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를 기쁘게 하지 않는 그리스도의 소망 (시편 79)

 

 

(79:4, 개역) 우리는 우리 이웃에게 비방거리가 되며 우리를 에운 자에게 조소와 조롱거리가 되었나이다

(15:3, 새번역) 그리스도께서도 자기에게 좋을 대로만 하지 않으셨습니다. 성경에 기록하기를 "주님을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떨어졌다" 한 것과 같습니다. / 69:9

 

 

(15:1, 개역)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15:2, 개역)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

(15:3, 개역)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 기록된 바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15:4, 개역)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안위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

(15:5, 개역) 이제 인내와 안위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15:6, 개역)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

(15:7, 개역) 이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

(15:8, 개역) 내가 말하노니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위하여 할례의 수종자가 되셨으니 이는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들을 견고케 하시고

(15:9, 개역) 이방인으로 그 긍휼하심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심이라 기록된 바 이러므로 내가 열방 중에서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로다 함과 같으니라

(15:10, 개역) 또 가로되 열방들아 주의 백성과 함께 즐거워하라 하였으며

(15:11, 개역) 또 모든 열방들아 주를 찬양하며 모든 백성들아 저를 찬송하라 하였으며

(15:12, 개역) 또 이사야가 가로되 이새의 뿌리 곧 열방을 다스리기 위하여 일어나시는 이가 있으리니 열방이 그에게 소망을 두리라 하였느니라

(15:13, 개역)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15:3, 새번역) 그리스도께서도 자기에게 좋을 대로만 하지 않으셨습니다. 성경에 기록하기를 "주님을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떨어졌다" 한 것과 같습니다. / 69:9

(15:9, 새번역) 이방 사람들도 긍휼히 여기심을 받아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시려고 한 것입니다. 기록된 바 "그러므로 내가 이방 사람들 가운데서 주님께 찬양을 드리며, 주님의 이름을 찬미합니다" 한 것과 같습니다. / 삼하 22:50; 18:49

(15:10, 새번역) "이방 사람들아, 주님의 백성과 함께 즐거워하여라" 하였으며, / 32:43

(15:11, 새번역) "모든 이방 사람들은 주님을 찬양하여라. 모든 백성들아, 주님을 찬양하여라" 하였습니다. / 117:1

(15:12, 새번역) 그리고 이사야가 말하기를 "이새의 뿌리에서 싹이 나서 이방 사람을 다스릴 이가 일어날 것이니, 이방 사람은 그에게 소망을 둘 것이다" 하였습니다. / 11:10(칠십인역)

 

 

소망이라는 것은 그 어떤 것도 기대할 것이 없을때에 돋아나는 겁니다.

결국 조금이라도 이 땅에서 위로받고 기댈수 있는 연결고리가 있다면

소망을 가질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지난 시간 시편 78편에서는 사도행전 7장의 스데반집사의 설교를 통해서 살펴보았고

오늘 시편 79편은 그 스데반 집사를 죽였던 사도바울이 바톤을 이어받아서

로마서 15장을 통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자 다시 소망에 대해서 언급해 보면

누가 봐도 좀 더 나은 상황으로 나아가는 것을 바라는 것이 소망입니다.

즉 안 좋은 상황에서 더 좋은 상황으로 나아가는 것 말입니다.

 

그런데 로마서 15장이나

시편 79편이나

소망이 다른 상황에서 펼쳐집니다.

더 좋은 상황으로 나아가는 것을 소위 앞으로 더 전진해가는 상황이라고 치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소망인데

그런데 성경은 정반대로 거꾸로 뒤로 가는 상황을 소망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것이 믿어질까요?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 됩니다.

파괴되니까? 이방인들이 놀려먹습니다.

아이고 너거 하나님 뭐하노?

어디 갔나? 있기는 있냐? 라는 식으로 비방합니다.

 

그것도 그럴것이 예루살렘이라는 성전이 실제적으로 무너지니까

그 증거로써 그들은 당당하게 본격적으로 조롱하더라 말입니다.

 

여기에 찬양자는 소망을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여호와께 소망을 둡니다.

원수 문제는 내 문제가 아니라 주님이 전문이거든요.

 

자 그렇다면 바로 이 소망 때문에

예루살렘 성전은 무너져야만 한다는 겁니다.

교회가 무너지지 않으면 하늘에 소망을 둘 리가 없겠지요.

기댈게 너무 많으니까

이 땅에 기댈게 전혀 없어야

즉 단절이 되어야 소망이 생긴다는 겁니다.

이 소망을 인간이 원하는 소원이 아니라

소망을 하나의 인물 바로 성령으로 보시면 됩니다.

절망 곧 단절이어야 성령의 활동이 보인다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참선지자들은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졌을때에

비로소 산 소망이 생기니까 오히려 덩실 덩실 춤춘다는 겁니다.

 

오히려 거짓선지자들은 절대로 이스라엘은 무너지지 않는다

하나님이 지켜주신다.

고로 예루살렘 성전은 절대로 무너질 리가 없다 라는 식입니다.

그런데 그랬던 그들이 오간데 없습니다.

 

일송정 푸른솔은 늙어 늙어 갔어도

한줄기 해란강은 천년두고 흐른다

지난날 강가에서 말 달리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거짓선지자 하면 자꾸 선구자 라는 가곡이 생각납니다.

오간데 없으니까 말입니다.

 

그런데 참선지자는 예루살렘 성전 무너져서 꼬시다 라고 춤추는게 아니라

미래완료가 덮쳐졌기에

미리 예루살렘성전의 완성을 봐 버렸기 때문에

새이스라엘의 완성을 봐 버렸기 때문에

오히려 이 땅의 것은 그림자로 봐버려서

누락 되어야 한다는 것을

오히려 실상을 보게 되니까 얼마나 그 실상이 침노하는 상황을 뼈솟까지 체험하고 있으니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지는게 그렇게 심각한게 아니다고 보는 겁니다.

오히려 덩실 덩실 춤추면서

되돌아 오게 될테니 표시해 놓아라 하는 식입니다.

 

결국 이방나라는 너거 하나님 있긴 있냐 라고 존재론적으로 보는데

너거 절망이지 맞아 우리도 목격했어

너거들을 하나로 묶는 저 교회 저 성전이 무너졌으니

과연 하나님이 있긴 있냐 말이야

 

라고 실로암 망대가 무너지니까 하나님으로부터 저주 받아서 깔려 죽었다고 보는 겁니다.

 

그런데 참선지자나 예수님의 시선은 오히려 그것이 바로

주님의 살아계심

존재론적으로 따지는게 아니라

살아계심 즉 사건으로 다가온다는 겁니다.

 

존재로 따진다는 것은 자아를 기준으로 하니 존재니 비존재니로 가리겠다는 거죠.

성전이 존재하다가 이제는 비존재가 되니까 하나님도 존재를 의심해야 한다는 겁니다.

 

이것이 이방인의 시선입니다. 존재 유무입니다.

 

그런데 복음은 존재로 안따집니다.

오히려 그런식이면 비존재적입니다.

비존재가 오히려 존재보다 더 초과잉적 존재이니까 말이죠.

나는 내가 없는 곳에만 존재한다 라는 비존재 말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유대인 이스라엘도 이런 이방인의 사고방식으로 따진다는 거죠.

지금도 많은 교인들 즉 교회 다니는 많은 사람들이 자꾸 존재로 하나님을 따지는 식입니다.

 

다윗도 그랬지요뭐, 사건으로 볼수 없었습니다.
결과로 못 보고 원인으로 보는 겁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성전을 무너뜨려야 합니다.
원인을 없애버려야. 원인 없는 결과로만 볼것 아니겠습니까?

다윗이 그렇게 짖고자 했던 예루살렘 성전을 짖는 것에 허락이 안 떨어지자

(대상 28:2, 개역) 『이에 다윗 왕이 일어서서 가로되 나의 형제들 나의 백성들아 내 말을 들으라 나는 여호와의 언약궤 곧 우리 하나님의 발등상을 봉안할 전 건축할 마음이 있어서 건축할 재료를 준비하였으나』


(사 66:1, 개역)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지을꼬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랴』


(행 17:25, 개역)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


(막 14:58, 새번역) 『"우리가 이 사람이 말하는 것을 들었는데 '내가 사람의 손으로 지은 이 성전을 허물고, 손으로 짓지 않은 다른 성전을 사흘만에 세우겠다' 하였습니다."』


(행 7:48, 새번역) 『그런데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는 사람의 손으로 지은 건물 안에 거하지 않으십니다. 그것은 예언자가 말하기를』

(행 17:24, 새번역) 『우주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하늘과 땅의 주님이시므로, 사람의 손으로 지은 신전에 거하지 않으십니다.』

(행 17:25, 새번역) 『또 하나님께서는, 무슨 부족한 것이라도 있어서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모든 사람에게 생명과 호흡과 모든 것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고후 5:1, 새번역)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사람의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압니다.』



대신 지을수 있도록 모든 재료를 준비해 두고 솔로몬이 짖도록 준비했지요

그런데 그런 황금성전 오래 못 갑니다.

어차피 처음부터 무너져야만 했던 성전이다는 겁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다니는 교회도 당연히 무너져야지요.

왜냐하면 이미 예수님이라는 성전이 완료되어 있으니깐요.

사람의 손으로 지은 것은 다 무너져야 합니다. 누락되지 않고 무너지지 않게 되면
사람의 손이라는 이유로 우상이 되고 마는 겁니다.

(시 69:9, 개역) 『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이 나를 삼키고 주를 훼방하는 훼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시 69:9, 새번역) 『주님의 집에 쏟은 내 열정이 내 안에서 불처럼 타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모욕하는 자들의 모욕이 나에게로 쏟아집니다.』

(요 2:17, 새번역) 『제자들은 ㉢'주님의 집을 생각하는 열정이 나를 삼킬 것이다' 하고 기록한 성경 말씀을 기억하였다. / ㉢시 69:9』

(롬 15:3, 새번역) 『그리스도께서도 자기에게 좋을 대로만 하지 않으셨습니다. 성경에 기록하기를 ㉠"주님을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떨어졌다" 한 것과 같습니다. / ㉠시 69:9』

 

아무튼 무너지니까

이방인들이 그 동안 감추었던 본색을 막 드러내는 겁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 다음 니 차례인데 우짜지

라고

 

이 예루살렘 성전을 하나의 어떤 민족의 성전과 그 민족의 신이 무너지는 것으로 보는 겁니다.

그 시선은 어쩔수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이스라엘이 특이하게 안 보이니까

다른 민족과 별 다를바 없고

타 민족과의 경쟁 속에 있는 주변국들은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거든요.

 

그런데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졌다는 것은 이 지구가 무너지는

지구의 역사도 무너지는 종말을 의미하는 겁니다.

 

자 이렇게 되면 참선지자의 시선처럼

천국을 죽어서 가는게 아니라

천국이 이 땅에 침범하는 식이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역사는 종말을 늘 비방하고 비아냥 거릴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육적인 이스라엘 말고

영적인 이스라엘은 이것이 참 소망이 되는 겁니다.

천국이 임하게 해 달라는

즉 이것은 이 땅은 작살이 난다는 것과 같은 말 아니겠습니까?

 

결국 지난 시간에도 말했듯이

전능자가 성도를 짖밟나요?

아니면 성도 아닌 자를 짖밟나요?

 

성도죠.

그것이 구별 시키는 방식이다고, 거룩이 덮쳤다고 했습니다.

미래 완료, 원인 없는 결과 말입니다.

 

결국 천국이 임할때에 이 역사를 작살내면

이스라엘 아닌 나라를 작살내면서 침노하겠습니까?

아니면

이스라엘을 작살내면서 침노 하겠습니까?

천국이 말입니다. 즉 예수님이 말입니다.

 

당연히 이스라엘 아닙니까?

그런데 이스라엘은 오히려 이방나라의 종교의 신앙으로 똘똘똘 뭉쳐져서

칭칭칭 온 몸에 감아서 신앙하는 것이 바로 바리새인과의 충돌을 통해서 다 드러나더라 말이죠.

 

그런데 이 이스라엘이 망하는, 누구에게? 천국으로부터 침노당하는 상황에

남의 집 불구경하듯이 볼 수 있는 그런 상황의 이방인위치에 있지 않다는 겁니다.

이스라엘 망한다는 것은 곧 전지구가 망하는 것과 같다는 겁니다.

 

그것도 모르고

실로암 망대가 무너지니까

깔려 죽은 자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것이고

자기는 안 무너졌고 안 깔려 죽으니까 축복이다 라고 하는 것 자체가 저주 받았다는 겁니다.

 

그 다음 니 차례인데 우짜노?

 

이것을 제가 어머니께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십자가지고 예수님께서 처형장에 가는 가운데

여인들이 졸졸졸 따라다니면서 웁니다.

아이구 청년 안됐다

참 착실해 보였는데 정치꾼들 장난에 말려 죽게 되었네

쯧쯧쯧 안타깝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뒤로 휙 돌아서 하는 말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와 네 자식을 위해 울어라

 

즉 이 말은 아이고 너거들이 더 안됐네???

조금있다가 예루살렘도 무너지고 이스라엘도 무너지고

다 무너지는 종말이 덮치는데

그 종말에서 살아남을수 있겠니?

나는 너거들 종말의 불 속에서 살릴려고 십자가 지러 가는데

너는 종말에서 무슨 수로 견디니?

즉 그 다음 니 차례인데 우짜지? 라는 말과 같다는 겁니다.

 

즉 평상시의 소망 자체가

이방나라가 구하는 기도와 같은 식으로 소망했던게 드러나더라 말이죠.

 

소망은 자기 기쁨을 구하는게 아니다고 합니다.

그럼 그게 아니면 그게 무슨 소망이고?

절망이지!!!

 

그런데 그리스도의 소망은 우리가 보기에는 절망이 소망이다는 겁니다.

그리스도 되신 예수님의 시선에서는 인간의 소망이 오히려 절망이다는 겁니다.

 

두 소욕 자체가 다른 시선입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않는

십자가 라는 소망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무리 봐도 하나님의 저주인 그 십자가가

어떻게 소망이 되느냐? 라는 겁니다.

 

그런데 성도에게는 특이한 시선이

다른 사람들과의 차이성으로 생기게 됩니다.

즉 소망이 덮치면

성령이 덮치면

도저히 소망할 수 없는 것을 소망하게 됩니다.

곧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않는 소망입니다.

단순히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않는 그 십자가만 소망하는게 아니라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않는 것만 소망하는게 아니라

진짜 십자가는 비방받는 것을 오히려 소망하게 된다는 겁니다.

내 기쁨 안 구하지 뭐

이건 어쩌면 쉬울수 있어요.

그런데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미움받기것 까지 소망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요즘 베스트셀러 책 중에

미움받을 용기 라는 것이 있는데

그거 순 엉터리죠

북한에 한번 들어가보세요

미움받을 용기라는 말도 뻥긋 못꺼냅니다.

그저 상호인정 상호기만 상호기대라는 것이 가능한 환경에서만 저런 책도 팔리지

북한에서는 안 통합니다.

 

그러니 흉내낼 필요가 없습니다.

십자가 영이라는 성령이 임하면

저절로 어제까지 친했던 자도 원수가 됩니다.

 

이것은 내 쪽에서 무엇을 잘못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이 세상을 악하다 했기 때문에

예수님 때문에 욕먹는 겁니다.

욥이 그러했잖아요.

이것을 알수 없는 고난이라고 했습니다.

이유 없는 고난

 

자 지난 시간에 스데반집사가 죽임을 당합니다.

그런데 그 주도자가 바로 사도바울입니다.

그런데 죽임을 당한 스데반으로부터 바톤을 이어받도록 성령께서는 주시는 겁니다.

결국 사도바울은 그 다음 니 차례인데 우짜지? 라고 성령으로부터

바톤을 이어받게 되니

그 다음 타자, 바톤을 이어받을 선수 바로 너 야 라고 말이죠.

 

딴 사람 보다도 가장 핍박했던

심지어 죽여버렸던

그 가해자가

그 피해자의 죽음으로 인해 단절된 사명을 이어받는 것이

이것이 바로 복음의 진수이다는 겁니다.

이해가 됩니까?

 

단절인 듯 단절아닌 단절 같은 , 너와 나의 연결고리 이다는 겁니다.

 

이해 되면 안되요

이해 되지 말라고 제가 이렇게 이야기 하는 겁니다.

 

복음은 어떻게 바톤을 이어받는고 하니

복음을 증거했던 그 자를 가장 미워하고 죽여버렸던 그 사람이 이어받아야

복음이 불가능성에서 불가능성으로 이어지는 겁니다.

 

즉 말이 안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말 되네 라는 식은 성경에 없습니다.

누구나다 그건 말도 안돼 라고 반발성이 극도로 달하게 하는 말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렇게 반발했던 자가

그 다음 타자 뭐시기 뭐시기입니다. 라고 당첨 대박이 되어야

사람이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증거하는

그리스도의 소망이다는 거죠.

 

왜 주를 훼방하는 훼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그 다음 타자 접니다 라고 되는 줄 아십니까?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소망이요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십자가의 어리석은 지혜요 요나의 표적이기 때문입니다.

기적을 받을 필요가 없어요. 악한 세대가 요구하는 표적이니까요.

본인 그 자체가 기적이 되어버렸어요.

어떤 기적의 축복? 지옥 갈뻔했는데 그 지옥에서 건져내신

지옥에 뛰어드신 분을 만나버렸기에

가만히 보니 내가 죽였던 예수였다는 겁니다.

그 예수를 그 나사렛 이단 예수를

내가 핍박했는데

도리어 그 이단 예수를 내가 가장 선두에 서서 증거하는 식이

바로 그리스도의 소망

주를 훼방하는 훼방이 내게 미친 내게 덮쳐진 그 다음 타자가 바로 나 라는 것이다는 거죠.

참 지혜롭죠???

 

이것이 예수님의 전도와 인간의 포교와의 차이점입니다.

그리스도의 소망과 인간의 소원의 차이입니다.

 

즉 가능으로 이어지는 법이 없습니다.

단절에서 단절로 이어지지

개방에서 개방으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이것을 또 성경에서 발견해서 써먹는 철학자가 있어요.

프로이드 라캉 계열을 잇는 지젝이라고 라캉도 헤겔도 느낀바를 발전시킨거죠.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고 있어요.

공산주의는 반드시 도래한다고

? 실패해 봤기 때문에

공산주의라는 원리도 성경에서 뽑아낸 것이거든요.

사도행전에서 공동으로 재산을 나누는 공동체 말이죠, 그거 흉내낸 거거든요.

물론 본래의 취지를 이용해서 가장 극적인 인간의 욕망을 그대로 빨리 노출시킨 것이 되었지만 말이죠.

또 물론 이 땅에서 절대로 안이루어진다는 것을 알면서도

소위 공산주의라는 원래 이상적인 그 원리는 반드시 이루어진다고 외치는 겁니다.

그것도 공산주의를 가장 반대하는 민주주의자들에 의해서 말이죠. 외쳐지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반발했던 자가 이룬다는 거죠.

바울이 그랬다는 거죠.

예수님은 기독교를 세운적이 없는데

바울은 오히려 기독교를 의도적으로 세울려고 해서가 아니라

저절로 세워질 수밖에 없는 모든 원리를 다 기록했기 때문이다는 겁니다.

다른 제자들은 뭐 세울꺼리를 만든 것 없이 자연스럽게 사라졌지만

그래서 그리스도의 편지가 그렇게 많지 않지만

바울은 특이하게 이방을 위한 사도로써 달랐다는 겁니다.

바울서신이 많다는 거죠.

그래서 가장 반발했던 자가 오히려 가장 선두에 서는 선봉자가 되는

그 원리를 철학적인 용어가 있었는데

겨우 몇 년 되었다고 잘 떠오르지 않네요. 2-3년 밖에 안되었는데 ㅋㅋㅋ

 

아무튼 로마서 15장을 언급한 이유는

지금 상황이 성도들이 사도바울을 말리고 있습니다.

로마에 가면 죽는다는 겁니다.

가지 말라고 말이죠.

 

참 절망적인 상황 아닙니까?

그런데 사도바울은 정반대로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나 로마 가는 것 우찌 알았어요?

성령이 알려줬군요 그랬어 !!! 우쭈쭈 !!

바로 그 성령이 소망을 부어준 겁니다.

그리스도의 소망

곧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않는

십자가만 자랑하고자 하는 소망

그러니 오히려 슬프기 보다는 기쁜 겁니다.

아니 죽으러 가는 것이 기쁘다니요?

 

(15:1, 개역)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15:2, 개역)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

(15:3, 개역)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 기록된 바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우리끼리는 서로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덕을 세우고

또 그것으로 끝나는게 아니라

주를 비방하는 비방이 나에게 미치도록

로마로부터 미움을 받는, 죽임을 당하는 것이 바로

그 성령의 소망이 덮쳤기에

미움받으러 간다는 것이 기쁘다는 겁니다.

 

? 예수님도 그랬거든요.

 

아니 예수님 때문에 그렇거든요.

 

자 이러니 오히려 로마에 죽으러 가는 사도바울이 성도들을 위로하고 기쁨을 주는 겁니다.

어떻게?

난 제대한다 앗싸 기쁘다

제대하는 말년 병장을 다른 병사들은 억수로 부러워 하는 겁니다.

 

마치 그 다음 당신 차례요 걱정하지 마요. 나 처럼 곧 따라올테니

 

울지말고 뚝 기뻐해야지 ~~~

라고 위로를 하는 겁니다.

위로가 거꾸로 하고 있지요.

위로 받아야 할 사람이 위로하고 있고

위로해야할 사람이 위로 받고 있습니다.

참 신기하죠.

말도 안되는 겁니다.

 

불가능하죠.

 

사실 사도바울이 걱정되어서가 아니라

억수로 부러워서 그러는 겁니다.

제대하는 선임병을 후임병들은 억수로 부럽다 라고 하듯이 말입니다.

 

그렇기에 성령이라는 소망이 덮쳐져서

이 불가능한 일이

불가능한 그대로 담아서 우리에게 알려주는 겁니다.

우리는 가능으로 바꾸어서 이해하는게 아닙니다.

성화론자들은 이것을 마치 실천하라는 식으로 숙제를 던지던데

지도 안하는 숙제를 막 던져요

자기가 못하니까 그런 겁니다.

 

이거 따라 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성령이 알아서 하십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이런 상황이 닥치면 나는 못하는데 우짭니까? 라고 걱정하지 마세요.

원래 못하는 것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안 맡기느냐?

물론 맡기기도 합니다.

군대에서 보직을 맡기잖아요

그런데 군복무 기간이 다 차면

아무리 보직의 할 일이 많아도

무조건 제대입니다.

성령의 법이 그러합니다.

 

결국 주님이 다 알아서 해 놓고서 결과를 안겨주시는 겁니다.

쪼매 죽을 고생 좀 하는 것이니

너무 걱정할 것 없어요

아니 이 땅에서 천년 만년 살 것도 아닌데

 

늙고 병들고 힘 없으면 오히려 빨리 가고 싶은게 인간입니다.

그게 소망이 될 수 없죠.

 

진짜 소망은 바로 십자가 라는 주님의 다 이루심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를 바라보게 하기 위해서

이 땅에 의지하고 기댈 것을 모조리 다 없애는 겁니다.

 

그런데 이 땅에 의지하고 기댈 것 다 없애버리니까

유대인 보다

자칭 하나님의 백성 보다

이방인이 도리어 이 산소망 되신 예수님과 그 십자가를 소망하더라 말이죠.

 

그게 바로 예수님의 활동이였습니다.

천국이 침노해서 벌어진 결과였습니다.

도래 라는 표현 보다 얼마나 좋나요? 침노

하여튼 신학자들이 예수 안 믿는 티가 이런데서 팍팍 나는 겁니다.

어떻게 해서든 천국을 이미지 좋게 선전할려고 말이죠.

 

예수님은 오로지 잃어버린 이스라엘 외에는 보냄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영접하는자가 없었어요.

오히려 개 같은 이방인여자가 영접하더라 말이죠.

 

주여 저 개 맞습니다. 개 맞아요

맞습니다. 맞고요.

하지만 개도 주인의 밥상에서 떨어진 부스러기를 먹지 않습니까?

이것이 바로 역설적으로 이스라엘 왕이 백성 이스라엘로부터 듣기를 원했던 말입니다.

그런데 그 이스라엘이 바로 이 개같은 이방여자였다는 겁니다.

결국 이스라엘 유대인은 자기들이 욕하다는 이 개같은 이방여자 보다 더 못한줄도 모르고

개같은 이방인이다고 상종도 하지 않고 삥 둘러 간다 말이죠.

더러움이 묻을까봐 ~~~ 무슨 결백증 환자도 아니도

자기들이 제일 더러운줄 모르면서 말이죠.

 

바로 우리가 제일 더러운줄도 모르고 남 더럽다고 하는 입장이다는 겁니다.

 

오히려 이스라엘은 12명의 정탐꾼을 통해서 나타난바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약속의 땅을 원치 않았습니다.

소망하지 않았어요.

정작 모세를 무릎 꿇혀서 속았다 죽여버리자 라고 했잖아요.

 

오히려 개 같은 이방여자가 출애굽사건 이야기로 인해 간담이 녹아질정도로

소망하고 소망하고 소망했다 말이죠.
그런데 이 개같은 이방여자와 달리 이스라엘은 모세를 죽일려고 갈렙을 죽일려고 하는 바람에
이 여자의 등장으로 두 개로 갈라지는 구분 구별로 인해 졸지에 이 여자땜에 40년 뺑뺑이를 돌게 됩니다.
그것도 말이 40년이지 출애굽을 경험한 장정들을 일부러 다 죽을때까지 계속 됩니다.
새롭게 교체된 세대로 인해 요단강을 거는 겁니다. 그 전까지는 죽을때까지 기다리는 겁니다.

이게 기생 라합의 거짓말 곧 행함이 있는 믿음이요.

열처녀 비유에서 슬기로운 다섯처녀의 종말적인 믿음 곧 행함이 바로

기생 라합을 말하는 겁니다.

 

그러니 시편 79편은 사실상 출애굽을 반복하는 겁니다.
그 무시 무시한 간담을 녹게 만다는 출애굽을 말입니다.

 

그게 무슨 약속이냐?

그게 무슨 소망이냐?

끊임없에 주를 훼방하는 훼방이

곧 미움이 덮쳐져야

왜 출애굽해야 하는 지를

왜 출애굽이라는 탈출을 주님의 소망으로서 왜 펼쳐져야만 하는지를 보게 된다는 겁니다.

 

결국 예수님 곧 그리스도의 소망은

예수님을 미워하는 그 미움이 성도에게 미치는 것이요.

그것을 사도바울은 드디어 제대라 육신의 장막을 드디어 벗는구나

좋아라 하는 겁니다.

그리고 위로 합니다. 거꾸로 말이죠.

너도 곧 말년 제대해야지?

언제 제대고? 아 그때!!!

다 됐네

 

그럼 사도바울의 스데반을 보는 시선은 놀랍게도

제대한 자로 보고 있지

자기가 살인을 해서 죽여버린자로 보고 있지 않습니다.

참 뻔뻔스럽지요?? 그리스도의 소망이 덮쳐져서입니다.

곧 로마도 사도바울을 죽입니다.

그 로마에서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의 사람이 우발적으로 발생하겠습니까?
괜히 죽인 겁니다. 괜히 벌집을 건드린 거지요.
오히려 그리스도는 더 기뻐합니다. 소망이였거든요.

한 알의 밀알이 떨어져 죽었기 때문이다는 겁니다.

그 다음 니 차례요. 그 다음 타자가 바로 너야 가 되거든요.

종말의 시선에서 억울하게 죽은 밧세바의 남편 우리아가
다윗에게 멱살잡고 왜 나의 마누라를 빼앗았어 라고 따지겠습니까?
아니면 고마워 하겠습니까?
뭐가 고맙냐구요? 제대시켜줘서요
다윗은 오히려 행님 고마워요 바톤을 주셔서
그 바톤 곧 그리스도의 소망이 안 덮쳤다면
꼬끼오 꼬끼오 꼬끼오 여디디야 여디디야 여디디야 라는 십자가의 소원을 못 알아봤다 말이죠.
지금 인간의 윤리 시선에서 놀고 있지 않고
하늘의 소망의 시선에서 놀고 있어요.

스데반 집사가 너 바울 이놈 왜 날 죽였어 얼마나 억울했는지 아니? 이랬겠습니까?
죽어가면서도 주여 저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도무지 알지 못하나이다.
저들의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말라고 했고 천사의 얼굴 같았잖아요.
그리고서는 바울아 너가 참 바톤을 잘 이어받았어
넌 줄 몰랐는데 참 그리스도의 소망이 얼마나 명료한지 참 놀라워

그래요 스데반 행님
스데반 행님이 꼬끼오 세번 우는 바람에
그리스도의 소망이 덮쳐졌당께요

이게 무슨 죽이고 죽은 철천지 원수 사이가 나눌 대화 맞습니까?
마치 사자들과 어린양이 뛰놀고 독사 굴에 어린이가 손 넣고 장난 쳐도 물지 않는 
귀신 시나락 까먹는 소리입니까?

그 정도로 그리스도의 소망은 뛰어넘어 설 정도로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겁니다.
 

오히려 바톤을 이어받았으니

이런 성령의 소망의 시선은

육의 시선을 단절시켜서 오히려 존재가 아닌

비존재(마치 유령처럼)로써

나는 내가 없는 곳에 다 있다 라는 식으로

불가능성만을 누리고 즐기고 기뻐하는 겁니다.

 

바로 이것이 십자가만을 소망하기에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않는 그리스도의 소망이 덮쳐진자의 찬양입니다.

 

 

 

 

 

 

Posted by 김 대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