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마을 2013년 여름수련회를 아래와 같이 개최합니다.

일 시: 2013년 7월 28일(일) ~ 30일(화)

장 소: 가야 호텔(경북 성주군 수륜면 백운리 1282-4)

주 제: 전도서 강해

강 사: 이근호 목사

회 비: 8만원(유치, 초등 5만원, 유아는 회비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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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련회에 참석을 원하시는 분들은 각 지역 책임자께 신청해 주시고

서울 경기: 이미아 선생 (010-9998-4171)

부산 경남: 박병규 목사 (010-2323-3571)

대구 경북: 이상규 집사 (010-2685-8211)

광주 전라: 김을수 집사 (010-2627-7800)

대전 충청: 김종인 권사 (010-8808-7111)

울산 지역: 김병만 집사 (010-4379-1471)

그외 지역: 서경수 목사 (010-2962-74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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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여름 수련회 교재 (전도서 강해)

주제 : “끝”

“선을 행하고 죄를 범치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아주 없느니라(전 7:20).”

“가라사대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 오늘과 내일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낫게 하다가 제 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하라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눅 13:32-33).”

Ⅰ. 서 론

생물책에 보면 동물 세포의 구조가 그려져 있다. 동그란 모양 가운데는 공 같이 생긴 핵이 자리 잡고 있고 주변에 리보솜, 미토콘드리아, 조면소포체, 활면소포체, 퍼옥시솜, 미세섬유 등등이 이미 녹아버린 팥빙수의 첨가물처럼 자리 잡고 있는 모양새를 보여준다. 전도서에서는 ‘해 아래’의 광경을 이런 식으로 보여준다.

자체적으로 각 요소는 서로만을 쳐다보고 있을 뿐이다. 죄라는 것도 성립되지 않고 멸망이라는 것도 발생되지 않는다. 그저 돌고 또 돌고, 변하고 또 변하는 현상을 보여줄 뿐이다. 자체적으로 지혜를 구축하고자 시도해보지만 본인 자체도 어지럽게 자연과 더불어 같이 변하는 입장에서 고정적이지 못하기에 실패하고 만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모호성이 곧 ‘해 아래’서의 지혜라는 것이다.

이 돌고 도는 가운데서 유일하게 기준처럼 거론되는 것이 곧 ‘해’다. 그래서 ‘해 아래’ 모든 가치는 한 덩어리로 녹아있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두 개의 상반된 가치로 분류할 수 있는 기준점 세우기는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이것을 ‘헛되다’로 표현한다. 하지만 애초에 ‘헛되지 않은 것’을 찾고자 하는 그 지혜자의 시도 자체가 허망한 기대가 아니었을까? 즉 지혜자는 ‘해 아래’ 세상에서 변화되지 않는 것을 찾을 수 있다고 여겼는가?

그것은 지혜나 진리가 궁금해서가 아니라 본인이 이 허망한 세계에서 탈출될 만한 지식을 확보하기 위함이다. 스스로 지혜를 알아서 그 지혜가 자신으로 하여금 허망한 세계에서 벗어나게 해주리라고 여겼다면 이것은 이 세상 자체가 조성해낸 지혜가 용납해주지 않는다. 그 이유는 ‘해 아래’서 동일한 운명을 간직해야 하기 때문이다. 마치 자신만큼은 달라야 된다는 의식 자체를 수정해야 하고 교정해야 한다. 단지 확실한 것은 ‘해 아래’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늘 반복 안에 갇혀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심판마저 이 반복적인 속성으로 진행된다. 과거에 이 세상을 살던 사람이나 미래에 이 세상에서 살게 될 사람이나 ‘해 아래’라는 동일한 조건 속에서 일생을 보낸다면 그들에게 주어지는 심판도 반복적으로 적용될 뿐이다. 이래야만 하는 이유는, 인간이란 이러기 위해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태어나서 죽지 아니하면 인간이라고 할 수 없다. 확실한 지혜를 얻고자 하면서도 결국에는 실패할 수밖에 없기에 참으로 ‘해 아래’ 있으면서 ‘해 아래 됨’을 제대로 말해주는 인간형이라고 할 수 있다.

Ⅱ. 본 론

1. ‘해 아래의 지혜’와 ‘언약’의 비교

전도서는 곧 예수님의 삶을 보여준다. 진정한 지혜는 예수님에게만 최종적으로 계시된다. 예수님 오시기 전, 이스라엘 내부에는 앞서 예수님의 삶을 보여주는 지혜가 제공되었다. ‘해 아래’로 한정되어서 실험되어지는 모든 사례들은 ‘해 아래’에서 시도되기에 반드시 구원이 성사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게 된다.

이는 ‘해 밖에’ 무엇이 ‘언약’이라는 이름으로 이스라엘에게 제공되어졌는가를 보여주는 배경 역할을 하게 된다. 전도서에 들어서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이미 이스라엘에게 자신의 언약을 남기셨다. 그 언약을 타고 주입되는 것은 죄와 의, 멸망과 구원이다. 이런 것들은 ‘해 아래’에서 일어나는 지혜로서는 구성될 수 없는 낯선 실재들이다.

따라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들이 몸으로 느끼는 ‘해 아래’에서의 지혜와 ‘낯선 지혜’의 만남이 성사되는 그 틈새에 끼어있는 실정이다. 이것은 곧 ‘하나님을 외면하고 버림’이 결국 어떤 결과로 이어지는지를 보라는 것이다. 쉽게 산다는 것, 편하게 산다는 것, 생을 그저 휘파람 불면서 세월 따라 신나게 하루하루 소비하며 산다는 것이 하나님의 언약이 담고 있는 어떤 취지를 말해주는 것인가?

(1) 율법의 투입으로 야기되는 지혜와의 충돌

율법의 의미가 인간과의 접촉을 통해서 역사적으로 어떤 식으로 표출되느냐 하는 것은 민수기가 적절하다. 일종의 ‘율법의 지상 실험’이라고 할 수 있다. 민수기 15:27-36에 보면, “만일 한 사람이 그릇 범죄하거든 일 년 된 암염소로 속죄제를 드릴 것이요 제사장은 그 그릇 범죄한 사람이 그릇하여 여호와 앞에 얻은 죄를 위하여 속죄하여 그 죄를 속할지니 그리하면 사함을 얻으리라 이스라엘 자손 중 본토 소생이든지 그들 중에 우거하는 타국인이든지 무릇 그릇 범죄한 자에게 대한 법이 동일하거니와 본토 소생이든지 타국인이든지 무릇 짐짓 무엇을 행하면 여호와를 훼방하는 자니 그 백성 중에서 끊쳐질 것이라 그런 사람은 여호와의 말씀을 멸시하고 그 명령을 파괴하였은즉 그 죄악이 자기에게로 돌아가서 온전히 끊쳐지리라 이스라엘 자손이 광야에 거할 때에 안식일에 어떤 사람이 나무하는 것을 발견한지라 그 나무하는 자를 발견한 자들이 그를 모세와 아론과 온 회중의 앞으로 끌어왔으나 어떻게 처치할는지 지시하심을 받지 못한 고로 가두었더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그 사람을 반드시 죽일지니 온 회중이 진 밖에서 돌로 그를 칠지니라 온 회중이 곧 그를 진 밖으로 끌어내어 돌로 그를 쳐 죽여서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하니라”고 되어 있다.

이 대목에서 ‘끊어져야 한다.’는 말이 나온다. 이 말은 기존의 구성된 자리에서 탈락해서 다른 영역으로 이전해야 하는 변동사항이 일어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기존의 영역은 ‘하나님 백성’ 곧 ‘언약의 백성’의 자리가 되고, 이전되어야 될 영역은 ‘비(非)-언약의 자리’가 된다. 즉 이 율법(=모세언약)이 주어지는 현장에서는 지속적으로 이런 분류작업이 멈추지 않는다는 말이다.

여기에 대해서 전도서는 어떻게 표현하고 있나? “노동자는 먹는 것이 많든지 적든지 잠을 달게 자거니와 부자는 배부름으로 자지 못하느니라(5:12).” 이는 곧 ‘해 아래’서 필히 제공되는 지혜의 축복이다. 그렇다면 안식일에 벌목한 자도 잠을 달게 잘 수 있을까? 아니면 안식법 위반으로 내일 해가 뜨면 처참하게 진 밖으로 끌려 나가서 이스라엘의 축복에서 끊어질 것을 생각하며 긴긴 밤을 불안과 초조 속에서 지새게 될 것인가? 벌목하는 노동자에게 이 ‘해 아래’가 누릴 축복이 결국 하나님의 냉엄한 처벌로 이어지는 것이 전부란 말인가? 이렇게 되면 지혜와 율법이 충돌되는 셈이다. 이러한 충돌 지점에 지혜는 인간의 형편을 주목하고 있다.

(2)지혜의 등장

전도서에서는 여호와라는 말이 전혀 나오지 않는다. 이 사실은 바로 솔로몬이 엘로힘의 입장에서 인간 세계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렇게 볼 때에 인간 세계는 자기 한계뿐 아니라 무의미성과 무목적성을 함께 갖고 있는 것이 발견된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실존이다. 인간에게 새로움에 대한 창조력이 상실되었다고 했을 때 이는 이 세대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에 부응하지 못하게 되었음을 나타낸다. 따라서 엘로힘 하나님의 기대에 부응 못하는 세대는 새로움이 상실된 세대이며 허무한 세대라는 것이 솔로몬의 생각이다(1:1-11).

하나님이 주신 선물을 누리면서도(3:13) 결국은 허무한 세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고 했을 때 이 심각한 모순을 어떻게 해소할 것인가? 그것이 인간들이 경외라는 측면에서 실패했다는 쪽으로 해답을 내릴 수 있다(3:14/12:1). 하나님이 주신 선물을(5:19) 폐단화 시키게(6:1) 된 것을 회복하는 데는 역시 지혜밖에 없다(7:4-12). 그런데 엘로힘 하나님의 세계에서 볼 때 지혜는 딴 것이 아니라 자신의 부족과 허무를 발견하는 것이다(8:17). 따라서 엘로힘 하나님 밑에서는 자신의 한계와 허무를 인정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엘로힘을 바로 알고 있는 자 즉 지혜자의 특징이다. 심판 받아야 마땅한 자신에 대한 발견이 바로 지혜이다(12:13-14).

2. 구성

(1)내용 구성

세 부분으로 되어 있다.

첫째 (1:1-4:3) : 전도자의 인생관과 세계관이 열거되어 있다.

둘째 (4:4-9:16) : 지혜로운 자가 경험한 사실이 열거되어 있다.

셋째 (9:17-12:14) : 모든 인생들을 위한 충고가 기록되어 있다.

(2)주제별 구성

첫째 (1:1-18) : 창조의 순환과 허무

둘째 (6:10-12) : 사람의 한계

셋째 (11:7-12:14) : 즐거움과 종말

세상은 어떤 내용을 품고 변화하고 있는데, 지혜의 세 가지 내용을 내뿜게 된다. 인생이 이 세상 변화에 휩쓸리게 되면 허무와 즐거움이 교차되면서 점차 종말 쪽으로 밀리게 되어 있다. 여기서 인간의 지혜 정립에 혼선을 낳는데 그것은 인간들의 행위에 대비해서 결과가 터무니없이 예상 밖이다. “구덩이를 파는 자는 거기에 빠지고, 담을 허무는 자는 뱀에게 물린다. 돌을 다듬는 자는 다치고, 나무 쪼개는 자는 위험하다. 주술을 거는 자가 뱀에게 물리면 그 주술마저 소용없다(10:8-11).”

이렇게 되면 변화 중인 인간이 측정하는 기준은 쓸모없게 된다. “굽은 것은 펼 수가 없고 없는 것은 셀 수가 없다(1:15).” 또한 그 끌림의 과정에서 고통이 따른다. “지혜가 많으면 번뇌도 많으니 지식을 더하는 자는 근심을 더하느니라(1:18).”

이는 인간으로 하여금 한계를 느끼게 만들면서도 동시에 그 한계마저 한계에 도달되게 한다. 이 와중에 어리석은 자와 의인이 분류가 되는데 “그의 양 눈은 얼굴에 달려 있으나 어리석은 자는 어둠 속을 걷는다(2:14).” 하지만 그 분류조차 한계의 신비, 죽음 속에서는 어떤 식으로 판정 날 지 미지에 속한다. “살아 있는 개, 그것은 죽은 사자보다 낫다(9:4).”

이처럼 지혜(=하나님의 일)는 인간의 이성적 장악력을 벗어난다. “바람을 살피는 사람은 씨 뿌리지 못하고 구름을 관찰하는 사람은 추수하지 못한다(11:4).” 그러면서도 인생은 지혜를 모르는 대가를 평생을 살면서 치르게 된다. “게으름 때문에 그 석가래가 내려앉고 늘어진 두 손 때문에 그 집에 물리 샌다(10:18).” 자연은 이미 지혜를 알고 있다. “하늘의 새가 그 소리를 옮기고 날 짐승이 말을 전한다(10:20).”

3. 복음적 내용

(1)감추어진 지혜

역사란 양적으로 질을 규정하는 입장을 보인다. 재물이나 권세로써 성공 여부를 가름하려 한다. 하지만 이러한 인식으로는 세상 변화를 다 읽어낼 수가 없다. 이것은 진실도 모르면서 인생을 마감하는 식이 된다. 곧 인간은 평생 오해 속에서 죽어가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부패하지 않는 것이 없다. 그들이 움켜잡은 그것으로 인해 거기에 관련된 진실과 의미가 삭제되어 버린다. 이것이 전도서에서 말하는 ‘헛됨’이다.

인간은 대안을 꾸려나갈 수 없는 재료들로부터 배격 당한다. 의미를 가진 그것으로 인하여 의미가 상실되는 현상을 보이기 때문이다. 이로써 역사 속에서는 그 어떤 새로운 창조나 질이 나올 수 없다. 꽉 막혀 있는 세상에서 죄는 감추어지고 죄의 열매와 결과만이 난무한다.

따라서 인간은 스스로 붕괴하지 아니하면 진정 죄조차도 모르는 처지다. 그래서 신을 찾다가 스스로 딜레마에 빠지는 그런 구조 속에서 인간은 일생을 보내게 된다. 결국은 자체적으로 붕괴를 맞이해야 하는 존재가 자연을 통해서 의미를 발견하겠다는 것은 어리석고 무모한 짓이다.

신을 미워하다가 지쳐버리지 아니하면 진정 지혜 있는 자가 아니다. 폐쇄를 혹독하게 경험해야 한다. 처음부터 죄 속에 있으면서 새삼스럽게 죄와 지혜를 언급하는 것 자체가 비-지혜적이다. 인간 세상은 누구 하나 예외 없이 똑같이 돌아가고 똑같은 생각과 똑같은 난관에 직면하게 되어 있다. 망해가는 입장에서 해결책을 강구할 수가 없다.

안다고 하는 순간, 되풀이해서 무지의 상태로 전락된다. 그것은 본인이 본인을 괴롭히는 성질에서 못 벗어나기 때문이다. “이것이 인생이다”고 확실하게 규정지을 수 있는 근거는 끝까지 마련되지 못한다. 흘러가고 분해되는 대자연의 이치에 그저 녹아있으면서도 인간은 거기에 순응 못할 속성을 드러낸다. 이것이 바로 죄의 결과이다.

따라서 구체적인 하늘의 법이 투입되어서 이 현실을 설명하는 것이 절실해 보인다. 부분으로만, 흔적으로만, 조각난 파편만 부여잡고 진리의 실마리를 찾으려는 모든 시도가 다 부질없는 것처럼 확실하게 규명해진 실체를 고대하게 된다.

(2)풀리는 비밀

a. 인간은 실험대상

민수기 5장과 6장을 살펴보면 인간은 대조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실험의 대상자가 된다. 민수기 5장에서는 행복을 얻기 위한 결혼에는 조건이 주어지는데 그 조건이 깨어지면 혼인관계에서 저주가 발생한다. 아내를 의심하는 남편으로 인해 저주를 유발하는 사이가 혼인관계라는 사실이 밝혀진다. 하지만 전도서 9:9에서는 결혼이라는 것이 마치 그 자체로 영원한 행복을 보장하는 것 같이 이해될 수 있다. “네 헛된 평생의 모든 날 곧 하나님이 해 아래서 네게 주신 모든 헛된 날에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지어다 이는 네가 일평생에 해 아래서 수고하고 얻은 분복이니라” 즉 허무하고 헛된 인생에 대한 보상책으로 받은 축복이 곧 아내와 더불어 즐겁게 사는 것이다. 이는 혼인관계 속에 새삼 저주가 피어나지 않고 이미 저주가 종결된 상황이라는 것이다.

민수기 6장에서는 포도와 관련된 나실인 이야기가 등장한다. 포도는 약속의 땅의 산물로 이것과 관련되어 꾸며지는 나실인의 존재는 하나님이 누군가를 알기 위해 바쳐지는 실험대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나실인 제도에서 메시아와 이어지는 단서가 엿보인다. “그러나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마 26:29).”

이처럼 ‘언약 아래’에서는 상대자가 있다. 하지만 ‘해 아래’에서는 따로 등장해야 하는 상대자가 없고 지시하거나 지시받는 자도 없다. 민수기 13, 14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직선상의 노선을 제시하시고 그 노선 위를 이스라엘로 하여금 걷게 하셨는데 결국 그 노선이 막히게 했을 때, 그들은 그들을 막는 가나안 민족의 느낌을 파악할 수는 없었다. 자신들과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거기서 또 네피림 후손 아낙 자손 대장부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의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민 13:33).”

이 본문에서 ‘그들의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는 대목이 나온다. 타인의 생각이 자기 생각과 동일할 것이라고 짐작한 것이다. 그래서 꽉 막혀버린 난관에서 인간들은 절망 이외에 한 게 없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절망적 상황 속에서 ‘낯선 끝 지점’을 주목케 한다. “그들이 그래도 산꼭대기로 올라갔고 여호와의 언약궤와 모세는 진을 떠나지 아니하였더라(민 14:44).” 이처럼 ‘해 아래’에서 ‘언약의 세계로’의 진입은 근본적으로 차단되어 있다.

b. 지혜가 주선해주는 만남의 성사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보라 하나님께서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전 7:13-14).”

허무가 인간을 몰아넣으면 그 절정은 죽음이며 깜깜한 날이다(11:8). 허무에서 인간을 죽음으로 몰아세우는 힘이 나온다. 죽음이 깜깜한 날이다. ‘해 아래’ 세상의 결말이다. 따라서 인간이 피할 길 없으니 그 날이 오기 전에 즐겨라. 어차피 허무는 피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이로써 ‘해 아래’ 있는 존재로서의 인생을 ‘언약 아래’로 전환시키는 작업은 죽음에 이르러 심판을 통해서 감행된다. 지혜의 완결판이 ‘죽음+심판’이라는 말이다. 이 죽음에 예수님께서 동참하셨는데 그 죽음이 곧 참 지혜자이신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다.

역사를 되돌릴 수 없는 이유는 그 안에서 실행되는 분류작업 때문이다. 역사는 그냥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천국에 갈 사람을 선별하는 연속적인 과정으로 구성되어 있기에 여기에 투입된 낯선 여분의 능력을, 이미 분류작업에 의해 조성된 입장에서는 자기 존재 이전의 상황으로 찾아들어갈 수가 없다. 마치 자식이 태어나기 이전의 부모를 찾아갈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자아는 분류의 결과물이지 원인선상에 가담될 수 없다. 그래서 인간은 바람에 의해 만들어진 또 다른 종류의 바람이며 이 바람의 일부로 와서 살다가 사라진다.

Ⅲ 결 론

전도서의 주제는 주체의 권력화도 아니요 윤리의 위기성을 다루는 것도 아니다. 뭔가 지킬만한 것이 없음을 주목하라는 말이다. 인간은 짜여진 대로 산다. 한정된 능력과 인식으로 공장같이 돌아가는 세상에서 한낱 기계처럼 움직인다. 지금 이런 식대로 살도록, 더 이상 벗어날 수도 없고 뛰어넘을 수 없도록 제한을 가하신 분의 면전에서 산다. 달리 살 수 없기에 이대로 살게 되었다. 이 정해진 연극무대 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죽음을 배경으로 해서 하나님의 거룩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여호와 하나님(언약의 하나님)의 계시에서는 거룩 안에서 인간은 필히 죄로 인해 죽게 되어 있다.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에게 말하여 가로되 보소서 우리는 죽게 되었나이다 망하게 되었나이다 다 망하게 되었나이다 가까이 나아가는 자 곧 여호와의 성막에 가까이 나아가는 자마다 죽사오니 우리가 다 망하여야 하리이까(민 17:12-13).”

하나님의 법의 주입은 죽음을 유발해서 온통 죽음의 환경 안에서만 진정한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전도서에서는 인간들이 나름대로 몸부림치다가 어느 날 죽음이 찾아든다. 청년에서 노화를 거쳐 죽음에 도달되는 인생의 여정은 정해진 코스며 이는 지혜를 거쳐 언약으로 완성되는 창조 작업이다(12:1-7). 잠시 얼굴 비취다가 이 땅에서 사라지는 자들이 보여주는 것은 곧 ‘끝’이다. 세상의 모든 변화의 바탕에는 끝이 깔려 있다는 것, 그것이 지혜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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