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3. 보호자(배후 세력을 들추어 내는) 싸움: 영의 일 

원수됨을 신체에 담는 영의 일

http://media.woorich.net/passofday/passofday080628luk23.mp3

(눅 6:22, 개역) 『인자를 인하여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눅 6:23, 개역)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저희 조상들이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눅 6:24, 개역) 『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눅 6:25, 개역) 『화 있을진저 너희 이제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진저 너희 이제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눅 6:26, 개역)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저희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눅 6:27, 개역)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눅 6:28, 개역)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교재 p56-63 원수를 사랑해요 (누가복음 6장 12-49절)

어린이 매일성경 2008년 1-2월 (고학년 4-6학년)
성서유니온 http://www.su.or.kr 1월 19-21일 날짜 QT

원수됨을 신체에 담는 영의 일

보호자(배후 세력을 들추어 내는) 싸움



오늘은 제가 글작성을 하는 것을 잊어버리고 먼저 성경만 보고 공부내용을 녹음해 버렸습니다. 녹음 뒤에 글을 작성하는 것이라서 교재를 보고 글을 쓸까 합니다.

녹음 내용은 녹음된 내용 대로 따로 들으시고

같은 의미에서 가급적이면 교재내용과 연결할려고 합니다.

먼저 19일자 20일자 21일자 교재 내용인데
19일자는 예수님이 12제자를 부르시는 내용인데 부르시는 이유는 바로 영의 일이 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반드시 육의 한계를 남들보다 지적받는 자로써 부름받게 됩니다. 우리는 반대로 부름받는다고 봅니다만 정작 영의 심판을 미리 앞당겨 받는 자로써 그 영이 얼마나 육의 소욕을 싫어하고 방해하는지를 제자들을 통해서 지적하시는 겁니다. 결국 제자들은 남들이 지적받지 않는 숨겨진 육의 한계를 들추임을 당함으로써 사랑을 알게 되는 겁니다.

그럼 20일자 교재 내용으로 넘어가서
결국 죄인으로써 12제자는 뽑히는 겁니다. 얼마나 가망없는 자들이면 주님이 사랑하고 붙들어주지 않으면 사망의 권세에서 빠져 나올수 없기에 뽑는 겁니다.

즉 이 12제자를 원수로 만드셔야 그 원수를 사랑하는 자가 누구인가를 보여주고자 하는
소모품으로써 뽑히는데 12제자들은 자신들이 선택당할만한 입장에 놓였다고 착각하거나
아니면 선택 당함에 합당한 모습을 앞으로 갖추면 된다고 보는 그런 모습이 바로 마귀라는 원수가 심은 생각임을 사랑만이 질투로써 들추어내는 겁니다.

그럼 12제자들은 그런 생각을 차단당하고 지워짐을 당해야하고 다른 것을 새로 받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약속하신 성령입니다.

그럼 이 성령이 하시는 일은 우리를 용서의 대상인 죄인을 새롭게 만드시는 일입니다.
즉 사랑의 대상인 원수 만들기입니다.

바로 이것이 선한 일을 하시는 주님의 일입니다.

나를 죄인 만들고 원수를 만든다? 이것이 선한 일이다?
도저히 우리로써는 이해 불가능 합니다.

그래서 21일자 교재 내용은
나무와 열매의 관계성을 언급하면서
좋은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나쁜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음으로인해
열매를 통해서 나무를 안다고 합니다.

이런 내용은 누구나 다 알수 있는 상식적인 이야기 인데 왜 구지 언급하실까요
여기서 우리는 나무와 열매의 관계성에서 우리가 반대로 생각하는 것을 지적하면서 성경은 뭔가 어긋맞게 교체하면서 이야기 할려는 의도를 알수가 있습니다.

즉 구원자는 누구와 잘 맞을까요?
다시 말해서 구원자의 열매는 누구입니까?
구원자를 알아 볼려면 그 구원자의 열매를 봐야 합니다. 죄인입니다.
그 구원자의 열매는 의인이 아니다 라는 사실에 우리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어떤 남자어른을 알고프면 그 남자 어른이 낳은 자식을 보면 알수가 있습니다.
그 자식이 아버지의 모든 것을 담고 있는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주의 할 것은 자식이 아버지와 전혀다른 독자적인 행동을 할 수 없다 라는 겁니다.
아무리 어려도 아버지의 모든 것이 담겨져 있는 것이 자식입니다.
성격 생김새 버릇 심지어 잘하는 것 더더욱 희한한 병의 잠재성
이 모든 것을 다 그대로 담고 있는 것이 자식이라는 아버지의 열매입니다.

또 예를 들면 병원의 의사에 대해서 알고프면 그 의사가 행한 일이 담겨진 자를 보면 알수 있습니다. 의사가 자기의 행한 일을 담고있는 자는 누구입니까? 의사 가족입니까? 아닙니다. 환자입니다.
오직 그 의사의 환자를 통해서 제대로 그 의사를 알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면 사랑을 알려면 누구를 보면 알수 있을까요?
바로 사랑이 사랑다움을 증명케 한 그 열매인 원수를 보면 알수가 있습니다.
그 원수를 통해서 사랑을 알수 있다는 의미는 사랑이 사랑의 진위를 발휘한 그 일이
원수에게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에 원수를 보면 그의 나무인 사랑을 알수가 있는 겁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알고있는 열매론의 잘못된 점이 무엇인고 하니
열매의 행동을 담고 있는 것은 열매가 아닙니다.
열매란 나무의 행동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습니다. 열매의 행동이 아닙니다.
(이것이 바로 비언약과 언약의 차이. 아브라함[미완료] vs 아브라함의 하나님[믿음의 약속]의 차이 입니다)
바로 이 둘의 차이성을 드러내는 것이 성령의 일입니다.

즉 성령의 일은 바로 이 차이성으로써 가짜와 진짜를 둘로 나누고 두 패로 쭈욱 갈라서게 하는 것인데

만약 지금까지 나오는 열매론을 살펴보면
바로 인간이 할 수 있는 열매는 열매가 아니다는 겁니다.

그 예로 자기에게 잘 해 주는 사람에게 잘해주면 그것은 칭찬받을 만한 열매가 아니다 라는 겁니다.
그리고 언급하시기를 그런일은 바로 죄인들도 다 할 줄 안다 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죄인들이 도저히 할수 없는 일이 바로 성경에서 말하는 열매인데
죄인들이 도저히 따라 할 수 없는 열매란 딱 하나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그 외의 나머지 열매는 이방인도 불교인도 천주교인도 종교인도 다 할 줄 아는
열매라는 겁니다.

여기서 바리새인이라는 완벽주의 자들이 할 줄 아는 열매도 거부할 수 있는 열매란
결국 우리 스스로 알 수가 없는 열매입니다.

그 열매가 놀랍게도 열매 맺고자 열매 맺어야 한다는 자기의 행함을 염두하는 자가 아니라.
내 자신 자체가 열매 덩어리로써
십자가에서 잉태하여 낳은 열매이다는 겁니다.

그렇기에 따로 맺을 열매란 없습니다.

내 자체 덩어리를 열매 자체로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나무가 누구인지 알수가 있는 겁니다.

여기에 크게 반발을 하는 자들이 놀랍게도 열매를 인간의 숙제로 맺고자 하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맺은 세리와 창기와 강도가 먼저 천국가도록 하신 십자가의 요나의 표적은
도리어 방해를 하고
악한세대가 요구하는 기적으로 교체시킬려고 창기 세리 강도를 죄사하시는 예수님을 지독스럽게 미워하는 겁니다.

물론 제사 안 드린 것이 아닙니다. 드렸기에 더 미운 겁니다.
마치 가인이 자기 제사를 안 받고 동생 아벨의 제사를 받았다는 이유로 아벨을 죽여버리듯이
없던 살인의지의 미움이 졸지에 편애 때문에 갑자기 지독한 미움이 터져 나오는 겁니다.

자 그럼 다시 돌아가서 12제자를 왜 뽑을까요?
12제자를 뽑은 나무를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그럼 그 나무 되신 예수님은 이 12제자를 어떻게 자신의 행하심을 12제자 속에 심고 담을까요?

바로 자신의 편애와 미움을 담는 그릇처럼 그런 취지로써 12제자를 다루십니다.
12 제자 자체 내에서는 이런 예수님의 편애와 미움을 바꿀수 있는 입장이 아니라 도리어 소외된 입장 뿐이다는 것만 드러납니다.

이 12 제자 중에 처음부터 마귀 다 라는 것을 보여주는 가룟유다의 모습과
또 행동으로 봐서는 가룟유다와 별반 다를바 없음에도 불구하고 편애를 보여주는 베드로의 모습으로 두 패로 나누시는 겁니다.

이것이 나무가 하시는 일로써 옳다 라고 여김을 받으시는 겁니다.
우리는 나무를 밝혀 낼 수 있는 재간이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나무의 열매로써 그 열매의 나무를 알 수 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열매의 배후인 나무 곧 보호자 주인입니다.

결국 영의 일이란 바로 이 열매의 배후세력인 보호자인 주인을 들추어 내는 겁니다.

그렇기에 12제자들은 이 배후세력을 들추어내는 미끼의 운명 뿐입니다.

이 미끼로 인해서(아브라함이라는 복의 근원을 통해서 복과 저주를 나누듯이)
십자가의 사랑이 세상을 두 패로 나누고 있다는 것을
12 미끼들은 자신의 신체에 나무가 심은 보호자의 뜻을 드러내는데 이용당하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미움 받는 일입니다.
누구로부터?

악한 나무와 악한 열매로부터

놀랍게 이 미움받는 일에 가룟유다도 동원되지만 정작 가룟유다는 미움받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예수님을 미워하는데 들추임을 당하는 가룟유다라는 열매의 나무가 드러나게 되는 겁니다.

우리 나무 되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자신의 사랑을 드러내셨듯이
우리 열매된 주님의 자녀 또한 십자가에서 이 세상이 악하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옳았다라는 것을 목격하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지금의 열매론은 사람들로부터 칭찬 받냐 못받냐 라는 인정받기에 목매여있습니다.

이런 열매론이 기존 모든 종교의 종교놀이로 인해서 사람들을 구원에 대해 집착케 하고 천국에 대한 탐욕심으로 가득차게 만드는 종교지도자들의 놀이감으로 전락케 했습니다.

다행이도 우리 나무이신 우리의 주인은 지난 시간에 공부한 안식의 주인에서 살펴봤듯이
우리에게 쉼을 주시고자 우리를 찾으시고 자신의 밥상에 겸상케 하셔서
먹으라고 긍휼을 베풀어 주십니다.

그러나 종교꾼들은 열매론으로 협박 합니다.
사기 치고 공갈치는 조폭의 수준입니다.
그런 자들의 특징이 바로 눈에 보이는 세계에 대한 집착을 심는 겁니다.

그리고 완료된 완성품이 없이 늘 이것으로는 부족하다는 미완료만을 늘 주장합니다. 그래서 따로 채워야만 완료된다고 합니다.

그런 열매는 없습니다. 육의 열매요 성령의 열매는 단번에 다 이룬 열매로써
나무가 하신일을 다 담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말만으로 열매를 외치는 인간의 의로움으로 쌓여진 누룩을 따를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다 이루었다 라고 완성된 그 자체로써 나를 열매 삼고자 다가오시는 예수님만을
바라보는
더불어 나와 먹고 마시자 라고 찾으시는 주님의 음성만을 듣고
달콤한 인간들의 인간에게 의미를 두는 소리를 거부할수 있도록
성령의 일하심을 바라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보호자를 밝혀낼 재간은 없습니다.
그래서 성령을 간구함으로써
성령이 왜 이런 두 패로 나누는 일을 하시는가?를 통해서 주님 자신 스스로가 증거하는 나무되심과 그 나무의 모든 것을 다 담은 열매는
바로 십자가만을 외치는 십자가 외에는 알지 않기로한 열매들을 보고서
그 나무의 뛰어난 독보적인 사랑에 우리는 모든 것을 걸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이 좋은 나무는 악한 나무가 하는 일의 차이성으로써 자신을 드러냅니다. 그 차이는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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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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