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절(거절)된 청년 사울 : 너가 핍박하는 예수라


(행 9:1, 개역) 『사울이 주의 제자들을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행 9:2, 개역)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좇는 사람을 만나면 무론 남녀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행 9:3, 개역) 『사울이 행하여 다메섹에 가까이 가더니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추는지라』

(행 9:4, 개역)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행 9:5, 개역) 『대답하되 주여 뉘시오니이까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행 9:6, 개역) 『네가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라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행 9:7, 개역)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섰더라』

(행 9:8, 개역)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행 9:9, 개역) 『사흘 동안을 보지 못하고 식음을 전폐하니라』



스데반 집사를 죽이는데 선동한 청년 사울은 그야말로 하나님의 열심에 가득차있습니다.

그의 신념은 오로지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그의 열심이 어떻게 도리어 죄인 중의 괴수로 작용하게 되는 것일까요?

(그냥 죄인이 아닌 죄인의 이중성, 괴수의 이중반복인 마귀 중의 마귀, 이 부정성의 이중반복)


분명히 일심으로 하나님을 위한 마음 뿐이였는데 

왜 이것이 하나님을 핍박하는 일이 된 것입니까?


좀 전의 누가복음 내용처럼

죽음이라는 심판성을 거치지 않아서입니다.

그렇다보니 마귀가 쥐고 있는 사망의 권세처럼

남을 죽이고 살리는 권리를 쥔냥 

선지자 노릇을 하고 있는 겁니다. 의인노릇을 하고 있는 겁니다.

정작 본인이 죽음의 저주를 거친적이 없이 말입니다.


그러니 마귀 노릇을 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 사울을

예수님을 핍박하는 사울을 죽음을 거치게 합니다.

십자가 라는 하나님의 저주를 거치게 합니다.


예수님을 핍박하는 마귀의 최선봉에 선 사울을

십자가만을 증거하는 사도바울로 변화시키는 것이

바로 십자가의 죽음을 거치도록 하는 겁니다. 십자가의 이중성을 말입니다.

그래야 죄인 중의 괴수, 부정성의 바닥을 칠 것 아니겠습니까?

바닥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을 정도로 계속 계속 바닥을 뜯는 무한 바닥 뜯기입니다.

과연 죽음이라는 바닥을 계속 뜯어보면 죽음이 있는지 예수님의 십자가가 있는지?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누가 꾀더냐 라는 겁니다.


좀 전의 누가복음에서 시므온 선지자와 안나 선지자는

소위 이중부정에 해당되는 자들입니다. 죄인 중의 괴수처럼 말입니다.

즉 상대적인 무리들과의 차이성인데

그들은 저번에 말한 것처럼 모든 구원의 장치를 완벽하게 구비해 놓고서는

마지막에 메시아만 그 자리에 안착하면 된다는 그들의 묵시관에

전혀 반대의 메시아가

메시아 스스로 자기자리인냥 누락되어 마땅한 자들을 내세우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부정의 부정입니다. 종말의 종말, 바닥의 바닥인 십자가의 이중성인데

반드시 의인 중의 의인들 앞에서, 죄인 중의 괴수를 앞장세우는 방식입니다.

세례요한이 이 노선, 즉 부정의 부정의 노선으로써 이 단절이라는 세례를 펼치는 겁니다.

물론 기존의 세례라는 의미는 연합이라는 의미인데

단절 된 적이 없는데 어떻게 연합이 되느냐입니다. 그래서 도끼맨으로써 모조리 차단하고 짤라내는 자가 세례요한이듯이

주님께서 들이대시는 메시아의 기능 곧 희년완성의 기능으로써 누구를 앞장세우는 고 하니

바로 세리 창녀 강도, 고아 과부 나그네인 겁니다.

누가복음은 특히 이방인 중의 한 이방인 나아만 장군 (아람(수리아) 왕의 군대장관 나아만(즐거움) 전쟁영웅인 문둥병자)

이방 여자 여러 과부 중의 한 과부(사렙다 과부 왕상 17장 죽었다가 살아난 아들의 어미)


(눅 4:25, 개역)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세 해 여섯 달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눅 4:26, 개역)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눅 4:27, 개역)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문둥이가 있었으되 그 중에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뿐이니라』


선지자 노선이란 결국 이 단절성을 제대로 보여주도록 되어 있습니다. 선지자 본인도 단절로써 말입니다. 즉 종말성입니다. 그러니 부정성을 앞장세우는 겁니다. 일부러 말입니다.

(그렇다면 거짓선지자와 그 패거리는 이들과 상대적인 개방의 노선이요, 기존의 구원장치 사수(유지 보수)입니다. 평강 평강이요, 종말과 심판 저주 죽음 멸망은 없다. 단절은 없다. 소통과 동일성 뿐이다 라고 그들의 성령론을 말이죠. 반대로 참선지자는 정작 단절이 소통이듯, 넓은 길이 아닌 좁은길인 길 자체가 없는 것이 유일한 길이듯 종말을 부어버리는 겁니다.)


(눅 4:24, 개역) 『또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


(눅 4:28, 개역) 『회당에 있는 자들이 이것을 듣고 다 분이 가득하여』

(눅 4:29, 개역) 『일어나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내리치고자 하되』


그래서 분해서 죽이고자 하는 숨어있는 본색을 들추어내도록 깨작 깨작 사람 속을 긁어내는 겁니다. 바닥 뜯기입니다. 3년 6개월 동안 비오지 않도록 기도하기, 오직 사렙다 과부에게만 보내심바 되기,


그냥 이방 중의 이방인이 아닌 이스라엘 중에 라고, 많은 이스라엘 사람 중에 라고 

일부러 일부러 상대적으로 이스라엘을 걸고 넘어지는 겁니다. 

뒤짚어 씌우기 라는 종말성 단절성입니다.

마치 출애굽기에서 애굽왕을 걸고 넘어지듯이 말입니다. 결국 속 끍어대는 것이 목적이였지 과부와 문둥병자의 구원이 목적이 아닙니다.

심판을 거치지 않는 구원은 의미가 없는 겁니다.


[그 중에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뿐]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

(이스라엘을 일부어 뒤짚어 씌우듯이 끍어대는 겁니다.

왜 잃어버린 양 이스라엘 외에는 보내심을 받지 않았다고 했는데

오히려 이방여인이 맞습니다 저 개입니다 개도 주인의 밥상에서 떨어진 부스래기로 은혜를 입지 않습니까 라고 왜 정작 이스라엘은 이 믿음이 없다고, 잃어버린바 되지 않았다고

이스라엘을 도리어 깨작 깨작 끍어대시는 겁니까? 손할례자에게 일부러 마음판의 할례자를 새롭게 만들어서 대비 대조 충돌 시키는 겁니다.)


(마 10:6, 개역)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마 15:24,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


나아만이나 사렙다 과부가 목적이 아닙니다.

마귀를 거치지 않으면 이들도 의미 없는 겁니다.

애굽을 거치니 않으면 이스라엘이 의미가 없듯이

이제 신약의 새이스라엘 신부는 옛이스라엘을 거치지 않으면 의미가 없는 겁니다.

바리새인(마귀)을 거치지 않으면 우리는 4복음서의 예수님의 차이나는 해석을 알길이 없습니다.

마귀를 거치지 않은 예수님은 조작 될 뿐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그 당사자 바리새인으로써 이 마귀를 거쳐서 예수님과의 차이를 드러내는데 있어서

인간을 배신 때리고, 마귀를 배신 때리고, 유대사회(성전)를 배신 때려

본인이 정작 스데반 집사(참성전이 예수다 라고 외친, 사람의 손에 짖지 않은 성전을 외치다 

청년 사울에게 죽임당한, 그 당사자 바울이 도리어 스데반집사의 외침인 유대성전을 거부하는 겁니다. 배신 때리는 겁니다. 이 얼마나 악마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이 서로 충돌하여서 그 고지을 하루에도 몇 십번 주인이 바뀌는 상황아닙니까? 이미 완료로써 말입니다.) 죽인자로써 다시 유대인의 하나님을 배신하고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주 되심을 증거하는 겁니다. 그 기준이 된 것이 십자가에서 새로 태어난 바로써 말입니다.

종말이 임해서 비로소 터져나오는 외침이 십자가의 복음인 겁니다.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하지 않겠다고 하는 겁니다. 바울이 목적이 아니라 십자가가 목적인

예수님의 죽음이 목적이다는 겁니다.


부정을 부정하는 겁니다. 죄인 중의 괴수, 원수 마귀 중의 마귀인 바울을 부정하는

그 부정성을 부정해 버리는 겁니다. 긍정 곧 최고의 긍정이라는 뜻이 아니라

숨어있는 마귀를 드러내는 유일한 것은 십자가의 사랑이라는 겁니다.


종말을 갖추어서 메시아만 앉으면 된다고 완벽하게 준비한 그 유대사회를

부정해 버리고

그것을 준비한다는 그 일로 인해서 그들에게서 부정당한 한 과부, 한 문둥병자를 앞장세우는 것이 십자가라는 임마누엘 전쟁이라는 겁니다. 소경을 앞장세우는 전쟁입니다. 할례전쟁.

(막살아라 라는 의미가 이 부정성입니다. 자기 뜻대로 살라는 말이 아니라 말이죠. 성령의 소욕에 의해 육의 소욕과의 충돌을 말하는 겁니다.)


그래서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며, 음부 보다 더 투기하며 시기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청년사울을 사도바울로 바꾸시는 목적은 바로 마귀보란 듯이 입니다.


십자가란 도저히 용서 받을 수 없는 원수 중의 원수를 용서하는 사랑입니다.


거기에 가장 적격한 인물이 바로 청년사울입니다.

사울은 정작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처럼

십의 이조에 이조를 더한 사조를 하는 자이고

이레에 금식 두 번 하는 바리새인 보다 배로 하는 네 번이나 하고


(눅 18:10, 개역)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눅 18:11, 개역)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눅 18:12, 개역)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눅 18:13, 개역)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불의함이나 간음이나 토색 따위는 일체 하지 않는

의로움이 두배요 정결함이 두배요 거룩함이 두배임을 자부하는

자신만만한 이 자를


어떻게 저런 지옥에서 건져

천국으로 옮기는 작업으로써 낮추시는지

죄인 중의 괴수 라는 죄인 곱빼기로 낮추시는지(저게 진짜 지옥입니다. 의로움을 두배로 갖추어야만 하고, 거룩도 성화도 정결함도 이것이 사람을 기쁘게 하고자 하는 그야말로 지옥 그 자체가 아닙니까?, 사망 뚫을수 없기는 매 마찬가지이거든요. 사랑이 없기에 죽음도 못 뚫으면서 저런 쓰레기 배설물 똥덩어리만 가득 쳐 바르는 겁니다. 얼마나 악취 나는 줄도 모르고 더 발랐다고 자랑하듯, 이것이 우리 속의 악마가 조정하는 노리개로써 작용하는 겁니다. 오죽하면 막살지 않겠다고 지옥을 자랑하는지?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모래성을 쌓는지? 어차피 반석이 아니기는 매 마찬가지인데?)


누가복음18장에서는 두 사람이지만

오늘 본문은 한 사람 청년 사울

그냥 청년사울이 아닌

스데반 집사를 죽인 기세 등등한 사울

그것도 모잘라서 예수 믿는 자를 모조리 다 죽이고자 다짐한

그야말로 곱빼기 사울


그래서 예수님 말씀이 그야말로 너무 너무 정확합니다.


나는 너가 핍박하는 예수다 라는 말씀


(행 9:5, 개역) 『대답하되 주여 뉘시오니이까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이런 청년사울을 어떻게 사도바울로 낮추시는지?

어떻게 분명히 큰 자였던 사울을, 작은자 바울로 바꾸는 교체작업을 하시는지


(눅 18:13, 개역)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눅 18:14, 개역)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 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그것은 바로 십자가의 죽음이 아니면 그런 일이 벌어질수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단절성인

십자가의 죽음으로 몰아넣는 겁니다.

시므온 선지자, 안나 선지자는

이 십자가라는 표적 때문에

84년이라는 과부라는 단절성

그리고 시므온은 드디어 왜 죽지 않고 아직까지도 살아있었는지

제대할 날짜가 넘었는데 왜 자꾸 연기되었는지

드디어 아기 예수를 안고 십자가라는 걸림돌을 외치고(종말)

무대 뒤로 누락됩니다.


바로 이 단절성 속으로 집어넣는 것이 사울을 낮추는 길입니다.

십자가 속으로 집어넣는 겁니다.

그 죽음에 넣어야

그 3일이라는 간격 속에서 바울이 새롭게 태어나는 겁니다.


(행 9:7, 개역)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섰더라』

(행 9:8, 개역)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행 9:9, 개역) 『사흘 동안을 보지 못하고 식음을 전폐하니라』


단절성이란 곧 종말이란

이 간격의 틈사이를 그 어떤 무엇으로도 매꾸어 넣을 것이 없다는 겁니다.

그냥 그 흔적 그 표적 그대로 증거하는 증표가 되는 겁니다. 그것을 할례라고 했는데

신약에서는 세례입니다. 예수님과의 짝꿍인 공명이 된 겁니다.


사울은 여러 사람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죽었던 예수님을 만난 겁니다.

죽었는데 어떻게 만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살아야 만나는게 가능하다는 겁니다. 그런데 죽은자를 만난 겁니다.

만남이란 죽은자에게는 해당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만났습니다.

만난 것은 분명합니다.


더 중요한 것은 죽었는데 어떻게 핍박받았다고 뒤짚어 씌우는 겁니까?

살아 있는 자에게만 해당 되는 것이 핍박입니다. 그런데 죽었는데 남도 아닌 청년 사울이 죽였는데 살아있는냥 핍박 받았다고 우기고 있는 겁니다. 이것이 종말 단절성입니다.

마음판의 할례인 종말이 뒤짚어 씌움 당하듯이 당하는 겁니다. 빼도박도 못합니다.


(죽였는데 핍박 까지 이것이 이중성입니다. 무한반복인 십자가의 반복입니다.

십자가를 괜히 건드린 겁니다. 선악과처럼, 그래서 취소 되기는커녕 더 활활 타오는 겁니다.


그래서 선지자는 십자가를 더 건드리는 겁니다. 3년 6개월 동안 비오지 않기를 기도하는 것이 바로 믿음으로써(행함이 있는 믿음) 이 부정성인 십자가를 자꾸 자꾸 건드리고 이중화 시키는 겁니다.)


오로지 청년사울에게만 뒤짚어 씌움을 당하는 종말이 임한 겁니다. 오직 혼자 말입니다.


그런데 여러사람들이 같이 있었는데

그들은 듣지도 보지도 못한 겁니다. 여러 사람이 있어도 혼자 그 음성 뒤짚어 씌우는 음성을 듣는 겁니다. 혼자 보는 겁니다.

여기서 사울은 보편적단독자로써 예수님의 죽음을 홀로 만난 겁니다.

자신이 죽인 예수님을 자신이 만나 버렸으니

이것은 좀 전의 누가복음 내용처럼 율법의 모순처럼

자신의 모든 감각의 모순이 벌어져 버린 겁니다.

신체를 전복시키는 다른 신체를 만난 겁니다.

졸지에 자신의 신체가 거짓됨이 밝혀져 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이 말도 안되는 것을 거짓 취급해 버리고

혼자만 알고 모르는체 일어나지도 않은채 하고 싶어도

이미 자신의 신체는 거짓이 되어버리고

자신의 신체인 손에 죽은 예수님의 신체가 진짜가 되어버린이상

그 신체만이 옳았다고만 외치는 신체로써만 작용하게 되는 것을

부인할수 없게 되어버림을 청년사울은 직시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만남은 사흘 동안 계속 됩니다.


눈은 떠 있어도 볼수도 없습니다.

먹을 수도 없습니다.

그저 사흘만의 그 간격을 그 단절성을 누리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예수 핍박자 였던 사울이

십자가의 예수만을 증거하는 바울로

뒤짚어 씌움을 당해야만 하는 그 단절성(종말: 뒤짚어 씌움당함) 말입니다.


본인이 하기 싫어도 소용없습니다.


십자가라는 자작극

즉 단절성이라는 자작극에 의해

반드시 예수 핍박자로 활동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 증거자로 활동해야만 하는 겁니다.


반대로 예수님을 3년 따라다녔던 예수 추종자로 활동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 팔아넘기는 자로 활동해야만 했던 가룟유다 라는 사도직을

바로 사도바울이 받듯이 말입니다.

(제가 이 부분을 철학책을 보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맛디아가 그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제비뽑기를 하지만

정작 의미상으로는 사도바울이 가룟유다를 대신함을 그들이 외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 의문스러운 점은 정작 그들은 사도바울이 외치는 십자가에는 도통 관심이 없습니다. 그래서 단절성이라고 하는 것일까요? 인물에는 그리 관심 가져도 그가 외치는 십자가 복음은 전혀 접근도 못하고 있으니 말이죠.

또하나는 바울에 항상 사도라는 의미가 늘 따라 붙습니다. 세례요한처럼 요한에게 세례라는 의미가 늘 붙듯이 말이죠. 그것은 단지 차이성 구분성을 부각하기 위함 보다, 그 정도로 늘 사도성이 늘 의심받을 정도로 따라다닌 문제였다는 거겠죠. 그러나 정작 사도바울에게는 그것이 전혀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가룟유다의 빈자리를 채워서 가룟유다처럼 늘 언제 배반할지 몰라서 불안한 마음을 해소하는게 목적이 아닌, 오히려 십자가가 나를 낳았다고 당당하고 뻔뻔스럽게 외치는 겁니다. 그래서 죄인 중의 괴수라고 죄인 꼽빼기성을 외치는 겁니다. 단절되어 너무 단절 되어 마땅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용서의 사랑을 받았다고 더더욱 당당하게 말입니다.)


예수 핍박자 청년 사울은 어떻게 높은자에서 낮은자로 주님께서 긍휼의 대상물로 삼게 되었습니까? 

바로 십자가의 죽음인 사흘간의 단절성 종말입니다. 뒤짚어 씌우기입니다.


금식 자랑하기 위해 이레에 두 번 금식이 아닌

진짜 죽음입니다. 

따따블 꼽배기 금식인 4번 금식이 아닌

진짜 저주 속에

십자가의 심판 속에

하나님의 저주 속에 들어간 겁니다.


마치 물 위에서 베드로가 만난 예수님이 아닌

풍랑 일어 빠져 죽어야만 했던 그 단절성의 죽음 속에서 만난 예수님입니다.


비로소 터져 나오는 소리 

주여 뉘 시 오니까 나는 죄인 이로소이다 라는 소리가 나오는 겁니다.


평상시 알던 예수가 아니다는 겁니다.

자기를 원수 삼고 심판하고 저주하고 죽일려고 달려드는 예수라는 겁니다.

마귀를 거쳐서 예수님을 보여주시는 겁니다.

마귀를 거치지 않는 예수는 예수가 아니무이다 라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을 그 단절성(종말:십자가) 속에 집어넣는 겁니다.

예수님과의 만남입니다.


비로소 만난 예수님은 자기가 알던 예수님이 아닙니다.

이단자 예수가 아닌 겁니다.

오히려 자신이 순 엉터리 이단자였던 겁니다.


그것을 그 내용 그대로 외치는 겁니다.


이것이 낮은자입니다. 높은자가 아닙니다.

높은자는 자기가 어떻게 예수 믿게 되었는지 예수믿는 것을 자랑하는 겁니다.

그러나 낮은자는 자신이 왜 예수님의 원수인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서하신 그 십자가의 사랑이 나를 죄인 중의 괴수로 만드시는지


높은자가 외치는 예수, 십자가, 성령은 전혀 십자가의 사건이 재현되지 않습니다.

그저 사람을 기쁘게 하는 감동만을 전하고 끝날 뿐입니다.

그저 예수는 인간의 종교성의 대상물일 뿐입니다.


그러나 낮은자가 외치는 예수는 졸지에 비방받는 표적이 되는 

또 다시 십자가 사건이 재현되는 증폭이 벌어지게 되는 겁니다.

이것이 기뻐하심을 입은 자는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이 단절성의 대상물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숨어있는 마귀가 드러나는 겁니다.

마귀가 가장 듣기 싫어하는 십자가의 사랑을 거부하는 그 맹렬한 거부성이 가시화 됨으로써

사도바울은 자신도 그랬다고 당연한 일이 벌어졌다고

도리어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누가 꾀더냐 라고 우리를 나무래고 있습니다.

딴데 눈 돌리지 말라고 오로지 푯대만을 바라보라고 호통을 치는 겁니다.


이것이 얼마나 넉넉한 완료의 미쁘심입니까?


핍박이 당연하지 않느냐 라고

쓴 고난의 잔 쓴 나물을 마시라고 격려해주고 있습니다.


한 눈 팔 겨를을 주지 않으니까 말입니다.


맞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핍박했던 자입니다.

그렇게 우리 손으로 예수님을 죽여 놓고도

정작 예수님은 우리를 용서 해 주셨습니다.

살인자를 말입니다.


이런 원수도 용서하는 사랑이라면

무엇이 진리이겠습니까?


사도바울은 자신의 목숨보다더 더 아끼던 하나님에 대한 열심을

배설물 쓰레기로 취급해 버렸습니다.

그 하나님이 하나님이 아님을 예수님을 만나고 하나님도 버렸습니다.

그 빈자리에 십자가만 현실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리고 진짜로 아무것도 아닌 

이 십자가라는 무의미한 것만 의욕하기로 작정했습니다.


이 십자가에 모든 것을 걸어버렸습니다.


싫어버린바 된 십자가

걸림돌인 단절성인 종말의 십자가

어리석기 짝이 없는 십자가

미련하기 짝이 없는 십자가


모든 부정한 것이 다 담겨져 있는 십자가

그 부정의 부정이

진짜 참된 사랑임을


사도바울은 사흘이라는 십자가의 죽음의 저주 속에서

새롭게 태어나는 겁니다.


건달(죄인 중의 괴수)는 착해지면 끝이다, 차카게 살면 끗이다 라는 개그콘서트의 개그처럼
그 끝을, 그 종말을, 그 단절을 미리 앞당겨 외치는 겁니다.


에디오피아 내시가 고난의 종을 만나야 했듯이

고난의 종이 청년사울을 만나줘야 했던 겁니다.

핍박받는 예수님이 핍박자 사울을 만나야

왜 고난의 종을 만나지 않으면 안되는지

자신이 하는 일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착각임을 알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물에 빠뜨리듯이

죽음에 빠뜨리는 겁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처음자리 근처도 가본적이 없던 자가

비로소 그 처음자리 십자가에서 새로 태어나야 비로소 이스라엘이 무슨 의미인줄 알 듯이

예수님이 가해자 청년사울을 섬기지 않으면 그는 마귀에게서 벗어날 수 없게 되는 겁니다.


처음사랑인 처음자리로써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도리어 핍박자임에도 불구함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그 십자가(어리석고 미련하고 싫어버린바 된 걸림돌을)를 부끄러워 하지 않고 

오히려 더욱어 뻔뻔스럽게 자랑스럽게 외치는 겁니다.

살인자이니까 십자가가 더 의미있기에

죄수 중의 괴수 복을 입고서 십자가의 피를 외치는 겁니다.

얼마나 기쁘면 아무것도 안보이는 것일까요? 오로지 십자가의 은혜만 보일 뿐입니다.


이것이 종말에서 태어나는 십자가의 증상으로써의 성령의 전인 종말의 단체 새이스라엘입니다.



예수님! 우리도 청년사울처럼 예수님을 핍박하던 원수인 자입니다.

핍박받는 자는 예수님 뿐이였고, 모든 인간은 청년사울처럼 핍박자 였습니다.

피해자는 예수님 뿐이고 우리는 가해자였습니다.

그야말로 죄인 중의 괴수 맞습니다.

일급 살인자 맞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원수에게 나타나주심

그리고 만나 주심

그리고 너가 핍박하는 예수 다 라고 말해 주심

그 배려로 인해

그 단절로 인해

십자가의 죽음 속에서 태어나게 해 주심을 감사합니다.

그 사랑을 감사하고 기쁘게 누리도록 해 주시옵소서

그리고 그 십자가의 사건이 매일 우리를 휘감도록 해 주시옵소서

너가 핍박하는 예수다 라고 알려주시는 그 섬기심에

그 음성을 들려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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