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꾼 야곱의 하나님이여! (시편 76)

죄인의 하나님이여!, 막사는 자의 하나님이여!


(
4:1, 개역)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된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4:2, 개역)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4:3, 개역)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

(4:4, 개역)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4:5, 개역)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4:6, 개역)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 바

(4:7, 개역)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4:8, 개역)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76:1, 개역) [아삽의 시, 영장으로 현악에 맞춘 노래] 하나님이 유다에 알린바 되셨으며 그 이름은 이스라엘에 크시도다

(76:2, 개역) 그 장막이 또한 살렘에 있음이여 그 처소는 시온에 있도다

(76:3, 개역) 거기서 저가 화살과 방패와 칼과 전쟁을 깨치시도다(셀라)

(76:4, 개역) 주는 영화로우시며 약탈한 산에서 존귀하시도다

(76:5, 개역) 마음이 강한 자는 탈취를 당하여 자기 잠을 자고 장사는 자기 손을 놀리지 못하도다

(76:6, 개역) 야곱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꾸짖으시매 병거와 말이 다 깊은 잠이 들었나이다

 

 

주님 혼자 구원전쟁을 벌리는데 있어서 사실상 인간은

곧 이스라엘은 하등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즉 아무것도 한 것이 없었다 라는 겁니다.
아무것도 한 것이 없었다면 참 다행이지요. 오히려 원망만 했습니다.

그저 각기 제길로 가는 양 같은 모습만 오히려 더 노골적으로 드러납니다.

마치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다 이루실때에

우리는 다 양같아서 각기 제 길로 가는 양과 같은 모습인 것처럼 말입니다.

그것도 왜 그러냐하면 믿음 때문입니다.

믿음은 예수님 혼자 다 이루심에 인간은 하등 도움이 되지 않았다 라는 의미가 믿음이다는 겁니다.

즉 죄인임이 명료하게 드러났다는 겁니다.
믿음에 의해서 말이죠.

만약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망쳤음에도 불구하고 의인이다고 주장한다면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어디서 꾀냐 가 되는 거죠.

 

그런데 교회를 다녀봐도

수많은 기독교인을 만나봐도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자꾸 자기 의인됨만을 주장하는자들 뿐이지

죄인임을 고백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여태껏 봐도 말이죠.

다들 서로가 서로를 비교해서 똑똑하다는 둥

유식하고 재산이 있고

남들과의 사교성도 있고 등등

그런 하잘 것 없는 배설물들은 참 잘 자랑해요


특히 저와 잘 비교하는데는 너무 너무 자신만만들하는데

십자가를 자랑하는데 있어서는 자꾸 한발을 빼는 겁니다.

물론 자랑 안하면 들통나니까 하긴 해요

하긴 하는데 뭔가 수상한 발걸음처럼

도망칠 구멍을 만들어 놓고서

언젠가 들통나게 되면 언제든지 빠져나갈 구멍들을 만들어놓고 하더라 말이죠.


그것이 들통나기 전까지는 무슨 자랑하느냐

한마디로 지난 시간에 말한 것처럼

교회자랑에 빠진 겁니다.


교회 이꼬르 자신의 믿음을 교회에 투자한 기관이거든요
.
한마디로 돈을 많이 때려부었다 인 거지요. 돈 아니면 열정 등등,

이렇게 강도의 소굴을 만든 것을 무지 무지 자랑해요

의문의 죽이는 것들을 만들어 놓고서는 그거 자랑하다가

십자가에 들통나면 언제든지 도망칠 준비를 하더라 말이죠.

들통나기 전까지는 마음껏 자기자랑에 미쳐 있더라 말이죠.
이것이 인간이 선택한 예수이다는 겁니다. 예수란 그저 자신의 선택 대상물인거죠.
선택이란 언제든지 버릴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 자랑을 같은 말 같은 멘트를 1년 내내 해도

제재하는 사람은커녕 오히려 그 영웅담에 빠져서

1년 내내 해요

그것을 깨뜨리는 놈을 본 적이 없어요.

 

오히려 다 동조를 하더라 말이죠.

 

교회가 강도의 소굴

그런 의문의 것을 자랑하는데 있어서

사람의 교회가 되더라 말이죠.

그게 또 부럽다고 1년 내내 같은 말만 하는데도 불구하고

지겨워 하지도 않아요.

무슨 마약먹은 집단 같아 ~~~~~~~~~

 

 

시편 76편이 이상해요

 

(76:6, 개역) 야곱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꾸짖으시매 병거와 말이 다 깊은 잠이 들었나이다

 

출애굽사건을 다시 일으켜 달래요 글쎄

 

지난 75편에 야곱의 하나님을 구스여인의 하나님

즉 죄인의 하나님이라고 표현했는데

좀 쉽게 말이죠

오늘은 조금더 구체적으로 야곱의 하나님에 대해서 언급하겠는데

시편89편처럼

다윗과 영원한 약속을 하겠다는데

정작 다윗은 죽은지가 이미 100년 ? 이상 넘었다 말이죠.

죽은 다윗과 영원한 약속을 해서 뭐합니까?
약속을 한 당사자 다윗이 살아있을 동안에 약속이 이루어져야 하잖아요
죽은 다음에 이루어져본들 무슨 소용있냐 말이죠.

아! 다윗의 직계자손이 남아 있으니까


그럼 좀 안정적일 때 하면 얼마나 좋아요


바로 망하기 직전에 하나 마나 한 약속을 그것도 영원한 약속이다고 하고 있으니

이게 이해가 되라고 하는 약속이겠습니까

우리가 오해를 하는 것이 다윗언약, 야곱의 하나님, 아브라함언약
이라는 표현이라 해서 그 당사자와 언약을 한게 아니라
인간은 오히려 누락되고요
약속이 약속과 언약을 하는
약속 자기자신과 약속하는 겁니다.
그들 인간이 살아있을 적에 약속이 이루어지는 법도 없을 뿐더러
그들이 오히려 다 죽고 사라져버려야 한다는 겁니다.
인간과 약속한 게 아니니까 말입니다.

선지자가 망한다 망한다 그렇게 잔소리를 해서 백성들이 듣기 싫었는데

마침 망하니까 너거들 이제 구원받았구나 라고 덩실 덩실 춤을 추면서

포로당해 가는 길에 표시해놓아라 돌아오게 될 테니 라고 하니

그 소리는 잔소리 때 보다 더 듣기 싫고 더 꼴보기 싫다 말이죠 핵노잼
돌아온다고 해도 듣기 싫죠.
구원 받았다고 해도 듣기 싫어하는 겁니다.
내가 원했던 구원이 아니다 쪽팔리는 구원이라서 싫다는 거죠.


그러나 예레미야 선지자는 완전 기뽀

핵 기쁨

오늘 로마서 4장처럼

핵 행복
완전 대박 ~~~~

 

망했는데 그게 구원이래?????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데 구원이래~~~~~

 

출애굽 전쟁을 지금 벌리시는데 있어서

야곱의 하나님

곧 야곱이 죽은지가 언젠데

대충, 800?

검색을 해야 좀더 가깝겠죠.

B.C.2006-1859

검색해 보니 대략 2000

아삽을 기준으로 해 보면

다윗과 동시대 이니까

다윗의 통치 기간이

기원전 1077- 기원전 1037

이렇게 검색되는 것 보니

아삽을 기준으로 하면 대충 800년으로 보면 된다 말이죠.

야곱이 죽은지가 언제냐 말이죠. 팔백년이다 말이죠.

그리고 야곱과 출애굽전쟁과 이것도 시차가 큽니다.

야곱이 죽은지 오래된 후에 출애굽이니까(요셉을 모르는 새로운 왕들이 등장해야 하니까)

결국 시간적으로 따진다면 다 안맞는 소리이다 말이죠.

출애굽 할려면 모세의 하나님이라고 해야지

왜 야곱의 하나님이냐 말이죠.

 

그리고 지금 왜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출애굽 전쟁을 왜 운운하냐 말이죠.

 

이것은 그때 모세때 출애굽전쟁때도 그랬지만

주님 혼자 싸움입니다.

그리고 표현도 주님 혼자 내세우는 표현인 겁니다.

인간은 시공간이 맞아야 인식을 하지만 그런 인식과 전혀 안맞습니다.

 

결국 이름 전쟁 때문에 출애굽을 다시 운운하고 야곱의 하나님이여 라고 부르짖는 겁니다.

 

자주 언급했지만

주님 쪽에서 먼저 시비를 거시는데

즉 전쟁을 먼저 일으키는 방식인데

그것이 바로 이름으로 시비를 거시는 겁니다.

그 이름이 뭔데?

 

여호와께 제사를 드려야 하니까

백성을 내어놓아라 라고 모세가 애굽왕에게 전쟁선언 합니다.

 

애굽왕은 당연히 야 반칙좀 하지 마라

정정당당하게

전쟁을 해서 싸워 이겨서 그 노략물로써 노예를 잡아오고 빼앗든지 해야지

전쟁도 하지도 않고 노예를 주는 법이 어디있느냐?

이것이 인간의 전쟁이든 신들의 전쟁이든 이 방식 뿐입니다. 그런 법칙을 왜 어겨서 반칙하냐 말이죠.

애굽은 모든 나라 모든 민족 모든 신들의 법칙인 전쟁을 해서

이겨서 그 승리의 전리품은 노예를 당당히 취했는데

넌 무슨놈의 반칙도 이런 반칙이 어디있느냐 라는 식으로

그런 법도 모르는 신이 누구인데?

 

라고 악마들의 입을 통해서 여호와가 누구인지를 이름 문제가 나오게 합니다.

 

그제서야 내가 누구인지 모르니? 아 참 넌 모르지. 내가 누구인지 알려줄게 기다려봐~~~~ (우비소녀)

 

바로 이것이 실로암 소경이 자기를 고친자를 누구인지 이름을 몰랐는데

바리새인이 마침 누구인지를 알려주는 방식과 같은 겁니다.
저절로 전쟁이 육의 전쟁이 아닌 영의 전쟁 다른 말로 "이름 전쟁"이 성사가 됩니다.
하여튼 마귀가 없으면 일이 안되요.

 

결국 이름 전쟁은 저쪽이 모른다는 입장에서 응 그래 알려주마 걱정하지마 곧 알려줄게 하는 방식으로써 이름전쟁이 벌어지는 겁니다.

 

하나님이란 이름이 아닙니다.

아버지도 이름이 아니지요.

여호와도 결국 이름이 아닙니다. 이름에 가차운 가까이 접근한 일종의 별명입니다.

전쟁 하나는 끝내주게 잘하는 신이라는 뜻이지 이름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름이 생기면 골치아픕니다.

왜냐하면 그 이름을 붙여준 자가 또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저쪽이 그 이름의 기능을 알려주는 보충물 역할을 하는 겁니다.


그래서 사실상 이름이 없어요
.

스스로 있는 분인데

이름이 생기면 피조물이 되는데?

그래서 이름을 어떻게 하는고 하니

누구 누구의 아빠 라고

야곱과 약속한 아빠 라고 보시면 됩니다.

 

자 그럼 또 예상치 못한 문제점이 하나 있는데

야곱의 아빠 라고 남들이 보는 시선이 있는 반면에

저 하나님은 누구의 하나님이지? 누구의 신이지

야곱의 신이래 라고

그 열매로 그 나무를 알게 되는 방식인데

 

야곱 자기자신은 이 하나님을 어떻게 보느냐 하는 점입니다.

이게 보기 보다 좀 어려운데

야곱은 자기가 원하는 아버지 곧 하나님의 이미지가 있잖아요.

그것을 야곱이 원하는대로의 하나님이겠습니까?

아니면 그거 완전 지근 지근 밟아버리는 하나님이겠습니까?

당연히 지근지근이지요.

그럼 야곱의 하나님이란 이중성이 있습니다.

물론 다른 사람들도 동일합니다.

다윗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다 그렇습니다.

어떤 이중성인고 하니

외부인들이 보기에는

사건을 통해서 야 저 하나님은 야곱의 하나님이잖아 라고 부를수 있는데

정작 내부에서는 야곱 자기자신은 이 하나님을 어떻게 부르느냐?

야곱 자신이 부르는 야곱의 하나님이겠습니까?

아니면 야곱을 깨뜨리는 야곱의 하나님으로써 전혀 낯선
베드로를 물에 빠뜨려 다시 죽음속에서 예수님을 보게 되니 도대체 내가 알던 예수님이 아니다 말이죠
.
주여 도대체 당신 누구세요?

이럴 때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는 겁니다.

아 가장 적절한 예가 생각났는데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마라 나를 마라라 하라 전능자 께서 나를 괴롭게 했다 라고
남편 하나님만 따랐는데 그 하나님이 가짜였다는 거죠.
나오미 자기가 직접만난 하나님은 나의 이름을 갈아치우는 하나님이다 말이죠.


즉 야곱 정작 야곱본인이 부르는 하나님은 이 야곱을 깨뜨리는 야곱 속의 야곱의 하나님, 이중분절로써의 하나님을 몰랐죠.

환도뼈가 뿌라져야! 물속에 잠겨 죽어야 예수님이 자기가 알던 그 예수님이 아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겁니다.
엘리야가 850 대 1로 싸워 이겼을때는 여호와가 누구인지를 엘리야 본인도 모릅니다.
나만 남았나이다 라고 나 죽게 되었는데 이러기요 라고 따졌을때에 7천명 남은자 때문에
아이고 잘못했습니다. 아까 한 말 취소 취소 라고 낯선하나님을 만나야 하듯이 말입니다.

이것을 줄여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다 말이죠.

자 이렇게 되면 개인개념은 전혀 없습니다.

나만 남았나이다 하나님은 없습니다. 7천명 남겨둔 하나님 뿐이다 말이죠.
개인 구원도 없는 셈입니다
.
개인 신앙 필요없습니다. 개인의 믿음 필요없어요.

개인 야곱이 아니다 말이죠.

오로지 이름만이 있을 뿐입니다.

 

이스라엘은 군사입니다.
어제 김용옥 강의에서 군사와 무사의 차이는 무기에 달렸다고 했는데
하나는 개인 무기이고 다른하나는 자기 무기가 아니다는 거죠.
자기 무기가 아닌 것이 군사 곧 조직의 무기이지 자기 무기가 아니다는 겁니다.

소속기관의 무기이다는 거죠.
이스라엘의 무기는 이름 입니다. 무기 아닌 무기
무기 없는 무기
무기를 포기하는 무기

개인의 무기란 없어요. 도리어 이름에 소속되었다는 겁니다.
결국 전쟁의 신 여호와께서 자신의 무기를 야곱으로 삼았다는 겁니다.
또 야곱은 자신의 무기를 아무것도 아닌 그저 이름뿐이지 존재가 아닌
하나님이 아닌, 하나님의 이름으로 싸운다는 겁니다. 무기로 말이죠.

이스라엘의 하나님

신과 더불어 싸워 이기는 자의 하나님이다 말이죠.

야곱 개인이 백날 설쳐 보세요 신과 이길수 있나?

 

즉 이름은 이런 역할을 하는 겁니다.

아무것도 없어요.

이름입니다.

이름은 존재가 아닙니다.


존재도 아닌데 뭔가 흔적을 남기고 간 그대 이름은 바람 바람 바람

왔다가 사라지는 바람
날 허리 뿌라놓고 가는 바람 ~~

존재가 아니다 말이죠.
가장 쉽게 이해되도록 마침 김범룡의 바람 바람 바람이 정말 딱 맞네요.


그런데 그 야곱의 하나님이 출애굽 사건을 재현할 때

외부나라가 아닌 이스라엘 내부에서 그 사건 그 흔적을 남겨버리면

졸지에 이스라엘 내부에서 전쟁이 벌어지는데

창칼이 아닌

역시나 이름 전쟁이 벌어지는 겁니다.

 

한 쪽은 하나님 이라는 존재를 따지는 99마리 이스라엘민족 즉 애굽이지요.

다른 한 쪽은 하나님이 아닌 하나님의 이름을 따지는 비존재를 따지는 잃어버린 한마리 이스라엘

 

위는 99마리 양이고

아래는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이고

 

이 싸움을 이스라엘 내부에서 선지자들이 벌리는데

임마누엘이라고 합니다.


니 하나님과 내 하나님이 다르다

하나님은 너희와 함께하지 않고

우리와 함께 하는 하나님이다 라고


하나님이 졸지에 두 개로 나누어지는 분절

이중분할이 되는 겁니다.

역시나 출애굽 사건이 발생한다는 거죠.


한 쪽 거짓선지자 쪽은 하나님이라는 존재

다른 한 쪽 참선지자는 하나님 존재가 아닌 비존재인 하나님 이름 곧 임마누엘

이 이름전쟁을 벌리는 겁니다.

 

자 그렇게 되면 한 쪽은 애굽왕처럼 여호와가 누구관데? 라고 그 이름에 시비를 거는 쪽의 역할을 감당하게 되는 거죠.

 

응 기다려봐 내가 누구인지 알려줄게 라고 이름 임마누엘이라는 듣보잡 듣도 보도 못한 생소한 이름을 걸고 전쟁을 거는 겁니다.

 

즉 쉽게 말해서 실로암 소경은 임마누엘에 의해 움직이는 장기알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이고

바리새인은 임마누엘이 누구관데? 어디서 까부냐? 난 모세 제자인데. 넌 누구 제자냐? 라고

너 임마누엘 제자이지 임마!! 난 모세제자야 짜샤!! 임마누엘을 오히려 알려주는 보충물 역할을 하게 되는 겁니다.

 

이 바리새인을 강퍅케 해서 여호와 하나님이 애굽왕과 애굽군사를 통해서 영광받으시듯이

실로암 소경에게 너 예수 제자냐? 라고 몰랐던 이름을 실로암 소경이 비로소 알게 되는

이 이름전쟁의 의미를 바리새인이 도리어 알려주는 보충물 역할을 톡톡히 해주는 겁니다.

 

그것을 아직 임마누엘 나오지 전까지인
이사야 서에서 나오는 임마누엘을 미리 말해 버렸는데

지금 시편에서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야곱의 하나님이여 라고 그 푯대(방향)를 이스라엘 내부를 향해서 외친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역시나 이중으로 분절 분할이 되는 거겠지요.

 

(2:34, 개역) 시므온이 저희에게 축복하고 그 모친 마리아에게 일러 가로되 보라 이 아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의 패하고 흥함을 위하여 비방을 받는 표적되기 위하여 세움을 입었고

 

이스라엘의 흥함과 패함의 기준이 되는 비방받는 표적이 된다고 했습니다.

 

임마누엘! 아이고 미리 이 이름을 언급해 버린 셈인데

그냥 이해하기 쉽게 미리 언급하죠 뭐

이스라엘을 두 조각 내는 기준이 임마누엘 이듯이, 구약에서 말이죠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이름이 표적, 화살표, 끄트머리가

애굽이 아닌 이스라엘 내부로 향해

내부전쟁이 벌어지는 식으로 구원전쟁 출애굽전쟁을 벌린다는 겁니다.

이 이름에 의해

이 야곱의 하나님 이라는 이름을 통해서 두 패로 갈라진다는 겁니다.

하나는 야곱, 또 하나는 형 에서로 말이죠.

하나는 다윗, 또 하나는 사울로 말이죠.


이 두 패거리로

하나는 이유없이 미움받는 쪽, 형 에서

하나는 이유없이 편애받는 쪽 사기꾼 야곱 으로 갈라지는 겁니다.

 

그래서 다윗은 가만히 보니

아브라함이 어떻게 용서를 받았지?

가만히 보니 자기가 그것을 격어보니까 즉 당해보니까

비로소 왜 믿음의 조상이 되었는지를 알게 되었고

결국 자기이야기였던 겁니다. 같은 운명이였다는 거죠.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용서 받은자의 행복에 대해서

아브라함을 언급한 겁니다.

이것을 다시 사도바울이 언급하는 이유는

자기 이야기 이니까 말이죠.
그래서 다윗을 언급합니다.
나도 나도 야곱의 하나님에게 당했어 뿌사졌어 라고 말이죠.

 

이삭의 희생덕분이고

우리야의 희생덕분이고

스데반집사의 희생덕분이니
이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어디서 굴러온 뼉다귀냐 말이죠.
다 의문덩어리 모호하고 미흡한 것들이 감히 어디서 꾀냐 말이죠.

이것이 믿음되신 예수님의 자작극으로써 믿음이다는 겁니다.

인간의 믿음이 아니다 말이죠.

 

그래서 어머니에게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사기꾼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말은

상대적으로 저쪽은 어떤 하나님? 정직한 하나님을 갖추었다고 정답을 외치시더라 말이죠.

 

요쪽을 죄인의 하나님 이라고 한다면 저쪽은 의인의 하나님을 갖추는 겁니다.
결국 상대적인 의미 입니다.

요쪽이 막사는 자의 하나님이라고 한다면 저쪽은 반드시 절대로 막살지 않는 자의 하나님이되는 겁니다.

 

요쪽이 탕자의 하나님이라고 한다면 저쪽은 맏아들의 하나님이 되는 겁니다.

 

한쪽은 아무것도 아닌,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 오로지 "이름"이 만들어내는 부정한 쪽이고

저쪽은 인간들이 믿숩니다 라고 만들어내는 하나님이다는 거죠. 그러니 거룩으로 포장해야지요.
누가 더 의롭겠습니까? 
당연히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쪽이지요.
그러나 존재가 아닌 이름이 만들어낸 믿음은 부정한 자에게 부어지는 긍휼인 겁니다. 십자가 용서인 겁니다.

 

이 두 하나님의 전쟁인
임마누엘 전쟁으로써

이스라엘 내부에서 벌어지는 구원전쟁이 되는 겁니다.

 

한 쪽은 부정해요!

다윗이 그 부정함을 수용하겠습니까?

절대 안하죠
왕인데 왕이면 더더욱 체면치레를 해야 하는데,
늘 수시로 이 왕의 자리를 노리는 놈들에게 빌미를 주면 안되잖아요?

그래서 율법으로 네 배가 갚으라 라는 판결은 그렇게 판결을 내리는 나는 깨끗한 놈이다 라는
자기존재로 귀결되는 언어요 하나님이요 그것으로 포장 즉 도배를 하는 겁니다.
존재 대 존재인 겁니다.


인간은 절대로 부정해질려고 하지 않습니다
.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부정해 질수가 없습니다
.


그런데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은 반드시 성도를 부정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
어떻게? 다윗을 죄인 중의 괴수로 만들어 버립니다.
세 번 부인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그래야 마귀한테 잡혀 올것 아니겠습니까?
이름을 훼방하는 자를 끌어들일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야 구원전쟁이 성사가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름을 높이기 위함이지

인간의 부정하지 않음을 높이기 위함이 아니다 말이죠.

그래서 그 이름이, 자기 이름에 걸맞는 자를 찾습니다.

아흔아홉마리 일부러 내버려두고

일부러 의도적으로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는 겁니다.


그래야 이름 곧 선한목자에 걸맞기 때문입니다
.

선한 분은 단 한 분 뿐이거든요.

의사에게 걸맞는 것은 환자이지

건강한 자가 아니다 말이죠.
의사의 기능은 건강한 자에게는 쓸모가 없거든요.

이것은 어디까지나 구원전쟁이고

하나님의 아이디어이지

인간의 욕망을 채워주는 구원이 아니기에

구원자는 의인을 부르러 온게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온 겁니다.


이것이 이름이라는 기능에 맞거든요.
존재보다 앞선 것이 기능이기에 사실상 존재란 없어요.
자아란 없다 말이죠.
존재로써 생산하는 것들은 다 배설물 똥덩어리 입니다. 뭘 해도 다 죄입니다.
존재란 없어요.
기능 뿐입니다.

 

여기에 상대적으로 이름에 접붙임 당할수 없는 자는

상대적인 의미로 무장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빈공백을 매울길은 그것 밖에 없거든요. 존재이거든요
존재는 어쩔수 없이 갖추어야 할 조건들이 무지 무지 많습니다.
믿음도 갖추어야지요. 율법 곧 말씀도 갖추어야지요. 한 두개가 아닌 조건들을 갖추어야만 합니다.

그래서 의인은 즉 죄인의 상대적인 의미인 의인은 자기 의를 그 빈공백에 채웁니다.
마치 다윗왕이 왕 다움을 갖추어야만 하듯이 말입니다.
의인이 못 될까봐 그들은 미쳐버립니다. 미친듯이 의인이 되기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얼마나 뿌듯하겠습니까?

그래서 부자청년은 뭐 또 부족한 것 있으면 말씀만 하소서 제가 얼른 채우겠습니다.


어딜 감히 이름을 모독해 그럼 전재산을 가난한자에게 나누어줘봐
~~~~~~

머리 띵 해지는 거지요~~~~~~~
자기 존재를 높일려다가 딱 걸려든 거죠.
하나님을 존재로 상대할려다가 존재로 귀결되는 자아에게 멘탈붕괴를 당하는 겁니다.
누워서 침뱉은 겁니다.

 

막사는 자의 상대적인 의미인 절대로 막살지 않은 삶을 빈공백이라는 틈새에 곧 흠집에 채워넣습니다.
막사는 자는 그 기능 자체가 빈틈 그 자체입니다.
그러나 막살지 않는 자는 틈이 없어요.

아버지 말씀을 단 한번도 어긴적이 없다는 것에 졸지에 예수님이 시비를 거시는 겁니다.

왜 저는 살진소도 한번 안잡아줍니까? 전 빈틈이 없었잖아요!!!!!

왜 저 막살기만 한 저 탕자를 왜 용서하십니까? 라고 용서에 대한 강한 거부를 표출하게 되는 거지요.

번제와 제사를 원치 않고, 인애와 자비를 원하시는 이유 입니다.

 

결국 맏아들은 이름이라는 아무것도 아닌 것에 목숨을 건 것이 아니라

존재에 목숨을 걸었던 겁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아닌 하나님이라는 존재
그것이 곧 자기라는 존재인 겁니다.

그런데 웃끼게도

하나님이라는 존재에 목숨건자는 결국 자기투사인 자기를 위해 목숨 건 겁니다.

이슬람 과격단체의 신학생들의 순교정신이 자살폭탄을 해서라도 순교하겠다고 하는 것이

바로 그런식이다 말이죠. 순교는 무슨 놈의 순교!!! 
그것은 자기욕심을 현실에서 못이루니까
왜냐하면 계급적으로 따질때에 위에서 시키거든요
.
그 위의 놈의 자리를 못 차지하니까 대신 가족들 볼모로 배불리먹여준다는 말에 속아서 하는 거죠.
같은 욕심에 놀아나는 겁니다.
그 높은 자리를 앉고싶은데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흙수저이니까 어쩔수 없이 가장 짧은기간에 가장 큰 효과를 누릴려고 한다 말이죠.
그러나 그들 입장에서는 최고의 모습 아닙니까? 바리새인도 마찬가지 입니다. 그래서 다들 의심하지 않고 존경하잖아요.
예수님만 빼고 ~~~

이것이 이슬람의 문제냐? 이슬람 흙수저의 문제냐?

지금 아삽의 시에서 이스라엘 내부에서 이런 우상이 99.9999999... % 퍼졌고

지금 현재 한국 기독교가 이 짖을 해요

흙수저의 열정페이로 청년들을 속이는 짖을 해요

노골적으로는 신천지가 무기력에 빠진 청년들에게 활기를 넣어주면서 먹혀들다 보니

같은 강도의 소굴들을 차지하던 놈들이 자기 밥그릇 빼앗길까봐 부랴 부랴 긴장해서

함께 대책을 마련하자 라고

 

결국 존재를 따진다는 것은 의문의 죽이는 것을 계속 잇고 잇겠다는 겁니다.
서로가 서로를 속이면서 서로에게 속아 넘어가는 겁니다.
의문의 죽이는 것에 빠져서 말입니다.

 

이름으로는 못 잇죠.

이름은 존재를 다 깨드리는데
무슨 수로 잇겠습니까? 이름 자체가 단절인데 ~~~~

이름에 의해 깨어진 자가 바로 야곱인데

없는 야곱을 다시 운운하고
죽은지 언젠데 다윗과 언약을 영원히 세우겠다 라고
주의 이름 혼자 난리법석이지
인간은 반응할수가 없어요. 야곱은 다윗은 다 죽고 없고
그 자손들도 시쿤둥하지 

없는 사람 왜 운운하지? 모르는 겁니다.
내 이름을 운운해도 움직일까 말까 한데
죽은사람 이름 운운한다고 이스라엘이 움직이겠습니까? 안움직입니다.

 

그런 이름을 언급하면서 야곱의 하나님이여 출애굽사건을 그때 그 사건으로 끝내는게 아니라

시간도 역사도 공간도 아닌 심지어 존재도 아닌
이름 혼자. 이름 자기 혼자 이런 말도 안되는 일을 벌리시는 겁니다.

지금 이 때 묵시로써 모든 공간 모든 시간을 찢듯이 심지어 존재도 찢듯이 깨뜨리면서

종말로써 곧 인물로써

한 인물로써 구원자의 전쟁을 벌리소서 라고

전쟁요청을 하는 겁니다.

마리아의 기도

한나의 기도가

전쟁요청아닙니까?
악인의 뿔을 해결해 달라는 겁니다.
찔려본 자가 답답해서 하지
안찔린놈이 이런 기도하겠냐 말이죠.

마치 노아홍수처럼

지금 이 이스라엘을 노아홍수를 때려붓듯이
확 쓸어 버려라 말이죠.

불들을 때려부어달라고 하는 겁니다.
모조리 다 불태워 버리소서 라고 합니다. 진노를 때려부어라 말이죠.

 

그 진노 속에서

그 불에서 가려진다는 겁니다.

 

불에서 녹는 자는 쓸데없는 배설물로 치장하고 자랑했음이 불에 녹아 다 없어지고

불에서 살아남은 자는 주님의 용서로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그 이름이 불쌓이 여겨서

애굽에서 지옥에서 빠져나오록 건지셨다는 그 이름의 기능에 부합되었던 자였다는 겁니다.

즉 죄인이였다는 겁니다.

 

[사기꾼 야곱의 하나님]이다는 말은 반대로 저쪽은 이름이 아닌 존재에 달라붙습니다.

[정직한 야곱의 하나님]을 믿는 자들 말이죠.

 

기능이 아니라 존재에 달라붙거든요.

자기존재를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이름(기능)을 도저히 믿을수 없도록 되어 있습니다.

반면에 기능은 존재를 깨뜨리기 때문에 사라진 존재에서 아무것도 나오는 것이 없거든요. 철저하게 무능합니다.

심지어 믿음도 말입니다. 믿음은 주님이지 자기존재에서 나오는 것은 믿음도 아니니까

그래서 믿음의 조상이라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다윗은 자기존재가 사라지는 깨어짐을 당함으로써 행복을 보게 된 겁니다.
죄인인데 분명 죄인으로 들통나게 되었는데 말도 안되게 용서가 덮쳐져버려서
그 용서만을 노래하는 자의 조상이 되었다고
.
얼마나 행복하냐고

용서라는 기능이 덮쳐져버렸기에


대박


당신의 나라에 저를 기억하소서 오냐 오늘밤 너와 내가 낙원에 있으리라

라는 존재에서 나올수 없는 대화와 문장과 언어들이 막 나와요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더 잘 아십니다 라고 말이죠.

존재의 언어를 초월했어요

선악을 초월했어요. 법을, 넘어서는 겁니다.

철저한 십자가 피를 말하기 위한 언어로만 나열될 뿐이다 말이죠.

 

그러나 저들은 저들 말마따나데 그 정직이 그들 소원대로 진짜 정직한 영이면 참 좋겠는데

늘 모호하고 흐릿하고 의문의 죽이는 정직이기에

그 강도의 소굴을 계속 주장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하나님의 집을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 자들과의 전쟁은

내가 아닌 주님의 이름이 직접 하셔서 그 속에서 끄집어 내시는

건져내시는 구원전쟁입니다. 출애굽전쟁 곧 십자가전쟁입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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