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파도보다 위대한 예수님, 죽음보다 강한 사랑 (시편 93)

 


(
8:24, 개역)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물결이 배에 덮이게 되었으되 예수는 주무시는지라

(8:25, 개역) 그 제자들이 나아와 깨우며 가로되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8:26, 개역)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신대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

(8:27, 개역) 그 사람들이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고 하더라

 

(93:1, 개역) 여호와께서 통치하시니 스스로 권위를 입으셨도다 여호와께서 능력을 입으시며 띠셨으므로 세계도 견고히 서서 요동치 아니하도다

(93:2, 개역) 주의 보좌는 예로부터 견고히 섰으며 주는 영원부터 계셨나이다

(93:3, 개역) 여호와여 큰 물이 소리를 높였고 큰 물이 그 소리를 높였고 큰 물이 그 물결을 높이나이다

(93:4, 개역) 높이 계신 여호와의 능력은 많은 물 소리와 바다의 큰 파도보다 위대하시니이다

(93:5, 개역) 여호와여 주의 증거하심이 확실하고 거룩함이 주의 집에 합당하여 영구하리이다

 

 

시편 93편을 보니, 예배시에 말씀을 나누기 전에 찬송가를 구주여 강풍이 일어 큰 물결이 이를 때 ~~~~

큰 바다야 잠잠해

이거로 하면 되겠네요.

 

찬송가 491장이죠?

 

찬송가 419- 구주여 광풍이 일어 - 8:24,25,26,27 인도와 보호

 

1. 구주여 광풍이 일어 큰 물결이 뛰놀며

온 하늘이 어둠에 싸여 피할 곳을 모르니

우리가 죽게 된 것을 안 돌아봅니까

깊은 바다에 빠지게 된 때 주무시려 합니까

큰 바람과 물결아 잔잔해 잔잔해

사납게 뛰노는 파도나 저 흉악한 마귀나 아무 것도

주 편안히 잠들어 누신 배 뒤엎어 놀 능력이 없도다

주 예수 풍파를 꾸짖어 잔잔해 잔잔해

주 예수 풍파를 꾸짖어 잔잔하라

 

2. 구주여 떨리는 내 맘 저 풍랑과 같아서

늘 불안에 싸여서 사니 날 붙들어 주소서

세상의 풍파가 나를 삼키려 합니다

지금 죽게 된 날 돌아보사 곧 구원해 줍소서

큰 바람과 물결아 잔잔해 잔잔해

사납게 뛰노는 파도나 저 흉악한 마귀나 아무 것도

주 편안히 잠들어 누신 배 뒤엎어 놀 능력이 없도다

주 예수 풍파를 꾸짖어 잔잔해 잔잔해

주 예수 풍파를 꾸짖어 잔잔하라

 

3. 사나운 광풍이 자고 큰 물결이 그치니

그 잔잔한 바다와 같이 내 마음이 편하다

구주여 늘 함께 계셔 떠나지 맙소서

복된 항구에 즐거이 가서 그 언덕에 쉬리라

큰 바람과 물결아 잔잔해 잔잔해

사납게 뛰노는 파도나 저 흉악한 마귀나 아무 것도

주 편안히 잠들어 누신 배 뒤엎어 놀 능력이 없도다

주 예수 풍파를 꾸짖어 잔잔해 잔잔해

주 예수 풍파를 꾸짖어 잔잔하라

 

 

며칠전에? 어제였나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시편을 준비하면서 인터넷검색을 통해서 많은 설교를 접해봤습니다.

다 한결같이 어떻게 하면 인간을 구원해 줄까 라는 인간의 열심이 가득하더라 말이죠.

 

철학을 공부해 보면 철학자들의 심정이 바로 그거거든요.

거짓선지자들 아닙니까?

 

그래서 그런 내용들을 참고해서

그들의 주장에 거꾸로 반대로 볼려고 하고 있습니다.

 

한가지 재미있는 것을 발견했는데

다들 시편 해석을 문자 그대로

찬양을 마치 예배용으로 보고 있다는 겁니다.

심지어 시편 기록 자체내에서도 그런 해석으로 밖에 안나오도록 기록이 되어 있기도 하구요.

무슨 가락에 맞추어 예배시에 썻다는 내용을 매 편 1절 앞에 적혀 있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시편을 달달 외운 유대인들이

시편대로 오신 예수님을 못 알아보는 이유이다는 겁니다.

 

찬양이 예배용 즉 노래일 뿐이다면

예배가 펼쳐지는 공간인 성전은 무너지지 말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정작 성전은 반드시 무너지도록 되어 있어야 한다는 거죠.

물론 제가 좀 과장 또는 비약을 해서 강조할려다 보니

찬양을 노래로만 취급한다고 하지 정작 그들은 그렇게 안보고 있죠

삶이다는 둥 찬양은 삶이요 기도요 중심이다는 둥

중요한 의미를 다 갖다 붙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어설프면 세뇌가 되겠습니까?

 

오히려 너가 저 찬송가 491장을 예배시 하면 되겠구나 라고 찬양을 예배용으로 사용할려고 하지 않냐 말이죠.

 

자 그래서 찬양은 예배용이 아닙니다.

이렇게 의문을 가지고 따지고 따져보자 말이죠.

 

예배를 위한 꼽사리로 넣는 장식품으로써 찬양이 아니다는 겁니다.

설교가 가장 1순위이고

그 다음 기도, 또는 대표기도이고.

찬양은 전체 공동용이고 등등

그러나 이런 것이 없다 말이죠.

 

오히려 찬양은 예배용이 아니라. 사건용이다는 겁니다.

사건이라는 의미 자체가 낯설고 생소하기 때문에

무슨 소리인지 모르는 겁니다
심지어 설교선포를 1순위로 잡아도 사건이 안된다는 겁니다.
복음을 증거하면 소동이 벌어져야 하는데 말입니다.

 

그리고 사건용은 공간 즉 성전이라는 공간 자체가 필요가 없습니다.

사실 공간 하면 우리가 인지하는 눈 안으로 들어오는 거리 길이 높이 등등의 인식이라

자로 재고 측량이 가능하겠지요.

그러나 공간이란 정작 그런 측량이 아니라

측량기계를 무용지물로 만들어 버리는 몸이다는 겁니다.

그것도 바로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은 측량불가입니다.

예측불허입니다.

해석 불가입니다.

 

사건은 바로 이 몸에 해당되는 겁니다.

몸이 가는 곳 마다 소동 곧 사건이 벌어지는 겁니다.

그리스도의 몸이 아니면 사건이 없어요.

사건이 없는 몸은 그리스도의 몸이 아니다는 거죠.

 

그래서 예수님은 제사와 번제를 원치 않고

인애와 자비를 원하신다고 했습니다.

 

찬양은 제사와 번제용이 아니라

예배용이 아니라

 

인애와 자비를 드러내는 사건용이 바로 찬양이다는 겁니다. 곧 계시죠. 묵시죠.

 

에이 노래 부른다고 해서 죽기나 하겠어요!!!

죽었어 나사렛 마을 예수님께서 시편 그대로 오셔서 시편대로 찬양을 했더니만 십자가에 달려 죽고 말았어

 

희한하죠

우리도 같은 몸이라고 우기는데

백날 찬양 불러도 사건 하나 안 일어납니다.

찬양 불렀다고 누구한테 미움 받기는커녕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이렇게 되지

당신은 미움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이 되지 않는 겁니다.

사건이 되지 않더라 말이죠.

소동이 일어나지 않아요

불화가 발생하지 않습니다.

검 곧 칼이 날라다니지 않아요.

 

그런데 예수님이라는 몸은 졸지에 화평은커녕 검을 주러온 몸처럼

사건이 발생하는 겁니다.

그래서 인애와 자비가 발현되는데

이 인애와 자비를 훼방하는 훼방이 예수님 몸에 닿게 되듯 미쳤듯이

우리도 졸지에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이유 하나 때문에

우리 몸에도 닿게 된다는 겁니다.

 

그것도 누구로부터?

역설적이게도 바로 제자와 번제를 드리는자로부터 말이죠.

스데반은 남도 아닌 사도바울에게로부터 닿게 되는 겁니다.

청년 사울이죠.

억울하다고요?

천만의 말씀

사도바울도 당하게 됩니다. 누구로부터? 로마로부터 말이죠.

이게 세상의 전도와 다른 십자가의 전도이다는 겁니다.

 

즉 찬양은 진짜로 인애와 자비 라는 곧 십자가라는 사건용

십자가 용이지

 

인간들 예배용, 사람의 손으로 지은 성전용, 제사와 번제용이 아니다는 겁니다.

그것은 오히려 평생가도 사건 하나 안 터지는 겁니다.

실제로 사건이 터지지 않기를 바래서 예배용으로 제사와 번제용으로 찬양과 기도를 드리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우짠디요

기도 자체가 이미 사건이 발생해서 부르짖는 겁니다.

 

이미 사건 속에 들어왔기에 기도드리는 것이기에

지키기기 아니라

너 자체가 기도이다는 겁니다. 기도의 사람으로 이미 태어난 겁니다.

 

자녀와 사생아의 차이는

자녀는 태어날 때부터 기도의 사람으로 태어났기에

지키기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생아는 놀랍게도 지키기를 해야만 하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아내와 가정부의 차이이듯이

탕자와 맏아들의 차이이다 말이죠.

 

가정부는 백날해도 사랑을 곧 인애와 자비라는 사건을 못누리거든요.

그래서 가인처럼 맏아들처럼 지키기만 하는데

그거 인정 안해주거든요.

그래서 죽여버리는 겁니다.

 

? 백날 지켜도 넘어설수 없는 것이 사랑이거든요.

사랑의 관계를 지키기라는 것으로는 못 넘어서는 겁니다.

이것이 죄의 소원입니다.

 

(4:7, 개역)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4:7, 새번역) 네가 올바른 일을 하였다면, 어찌하여 얼굴빛이 달라지느냐? 네가 올바르지 못한 일을 하였으니, 죄가 너의 문에 도사리고 앉아서, 너를 지배하려고 한다. 너는 그 죄를 잘 다스려야 한다."

 

인간에게 다스려지는 죄란 없습니다. 그러니까 죄의 소원이 덮쳐진 거죠.

그저 살인 외에는 답이 없어요. 때려죽어도 자기는 못 죽이고, 남만 죽이는 겁니다.

 

그러나 사랑의 소원이 덮쳐지면

그저 용서 밖에 없습니다.

허다한 허물을 다 덮는 겁니다.

바로 십자가 사건이라는 피용서 말입니다.

 

(10:12, 개역)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우느니라

(10:12, 새번역) 미움은 다툼을 일으키지만, 사랑은 모든 허물을 덮어 준다.

 

(벧전 4:8, 개역)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벧전 4:8, 새번역) 무엇보다도 먼저 서로 뜨겁게 사랑하십시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어 줍니다.

 

그런데 놀라운 점은 우리는 미움과 다툼이라는 구분 구별 없이 사랑에 이를려고 한다는 점에서

예수님은 정반대로 소동과 사건을 통해서 율법의 완성인 사랑을 이루신다는 겁니다.

 

즉 제사와 번제만으로 사랑에 이를려고 하는 것이 사람의 제사요.

예수님은 정반대로 십자가 사건 곧 소동으로 인애와 자비를 이미 이룬 것을 누리도록 하신다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인간들은 안식일을 지킴으로써 사랑에 이를려고 하니까

오히려 사랑은커녕 살인이 벌어지는 겁니다. 미움이 벌어지는 겁니다. 다툼이라는 결과를 최종적으로 만나는 겁니다. 죽음에 귀결되더라 말이죠.

 

이것이 율법 아래에 갇힌바 된 죄 아래 있는 자들입니다.

시편을 부르면 부를수록 살인만 더 해가는 겁니다.

 

나는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하나님 감사합니다 라는 식이다는 거죠

 

그러나 예수님은 오히려 안식일날 일부러 안식일을 어겨서

안식의 본래 취지인 인애와 자비를 말씀하시는데 있어서

더 나은 제사를 드렸다고 시기와 질투를 받아 죽임을 당하는 겁니다.

자 이렇게 인간의 본색, 마귀의 정체를 들추어낸 뒤에

사망권세를 이기시고 저들의 무기인 살인 조차도 무용지물로 만들어서

다시 3일 만에 살아나셔서 제사와 번제가 틀렸고 인애와 자비가 옳았다를 선언하시는 겁니다.

십자가가 나 보다 옳았군요 라고 말이죠.

그 자백을 자발적으로 받아내시는 겁니다.

이것이 원수를 사랑하는 그 말씀을 이루시는 바 되는 겁니다.

 

인간은 이것을 사모하지 않습니다.

그저 자기가 지키는 말씀

그것도 지킬수 있는 것만 지키고

지킬수 없는 것은 절대로 못 지키는

골라서 믿을만한 것만 믿는 식이고 지키는 식이다는 겁니다.

 

이것은 곧 약대는 삼키고 거지는 뱉어버리는

자기유익을 쫏는 것을 오히려 성경말씀 지키기로 행하고 있다는 겁니다.

 

(23:24, 개역) 소경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키는도다

 

이런 것은 세상사람들도 다 할줄 아는 것이지

종교꾼들 본인들만 제대로 지킨다고 착각하고 있는 겁니다.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말이죠.

 

 

자 이렇게 서두를 깔아놓는 이유는

 

(93:2, 개역) 주의 보좌는 예로부터 견고히 섰으며 주는 영원부터 계셨나이다

(93:3, 개역) 여호와여 큰 물이 소리를 높였고 큰 물이 그 소리를 높였고 큰 물이 그 물결을 높이나이다

(93:4, 개역) 높이 계신 여호와의 능력은 많은 물 소리와 바다의 큰 파도보다 위대하시니이다

 

 

보좌 와 큰 파도를 말하기 위함입니다.

 

보좌라는 의미는 시편 99편에서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99:1, 개역) 여호와께서 통치하시니 만민이 떨 것이요 여호와께서 그룹 사이에 좌정하시니 땅이 요동할 것이로다

 

(2:20, 개역) 오직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시니 온 천하는 그 앞에서 잠잠할지니라

 

보좌에 주님이 앉아있다. 좌정해 있다 하면

그 증거로 보좌에 앉아있다는 증거로 땅을 흔들어 요동시키는 겁니다.

 

즉 큰 파도를 일으킨다는 거죠. 하나님의 진노를 일으킨다는 겁니다.

 

소동 요동이 일어난다는 말입니다.

계시록에서는 그야말로 대혼란이지요.

그런데 그것이 기쁜 이유가 바로 아 주님이 보좌에 앉은 증거이구나 라는 겁니다.

 

이것이 시편을 달달 외우기만 하고 제사와 번제로 지키기만 했던 베드로에게

시편이 그냥 노래 찬양이 아니라

사건으로 실제적으로 덮치니까

큰 풍랑 파도 바다를 일으키고 높이시니까
(구약으로 치면 출애굽 홍해사건이요 죽음을 일으키듯이 파도를 높이 일으키시니까)

 

오히려 그 속에서 그 죽음 속에서 길이 있더라 말이죠.

말도 안되는 것을 실제적으로 출애굽때의 이스라엘은 누렸습니다.

 

그것을 다시 신약에서 베드로에게 실현시키시는 겁니다.

큰 파도를 일으켜 저들이 죽게 될 정도로 흔들어버리는 겁니다.

아이고 선생님 우리 다 죽게 되었어요.

이런 와중에 잠이나 자고 있을 팔자가 못 됩니다 라고 깨우잖아요.

즉 주님이 보좌에 앉은 그 증거가 바로 땅을 요동하듯이

바다를 높이더라 말이죠.

 

바다를 높이면

죽음을 높이면

큰 파도와 풍랑을 높이면 무엇이 돋아나게 되냐하면

지난 시간에 이 땅에 의지할 것 기댈것이 생기면 소망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절망속으로 집어넣음으로써 소망이 돋아난다고 했듯이

죽음을 높여버리면 무엇이 돋아나느냐 하면

바로 주의 보좌가 일어난다 말이죠.

아 이 큰 파도와 풍랑의 출처가 돋아나는 겁니다.

저 주의 보좌에서 발생하는 것이 바로 큰 파도이구나 큰 풍라이구나

대 환란이구나 하나님의 심판이 주의 보좌에서 발생하여 나타나는 구나

 

출처를 보여준다 말이죠.

 

그 출처인 주의 보좌는

지지난 시간에 장막(성전) 이야기 했듯이

 

요셉 장막 너 아니야

에브라힘 지파 너도 아니야

 

(78:67, 개역) 또 요셉의 장막을 싫어 버리시며 에브라임 지파를 택하지 아니하시고

 

뭐뭐뭐 아니요 라는 식으로 자꾸 탈락 누락을 펼치심으로써

출처는 저기이다 라는 방향성을 제시하는 겁니다. 벡터

 

그럼 그들의 역할은 그저 탁란하기 위한 보충물 역할이다는 거죠.

 

(78:68, 개역) 오직 유다 지파와 그 사랑하시는 시온 산을 택하시고

(78:69, 개역) 그 성소를 산의 높음 같이, 영원히 두신 땅 같이 지으셨으며

(78:70, 개역) 또 그 종 다윗을 택하시되 양의 우리에서 취하시며

(78:71, 개역) 젖 양을 지키는 중에서 저희를 이끄사 그 백성인 야곱, 그 기업인 이스라엘을 기르게 하셨더니

(78:72, 개역) 이에 저가 그 마음의 성실함으로 기르고 그 손의 공교함으로 지도하였도다

 

그래서 오로지 유다지파만 된다고 했죠

그런데 다시 그 유다 속에서도 소립자 세계로 들어가듯이

계속해서 무한반복으로 분절이 계속 되는 겁니다.

출처를 향해서 끊임없이 말이죠.

다시 유다 속에서 다윗에게만 해당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다윗도 탈락이지요.

예수님의 족보에서 다윗은 탈락이고 오히려 우리야 장군 계통으로 오시는겁니다.

사실상 그 어떤 인간도 해당 안된다는 의미이다는 거죠.

 

그런데 그러면서 동시에

이들이 오히려 예수님에게 정작 접붙임 당하는 식이 이런식으로 접붙임당한다는 겁니다.

 

그들 계통으로 예수님이 온다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계통 즉 족보에서 이들이 낫다는 겁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말이죠. 15

 

그러니 육의 시선으로 볼때는 오히려 가장 더러운 잡족의 족보처럼 보여야만 하는 겁니다.

저 더러운 세리와 같지 않음을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라고

휴 다행이다 ~~~~ 라는 감탄을 저들이 진짜 진짜로 할 수밖에 없도록

휴 나는 예수 안 믿은게 참 다행이다 (이적) ~~~~~~

라고 감탄의 감탄을 나타내도록 하는 십자가 이어야 진짜 십자가 아니냐 말이죠.

 

저들이 누구입니까? 딴 성경은 몰라도 시편은 다 알고 외우고 지켰다고 자부하는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저 시편도 모르고 지키지고 외우지도 알려고도 하지 않는 저 사람들로부터 구원하셔서 찬양케 하심을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저들 아닙니까?

 

아무튼 오로지

 

(122:5, 개역) 거기 판단의 보좌를 두셨으니 곧 다윗 집의 보좌로다

(122:5, 새번역) 거기에 다스리는 보좌가 놓여 있으니, 다윗 가문의 보좌로구나.

 

유다지파의 다윗에게만 자신의 보좌로 삼았는데

임금의 의자 아닙니까

그 다윗이 마귀를 물리쳐서 보좌가 된 겁니까? 즉 하나님의 집이 된 겁니까?

아니면 물리치기는커녕 마귀에게 도로 잡혀 와서 입니까?

물론 잡혀왔다는 조건이 의자가 되는게 아니라

누구로부터 용서받는 원수를 사랑하는 그 분을 돋보이게 그분의 자작극에 말려들어서

심지어 덩달아 사망의 권세까지 이기시는 원수를 사랑하시는 분을 돋보이게 하는

역할이 저절로 되어버린 겁니까?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데

저절로 원인 없는 결과가 덮쳐버린 겁니까?

 

자 그렇기 때문에 베드로 도 마찬가지

누가 양을 먹이고 누가 양을 치고 누가 양을 가르치는 겁니까?

 

(78:70, 개역) 또 그 종 다윗을 택하시되 양의 우리에서 취하시며

(78:71, 개역) 젖 양을 지키는 중에서 저희를 이끄사 그 백성인 야곱, 그 기업인 이스라엘을 기르게 하셨더니

(78:72, 개역) 이에 저가 그 마음의 성실함으로 기르고 그 손의 공교함으로 지도하였도다

 

(21:15, 개역)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21:16, 개역) 또 두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양을 치라 하시고

(21:17, 개역) 세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

 

 

바로 원수이면서 동시에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라고 대답하는 자 아닙니까?

 

구원자는 죄인만을 자기보좌로 삼는 겁니다.

죄인이라는 의자가 대단해서가 아니라

구원자가 대단해서 말이죠.

구원자 자신을 돋보이도록 하기 위해서

아무것도 아닌 하루살이를 의자로 보좌로 삼은 겁니다.

약대를 삼키는 바리새인처럼 약대라는 BMW를 자기 보좌로 삼지 않았다는 겁니다.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다 말이죠.

원수를 용서하심으로 죄인을 보좌로 삼아야

십자가라는 피 용서만이 드러나는 겁니다.

 

즉 많이 탕감받은자가 많이 사랑하거든요.

 

그래서 양을 먹이라 치라 먹이라 해놓고서는

정작 사도바울에게 야단만 맞지요 ㅋㅋㅋㅋ

 

남 가르치라 라는 목사의 직분을 준다는게 아닙니다.

너가 받은 용서를 어떻게 받았는지

많이 탕감받은 바를 그 피용서의 출처가 이 분입니다를 알려주라는 겁니다.

선생자격 준다는 말이 아니지요.

 

십자가라는 피용서가 베드로를 쪼개고 쪼개는 겁니다.

사건이 베드로를 이리로 저리로 데리고 가서 쪼개는 겁니다.

나 이렇게 바울에게 야단맞은 사건 모르지? 알려줄게 라고 말이죠.

진짜 선생은 예수님 뿐이고 우리는 교실 안의 스피커? 칠판? 때로는 분필

때로는 손편지 때로는 매 몽둥이가 되는 겁니다. 기타등등

 

베드로를 분절 시키는 겁니다. 쪼개버리는 거죠. 나중에 사도바울도 쪼개고

그래서 우리에게 까지 왔고 우리도 쪼갬으로써

점점점 출처를 향해서

본향을 향해서 가는 겁니다. 푯대를 향하여 말이죠.

바로 예수님 그 자체를 향해서 말입니다.

 

베드로가 나를 대신해서 내 죄를 담당하고자 십자가에 진 것이 아니니깐요.

 

그래서 그 죄인이라는 베드로 다윗을 보좌로

죄인 중의 괴수인 사도바울 보좌로 삼으니까

그 보좌에 제대로 앉은 증거로써

땅이 요동하는 겁니다.

 

안됩니다 안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잖아요

그런 자를 보좌로 삼으면 안됩니다.

 

바울은 스데반집사를 죽였잖아요.

 

다윗은 절대로 안됩니다.

 

밧세바를 겁탈했구요

거룩한 여호와의 전쟁만을 생각했던 우리야 장군을 철저하게 계획적으로 죽였고요

그래서 낳은 자식을 살리지도 못했습니다.

절대로 다윗을 예수님의 보좌로 삼으시면 안됩니다.

 

탕자를

죄인 중의 괴수를

주의 성전으로 삼으시면 안됩니다.

 

땅이 발악을 합니다.

통촉하여 주옵소서

바다가 반발을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보좌에 제대로 앉아 계심이다는 증거입니다.

 

예수님이 자기자신을 나타내시기 위해서

보좌에 제대로 앉아 계심을 나타내기 위해서

예수님 자신의 보좌로 삼은 이 제자들에게

큰 파도를 일으키는 겁니다.

죽일 듯이 맹렬하게 파도를 일으켜

딱 봐도 어부의 감각으로 아 이건 사람이 살아날수가 없는 풍랑이구나 라고

누가 봐도 도저히 살아날수가 없는 불가능함이 덮쳤는데

이 불가능보다 더 심한 불가능이

이런 와 중에 참으로 태평스럽게 잘도 자고 있는 예수님이다는 겁니다

 

누가! 예수님 우리도 같이 낮잠 자요 라고

이 풍랑 속에서 외치겠습니까?

 

그래서 물 위를 걷고 있는 베드로를 물에 빠뜨려야

풍랑 속에 들어가야

큰 파도 속에 들어가야

죽음 속에 들어가야

더 이상 그 어떤 것도 기댈것이 없도록 죽음 속에 집어넣어야

어제 보던 예수님이 아니다는 겁니다.

 

주여 뉘 시이니까?

 

당신 도대체 뉘 신데

이 풍랑도

이 죽음도 잠잠케 하십니까?

 

비로소 얼굴과 얼굴을 만나는 겁니다.

 

달리 보인다는 거죠.

 

백날 시편을 달달 외워도 사건 안 일어납니다.

실제적으로 벌어지면 우리는 다 양같아서 다 도망칩니다.

그런 놈 잡아서 너가 도리어 이 풍랑보다 더 센 나의 보좌야 라고 백날 알려줘도 소용없습니다.

실제적으로 사건을 터트리는 것 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악한세대가 요구하는 기적이 아닌

요나의 표적 밖에

밖에

빡에

 

빠께 보여줄 것이 없는 예수님이다는 겁니다.

 

죽음이라는 괴물

풍랑이라는 괴물 보다

너가 더 괴물이야

 

이런식으로 전복시켜서, 채널돌리기를 해서

 

자기 피를 자랑할려고

그 피가 묻은 원수에게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교회로 삼았다는 겁니다.

 

즉 이 말은 교회 자체는 음부의 권세 이기기는커녕 택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가 미끼가 되다 보니

내 피 묻은 내 새끼 누가 건드렸어

라고

 

괜히 건드려서 작살나는 겁니다.

오히려 마귀는 안 건드리고는 못배기도록

 

세리와 같고

하루살이와 같고

누가 봐도 건드려도 상관없을 정도로 마귀가 덮썩 물 수밖에 없는 원인과 조건을

 

즉 죄인이요 세리요 죄인 중의 괴수됨을 다 뒤집어 씌워서

 

십자가 사건에 말려들도록 하시는 겁니다.

 

큰 파도를 일으키는 주님을 보라는 겁니다.

너의 출처를 보라는 겁니다.

 

큰 파도가 무섭냐 내가 더 무섭냐?

죽음이 두렵나? 내가 더 두렵냐?

 

아주 당당하게 물으시는 겁니다.

 

누가 너를 사랑하는 자이냐는 겁니다.

누가 너를 위해 목숨까지 아끼지 않았느냐 라고 묻는 겁니다.

 

자 이런데도 너가 나를 사랑하느냐?

 

우리는 죽음 보다 더 위대하고 강한 분을 만나야 합니다.

그래서 죽어도 상관없는

죽음으로 끝나버리는 것이 아닌

죽음 너머의 인물을 만나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귀도 동원하고

큰 파도도 동원하고

큰 풍랑도 죽음도 동원해서

그것보다도 더 위대한 자신을 나타내시는 겁니다.

 

보잘 것 없는 아무것도 아닌 나를 보좌로 삼으신 주

그래서 더 이 땅을 흔들어버리는 겁니다.

요동케 하십니다.

 

십자가라는 사건을 매일 매일 터트리시는 겁니다.

 

이 십자가의 피 용서만을 자랑하고자 말입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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