싫어버린바 된 얼굴과, 얼굴과 얼굴을 마주보며 (시편 80)

 

 

(고전 13:8, 개역)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고전 13:9, 개역)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고전 13:10, 개역)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고전 13:11, 개역)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고전 13:12, 개역)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고전 13:13, 개역)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김세환 가수의 노래 중에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눈과 눈을 마주 보며 우리 사랑을 노래해요

 

마주 보고 마주 대한다 라는 것은 곧 둘 사이가 사랑의 관계이다는 겁니다.

 

이 관계성 때문에

반드시 마귀는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베드로라는 월척을 잡아야 한다 말이죠.

잡혀온 베드로는 도리어 이 사랑의 관계성을 말하기 위해

미끼로써 마귀가 덮썩 물도록 먹음직 보암직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러워야 한다 말입니다.

 

마귀가 이 최고의 먹잇감을 놓칠 리가 있나요?

그렇다고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데 이 기가막힌 기회를 놓칠 리가 있나요?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자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시험하는데 정말 기가막힌 우연으로 작용하는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히려 자신의 십자가의 사랑의 용서관계를 말하는데 있어서

이것 보다 더 좋은 찬스가 없습니다.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돌삐를 들고 이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자를 돌로 쳐들고 죽일려고 달려들던 그 율법의 달인들이

도대체 왜?

김현철 노래의 가삿말 중에

 

도대체 왜 아무런 말도 없는거야? 미안해서 못하는 거야? 하기 싫어 안하는 거야?

도대체 왜 아무런 말도 없는 거야? 내가 알면 안돼는 거야? 이젠 할말도 없는 거야?

왜그래 그렇게 어려워?

 

왜그래 무슨일 있었어? 너의 얼굴이 말이 아냐 말해봐

왜그래 나쁜일 인거야? 나랑 눈도 맞추질 못해 지금 넌

 

왜 그래? 돌을 던져!!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왜 못 던져???

너의 얼굴이 귀신을 본 것 같아!!!

누굴 봤기에 그렇게 얼어버렸니!!!

 

땅에 SSG 무엇을 적었기에

도대체 무엇을 봤길래

다들 돌삐를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자에게 던지지 않고

예수님을 자신만만하게 시험하겠다고 했던 자들이

하나 둘 씩 도망치는 겁니다.

 

어떤 목사 사모는 글쎄 이 내용을 여인아 다시는 죄 짖지 말라는 식으로 해석하면서 히스테리를 막 부려요

 

그게 아니라 예수님은 자신의 사랑의 관계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랑 때문에

법을 끌어들이는 겁니다. 율법을 쥔 놈들 말입니다.

법 보다 더 나은 사랑, 곧 법을 뛰어넘지 못하는 사랑은 거짓사랑인 거죠.

그래서 사랑은 불법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율법의 완성이 사랑인 겁니다.

그러니 율법을 끌어들이지 않고서는 이 율법의 완성인 사랑을 나타낼수가 없습니다.

 

누가 바보처럼 율법을 완성하는데 율법을 어기겠습니까?

그래서 다들 너무 너무 똑똑한 마귀처럼 법을 지키고 율법을 손아귀에 장악하는 겁니다.

왜 사랑하기 싫어서입니다.

사람들이 왜 말씀을 지키는 줄 아십니까?

왜 성경에 나오는 이웃사랑을 실천하시는 줄 아십니까?

주를 사랑하기 싫어서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이 아니라

자기 사랑으로 예수님을 사랑하겠다는 방식입니다.

전체 얼굴이 아니라

자기의 부분적인 것을 우려먹는 식이다는 겁니다.

 

즉 이 말은 불법을 어기는 사랑이 아니다는 겁니다.

 

그러나 율법의 완성은 율법을 어기는 겁니다. 예수님 혼자만 그렇습니다.

불법을 저지르는 겁니다. 사랑의 관계 때문에 불법자가 되는 겁니다.

 

이것을 얼굴과 얼굴을 마주보는 것인데

어린아이의 일과 관련해서 고전 13장에서 사랑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어릴적에는 깨닫는 것도 말하는 것도 생각하는 것도 아이와 같은데

장성하면 어린아이의 것을 버린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부분적으로만 보이던 것이 전체가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 전체를 바로 얼굴이라고 하는데

전부와 전부를 마주 보는 겁니다.

 

즉 목숨을 걸고자 죽음에 뛰어드는 것이 바로 전부와 전부

얼굴과 얼굴을 마주대하는 장성한자의 모습인 어린아이의 일을 버린자입니다.

 

또 이것을 따라할려고 쓸데 업이 목숨 걸지 마시고요 (이게 바로 어린아이입니다)

오히려 나에게 목숨 거는 분이 나를 섬기고자

자기 목숨을 아끼지 않았다는 것을 기뻐하시면 됩니다.

 

어떤 목사는 심심하면 어린 성도들 어린 성도들 어린 성도들

그런 말을 반복하면서 장성한 자기가 이끌어 주어야 한다고 사기를 치던데

이미 반복하듯이 입버릇이 되었다는 자체가 세뇌 시키는 거죠.

아무리 봐도 등쳐먹는 자이지 섬기는 자가 아닌데

보통 똑똑치 않은 자들이 거기에 다 넘어가는 것 보면

똑똑해도 소용없구나 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부분적인것과 부분적으로 보는 것은 이제 지나갔다 말이죠.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예수 안에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 말이죠.

예수님이 일방적으로 맺은 관계를

율법을 쥐고 돌삐를 들었던 놈들이 도대체 어디 갔냐 말이죠

왜 돌삐를 던지지 못하느냐 말이죠.

 

그 부분과 부분의 만남이 아닌

전체와 전부의 마주 대함이

곧 얼굴과 얼굴의 대함이 바로

 

율법을 어기고 사랑을 감행하는 겁니다.


 

이것을 어머니께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우리가 솔직하게 남의 집에 불이 났을때에

다들 얼굴을 다 불난 집에 불 구경하듯이 얼굴을 그 쪽으로 향합니다.

아무도 불난 집은 안쳐다 보고 얼굴을 돌려서 반대로 향하지 않습니다.

불구경처럼 세상에서 가장 재미난 것이 없거든요.

 

누가 물에 빠졌습니다. 아무도 들어가질 않으나

다들 얼굴을 돌리지 않고 다들 쳐다 봅니다.

사건이 터지면 구경하는 재미이지

만약 아무일도 벌어지지 않으면 에이 하고 다들 돌아서는 겁니다.
얼굴을 돌려 버립니다.

얼굴을 계속해서 그 쪽으로 주시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갑자기 다들 흩어져 버립니다.

 

모든 사람들이 각자 각자 자기 일로 떨어져 있다가

사건이 터지만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모든 얼굴을 한 곳에 집중하고

다들 벌떼같이 모여듭니다.

구경이 났거든요.

 

바로 이렇게 우리는 철딱서니 없이 남 불구경하듯이 얼굴을 들이대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남 불구경 했었던 한 여인이

불구경에서 진짜로 불 속에 뛰어드는 자가 있습니다.

네 맞습니다. 불 타는 집에 있는 아기의 엄마입니다.

그 엄마도 남의 일이였을때는 불구경하는 재미를 누리던 자입니다.

그렇다고 뛰어들 수 없습니다. 남이니까

그런데 이제는 뛰어듭니다

철없을때는 부분적으로 봤지

자기 전체를 걸어야 할 문제가 아니였습니다.

 

이제는 자기 이쁜 얼굴이고 뭐고 다 의미가 없습니다.

다 걸어야 합니다.

불이 그 여인 보다 약할까요? 천만의 말씀

불은 그 여인을 수천번 죽여도

절대로 약하지 않습니다. 눈 하나 깜짝하지 않더 더 활활 타오릅니다.
만번이면 만전 만패 하도록 만드는

절대 강자가 불입니다.

그거 아기 엄마가 모릅니까?
알아도 너무 너무 잘 압니다.

그런데 뛰어듭니다.

전체가 보였기 때문입니다.

부분이 아닙니다. 즉 관계를 말해 주는 겁니다.
나 이 불 속에 있는 아기 엄마 다 라고 아임 마더.
이 관계성을 말하는 것이 솔로몬 재판 아닙니까? 

 

그게 얼굴입니다.

얼굴은 그 사람의 전체가 다 나타나는 겁니다.

얼굴에는 조그마한 숨겨진 부분 부분 들이 없어요.

얼굴은 전체를 나타내는 거울입니다.

 

강도만난 자가 쓰러져 있습니다.

레위인이 지나가버립니다.

제사장도 지나가 버립니다.

그런데 이 비유를 듣고 있는 유대인의 철천지 원수인 사마리아인이

이 강도만난 자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서 치료합니다.

누가 과연 이웃이냐 라는 거죠.

 

우리 보고 선한사마리아인이 되라는 말이 아닙니다.

아까 말한 어떤 목사의 사모도 그렇게 이웃사랑실천해야 한다고 사기를 치는데

그런 사기칠 생각 마시고

본인이 강도만난 자이라는 것을 알라 라는 내용이다 말이죠.

 

불 속에 타고 있는 아기이다 말이죠.

누가 뛰어드느냐 말이죠.

아무도 안 뛰어듭니다.

얼굴 다치거든요
전체가 다쳐요

 

그런데 아기 엄마는 뛰어듭니다.

그 뻔한 불법 속에 뛰어듭니다.

그 뻔한 저주 속에 

그 뻔한 불법 속에

지옥 속에 뛰어듭니다.

 

그렇게 뛰어드는 자는 사랑의 관계자 밖에 안되는 겁니다.

 

오히려 화마는 우리에게 귀한 것을 깨닫게 해 줍니다.

관계자 외 뛰어들지 마라 말이야

 

관계자 외 출입금지이다는 거죠.

 

돌삐를 들고 있는 유대인

더러운 시체를 만지면 안되는 레위인, 제사장

이웃사랑 실천해야 한다고 사기치는 사모

 

모조리 다 관계자 외 출입금지를 말하는 사건현장의 노란띠

또는 바리케이트

이 선을 넘지 말라는 그런 짖 외에는 할 줄 모르는 놈들이다 말이죠.

그런 선을 넘는 자가 바로 사랑이다는 겁니다.
선을 넘는 불법을 행하는 자가 사랑이다는 겁니다.

이것을 그들은 다시는 죄 짖지 마라 라는 법을 또 말하고 있거든요
주님이 고침을 받을까봐 깨달으면 안되기 때문에 귀를 막과 눈을 못 보도록 하셨다는 것에 그들이 말려든 겁니다.
사랑을 말 할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불법적인.
왜? 그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법을 말할려고 하지 불법은 말 못하는 거니까 말이죠.



율법의 완성은 그 율법의 선을 넘는자 만이 완성합니다

율법을 지키는 자는 오히려 사랑이 없는 자이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법이나 그 하나님을 따라하는

가인은 벌이 칠 배 인데

나 라멕을 건드리는 놈은 벌이 77배 이다고 말하는

모조리 이런 라멕을 키우는 곳이 오늘날 교회가 되고 말았죠.

그래서 너희 조상이 했던 짖을 그대로 유전 받았다고

너희 장로가 했던 짖을 그대로 유전 답습한다고

예수님이 아주 대놓고 그들 성질을 건드린 겁니다.

조상 대대로 내려오던 버릇이 어디가겠습니까? 선지자를 죽였듯이 죽여 버리죠.

어딜 감히 벌이 77배인 하나님의 법을 건드려 라고 예수님을 죽여 버리죠.

그것도 하나님의 저주인 십자가를 뒤짚어 씌우는 겁니다.

곧 자기들이 하나님이다는 거죠.

그 목사의 사모가 그런 못땐 짓을 배운 겁니다.

자기 건드리면 벌이 77배라는 라멕을 따라해 놓고서는

갑자기 성경적이다고 이웃사랑실천해야 한다는 역시나 또 법을 운운하지

사랑을 말하지 못하는 겁니다.

당연하지요

용서를 받은게 없거든요.

많이 탕감받은자가 많이 사랑할텐데 말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바로 저런 마귀들이 우굴 우굴 거리고

심지어 목사 사모 장로 다 해먹는 겁니다.

 

그래서 그들은 불가능성을 말할줄 모릅니다.

불법적인 사랑을 말할 수가 없는 겁니다.

왜? 사랑은 불법이니까

절대로 이 사랑을 말 못하는 거죠.

말하면 불법이 되고

그동안 자기가 불법 타도를 외쳤는데

자기가 자기를 타도해야만 하는 1순위가 될테니 말입니다. 

이것이 전체 얼굴을 못보는 부분적인 폐하는 그림자를 쫏아서 그런 겁니다.
실상을 나타나 주지 않았기에 말이죠.
.

 

우리는 부분적이라서 언제든지 고개를 돌려 버립니다.

그저 불구경하는 신나는 재미난 것만 찾지

전체 얼굴을 다 걸어야 하는 불 속에 뛰어들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참으로 못땐짖을 하십니다.

제발 어린아이의 일을 버리라고

물론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장성한 자가 되라고

물에 빠져 허덕이는 자에게 생명줄 던지라고

사람낚는 어부가 되라고

물에 등떠밀어 버립니다.

아니 남 살리라고 물에 뛰어들지 못하는 망정

수영도 못하는데다가 겁도 많아서 절대 그런일 하지 못하는 자를

뒤에서 확 등 떠밀어 버리면

그 사람 죽으라는 말 아닙니까?

그래서 물에 빠져서 살려달라고 살려달라고 온갖 오두방정을 떨면

다들 그 심각한 상황에서도 웃음이 터지는 겁니다.

그런데 우짜다가 겨우 겨우 물에서 나오게 되니

다들 박수를 칩니다 어느새 그 물에 먼저 빠졌던자가  후에 등떠밀린 사람의 발모가지를 잡고서

딸려 나왔던 겁니다.

그런데 화 나지요 누가 나를 등 떠밀었어 씩씩씩
이것이 우리의 철딱서니 없는 모습니다.
늙어 죽을때까지도 철들지 않습니다. 절대 장성한 자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부분적입니다.

누가 나를 등 떠밀었느냐 밖에 모릅니다.

전체 그림인 얼굴을 볼 줄 모릅니다.

다들 싫어버린바된 얼굴을 돌려 버립니다.

 

아기는 자라서 엄마 얼굴이 괴물 같아서 늘 놀림깜이 되다 보니

아기는 늘 엄마를 싫어했습니다.

싫어버린바 된 얼굴이니까 말이죠.

그렇게 철딱서니 없는 어린 시절이 지나고

자기가 죽다살다 싶이 아기를 낳고 기르다 보니

괴물얼굴을 한 엄마가 바로 사랑이였다고

이제는 누구보다 먼저 부끄러워 숨지 않고

누구보다 먼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얼굴이 우리 엄마 얼굴이라고

남들은 다 괴물이다고 고개를 돌리는데

이제야 얼굴과 얼굴을 마주보면서 외친다 말이죠.

 

부분이 아닌 전부를 걸어서 죽음에 뛰어드는

죽음이라는 불법에 뛰어드는 자는 사랑 밖에 없다고

그것이 얼굴이라고

 

레위인도 그냥 얼굴을 돌려버렸고

제사장도 그냥 얼굴을 돌려 버렸는데

내가 부정하다고 했던 그 사마리아인이

얼굴을 돌리지 않고

자신의 전부를 걸어서

이 강난 만난 나를 치료해 주더라 말이죠

그 사막에서 한 시간만 지나면 바로 시체가 되는데 말이죠.

어차피 불가능하다 싶어서 다들 외면하고 돌아섰는데

왜 얼굴을 돌리지 않고

치료하냐 말이죠?

왜 불법을 행하냐 말이죠.

법을 지켜야지

법을 지키지 않고 불법을 행하냐 말이죠.

 


지금 시편 80편은 그야말로 이스라엘 전체가 강도만난자가 되어서

다 죽게 되었는데

여기서 찬양자는 딱 하나만 외치는 겁니다.

주의 얼굴을 돌리지 마시라고

네 맞습니다. 우리 불법을 행했습니다.
맞습니다 맞고요 저 개 맞습니다. 그러나 개도 주인의 밥상에서 떨어진 부스러기를 먹지 않습니다.

주여 나의 주인이 되소서 라는 겁니다.

벡번 만번 벌을 당해도 쌉니다. 그 벌이 중요한게 아니라.

제발 주의 얼굴을 돌리지 마시라고

 

이 말은 주여 제발 불법을 저질러서 사랑을 베풀어 달라는 겁니다. 용서 해 달라는 겁니다.

 

불법을 저지른 자를 용서하는 것은 불법입니까? 사랑입니까?

불법을 행한 자를 옹호하는 것이 말입니다.

 

바로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자를 가지고서 예수님을 시험하는 자들이 바로 이것을 노린 겁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신학책들에서 가장 많은 논쟁이 뭔고 하니

 

행함이냐 믿음이냐 라는 논쟁입니다.

아직까지 풀지 못했나 봅니다.

20년 전에 늘 널려있던 제목이기도 했는데 말이죠.

지금은 거의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행함 쪽으로 기울어졌지만 말이죠.

믿음으로 기울어 질 리가 없지요. 그럴러면 불법을 행해야 하는데 그런 자는 없습니다.

 

믿음있고 그런 것 필요가 없어요

교회에서는 무조건 돈 안 되는 놈은 원수보듯 합니다.

마귀 취급 받아요

돈되는 놈만 다니는 것이 교회입니다.

 

오히려 믿음있는 성도가 나타나면 교회는 골치아파 집니다.

부정한 교회 보다 더 부정해요

더 불법적이다는 거죠.

감히 금기시 되어 있는 사랑을 외치니까 말이죠.

 

다들 고개를 돌려버린 싫어버린 바 된 얼굴을 들이대니까 말이죠.

부분이 아닌 전체를 들이대니까 말입니다.

 

물 위를 세 번 걸었던 그런 것만 좋아하지

부분적인 것만 알기를 원했지

풍랑을 일으켜서 죽이고자 물에 빠뜨리는

그 죽음을 통과케 하는

3일 만에 다시 살리는

3초 만에 주마등 같이 다 지나가게 하는 죽음을 거치도록 해서 다시 건지는

당신 도대체 3초 전에 물위를 세 걸음 걷게 해 주었던 예수 맞기는 맞아요?

3초 후에는 도대체 당신 누구인지?

저 죽음도 저 큰 파도 도 잠잠케 하는 당신 뉘시오?

 

이 말은 이제야 얼굴을 제대로 봤다는 겁니다.

 

아이구 눈 부셔 천사도 감당이 안되어 여섯 날개를 가려야 겨우 버틸정도인데

우리는 가릴수 있는 날개가 있어야 말이죠

그저 맨탕으로 당하는 겁니다.

모세도 보고 싶어도 못 봤던 얼굴

이스라엘 야곱도 간밤에 하나님의 얼굴 보도 타 죽어야 함에도 안 타죽고 살아남았다고 해서

아이고 간밤에 주의 얼굴을 보고도 안 타죽었네 해서 나온 인사말 샬롬

 

그 불 속에서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보는 겁니다.

전부를 걸어서 말이죠.

 

시편 80편에서

이 얼굴 때문에

얼굴 자체가 사건이니까 배경이니까 구조이니까

이 얼굴 땜에 벌어져야만 하는 사건이 바로 이스라엘이 쫄딱 망하는 겁니다.

불 속에 진노 속에 들어가는 겁니다.

 

이방나라 불구경 났다고 신났죠 뭐

너거 하나님 뭐하시노 낮잠 자나

깨워라 아이고 그래 불러가 잠에서 깨겠나

더 크게 불러야지

아주 신났다고 조롱합니다.

 

부분을 나타내는 겁니다.

그 부분에 상대적인 전체가 등장하는 겁니다.

얼굴은 바로 이런 상대적인 어린아이의 일과 대조해서

장성한 자의 얼굴을 나타내는 겁니다.

 

이게 사랑이다는 겁니다.

 

이제 부분과 부분적으로 하는 것 다 폐하고

실물과 실물을 마주하자 말이죠.

 

언제까지 그림자 소꿉놀이 하냐 말이죠.

이제 실상과 실상의 만남

얼굴과 얼굴의 만남으로써

 

사랑을 나타내는 겁니다.

 

율법을 어겨서 율법의 완성인 사랑을 이루는 겁니다.

불법인 이 죄인에게 뛰어드시는 구원자이다는 겁니다.

 

온전함이 오면 불완전했던 의문의 죽이는 것은 이제 누락되는 겁니다.

아니 사랑은 그 불온전한 것을 가만히 두지 않습니다.

찢어버립니다.

 

이것이 전남편으로부터 자유케 된 성도의 새남편의 얼굴을 마주하는 모습입니다.

이 사랑에서 끊을자 없습니다.

 

(7:1, 개역) 형제들아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율법이 사람의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

(7:2, 개역)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 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났느니라

(7:3, 개역) 그러므로 만일 그 남편 생전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부라 이르되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케 되나니 다른 남자에게 갈지라도 음부가 되지 아니하느니라

 

(8:1, 개역)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8:2, 개역)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8:3, 개역)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8:4, 개역)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8:5, 개역)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8:6, 개역)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8:7, 개역)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8:8, 개역)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8:9, 개역)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8:10, 개역)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8:11, 개역)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8:12, 개역)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8:13, 개역)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8:14, 개역)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8:15, 개역)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8:16, 개역)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8:17, 개역)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8:18, 개역)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8:19, 개역)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8:20, 개역)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8:21, 개역)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8:22, 개역)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8:23, 개역)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8:24, 개역)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8:25, 개역)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8:26, 개역)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8:27, 개역)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8:28, 개역)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8:29, 개역)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8:30, 개역)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8:31, 개역)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8:32, 개역)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8:33, 개역)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8:34, 개역)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8:35, 개역)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협이나 칼이랴

(8:36, 개역)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8:37, 개역)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8:38, 개역)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8:39, 개역)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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