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방(은밀한)과 기도


2013년 2월 27일 수요일 오전 10:04:31



(마 6:1, 개역)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마 6:2, 개역)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마 6:3, 개역)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마 6:4, 개역)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마 6:5, 개역)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저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마 6:6, 개역)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왜 골방에서 기도하라고 하시는 걸까


예수님을 만난지 얼마되지 않은 19살 때 였던가?

이 말씀을 보고 골방을 찾아다녔다.

집 구석에서 골방이라고 치면 다락방 뿐이였는데

다락방은 너무 습한곳이라 밤에 기도하기에는 뭐하고

그냥 방에서 하면 될 것을 구지 골방을 찾겠다고 한 것이 

우습게도 장롱이였던 것이다.


문제는 그 만큼 다급할 정도로 애탓던 것을 고쳐달라는 간절함 때문이였다.


장롱안에서 큰소리를 쳐도 소음은 줄일수 있겠다 싶어서

골방으로 삼아 기도를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웃기지도 않는 모습이지만

그때는 자기 따나 심각했는가 보다.

얼마나 고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으면

다급하다고 생각했는지 말이다.


그런데 오늘 살펴보고자 하는 골방의 의미를

왜 산 위 높은 곳이 아닌 골방인가 라는 생각이 문득 들어서 골방이 뭘까 라고 생각해 본다.



(마 6:6, 현대어) 『그러니 너는 혼자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남의 눈에 띄지 않는 데서 너의 아버지께 기도하라. 너의 비밀을 아시는 아버지께서 다 들어주실 것이다.』


(마 6:6, 쉬운) 『기도할 때에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숨어 계시는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숨어서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네게 갚아 주실 것이다.』


(마 6:6, 공동) 『너는 기도할 때에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보이지 않는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아버지께서 다 들어주실 것이다."』


드라마 삼생이를 보는 가운데 [좋은 의도들이 큰 벌을 받는다](희생의 희생, 거절의 거절)는 말처럼 주인공이 정작 좋은일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남의 병고칠려다가 자기가 도리어 병걸리게 되다 보니 주인공은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습니까 라고 물으면서 어릴적부터 산에서 산신령에게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


아 이거구나 왜 골방일까 라는 의문이 들어서 글을 적게 되었다.


지금도 교회 가는 길에 도저히 꽉꽉 찬 버스 안의 공기가 숨막힐 것 같아서

좀더 적은 사람들이 타는 버스로 빙둘러 가고 있다.

그러나 역시나 버스안의 반의 반이 다 산으로 향하는 높은 산에 기도하러가는 사람들이다.


왜 높은 산에 가야 기도가 되는 것일까?

소위 과거에 기도원 간다고 교회차 타고 기도원에 가보면 대부분 산 위이다.


물론 고함쳐도 소음상 상관없는 곳이라 높은산이 낫다고 보겠지만

정작 주님은 시끄럽다 라고 귀를 막는 이사야 6장의 내용을 보면


인간이란 자기 좋으라고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로 말씀을 이용하기 마련이다.

목사는 좀 나을 줄 알았는데

더 심각하다.

나 또한 별수 없는 놈이다. 예외가 될 수 없다.


높은 산을 찾는 이유는 아마 빨리 기도를 들어달라는 취지일 것이다.

그만큼 급박하다는 문제가 닥쳤으니 빨리 해결해 달라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성경 말씀이다. 예수님이 문제다.

왜 골방인가 말이다.

성경상의 문자에서는 남들에게 기도한다는 티를 내지 않는

자기자랑을 문제 삼는 듯이 보이겠지만


오늘 살펴보니 그것이 아닌 것 같다.


은밀함이라는 구절이 예사롭지 않게 보인다.


비밀


그런데 너의 비밀을, 너의 하나님이 숨어서 은밀하게 보신다 라고 했다. 비밀의 비밀, 비밀의 이중성. 비밀의 반복.


과연 비밀일까?


뭐가 비밀일까? 문제가 닥치면 비밀이라기 보다는 그저 빨리 해결해달라는 것이 목적이지

구지 비밀이라고 할 필요가 있는가?


막상 지금 글로 써보니

이 비밀이 더 궁금해 진다.

도대체 비밀이 뭔가?


은밀하신 주님이 은밀하게 숨어서 너의 비밀을 보시고 있다 라고 했다.

그런데 이 비밀을 비밀이신 주님이 보신다고 했는데

도대체 비밀이 뭐냐 라는 것이다.


지금 마태복음 6장은 마태복음 5장의 산상수훈의 내용으로써 연장된 선상에서

주님의 선하심을 증거한다. 마4장에서는 마귀의 3가지 시험을 말씀하시면서

그 간격의 차이성으로써 산상수훈이 증거됨으로써(물론 성화론자들의 최고의 선인 산상수훈의 해석과 또 다른 해석이 예수님의 산상수훈이다.)

그 내용이 나열되고 있다.


즉 이스라엘 유대인으로부터 출애굽하듯 출이스라엘 하면서

마귀의 손에서 빼내시는 그 구원이 어떻게 마귀와 같은 강퍅한 유대인(바로왕)들 손에서 빼내시는 그 차이성이 유대인의 해석과 예수님의 해석과의 차이로써 산상수훈이 증거 되고 있다.


오늘 골방에서의 기도는

유대인의 기도와 예수님이 기도에 대한 해석의 차이이다.

율법을 손아귀에 쥔 유대인의 기도해석은

나 율법 지키고 있잖아 라는 해석이다.

어려울 때 기도하라 기도하면 다 들어주신다. 율법(말씀)을 지키는 자 한에서만 다 갚아주신다.

그런 말씀을 지키는데 뭐가 틀렸냐? 그들 기도가 맞다는 것이다.

물론 노골적인 이런 모습은 예외적이고 얼마나 순하디 순한 겸손한 자세인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그 속내를 끍어보면 역시나 그 예외성이 튀어나오는 것은 예외없다.


그런데 예수님의 해석은 그것이 바로 이방인처럼 중언부언의 기도다 라는 것이다.

사람에게 보일려고 한다는 것이다. 의로운 행위들이 왜 이런 타인과 연결이 된 것일까?


라캉에 의하면 내가 곧 타인이다. 타인이 곧 나다 라고 말하고 있다.

타인의 욕망이 곧 나의 욕망이다는 것이다.

자 이렇게 되면 내가 기도하는 것이 대부분 타인들이 욕망하고 있다는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이 일방적으로 유대인들의 기도에 뒤짚어 씌우기 식으로 해석하는 것은

결국 너희들은 악마의 기도를 하는 것이다. 마귀의 3가지 시험으로 예수님께 시험하듯이 기도한다는 것이다. 마귀처럼 말이다.


여기에 예수님의 차이성을 기도에 대한 새로운 해석으로 펼쳐진다.


은밀하게 기도와 구제와 의로움을 하라 라는 것이다.

이것을 또 행하라 했으니 행하면 될 것 아니냐 라고 나오면 곤란하다.


비밀이라는 은밀성은 그런 것이 아니다.

반드시 구제와 기도 라는 은밀성은 인간이 갖출수가 없다.

행하게 되면 반드시 자랑하도록 되어 있다.


이 부분을 예수님이 콕 하고 찝어 주시고 있는 섬김을 봐야 한다.

반드시 자랑 하도록 되어 있다.

행한 자신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요

그 자아가 곧 타인이요

타인의 욕망이며 자신의 욕망이니 말이니 어쩔수가 없다.


바로 이런 욕망에 주님이 손 대신다는 것이 바로 은밀성인 비밀이다.


구원이라는 출애굽사건이라는 것은 바로 그것과의 단절성이다.

짤림이다. 차단이다. 거리두기요 거절이요 희생의 희생이다.


이것이 비밀이요 은밀성인데

그것이 바로 골방이라는 심연이다.

높은 산이 아니라

밑바닥으로 꼬라박기 이다.


이것이 너의 은밀한 비밀이다는 것이다.

여기에 이중 비밀처럼 은밀하신 주님이 개입한다는 것이다.

은밀한 중에 너를 보신다 라는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점은 위에서 언급한 비밀이 뭔데 라고 의문을 가진 나의 물음처럼

인간이란 은밀성이 없다.


그런데 비밀을 은밀하신 주님께서

은밀한 중에 숨어서 그 비밀을 심으신다. 비밀을 뒤짚어 씌우신다.

예수님께서 말이다. 이 은밀한 숨은 비밀 때문에

졸지에 나에게 비밀이 졸지에 생겨버린다.

비밀이 전혀 없던 자에게 비밀을 심어서

비밀을 펼치는데 작용하도록

은밀한 중에 보신다는 것이다.


그 비밀이 뭔데 뭔데?

억수로 궁금타 비밀뭔데 캐봐라?


모른다 !  에이 그게 무슨 비밀이고?


모르기 때문에 비밀이다.


모르지만 알수 없지만 이상하게 비밀의 증상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비밀 때문에 나타나는 증상 징후 노이로제

이것이 바로 기도요 구제라는 것이다.


그러면 당연히 가짜 비밀과 진짜 비밀이 나타나기 마련이다.

진짜 비밀은 다윗이라고 보면 되며 (야곱, 아벨, 베드로, 사도바울, 모세, 탕자, 등등)

상대적인 가짜 비밀은 사울 이다.(형에서, 가인, 가룟유다. 청년사울, 애굽왕 바로, 맏아들 등등)
반드시 두 왕의 대립으로써 항상 대립적이다. 왜 항상 아버지는 두 명일까? 인것처럼.


그렇다면 주님께서 어떻게 비밀로써 개입하면서 믿음에서 믿음으로 이르게 하시는가?


(롬 1:17, 개역)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분명히 모든 인간은 타인의 욕망이다. 지나 개나 다 같은 욕망 뿐이다.

마귀가 심어버린 이상 마귀에게 갇혀버린 이상 다 같다. 인간 내부는 다 똑같다.

그런데 주님께서 외부에서 심으신 것이 있다. 바로 하나님의 의 다.

이것이 믿음으로써 비밀스럽게 심으신바 된다.

심었다고 해서 계속 자기 내부에서 찾을수 없다.

계속해서 외부에서 작용하는 은밀한 중에 숨어서 보시는 바인

여전히 외부에서 공급하는 비밀인 믿음이다.

믿음이 믿음을 땡기는 식이다.


그 비밀의 증상 징후 노이로제(강박증, 병적, 신경증)로써

기도와 구제라는 것이다. 즉 처음자리인 무능함이다.

기도란 부르짖음이다. 살려주세요 라고 외치는 부르짖음이다.

무능하기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애굽왕을 강퍅케 하니 저절로 터져나오는 부르짖음이다.
마귀의 강퍅함 앞에 철저한 무능함만 드러나기에 그 증상으로써 부르짖음이다. 강퍅함이 없다면 무능함도 없다.
결국 기도의 대조성은 강퍅함이다. 보이지 않는 존재의 강퍅함 앞에서의 무능함.
다윗은 그래서 기도했다. 회개 금식 눈물기도가 먹혀들지 않을 정도로 무능함에 모친의 죄 중에 태어났음을 울부짖는다.

주님의 자작극으로써 걍퍅자를 만들어내었기 때문에 당연하게 나타나는 무능자의 외침이다.

구제란 그런 구원받은자끼리 이미 죽은자로써 생명을 공급하는 자로부터 이사람줘라 네

아 저 사람요 라고 생명이라는 의를 이동 옮기는 것일 뿐(흐름:임의로 부는 바람)인데

그런 무익한 종(빚을 갚을 능력이 없는 무능력한 빚진자)이 그것을 행했다고 자랑하니

정작 의가 뭐가 되는가? 그래서 일만달란트 탕감의 비유가 용서를 자기 의로움으로 끌어당겨버리니 의의 흐름이 훼방을 당하니 정작 너가 그 훼방을 감당해 보라 라고

용서를 용서 답게 하기 위해, 의의 흐름을 의 답게 하기 위해, 심판해 버리는 것이

일만달란트 탕감 비유(마 18장)이다.


(눅 12:10, 개역)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받으려니와 성령을 거역하는 자는 사하심을 받지 못하리라』



그래서 마 6장을 살펴보면 처음에는 구제 그 다음 기도 그다음 금식 그다음 재물 등등으로

자꾸 외식하는 자인 그당시의 해석의 주류인 바리새인의 외식과 대비시킨다.

바리새인이 보편적 단독자 곧 대표성으로써 대비가 된 것은

오늘날 우리의 해석을 그 대표자로 대비해 놓고서는

불가능한 해석을 한 것이다.

내부에서 의를 찾아내는 해석이 아닌

외부에서 지금도 공급하시는 얼마나 무능하면 불쌍히 여겨주지 않으면 안되는

그 긍휼 때문에 주어지는 외부의 해석이다.


그런데 그때의 바리새인이나 오늘날 우리들처럼

자꾸 의로움을 자기 내부에서 찾아내어서 해석하게 되니

산상수훈을 얼마나 마귀들이 꽉 쥐고서는 놓지 않을려고 한다.

그러니 더더욱 외식 할 수 밖에 없지 않은가? 외식에 말려드는 결과다.

외식하지 않을려고 산상수훈과 일치할려는 동질성이 더더욱 외식하게 되는 결과다.


외부의 해석에 대한 거부이다. 곧 성령 훼방이다.

도리어 해석 당해야 할 대상물이

산상수훈을 최고의 덕목으로 대상으로 삼았다고

그것을 쥐었다고 하니

무한 용서 받아야 할 자가, 7번 용서 해야 합니까 라고 용서를 대상물로 삼는 것이다. 용서 할려고 달려든다.
그 반대다 7번에 70을 곱할 정도로 너무 너무 용서 받아야 할 정도로 무한대의 용서를 받아야 날만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이것을 관계 또는 사귐이라고 한다.


그래서 골방이다. 즉 은밀성이요 비밀이다.

비밀이 비밀로 이르게 하는 것이다.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

분명 구약 출애굽기에서 모세는 바로왕이 두려워 도망쳤다.

그런데 신약 히브리서에서는 모세는 바로왕을 두려워 하지 않고 믿음으로 행했다고 한다. 뒤짚어씌운다.


앞 뒤 안 맞는 이 모순의 간격, 이 간격을 무슨 수로 좁힐수가 있단 말인가?

외부의 해석인가? 

아니면 내부의 해석인 바리새인들이 우리는 아브라함 자손이요 모세의 제자다 라는 해석인가?

이미 아브라함 자손도 도끼맨 세례요한으로부터 짤려버렸고

모세의 제자 됨도 실로암 소경으로부터 단절 거부 당해 버렸다.

그래도 빡빡 끝까지 우기는 그 완고함만이 그들의 내부의 해석이다.

이런 유대인인 바리새인의 해석이

오늘날 우리들의 모습이 아닌가?


그 어디에서도 무능함인 처음자리를 찾을수가 없다.

즉 비밀을 찾을수가 없다. 은밀한 심연이 없다.


그들은 이 비밀을 놓쳐버렸다. 그리고 비밀 대신에 외식함으로 가득채워 버렸다.

비밀이 더 이상 비밀을 제공해 주지 않게 되니

그 비밀이 떠난 자리인 빈공백에 외식함인 행함만 가득채운 결과다. 곧 선택론이다.

아브라함 자손, 모세의 제자 라는 구원론만 가득 채운 결과다.


오늘날에도 똑같은 경험을 해 본다.

더 이상 죄인 죄인 카지 마라

주님께서 용서해 줬는데 왜 죄인이냐 우리는 의인이다. 예수님의 피로 의인이다.

십자가는 단 한번으로 족하다. 자꾸 십자가 십자가 카지 마라


캬 이것이 우리 속의 악마의 본색이다. 우리의 본색이다. 모든 인간의 타자화된 욕망이다.

십자가는 더 이상 언급하지 말라는 것이다.

걸림돌이 아니라 디딤돌이요, 단절이(거절, 차단, 거리두기, 거부, 희생의 죽음, 저주)가 아니라 개방이요 소통이다는 것이다.


더 이상 골방이라는 어둡고 차디찬 습하고 냉냉한 비밀(은밀함)이 아니라

높은산에서 외치는 따뜻한 개방이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꾸 물없는 곳, 양식 없는 곳, 생명이 없는 곳인 광야로 몰아가시는 그 단절은

기도와 구제와 금식과 재물 등등에 담겨진 비밀을 보여주시기 위함이다.


그 광야교회에서 격게 되는 비밀, 은밀성은, 바로 약속과 육의 차이성이다.


믿음과 행함의 차이성이다.


비밀이라는 숨은 은밀성과 개방의 차이이다.


기여이 저들과의 차이성을 내겠다는 주님의 똥고집이

바로 산상수훈이지

우리가 산상수훈을 대상으로 삼을 수 가 없다는 취지이다.

도리어 대상물이 된 것이다.


기도의 대상물이 기도자로 태어난 자이다. 비밀이다. 출생의 비밀. 자기숙제 없다.

그러나 기도를 대상물로 삼은 자는 기도하기에 빠져버린다. 외식이다. 자기숙제 뿐이다.


산상수훈에서 언급된 기도 금식 구제 다 그런 의미이다.


좀 간략히 살펴볼까?


1. 마 4장 마귀에게서 3가지 시험 받고 (마 4:1-11)

2. 난 뒤 (마 4:12-17) 비로소 복음을 전파하신다. 희년선포요 그 희년의 대상물인 고아 과부 나그네 곧 구제대상물


(마 4:14, 개역)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마 4:15, 개역)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마 4:16, 개역)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 하였느니라』


흑암에 폭삭 주저앉은 백성,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자들


(마 4:17, 개역)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하시더라』


빛은 이들에게 유효하지 의인에게는(빛의 아들들) 의미 없다. 고아 과부 나그네에게만 희년은 의미가 있다. 


3. 그리고 제자를 부르신다. 12이라는 새로운 이스라엘을 형성, 즉 기존의 12이스라엘과의 대조이다.


4. 마5장에서 산에서 8복을 외쳤다고 해서 산상 수훈이 그 복음의 내용, 희년의 구체적인 내용으로써 어떻게 외부에서 희년 곧 은혜를 뒤짚어 씌우시는지


항상 대비해서 차이로써 쉽게 설교하신다.

그 팔복이 마 5:1-12 에 기록


5. 세상의 소금, 세상의 빛 마 5:13-16 에 대해서


6. 율법을 폐하러 온게 아닌 완전케 온전히 이루려 함이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다.

마 5:17-20


7. 살인과 미움 마 5:21-26

살인 안한게 십계명 살인하지 말라를 지키는게 아니라

남을 미워한 것이 이미 살인이라는 십계명을 어긴 것이다. 그러니 심판받아야 마땅하다는 재판상의 법적인 심판성


8. 간음하지 말라 마 5:27-32 음욕을 품은자 마다 이미 다 간음한 자

눈을 뽑아버려라. 이혼증서도 같은 원리


9. 헛맹세 하지 말라 마 5:33-37


10.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하지 말라.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마 5:38-42


11. 네 이웃은 사랑하고 원수는 미워하라 했으나

네 원수를 사랑하고 너를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 마 5:43-48


12. 마 6:1-4 구제에 대해,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그야말로 불가능하다.


13. 마 6:5-15 골방에서 기도하라


14. 깨재재 하게 금식하지 말고 기름기 좔좔 흐르게 금식 죽음 티내지 말라 마 6:16-18 


15. 마 6:19-34 재물에 대하여, 두 주인 섬기지 말라.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16. 마 7:1-5 비판받지 않을려면 비판하지 말라. 남의 눈에 티는 보고 내 눈의 들보는 못 본다.

입만 띠면 다 비판이고 남을 험담하는 대험담꾼이 우리들 아닌가?

그야말로 악플러 악성 바이러스와 같은 우리들이다.


17.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고, 진주를 돼지에게 주지 말라. 마 7:6

내가 진짜 개요 돼지이다. 감히 거룩하기를 바라고 있으니 원.


18.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과 선지자다. 마 7:7-12

맨날 대접받음에도 불구하고 대접할 줄 모르는 그야말로 염치없이 얻어먹을 뿐이다.

생명의 은인과 같은 자에게 그저 대접받을 뿐이다.


19. 좁은 문으로 가라 마 7:13-14

넓은 길로 가지 못하면 그야말로 굶어죽는 것은 시간문제이다. 그런데 그것이 멸망의 길이다.

좁은 길 없는 길로 가라. 죽는 길로 가라.


20. 마 7:15-27 거짓 선지자를 삼가라. 열매로 알리라. 반석과 모래 위의 집의 차이.


자 이렇게 20계명이라고 할 정도로 율법(십계명: 궁극적으로 십계명을 의도로한) 보다 더 강화된 것이다.

지키라는 취지일까?

지켜라 라고 말하는 오늘날 목사들의 해석도

정작 단 한 개도 지키는 목사 없을 정도로 불가능한 것만 모은 것이다.

인간의 해석을 비켜가는 것만 모은 예수님만의 해석이다.


이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즉 대상물로 삼으라는 뜻이 아니라

대상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 산상수훈의 비밀성, 복음의 은밀성, 십자가의 믿음에 의해

대상물이 되었다는 것이다.

(결국 비밀이란 단절성 거부성 거절이다. 그리고 이 불가능성을 즐겨라 누려라 라고 누릴수 밖에 없다 라고 예정된 말씀의 성취를 우리에게 갖다 앉겨버리는 것이다.)

십자가라는 비밀을 우리를 대상물로 삼을 수 없다.

불가능한 것 뿐인데 지켰다고 착각해 버리면

오히려 상대적으로 대조시킨 인간 바리새인의 해석, 인간 내부의 해석이 대조적으로

차이내고 단절 거절 거부로써 증거한 산상수훈에 말려들게 되는 것이다.


소통이요 개방이요 연합이요 동일성 일치성으로 인간내부의 해석으로 덮썩 물어버린 것이다.


외부의 개입을 늘 새롭게 개입하는 외부가 없기에

믿음이 없기에


내부가 그 결핍을 견딜수가 없어서 덮썩 물어버리는 것이다.


그래놓고 외식이 아니다고 하니 얼마나 외식인가?

우리는 외식 뿐이다. 타인의 외식이 나의 외식으로 작용하는 상호외식 뿐이다.

즉 뒤짚어 씌우는 외식을 모르기에

내부의 외식이 아니다 라는 것만 내세우는 것이다.


모조리 다 비밀성이요 은밀성이다.

기도를 해석할 줄 모르는자 없다. 

그것은 이방인도 다 하고 세리도 다 할줄 안다고 했다.


(마 5:46, 개역)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마 5:47, 개역)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마 5:48, 개역)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금식을 해석 못하는자 있을까? 밥 먹지 않는 것. 

죽은채 하는 죽은자와 같아지는 것. 레알? 레알. 개그도 다 안다.


그런데 여기에 비밀이 개입해 버리면

아무도 해석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때 해석한다는 자와 해석불가능하다는 자와의 충돌이

바로 이 비밀 때문에 벌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차이로써 원수를 사랑하라 라는 비밀이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는 것이다.


과연 어떤 누가 원수를 사랑할수 있을까?

자기를 두들겨 패고, 잡아 죽이고, 모든 것을 빼앗아 버리는, 그 자를 위해 기도하는자 과연 있을까?


없다. 즉 단절성이다. 불가능성, 거절성이다.


가능하다면 그거 거부해 버린다.

가인과 아벨의 제사에서

제사 자체는 처음부터 거절입니다. 단절성이다.

그 어떤 누구의 제사도 처음부터 안 받도록 되어 있다.

그런데 이 불가능성을 가능성으로 기여이 바꾸는 것이 가인의 제사요

아벨의 제사는 역시나 불가능했군 이라고

비밀화 되어버리면서 죽임당하니 그 죽음이 졸지에 비밀이 되어버린 것이다.


가인은 그 가능한 제사를 계속 드릴수 있었을지 몰라도

아벨은 정작 가인으로부터 인해 불가능한 제사로 남겨져 버린 것이다.

이 얼마나 맞물려지는 비밀인가?


이 맞물려짐이 없이 가인은 개방의 제사에 빠졌으니 백날 드려도 소용없는 것이다.

어차피 안 받는데요 뭘


기도도 마찬가지이다.

애굽 왕 바로왕의 강퍅함이 맞물려져야

비로소 기도가 비밀이 된다.


즉 주님의 외부로써의 개입이 아니면 그게 무슨 기도이냐 말이다.


원수가 핍박해야 비로소 기도케 된다는 산상수훈의 말씀을

그 내부가 아닌 외부의 말씀이 술술 믿겨질까?


차라리 성화론자들의 산상수훈의 해석처럼 원수를 사랑합시다 라고

그것을 지키고 행하자 라고 하는 것이 훨씬 덜 부담되고

너무 너무 쉬워지는 것이다.


말라꼬 비밀이 개입할게 뭐가 있다고 말이다.


비밀이라는 수수께끼는

골방이라는 은밀성 단절성 거절성 거부 거리두기 은폐성의 기도와 같다.


사랑(십자가의 비밀)의 반대편에 놓인 십자가 사랑의 대상물로써 놓여지는 원수의 자리다.


그 자리에서 무능함이라는 비밀성 처음자리 곧 믿음이라는 실상을 바라보는 것이다.


아무리 봐도 산상수훈을 지킬수 있는 정직한 영이 우리에게는 없다.


교회 백날 다녀도 신앙 30년 100년 아마 1000년을 해도

비밀은 비밀이다. 


외부의 개입 뿐이다.

이 외부의 개입 때문에

철저한 단절 속에 놓여질 뿐이다.


그 단절성을(죄인 중의 괴수) 거부하기에

오히려 외식으로 그 빈자리를 채울정도로


우리는 그저 악할 뿐이다.


그런 마귀 중의 마귀인 이 원수를

허물을 보시지 않겠다는 십자가의 피흘리심은

우리를 매일 매일 외부에서 간섭하신다.


이런 이런 기도 하지 말고, 불가능한 비밀의 기도로 인도하신다.

뭐뭐뭐 기도 아니요, 뭐뭐뭐 기도가 옳다 라고 성령의 탄식기도로 알려주신다.


그래서 불쌍히 여겨달라고 긍휼을 바라는 것이다.


비밀은 내부에 있지 않고(아브라함 자손이다. 모세의 제자다)

매일 매일 새롭게 외부에서 공급해 주는 것이다. (사랑 : 불쌍히 여겨주심)


















Posted by 김 대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