뿔전쟁과 구스여인(야곱)의 하나님 (시편 75)

죽으면 죽으리라의 하나님

당신은 미움받기 위해 태어난 자의 하나님 

왜 미움인데? 창세전에 편애(사랑하기로 작정)받았기에 ~~~


(롬 9:13, 개역)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롬 9:13, 새번역) 『이것은 성경에 기록한 바 ㉧"내가 야곱을 사랑하고, 에서를 미워하였다" 한 것과 같습니다. / ㉧말 1:2; 3』


 

(삼상 2:1, 개역) 한나가 기도하여 가로되 내 마음이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내 뿔이 여호와를 인하여 높아졌으며 내 입이 내 원수들을 향하여 크게 열렸으니 이는 내가 주의 구원을 인하여 기뻐함이니이다

(삼상 2:2, 개역) 여호와와 같이 거룩하신 이가 없으시니 이는 주 밖에 다른 이가 없고 우리 하나님 같은 반석도 없으심이니이다

(삼상 2:3, 개역) 심히 교만한 말을 다시 하지 말 것이며 오만한 말을 너희 입에서 내지 말지어다 여호와는 지식의 하나님이시라 행동을 달아보시느니라

(삼상 2:4, 개역) 용사의 활은 꺾이고 넘어진 자는 힘으로 띠를 띠도다

(삼상 2:5, 개역) 유족하던 자들은 양식을 위하여 품을 팔고 주리던 자들은 다시 주리지 않도다 전에 잉태치 못하던 자는 일곱을 낳았고 많은 자녀를 둔 자는 쇠약하도다

(삼상 2:6, 개역)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음부에 내리게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삼상 2:7, 개역)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삼상 2:8, 개역)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빈핍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드사 귀족들과 함께 앉게 하시며 영광의 위를 차지하게 하시는도다 땅의 기둥들은 여호와의 것이라 여호와께서 세계를 그 위에 세우셨도다

(삼상 2:9, 개역) 그가 그 거룩한 자들의 발을 지키실 것이요 악인으로 흑암 중에서 잠잠케 하시리니 힘으로는 이길 사람이 없음이로다

(삼상 2:10, 개역) 여호와를 대적하는 자는 산산이 깨어질 것이라 하늘 우뢰로 그들을 치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땅 끝까지 심판을 베푸시고 자기 왕에게 힘을 주시며 자기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의 뿔을 높이시리로다 하니라

(삼상 2:11, 개역) 엘가나는 라마의 자기 집으로 돌아가고 그 아이는 제사장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기니라

(삼상 2:12, 개역) 엘리의 아들들은 불량자라 여호와를 알지 아니하더라


당신은 미움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당신의 삶 속에서 그 미움 또렷히 받고 있지요.

당신은 미움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당신의 삶 속에서 그 미움 분명히 받고 있지요.

 

창세전부터 기록된 여호와의 편애는

예수님의 십자가로 다 이루셨고

 

세상을 악하다고 증거함으로 인해

너를 미워한게 아닌 나를 미워함이라

 

당신은 미움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지금도 그 미움 받고 있지요.

당신은 미움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지금도 그 미움 받고 있지요.

 

먼저 시편 75편에 대한 내용을 2월달에 왕의 부르짖음으로, 왕의 기도로 글을 올렸습니다.

그리고 어제 그 내용을 가지고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니 제목이 좀 잘못되었나? 아니면 부족했나? 아니면 과잉오바했나? 라는 등등의
뭔가 아쉬운 생각이 들더군요
.


왜냐하면 제가 글을 올릴때에 신학자들의 의견들이 왕의 부르짖음, 왕의 기도 

또는 왕의 즉위식에 쓰여지던 기도이다 라고 학자들의 주장을 참고했는데 

그것은 별다른 이견이 없어서 그냥 넘어갔는데

 

정작 우리같은 일반인 비전문가들은 본문 내용에 나오지 않으면 알수 없습니다.

그래서 각 번역의 1절만 한번 올려봤지만

전체 75편을 살펴봐도 사실상 우리 비전문자들은 알 길이 없습니다.

왕의 즉위식에 드렸던 기도라는 것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학자들이 그렇게 주장하니 그런갑따 라고 넘어갈 뿐이지

정작 제가 다시 한번 생각해 보니 역시나 정반대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참 건방지죠. 지가 뭔데 학자들의 다수의 의견을 거부하냐 말이죠.
말씀을 나누는 중에 아 이거 아니구나 라고 떠올라서
이렇게 반대되는 생각을 올려봅니다.
 

(75:1, 개정) [아삽의 시, 인도자를 따라 알다스헷에 맞춘 노래] 하나님이여 우리가 주께 감사하고 감사함은 주의 이름이 가까움이라 사람들이 주의 기이한 일들을 전파하나이다

(75:1, 개역) [아삽의 시, 영장으로 알다스헷에 맞춘 노래] 하나님이여 우리가 주께 감사하고 감사함은 주의 이름이 가까움이라 사람들이 주의 기사를 전파하나이다

(75:1, 바른) [지휘자를 따라 알다스헷에 맞춘 아삽의 시, 노래] 하나님이시여, 우리가 주께 감사하고 감사함은 주님의 이름이 가까이 있기 때문이니, 사람들이 주님의 놀라운 일을 선포합니다.

(75:1, 새번역) 하나님, 우리가 주님께 감사하고 또 감사합니다.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이들이 주님께서 이루신 그 놀라운 일들을 전파합니다.

(75:1, 공동) 하느님, 우리가 당신께 감사 드리옵니다. 당신의 이름을 불러 감사 드리오며 당신께서 이루신 크신 일들을 이야기하리이다.

(75:1, 쉬운) <재판관이신 하나님-아삽의 시. 알다스헷 에 맞춰 지휘자를 따라 부른 노래> 오 하나님, 주께 마음을 다해 감사를 드립니다. 주의 이름이 늘 우리와 함께 계시니 감사합니다. 주께서 하신 놀라운 일들을 우리가 외칠 것입니다.

(75:1, 우리말) 오 하나님이여, 우리가 주께 감사를 드립니다. 주의 이름이 가까이 있으니 주의 놀라운 일들이 선포됩니다.

(75:1, 킹흠정) (악장에게 준 알다스헷, 아삽의 시 또는 노래) 오 하나님이여, 우리가 주께 감사를 드리고 우리가 주께 감사를 드리오니 주의 이름이 가까이 있음을 주의 놀라운 일들이 밝히 보이나이다.

(75:1, 한글킹) 악장을 따른 알타스킷, 아삽의 시 또는 노래오 하나님이여, 우리가 주께 감사드리고 감사드리오니, 이는 주의 경이로운 일들이 주의 이름이 가까움을 선포함이니이다.

(75:1, 현대인) (아삽의 시. `멸하지 말라.'는 곡조에 맞춰 성가대 지휘자를 따라 부른 노래) 하나님이시여, 우리가 주께 감사하고 감사하는 것은 주께서 행하신 놀라운 일이 주가 우리와 가까이 계심을 선포하기 때문입니다.

(75:1, 현대어) [하나님 오셔서 정의를 세우신다; 아삽의 시. 부수지 마소서 가락에 맞추어 지휘자의 지휘에 따라] 고맙습니다, 하나님 주께서 우리 가까이 계시오니 고맙습니다. 주께서 베푸신 놀라운 일을 널리 전하렵니다.

(75:1, 가톨릭) 저희가 당신을 찬송합니다, 하느님, 찬송합니다. 당신 이름을 부르는 이들이 당신의 기적들을 이야기합니다.

 

 

즉 왕의 기도가 될 수 없는 기도 이다는 겁니다.

 

자 여기서 제가 욕을 얻어먹을 수밖에 없는데

왜냐하면 기존의 해석들이 다 그렇게 주장하는데 그런해석을 따르지 않고

정반대의 주장을 하니 욕먹을 수밖에 없겠지요.

그렇다고 노골적으로 욕하지 않습니다. 점잖은채 할테니 말이죠.

유독 눈 시뻘겋게 달려드는 똘아이들만 누구 지시로 덤벼들지

행동대장이 아니면 뒤에서 뒷짐지고 점잖음만 떨고 있을 뿐입니다.

 

아무튼 제가 반대하는 이유는 반대라서 반대가 아니라

조금 비틀어 보는 시선으로써 보이길래

졸지에 저렇게 보는 자들과 충돌이 될 수 밖에 없겠지요

아무튼 저는 이것이 왕의 기도가 아니다 라고 주장을 펼쳐 보고 시작하겠습니다.

 

그럼 뭐냐?

 

사실은 왕의 기도 맞습니다.

그런데 제가 주장하는 것은 비천한 자의 기도이다는

정반대의 위치를 주장하고 싶어서입니다.

왕과는 완전 정반대의 위치에 있는 자의 기도입니다.

 

바로 가장 비천한 자의 기도입니다.

가장 비천한 자는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도

즉 사라져도

아무도 의식하지 않는 그런 자입니다.

 

앞의 이전 글들에서 소자에 대해서 언급했지요?

바로 오늘 기도는 소자의 기도입니다.

 

그래서 제가 제목을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하지 않고

그건 좀 이해하기가 어려워서 좀 쉽게 이해한 것이

구스여인의 하나님으로 표현했습니다.

어머니께 좀 쉽게 알려드리고자 말입니다.

 

물론 같은 의미입니다.

다음 시편 76편에서도 야곱의 하나님이 나오지만

오늘은 같은 의미로 구스여인의 하나님으로 말하겠습니다.

 

자 왕의 기도 맞다 해놓고 또 아니다니 왜 이랬다 저랬다 하느냐

제가 주장하고픈 것은 소자의 기도로써 왕의 위치와 정반대라는 것이다는 겁니다.

그런데 어떻게 왕의 기도가 되었는가?

소자의 기도였고

비천한 자의 기도인데???

 

뿔에 대해서 오늘 시편 75편에서도 강조하고 있지만

사무엘상 2장 한나의 기도에서도 강조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기도인 마리아의 기도에서는 안나오지만 같은 누가복음 1장에서

세례요한의 아버지 사가랴가 입이 풀리자 마자 구원의 뿔을 언급하게 됩니다.

 

(1:57, 개역) 엘리사벳이 해산할 기한이 차서 아들을 낳으니

(1:58, 개역) 이웃과 친족이 주께서 저를 크게 긍휼히 여기심을 듣고 함께 즐거워하더라

(1:59, 개역) 팔 일이 되매 아이를 할례하러 와서 그 부친의 이름을 따라 사가랴라 하고자 하더니

(1:60, 개역) 그 모친이 대답하여 가로되 아니라 요한이라 할 것이라 하매

(1:61, 개역) 저희가 가로되 네 친족 중에 이 이름으로 이름한 이가 없다 하고

(1:62, 개역) 그 부친께 형용하여 무엇으로 이름하려 하는가 물으니

(1:63, 개역) 저가 서판을 달라 하여 그 이름은 요한이라 쓰매 다 기이히 여기더라

(1:64, 개역) 이에 그 입이 곧 열리고 혀가 풀리며 말을 하여 하나님을 찬송하니

(1:65, 개역) 그 근처에 사는 자가 다 두려워하고 이 모든 말이 온 유대 산중에 두루 퍼지매

(1:66, 개역) 듣는 사람이 다 이 말을 마음에 두며 가로되 이 아이가 장차 어찌 될꼬 하니 이는 주의 손이 저와 함께 하심이러라

(1:67, 개역) 그 부친 사가랴가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예언하여 가로되

(1:68, 개역)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 백성을 돌아보사 속량하시며

(1:69, 개역)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

(1:70, 개역) 이것은 주께서 예로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으로 말씀하신 바와 같이

(1:71, 개역) 우리 원수에게서와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구원하시는 구원이라

(1:72, 개역) 우리 조상을 긍휼히 여기시며 그 거룩한 언약을 기억하셨으니

(1:73, 개역) 곧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 맹세하신 맹세라

(1:74, 개역) 우리로 원수의 손에서 건지심을 입고

(1:75, 개역) 종신토록 주의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섬기게 하리라 하셨도다

(1:76, 개역) 이 아이여 네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라 일컬음을 받고 주 앞에 앞서 가서 그 길을 예비하여

(1:77, 개역) 주의 백성에게 그 죄 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하리니

(1:78, 개역) 이는 우리 하나님의 긍휼을 인함이라 이로써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1:79, 개역) 어두움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취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 하니라

 

 

뿔전쟁이다 말이죠.

 

뿔을 쉽게 이해해서 남성성기의 남근으로 보시면 됩니다.

일종의 힘의 사고방식이다 말이죠.

 

전쟁은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칼과 방패 병거로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한다는 겁니다.

 

(삼상 17:47, 개역)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

 

전쟁을 사랑으로 해 보세요

말이 되나

참 가관이겠지요?

그런 뜻이 아니라


야곱의 하나님으로 한다는 겁니다
.

야곱의 하나님이 뭐냐?


바로 힘으로 하지 않는 힘이다는 겁니다
.

힘은 힘인데 힘 없는 힘이다는 거죠.


즉 쎄지않다는 겁니다
. 약하다는 겁니다.

그럼 그것은 힘이 아니잖아요?

 

그런데 이거 아십니까?

힘을 빼는데도 힘이 듭니다.

 

이것을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하는데

야곱 하면 무엇이 생각납니까?

신과 더불어 싸우는 싸움꾼이라는 이름을 얻었습니다.

바로 이스라엘이지요.

 

그러기 위해서는 힘을 빼는 겁니다.

분명 야곱은 얍복강가에서 천사와 씨름하면서 복 곧 힘을 달라고 했습니다.

약하기 때문에 강하게 해 달라고 한 겁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은 오냐 힘 주께 해 놓고

힘을 쳐 버립니다.

평생 쩔뚝 거리면서 살게 됩니다.

환도뼈 즉 남성 성기를 중심으로 해서 다 무너뜨려버렸습니다.

 

이것이 할례 때에 입이 열린 것과 같습니다. 사가랴가 말이죠.

그리고 뿔 싸움이 드디어 시작됩니다.

 

원수의 속성은 뿔을 높이는 겁니다. 힘을 반드시 과시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상대적인 구원의 뿔, 의의 뿔은 
악인의 뿔을 베는 것이 구원의 뿔이다는 거죠
.
반대를 위한 반대의 뿔인 셈이죠.
 

그럼 그 방법이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이런 방식은 악인의 뿔 전쟁 방식이고

(5:38, 개역)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5:39, 개역)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5:40, 개역)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5:41, 개역)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5:42, 개역)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5:43, 개역)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5:44, 개역)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5:45, 개역)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5:46, 개역)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5:47, 개역)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5:48, 개역)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구원의 뿔 방식은 어리석고 미련한 십자가의 죽음 방식이다는 겁니다.

오히려 힘빼고 할례를 해서 전쟁 속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한마디로 죽으라 라는 소리와 같습니다.

 

왕의 기도는 결국 이 악인의 뿔을 베는 것을 요청하는 비천한 자에게 구원의 뿔을 높이시는 겁니다.
즉 긍휼의 세계인 소자에게 긍휼을 베푸는, 넓은 바다보다 더 넓은 세계입니다.
소자를 연자맷돌에 달아서 그 넓고 넓은 지옥과 같은 넓은 바다에 빠뜨렸는데
정작 주님의 긍휼의 세계에서는 더 넓어서 소자가 넓은 바다 보다 더 커서
빠뜨려 보니 물두멍이에 빠뜨린 셈이다 말이죠.
아이들 장난감의 세수대아 이다는 겁니다.
 

여기에 누가 기도했는가?

두 여인 바로 한나와 마리아입니다.
율법에 의해 돌삐를 든 남자들에게 마땅히 죽어야 하는 여자, 무능한, 부정한 여자입니다.
 

제가 왜 왕의 기도가 될 수가 없느냐 하면

사실은 처음부터 왕의 기도가 아닙니다.

왕이 무슨 저런 기도를 합니까?

 

내용으로 봤을 때

이것은 가장 비천한 자의 기도입니다.

즉 악인의 뿔에 찔린 자입니다.

 

악인의 뿔에 찔린 자 만이 저런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뜯어 말려도 자동적으로 본능적으로 나오도록 되어 있다 말이죠.

과부와 불의한 재판관 비유가 그런 이유입니다.

 

그런데 저번에 솔로몬 재판에 대해서 이야기했듯이

즉 왕의 지혜, 왕의 기도에 대해 이야기 했듯이

저 촌구석에 그것도 아무런 지위도 없는

그저 저거들끼리 벌어진 사건을

다들 무시해 버려도 상관이 없는데

 

이스라엘 사회는 이상하게 다른 민족과 다르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촌구석의 아무도 관심두지 않는

즉 소자를 연자맷돌에 달아 바다에 빠뜨려도

그 넓은 바다에서는 티도 안납니다.

물결이 억울하다고 파도소리를 쳐도
그 파장은 곧 고요해져 버립니다. 
위에서 전지적각하시점의 드론을 띄워도 안 보입니다.
요즘 경찰들이 사건의 단서를 찾고자 드론을 띠우잖아요.
시체라든지 실종자를 찾든지 하잖아요!

그 정도로 넓고 넓은 그 바다에서는 티도 안난다는 겁니다.

이것이 세상이라는 악의 구조이다는 겁니다.

악인의 뿔이 높아지는 세상 구조이다는 겁니다. 바다

그 넓은 바다라는 악의 구조는 그렇습니다. 티도 안납니다.

한 어린아이가 수돗물에 오염이되어 납중독이 되었습니다.
어린아이 하나가 납중독이 되든 말든 어른들의 사회구조는 눈하나 깜짝 안합니다.
아무도 신경 안씁니다.
그런데 왕의 기도가 떳습니다.
미국 오바마 대통령이 그 아이가 있는 곳에 갔습니다.
어른들은 추호도 움직일 생각이 없는데
오히려 감출려고 하는데

대통령이 직접 그 납중독의 지역으로 비행기가 뜨니까
졸지에 부랴 부랴 무슨 대책이란 대책은 다 세우는 겁니다.


심지어 대통령까지 그 어린아이 소자가 마셨던 물을 직접 마시겠다고 합니다.

어른들은 비상이죠. 여럿 어린아이 하나 죽어도 꿈쩍 안하던 놈들이

대통령이 마시겠다고 하니 부랴 부랴 물을 정화시키기 바쁩니다.

대통령 죽었다 라는 소리 들어봐요?
평생을 그 무거운 짐을 나홀로 지고 무슨수로 견딥니까?

이 가장 비천한 소자의 기도가 졸지에 왕의 기도가 된 겁니다.

어린아이 하나의 편지가 왕의 편지인 겁니다.

그래서 왕은 그 어린아이의 편지를 자기 편지로 만들어야 하는 자작극을 펼쳐야 합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편지라 ~~~~~~

(고후 3:3, 개역)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한 것이며 또 돌비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심비에 한 것이라』

얼마전에 나온 영화인데 뇌진탕 
Concussion 이라는 영화인데

미국의 미식축구선수들의 뇌진탕 문제를 다룬 영화인데
다들 쉬쉬하고 덮어버릴려고 하는 겁니다.
돈 문제가 걸려있기 때문인 겁니다.

뒤에 더 큰 돈문제로 손해를 보든말든 지금 당장은 손해를 보기 싫기에
다들 쉬쉬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절대 절대 미국인들은 그 문제를 들추어낼려고 하지 않기에
또 절대로 들추어낼수도 없는 내부인이기에

반드시 외부인 이방인이 그 문제를 들추어내는 겁니다.

이것을 제가 토요일 올린 글에서 
소위 차이 라는 간극이라는 외부인 곧 히스테리 라고 표현했습니다.
절대 내국인은 그 문제를 들추어낼수가 없습니다.
오로지 외국 이방인 만이 그 문제를 들추어내는 겁니다. 

컨커션
(Concussion, 2015) 라는 영화인데 윌스미스가 나오는 영화입니다.


오로지 어른들의 세계의 외부인인 어린아이만이 이 문제를 들추어내는 기도 곧 편지가 되는 겁니다.
여기에 대통령이 뛰어드는 겁니다. 왕이 자신의 기도로 삼아버린다는 겁니다.

그런데 성소 곧 성막에 있는 물이 바다 덮음같이

그 물두멍에 있는 세수대아 보다 조금 큰 세수대아 한 10? 5? 정도의 물로

바다를 덮을 정도로

불가능한 일들이 바로

 

분명 아무도 듣지 않는 비천한 자의 기도

소자의 기도를

누가 듣고?

그 사건을, 이 세상에나! 세상에나! 도시 중앙의 왕의 자리에 까지 올라가

이제 하늘위의 하나님의 보좌에 까지 올라간다는 겁니다. 말이 됩니까?

가장 변두리 촌구석에서 이제는 도시 중앙의 정중앙 중에서 가장 정중앙으로 ~~

 

왜냐하면 구원의 뿔에 딱 맞는 기도이다 말이죠.

구원의 뿔이 자기가 그렇게 듣고 싶어하는 기도를 들었다 말이죠.
그거 해결할려고 구원의 뿔이 있었다는 겁니다.

 

어 악인의 뿔이 나타났다 살려주세요 라는 소리 말이죠.

 

그런데 왜 제가 왕의 기도가 아니다 라고 하느냐 하면

그 비천한 자의 기도가

사실상 귀에 안들립니다.

목을 상처냈다든지
목을 상실해 아무리 외쳐도 목소리가 안나옵니다.
벙어리의 기도 외침인 거죠.

또 
증거를 인멸해서

그 어떤 누구도 변호를 해 줄수가 없다 말이죠.

뭔가 물증이 있어야 하니 말입니다.

 

오로지 왕이 이 비천한 자의 기도를 받아서 왕이 직접 자신의 기도로 만드는 그 길 외에는 없다 말이죠.

 

이것을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구스여인으로 표현하자면

즉 여성으로 표현하자면


불임이라는 죽은태로 인해 통해서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여자가

아이를 많이 낳는 여성으로부터 공격을 받는다 말이죠.

 

그런데 이것이 다른 나라 민족에서는 그것이 아무런 흠이 되는게 아닙니다.

아이 못 낳는 여자가 죄인으로 취급받을 수 밖에 없는 거죠.

그런데 이스라엘 만큼은 다르다 말이죠.

왜냐하면 원래 이스라엘의 처음자리가 바로 죽은태였거든요.

할례 였거든요.

 

이스라엘은 육에서 육으로 낳은 자손을 형성하지 않습니다.

참 제가 말하면서도 참 말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다 육에서 육으로 자식을 낳지 그럼 어떻게?

이스라엘 만큼은 다릅니다.

오히려 육에서 육이 단절 되도록 할례를 함으로써

믿음에서 믿음으로 자손을 낳는 방식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렇게 하면 아이가 생기질 않습니다.

 

당연하지요!!!!

남녀 둘 다 영이어야 하는데

남자도 여자도 이미 육인데 영의 세계에서는 남자 여자 자체가 없는데

어떻게 아이까지?

 

그래서 그 차이를 간격을 벌리듯이 등장한 사건이 바로

이삭 사건입니다.

여러분 놀라지 마세요 저도 안믿고 즉 말도 안된다고 여기고 여러분도 불가능하다고 여기는게 당연한데

그렇게 별명이 믿음의 조상이라고 이름이 붙여진 아브라함 조차도 안 믿었습니다.

비웃었지요 그래서 웃음이라는 이삭이 된 겁니다.

즉 비언약의 속성을 담아서 언약을 이루신 주님의 방식인데

여기에 반드시 아브라함은 못 참아서 아들을 낳은게 이스마엘인데

이 이스마엘을 이스라엘로 쳐 버리자 라는 그런 꼼수가 먹혀들지 않도록 하시는 사건을 반드시 일으키시는 겁니다.

 

그런데 그 불가능한 진짜 말도 안되는 이삭을 가졌으면

이 이삭을 잘 키우도록 하시는게 아니라

아이를 제물로 바치라고 합니다.

 

참나 기가막히지요?

아버지로써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고 하면 기분 어떻겠습니까?

죽을 정도가 아닙니다.

사람을 극으로 몰아가면 다들 미쳐버립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어쩔수 없어서이지

믿음이 좋아서가 아닙니다.

어쩔수 없이 바쳤는데

다른 제물이 있어서 멈추라고 합니다.

그럼 멈출 것 같았으면 왜 바치라 하냐 말이죠?

 

시험 테스트 하는 것이 믿음입니까?

아니잖아요?

 

주님 쪽에서 강조하시는 것이 뭐냐 하면

반드시 반드시 원수 문제

즉 악인의 뿔을 제거하겠다는 겁니다.

 

하나님 본인이 이런 기도 하실 필요가 없어요.

이런 기도는 저 비천한 자가 악인의 뿔에 찔려서

저 촌구석에서 그냥 억울하게 죽으면 그만인 겁니다.

 

하나님에게는 원수도 없을뿐더러

아무도 하나님에게 덤비지 않습니다.

누가 왕에게 덤벼드냐 말이죠?

 

솔로몬 재판에서 가짜 엄마가 왕에게 덤벼든적 없어요.

오히려 참 지혜롭다고 물개박수를 치지

지가 뭔데 왕에게 덤벼들다가 바로 죽임을 당하면 우짤려고?

 

다들 힘 앞에서는 벌벌 떨거든요.

 

자 그럼 야곱의 하나님은 뭐냐?

아무도 왕에게 덤벼드는 자가 없는 가운데서 덤벼들도록 만드는 자가 야곱의 하나님입니다.

 

참 말이 어렵지요?

마귀는 하나님에게 절대 덤비지 않습니다.

 

그것을 하나님은 잘 아시기 때문에

덤벼들도록 만드시는 것이 진짜 하나님이다는 겁니다.

그 진짜 하나님이 바로 야곱의 하나님인데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말은

야곱을 가지고서 마귀를 덤벼들도록 미끼로 사용한다는 겁니다.

그래야 마귀는 악인의 뿔을 높일 것 아니겠습니까?

주님의 자작극에 말려들도록 하시는 하나님이 바로 야곱의 하나님이다는 겁니다.

물론 당연히 야곱 조차도 이 자작극에 말려들어서 뿔이 뿌셔져야 함이 당연하다 말이죠.


제발 제발 마귀야 너의 뿔을 높여라 왜 겸손한척 자꾸 뿔은 낮추고 있니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럼 마귀는 자랑할 것이 자기 뿔 밖에 없거든요.

자기의 뿔 자랑

곧 힘자랑을 누구에게 하겠습니까?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감사합니다 라고
절대로 자기 보다 강한자에게 안하죠?

반드시 지 보다 약한자

곧 하나님 빼고 모든 인간 아니겠습니까?

자랑한다 말이죠.

 

정신과 의사에게 이런 환자에 대해서 들었는데

사실상 대부분 다들 격어본 경험이 있는 내용입니다.

특히 군대에서는 그런 것이 심하잖아요.

 

약자 앞에서는 거의 사이코패스인데

강자 앞에서는 그렇게 충성스러운 부하가 아닐수 없습니다.

 

온갖 아부의 극치를 보여주면서, 충성의 순종을 다 하면서 칭찬을 독차지 하지만

 

약자 한테만 가면

그 힘을 과시할때가 없기 때문에 약자한테 뿔을 들이대는 겁니다.
군대에 가서 알게 된 거지만 병장은 꼭 며칠 안된 신병을
숟가락으로 머리를 몇시간 동안 같은 자세로 계속 때라는 겁니다.
에이 그 놈만 그렇겠지 했는데 이상하게 전염병처럼 그런 놈들이 의외로 많더라 말이죠.
 

다윗도 마찬가지이지요.

강자라서 율법의 네 배나 갚겠다고 합니다. 자기가 왕이다 이거죠.

이런 자는 절대로 가장 비천한 자의 기도를 자신의 기도로 삼을수가 없는 왕입니다.

 

강자임만을 내세우는 짖만 한다 말이죠.

 

그런데 이런 다윗을 환도뼈 뿌릇듯이 확 팍 뿌싸 버리면

졸지에 가장 비천한 자의 기도가

딱 내 기도네 라고

비로소 가장 비천한 자의 기도에 귀를 기울인다 말이죠. 왜? 자기 기도이니까!!

 

야곱도 마찬가지입니다.

악인의 뿔을 자꾸 달라고!! 힘으로 높이겠다고 우깁니다.

그 뿔 뿌쌋뿌니까

이스라엘이라는 영의 시선에서

네 은혜가 네게 족하다 라고

약할 때 강함이다고 외치는 겁니다.

 

그래서 그들이 이제 전쟁을 치를 때

할례를 하고

쩔뚝 쩔뚝 거리면서

어깨에 증거궤를 매면서 하나님을 원망하다가

3번 깨어진 십계명 두돌판 아론의 싹난 지팡이 만나를 담은 항아리

얻어 터졌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서하셨습니다 라고

전쟁을 하라고 전쟁 속으로 들어가는게 아니라

전쟁 아닌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전쟁 속에 들어가서 주의 이름을 외치더라 말이죠.

[야곱의 하나님]이 옳았습니다 라고 말이죠.

 

이것을 여성적으로 표현하자면

[구스여인의 하나님]이 옳았습니다 라고

미리암이 외치는 겁니다.

 

이것을 다시 에스더가 바톤을 이어 받아서

[죽으면 죽으리라 의 하나님]이 옳았습니다 라고 외치는 겁니다.

 

자 이렇게 되면

 

젖을 물려 본적이 없는 여인이 아들이 많고

해산한 경험이 많은 자식의 어미인 여인은 아들이 하나도 없게 되는 겁니다.

참 무서운 말이지요.
있는 자는 더 받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긴다 말이죠.

 

종말에서는 즉 종말을 시간이나 역사로 보는게 아니라

때 곧 인물로 봐 버리면

종말의 시선

그 한 남자의 시선에서는

해산한 경험이 없는 여자가 아이가 많게 되고

젖을 많이 물려본 여인은 아이가 하나도 없게 되는

종말의 시선

한 남자의 시선을

 

이 세상에 씨알도 안먹혀드는 세상에서 외치게 된다는 겁니다.

종말에서는 팔을 어긋맞게

먼저 된자 나중 되고

나중 된자 먼저 되는

 

무조건 반대를 위한 반대가 되는데

이것이 바로 야곱의 하나님이다 라는 겁니다.

 

맞아요

누가 봐도 구스여인의 하나님이 될 필요가 없어요.

그런데 기여이 하나님 본인이 구스여인의 남자가 되겠다고 하시는 겁니다.

 

격떨어진다고 말립니다. 누나 미리암이 말려요.

여기서 이러시면 안됩니다 라고

 

그럼 왜 이렇게 우리의 시선은 종말의 시선

즉 때의 시선

한 남자의 시선과 안 맞는 것입니까?

 

한 남자는 오로지 원수를 겨냥한 사고방식이다는 겁니다.

우리에게는 원수가 없어요.

원수의 뿔에

악인의 뿔에 찔려도

어디 가서 하소연을 할 수가 없어요.

악의 실체를 본 적이 없거든요.

또 몰라요? 봐도 몰라요. 봐봤자 이게 무엇인지 알길이 없어요.

 

누가 악인 인지 말입니다.

 

구스여인이라는 미끼를 통해서

야곱이라는 미끼를 통해서

악의 실체

악인의 뿔을 보여준다 할찌라도

이거 뭐 봤다고 무슨 해결점이 생기냐 말이죠?

더더욱 해결점이 없음에 오히려 실족할겁니다.

 

그 어떤 희망이 없다 말이죠.

 

우리 보다 훨씬 강한데 말입니다.

 

물론 볼수 없습니다.

 

이런 불가능 속에서

단절 속에서

 

이 악인의 뿔을 베고자 싸우시는 자가 등장한다는 자체가

그야말로 신비 그 자체 이다는 겁니다.
왜? 등장 자체가 이미 승리 이거든요.

 

이런 현실만이 진짜 현실이다는 거죠.

악과 싸우시는 자의 등장 말입니다.

종말은 그것을 기뻐하는 때 인 겁니다.

사건이 벌어진다는 그 자체가

악과 싸우고 있다는 증거 아니냐 말이죠.
섬기는 분의 등장 왕의 등장이 이미 승리요 완료입니다.

그렇다면 악이 아무리 판을 쳐도

이미 가장 비천한 자의 기도를 왕이 자신의 기도로 삼을 필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악을 제거하겠다는 자신의 구원의 뿔을 자랑하기 위해서라도 가장 비천한 자의 기도를

자신의 기도로 삼았다는 자체가

이미 넉넉히 이기고도 남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늘 영광 버리고

이것도 또 마귀에게는 더더욱 그 빈자리를 채우고자 함에 미쳐버리는 겁니다.

마귀는 결과를 알아도 그 빈자리의 유혹을 이기지 못합니다.

그것이 마귀의 역할이고요.

그러니 하늘 영광 버리고

비천한 자와 같이 되셨다는 것은

자신의 기도로 삼았다는 겁니다.

아니 기도 받으실 분이 기도하시는 겁니다.

 

성전 이야기도 했었지만

성전 되신 분이 성전에서 쫏겨나는 역설적인 사건이 벌어지는 이유가 십자가 때문이듯이

기도 받는 분이 도리어 기도하시는 겁니다.

 

아무도 이 가장 비천한 자의 기도를 듣는 자들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불의한 재판관까지 보충물로 삼아서 기도의 의미를 명료하게 밝히십니다.

 

즉 기도는 sos 경보 발령은

악의 뿔에 찔린자를 발생시킴으로써

자신의 구원의 뿔

의의 뿔을 내세우기 위함입니다.

 

이것이 힘인가? 힘 빼는 힘입니다. 곧 구원전쟁 싸움입니다.

 

죽으면 죽으리라에서 아름다움을 권력이라는 힘이 무너뜨릴수 없습니다.
오히려 권력보다 더 강한 것이 아름다움입니다. 왜? 약하기 때문에 아름답거든요.

예수님께서 죽어 마땅한 우리에게 뛰어드셔서 죽으면 죽으리라를 외침으로써

부림절 도리어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도리어 나음을 입게 되는 겁니다.

왕의 부르짖음으로써 말입니다.


마귀를 이기는

악인의 뿔을 베어버리는 유일한 기도이거든요.


이 기도를 제발 대신 기도해달라고

왕의 기도가 되게 해 달라고

우리를 악인의 뿔에 찔리도록 하신 겁니다.

안 부르짖고는 못 배기도록

애굽왕 바로를 강퍅케 하셨습니다.


그래야


야곱의 하나님이 등장하는 겁니다.

그 힘 뿌수는 주특기가 그분에게 있거든요.

야곱도 뿌수고

악인의 뿔도 베어버리고

순풍 순풍 잘 놓는 태도 닫아버리게 하고


오히려 닫혀버린 죽으면 죽으리라의 태를 오히려

아이를 많이 낳는, 바다의 모래와 같이, 하늘의 별과 같이 만드시는 겁니다.

 

(23:29, 개역) 보라 날이 이르면 사람이 말하기를 수태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하리라

 

편파해석이지요.

 

마지막으로 어머니께 이런 말로 결론을 맺었습니다.

 

예수님은 오로지 마귀만을 상대로 하십니다.
인간 상대 안하고 인간 구원에는 관심조차도 없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왜 인간이 쓸데 없이 마귀에게 말려들어서

마귀에게 내릴 심판을 인간들이 괜히 맞냐 말이죠.

 

나의 원수도 아닌 예수님의 원수요

나의 전쟁도 아닌 예수님의 전쟁인데

왜 쓸데 없이 말씀을 지킨다고 설치다가

예수님이 내리시는 마귀에 대한 심판을

악인의 뿔을 제거하는 구원의 뿔의 활동에

왜 악인과 함께 심판 받냐 말이죠.

 

이것은 섬기는 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내 기도가 아닌 예수님이 대신 기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 기도 할 생각 마시고

예수님이 제발 대신 기도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난 순 엉터리 기도일 뿐이니 말이죠.

 

그래서 전쟁을 할 때

난 광야때에 여호와를 원망했습니다 라는 소리만 외치면서 뺑뺑이 돌 뿐입니다.

힘을 달라고 하는게 아니라

힘을 도리어 빼는 기도

참 힘빠지는 기도를 하는 겁니다.

전쟁 때에 회개를 하다니

정신 나간 짖 아닙니까?

간따나 적이라서 미운데 더더욱 미운 짖을 하고 있으니

야들아 나처럼 창과 칼을 들어라

그래야 싸움 다운 싸움을 할 것 아니냐? 라고 원수들이 외칩니다.

 

너의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구원한다매? 니 하나님 도망쳤니? 라는 조롱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조롱을 더 받는 짖만 골라 하더라 말이죠.

 

전쟁을 안하고

왜 쓸데 없이 이상한 짖인 뺑뺑이를 도느냐 말이죠.
그것도 전쟁터에서 꼭 보란듯이 ~~~~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니기에

반대를 위한 반대를 보란 듯이 하는 겁니다.

 

어머니!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아이고 욕봤데이 수고했다 라고 기쁘게 반겨주십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손에 수갑이 차였다고 손을 듭니다.

함께 딸려온 손은 마귀의 손입니다.

마귀는 경찰복을 입었고, 베드로는 죄수복을 입었거든요.
마귀는 자신이 베드로 라는 수제자 월척을 잡았다는 것에서 아주 자신만만했는데


어라 예수님은 베드로 곧 예수님을 세 번 배신때린 베드로를 잡아온 마귀를 칭찬하는게 아니라

베드로를 칭찬 합니다.

베드로야 너가 마귀를 잡아왔구나

베드로도 놀랬고 마귀도 놀랍니다.
베드로가 잡혀왔다니깐요

마귀는 베드로를 잡은 수갑찬 손을 번쩍 듭니다.
마귀는 자기자랑인데??? 자기 뿔을 들수 밖에 없습니다. 


아니 마귀가 베드로를 잡아서 끌고 왔는데

해석이 다른 겁니다. 전혀 다른 해석을 해 버리십니다.


마귀도 베드로도 범인은 베드로이고 베드로 본인도 자기자신이 범인이어서 체포당해서

수갑을 찼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귀를 잡아왔다고 칭찬합니다.
다른 말로 너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갑자기 사랑타령하시는 겁니다.
 

이것이 힘이 아닌 힘을 빼는 힘인 구원의 뿔이 벌린 자작극
곧 악인의 뿔을 베는 방식입니다
.

 

비천한 자의 기도를 자신의 기도로 삼은 왕의 기도이기에

나타나는 사건인 겁니다.

얼마나 또렷하고 명료한 밝히보이는 십자가의 용서입니까?

베드로는 말로만 듣던 그 솔로몬 왕의 지혜 재판을
십자가의 지혜를 통해 비로소 누리게 됩니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예수 안에는 결코 정죄함이 없음을 말이죠.

두 동강나야할 아기처럼 베드로는 악인의 뿔에 의해 쪼개져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너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는 물음으로
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더 잘 아시지 않습니까? 라는
전쟁 속에서. 죽음 속에서 나오는 이 말도 안되는 부르짖음이
바로 예수님이 대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 때문이였다는
구원의 뿔을 높이 드심이다는 겁니다.

이 구원의 뿔을 노래하는 겁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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