예수님 외에는 감당할 자가 없습니다.
그런데 참 재미 있게도
희년을 인간 쪽에서 이미 자기들 방식으로 벌리고 있는 자들이 있는데 바로 바리새인입니다.
자 그럼 우리는 누가 진짜 희년 완성자이고 누가 가짜로 희년을 흉내 내는 자 인지를
비교와 대조와 차이성으로써 발견하도록 성경이 우리에게 배려를 해 줌과 동시에 우리 또한
마귀가 심은 죄를 지적받게 하시는 말씀의 운동력에 찔림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왜 환영받지 못한 예수님인가 라는 제목을 달았는고 하니 희년을 완성하러 오신 예수님을 인간이 환영하기는커녕 오히려 가장 적대시 하고 가장 적극적으로 방해하고 쫏아내는 방식으로써 예수님은 일하신다는 겁니다.

이유는 딱하나입니다. 이미 아쉬울 것이 없는 마귀가 심은 희년이 그들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선포하는 희년은 그들에게서는 위기로 닥치고 경쟁 상대가 되면서 반드시 배척을 해야하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참 재미있게도 그들이 그런 생각을 하기도 전에 이미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그런 마음을 심어버립니다. 그리고 반드시 예수님을 배척할 수 밖에 없도록 미움 받는 말만 골라서 합니다. 그렇게해서 예수님이 말하는 희년과 유대사회에서 이미 구축화된 희년사상을 대조하고 비교하여서 그 차성을 드러내어 우리에게 누가 진짜냐? (마치 성전을 헐라 누가 다시 사흘만에 세워지는지 보자 라고 너무 너무 당당하게 시비걸고 오시는 것처럼) 라고 보이지 않는 마귀의 정체를 드러내시듯이 일하시고 그 마귀와 인간이 합세하여서 그 당시 유대교이든지 로마국가체제라든지 모든 보이는 것들이 예수님을 일제히 거부할 수밖에 없는 어두움의 실체와 결부가 된 것을 증거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회당에서 이사야 예언의 글을 읽으시면서 희년을 선포하십니다.

(눅 4:17)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한 데를 찾으시니 곧』
(눅 4: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눅 4:19)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그리고 느닷없이 일방적으로 이런 이야기를 하심으로써 사람들이 반드시 반응토록 만드십니다.

(눅 4:21) 『이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이 말에 도저히 화가 나지 않을 자가 없도록 하신 겁니다.
왜냐하면 선지자도 아닌 주제에 그저 평범한 한 인간 주제에 희년의 완성을 말하는 마치 자신이 하나님과 동등 된자인 것처럼 말하니 기가막힌 겁니다.

그래서 너는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라고 물을 수밖에 없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미리 그들 속에 떠도는 속담을 언급하시면서

너희는 [희년 완성 웃끼고 있네? 너나 완성하셔? 너나 고치셔? 너가 의사라매? 너나 잘하세요, 너 정신병이나 고쳐라 고쳐, 고쳐봐 고쳐 고쳐보라니깐] 라고 너희가 비아냥 거리고

또 가버나움에서 행했던 수많은 기적들 여기서도 한번 해 보시지 그래? (마치 마귀의 3번째 시험처럼-종교)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을 받는 자가 없고 또 엘리야 선지자는 많은 과부가 아닌 오직 한사람 시동 땅의 사렙다 과부 에게만 보내심을 받았고

선지자 엘리사는 이스라엘에 많은 문둥병자가 있었지만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 에게만 깨끗함을 얻도록 하였다

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즉 이 말은 그 때나(엘리야 때 엘리사 때) 지금이나 (이 말이 너희 귀에 응했다고 하신 때) 그리고 현재 (이글을 쓰고 있는 2008년도의 현재상황)이나 똑같이

보내심을 받지 않는 자에게는 도저히 알수 없는 이 이사야의 예언이 응했다 라고 하시는 겁니다. 즉 가르겠다 라는 것이 바로 희년의 취지입니다. 두 패로 뚫어버리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선지자가 하는 일이다는 겁니다. 즉 편애 받은 자는 많은 과부 중에 한 과부 뿐, 많은 문둥병자 중에 한 문둥병자 뿐이고, 나머지는 다 지독한 미움을 심어버리겠다 라는 뜻입니다.
(마 11:27)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자 드디어 이 말을 듣고 화를 본격적으로 내기 시작합니다.

마치 아벨의 제사를 열납하시는 원리처럼 아벨의 제사만을 받고 (한 과부, 한 문둥병자)
나머지 모든 제사를 받지 않는 것처럼 (나머지 모든 과부, 나머지 모든 문둥병자)

그러니 안색이 변하지 않고는 못 배기도록
편애를 통해서 유발케 하시는 겁니다.

즉 희년은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그 포로된 자를 통해서 가짜 자유를 다 뚫어버리고
눈먼 소경을 통해서 진짜 소경을 다 수시는 전쟁을 벌리고
눌린자를 통해서 마귀 안 걸렸다 라고 우기는 자는 다 마귀 걸리도록 심어버리시는 겁니다.

이 한 과부, 한 문둥병자를 통해서
마귀의 세계를 들추어내시는 겁니다.
정작 마귀의 세계에 속한 자들이 화를 내고
적극적으로 방해하는 아주 간단하게 이 편애받은자에게 향하는 저들의 화냄(미움)을 통해서
그 근원인 예수님을 지독하게 미워할 수 밖에 없도록 하시는 겁니다.

(요 7:7)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못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행사를 악하다 증거함이라』

즉 예수님이 그들의 행사를 악하다 라고 증거했기에
그 실체가 드러난 이상 그들은 반드시 예수님을 미워하고
또 예수님이 편애한 자를 반드시 미워하도록 되어 있다 라는 것을 예수님께서
지금 새로운 상황으로써 무대를 꾸며가시고 창작해 가시는 겁니다.

이들의 속내가 어느 정도인지

유일하게 이 부분에서 가장 적나라하게 증거 됩니다.

예수님을 동네 밖으로 쫏아내고 (여기까지는 보통 그래해 왔던 모습이지만)
그 동네가 만든 산언덕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내리치고자 했다 라고 기록 합니다.

그리고 그 무리들의 중앙을 예수님이 가르시고 지나가십니다.

자 이렇게 해서 가버나움과 같은 (눅 10: 8-24)

(눅 10:12)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저 날에 소돔이 그 동네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눅 10:13)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면 저희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눅 10:14) 『심판 때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눅 10:15)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눅 10:16) 『너희 말을 듣는 자는 곧 내 말을 듣는 것이요 너희를 저버리는 자는 곧 나를 저버리는 것이요 나를 저버리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저버리는 것이라 하시니라』

듣기는 들어도 알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는

(마 13:14)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마 13:15)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 함이라 하였느니라』
(마 13:16)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편애와 미움을 가르시는 그 이사야의 예언인 희년이 응했음을
역으로 선지자를 죽이는 모습을 통해서 증거하십니다.
이런 어리석은 지혜가 인간의 지혜보다 인간이 요구하는 기적보다
훨씬 뛰어난 십자가의 지혜이다 라는 것을악마의 실체를 들추어내시면서
어두움과 빛의 대조로 나누시는 것이 바로
거룩완성입니다.

우리 속의 죄를 끄집어 내지 못하는 사랑은 사랑도 아닙니다.

죄를 해결도 못하고 눈에 보이는 성전과 율법 속에 감추어 둔다고 죄가 해결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비록 소경이어도, 문둥병자 이어도 , 비록 과부, 세리, 창기, 강도 이어도
주님 한 분만이 옳았다면 그것으로 족한 것이 바로 희년의 대상인 자유케 된 자입니다.

그러나 정작 자유를 자기 쪽으로 챙길려고 한 자는
모든 것을 지키고 행해도
예수님의 나를 죄인 만드심의 어리석은 십자가의 지혜에
철저하게 화내고 거부하고 안색을 붉히는
자신이 행했다고 내세우는 것인 자기 제사 때문에
주님이 드리는 제사를 미워하고 싫어하는 마귀가 심은 것에 의해서

이 모든 것이 주님의 소원대로만 되어 간다는 것을
그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
누구는 긍휼의 그릇 누구는 진노의 그릇으로
편애와 미움을 심는다는 것을

예수님을 기준으로 해서 더욱 더 또렷하게 구분되고 차이나게 드러내는
가르시는 일이 바로 주님의 희년의 완성임을 우리가 알게 되는 겁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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