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짖을 수 없는 곳에서 부르짖는 부르짖음 (시편 61)

 

불가능한 부르짖음


(
61:1, 개역) [다윗의 시, 영장으로 현악에 맞춘 노래] 하나님이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시며 내 기도에 유의하소서

(61:2, 개역) 내 마음이 눌릴 때에 땅 끝에서부터 주께 부르짖으오리니 나보다 높은 바위에 나를 인도하소서

(61:3, 개역)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원수를 피하는 견고한 망대심이니이다

(61:4, 개역) 내가 영원히 주의 장막에 거하며 내가 주의 날개 밑에 피하리이다(셀라)

(61:5, 개역) 하나님이여 내 서원을 들으시고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의 얻을 기업을 내게 주셨나이다

(61:6, 개역) 주께서 왕으로 장수케 하사 그 나이 여러 대에 미치게 하시리이다

(61:7, 개역) 저가 영원히 하나님 앞에 거하리니 인자와 진리를 예비하사 저를 보호하소서

(61:8, 개역)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이름을 영원히 찬양하며 매일 나의 서원을 이행하리이다

 

 

먼저 부르짖을 수 없는 곳에서 부르짖는 다윗이라고 하지 않고

부르짖을 수 없는 곳에서 부르짖는 부르짖음이라고

의도적으로 다윗을 빼버리는가 하면


다윗이 부르짖는 주체가 아니라

부르짖음이 다윗을 다루고 있는 주체라는 겁니다.


아니 [부르짖음]이 무슨 놈의 주체가 된단 말입니까?
사물입니까? 인물입니까? 명사가 아니잖아요!

어떤 행동이라고 볼수 있는데 그것이 무슨 주체가 되냐 말이죠??
주체라고 부를 수 없는 것이 주체로 작용이 됩니다.

그럼 안해 버리면 주체도 될수 없는 사라지는 주체네!!!
철저한 필연성이 아닌 철저한 우발성이지요?
그렇기 떄문에 무시해 버리는 겁니다.
무가치 한데! 사라져 버리는데! 말라꼬???

난 절대로 무가치 하게 여기지 않을꺼야!
소용없습니다. 기도, 부르짖음 자체가 주체로써의 우발성입니다.
우리는 개입할 수 없는 도리어 대상물일 뿐입니다. 부르짖음의 대상물 말입니다.

그래서 제목을 부르짖을 수 업는 곳에서 부르짖는 다윗이 아니라

다윗을 빼버리고
부르짖을 수 없는 곳에서 부르짖는 부르짖음이라고
부르짖음이 주체이고
다윗은 대상물이다고 하는 겁니다.
우리는 부르짖음의 대상물입니다.

그래야 출애굽 사건의 구원전쟁이 부르짖음을 통해서 벌어지는 겁니다.
 

만약 다윗이 주체가 되어 부르짖는 것이 되어버리면

마치 가인의 제사처럼

모든 종교의 또는 모든 인간이 소원을 비는 그런 제사! 그런 기도와 다를바 없습니다.

가인의 기도 보다 더 나은 기도가 아벨에게 덮쳐졌듯이 다윗에게도 덮쳐진 겁니다.

다윗 또한 일반인들의 기도에서 갇혀 버렸기에 빠져나올수가 없는데
불가능합니다. 불가능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빼내시는 방식이 바로

부르짖을 수 없는 곳에서 부르짖는 부르짖음이라는 겁니다.


즉 다윗이 다루는 기도란 없습니다.
기도가 다윗을 다루는 방식만이 기도 이다는 겁니다.

이방인의 기도처럼 주문 외우듯이 중언부언 하지 않는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처럼 말입니다.
 

잠언에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15:29, 개역) 여호와는 악인을 멀리 하시고 의인의 기도를 들으시느니라

 

의인의 기도를 들으신다 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눈치 채셨겠지만

의인이 없습니다.

하나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의인이 없기에 의인의 기도 또한 없는 거죠.

즉 주님이 들으실 기도는 없는 겁니다.

 

아무도 못하기 때문입니다.


또 더 기가막히는 이야기를 할까요?
유일하게 의인 딱 한 분 되신 예수님의 기도 마저도
듣지 않으십니다.

하실 수만 있다면 이 잔을 내게서 옮겨주옵소서 라고 말입니다.
 
땅에서 하늘로 제사를 올리듯이 기도를 하늘로 향하는 것이 모조리 차단당한다는
단절을 말하고 있는 겁니다.
그럼 기도 말라꼬 하노?
네 맞습니다. 기도란 기도가 기도의 사람을 찾듯이
하늘에서 찾아내는 겁니다.
하늘에서 밑으로 향하는 겁니다.

결국 주님이 듣고자 하시는 기도는 전혀 없고

오히려 그렇기 떄문에 기도가 풍성해지는데

부르짖음이 풍성해지는데

주님이 해주셔야만 하는 기도 밖에,

들려주시고자 부르짖으시는 주님의 기도 밖에 없는 겁니다.

 

졸지에 기도에 공백이 생겨버렸습니다.

마치 기도일기에 그 어떤 글씨도 하나 없이

깨끗하고 하얗고 맑끔합니다.

 

기도일기책이 너덜 너덜 손때가 가득 묻은 것이 아니라

손 한 번 댄적이 없이 깨끗하게

깔끔한 공책처럼 새기도일기장책입니다.

 

마치 이것은 성전에서 두 사람의 비유와 같습니다.

(18:10, 개역)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18:11, 개역)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8:12, 개역)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18:13, 개역)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두 사람 중의 한 사람인

바리새인이 저 더러운 세리와 같지 않음을 하나님께서 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라고

깨끗한 공책을 내미는 것과 같습니다.

단 한 개의 글자도 없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땅끝으로 몰려버린 세리는

기도책이 왜그렇게도 더러운지

뭐가 그리 답답하고 슬프고 아픈지

빼곡하게 적혀 있는 겁니다.

 

성전 곧 하나님의 집은 기도하는 집 곧 만민이 부르짖는 집이거든요

 

(19:46, 개역) 저희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 하시니라

 

땅 끝으로 내 몰려도 한 참으로 내 몰린 가망 없는 자가 부르 짖는 집이거든요.

그런데 그 부르짖는 집이 오히려 가장 정중앙의 요새가 되어버린 겁니다. 즉 권력이지요.

 

이슬람이 무슨 행사 하면서 매번 수십 수백의 사람이 깔려 죽는다는 뉴스를 보는데

이슬람 뿐만 아니라

사실상 모든 종교 심지어 기독교의 성전마저도 바로 땅끝으로 내몰린 종말의 단체로써의 교회가 아니라

권력의 중앙으로써 성전이 되었기에

강도의 소굴인 겁니다.


모든 인간의 기도의 내용은 정중앙에 들어가기 위함입니다.
누가 저를 땅끝으로 내몰아 주세요 라고 기도하는 자가 어디있겠습니까?

천국 보내달라. 구원해 달라.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고 예수님을 임금님으로 모시겠다.
이 모든 것이
사실상 중앙 센터를 차지하기 위한 몸부림이다는 겁니다.
 

그렇기에 그들의 부르짖음은 두 사람 중의 한 사람인 바리새인의 기도와 다를바 없습니다.
모든 인간의 기도는 다 여기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주여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감사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신앙의 정중앙이요 믿음의 정중앙이요 기도의 정중앙으로써 차지한

성전인 셈입니다.

그런데 기도 자체가 부르짖음 자체가 
새로운 기도의 사람을 만들어 내는 겁니다.

 

세리는 성전 안에서도 멀리 서 있습니다.

성전 자체 내에서도 이미 자리배치가 되어 있는 겁니다.
부르짖음이라는 주체가 미리 세리의 자리를 배치시켜 놓은 겁니다.
부르짖음이 세리를 부르짖도록 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당연히 거룩한 자는 정중앙에 위치하겠지요.

그러나 더러운 자는 끝으로 자진해서 물러설 것입니다.

 

그 이유는 거룩한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기도하는 집인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 그렇게 배치 시키시는 겁니다.
성전이라는 눈에 보이는 공간만 그럴까요?
지구 땅 덩어리에서도 그렇게 배치시키시는 겁니다.

 

자 그런데 문제는 거룩한 성전이

인간들이 자리를 차지하는 그 위치에 따라서

거룩의 정도가 차이난다면

그것은 거룩한 성전이 아닌 거지요.

 

제 말은 인간이 찾아나서서 위치에 앉듯이 앉는 그런 자리 배열이 아니다는 겁니다.

인간 쪽에서의 찾아감이 아니라

오히려 정반대로 거룩한 성전이 다가옴으로써 부르짖음의 의미가 달라진다는 겁니다.

 

결국 거룩이 먼저 찾아왔기에 세리는 그렇게 밖에 부르짖을 수 밖에 없었고

또 거룩이 바리새인에게 이렇게 찾아 왔기에 바리새인은 그렇게 밖에 부르짖을 밖에 없었다는 겁니다.

부르짖음이 그렇게 두 사람을 두 패로 갈라버린 겁니다.
그것도 모르고 바리새인은 좋아라 했지요
하나님이 그렇게 두 패로 가르니까
성전 중앙에는 자기가 있지
성전 끄트머리에는 세리가 지가 알아서 저 구석으로 자진해서 가고 있지
모든 것이 자신에게 유리하게 보이니까
그렇게 보이는데로 해석을 한 겁니다.

 

지난 시간에 거룩한 전쟁이 먼저 있었고

그 거룩한 전쟁의 증상으로써

인간의 구원은 헛되다를 외치는 찬양이

여호와의 거룩한 전쟁의 증상으로써 나타났다고 했습니다.

 

즉 우리는 이렇게 밖에 의식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있고 성전이 있고

내가 성전에 들어감으로써 나의 발걸음의 대상물로써 성전이 있어서 들어가게 되니

그 성전에서 부르짖게 된다고 말이죠.

 

아닙니다. 틀렸습니다.
정반대로 꺼꾸로 입니다.
가능성으로가 아닌 불가능성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가능성의 해석은 결국 자기 몸에서 출발하는 겁니다.
불가능성의 해석은 예수님의 몸에서 출발하는 겁니다.
고로 나는 철저하게 단절된 몸으로 봐야 하는 해석을 해야 합니다.
나를 부정하는 해석으로 말입니다.
 

부르짖음이 먼저 있었고

그 부르짖음의 집이 나에게 찾아와서

나를 스피커로 삼아 스피커 잭을 꼿으니까

나 라는 스피커가 이렇게 밖에 부르짖을 밖에 없도록 하신다 라는 겁니다.


나의 의지와 상관 없는 부르짖음입니다.
분명 나는 돈 따발 하늘에서 뚝 떨어지게 해 달라는 기도 밖에 할 줄 모르는데 
그런 기도 밖에 못하는데
정작 내 입에서는 엉뚱한 소리가 내 귀에서도 들릴 정도로 나오는 겁니다.
주여 불쌍히 여겨 주소서 나는 죄인 이로소이다.

마치 나에게 누가 씌여져서 나와 다르게 외치는 겁니다.

성령의 놀라운 탄식으로써 말입니다.
 

그 부르짖음이 두 종류인데 두 사람으로 표현이 된 겁니다. 성전 안에서 말입니다.

 

즉 이 말은 자주 언급했듯이

이스라엘 내부에 두 패로 갈라지는 현상이다는 겁니다.

 

이스라엘 내부에 사울 패거리는 바리새인처럼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감사합니다.
저 다윗과 같이 안식일 어기는 놈들과 같지 않게 해 주심을 감사합니다 라고 말입니다.

저 놈들은 안식일을 어기고 제사장만 먹을 수 있는 진설병을 먹음으로써

거룩한 율법을 어긴 더러운 자입니다. 저들과 같지 않게 해주심을 감사합니다 라고
다윗과 같지 않음을 부르짖음의 한 패거리 이고

 

전에도 말했듯이 이것이 사실상 대세죠. 이스라엘 전체에서 말입니다.

성전 안에서 부르짖는 사람들의 대부분의 부르짖음의 내용이 말입니다.

 

반대로 딸랑 한 명은
그 다윗은 이스라엘 내부에서 정중앙은커녕 완전 끄뜨머리로
끝으로 땅끝으로 몰려서 부르짖는 부르짖음으로써 한 노선을 형성하더라 말이죠.
곧 죽음으로 내 몰리는 기도라는 겁니다.
부르짖음이 다윗을 죽음으로 내 몰아버리는 겁니다.

마치 예수님이 그렇게 땅끝 곧 죽음으로 몰려서 십자가의 죽임을 당하듯이 말입니다.

부르짖음이 그렇게 만들어 버린 겁니다.
 

이것은 이미 정해진 상황에서 그 증상으로써 나타나는 겁니다.

 

부르짖음이 먼저 있었다 말이죠.

 

제일 마지막 행동이 부르짖음이 아니라 말이죠.

 

 

자 이렇게 볼때에

 

이스라엘 내부에서든

성전 안에서든
어떤 공간에서든
지구에서든

두 패로 갈려지는데


한 쪽은 정중앙으로 자연스럽게 모아지고

당연히 마땅히 부르짖을 만한 곳에서 부르짖는 것이고

 

다른 한 쪽은 끝으로 몰려서

도저히 부르짖을 수 없을 곳에서 부르짖는 부르짖음이 되는 겁니다.

 

성전 곧 하나님의 전은 만민이 부르짖는 집이라고 했는데

마음껏 언제든지 누구든지 얼마든지 부르짖을 수 있는 장소임에도 불구하고

 

정작 부르짖음 자체가 두 사람을 두 패거리의 양상으로 선택해서

한 쪽은 이런 식으로 부르짖겠끔 만들고

다른 한 쪽은 저런 식으로 부르짖겠끔 만들어 버린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한 쪽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니까

마음껏 자유롭게 기도하면 되고 기도하는데 그 어떤 불편함이 없는 겁니다.

 

그런데 다른 한 쪽은 그렇게 자유롭게 마음껏 기도할 수 있는 집이 졸지에

도저히 기도할 수가 없을 정도로 부르짖기 힘든 곳으로써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르짖지 않고서는 못배기는 장소가 되는 겁니다.

마음놓고 자유롭게가 아니라 끝으로 몰리는 그 상황의 사건이 벌어지면서 말이죠.


부르짖음이 그렇게 만들어 버리는 겁니다.
 

한 쪽 사람에게는 너무 너무 자유로운데

다른 한 쪽 사람은 누가 건드린 것도 아닌데

찢어질 듯이 마음 아픈 곳으로써의 장소가 되어버린 겁니다.

 

 

다르게 말하면 한 쪽 사람들 패거리에서는

이스라엘 자체가 구원의 민족, 또는 공동체로써

주님의 구원을 마음껏 노래 부르는 그런 국가와 민족이 되는 겁니다.

 

그러나 다른 한 쪽의 사람들에게서는

이스라엘 자체 내에서 버림받는 자의 모습으로써

사람의 구원이 헛됨을 노래하는 겁니다. 이스라엘에서 말이죠.

선민들 속에서 말입니다.

 

도대체 누가 맞습니까? 라고 물을 필요 조차 없을 정도로

그 물음이 무가치 하게

이미 전체 대세는 이스라엘은 구원받았다 라는 것에 대한 하나님께 대한 감사입니다.

 

아무리 다윗이 사람의 구원이 헛되다 라고 외쳐도

대세는 인간을 구원하시는 주께 대한 감사로 가득합니다.

 

뭐그리 마음 아파 할 필요가 뭐 있냐 말이죠!!

 

말그대로 만민이 기도하는 집에서 기도하면 되잖아요.

정중앙이 어디있고 멀리 끄트머리가 어디있고

그런 것을 왜 따지냐 말이죠. 그냥 하면 되지!!!

 

맞습니다. 그냥 기도하면 됩니다.

 

그런데 그것은 모든 종교라고 했고 늘상 보아온 모든 종교의 제의 장소에서 벌어지는 겁니다.

이상할 것 하나 없습니다.

 

그런데 복음은 다릅니다. 정반대입니다.

기여이 정중앙과 끄트머리라는 위치를

인간이 아닌 기도가

기도가 그렇게 사람을 배치시켜서

두 패의 부르짖음으로 가른다는 점입니다.

 

일만달란트 용서의 비유에서 놀라운 점은

인간은 용서를 받거나 아니면 이해할 수 있는 그 어떤 능력?

사고방식 자체가 없다는 겁니다.

 

뭐 용서 그 까짓껏 용서 해 주시면 용서 받으면 되지 뭐

그게 뭐 어렵나?

 

얼마나 불가능하면 용서를 줘 봤자 소용이 없을 정도로 만들어 버린 것이

일만달란트 용서의 비유입니다.

비유란 수수께끼이다 라는 말이거든요.

즉 알수 없다 라는 겁니다.

못 푼다. 비밀이다 라는 겁니다.

단절이지요.

 

용서에 그 어떤 누구도 접근할 수가 없다 라는 겁니다.

 

방금 말한 거룩도 그렇죠

구원도 그러하지요

심지어 기도도 그렇다 라는 겁니다.

당연히 시편이니까 찬양도 마찬가지 이다는 겁니다.

 

모조리 다 불가능하다는 겁니다.

그런 입장에서

성전 안에서의 두 사람

두 사람 중에 이 불가능성을 인식하는 자는 누구입니까?

 

그 단절성을 뼈저리게 느끼는 자는 누구입니까?

 

그 사람이 중요한게 아니라

왜 부르짖음이라는 기도는 왜 그 사람을 그렇게 만드는 것일까요?

 

모든 종교에서의 기도하는 사람들처럼

대세를 따라서

바리새인처럼 기도하는 것이 하나도 어색한게 아닌데

 

왜 특이한 부르짖음을 따로 낯설게 만드시는 것일까요?

 

오늘 그 특이한 부르짖임이 시편 61편에 나타납니다.

 

땅끝에서의 부르짖음이라고 말입니다.

 

누가 봐도 우리같이 평범한 사람보다 정중앙의 자리를 제대로 누려본 사람입니다.

왕이지요.

 

그런데 그 왕이 그 정중앙에 있었던 자가

졸지에 땅끝으로 내몰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부르짖습니다.

 

이 부르짖음을 품으라 라고 말이죠.

누가 품을려고 하겠습니까?

불가능한데 !!!

 

(2:5, 개역)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2:6, 개역)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2:7, 개역)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2:8, 개역)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2:9, 개역)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2:10, 개역)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2:11, 개역)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품을 수 없는 마음이기에

불가능하기에

 

예수님이 먼저 십자가에서 다 이루시고

다윗에게 찾아와서 이 마음을 품도록 마음판에 심으시는 겁니다.

그리고선 부르짖습니다.

땅끝에서 말입니다.

 

남들은 다 여호와 하나님을 참 편하게 만납니다.

이상할 것 하나 없이 말입니다.

 

그런데 왜 다윗은 저 이스라엘 내부에서 이렇게 까지 해야

여호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단 말입니까?

저들처럼 자연스러우면 안됩니까?

 

이상할 것 하나 없이 말이죠.

 

그런데 다윗은 너무 너무 이상하게 여호와 하나님을 만납니다.

너무 너무 이상하게 부르짖음을 부르짖게 됩니다.

왜 꼭 땅끝으로 내 몰려서

끝으로 내 몰려야만 하는 부르짖음이어야 하는 겁니까?

 

이것이 저들과 구별시키는 거룩이다는 겁니다.

 

저들은 거룩을 잘도 행합니다.

맞습니다.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감사한게 맞잖아요!!

어떻게 세리라는 매국노처럼 살수 있습니까?

민족을 배반하고

일본앞잡이

로마앞잡이 노릇을 하면서

뻔뻔스럽게 성전에 와서 만민이 기도하는 집을 더럽히냐 말이죠

 

그런데 문제는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 뚜벅 뚜벅 걸어와서

이 세리와 같은 다윗에게 덮쳐서 부르짖도록 만들어 버린다는 겁니다.

 

졸지에 두 부르짖음이 생겨버리게 된 겁니다.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이유는 졸지에 두 기도가 생기도록 만들어 버린다는 겁니다.

아무도 그렇게 못했는데 말이죠.

누가 세리의 기도를

다윗의 기도를 기도로 쳐 주냐 말이죠.

 

그런데 그것이 바로 너희들이 불렀던 찬양이요 기도가 아니냐 말이죠.

 

유대인들은 어릴적부터 시편을 달달 외웠잖습니까?

누구 입장에서? 세리 입니까? 아니면 거룩을 행한 자 입니까?

 

세리입니다.

세리가 잘나서? 기도를 바르게 해서?

바른 기도를 해서?

아닙니다.

 

인간의 대상물이 될 수 없는 것이 기도입니다.

기도가 세리에게 다가온 겁니다.

그래서 불렀던 시편찬양을, 시편 기도를

 

도리어 이스라엘 스스로가 거부하는 식으로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감사합니다 라고

 

한 입에서 찬양(기도) 과 저주가 동시에 나오는 겁니다.

 

이것을 주님이 지적해 주시는데

세리처럼 멀리서서 고개를 못 들고 감히 감히

어떻게 부르짖을 수 있냐 말이죠.

 

그런데도 불구하고 바리새인 들으랍시고 뻔뻔스럽게 부르짖을껀 다 부를짖고 있으니

참으로 싸가지가 이렇게 없을 수가 있냐 말이죠.

이중적이고 모순적이며 부조리 하죠.

 

그런데 바리새인의 부조리 보다 더 더 더 부조리 해야만 하는 것이

부르짖음의 덮쳐짐이다는 겁니다.

 

세리에게

다윗에게 말입니다.

탕자에게 ~~~~

 

자 이렇게 되니까

압살롬은 아버지 다윗의 치부인 우리야 장군을 고의적으로 죽인 그 사건을

계속해서 물고 늘어지는 겁니다.

이미 나단 선지자를 통해서 용서하신 그 사건을 끄집어 내는 겁니다.

아무리 봐도 아부지 노아가 술 먹고 뻣은 발가벗은 모습을 보니

저게 무슨 의인이냐 말이죠.

 

왜 아버지는 탕자에게 금가락지 새 옷 새 신발을 주냐 말이죠.

내가 아버지 말씀 한 번도 어긴적이 있냐 말이죠.

나 한테는 한 번도 저렇게 해 준 적이 있냐 말이죠.

 

이 부조리를 넘어설 수가 없는 겁니다.

 

결국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의 모든 답은 딱 하나입니다.

 

저 부조리와 같지 않음을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라는 것

끝까지 저 더러움, 부조리에 동참하지 않는 겁니다.

 

동참하든 안하든 이미 더러운데 말이죠.

막살든 막살지 않든 이미 막살았고 막살며 막살도록 되어 있는데 말이죠.

 

성화론자, 개혁주의자들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개혁을 해야 하는데

단 한 개라도 어긋나 보세요

저 부패하고 썩어빠진 집권당 여당이

끝까지 물고 늘어질 것 아니겠습니까?

 

언론 플레이에 말려든다 말이죠.

 

즉 불가능, 단절 자체를 모른다는 겁니다.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다 고 하니까

다들 마땅히 기도 할 수 있는 줄 압니다.

기도 자체가 불가능인데!!!

 

결국 유대인들은 시편을 단 한번도 외친적이 없다는 셈입니다.

똑같이 유대인이 안되면 이방인은 두 말 할 것 없듯이

똑같이 유대인들은 단 한 번도 율법을 단 한 개도 지킨 적이 없다는 겁니다.

 

? 이레에 두 번 금식하고, 십의 이조를 드리고, 토색하지 않았고?

뭐 뭐 뭐 !!!!!!

 

괜히 이레에 두 번 금식한 것이 그 사람을 망친 겁니다. 지옥에 가거든요.

괜히 십의 이조를 드리고 토색하지 않은 것이 지옥으로 가는 지름길이였다는 겁니다.

괜히 막살지 않았다는 것이 지옥행이였다는 겁니다.

 

어디 자기자신이 옳음과 말씀지킴과 구원의 정당함 등등을 내세울수가 있냐 말이죠

뭘 해도 다 죄만 지어놓고 말이죠.

 

단절 곧 거룩을 거부한 겁니다.

아주 아주 역설적이지요.

 

거룩을 거부하는 거룩을 지켜왔던 겁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거부하는 아버지 말씀을 단 한번도 어긴적 없다를 주장하듯이 말이죠.

왜 아버지 말씀을 단 한번도 어긴적 없다 라는 것을 주장할까요?

아버지의 사랑을 거부하기 위해서입니다.

 

즉 아버지의 부조리를 끝까지 물고 늘어지듯이

자신의 부조리를 끝까지 주장하겠다는 겁니다.

 

내 부르짖음은 옳지만

아버지의 부르짖음은 옳지않다 라고 말이죠.

 

나의 부조리는 옳지만

아버지의 부조리는 옳지 않다 라는 겁니다.

 

자 이렇게 십자가의 지혜는 불륜스럽게 우리에게 파고드는 겁니다.

 

십자가만 그럴까요?

 

부르짖음도

찬양도

기도도

말씀도

성전도

 

다 십자가의 지혜로써 다가오는 겁니다.

 

심지어 시간적으로 가장 멀었던

가인의 제사와 아벨의 제사도

바로 십자가를 말하기 위함이였다는 겁니다.

 

가인의 제사는 인간 쪽에서 볼 때 하등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제사였고

아벨의 제사는 일방적인 편파적인 편애 제사로써 십자가의 죽음이 덮쳐진 겁니다.

 

이 불륜이 과연 무슨 수로 감사할수 있을까요?

거리끼는 걸림돌이지 않나요?

 

아무리 봐도 자랑꺼리가 되지 않잖아요

즉 자랑꺼리가 안된다는 것은

옳지 않게 보이기 때문에

반발한다는 겁니다.

 

이 반발성을 배경으로 깔아서 그 위에 펼쳐지는 십자가이니까

부르짖음도 제사도 찬양도 기도도 모든 것이 이렇게 십자가로 인해서 갈라지는 겁니다.

 

기도 즉 부르짖음이 하나가 아니다 라는 겁니다.

구원도 찬양도 성전도

반드시 두 패로 갈라지는 겁니다.

 

두 패로 갈라질 때 우리도 할 줄 알고 익히 아는 것 말고

도저히 납득이 안되는 한 쪽을 보자 말입니다.

그래서 땅끝으로 내몰리는 부르짖음이다는 겁니다.

특이하죠

 

부르짖음이 땅끝으로 내몰려서

비로소 부르짖음의 제대로 된 의미를 주장하더라 말이죠.

인간이 아닌 부르짖음 스스로가 말입니다.

인간의 부르짖음이 아닌

부르짖음이 부르짖는 부르짖음을 보자 말입니다.

너무 너무 낯설고 특이하니까

아무도 모르는 그 부르짖음이요

아무도 못 보고 못 듣는 부르짖음이다는 겁니다.

어떻게 벙어리가 찬양을 합니까?

벙어리의 찬양을 들을수나 있냐 말이죠.

그런데 주님은 우리가 들을 수 없는 찬양을 듣더라 말이죠.

땅끝은 이렇게 벙어리 또는 호모사케르 또는 추방자

이방인

또는 제가 언급한 감히 더러운 죄인 주제에 만민이 기도하는 집인 성전에서 부르짖는

세리가 감히 거룩한 곳에 왜 와서 부르짖냐 말이죠.

너는 부르짖을 수 없는 곳에 온 것이야 라고

그런 분위기가 조성된 그 곳에서

부르짖을 자격조차 주어지지 않는 자가 부르짖는 겁니다.

누가 들어주겠냐 말이죠.

 

이런 상황을 카페트처럼 배경으로 깔고 나타나는 부르짖음은

하나의 사건이 되는 겁니다.

 

즉 땅끝으로 내몰아 버리는 세력을 가시화 시키면서 말입니다.

 

우리의 엉터리 기도는 땅끝으로 내 몰리는 적도 없거니와

그런 세력들을 가시화로 만들어 낼수가 있던가요?

백날 기도해보세요 되던가?

 

그러니 처음부터 인간의 기도는 안받습니다.

오로지 성령의 놀라운 탄식

곧 성령의 땅끝에서의 부르짖음만 받으시는 겁니다.

 

그 성령의 부르짖음이

졸지에 우리에게 아무런 연고 없이 덮쳐버리면

이런 양상이 벌어진다는 겁니다.

 

땅끝으로 내 몰리는 상황 말입니다.

 

참 이상한 기도죠 !!!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가 그러했습니다.

아무도 내몰아 버리는 자가 없는데

예수님 혼자 땀 뻘뻘

눈물이 피 눈물이 될 정도로 부르짖습니다.

누가 땅끝으로 몰던가요?

 

(26:34,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26:35, 개역) 베드로가 가로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이와 같이 말하니라

(26:36, 개역)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26:37, 개역)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새 고민하고 슬퍼하사

(26:38, 개역)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26:39, 개역)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26:40, 개역) 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 동안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26:41, 개역)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26:42, 개역) 다시 두 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고

(26:43, 개역) 다시 오사 보신즉 저희가 자니 이는 저희 눈이 피곤함일러라

(26:44, 개역) 또 저희를 두시고 나아가 세 번째 동일한 말씀으로 기도하신 후

(26:45, 개역) 이에 제자들에게 오사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보라 때가 가까웠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우느니라

(26:46, 개역)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참 이상하죠

자신이 팔리기 위해서 기도 합니다.

 

아냐 아냐 너가 잘못 본 거야

예수님이 기도하심으로써 자신이 팔릴 것을 아신 것이지

팔리기 위해서 기도한 게 아니야

 

아닙니다 저는 아무리 봐도 팔리기 위해서 기도하십니다.

 

유다야 유다야 빨리 나를 팔아라 뭐하고 있니 어서 팔아라 어서 어서

 

(26:50,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 하신대 이에 저희가 나아와 예수께 손을 대어 잡는지라

 

(14:48, 개역)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를 잡으러 나왔느냐

(14:49, 개역) 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어서 가르쳤으되 너희가 나를 잡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는 성경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시더라

 

(14:55, 개역)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그를 칠 증거를 찾되 얻지 못하니

(14:56, 개역) 이는 예수를 쳐서 거짓 증거하는 자가 많으나 그 증거가 서로 합하지 못함이라

(14:57, 개역) 어떤 사람들이 일어나 예수를 쳐서 거짓 증거하여 가로되

(14:58, 개역) 우리가 그의 말을 들으니 손으로 지은 이 성전을 내가 헐고 손으로 짓지 아니한 다른 성전을 사흘에 지으리라 하더라 하되

(14:59, 개역) 오히려 그 증거도 서로 합하지 않더라

 

인간은 결국 거짓성전을 그것도 얼마나 모호했으면 36년 동안 짓겠습니까?

그런데 그것이 인간의 정성이 들어가니까 진짜가 되어버리고

 

상대적으로 3일 만에 짖는 성전은 가짜가 되어버린 겁니다.

 

두 주인을 못 섬기니까 당연하지요.

 

얼마나 깔끔하고 또렷하고 명료하면 삼일 만에 짖겠냐 말이죠.

그러니까 안 믿겨지고 믿을 수 없는 불가능이지요.

 

에이 알고보니 예수님 자기 몸이지

건물이 아니였습니다.

 

맞습니다. 허물어지는 성전이면 그것은 처음부터 성전이 아닌 거지요.

 

그래서 이 말도 안되는 부조리한 말을 오냐 예수 너에게 한 번 해 보자 라고

인간의 부조리가 예수님의 부조리한 말에 말려드는 겁니다.

 

아무리 봐도 부조리 즉 거리끼는 걸림돌이 되는 말이니까

걸림돌이기에 넘어져야 하니까 말이죠.

 

걸림돌이 아닌데 아무도 걸려 넘어지는 자가 없는데

왜 걸림돌이라고 하겠습니까?

 

그래서 역설적으로 예수님의 몸을 세우는

참성전을 세우는 역할에 맞물리도록 하신 겁니다.

막살지 않은게 아니라 막사는데 동조한 겁니다.


용서 받은자 없지롱 이라고

용서 받은자가 없는데 그게 무슨 용서냐 라고 따지는 것에

도리어 그 용서의 의미가 더 풍성해 지게 만드는 보충물로써 작용하게 된 겁니다.

 

이래나 저래나 예수님은 더 받고

우리는 그 있는 것 마저 빼앗기는 식입니다.

 

말씀대로 다 이루어지는 겁니다.

이루어진 채로 다가오는 사건들입니다.

 

우리가 지켜야 하는 말씀이 단 하나도 없이 말입니다.

 

자 부르짖음이 나에게 먼저 덮쳐져서

땅끝으로 몰고갑니다.

 

왜 일까요?

 

그 땅끝으로 나를 몰아가는 그 부르짖음이

 

나의 기도를 거부하고

성령의 놀라운 탄식을 듣게 하시는 겁니다.

 

비로소 주님의 부르짖음을 듣게 됩니다.

그리고 동시에 주님의 부르짖음을 싫어하는 세력

나 같은 원수를 포함한 모든 세력이 왜 이 예수님의 부르짖음을 싫어하는지의

그 내막을 보여주시는 겁니다.

 

 

 

(26:36, 개역)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26:37, 개역)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새 고민하고 슬퍼하사

(26:38, 개역)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26:39, 개역)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26:40, 개역) 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 동안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26:41, 개역)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26:42, 개역) 다시 두 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고

(26:43, 개역) 다시 오사 보신즉 저희가 자니 이는 저희 눈이 피곤함일러라

(26:44, 개역) 또 저희를 두시고 나아가 세 번째 동일한 말씀으로 기도하신 후

(26:45, 개역) 이에 제자들에게 오사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보라 때가 가까웠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우느니라

 

우리 죄인의 손에 팔리우실 정도로 예수님은 땅끝으로 내몰려 부르짖습니다.

우리는 이런 기도 못합니다. 불가능합니다.

육신이 약합니다.

각기 제 길로 가는 양 같아서 도망쳐버립니다.

 

그러나 세 번씩이나 가시를 빼달라고

이 잔은 옮겨달라고 부르짖는 예수님의 부르짖음은

아무런 응답을 받지 못합니다.

 

이미 다 알고 부르짖으셨기 때문입니다.

 

다 아는데

왜 부르짖을 필요가 뭐가 있냐?

왜 하나 마나한 부르짖음을 하시느냐?

 

이미 다 알고 계신다메?

아니 그 보다 더 충격적인 것은 또 뭔고 하니
안 들으시고 안들으심으로써 무응답이시고 부르짖는 그 부르짖임에 대답 조차도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철저한 버림받는 기도요 부르짖음인 거죠.

그 버림받는 부르짖음을 이미 다 아는데 왜 하냐 말이죠.
하나 마나 한 짖인데

더 구석으로 더 땅끝으로 내몰릴려고? 더 밉상 받을려고?

모든 인간의 기도는 센터 중앙에 진입하고자
예루살렘이라는 센터 안에서도 더 더 더 중앙으로 몰려드는데
그것이 기도의 목적인 인간의 기도인데

완전 정반대로 향한 부르짖음이다는 겁니다.

 

이렇게 앞뒤가 맞지 않다고 여기는 우리의 어두운 눈을 열어주시고자

사실상 다윗과 다를바 없이

우리는 마귀로부터

아니 우리 자신이 마귀처럼 행동하듯이

 

우리는 예수님을 땅끝으로 내몰아 버렸지만

사실상 우리가 땅끝으로 몰려버린

갇힌바 된 죄인이요

환자요

포로된자요

사망의 그늘에 폭삭 주저 앉은

흑망의 백성임을 보여주시고자

 

나의 진짜 모습을 반사시켜 보여주는 거울로써 증거하시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 아시면서
응답되지도 않는 부르짖음을 부르짖는 겁니다.

상대방이 듣지도 않는 그 외침을 왜 하냐 말이죠!

그러나 하나 마나 한 그 세 번씩의 부르짖음이

그 부정한 세가지 물건이

나를 구원하는 겁니다.


구원이라는 긍휼을 만드는 겁니다. 나의 구원이 주체가 아니라
구원이 주체로써 나는 그 증상물일 뿐입니다. 그저 대상물일 뿐입니다.
 

이 부정한, 부조리한, 모순된 불륜의 세 번의 부르짖음이 없었다면

 

십자가가 외치는 꼬끼오 꼬끼오 꼬끼오의 탄식이 없었다면

 

무슨 수로 광명한 천사의 탈을 쓴 마귀에게서 벗어날수가 있겠습니까?

 

땅끝으로 내 몰림으로써 비로소 부르짖게 하시는 겁니다.
만민이 기도하는 집은 센터 중앙이 아니라
성문 밖에서
해골 언덕에서 완성이 됩니다.

이미 부르짖는자로 만드셨기에

 

도저히 부르짖을 수 없는 그 땅끝에서

부르짖지 않고서는 못배기도록 부르짖음이 덮쳐지는 겁니다.

아무도 원치 않는 부르짖음이 땅끝으로 우리를 몰아서 땅끝에서 말입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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