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4. 잃어버렸다가 되찾은 자기 양

잃어버림의 경험(심판)을 아는 십자가만 자랑하는 자

(백부장의 하인이 아닌 백부장 구하기, 과부의 죽은 아들이 아닌 과부 구하기 vs 상대적으로 저쪽은 구한적 없고 도리어 미워하심)

http://media.woorich.net/passofday/passofday080708luk24.mp3

(눅 7:6, 개역) 『예수께서 함께 가실새 이에 그 집이 멀지 아니하여 이 벗들을 보내어 가로되 주여 수고하시지 마옵소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눅 7:7, 개역) 『그러므로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치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눅 7:8, 개역) 『저도 남의 수하에 든 사람이요 제 아래에도 군병이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제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눅 7:9, 개역) 『예수께서 들으시고 저를 기이히 여겨 돌이키사 좇는 무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지 못하였노라 하시더라』

(심판의 영 곧 완료의 영, 손종의 영)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교재 p64-65 백부장의 큰 믿음 (누가복음 7장 1-17절)

어린이 매일성경 2008년 1-2월 (고학년 4-6학년)
성서유니온 http://www.su.or.kr 1월 22일 날짜 QT

성령의 새창조물 - 고아 과부 나그네 만들기(희년완성)

희년(복음)이 찾아낸 잃어버린 양

지난 시간까지 누가복음의 내용은 바로 예수님이 벌리시는 희년 전쟁에서 희년은 누군가를 찾아내는데 있어서 그 찾을대상이 뭔가에 포로가 되어 있다 라는 것을 아주 강력하게 주장함과 동시에 그 대상을 반드시 명확하게 규정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 대상은 두 부류입니다. 하나는 주인 노릇을 함으로써 종으로 삼은 자들이고, 또 하나는 바로 그런 주인들에게 종으로써 포로 잡힌자들입니다.

이 두 부류의 경계선을 모호하게 남겨두지 않고 반드시 선을 선명하게 긋고 난 뒤에 희년의 의미를 통해서 확인사살 하듯 다시 한번더 선을 긋는 영원한 두 패로 나누고 있습니다.

우리는 구지 그런 두 번이나 번거롭게 그런 작업을 할 것이 아니라 당장 눈에 봐도 이미 두 패로 나누어 졌다면 그냥 한번데 선을 그으면 될 일을 재차 확인의 작업을 한다는 것은 시간낭비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렇게 시간낭비가 든다고 생각하는 쪽을 반드시 희년은 그들을 적으로 삼고 뚫고서 들어오게 될 때에 과연 희년을 생각해서 나온 말이 아니라 도리어 방해하는 마귀가 배후에서 조종해서 나온 사고방식임을 들추어내시고자 돌격해 들어오시는 겁니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누가복음은 1장부터 유대인을 향해서 무대포로 돌격해 들어옵니다.
이유는 일단 모릅니다. 무조건 돌진해 와서는 우리를 향해 정면충돌을 하고서는 양쪽의 충돌 속에서 뭔가 쏟아져 나오는 충돌사고 파편들이 너저분하게 떨어지는데 그것을 보고 그 배후 세력이 누구인가를 밝혀내겠다는 그 심뽀에 우리는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는 입장에 놓이게 됩니다.

일단 누가복음에서는 그 정면충돌 대상이 유대인입니다.

그럼 유대인과 희년과 정면충돌의 꽝하고 박살이 난 그 파편에서 유대인들에게는 주님이 심지 않은 것들만 이상하게 나열이 되고

정작 그들에게서 도리어 정죄받는 하나님과의 관계성이 전혀 없던 개만도 못한 비거룩이다는 단절적인 지독한 미움의 대상이

아주 신비하게도 이스라엘에게만 있어야할 특징이 그들에게 있었습니다.

그것이 뭔고 하니 바로 희년 곧 영의 일 만이 밝혀 낼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 좋은 것입니다. 거룩이지요

아 그런데 제가 방금 유대인이 거룩에 미쳐서 평생을 거룩하게 살았고
반대로 유대인의 판단대로 거룩과 전혀 상관 없는 자들인 비거룩자 이방인이 그야말로 더럽기 짝이 없는 자들임이 유대인 뿐만 아니라 이방인 본인 스스로도 인정할 만큼 당연한 상식화 된 것인데

왜 당신은 반대로 말하고 있느냐 라는 질타를 안 받고는 못배기겠지요

그런데 참으로 웃끼는 것은
과연 거룩이 인간에게 소유가 되거나 거룩해 질수 있다는 가능성이 있다거나
또는 거룩한 사람이다 라고 붙일만한 일관성 가진 인간이 있다면
그것은 도리어 역설적으로 성경이 다 틀리게 되는 겁니다.

자 이제 제가 위험 수위를 넘고 있습니다. 이제는 성경마저 틀렸다 라고 발언을 할 정도가 되었으니까요

이것은 실제로 제가 늘 교회 다니기를 하는 사람들에게 늘 공격받는 내용들입니다.

꾸며내기에는 이미 너무 일반화 된 늘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일이 된
차라리 꾸며내기로 끝나기를 바라고픈 마음이 들 정도입니다.

왜냐하면 그 정도로 주님의 말씀이 딱딱 떨어질 정도로
눈에 보이는 시간적인 현실 보다 성경말씀이라는 현실 외에는 다른 현실이 없음에 놀랄정도이니깐요

그것이 바로 성경에도 나옵니다.
오늘 내용이 바로 누구의 손에서 그 누구의 포로를 빼 내시는가 라는 문제입니다.

저는 여기에 전부를 올인하고 싶을 정도로 강력하게 주장하고픈 내용이 뭔고 하니

바로 하나님이란

누구의 손에서 그 포로를 빼 내시는가 라는 일하심 외에는 예수님을 곧 하나님을 알 길이 없다 라는 것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싶습니다.

누가복음은 바로 그런 취지를 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위에서 언급한 내용처럼 다시 정리하면

먼저 포로가 전제가 되어 있고

이 포로를 기준으로 해서
한 쪽은 빼앗는 자이고
한 쪽은 빼앗기는 자로써

먼저 포로의 주인이 설정이 되어 있고 그 주인에게 도전하고 전쟁을 벌리는 또 다른 주인이 포로를 끄집어 내는데서 그 차이성을 드러내는 것이 바로 희년의 핵심입니다.

사랑이란 바로 이 차이입니다.

그렇다면 먼저 전 남편과 같은 전 주인이 왜 지금 전주인의 포로를 빼앗느냐 라는 입장에서 새로 등장한 주인의 전쟁의 대상 곧 지독한 미움의 대상이 되어야만 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 미움이 명확하게 서지 않으면 그 차이성으로써 사랑도 명확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되면
포로된 종은 종이 아니라 자기선택에 따라 주인을 그때 그때 이용해 먹는 입장일 뿐일 겁니다. 결국 포로된 적이 없는 종 된 적도 없는 한마디로 말해서 제 3의 주인인 셈입니다.
이런 제 3의 주인의 모습은 우리가 수많은 인간의 문학과 이야기 영화 역사나 드라마에서 수도 없이 봤습니다. 사실상 인간은 이것 뿐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가인의 모습과 가인의 후손들에게서 늘 보아 왔습니다.그 가인의 후예들이 만들어낸 가장 완벽하다는 신학이 바로 삼위일체인데, 알고 보면 인간이 취사선택하여서 만들어낸 신학으로 정작 삼위일체의 신은 인간에게 선택 당해야할 입장에 놓이게 된 겁니다. 결국 인간이 삼위일체 라는 각각의 가면을 쓰고서 자기를 가리우는데 가장 완벽하게 짜맞춘 정교하고 완벽한 무화과 나뭇잎인 겁니다. 어떤 누구도 공격할 수 없는 난공불락의 요새로 만들어낸 이상적인 교리가 되었고 그것을 바탕으로 교회 자체가 이제 본격적인 마귀의 터전임을 스스로 드러내는데 있어서 이 만병통치약 하나면 뭐든지 다 통과 할수 있는 천주교의 면죄부처럼 이용되고 있는 막판까지 와 있게 된 겁니다.

그런 모습은 성경에서 유대인인 바리새인을 통해서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자 그럼 이런 지독한 미움의 대상자가 아니면 즉 예수님의 전쟁의 대상자가 아니면 예수님의 전쟁으로 인한 전리품이 누구인지도 모를 것입니다.
전쟁은 바로 그 전쟁의 승리의 물품으로써 그 전쟁의 내막을 알수가 있습니다. 곧 전리품입니다.


그렇다면 이 전리품은 무엇만을 자랑하게 될까요?
전리품 된 것이 무슨 자랑꺼리가 됩니까? 전리품 자체에서는 없습니다.

그렇기에 전리품이라는 의미 자체가 이미 관계성에서 놓이게 된 빼도 박도 못하는 상대적인 의미입니다.

난 전리품이다 라고 아무리 자랑해도
듣는 타인은 그 전리품을 보는데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나 누가 너 같은 놈을 건져냈데? 라고너 같은 놈도 건짐을 받을 정도로 그 분이 대단한 분인가? 라는 그 분의 승리를 긍휼을 보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의 자녀는 죄수복을 입고서 특별사면이라는 혜택을 바로 죄수복에 발린 피를 자랑함으로써 그 피의 주인공을 드러내는 겁니다.

그런데 정작 죄수복을 벗고 거룩한 옷을 입고서 피비린내 나는 빨강자국을 다 빨아버리면
우리는 정작 그 사람 자체를 보고 최종적인 판단을 내리고 그와 관련된 관계성에 놓인 자를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정작 그 사람 스스로가 증거하는데 있어서 자기 기분 좋을 때는 예수님의 피 자랑했다가 정작 좀 안좋은일이 생겨 스트레스 수치가 높고 불쾌지수가 높은 광야의 땡볕 아래에서는 예수님의 피고 뭐고 나발이고 짜증내는 인간임을 유감없이 다 드러내는 그때는 차라리 죄인이었음이 맞습니다 라고 말한 것이 옳았을 텐데 그동안 쌓아온 자기 거룩의 이미지에 자꾸 모순이 되기에 그 수치를 스스로 가릴려고 하니 더더욱 위선의 회오리에 말려들어가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의 자기믿음이야말로 가장 중독성이 강한 마약과도 같은 도박처럼 무서운 자기집착인 겁니다.

바로 예수님이 찾아낸 진짜이스라엘에게서만 있어야할 것이 정작 이스라엘에게는 없고
놀랍게도 이스라엘에게 이미 정죄받아서 아웃사이드가 된 소외된 자들이 바로 이스라엘에게만 있는 그 특징들이 있는 겁니다.

의인들에게는 예수님의 피가 아무리 찾아봐도 없는데 (유월절 어린양의 희생 피)
정작 죄인에게는 예수님이 그렇게 찾으시는 죄인을 위해 흘리신 자신의 피가 덩그러이 발려져 있는 겁니다.

그게 바로 오늘 나오는 백부장과 과부 두 사람에게 발려져 있는 성령이 그렇게 찾아낸 피 발린 거룩한 피 발린 죄인들입니다.

자 그런데 바로 본문으로 들어가기 전에 다시한번더 강조하고픈 것이
성화론자들이 무엇을 이해 못하는고 하니

바로 죄수복을 입고서 피를 자랑한다는 것에 대해서 그들이 알길이 없고
또 가장 중요한 이 죄수복을 입은 자기 자녀를 정작 예수님은 피라는 보석의 의미만 밝혀 드러내시고 그 자녀를 미말에 구경꺼리가 되는 찌기와 같은 소모품과 미끼로써 사용한다는 의미에서 너무 그것이 무의미하게 다가오니까 자꾸 의미를 두어야만 예수님의 가치도 덩달아 높아진다고 대부분의 신학자들이 곁길고 빠지고 엉뚱한 소리를 막바지에 하는 이유가 자기가 꿈꿔왔던 하나님의 이미지랑은 안맞아서 자꾸 조작을 하는데 좀 더 아름다고 좀 더 가치가 높고 좀 더 좋으신 선한 하나님은 인간이 손대고 있다는 점에서 그들은 주저없이 자신만만해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즉 이 두가지의 모순점을 자기들이 해결한 것이 바로 성화입니다. 그런데 이 모습이 정작 바리새인의 모습과도 일치하는 겁니다. 결국 하나님도 별수 없이 인간의 변호에 의해서만 의미있지. 인간의 변호가 없으면 나쁜 하나님으로써 그 이미지를 탈퇴할수 없다는 취지인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바로 그런 인간의 생각을 아시고 더더욱 미운 짓만 골라서 하는 겁니다.
하나님은 애완용강아지 취급하는 정작 이방인이 아닌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자들의 모습 속에서 가장 마귀적인 모습을 들추어 냄으로써 그들의 배후가 하나님이라고 우기는 것을 역으로 마귀라고 그들의 보호자를 까발리는 분은 예수님 뿐이며 여기에 어떤 인간도 동의를 할 수 없을 정도로 모든 인간을 죄 아래에 가두어 놓은 주님 자신이 막아놓은 바로 심판이라는 미움이라는 겁니다.

정작 미움 받아 마땅한 죄인은 없고
자기 자신을 더 이상 미움 받아 매 맞을 거리가 없는
더 이상 지적받을 것이 없는 자로써 만드는 것이 바로 사생아의 특징입니다.
그러니 미움받을 짓은 가리우고 이쁨 받을 짓은 고의적으로 드러내는데 있어서
예수님과 정반대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관계성에 놓인 자들은 자신이 마땅히 미움받아야할 죄인임을 아는 미움의 자리 저주의 자리인 십자가에 놓이게 되니
정작 자기가 미움받고 저주 받고 심판 받는 것이 아니라
그 심판의 자리에 예수님이 관계성으로 가만히 멍청하게 있는게 아니라
아주 아주 적극적으로 뛰어든다는 점에서
정작 누가 놀라는가 하면
죄인이 놀라는 겁니다.

도대채 그 이유를 아무리 찾을려고 해도 찾을수가 없는 무조건 적인 무모한 행동에
논리나 합리적인 이유나 조건이나 근거나 타당한 점이 일체 없고

역으로 모순과 불합리함과 불공의로움과(자기의 법을 자기가 어김) 불법과
건전한 사랑이 아닌 철저한 불륜적인 사랑과 철저한 불공평이라는 일관성 만이
자기를 살리는 유일한 외부에서 다가오는 의로 다른 의는 일체 없음을 보게 됩니다.

창기가 자신의 구원만을 바라봤다면, 일종의 자기 성과로써 자신이 해낸 성취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성취가 무색해 질정도로 정작 창기의 구원을 통해서 도리어 의인의 지옥심판을 비로소 (이 비로소가 왠지 베드로가 고백했을때에 비로소 십자가에 가겠다고 하니 베드로가 막은 그 사건이 생각날 정도로 예수님은 지금 모든 것들을 팔을 엇맞게 엑스로 만들어서 뒤바꿔 버릴려고 하는 십자가로 가는 겁니다.) 증거함으로써 창기 스스로에게서 일체 구원의 근거나 조건들이 나올수 없음을 기정사실로 만들고 저 의인들의 심판을 통해서 정작 예수님의 십자가가 무엇인가에 모든 관심을 가지도록 새롭게 창조하는 새 마음 새 피조물 새 창조 새 영을 주시고자 하는 약속에 올인하도록 순종의 영에 지배받도록 하십니다.

그래서 오늘 백부장과 과부는 바로 이런 약속이 벌리는 자작극에 약속의 피가 무엇인가를 드러내는 데 있어서 반드시 동원되는 소품이 되는 겁니다.

(눅 4:13, 개역) 『마귀가 모든 시험을 다 한 후에 얼마 동안 떠나니라』
(눅 4:14, 개역) 『예수께서 성령의 권능으로 갈릴리에 돌아가시니 그 소문이 사방에 퍼졌고』
(눅 4:15, 개역) 『친히 그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매 뭇 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시더라』
(눅 4:16, 개역)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자기 규례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눅 4:17, 개역)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한 데를 찾으시니 곧』
(눅 4:18, 개역)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눅 4:19, 개역)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눅 4:20, 개역)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눅 4:21, 개역) 『이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눅 4:22, 개역) 『저희가 다 그를 증거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 바 은혜로운 말을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눅 4:23, 개역)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반드시 의원아 너를 고치라 하는 속담을 인증하여 내게 말하기를 우리의 들은 바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네 고향 여기서도 행하라 하리라』
(눅 4:24, 개역) 『또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
(눅 4:25, 개역)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세 해 여섯 달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눅 4:26, 개역)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눅 4:27, 개역)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문둥이가 있었으되 그 중에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뿐이니라』
(눅 4:28, 개역) 『회당에 있는 자들이 이것을 듣고 다 분이 가득하여』
(눅 4:29, 개역) 『일어나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내리치고자 하되』
(눅 4:30, 개역) 『예수께서 저희 가운데로 지나서 가시니라』자 위의 4장의 내용을 왜 언급했는고 하니 마귀의 시험을 이기고서 이제 본격적으로 마귀가 심은 인간들의 가짜 메시야상을 어떤 누구도 아닌 예수님 스스로가 들추어내는데 있어서 바로 고아 과부 나그네를 동원하십니다. 정작 유대인이 이런 예수님의 일에 동원되는 미끼가 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마귀가 심은 가짜 메시야 상으로써 예수님을 마귀처럼 시험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저들의 손에서 포로가 된 고아 과부 나그네를 자유케 하는 희년을 완성하시는데 반드시 뭔가를 뚫고서 나타난 결과인 겁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의 전쟁은 곧 희년 전쟁입니다.

이방인 나아만 장군의 문둥병은 의도적으로 차이성을 드러내기 위해서 만호은 문둥병자 모두가 아닌 단 한 명의 문둥병자

또 수많은 이스라엘 과부와 이방인의 과부를 다 냅뚜고
하필이면 이방인의 과부 중에 단 한명의 과부 사랩다 과부에게만 보내심을 받았다 라는 것은

구원이 목적이 아니라 심판을 목적으로한

바로 종말의 선포인겁니다. 그래서 선지자란 종말의 영이 임함자로써 종말을 선언하는 자입니다. 이것이 거룩인데

인간의 거룩은 선악으로 해석을 하기에 이 백부장의 믿음도 아주 좋은 큰 믿음이기에 우리도 이런 믿음을 추구하자 라는 식으로 해석을 하다 보니까
종말의 영을 완전히 물먹이는 꼴이 되는 겁니다.

백부장의 믿음을 칭찬하신다는 것은 상대적인 이스라엘의 종말을 선언하는 겁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이 종말을 완성하심으로써 이제 새이스라엘인 백부장으로 말미암아 옛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더 이상 아니다 라는 일방적인 선언이자
또 나중에 변명치 못하도록 그들의 아비는 마귀임의 증거를 계속 끊임없이 밝히시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의 진면목인 질투요 시기입니다.

질투가 없다면 즉 미움이 없다면 사랑이 뭔지 모릅니다.

사랑은 뭐든지 다 사랑하지 않습니다. 죽음과 죄는 지구 끝까지 따라가서도 적극적으로 미워합니다. 이런 인간은 없습니다.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뿐입니다.

화냄을 통해서 그 사람의 목적을 알수 있듯이
사랑은 죄에 대해서 가만히 잊지를 못하고 목숨을 버려가면서까지 끝까지 싸워 이기십니다.

그러나 인간의 사랑은 죄에 대해서 알길이 없는 어두운 눈이고
엉뚱하게 우리를 향한 죄에 대한 지독한 미움을 도리어 고마움이 아닌 살인으로써 예수님을 지상에서 제거해 버렸습니다.

제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저 사람이 나를 미워 하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발린 피만을 미워하더라 라는 것을 말한적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창세전에 예정된 자기 자녀에게 발린 죄라는 엉뚱한 선악을
예수님은 목숨까지 바칠정도로 미워하십니다.

그런입장에 볼때에 마귀 또한 그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마귀는 우리에게 발린 피만을 죽어라고 미워합니다.

소위 성화론자나 바리새인이나 자칭 의롭다고 여기는 새생명의 삶을 사는 자들이
다른 것에는 화낼 이유도 없는 그저 천사와 같은 모습이지만
지독스럽게 이 십자가의 피에 대한 거부반응은 다른 어떤 모습에서도 들키지 않는
유일한 거부반응입니다.

즉 예수님 외에는 십자가에 순종한 자는 없다 라는 겁니다.

백부장의 순종은 반대로 이스라엘의 불순종을 상대적으로 폭로하는 겁니다.

마치 구약의 나아만 장군이 그 더러운 꾸중물에 들어가라 라는 말로 안되는 모순된 불공평하고 불합리하고 전혀 깨끗해지기는커녕 도리어 더러워질 수밖에 없는 그 비거룩한 똥물에 들어갔음에도 불구하고 나았다 라는 것은 나아만 장군을 칭찬하기 위함이 아니라 나아만 장군이라는 아주 나약하고 소경 병자 라는 부정한 인물을 통해서 심지어 이스라엘 적군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아군이라는 이스라엘은 정결하다 라고 우기는 이스라엘을 고발하고자 하는 취지였다는 겁니다. (왕하 5장)

너희들도 원래는 이런 적군의 종이였고 고아 과부 나그네 였는데 도리어 고아 과부 나그네를 압제하는 마귀와 같은 애굽나라의 강퍅한 파라오가 되었다고 파라오 왕을 강퍅하게 하듯이 이스라엘을 애굽으로 여기고 나아만 장군을 모세로 삼아서 그들의 죄성을 깝죽 깝죽 거리면 슬슬 긁어대시는 겁니다. 화 딱지 나도록 화 내지 않으면 안되겠끔 만들어내는 식으로 말이죠. 적과 아군의 팔을 어긋맞게 하시는 겁니다.

자 나인이라는 성에서 어떤 과부의 아들이 죽어 메고 나오는 그 과부를 보시고(죽은 아들을 불쌍히 여긴게 아니라 과부임) 불쌍히 여겨서 아들을 살려냅니다.

이것은 마치 엘리야가 사렙다 과부의 아들을 살려내는 식인데 단순히 살려내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그 과부의 아들을 살려냄으로써 상대적으로 이스라엘의 죄악을 반드시 심판하시겠다는 지독한 미움을 말하기 위해서 한쪽은 반대로 일방적인 편애를 증거하시는 겁니다. 즉 편애가 목적이 아니라 미움이 목적입니다. 사랑은 매를 통해서 알지 매가 아니면 아버지의 사랑을 알길이 없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라는 외침도 그런 의미입니다.
즉 예수님의 입에서만 비로소 하나님이 증거 됩니다. 그 이전의 하나님에 대한 증거를 다 거짓으로 만든 겁니다.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라는 예수님이 하나님에 대한 증거를 해석할 자가 아무도 없듯이 말입니다.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라는 심판과 나의 원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 라는 순종. 이 불공평함에 대한 순종이 바로 십자가이다. 이 십자가 가장 불공평 중에 불공평인 이 십자가에 순종하는 것은 오로지 영의 일 곧 믿음이다 라는 겁니다.

그래서 엘리야는 이스라엘에게 인간 왕을 통한 대리만족에 빠져 힘을 사모하는 마음에 왕과 결탁하여서 백성을 섬기는 순종이 아니라 도리어 약탈자로써 힘 모으기에 미쳐 있다는 그 자체를 그냥 내버려 두지 않고 지적하고 간섭한다는 자체가 바로 엘리야의 기도입니다. 비오지 않기를 바라는 기도. 그것도 3년 6개월 동안 이 말은 죽어 마땅한 심판받아 저주 받은 자입니다 라는 고백입니다.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나 죄인입니다. 그 죄인의 죄를 제하고자 억울하게 제물되는 그 말도안되는 대신형벌받는 그 판결에 그 불공평한 판결에 순종하겠습니다 라는 사랑의 모습이 바로 비오지 않기를 기도하는 겁니다. 즉 심판 속에 뛰어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심판 속에서도 주님은 사렙다 한 과부에게 아들의 죽음을 일깨우고 그리고 기름도 끊어지지 않도록 퍼도 퍼도 늘 흘러넘치는 종말 속에서도 긍휼이 변함없이 주어지는 잃어버린 자기 양에게 긍휼 베푸심을 엘리야선지자는 증거해야 하는 믿음의 행함을 증거하는 곧 영의 일에 동원이 되는 겁니다.

(약 5:17, 개역)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저가 비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아니오고』
(약 5:18, 개역) 『다시 기도한즉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내었느니라』
(약 5:19, 개역) 『내 형제들아 너희 중에 미혹하여 진리를 떠난 자를 누가 돌아서게 하면』
(약 5:20, 개역) 『너희가 알 것은 죄인을 미혹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그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하며 허다한 죄를 덮을 것이니라』

결국 열매는 허다한 죄를 향한 무모하기 짝이 없는 돌격이요 전쟁의 승리로써 전리품인 광야교회라는 새피조물이 새 영, 새 마음으로 인해서 새로 지음 받는 겁니다. 이것을 예수님 혼자 외로이 홀로 이 사랑의 전쟁을 펼치시는 겁니다.

죽음 보다 강한 사랑

맞습니다. 사랑은 죽음과 때려치심의 매(회초리 징계)와 지독한 미움 곧 저주와 버리심이 아니면 알 길이 없습니다.

십자가를 모르고서 사랑을 운운하는 종교꾼들은 항상 댓가를 바라는 사기꾼일 것입니다.

자 이 두 사람 곧 가버나움의 백부장은 이 가버나움의 심판의 기준이 됩니다.즉 백부장처럼 말씀만 하소서 순종하겠나이다 라고 아예 처음부터 죽이시든지 살리시든지 당신에게 모든 것이 달렸다는 나의 원대로 마옵소서 라는 그 순종의 영을 받지 않은 자는
소돔과 고모라 보다 더 악한 마을동네임을 단지 이 백부장의 고백을 기준으로 심판을 하겠다는 일방적인 기준을 선포하는 것이되고

또 나인 성에 한 과부는 비로소 긍휼을 입음에 보내심을 받은 자를 알아보지 못한다면 선지자 곧 심판의 영을 입은 자를 못 알아 봤다는 이유로 이미 심판받았다고 선언이 되는 아주 말도 안되는 일방적인 판결의 판례 곧 지혜는 그 행하심에 의해 옳다함을 받는 결과로 실질적인 사례로써 이 과부의 보호자 되심의 기준이 되었기에

보호자 없는 과부나, 다른 남편이 없는 과부는
이 진짜 보호자를 기준으로 심판이 된다는 것을 선언하는 믿음(성령)이 벌리는 전쟁이
바로 희년을 구체화 하시는 예수님의 행하심입니다.

(눅 4:26, 개역)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보내심을 받는다 라는 표현과

(눅 7:15, 개역) 『죽었던 자가 일어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미에게 주신대』
(눅 7:16, 개역)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아 보셨다 하더라』

비로소 하나님의 영광이 덮쳐져서 주의 전쟁을 보게 된 과부의 찬양이(비천한 여인의 찬양인 마이랴의 찬양)

그 기준이 되어 사랑의 전쟁은 넉넉하게 이기는 끊어지지 않는 긍휼을 십자가의 피로써 지금도 멈추지 않고 돌진하고 있습니다. 이 쓰레기를 치우는 똥차에 미리 허리가 박살난 자들이 바로 새이스라엘 곧 백부장, 과부, 고아, 나그네 곧 교회의 처음 모습인 광야교회입니다.

추가

아무리 깨끗한 의인이라도 쓰레기가 나오고
악한 죄인이라고 쓰레기가 나오듯

쓰레기가 나오나 안 나오나
또 억수로 많이 나오는 악한 죄인이나
억수로 작게 나온다고 우기는 자칭 의롭다고 하는 자들이나

만약 그 쓰레기를 치워주지 않는 쓰레기차가 외부에서 와 주지 않는 자는
아무리 악해도 아무리 의로워도 자기들 입자에서 결정나지 않고

외부에서 치워주심을 입은자 곧 보내심을 입은 자
기뻐하심을 입은자 등등의 표현으로 항상 외부에서 벌어진 사건인 유일한
주님만이 하신 공로 (인간이 흉내냄으로써 침범받지 않는 유일한(단번에) 사건은 곧 십자가의 피흘리심 뿐이다.) 만이 모든 바다를 다 덮고 모든 허물을 다 덮고도 남는 사랑입니다.

(약 5:20, 개역) 『너희가 알 것은 죄인을 미혹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그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하며 허다한 죄를 덮을 것이니라』

(벧전 4:8, 개역)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Posted by 김 대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