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3가지 별명

교재 p66-67 말씀을 잘 듣고 따라요 (누가복음 7장 18-35절)

어린이 매일성경 2008년 1-2월 (고학년 4-6학년)
성서유니온 www.su.or.kr
1월 23일 날짜 QT

예수님의 3가지 별명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며 세리와 죄인의 친구)

걸림돌을 제시하는 순종의 영 (실족케 하는 성령의 일)


올해 학생회 처음 공부 시간에 큰인물 세례요한에 대해서 공부를 했습니다. 교재는 요한을 큰 인물이라고 표현한 것을 아마 오늘 본문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서 제목을 붙인 것 같았습니다.

(눅 7:27, 개역)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앞에서 네 길을 예비하리라 한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라』
(눅 7:28, 개역)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이가 없도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 하시니』

그런데 저는 우리 학생들에게 큰 인물 요한이라고 표현하지 않고 가장 작은 자 요한이라고 했고 크냐 라는 의미는 축소시켜버리고 요한이 하는 일은 바로 물에 빠뜨리는 자 이다 라는 것을 강조 했습니다.

지난 시간까지 공부한 내용을 연결해서 표현한다면

물에 빠뜨리는 자가 선지자인데 바로 걸림돌을 제시하는 자가 선지자 곧 성령을 입은 자입니다.

즉 영의 일이란 반드시 육의 눈에 밉상짓만 골라서 하고
육이 보는 기준에 반드시 불륜과 부정과 실족과 넘어뜨림을 유발케 한다는 것이 영의 일이라고 했습니다.

그럼 육은 그 기준을 항상 육체의 행함 곧 선악에 대한 기준에서 비롯된 기준이기에
반드시 그 선악의 판단을 유발케 하여 법적인 율법을 끄집어 내도록 합니다.

그래서 육이 판단하여서 찾아낸 사람이 백부장의 큰 믿음이라는 표현으로 제목을 단 큐티 교재처럼 자꾸 선악의 판단을 인간의 행함의 여부로 취급해버립니다.

그러나 육의 판단인 선악이 아니라

영의 일로써 잃어버림의 경험을 아는 백부장과 과부는
기존의 이스라엘을 거짓으로 취급하고
새이스라엘로써 기존의 이스라엘과의 차이성을 드러내는 희년이 찾아낸 새피조물인 자들입니다.

희년에 은혜를 입혀서 찾아내고 창조해 낸 자유케 한 자, 자유함을 당해버린 자
곧 고아 과부 나그네입니다.

즉 고아 과부 나그네 에게서는 자발적인 어떤 내부적 활동이 일체 있을 수 없습니다.
오로지 외부에서 입혀짐을 당하는 입장 뿐입니다.

우리가 영의 일을 알려면 먼저 내부적인 모든 활동은 단절이라는 전제성이 깔려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전제 되어 있지 않으면 또 성령의 일 마저도 자기의 숙제인냥 떠벌리게 됩니다.

그래서 누가복음에서는 이 영의 활동에 반드시 육의 철저한 단절을 의미하는

기뻐하심을 입었다 라는 입었다 라는 표현과
자유함을 당했다 라는 당했다 라는 표현과
보내심을 받았다 라는 받았다 라는 표현을 우리가 공부함을 통해서
반드시 외부의 전적인 활동이 덮쳐졌기에
내부의 단절을 당하는 이 양발차기를 이해 못하면 누가복음의 영의 활동은 모조리 알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누가 희년을 입힘을 당했느냐 라는

희년이란 누구에게 응하느냐 라는
희년의 열매를 보고 아 희년이구나 라는 것을 알도록 하시는 겁니다.

즉 희년은 누구 누구는 때려죽어도 아니고
이런 자만이 바로 희년이 찾아낸 희년의 열매다 라고 주장합니다.

뭐 뭐 뭐 아니고 뭐 뭐 뭐 이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눅 4장에 희년의 완성의 예를 든 것이 바로
엘리야가 이스라엘 과부나 이방의 많은 과부 가 아니라
오직 시돈 땅 사렙다의 한 과부 에게 보내심을 받았다 라고 표현 했고
엘리사는 이스라엘의 많은 문둥병자나 이방의 문둥병자가 아니라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 에게만 깨끗함을 얻도록 했다 라고

받는자 관점이 아니라 반드시 주는 자 입장에서만 주는 자를 부각하기 위한 영의 증거를 눅 4장에서 언급합니다.

우리는 곧잘 선악의 판단과 법적인 사고방식으로
받는자 관점이 아닌 주는 자 입장을 부각한다면 다수가 훨씬 효과적이다 라고 착각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보시기에게는 영이기에 육이 아무리 많아도 단 한 사람일 뿐인 죄인입니다.

그렇다면 단 한 사람의 고아 과부 나그네로 보신다면 아무리 문둥병자가 많고 과부가 많아도
주님의 영의 일은 완성이 된 겁니다.

다른 문둥병자는 나아만 장군의 문둥병이 나음을 보고 내 쪽으로 땡겨서 챙길 것이 아니라
주님이 일하셨다 라는 자체로 이미 약속은 다 이루어 졌고 미완료는 없다 라는 것을 본인이 믿어야 할 판국에 놓였다는 겁니다.

바로 이런 자세가 백부장의 자세입니다.

백부장의 하인을 찾고자 하는 목적이 아니라
백부장을 찾는 겁니다. 누구로써? 고아 과부 나그네 로써 말입니다.

수많은 과부 일일히 갈 필요가 없습니다. 단 한 사람의 과부를 통해서 우리는 지적을 받아야 합니다. 과부의 아들을 나음을 통해서 아들에게 긍휼을 베푸심을 볼게 아니라.
과부를 불쌍히 여겨주시는 그 희년의 완성자가 왔다는 자체로 이미 모든 죄악은 심판 받은 겁니다.

이것은 시돈의 과부는 기뻐함을 입어서 긍휼을 입어서 찬양하고 외칩니다. 선지자가 나타났다 라고 이제 세상은 끝났다 종말이다 눈물 슬픔 걱정은 이제 끝이다 라고 그 선지자가 나타났다고 외치는 종말의 현상을 통해서 이제 더 이상은 미완료가 없고 완료가 덮쳤다 라고 외치는 것이 바로 희년이 찾아내고 희년에게 찾아냄을 당한 자들의 희년을 외치는 완료 곧 미래의 완성을 외치는 겁니다. 그래서 그들은 고아 과부 나그네의 옷을 입고 자기의 보호자가 되어주신 포로됨에서 자유케 하신 분을 찬양하는 겁니다. 종말의 외침이요 선포인 겁니다. 죄인의 옷을 입고 원수의 옷을 입고 구원자가 이분이다 라고 외치고 사랑은 이분 뿐이다 라고 외치는 겁니다. 마치 죄인의 옷과 원수의 옷을 입는다는 것은 저쪽의 상대방을 자극 시키는 영의 일입니다. 즉 미움을 유발케 만드는 겁니다. 희년과 사랑이란 전쟁 없이는 완료가 없습니다. 전쟁이 완료가 되어야 평강이 이루어지는 겁니다.

어떤 안티가 샬롬이라는 뜻을 개독들은 엉터리로 가르치고 있다 라고 인터넷 글을 본적이 있습니다. 우와 이것을 우찌 알았을까? 아니다 다를까 그것을 자기는 알았으니까 옳다 라고 주장한다는 자체가 샬롬이라는 뜻은 여전히 모르고 있구나 그저 문자 풀이를 한 기독교를 자기자신 또한 문자풀이한 내용을 가지고 공격한 겁니다.

샬롬이라는 뜻은 심판 속에서의 구원입니다. 저주 속에서의 평강입니다. 그런데 항상 문자만을 보는 자들은 앞의 부정적인 의미를 항상 빼버립니다.
복수 속에서의 사랑입니다. 아가서의 주제가 바로 죽음 보다 강한 사랑과 지옥을 잔혹하게 질투하는 불과 같다 라고 합니다.

결국 샬롬이라는 뜻도 십자가의 의미에서 해석하지 않으면 다 엉터리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거짓선지자들이 평강 평강이다 라고 외치는 겁니다.

(아 8:6, 현대인) 『여자: 당신은 나를 인장 반지처럼 당신의 마음에 간직하고 도장처럼 당신의 팔에 새기세요. 사랑은 죽음처럼 강하며 질투는 무덤처럼 잔인하여 맹렬한 불처럼 타오릅니다.』
(아 8:6, 현대어) 『그대 가슴 끈에 인장반지를 달고 다니듯 그대 마음에 나를 꼭 품어 주세요. 그대 팔에 띠를 꼭 매고 다니듯 그대여, 내 사랑 나를 꼭 그렇게 안아 주세요. 그 누가 죽음을 이겨 낼 수 있을까? 아무도 죽음을 건너뛸 수 없지요. 죽음은 그 누구도 놓아 주지 않아. 아, 사랑도 사랑도 그러하지요. 그 누구가 이 사랑을 어찌할까요? 불같이, 맹렬한 불꽃같이 타오르는 시새움.』
(아 8:6, 쉬운) 『나를 옥새같이 그대 마음에 두세요. 나를 도장같이 그대 팔에 새기세요.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고, 그 질투는 무덤같이 끈질기니, 그 사랑은 불꽃처럼, 강력한 불길처럼 타오르네.』
(아 8:6, 개역) 『너는 나를 인 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 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투기는 음부 같이 잔혹하며 불 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자 세례요한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선지자란 우리를 물에 빠뜨리고 바로 이 걸림돌을 제시하는 자입니다. 모든 자들을 실족케 하고 다리 걸어 태클로써 넘어뜨리는 자입니다.
우리는 넘어져도 상관 없고 실족 당해도 상관이 없는 미래의 영광이 덮친 희년의 완성자가 떳다 라는 것으로 모든 것이 완료된 겁니다.

바로 이 완료가 덮침으로써 미완료에 대한 화냄 질투 공격 전쟁이 바로 사랑입니다.
이것을 전담하시는 분이 바로 성령이요 성령이 임한 자를 선지자 라고 합니다.

모든 미흡하고 미완료 상태인 것을 공격하는 것이 바로 성령입니다.

그래서 역사에서는 부정적인 행동만으로만 보입니다.

물에 빠뜨리고, 실족케 하고자 다리걸어 넘어뜨리고
거리끼게 하는 걸림돌만 제시하고

누가 이런 자를 좋아하겠습니까?

다 고개를 돌릴 수 밖에 없도록
외면하지 않으면 안되도록 만들어 버리는 질리도록 하는 자들이 성령을 입은 자입니다.

세례요한은 그래서 희년 곧 포로되고 갇히고 눈 멀고 갇힌 자를 자유케 하시는 예수님을 예비하고 준비하고자

우리를 자꾸 포로다 라고 의도적으로 포로 만들고
너희들은 갇혔다 라고 의도적으로 갇힌자 만들고
너희들은 눈 먼 소경이다 라고 의도적으로 소경 만들고
너희들은 눌린자다 라고 의도적으로 눌린자 만들어 버리니까

그래서 물에 모조리 빠뜨립니다.

빠뜨려야 자유케 하시는 예수님이 건져내시는 역할을 하도록
미리 예비를 하는 겁니다.

화로다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구나 라는 회개의 영을 부어넣는 역할을 세례요한이 하는 겁니다.

자 이제 예수님 와서 이 화로다 망하게 된 심판받은 자를 고아 과부 나그네를 불쌍히 여기는 보호자가 되어주고 기업을 물려주고 복수를 대신 함으로써 고엘의 하나님인 졸지에 보호자가 생겼다는 자체로 모든 완료를 자유로써 다 누리게 되는 겁니다.

반면에 요한의 세례를 받아버리게 된다면 자신이 고아 과부 나그네 임을 인정하고 죄인임을 인정하는 꼴이 되기에 심판을 받고 저주를 받고 물에 빠짐을 당함을 마땅히 아는 죄인임을 인정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 세례요한의 활동에 말려들지 않을려는 자들이 반드시 생기도록 영은 자신의 영의 일을 증거하기 위해 그 차이성으로써 한 쪽은 육의 소욕을 유발케 하는 겁니다.

세례요한 뿐만이 아닙니다. 예수님도 똑같은 선지자의 활동을 하시게 되니
바리새인들이 자신들의 안목에서 세례요한과 예수님을 비교분석해 보니
세례요한 보다 더 똘아이 임을 밝혀 냅니다.

그 전에 예수님은 이 세례요한의 활동도 못 이해한다고 책망을 합니다.

피리를 불어도 춤 추지 아니하고
애곡을 하여도 슬퍼도 하지 않는

이 세대가 바로 심판 받아 마땅함을

희년을 말하기 위해서 이 심판받아 마땅한 악한 세대를 규정하고 그 속에서 끄집어 내겠다는 선지자의 활동을 이야기 하십니다.

그렇다면 갇힌적 없고 포로된 적 없고 눌린 적 없고 눈 먼 적 없는 소경 된 적이 없는 자들에게

자유케 하시는 희년 완성자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희년이 소용이 없는 자를 먼저 규정하시는 겁니다.

세례요한을 통해서 두 패로 나누고 예수님도 두 패로 나누시고
이 희년이 소용없는 의사가 필요 없는 환자가 아닌 자를 먼저 규정하시는 겁니다.

그들은 세례요한의 말도 무시했듯이 예수님에게도
예수님의 행동 하나 하나를 분석해서 내린 결론이
자기들과 차이가 나는 행동들인 바로 비경건성의 일침입니다.
이거 한방이면 대중들은 다 떨어져 나갑니다.

바로 먹기를 탐하는 먹보 이고, 포도주를 즐기는 술꾼 이고, 세리(매국노)와 죄인의 친구 로다 라고 별명을 붙입니다.

(마 11:19, 개역)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눅 7:34, 개역)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너희 말이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이것은 바로 예수님이 그들에게 걸림돌을 제대로 걸었다는 뜻입니다.
아무리 봐도 그들은 이 해석 외에는 나올 해석이 없는 겁니다.

마치 아무리 예수님의 말씀 선포와 희년의 완성을 보여줘도
겨우 말하는 결론이 늘 저자는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라는
그 판단 외에는 벗어날 수가 없는 겁니다.

그것은 그들이 무지함도 아니요 어두운 눈이라서도 아닌
예수님 자신이 저들에게 지독한 미움으로써 못 믿도록 귀를 막아버렸고 눈을 막았다는 겁니다.

그래야 미움도 인간 쪽에서 해석할 길이 없도록 하시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긍휼도 인간 쪽에서 해석 할 길이 없습니다.

지난 시간의 백부장의 믿음이 좋았다 라고 큐티교재는 마치 백부장이 편애 받을 짖을 해서 곧 믿음이 너무 큰 믿음이라서 칭찬했다고 가르치고 우리도 이런 믿음 가지자 라고 교육 교훈으로 가르칠려고 하지만 바로 이런 의식이 마귀적인 해석이다는 겁니다.

백부장은 결국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믿어야 할 판국에 놓여져서 예수님이 믿음을 주니까 믿게된 겁니다. 누구 누구를 상대적으로 고발하기 위해서?

정작 유대인이 믿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유대인은 안 믿고 이 백부장이 믿는다고 하는 것은
저들에게 백부장 자체를 걸림돌로 삼았다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과부 아들을 살려내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과부를 긍휼의 대상으로 삼아서
선지자가 바로 이 과부를 통해
정작 선지자를 영접해야할 고향사람들이 도리어 배척한다 라는 것을 이 과부를 통해서 걸림돌을 제시하는

예수님은 오로지 미움 받을 짖만 골라서 한다는 겁니다.
마치 선지자 자기 고향에서 배척을 받는다 라는 대본대로 그대로 성취되게 할려고 하시듯이 말입니다.

결국 복음이 전파 되는 광경을 우리는 복음을 거부하는 모습을 통해서 아 복음이 이렇게 전파되는 구나 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지독한 미움과 지독한 편애를 주님이 갈라서 수박 자르듯이 영의 세계와 육의 세계를 두 패로 쭈욱 시원하게 쪼개버리는 겁니다.

이 일에 세례요한 보다 더 큰 자들이 하나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자도 요한 보다 라고 크다 라고 합니다.

즉 이 걸림돌이 크다는 뜻입니다.
성령이 자기 자녀를 세례요한 보다 더 크게 이 땅에서는 더 큰 걸림돌로 작용하도록 하시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겨우 그들에 볼 줄 알고 해석하는 한계점이 육의 행동으로 파악하는 겁니다.
오늘날 성화론자들이 항상 저들의 열매로 그 나무를 안다 라는 문자를 그대로 적용해서 파악하듯이 말입니다.

그 뒤에 나오는 내용이 다음주 내용을 미리 맛보기를 해보면
바로 향유를 깨뜨린 여인이 비산 향유를 통해서 예수님의 발을 씻으니까
제자들이 아깝다라고 차라리 그 돈으로 가난한 자의 배고픔을 해결함이 더 좋지 않겠냐 라고 의로운 분노인냥 화를 내는데 있어서 제자들은 이 여인의 행동에 걸림돌에 실족케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바로 이 여인이 지금한 행동을 앞으로 계속 계속 기념하도록 이 사건을 아주 아주 칭찬을 합니다.

자 여기에 제자들은 졸지에 낙동강 오리알이 되어버립니다. 소외 당해버린 거죠

그러나 예수님은 이 여인이 한 행동은 자신의 십자가의 죽음과 연관 시켜서 모든 사람과 모든 시간 공간에 걸림돌로써 박아버립니다.

그렇기에 당연히 제자들은 이 걸림돌에 넘어진 겁니다.

예수님 자신의 죽음을 이 여인은 우리 죄 때문에 죽어야 할 예수님을 자신의 모든 재산을 올인하여서 기념한 겁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기념했다는 겁니다.

바로 이것이 영의 일입니다.

즉 걸림돌 제시입니다.

이것이 모든 돌이 이 걸림돌 위에 아래 좌 우 양 사방에서 떨어져도 다 부서뜨리는
그야말로 완료된 사랑입니다. 미흡함이 없습니다. 그래서 올인 해도 상관 없고
제자들의 비방을 얻어도 상관 없고
구경꺼리가 되어도 상관 없고
찌기가 되어도 상관 없는 겁니다.

왜냐하면 사실은 예수님이 그런 자세로 우리를 향해 십자가의 사랑으로 다가와
모든 허물인 미완료를 깨뜨리고 완료했기 때문입니다.

(마 21:42,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
(마 21:43, 개역)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마 21:44, 개역)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저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
(마 21:45, 개역)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의 비유를 듣고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마 21:46, 개역) 『잡고자 하나 무리를 무서워하니 이는 저희가 예수를 선지자로 앎이었더라』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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