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복음 vs 십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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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강-YouTube강의-120906-이 근호 목사


오늘은 갈라디아서 3장 1절에 나오는 십자가에 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사도바울이 구약에 그야말로 정통한 사람입니다.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니까, 신구약 전체를 집약해서 복음을 전할 때 ‘십자가’라고 이렇게 단출하게 최종적으로 종합을 했습니다. 그리고 곁들여 이야기하기를 ‘내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났던 사도바울은 그리고 사도바울은 장담하기를 ‘내가 여러분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내가 공교하게 내가 임의로 내 사귐으로 이야기하는 것도 아니고 내가 직접 예수 그리스도에게 부여받은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전한다.’ 그렇게 돼 있습니다. 이 말을 달리 정리하게 되면 ‘사도바울의 말을 듣지 아니하면 그것은 다른 복음을 추종하는 것이 되고 그것은 구원받지 못하고 도리어 저주받는다.’하는 이야깁니다.

우리가 사도바울의 복음을 접하면서 사도바울을 보통의 일반적인 사람처럼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대할 때 하나님의 계시를 받는 것으로 우리인간은 대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각자, 각자 자기가 계시라고 우기고 나올 때는 우리 사람의 입장에서는 당황스럽죠. 그런데 거기에 대해서 사도바울은 분명하게 이야기합니다. ‘내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심지어 우리, 그러니까 자기 자신을 포함해서 천사라 할지라도 그 누구라도 분명하게 저주를 받는다. 지옥 간다.‘라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우리가 그 이야기를 들을 때 이것은 단순히 사도바울을 우리가 상대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 그리고 예수님을 직접 상대한다는 그러한 입장에서 이 사도바울의 복음을 접수해야 됩니다. 그렇다면 사도바울이 신구약을 다 합해서 단, 복음이라 뭐냐, 단출하게 언급해서 뭐라고 이야기하는가, 그것이 상당히 궁금합니다. 이것도 믿어야 되고 저것도 믿어야 되고 그러면 10개를 믿어야 된다면 9개를 믿는데 1개를 놓쳐버리면 과연 그것은 우리가 지옥 갈 수 있지 않을까 그러한 의심도 들 수가 있습니다.

그 단출한 사도바울의 집약된 응축된 복음의 내용이 갈라디아서 3장 1절에 보면 나와 있습니다. 제가 읽어보면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그렇게 돼 있습니다. 눈앞에 있는 걸 보라는 겁니다. 눈앞에 뭐가 보이는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눈앞에 그냥 보이는 것이 아니고 밝히 보인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과연 사도바울이 외치고자 하는, 그리고 알려주고자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종으로서 정말 천국 보내고 구원시키기 위해서 완전하게 완성된 응축된 그 복음의 진수라고 이야기할 수 있느냐, 그 반증을 어떻게 내릴 수 있느냐 하면 3장 1절을 다시 읽어보면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이렇게 돼 있습니다. 그리고 난 뒤에 방금 언급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인다 했습니다.

여기 예수님이 십자가에 밝히 보이는 것과 사도바울이 분명히 이야기했습니다. “어리석도다.”라는 말을 같이 언급했습니다. 그러면 이 말은 뭐냐 하면 눈앞에 밝히 보이는 그리스도 십자가에서 눈 돌려 버리면 그것은 어느 영역에 빠져 들어가느냐 하면 ‘어리석도다’에 지적을 받는 그 영역에 들어가는 것이 되는 겁니다. 밝히 보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 십자가 말고 다른 어떤 복음을 찾는다고 한다면 그건 어리석음에 해당되는 사람이다, 그렇게 사도바울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어리석지 않으려면 바로 눈앞에 밝히 보이는 그리스도 십자가만 주목을 해야 된다는 이야깁니다. 어떤 사도바울의 진리를 이야기할 때 특히 십자가를 만약에 요즘 우리의 편하게 대인 관계하는 것처럼 ‘예,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못 박혔습니다. 알아두시면 좋습니다. 뭐 이거 신경 쓰시지 않고 딴 데 사셔도 우리는 관여하지 않겠습니다.’ 우리는 사람이 대인관계에 있어서도 좋은 게 좋다고 그렇게 사람들에게 기분 나쁜 이야기를 빼고 ‘이런 소식이 있는데 한번 믿어 보시렵니까?’ 하는 어떤 제안을 할 수는 있습니다.

그렇게 나올 경우에 ‘어리석도다.’라는 부정적인 그런 과감한 발언을 우리가 참~ 하기가 힘들죠. 상대방 인격에 대한 모독과 관련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제 생각에는 십자가가 복음의 진수인데 뭐 달리 생각하셔도 뭐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좋게, 좋게 이야기할 수도 있는 문젠데 사도바울은 십자가 이야기를 끄집어내면서 놓치지 아니하고 ‘어리석도다.’라고 해서 인간에 대한 근원적인 그 사람의 인격의 품위에 대해서 도발적인 발언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어떤 십자가 외에 다른 복음의 응축된 내용은 있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십자가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 그런 것으로 이렇게 정리될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왜 ‘어리석도다.’라는 말을 했는지 우리가 십자가를 이야기할 때 십자가만 따로 챙겨서 그것만 지식으로 습득하려고 하지 말고 십자가를 이야기할 때 ‘어리석도다.’하는 이야기와 겸해서 같이 어떤 것이 어리석은 것인지를 어리석음에 대해서 우리가 사도바울의 말한 취지를 우리가 놓쳐버리면 안 됩니다. 그러면 십자가가 죽습니다. 십자가 의미가 이건 희석돼 지고 옅어져 버리고 소실돼 버립니다.

‘어리석도다.’와 같이 겸해서 십자가를 언급해야 됩니다. ‘십자가 있는데 믿어보세요.’라고 가 아니라 ‘십자가 믿지 아니하면 어리석은 사람이 됩니다.’라고 겸해서 어리석음과 십자가를 같이 동반해서 증거 해야 사도바울이 그리스도께 직접 받았던, 직접 배웠던 그 복음입니다. 그리고 이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받습니다. 간추려서 이야기해서 십자가와 어리석음을 같이 겸해서 강단에서 설교단에서 외쳐야 된다는 이야깁니다.

그러면 이 ‘어리석도다.‘는 어떤 의미에서 ’어리석도다‘라고 이야기하느냐, 여기에 그 내용이 뒤에 3절 보면 나옵니다.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라는 언급을 합니다.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체로 마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고, 그 사람은 사도바울이 이야기하는 십자가의 복음을 전혀 이해 못하는 사람이다. 그런 조로 논리가 전개되는 겁니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이렇게 언급을 해놓고 십자가를 같이 언급을 해놓고 그 뒤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에 해당된다는 겁니다. 여기 육체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렇다면 어리석었다는 말을 좀 더 깊이 알기 위해서 어쩔 수없이 성령에 대해서도 알아야 되고 그 다음에 육체에 대해서도 필수적으로 알아야 되는 겁니다.

그럼 육체가 뭐냐, 뭐를 가지고 육체라 하느냐, 그리고 성령과 대비되는 관계에서 육체라 하는 것은 어떤 것을 두고 말하는가, 그것을 제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육체라 하는 것은 인간 자체를 두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인간 자체가 그동안 구약에서 자신의 육체를 가지고 자기 육체 바깥에 문자로 전달된 그 하나님의 율법이나 또는 하나님의 계시나, 하나님의 말씀을 육체의 모든 역량을 동원해서 그 내용과 일치해서 거기서 하나님이 원하는 레벨의 하나님의 의를 가져서 그 가진 발생된 의를 가지고 의의 나라 천국에 들어오고자 시도하는 이 모든 것을 육체로 보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그렇게 보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이런 이야기를 할 때 그만한 자신감이 있었습니다. 왜냐 하면 사도바울이 바로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자기는 율법에 흠이 없는 사람이고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라고 해서 인간의 육체에서, 또는 육신에서, 육에서 다 같은 말입니다. 육체에서 시작해서 하늘나라와 하나가 되기 위해서 시도한 모든 것에 대해서 노하우를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노하우는 사도바울이 사적으로 경험한 것에 해당되는 것이 아니고 유대나라에 이스라엘 나라에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신앙과 경건을 총 집합시켜서 인간의 역량으로 해낼 수 있는 최고의 경건함과 의로움을 이미 사도바울도 거기에 합세해서 훈련받았고 습득해 온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점에 대해서 예수님도 인정했습니다. 마태복음 5장에서 예수님께서 산상설교에서 이런 말씀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바리새인보다 더 의가 낫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 이렇게 돼 있습니다. “바리새인보다 더 의가 낫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간다.”는 말은 사람들은 일렬로 줄을 한번 세워보는 거예요. 줄을 세워보면 그 줄의 제일 위 자리에, 다시 말해서 사람들이 추구하는 제일 높은 경지에는 필히 바리새인을 세울만한 정도다. 하는 것을 예수님 본인이 벌써 인정하고 들어갔습니다. 이 말은 세상에 어떤 인간이 애쓰고 노력해도 바리새인을 능가할 만한 완벽한 그러한 경건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다는 그런 이야깁니다. 유구한 이스라엘 역사는 인간이 경건 되고 거룩하게 말씀을 가지고 인간이 육체를 가지고 해낼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실험한 실험의 시간들이었고 여정들이었고 역사였다. 그렇게 보시면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러한 인간의 육신으로 했던 그 모든 것이 결국 그들이 낳은 일이 뭐냐, 성령께서 우리에게 찾아오도록 하는 그러한 근거를 마련하는데 인간들의 열성 있는 모든 것이 거기에 재료로 다 집약되게 돼 있습니다. 이게 무슨 이야기냐 하면 사람들이 자기 의에 열심을 내고 종교적으로 신의 말씀을 최대한도로 지킨다는 그 모든 것들이 어떤 결과를 낳았느냐 하면 하나님과 인간의 행함과 관계없이 이미 인간과 하나님이 하나 되게 결속되게, 저는 이걸 끊어지지 않는다고 하는데 두 번 다시 끊어지지 않는 진짜 주님과 하나 될 수 있는 그 근거 마련하는데 인간들이 하는 모든 육체의 열매들은 부정적인 방법으로 거기에 재료로서 가담을 한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속의 거저주시기 위해서 하는 그 작업에 인간은 나쁜 의미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게 하는 원인으로 작용했습니다. 그것이 인간들이 자기 의, 육신에 의해서 율법을 지켜서 자기 육신의 행함으로 구원 받겠다 하는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십자가의 원수로 작용한 겁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는 뭐가 있느냐 하면 인간들이 육체로 하는 모든 것은 바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과 정 배치가 되고 정 반대되는 방향으로 악마적인 악마가 원하는 기뻐하는 쪽으로 나아간다는 것이 그것이 완전히 들통 내는 그러한 작용을 십자가가 하도록 그런 여건이 조성된 겁니다.

자, 그럼 다시 생각해 보면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했을 때는 갈라디아 사람들께는 상당히 불쾌한 이야기겠지만 그들이 ‘어리석도다.’라는 말을 할 때는 오히려 기뻐해야 되는 겁니다. 십자가 복음을 전할 때는 반드시 뒤따라오는 것이 ‘이 어리석은 인간들아’ 하는 것이 ‘육체를 가진 인간들아‘ 하고 뒤따라올 때 그 어리석다는 말을 아주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더 이상 ’자신의 육체의 율법 행함이나 모든 자신의 율법 지킴을 더 이상 의지하지 않는 신앙적인 사람이다.’라는 것을 고백하는 게 되는 겁니다. 그것을 가지고 영적인 사람이 되는 겁니다.

영적이라는 것은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영적이라는 것은 뭔 뜻이냐 하면 다시는 하나님과 끊어지지 않는다는 그런 관계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사람의 모든 관계라 하는 것은 아무리 열심을 내도 아무리 자기 딴아 최선의 노력을 다해도 하나님의 뜻과 이렇게 연결되질 않습니다. 부부가 아무리 사이가 좋아도 역시 남편은 남편이고 아내는 아내입니다. 그리고 대인  관계도 마찬가지고 인간적인 사랑도 마찬가지고 사람의 사이도 마찬가지고 하물며 아무리 노력해도 하나님과 연결된다는 것은 우리가 성립되질 않습니다. 끊어지게 돼 있습니다.

그런데 로마서 8장 39절에 보면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이렇게 돼 있습니다. 이 끊어지지 않는 하나님의 관계는 우리가 육신으로 율법을 지킨다고 해서 이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저는 단언합니다. 인간이 이 성령에 의해서 끊어지지 않는 주의 사랑을 받았으면 우리가 교회에서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하는 모든 우리의 행함은 다 주님 앞에서 다 탁, 탁 하고 끊어질 수밖에 없는 그러한 것을 우리는 죽을 때까지 경험해야 됩니다.

우리의 전도, 이것도 주님 앞에 도달되지 못하고 끊어지고 우리의 헌금, 우리의 기도, 우리의 예배봉사, 우리의 구제, 이 모든 것은 기껏 시작을 해봐야 하나님 앞에 일치되지 못하고 툭, 툭 끊어지는 단절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우리는 평생을 살면서 경험하게 될 때 그 사람은 오직 끊어지지 않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 하신 그리스도의 사랑이라는 것을 끊어질 때마다 다시 두 번 세 번 깊이 있게 더 느껴지는 법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는 모든 ‘우리가 주님을 나름대로 사랑했다. 주님 앞에 충성했다. 주님 앞에 모든 걸 바쳤다.’하는 모든 것들이 주께서 그걸 허락하신 이유는 그렇게 뭔가 믿음으로 했다고 하지만 나중에 돌이켜 자기가 한 믿음을 되돌아 볼 때는 우리는 어느새 나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의 은혜를 내 행함의 보상차원이라든지 내 열심으로 전환시키는 아주 간교한 이 육신의 악마 성, 비 복음 적인 것, 이 죄악된 것을 깊이 있게 느끼는 기회를 우리가 맞이하게 되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했습니다. 참 고생도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자신 있게 이야기합니다. 내가 어떤 사도보다도 더욱 더 고생을 많이 했다. 하지만 그것이 결코 내 공로나 내 자랑이 될 수 없는 것은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 했습니다. 왜 사도바울은 자기가 그렇게 고생하고 진짜 보상받으려면 엄청난 보상을 받을 만한 그런 훌륭한 일을 많이 했고 누구 앞에 칭송받을 만한 일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자기는 죄인 중에 괴수다.“라고 고백하는 이유는 그는 모든 것을 성령이 허락하는 하에서 자기의 육신이 성령이 이야기하는 십자가, 끊어지지 않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 이루신 그 십자가 복음을 증거 하는 용도로서 자기의 육신이 거기에 쓰여 진다는 사실을 깨닫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신의 육신이 쓰여 지면서 그 육신이 품고 있던 사도바울 본인도 미처 몰랐던 각가지의 그 죄악들이 주의 일을 하는 가운데서 자기를 통해서 번져 나왔던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 하는 것과 자신의 육신, 사도나 우리의 몸으로 하는 것과 그 차이성이 성령 안에서 분명히 보여 진다는 겁니다. 우리가 내미는 것은 우리 자신의 자랑과 우리의 영광과 어떤 세상적인 보상이나 어떤 기대 같은 거, 그리고 하나님 앞에 자기의 과시 같은 거, 결국은 그런 쪽으로 그것이 뭉쳐진다 하는 것을 사도바울도 경험하고 오늘날 성도도 경험하게 되는 겁니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서 자기의 행한 것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우리는 절망을 느끼고 ‘아! 이게 바로 육이구나.’ 라는 것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여기 3절에 보면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라는 이야기를 다른 사람, 지옥 가는 사람보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고 바로 구원받은, 성령 입은 우리보고 바로 직통으로 사도바울이 이야기하는 말입니다. 이 말을 들을 때 ‘맞습니다. 제가 바로 어리석은 사람입니다.’라고 고백하면 되는 겁니다. 제가 바로 매일같이 어리석은 사람이고 매일같이 어리석은 사람이 될 때 이 어리석은 인간조차도 그리스도 안에서 끊어지지 않는다는 그 모든 공로는 우리 몸으로 어떤 행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이 우리로 하여금 성령의 열매를 제시하기 때문에 그러한 결과를 낳은 겁니다.

따라서 이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할 때 이 십자가라 하는 것은 필히 어리석음과 같이 동반해서 십자가를 지금도 우리에게 증거 한다는 사실을 우리가 잊지 말아야 되는 겁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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