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신이라고 하신 예수님 2   08.07.11 20:32 

날짜, 보낸사람, 받는사람, 내용2008-07-11 08:43:00, 미래
 
이스라엘이 하나님(신)과 겨루었다란 말은 쉽게 말해서 자아와 겨루었다란 말인가요
 
그래서 자아가 죽고 주님이 이기셨다란 말인가요
그래서 이제는 죽어도 상관 없는자가 되었단 뜻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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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
 
자아란 없습니다. 없는 허깨비 붙잡고 이길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없는 자아가 자꾸 자아라고 우기기 때문에 속을 필요는 없습니다.
 
죽어도 상관 없다 라는 의미는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비로소 알게 된 겁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을 야곱으로 볼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라고 보십시다.
 
예수님은 누구와 싸웠나요?
일종의 하나님을 믿는 자들 입니다.
 
바로 그런 자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이 된 자들입니다.
그런 죄악을 들추어내시는데
예수님 외에는 없고 예수님 외에는 신과 싸운 자가 없습니다.
(이미 신에게 포로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고아 과부 나그네를 찾는 겁니다.)
 
결국 모든 인간과 싸운 자는 예수님 뿐입니다.
우상이란 없습니다. 인간들이 조작해 내는 것이 신입니다.
인간만이 만들어낸 겁니다. 인간 외에는 신이 없습니다.
 
그 인간이 만들어낸 신이 바로 유대인이 대표적으로 보여준 모습입니다.
결국 비언약의 하나님을 유대인은 늘 꿈꾸어 왔음을 우리는 구약을 통해서 보아왔고
그 비언약의 하나님은 늘 미완료의 모습으로
인간의 거룩치 못함에 따라 늘 인간에게 손해 보는 하나님으로 비추어져 왔기에
인간 하기 나름에 하나님도 마냥 손해 보시기만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런 속성이 야곱에게 들어있고 이 야곱을 퍼트리니까 12아들 속에서도 다 담겨져 있습니다.
 
결국 마귀성을 주님은 야곱 속에서 비언약적 사고방식을 들추어 내십니다.
그런 비언약성을 깨뜨림을 당한 자가 이름이 교체 당하면서
이스라엘이라고 하나님의 임하는 집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문(야곱의 사다리)이 되는 거죠(창 28:12)
즉 약속은 이 이스라엘 외에는 없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예수님 외에는 다른 약속은 없다는 겁니다.

(창 28:17, 개역) 『이에 두려워하여 가로되 두렵도다 이 곳이여 다른 것이 아니라 이는 하나님의 전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고』
 
율법도 제사도 야곱도 모조리 예수님을 말하고자 하는 그림자 이고
야곱은 누락 되어야만 하는 겁니다.
 
그럼 약속의 의미를 담은 이스라엘이라는 것은
예수님이 와야지만 비로소 그 의미가 드러나는 겁니다.
 
신을 이긴자는 예수님 뿐입니다. 사랑이시거든요
 
즉 신도 아니면서 죽음과 생명을 쥐었다고 떠벌리는 인간들의 허상을 까발린 자는
예수님 뿐인 거죠
 
결국 그 신 속에 나 자신도 포함 되었고
야곱도 포함된 겁니다.
 
예레미야서에서는 여호와는 나 보다 강하십니다 라고 합니다.

(렘 20:7, 개역)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권유하시므로 내가 그 권유를 받았사오며 주께서 나보다 강하사 이기셨으므로 내가 조롱거리가 되니 사람마다 종일토록 나를 조롱하나이다』

그 강한 분이 심지어 십자가만을 앞세워 버리면

강함에도 불구하고 낮아지시고 죽기까지 복종해 버리면
마귀 입장에서는 미운데 더 미운 겁니다.
마귀의 시선에서 예수님은 미운 짖만 골라하십니다.
동일하게 인간의 시선에서 예수님은 미운 짖만 골라하십니다.
나로 인하여 실족치 않는 자는 복이 있도다
  


마귀의 실체는 이런 면에서 그 실체가 드러납니다. 무엇을 미워하느냐? 로 드러나죠.

이 마귀의 선악을 판단하는 품성이 바로 자아라는 겁니다.
즉 자아란 육인 나를 내가 내 스스로 규정하는 표현 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으로부터 규정된 나를 표현하는 말은
성령의 전입니다.
(자아가 없습니다. 주 안에서 죽고 주 안에서 살았기에 그 관계성으로 규정됩니다.)
하나님의 집 입니다. 하늘의 문 입니다.

그리고 죽어도 상관 없다는 말은
이 하나님의 집을 허물자가 없다 라는 겁니다.

(마 16:18, 개역)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말이 아니라 실지로 해봐야 허물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확정되겠지요

내가 나를 규정하는 자아라는 것은 사실은 마귀가 심은 개념이고
예수님이 나를 규정하는 성령의 전이란 성령이 이끄는, 죽음을 이기는 사랑을 담겠다는 겁니다.
지옥을 이기는 질투와 투기를 담겠다는 겁니다.

우리가 거부한 이 성령의 일에
예수님이 본을 십자가에서 보여주셨습니다.

죽음이라는 신을 이기는 자는 성령의 전 입니다
이 예수님의 마음인 성령의 마음이 임하면 죽음도 이기는 겁니다.
아니 이미 이긴 관계성에 놓인 겁니다.
미완료는 없구요완성으로 다가온 겁니다.

나 라는 자아가 그 죽음을 이길 필요가 없는
이미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긴 그 약속을 바라보는 겁니다.

약속이라는 피 만을 남기기 위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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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보낸사람, 받는사람, 내용2008-07-11 10:25:32, 미래
 
신이다 이것도 결국 주님을 드러내기 위한 미끼였군요
 
답변

(선악과의 나무도 예수님을 드러내기 위함이요 생명나무도 예수님을 드러내기 위함이요 마귀도 천사도 모조리 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를 드러내기 위함이지 독자적인 의미는 없습니다.) 

마귀는 예수님을 주인공으로 드러내기 위한 악당역할을 반드시 해야 하듯이
우리는 나의 신랑을 드러내기 위한 반드시 신부의 역할을 하는 겁니다.
 
뽀빠이는 자기의 사랑을 드러내기 위해 반드시 올리브를 브루트스 손에서 건져야 하기에
브루트스는 이 둘의 사랑을 드러내는데 동원된 둘의 불 같은 사랑에 기름을 껴얹는 역할을 하는 겁니다.
이런 예수님의 자작극에 올르브도 브루트스도 예수님이 준 대본대로 철저하게 한치 오차 없이
감독의 싸인에만 움직이도록 되어 있습니다.
신은 예수님 뿐인데 가짜 신들이 판을 칠수록 진짜 신은 그 희소가치성으로 다가옵니다.
가짜에게 당해봐여 진짜의 소중함을 알 듯이

참 신과 선한 목자는 자기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데 있어서 전혀 신의 권위 답지 않고
반대로 가짜들은 그 권위를 자기것인냥 남용하지요

야곱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야곱이 예수님에게 걸려들어서
이 양쪽의 신의 모습을 다 보여주고

주님이 결국 따듬은 모습만 남겨두시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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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

(창 32:30, 개역) 『그러므로 야곱이 그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

(자 이렇게 되면 어떤 얼굴을 대면해도 다 싸워 이기는 겁니다. 형 에서의 얼굴을 대면해도 상관없고 왜냐 이미 심판을 받아서 통과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대면해서 살았다면 어떤 누구의 얼굴을 대면해도 이미 이긴 것입니다.)

참 한가지 중요한 의미 중 하나가
바로 샬롬이라는 뜻입니다.
샬롬이라는 뜻은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도 안 타죽고 살아남았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심판 속에서 안식을 누린
하나님을 보고도 안 죽는 자는 의인 뿐입니다.
 
즉 하나님을 보고 만나고 만진다는 것 자체가 이미 죽음이요 지옥이요 저주 입니다.
비거룩하기 때문입니다.
(비거룩과 거룩의 만남은 거룩의 낮아지심인 자기자신의 치심 곧 십자가의 피요 긍휼 뿐입니다. 성화로 만났다가는 타 죽습니다. 인간 쪽이 아닌 예수님 쪽에서의 낮아지심 뿐입니다.)
 
그런데 안 죽었다 이것은 하나님 쪽에서 밥상에서 함께 더불어 먹고 마시도록 하신
긍휼을 베푸셨기 때문입니다. (불쌍히 여기심)

자 야곱은 얍복강가에서 하나님과 씨름 합니다.
잘못된 만남입니다. 전기전선의 고압선을 만지는 것과 같은 즉사 할수 밖에 없습니다.
 
야곱은 자신이 만지자 마자 타 죽을 수 밖에 없는 번개와 우뢰와 천둥을 만난겁니다.
안 타죽었다는 뜻은 기적이 아니라 말도 안되는 비정상적인 일이 벌어졌다는 겁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누가 대신 타죽은 겁니다. 너가 타죽어야할 자리에 누가 대신 죽었다는 겁니다. 대신 심판 받아서 살려주심입니다.
 
그것 뿐만 아니라 신을 만나고도 안죽고 도리어 신을 이겼다 라는 뜻의 이스라엘 이라는 이름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건의 의미를 담은 겁니다. 예수님 자신의 이름을 담는 겁니다.
약속의 이름이요 하늘에서 난 이름입니다. 이 이름을 담은 것이 바로 죄와 피의 결합인 언약궤 법궤 증거궤입니다.

이 집이 이 상자 박스가 야곱이라는 이스라엘이요 이 이스라엘이 교회입니다.
성령의 일을 담은 박스. 십자가의 피의 사건을 담은 마당 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집
약속을 담은 그릇
 
이스라엘인지 아닌지? 예수님인지 아닌지? 교회 곧 성령의 전인지 아닌지는
이 죽음을 통과 해보라는 겁니다.
 
이 지독한 미움을 통과하는 것은
사랑 뿐입니다.

(아 8:6, 개역) 『너는 나를 인 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 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투기는 음부 같이 잔혹하며 불 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아 8:6, 새번역) 『도장 새기듯, 임의 마음에 나를 새기세요. 도장 새기듯, 임의 팔에 나를 새기세요. 사랑은 죽음처럼 강한 것, 사랑의 시샘은 저승처럼 잔혹한 것, 사랑은 타오르는 불길, 아무도 못 끄는 ㉠거센 불길입니다. / ㉠또는 '주님의 불길 같습니다'』

(아 8:6, 우리말) 『나를 당신 마음에 도장처럼 새기고 나를 당신 팔에 도장처럼 새겨 두세요. 사랑은 죽음만큼이나 강하고 질투는 무덤만큼이나 잔인해 불꽃처럼 거세게 타오릅니다.』

(아 8:6, 공동) 『가슴에 달고 있는 인장처럼 팔에 매고 다니는 인장처럼 이 몸 달고 다녀다오. 사랑은 죽음처럼 강한 것, 시샘은 저승처럼 극성스러운 것, 어떤 불길이 그보다 거세리오?』

(아 8:6, 가톨릭) 『인장처럼 나를 당신의 가슴에, 인장처럼 나를 당신의 팔에 지니셔요. 사랑은 죽음처럼 강하고 정열은 저승처럼 억센 것. 그 열기는 불의 열기 더할 나위 없이 격렬한 불길이랍니다.』

(아 8:6, 쉬운) 『나를 옥새같이 그대 마음에 두세요. 나를 도장같이 그대 팔에 새기세요.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고, 그 질투는 무덤같이 끈질기니, 그 사랑은 불꽃처럼, 강력한 불길처럼 타오르네.』

(아 8:6, 킹흠정) 『너는 나를 도장같이 네 마음에 새기고 도장같이 네 팔에 새기라. 이는 사랑이 죽음같이 강하고 질투가 무덤같이 잔인하기 때문이니 그 숯은 극히 맹렬한 불꽃을 지닌 불붙은 숯이니라.』

(아 8:6, 한글킹) 『네 마음에 인장처럼, 네 팔 위에 인장처럼 나를 새기라. 사랑은 죽음처럼 강하고 질투는 음부처럼 잔인하니, 그 곳의 숯은 불타는 숯, 곧 심히 맹렬한 불길을 가진 것이라.』

(아 8:6, 현대인) 『여자: 당신은 나를 인장 반지처럼 당신의 마음에 간직하고 도장처럼 당신의 팔에 새기세요. 사랑은 죽음처럼 강하며 질투는 무덤처럼 잔인하여 맹렬한 불처럼 타오릅니다.』

(아 8:6, 현대어) 『그대 가슴 끈에 인장반지를 달고 다니듯 그대 마음에 나를 꼭 품어 주세요. 그대 팔에 띠를 꼭 매고 다니듯 그대여, 내 사랑 나를 꼭 그렇게 안아 주세요. 그 누가 죽음을 이겨 낼 수 있을까? 아무도 죽음을 건너뛸 수 없지요. 죽음은 그 누구도 놓아 주지 않아. 아, 사랑도 사랑도 그러하지요. 그 누구가 이 사랑을 어찌할까요? 불같이, 맹렬한 불꽃같이 타오르는 시새움.』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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