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피조물
맞습니다. 새 피조물은 나를 의식하지 않습니다.
졸지에 나 라고 주장하고 싶어도
관계성 때문에 나 라는 것을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밖아 버리는 바람에
찾아도 찾을수가 없습니다.
(갈 5:24, 개역)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포기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미 애굽에서 애굽이랑 같이 망해서 삭제당한지 오랩니다.
그런데 광야에서 이스라엘은 그 삭제된 나 라는 주체를
쓰레기 더미를 뒤져서라도
지옥을 뒤져서라도 다시 찾겠다고 합니다.
잃어버려 삭제당한 나를 내가 내 스스로가 찾는 것이
오늘날의 지옥을 살고 있는 현대인입니다.
원본 보다 더 낫다고 합니다.
스탠다드 얼론 콤플렉스(군중 속의 고독 = 시뮬라크르)
원본을 준적이 없는데
후대에 예수님이라는 원본이 오니까
어찌 다윗이 다윗 자손에게 주여 라고 다윗의 주라고 할수 있느냐는 말에
유구무언이 된 성경의 달인 박사들 바리새인들이였으니 원 ...
(마 22:35, 개역) 『그 중에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마 22:36, 개역)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마 22:37,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마 22:38, 개역)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마 22:39, 개역)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마 22:40, 개역)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마 22:41, 개역) 『바리새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시되』
(마 22:42, 개역)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뉘 자손이냐 대답하되 다윗의 자손이니이다』
(마 22:43, 개역) 『가라사대 그러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마 22:44, 개역)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
(마 22:45, 개역)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마 22:46, 개역) 『한 말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고 그 날부터 감히 그에게 묻는 자도 없더라』
아무튼, 삭제 당했는데? 복원시킬려고?
하나님 형상 회복 운동 하겠다구?
그래서 약올리듯이 새피조물을 그 때 등장시킵니다.
전제된 것은 “이전 것은 지나갔다” 라는 겁니다.
(고후 5:17, 개역)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너가 너 스스로 애지중지했던 다마꼬찌 나 라는 것은
애초부터 없었어!! 숙주일 뿐이죠.
그럼 어떻게? 나를 되찾을수 없는 거야?
삭제 당했다니깐?
우짜지?
그래서 보라 라고 하십니다.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즉 이 말은 참 재미있게도 때려죽어도 안 본다는 것을 알고서
불가능한 것을 말하신 겁니다.
성경말씀은 불가능한 것 뿐입니다. 가능하거나 실천할 수 있는게 없습니다.
그래서 참 감사하게도
행할 것이 없기에 기쁜소식입니다.
오로지 행할 것은 없고 믿을 것 밖에 없습니다.
왜? 내가 없기에 내가 믿을 것도 없습니다.
나의 대상물은 애초부터 없었습니다.
삭제 시키면 삭제 당하고
이전 것을 지나게 하시면 이전 것을 지나가게 하심 당할 뿐이고
용서하시면 용서함 당할 뿐이고
믿게 하시면 믿게 될 뿐이고
새로운 피조물로 지음 받으면 새피조물 지음 받을 뿐이고
그래서 선악의 법에 저촉 되지 않는, 자유 되신 예수님의 등에 달라붙은 자녀일 뿐입니다.
가시떨기 나무에 붙은 불이 아니라. 불에 붙어 사는 가시떨기 나무
그 새로운 피조물의 특징은
전혀 죄책감, 원한, 복수심이라는
인간 노동(행함)에 구애를 받지 않기에 책임질게 없습니다.
니체는 인간의 노동은 다 원한이다 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반대의 사상인 "원한"의 반대인 "놀이"를 주장하다가
기독교로부터 밉상 제대로 받습니다.
주님이 주신 세계를 즐길줄 모르고 대따 죽도록 일만 하고 있으니
한풀이를 믿음이라고 우기면서 믿고 있다고, 그것을 종교종사자들이 부축이고 있다고
그러나 그것 또한 지젝으로부터 한풀이가 아니냐 라고 플라톤주의자들에게도 욕먹고 있죠.
진보는 그래서 바보가 될 수 밖에 없고. 보수는 그래서 나쁜악당일 수밖에 없는 거죠.
그러나 복음은 책임 질게 없는데 자꾸 책임지라고 한다면
악마의 꾀임에 말려든 시험든 것이라고 합니다.
얼마나 미쁜지 시험이 없습니다. 시험이라는 '자기를 쳐다보는' 겨를이 없습니다.
누리기 바빠서 말입니다.
그래서 싸가지 없게
뻔뻔스럽게
입에 침도 안바르고 거짓말하듯이
자기가 자기를 말하면서 자기가 아닌냥 “그” 라고
남 말 하듯이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관계성에서 나온 말이기에
걸림돌로써 작용할 수 밖에 없도록 하는 용어가 된 겁니다.
문자 하나 하나, 말투 하나 하나, 습관 행동 사건 등등
그 하나 하나 모든 것이
바울이 자신을 “그” 라고 하는 가장 대표적인 표현으로써
예수님과의 관계성에서 나오는 언어가 되는 겁니다.
구조주의 히스테리 매트릭스 가 되는 거죠.
빈 공터 (쭐꾸덕 미끄러지는 빠다발린 보좌)
이랬다가 저랬다고 왔다리 갔다리 오락 가락!
희숙대리(히스테리) 아 짜증나 아 짜증나 짜증나
으~짜증나 난 히스테리가 아니라 희숙대리야 으~짜증나 으~짜증나 ㅋㅋㅋㅋ (개콘 갑을컴퍼니)
그 어떤 편도 안들고 오직 자기 밖에 모르는
예수님의 열심 때문에 말이죠.
(갈 3:1, 개역)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
'교회와 양립불가인 십자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최고의 고리대업자 요셉총리(불의한 청지기 비유) (0) | 2016.10.15 |
---|---|
마태복음 ; 한없이 작은 권력 (2016 십자가마을 여름수련회) (0) | 2016.08.08 |
어찌 하여 버리시나이까? (십자가 속의 십자가) (0) | 2013.01.11 |
다른 복음 vs 십자가 (0) | 2012.09.15 |
복음이란 무엇인가? (0) | 2012.09.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