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한 대로 갚는 부끄러운 피난처로 도망치기 (시편 62)

부끄러운 십자가에 목숨이 달려 있다!!


(막 8:31, 개역)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저희에게 가르치시되』

(막 8:32, 개역) 『드러내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매』

(막 8:33, 개역)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가라사대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막 8:34, 개역)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막 8:35, 개역)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막 8:36, 개역)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막 8:37, 개역)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막 8:38, 개역)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62:1, 개역) [다윗의 시, 영장으로 여두둔의 법칙을 의지하여 한 노래]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는도다

(62:2, 개역) 오직 저만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니 내가 크게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62:3, 개역) 넘어지는 담과 흔들리는 울타리 같은 사람을 죽이려고 너희가 일제히 박격하기를 언제까지 하려느냐

(62:4, 개역) 저희가 그를 그 높은 위에서 떨어뜨리기만 꾀하고 거짓을 즐겨하니 입으로는 축복이요 속으로는 저주로다(셀라)

(62:5, 개역)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대저 나의 소망이 저로 좇아 나는도다

(62:6, 개역) 오직 저만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니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62:7, 개역) 나의 구원과 영광이 하나님께 있음이여 내 힘의 반석과 피난처도 하나님께 있도다

(62:8, 개역) 백성들아 시시로 저를 의지하고 그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셀라)

(62:9, 개역) 진실로 천한 자도 헛되고 높은 자도 거짓되니 저울에 달면 들려 입김보다 경하리로다

(62:10, 개역) 포학을 의지하지 말며 탈취한 것으로 허망하여지지 말며 재물이 늘어도 거기 치심치 말지어다

(62:11, 개역) 하나님이 한두 번 하신 말씀을 내가 들었나니 권능은 하나님께 속하였다 하셨도다

(62:12, 개역) 주여 인자함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께서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심이니이다

 

 

지금 도망치는 상황입니다.

도망이라는 부정적인 의미가 도리어 구원입니다.

 

저들 원수들은 도망치는 것은 부끄러운 짖이다며 놀려먹습니다.

 

그러나 다윗에게는 저들이 놀려먹는 부끄러운 피난처가

도리어 참된 구원이요, 구원의 반석이다고 합니다.
얼마나 든든한지 미쁜 피난처 라는 겁니다.

 

반석, 바위, 흔들림이 없이, 요동침이 없이,
고요한,

세미한 음성이

침묵이

나의 구원이다는 겁니다.

 

저들은 비웃습니다. 왜 말을 못 하느냐고

말해 보라고

벙어리냐고


침묵이 무슨 구원이냐고?
죽음이 무슨 구원이냐고?
목숨 거는 것이 무슨놈의 구원이 되냐고!!!
 

니가 구원자 라메?

남을 구원하러 왔다면

왜 너 자신을 구원하지 못하는 것이지!!
말해봐 말해!!

 

말도 못하고

저 부끄러운 저주의 십자가에 달리냐고?

 

그 십자가가


저들이 거리끼는

도저히 자랑꺼리가 되지 못하는

부끄러움이 되는 십자가가


나의 진정한 피할 바위이다고

다윗은 지금 저들이 부끄러워하는 그것이 구원이다 라고 노래

자랑하는 겁니다.


부끄러운 꺼리와  자랑 꺼리의 대조 입니다.
 

지난 시간에 땅끝에서 부르짖는 부르짖음이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기도든
신앙이든

모조리 중앙센터를 차지하기 위한 용도로써 기도든 믿음이든 활용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예수님은 그 인간들의 그 중앙에서 까불다가 개죽음 당합니다.
어딜 감히 성전을 허물고 사흘만에 짖냐 말이죠.

어딜 감히 그 정중앙 센터에 들어오냐고

그 정중앙을 허물겠다고 말이죠.

인간의 권력이 다 모이는 센터 중앙인데

그래서 해체하겠다는 것에 반발한 인간의 불안에 의해
도리어 땅끝으로 내 몰립니다.

거기서 진정한 부르짖음이 덮친다고 했습니다.

 

땅끝이라는 아웃사이더는

사람들이 부끄러워 하는 위치입니다.

그런데 그곳에 진정한 피난처
진정한 부르짖음
피할 바위가 있습니다.

구원의 장소가 있는 겁니다.

장소 시공간 개념이 아니라

누구라는 인물이 있었다는 겁니다.

부르짖음이라는 인물 말입니다.
진정으로 부르짖는 부르짖음이요 상한심령의 탄식 말입니다.

 

아무도 진정한 온전한 부르짖음을 제대로 하는 자가 없습니다.
할수도 없습니다.

땅끝으로 내 몰리니까 보니

우연히도 그 온전한 부르짖음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오늘 시편 62편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들이 부끄럽다고

도망자나 가는 곳이라고 했던 그 곳이

진정한 피난처요

요동치 않는 바위 이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집이 바로 그런 의미인데

역시나 하나님의 집 내부에서도

성전 내부에서도 끝까지 이 두 패로 갈라지면서

만민이 부르짖는 집의 의미를 증폭 시키는 겁니다.

 

피난처도 그런 의미에서 증폭 시킵니다.

도망치는 자와 쫏는 자 라는 두 패로 말입니다.

 

죽임을 당하는 자와 살인의지를 표출하는 두 패로

피난처의 의미를 드러내는 겁니다.

 

반석도 동일한 의미입니다.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운다고 했습니다.

 

(16:18, 개역)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그렇다면 교회 내부에서도 음부의 권세가 맹렬하게 타올라서

끊임없이 교회는 분절이 되듯 나타나는 겁니다.

건물로써의 교회가 아닌

성령의 전으로써의 성도가 말입니다.

 

도망치는 성도가 꼴에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한다고 합니다.

 

말이 앞뒤가 맞지 않는 모순 아닙니까?

 

남들은 부끄러움 상황인데

도망치는 것이 무슨 자랑꺼리이냐고 비웃는데

그것이 피난처가 맹렬하게 내뿝는 구원의 능력이다는 겁니다.

 

십자가가 그래서 걸림돌이라는 거리끼는 상황을 발생시키는 사건으로써

두 패로 나누는 겁니다.

 

다윗은 지금 누구로부터 쫏기는 겁니까?

이스라엘 전체입니다.

사울왕의 사고방식이 이스라엘 전체에 퍼졌습니다.

 

이것이 원수들이 센터 라는 중앙을 차지해서 나타나는 결과입니다.

그들은 오로지 권력만 관심있습니다.

 

중앙에서 더 더 더 중앙을 차지해서

예루살렘이 이스라엘의 중앙인데

그 중앙에서 더 중앙인 성전에서

성전 안에서도 더 중앙의 자리를 차지 하기 위해서

기도한다고 했습니다.

 

인간의 본심을 가장 잘 보여준 겁니다.

 

그래서 그 기도의 내용이 정중앙의 권력을 차지한 자 답게 나타납니다.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이레에 두 번 금식하고 십의 이조를 내고 탐색하지 않고

저 정중앙 차지할 자격 있는 것 맞지요?????

 

이런 사울왕의 사고방식이 이스라엘 전체를 덮쳐

다윗은 땅끝으로 내 몰리는 겁니다.

 

그런데 그 땅끝이 저들이 싫어버린바 되어서 정중앙을 차지할려고 했는데

그 땅끝이

저들이 싫어하는 땅끝

저들이 거리끼는 도저히 자랑꺼리가 되지 못하는 그 땅끝이

진정한 부르짖음이 되는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 되는 겁니다.

 

저들이 부끄러워 하는 도망쳐서 만나게 되는 피난처가

구원의 능력이 나타나는 반석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이 시편 62편을 인용하십니다.

우리 같으면 첫 부분의 내용으로 가스펠을 만들 듯이 앞부분을 인용하는게 아니라

긍정적이고 부정적인 의미가 없는 부분으로 가스펠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거리끼는 걸림돌이 되는 부분으로써

예수님께서 시편을 인용하시는데

 

이 시편은 시편 자체로써 해석이 안되고

그렇게 되면 정중앙을 차지하기 위한 해석을 할테고

마치 십의 이조를 드렸다는 둥 이레에 두 번 금심했다는 둥

 

인간의 해석에 반대로

시편 자체내에서의 해석을 거부하고

십자가를 거쳐서 재해석함으로써

예수님께서 왜 시편을 인용했는지

왜 시편 그대로 행하셨는대도 불구하고

시편을 외운 자들에게서만 죽임을 당하는지

이 모순 이 역설을 통해서 그 시차의 간극을 보게 되는 겁니다.

 

시편 자체로써 해석을 하게 되면 모호하게 됩니다.

의문의 증서가 찢어지는 것이 아니라

의문의 증서가 계속해서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문에서 의문으로 꼬리를 물고 답도 없이 모호한 것으로 여운이 남게 됩니다.

 

깔끔하지 않고 찜찜한데 그 찜찜한 것으로

정답으로 삼기 때문에

기껏 내세우는 것이 이레에 두 번 금식했다는 둥

십의 이조를 드린다는 둥 그딴 모호한 것을 자랑하는 겁니다.

 

여기에 비해 십자가는 또렷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레에 두 번 금식했다 라는 것을 내세우던 가요?

십의 이조를 드렸다는 것을 내세우던가요?

없는데

 

제가 만나본 많은 목사들과 그 똘마니들 중에

의외로 99.99999999999..........% 로가 그렇다 라고

모호한 것을 주장하더라 말이죠.

 

아 이게 그냥 놀랄 일이 아니라

악마가 씌였는데

마귀가 씌였기에 정중앙을 차지해서

저렇게 말할 수 없는 개들이였구나 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자 에 대한 해석을 보고 놀랬습니다.

뻔히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데

저들은 기록된 문자가 이렇다고 우기는 겁니다.

문자로 보는 게 아니라

그것은 불교 땡중들도 다 그렇게 해석하는데

말씀이 말씀을 해석하는데도 불구하고 고집을 피우던데

놀라운 점은 그렇게 사람들을 속였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그쪽 교인들이 봄에도 불구하고

그 뻔한 속임수를 자랑으로 삼더라 말이죠.

 

어디 거리끼는 요소가 하나도 없는 겁니다.

 

아 이거는 사람의 육의 싸움이 아니구나

그냥 도망치는 길 밖에 없는 겁니다.

 

각 교회마다 가증한 것이 세워지면 도망치라고 했습니다.

 

(24:15, 개역)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의 말한 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

(마 24:16, 개역)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

(마 24:17, 개역) 『지붕 위에 있는 자는 집 안에 있는 물건을 가질러 내려 가지 말며』

(마 24:18, 개역) 『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질러 뒤로 돌이키지 말지어다』

(마 24:19, 개역) 『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 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로다』

(마 24:20, 개역) 『너희의 도망하는 일이 겨울에나 안식일에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

(마 24:21, 개역) 『이는 그 때에 큰 환난이 있겠음이라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

(마 24:22, 개역) 『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할 것이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나 그러나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시리라』

(마 24:23, 개역) 『그 때에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혹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마 24:24, 개역)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

(마 24:25, 개역) 『보라 내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노라』

(마 24:26, 개역) 『그러면 사람들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광야에 있다 하여도 나가지 말고 보라 골방에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마 24:27, 개역) 『번개가 동편에서 나서 서편까지 번쩍임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마 24:28, 개역) 『주검이 있는 곳에는 독수리들이 모일지니라』

(마 24:29, 개역) 『그 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마 24:30, 개역)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마 24:31, 개역) 『저가 큰 나팔 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마 24:32, 개역)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마 24:33, 개역)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

(마 24:34, 개역)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이루리라』

(마 24:35, 개역)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마 24:36, 개역)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마 24:37, 개역)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마 24:38, 개역)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마 24:39, 개역)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마 24:40, 개역)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마 24:41, 개역) 『두 여자가 매를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마 24:42, 개역)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13:14, 개역)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

 


그럼 이 시편 62편을 구약 자체내에서 해석하면 부딧히듯이 모호해 집니다.

 

(99:8, 개역)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여 주께서는 저희에게 응답하셨고 저희 행한 대로 갚기는 하셨으나 저희를 사하신 하나님이시니이다

(24:29, 개역) 너는 그가 내게 행함 같이 나도 그에게 행하여 그 행한 대로 갚겠다 말하지 말지니라

 


그럼 이 시편 62편을 예수님은 어떻게 인용을 하셨는고 하니

 

(16:27, 개역)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

 

우리는 선악이라는 행위의 기준으로 행한대로 갚는다고 해석합니다.

그것은 그런 해석의 달인 유대인 또는 불교애들과 다를바 없습니다.

괜히 불교를 언급하는게 아니라

개네들은 교리의 달인입니다. 즉 성화론자들의 해석과 똑같습니다.

성령 없이 해석하는 자들 말입니다.

광명한 천사들 아닙니까? 성화론자들!!!

성화론이 불교사상이거든요.

 

그런 선을 심으면 선으로

악을 심으면 악으로

갚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선악을 판단하는 기준을 인간도 선악을 해석할 줄 안다고 우기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놀랍게도 선악을 모릅니다.

악을 선으로 보고

선을 악으로 보는

어두운 눈을 가진자들이 인간입니다.

무슨 근거로 악이 왜 악인지 모르고

무슨 근거로 선이 왜 선인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런 엉터리 근거를 예수님을 항상 뒤짚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시편 62편을 인용하시는 겁니다.

 

(16:23, 개역)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16:24, 개역)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16:25, 개역)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16:26, 개역)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16:27, 개역)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

(16:28, 개역)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자 그 유명한 장면인 베드로가 예수님으로부터 사단아 라고 욕먹는 장면입니다.

 

놀랍게도 아직까지 저는 왜 베드로에게 사단이라고 욕먹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제대로 해석하는 자를 못 봤습니다.

수 많은 목사들을 즉 성경해석자들을 만나봐도 제대로 해석을 못하더라 말이죠.

 

자 그렇다면 이들 역시나 사람의 일과 하나님의 일을 구분 못하는 겁니다

 

사람의 일에서 선한 일이였던 베드로가 예수님을 죽으러 가시면 안된다고 막는 것이

사람의 일입니다. 이것이 베드로 입장에서는 선한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사람의 일이 바로 악한 일이다고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아서 이다 라고 하십니다.

 

그 근거가 되는 의미가 뒤에 나옵니다.

 

우리는 이 부분이 따로 따로 인식이 되지

같이 연결된 의미로써는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연결이 되어야 나오는 의미인데도 말입니다.

 

사람의 본분이 선한 일 곧 하나님의 일을 해야함이 마땅한데

아무도 하지 않기 때문에 다시 예수님께서 직접 보여주시는데

베드로는 안됩니다 라고 막는 겁니다.

 

베드로가 막고자 하는 이유인 그 기준은 죽으시면 안된다 살아계셔야 합니다 라는 기준입니다.

 

바로 그것이 예수님의 하나님의 일에서는 악이다는 겁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막아설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선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사탄아 라는 가장 심한 욕을 하지 않으면

그 각성된 최면에서 빠져나올수가 없는 겁니다.

 

그럼 선함과 악함이 뭔가?

제목의 부제로 달자면

사실상 성경 전체에서 아직까지 현대에까지 부딧히는 문제인 행함이냐 믿음이냐 라는 충돌인데

같은 연장선상에서 보면

 

(16:24, 개역)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16:25, 개역)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16:26, 개역)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16:27, 개역)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

 

선함이란 자기 목숨을 잃고자 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은 베드로 또는 우리 입장에서는 악입니다.

 

그리고 악함이란 자기 목숨을 구원코자 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베드로 또는 우리 입장에서는 선한 일입니다.

 

지지난 시간부터 계속해서 사람의 구원이 헛되다

그리고 땅끝에서 부르짖는 부르짖음 이다고

계속해서 거꾸로 거리끼는 것을 자랑하고

반대로 누구든지 내세울꺼리로는 자랑삼는 것은 십자가를 밝히 못보도록 꾀는 것으로

 

거꾸로 해석하는가 하면

 

바로 이런 기준 때문입니다.

 

사람이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는 일들은 모조리 악이다는 겁니다.

반대로 사람이 자기 목숨을 잃고자 하는 일들은 모조리 선이다는 겁니다.

 

우리 기준의 선악이 뒤 바뀐 겁니다.

 

심지어 자기 목숨을 구원코자 자기 목숨을 잃는 것도 악입니다.

반대로 자기 목숨을 잃고자 자기 목숨을 구하는 것은 선입니다.

 

슬슬 헷갈리죠.


하여튼 말씀을 내 쪽으로 끌어당기면 모조리 다 악이 됩니다. 믄 짖을 해도 죄 입니다.
말씀이 알아서 하도록 내버려 둬야 합니다.
나의 대상물이 말씀이 아니라
말씀의 대상물로써 나를 다루시는 겁니다.

제가 인간이 말씀을 읽는게 아니라
말씀이 나를 읽는 것이기에

마귀는 말씀을 읽을려고 하기에
말씀은 마귀가 읽으라고 나온것이다. 유대인들(시편을 달달 외운) 이지요.

성도는 말씀을 읽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말씀이 성도를 읽기 때문에 말씀이 있다 라고 하니까
등지고 나가버리는 사람이 생기는 겁니다.
복음의 능력을 그때 또 새삼스럽게 누렸습니다.
 

이 말은 인간의 행함은 믄 짖을 해도 결국 악이다는 겁니다.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든

자기 목숨을 잃고자 하든(사실상 없습니다.)

 

사람의 일이다는 겁니다.

 

그럼 하나님의 일은 이 사람의 일에 반대되는

살고자 빠락 빠락 애쓰는 자를 죽이고자 하시고

죽어 마땅함을 알아 죽을려고 애쓰는 자를 살리시고자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사람들은 짜증내는 겁니다.


결국 사람의 일이나 하나님의 일이나 도찐개찐 뭐가 다르냐 라는 겁니다.

 

살고자 하면 살고자 한다고 악하다고 하고

죽고자 하면 죽고자 한다고 악하다고 하고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부당하다 부당하다.
 

이것은 사실상 지난 시간에도 언급했지만

 

바로 우리가 그 짓을 하고 있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거울 반사 시키듯이 보여준다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의 부조리 보다 더 심한 부조리로 거울반사하듯이 보여주면

화를 내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대표적인 예가

그것을 자주 언급했듯이 일만달란트 비유에서도 나타났지만

 

이번엔 부자청년 비유를 통해서 언급해보면

 

부자청년이 말씀을 단 한번도 어긴적이 없이 어릴적부터 모조리 다 지켰다고 자부하길래

혹시 부족했거나 못 지킨 것이 있다면 말씀해 보세요 지금 당장 실시 하겠습니다 라고

 

선을 심어도 선을 행해도 너무 너무 엄청나게 선을 행했으니 선으로 갚으셔야 함이 마땅한데

 

예수님은

너가 도대체 선을 행한 적이라도 한 개 라도 있긴 있냐 라는 식으로


삐딱선을 타도 너무 삐딱선을 타서
 

그래? 선을 행했다고? 어릴적부터 모조리 다 지켰다고?

그래 과연 선을 행했는지 한 번 보자 라고

전재산을 가난한 자에게 다 주라 라고 하십니다.

 

절대로 전재산을 예수님에게 바치라고 안합니다.

가난한 자에게 주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에게 바쳐버리면 의미가 됩니다.

그런데 가난한 자에게 주는 것은 의미가 없어져 버리는 겁니다.

 

그 의미 없는 하나 마나 한 짖을 과연 할 수 있겠냐 말이죠?

 

오늘 본문 시편 62편에 만약 부자청년이 이 구절을 본다면 반박할 껍니다.

 

천한 자도 헛것이요 높은 자도 거짓되고

 

(62:9, 개역) 진실로 천한 자도 헛되고 높은 자도 거짓되니 저울에 달면 들려 입김보다 경하리로다

 

그러니 가난 한 자에게 전재산을 주는 것은 헛된 일이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너의 높다 라는 의식이 거짓되다

어릴적부터 단 한번도 어긴적이 없다는 것도 거짓되다 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러니 율법이라는 올무에 제대로 걸려든 거지요.

빠져나올수 없는 그물망인데

마치 빠져나왔다는 둥 외치고 있으니 거짓되다는 겁니다.

 

시편도 율법입니다. 율법 자체내에서 율법을 율법이 해석하면 답이 안 나옵니다.

답없는 인생이 졸지에 되어버린 겁니다.

그물망 무슨 수로 빠져나올래요?

천한자든 높은자든 다 걸려들었고

말려들지 않은자가 없는데

 

뭘해도 다 죄악인데

말씀을 지켜도 죄인데

 

법을 지키라고 준게 아니라

법은 우리를 반드시 어기도록 만들어 버린다는 겁니다.

 

유명한 예로 들어서 귀에 속 박힌 예가 있는데

오목사님 말 마따나

 

도로 주행을 하고 있는데 법을 제대로 지키고 있는데

도로 자체가 움직여서 나는 제대로 차선을 지킬려고 하는데

차선이 나를 법 어기도록 지마음대로 차선의 흰색? 노란색이 마음대로 움직여 버리면

법을 지킨 것이 될까요? 아니면 법을 어기게 된 것일까요?

 

시편도 율법입니다,

 

시편대로 지키면 예수님을 죽일수가 없도록 되어 있는데

이상하게 시편대로 다 외웠고 지켰는데 예수님을 죽이게 될까요?

이상하잖아요

 

그럼 우리는 지켰다고 할게 아니라

곤고한 자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랴 라고

의인이 아닌

죄인의 자리에서

 

한 인물에게 걸어야 하는데

 

이것이 선함인데

 

왜 자기가 할 일을 남에게 짐 지우냐 부끄럽지 않으냐

쪽팔리지 않냐 라고 유명한 성화론자 말처럼

쪽팔리지 않기 위해서 성화론을 주장한다처럼

그런 부끄러운 짖을 못하겠다 라고 하는 것이 바로 악함이다는 겁니다.

 

반대로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예수라는 한 인물 그것도 나의 모든 미움을 다 받아서 내 손에 죽임을 당한 그 인물에게 나의 선악적인 판단을 뻔뻔스럽게 떠넘겨버리고 자신은 얍삽하게 빠져버리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일인데 그것 조차도 예수님이라는 그 인물이 한다는 겁니다.

 

그럼 나는? 나는 좀비냐?

딩동뎅 정답

 

나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기에

예수님에게 모조리 일임

인수인계해 버리는 겁니다.

 

무책임하다 쪽팔리지도 않냐

부끄럽지도 않냐 라고 욕먹으면 기뻐하세요

왜냐

시편 62편이다는 겁니다.

 

결국 인간이 주체가 되면 악을 심은 것이고

예수님이 주체가 되면 선을 심은 것이다는 겁니다.

 

나의 목숨 마저도 예수님에게 달렸다면 모조리 예수님에게 떠 넘기는 겁니다.

 

그런데 성화론자나 사울패거리나 이스라엘 전체나 오늘날 교회는

그런 부끄러운 짖을 어떻게 하냐 라는 것이, 거리끼는 싫어버린바 되는 것이

 

우리에게는 도리어 자랑꺼리로써의 피난처이다는 겁니다.

 

도망치는 것이 무슨 자랑꺼리가 됩니까?

그런데 자랑꺼리 맞습니다.

든든한 피난처가 있거든요.

땅 끝에 말입니다.

 

그런데 저들은 이 든든한 피난처가를 도망치는 부끄러운 짖으로 보고

거리끼는 것으로 보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저들의 자랑꺼리는 뭔고 하니

십의 이조 이레에 두 번 말씀을 단 한번도 어긴적이 없다는 둥

어릴적부터 모조리 다 지켰다는 둥

그런 모호한 것들을 자랑하는데

그것이 성전 정중앙에 위치해 있는 겁니다.

그런 것들이 만민이 부르짖는 만민이 부르짖는 집에 자리 잡고 있다면

 

우리는 오히려 도망을 쳐야 합니다.

가증한 것이 세워졌거든요.

 

주의 선하심이 없고

악한 인간의 선하다고 우기는 그것들이 거룩한 곳에 세워진 겁니다.

 

그렇다면 땅끝으로 도망치라고 합니다.

든든한 피난처가 있기 때문에

저런 모호한 것들이 거리낀다고 근처도 오지 않는

 

저들의 그 부끄러운 피난처가, 정중앙의 센터가 되지 않는 부끄러운 땅끝이

 

우리에게는 유일한 도망갈 수 있는 든든한 요새요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반석이요

피할 바위요

믿음직 스러운 미쁘신 구원의 산성이다는 겁니다.

 

즉 다윗은 예수님을 보고 기뻐한 겁니다.

 

다윗이 아무것도 없는 땅끝으로 내 몰렸을때에

오히려 풍성한 피난처의 구원의 풍성함을 누리고 있는 겁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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