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야에서 나오는 줄기, 광야에서 부르는 찬양 (시편 63)

 

 

(63:1, 개역) [다윗의 시, 유다 광야에 있을 때에]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곤핍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63:2, 개역) 내가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보려하여 이와 같이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았나이다

(63:3, 개역) 주의 인자가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

(63:4, 개역) 이러므로 내 평생에 주를 송축하며 주의 이름으로 인하여 내 손을 들리이다

(63:5, 개역) 골수와 기름진 것을 먹음과 같이 내 영혼이 만족할 것이라 내 입이 기쁜 입술로 주를 찬송하되

(63:6, 개역) 내가 나의 침상에서 주를 기억하며 밤중에 주를 묵상할 때에 하오리니

(63:7, 개역)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음이라 내가 주의 날개 그늘에서 즐거이 부르리이다

(63:8, 개역) 나의 영혼이 주를 가까이 따르니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거니와

(63:9, 개역) 나의 영혼을 찾아 멸하려 하는 저희는 땅 깊은 곳에 들어가며

(63:10, 개역) 칼의 세력에 붙인바 되어 시랑의 밥이 되리이다

(63:11, 개역) 왕은 하나님을 즐거워하리니 주로 맹세한 자마다 자랑할 것이나 거짓말 하는 자의 입은 막히리로다

 

 

이사야11:1-9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하여튼 성경은 말 되는 소리는 하나도 없습니다.

모조리 다 말도 안되는 소리만 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어릴적에 무지 많이 부르기도 했습니다.

 

광야에 샘이 넘쳐 흐르리라

광야에 꽃이 피어 향내 내리라

 

주님이 다스릴 그 나라가 되면은

사막이 꽃동산 되리. (35:1-6).

 

사자들이 어린양과 뛰놀고

어린이도 같이 뒹구는

참 사랑과 기쁨의 그 나라가

이제 속히 오리라.

 

사막에 숲이 우거지리라.

사막에 예쁜 새들 노래하리라.

주님이 다스릴 그 나라가 되면은

사막이 낙원 되리라.

독사 굴어 어린이가 손 넣고

장난 쳐도 물지 않는

참 사랑과 기쁨의 그 나라가

이제 속히 오리라.

 

 

어떻게 죽음이 천국이 됩니까?

죽음은 죽음 뿐이며 그것이 지옥 아닙니까?

광야는 그야말로 지옥입니다.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물이 없어서 생명들이 자랄수가 없습니다.

오로지 갈증 뿐이고 목마름 뿐이며

죽음 뿐입니다.

 

그 죽음이 어떻게 낙원이 된단 말입니까?

 

(11:1, 개역)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11:2, 개역) 여호와의 신 곧 지혜와 총명의 신이요 모략과 재능의 신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 그 위에 강림하시리니

(11:3, 개역)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그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치 아니하며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치 아니하며

(11:4, 개역) 공의로 빈핍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그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11:5, 개역) 공의로 그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몸의 띠를 삼으리라

(11:6, 개역)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찐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11:7, 개역)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11:8, 개역) 젖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11:9, 개역)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11:10, 개역) 그 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기호로 설 것이요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리니 그 거한 곳이 영화로우리라


(사 35:1, 개역) 『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며 사막이 백합화 같이 피어 즐거워하며』

(사 35:2, 개역) 『무성하게 피어 기쁜 노래로 즐거워하며 레바논의 영광과 갈멜과 사론의 아름다움을 얻을 것이라 그것들이 여호와의 영광 곧 우리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리로다』

(사 35:3, 개역) 『너희는 약한 손을 강하게 하여주며 떨리는 무릎을 굳게 하여주며』

(사 35:4, 개역) 『겁내는 자에게 이르기를 너는 굳세게 하라, 두려워 말라, 보라 너희 하나님이 오사 보수하시며 보복하여 주실 것이라 그가 오사 너희를 구하시리라 하라』

(사 35:5, 개역) 『그 때에 소경의 눈이 밝을 것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며』

(사 35:6, 개역)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벙어리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사 35:7, 개역) 『뜨거운 사막이 변하여 못이 될 것이며 메마른 땅이 변하여 원천이 될 것이며 시랑의 눕던 곳에 풀과 갈대와 부들이 날 것이며』

(사 35:8, 개역) 『거기 대로가 있어 그 길을 거룩한 길이라 일컫는바 되리니 깨끗지 못한 자는 지나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입은 자들을 위하여 있게 된 것이라 우매한 행인은 그 길을 범치 못할 것이며』

(사 35:9, 개역) 『거기는 사자가 없고 사나운 짐승이 그리로 올라가지 아니하므로 그것을 만나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얻은 자만 그리로 행할 것이며』

(사 35:10, 개역) 『여호와의 속량함을 얻은 자들이 돌아오되 노래하며 시온에 이르러 그 머리 위에 영영한 희락을 띠고 기쁨과 즐거움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달아나리로다』


 

이새의 줄기는 곧 죽은 줄기입니다.

그런데 그 죽은 태에서 찬양이 나옵니다.

 

왜 이새의 줄기입니까?

거슬러 올라가 우리는 룻기의 나오미 사건을 봐야 합니다.

 

나오미는 나를 나오미 라 하지 말라 기쁜자라 하지 말라

나는 마라 라 괴로운자

 

전능자 께서 나를 괴롭게 하셨다.

(룻 1:15, 개역) 『나오미가 또 가로되 보라 네 동서는 그 백성과 그 신에게로 돌아가나니 너도 동서를 따라 돌아가라』

(룻 1:16, 개역) 『룻이 가로되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룻 1:17, 개역)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와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룻 1:18, 개역) 『나오미가 룻의 자기와 함께 가기로 굳게 결심함을 보고 그에게 말하기를 그치니라』

(룻 1:19, 개역) 『이에 그 두 사람이 행하여 베들레헴까지 이르니라 베들레헴에 이를 때에 온 성읍이 그들을 인하여 떠들며 이르기를 이가 나오미냐 하는지라』

(룻 1:20, 개역) 『나오미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나오미라 칭하지 말고 마라라 칭하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룻 1:21, 개역)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나로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칭하느뇨 하니라』


 

괴롭히는 여호와를 만났다는 겁니다.

 

모든 인간이 섬기는 신이란 괴롭히는 신이 아닙니다.
괴롭히는데 어떻게 자기의 신이 되겠습니까?

그것은 적군의 신입니다.

 

고대는 신들의 전쟁에 인간은 하나의 장기알 이였듯이

자신의 신을 드러내기 위해서

적의 신들과 싸우는 겁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신은 뭔가 다릅니다.

정작 자기 백성을 괴롭히는 신입니다.

그것은 뭐 적의 신 보다 더 적과 같은 모습입니다.

 

나오미는 하나님을 통해서 좀 혜택 좀 누려보자 라는 남편과 그 아들들의 죽음을 보고서

여호와가 누구인가를 제대로 인식합니다.

 

즉 믿는 척 하거나

겸손한 척 하거나

신을 제대로 아는 척 한게 아니라

자신이 격은 그대로 발설합니다.

 

전능자께서는 나오미를 괴롭히는 자 라고

 

여기서 이스라엘이 두 패의 노선으로 나누어집니다.

괴롭히는 여호와를 격는 노선과

즉 나를 원수로 삼는 여호와의 노선과

 

정반대로 나의 구원을 위한 여호와 노선 말입니다.

고로 나의 구원에 방해되는 저 나오미 같은 자를 방해된다고 제거할려는 노선 말입니다.

어차피 여호와께서 저 나오미를 괴롭히고 있으니 나도 저를 괴롭히겠다고 나서는 노선 말입니다.
사울왕이 그러했습니다.
다윗을 괴롭히는데 이스라엘 전체가 사울왕을 따랐습니다.
 

결국 이스라엘 전체는 이 이새의 줄기를 어떻게 해서든 없앨려고 달려든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듯이 말입니다.

 

그런데 그 죽은 광야의 노선에서

그 죽음의 사막에서 샘이 흘러 넘치는 겁니다.

 

샘이 흘러 넘친다는 표현은 성적인 표현입니다. 곧 사랑 에로스입니다.

씨뿌리는 비유가 그러합니다.

 

꽃이 피어 향내 내리라 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떻게 죽은 태가 어떻게 많은 자식을 낳냐 말이죠.


(눅 23:29, 개역) 『보라 날이 이르면 사람이 말하기를 수태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하리라』
 

결국 의도적으로 말도 안되는 것만 골라 골라서 가는 노선인 겁니다.

 

이것을 다시 다른 말로 하면

어떻게 해서든 인간이 믿을려고 달려들때마다

도저히 못 믿는 길로만 펼쳐놓은 노선이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죄인 되면 됩니다.

 

죄인 되면 구원이 된다는 말이 아니라

죄인이 되면 주님이 도대체 무슨 일을 하시는 지를 비로소 보게 됩니다.

 

그것 때문에 이 말도 안되는 일만 골라서 하는 겁니다.

인간의 의식이란 고정적입니다.

아무리 천재가 창의적으로 유동적인 사고방식으로 살아도

그 본인 자체는 고정적이거든요.

 

그 고정적인 인간 그 자체를 흔들어 버리는

죽음으로 사막으로 몰아넣어버리면

 

한마디로 나오미처럼 전능자께서 괴롭히면

36년 동안 쌓은 정중앙 센터의 권력을 3일만에 허물어져 버리는 겁니다.

3일만에 허무는 그 전능자를 나의 구원자로 모실수가 있냐 말이죠.


나의 성전 곧 나의 육체를 무너뜨리는 자인데?
나의 적군인데

나를 원수로 만들어 버리는데

이스라엘로부터 철천지 원수로 만들어 버리는데

그런 상황을 만드는 주님을 전능자 라고 노래할 수 있냐 말이죠..


그것도 아주 아주 기쁘고 신나게 즐겁게 말입니다.. 노래 부를수 있냐 말이죠.

나를 죽일려고 하고

나를 사막으로 광야로 목마름으로 갈증 뿐인 물 한 방울 없는 사막으로 내몰아 가는데

탈탈탈 모조리 다 털어버리는 그 전능자를 찬송할 수 있냐 말이죠.

 

내 평생에 송축하겠다고 합니다.


(시 63:3, 개역주의 인자가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

(시 63:4, 개역이러므로 내 평생에 주를 송축하며 주의 이름으로 인하여 내 손을 들리이다


나오미 입장에서는 그것이 바로 전능자 라는 표현으로 나타났고
지금 시편 63편에서 다윗은 주의 인자하심으로 표현된 겁니다.

인자 곧 인애와 자비 곧 사랑이 이런 식이면
누가 이 사랑을, 인애와 자비를 간구하겠냐 말이죠.

그것도 평생토록 송축하며 찬양한다고 하니 기가막힐 노릇 아닙니까?

그런데 주님은 실시하겠다는 겁니다.

감당할 육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불가능한 소리만 하시는 겁니다.

 

이것은 육의 입술이 외치는게 아닙니다.

또 이것을 육의 입술이 부르는게 아닙니다.
 

정반대의 나는 육일 뿐인데 영이 내 속에 들어와서 외치는 찬양입니다.

내 허락도 없이 내 입술을 몽땅 빼앗아 내 입술이 저절로 외치는 찬양입니다.

내 입술을 내가 막아도 소용이 없을 정도입니다.
 

어 내가 왜 이러지?
나는 노래 부를 처지가 못 되는데?

난 입술이 죽은, 벙어리와 방불한 자인데

난 태가 죽어버린 불임자인데

나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어라 라고 외친 철천지 원수인데

나는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고 도무지 저를 알지 못한다고 한 부인한자인데

나는 앉은뱅이로써 도저히 사슴같이 뛰어 놀수가 없는 자인데

 

어떻게 벙어리의 입술에서

죄인의 입술에서

 

예수님을 찬양할 수가 있단 말입니까?

 

내 자체가 광야요 사막이요 죽음인데

 

어떻게 찬송이 나올수가 있단 말입니까?

 

아무리 봐도 죽은 나에게는 생명이 나올 구석이 아무리 들따 봐도 없습니다.

 

그것은 내가 찬송을 부르는게 아니라

찬송이 나를 부르기 때문에

아무리 내가 벙어리 일지언정 노래 부르지 않고서는 못배기는 겁니다.

숯불에 지져진 불에 탄 입일 지라도 그런 입술이 부정한 자라도
주를 외칠려고 입술이 가만히 있지를 않는 겁니다. 입술 지멋대로 말입니다.

이런 일을 누가 벌리느냐 말이죠.

 

바로 나오미를 괴롭혔던 그 전능자 여호와입니다.

 

이 죽은태에서 남자들의 씨가 다 매말라 버린 광야 속에서

예수님이 의도적으로 죽은태에서 나시는 겁니다.

 

천국이 등장하는 겁니다.


천국이의 등장은 항상 죽음이라는 지옥을 카페트로 깔고 등장합니다.
예수님의 등장은 항상 마귀라는부정적인 보충물을 동원해서 그 배경으로 등장하시는 겁니다.

빛은 빛에서 등장하지 않고 캄캄한 어두움 속에서 빛은 등장하듯이 말입니다.

그렇다면 빛은 이 어두움을 제대로 규정하는 겁니다.
광명한 천사의 노릇까지 하는 이 마귀의 어둔 세력을 제대로 규정하면서 말입니다.

 

이제 이 천국은 모든 어두움을 쫏아내는 전쟁을 벌리는 겁니다.

 

어두움이 가만히 있지 않죠.

이 천국을 쫏아내고자 광야로 땅끝으로 내몰아 버리는 겁니다.

 

그런데 죽은줄 알았는데 자꾸 살아나는 겁니다.


사망이의 최후의 무기는 사망 뿐입니다.


(고전 15:52, 개역)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고전 15:53, 개역)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고전 15:54, 개역)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 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

(고전 15:55, 개역)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고전 15:56, 개역)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고전 15:57, 개역)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고전 15:58, 개역)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그런데 우리는 그 사망을 이기신 분의 인자하심을 곧 전능하심을 외치는 찬양자 입니다.

 

소인에게는 아직도 7천번의 목숨이 남아 있나이다 ~~~~~

 

엘리야는 언제는 나만 남았다고 내 목숨 딸랑 한 번 뿐인데
그거 죽으면 우짜노??????

내 열심히 특심이라고 원망할때는 언제고

입싹 딱고 소인에게는 아직도 7천번의 목숨이 남아 있다고 외칩니다.


죽음이 무용지물이 되어버리는 7천명의 남은자가 있다는 겁니다.

아 괜히 쫄았네 쫄지마 !!!!!!!
 

즉 찬양이가 덮쳐져서 엘리야를 노래 부른 겁니다.

엘리야가 찬양하는 찬양은 모호할 뿐인데 나만 찬양할 뿐입니다,
찬양자는 나만 남았나이다 라고 원망할때에

너 왜 자꾸 찬양을 무시하느냐? 7천번의 찬양이가 남아 있다는 겁니다.
 

찬양이가 엘리야를 노래 부르니까 아주 또렷하고 명료해져 버린 겁니다.

 

아무리 사도바울을 죽여버려서 쓰레기 통에 버려도

그 다음날 또 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겁니다.

 

또 패버려 죽여서 쓰레기 통에 버렸는데

또 그 다음날 벌떡 일어나 또 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겁니다.

 

도대체 목숨이 몇 개냐 말이죠.

 

아무리 광야에 내다 버려도

벌떡 일아나 그 광야에서 외치는 겁니다.

 

그는 흥하고 나는 쇠하여야 함이 마땅하다고

 

맞습니다.

우리는 그 분의 흥함만을 노래하기 위해서 태어난 겁니다.

 

나의 흥함은 의미가 없고 안개와 같습니다. 덧 없습니다.

의미도 없는 모호한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62편에 천한자 곧 가난한 자의 낮은 모습 천한 모습 가난한 모습도 다 헛되고

그럼 높은자는 의미있는가? 높은자의 권력, 다들 우러러 보는 높음, 다들 부러워 하는 영광?
그런 높은자의 것들도 다 거짓되다고 합니다.

즉 찬양꺼리가 될 수 없다는 겁니다.

자랑꺼리가 안 된다는 겁니다.

오히려 거리끼는 것인데

우리는 거꾸로 주님의 전능하심을 그 인자하심을 찬양하기 싫어한다는 겁니다.

그 정도로 자랑꺼리가 되지 못하는 부끄러운 피난처요 거리끼는 십자가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가 무한 영광일세 라고 찬양하는 자가
전능자를 만난 자 입니다.

주의 인자하심이 덮쳐진 찬양자 인 겁니다.

 

오로지 주의 흥하심만을 노래하기 위해 태어났고

주의 흥하심만을 위해 노래하다 죽도록 되어 있습니다.

 

나오미는 이 주의 흥하심 때문에 전능자를 만나도록 되어 있었던 겁니다.


그것 뿐이겠습니까? 그 노선에서 예수님이 나시는 겁니다.
 

죽은 가문이고 남자들의 씨는 이제 다 사라진 그 죽은태에서

오로지 예수님의 흥하심 때문에 쫄딱 망하는 태가 되어야 헸던 광야가 되어야 했던 겁니다.

아무 광야가 아니기 때문에 흉내 낼려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 광야에서

그 사막에서 샘이 흘러 넘치는 겁니다.

완전히 대박 사건이지요.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는

오로지 예수님이라는 보석을 담은 그릇으로써

살아도 주를 위해 죽어도 주를 위해 깨져야 하는 그릇이였던 겁니다.

 

이 이새의 줄기에서 찬송이 나옵니다.

 

다른 데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같으면 다 입술이 있겠다 모두다 다 찬양하면 되지

왜 하필이면 이새의 줄기에서만 찬양이 나오냐

우리도 찬양 할 줄 안다.
너만 찬양하냐? 전능자? 전능자 까짓꺼 왜 노래 못 부를 이유가 뭐있나???

우리도 찬양하면 되지 않냐 라고 하겠지만

그것은 육의 생각입니다.

 

믿음의 노선을 따로 마련했다는데 있어서

우리는 내가 찬양하는 것에 의미를 둘게 아니라

나에게 찬송을 들려주실 자가 어느 줄기에서 나오느냐를 보라는 취지입니다.

 

내가 부르는 찬양은 허접합니다.

되도 않는 노래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들려주시는 찬송은 다른 사람이 부르는 찬송과 다릅니다.

그 어떤 찬송의 달인과도 족히 비교가 될 수 없을 정도로 그들과 같지 않습니다.

 

(7:28, 개역)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래니

(7:29, 개역)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1:21, 개역) 저희가 가버나움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곧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매

(1:22, 개역) 뭇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다들 놀래 자빠질 지경입니다.

 

권능과 능력이 넘칩니다.

동시에 다른 노선에서 찬양(시편)을 추구하던 자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지키고자 위기의식에 빠져들게 되는 겁니다.

 

왜 많고 많은 장소 다 내버려 두고 광야에서 유다 광야에서 이 시편 63편을 노래 할까요?

 

왜 광야에서 그를 예비하는 것일까요?

 

그 전능자를 위해서라면 광야가 아닌

생명력이 넘치는, 물이 있는, 강이 있는

도시에서 예비하지 않나요?
문명이 발생하는 장소인 물이 이미 있는 곳이 아니라

물이 전혀 없는 곳에서 왜 구지 있는 물 놔뚜고

새로 샘물을 터트리는 것일까요?
그것도 아무도 없는 광야에서 말입니다.

 

사막은 죽음 뿐인데

 

신을 위해서라면 인간은 가장 좋은 것을 드려야

그 분을 흥하게 하는 것 아닙니까?

 

그 분을 흥하게 한다는 것이 고작

그 분을 예비한다는 것이 고작 죽음의 사막이냐 말이죠.

 

즉 아무것도 예바할 것이 없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 분을 흥하게 하기 위해

나는 아무것도 할 게 없다는 말과 똑같다는 겁니다.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데 그 분이 흥하게 되어버림이 덮쳐지는 겁니다.

 

이런 소리를 돈바치기를 좋아하는 교회에서 해 보세요

죽죠 개죽음 당합니다.

사도행전에서 아주 인상 깊었던 것이
무당 또는 영접한 점쟁이를 사실상 그 지역의 경제를 쥐고 있는 상인들이 뒤에서 조종 했다는 겁니다. 그 뒤에는 마귀이고요.
그렇다면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고 보시면 됩니다.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줄기 곧 노선은 기존의 노선을 의도적으로 피하기 위해서입니다.

 

제사의 노선이 아닌 인애와 자비의 노선

강도의 소굴이 된 교회와 이스라엘 전체가 아닌

따로 꼬불쳐 놓은 노선인 이새의 줄기 라는 겁니다.

 

여기서 왕이 나는 겁니다.

 

여기 죽은 태에서 나오는 왕이어야 말로 진짜 왕이다는 겁니다.

십자가 속에서 나오는 왕입니다.

 

누가 믿겠습니까?

 

의도적으로 인간의 믿음을 피해서 이루는 방식이다는 거죠.

 

얼마전에 아둘람 땅굴에 대해서 언급했는데 (시편 57편)

거기서 이스라엘 왕이 나오는 겁니다.

뭐라굽쇼 이스라엘 왕이 땅굴에서 나온다고 굽쇼

하필이면 허구한 장소 다 냅뚜고 왜 땅굴입니까?
그 땅의 틈새에 뭐가 있는데?


(창 37:18, 개역) 『요셉이 그들에게 가까이 오기 전에 그들이 요셉을 멀리서 보고 죽이기를 꾀하여』

(창 37:19, 개역) 『서로 이르되 꿈 꾸는 자가 오는도다』

(창 37:20, 개역) 『자, 그를 죽여 한 구덩이에 던지고 우리가 말하기를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먹었다 하자 그 꿈이 어떻게 되는 것을 우리가 볼 것이니라 하는지라』

(창 37:21, 개역) 『르우벤이 듣고 요셉을 그들의 손에서 구원하려하여 가로되 우리가 그 생명은 상하지 말자』

(창 37:22, 개역) 『르우벤이 또 그들에게 이르되 피를 흘리지 말라 그를 광야 그 구덩이에 던지고 손을 그에게 대지 말라 하니 이는 그가 요셉을 그들의 손에서 구원하여 그 아비에게로 돌리려 함이었더라』

(창 37:23, 개역)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매 그 형들이 요셉의 옷 곧 그 입은 채색옷을 벗기고』

(창 37:24, 개역) 『그를 잡아 구덩이에 던지니 그 구덩이는 빈 것이라 그 속에 물이 없었더라』

(창 37:25, 개역) 『그들이 앉아 음식을 먹다가 눈을 들어 본즉 한 떼 이스마엘 족속이 길르앗에서 오는데 그 약대들에 향품과 유향과 몰약을 싣고 애굽으로 내려가는지라』

(창 37:26, 개역) 『유다가 자기 형제에게 이르되 우리가 우리 동생을 죽이고 그의 피를 은익한들 무엇이 유익할까』

(창 37:27, 개역) 『자, 그를 이스마엘 사람에게 팔고 우리 손을 그에게 대지 말자 그는 우리의 동생이요 우리의 골육이니라 하매 형제들이 청종하였더라』

(창 37:28, 개역) 『때에 미디안 사람 상고들이 지나는지라 그들이 요셉을 구덩이에서 끌어 올리고 은 이십 개에 그를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매 그 상고들이 요셉을 데리고 애굽으로 갔더라』

(창 37:29, 개역) 『르우벤이 돌아와서 구덩이에 이르러 본즉 거기 요셉이 없는지라 옷을 찢고』

(창 37:30, 개역) 『아우들에게로 와서 가로되 아이가 없도다 나는 나는 어디로 갈까』

(창 37:31, 개역) 『그들이 요셉의 옷을 취하고 수염소를 죽여 그 옷을 피에 적시고』

(창 37:32, 개역) 『그 채색옷을 보내어 그 아비에게로 가져다가 이르기를 우리가 이것을 얻었으니 아버지의 아들의 옷인가 아닌가 보소서 하매』

(창 37:33, 개역) 『아비가 그것을 알아보고 가로되 내 아들의 옷이라 악한 짐승이 그를 먹었도다 요셉이 정녕 찢겼도다 하고』

(창 37:34, 개역) 『자기 옷을 찢고 굵은 베로 허리를 묶고 오래도록 그 아들을 위하여 애통하니』

(창 37:35, 개역) 『그 모든 자녀가 위로하되 그가 그 위로를 받지 아니하여 가로되 내가 슬퍼하며 음부에 내려 아들에게로 가리라 하고 그 아비가 그를 위하여 울었더라』

(창 37:36, 개역) 『미디안 사람이 애굽에서 바로의 신하 시위대장 보디발에게 요셉을 팔았더라』


요셉이 형들에게 죽임을 당해 구덩이에 던져져 사자에게 찢겨 죽었다는 그 구덩이 굴 처럼
쫏아오는 사울왕을 피해 피해 도망치다 도망치다 얼마나 다급했으면 그 속으로 들어가야 할 정도로 
땅끝으로써의 죽음으로 내몰린 상황을 말하는
그 사건을 말하는 땅굴이기 때문입니다.

즉 이 말은 사울왕은 이스라엘 왕으로 쳐주지 않겠다는 겁니다.

그 죽음의 아둘람 굴에서 다윗이 왕으로 세워집니다.

 

얼마나 초라합니까?

그런데 그 초라함을 세련되게 하는게 아니라

그 초라함을 더 증폭 시키듯이

가난뱅이 천한자 거지들 약자 병자 들이

이 다윗이 왕으로 세워지는 곳에 모여들어서 찬양합니다.

(삼상 22:1, 개역) 『그러므로 다윗이 그곳을 떠나 아둘람 굴로 도망하매 그 형제와 아비의 온 집이 듣고는 그리로 내려가서 그에게 이르렀고』

(삼상 22:2, 개역)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 장관이 되었는데 그와 함께 한 자가 사백 명 가량이었더라』

 

참 신기하죠

광야인데

죽음인데

샘이 넘치는 겁니다.

짐승 구유인데

왕이 나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저주에 내몰려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주의 주 되심을 완성하십니다.


구원자의 구원이 완성이 됩니다.

다 이루었다.

그런데 아무도 듣지 않는 외침입니다.

마치 용서의 비유인 일만달란트 탕감 받은 자의 비유에서
용서 받은 자는 결과적으로 없는채 용서의 의미만 풍요해진 겁니다.

예수님이 구원을 완성하든 말든 인간은 자기들만의 구원이 따로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성령의 일은 바로 그런 구원들을 다 모조리 깨뜨리는 식입니다.
 

아무도 예수님의 주 되심을 원치 않는데

떨거지 같은 자들이 이 예수님의 죽음의 자리인

십자가에 몰려들어서

 

예수님의 주 되심

 

왕의 왕 되심을 찬양합니다.

 

죽음의 자리에서 말입니다.

 

십자가라는 죽음에서 비로소 찬양이 나오는 겁니다.

 

누가 믿겠습니까?

너도 나도 안 믿었다는 것을 선언하고 부르는 찬양입니다.

 

찬양이 덮쳐져서 불가능한 내 평생의 송축이 되시는 겁니다.

나도 원치 않았던 주의 주 되심이,
주의 주 되심 곧 나의 구원은 헛되고 주님의 주 되심만 옳았습니다 라는 선포가,

 

나에게 덮쳐져서 주의 주 되심만을 외치도록 처음부터 만드셨던 겁니다.
그것 때문에 태어난 겁니다.

죽은 나로 인해

사막이라는 죽음으로 인해

 

기쁨의 찬양의 샘이 광야에서 흘러 흘러 넘치는 겁니다.


Posted by 김 대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