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휼과 멸시가 한 세트로 등장 (시편 123)



(123:1, 개역)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하늘에 계신 주여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

(123:2, 개역) 종의 눈이 그 상전의 손을 여종의 눈이 그 주모의 손을 바람 같이 우리 눈이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바라며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기를 기다리나이다

(123:3, 개역) 여호와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긍휼히 여기소서 심한 멸시가 우리에게 넘치나이다

(123:4, 개역) 평안한 자의 조소와 교만한 자의 멸시가 우리 심령에 넘치나이다

성전에 올라가면 비로소 실상이 드러납니다.

 

물론 우리 인간의 발걸음으로 올라가는 그런 공간적인 성전이 아니라

예수 안이라는 인물 개념으로써의 성전입니다.

 

그 이전에는 왜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지 몰랐는데

실상을 보게 되니 아 그렇군요 라고 알게 된다 말이죠.

 

이것이 시편 73편에 나옵니다

 

(73:17, 개역)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저희 결국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73:1, 개역) [아삽의 시]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73:2, 개역) 나는 거의 실족할뻔 하였고 내 걸음이 미끄러질뻔 하였으니

(73:3, 개역)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시하였음이로다

(73:4, 개역) 저희는 죽는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건강하며

(73:5, 개역) 타인과 같은 고난이 없고 타인과 같은 재앙도 없나니

(73:6, 개역) 그러므로 교만이 저희 목걸이요 강포가 저희의 입는 옷이며

(73:7, 개역) 살찜으로 저희 눈이 솟아나며 저희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지나며

(73:8, 개역) 저희는 능욕하며 악하게 압제하여 말하며 거만히 말하며

(73:9, 개역) 저희 입은 하늘에 두고 저희 혀는 땅에 두루 다니도다

(73:10, 개역) 그러므로 그 백성이 이리로 돌아와서 잔에 가득한 물을 다 마시며

(73:11, 개역) 말하기를 하나님이 어찌 알랴 지극히 높은 자에게 지식이 있으랴 하도다

(73:12, 개역) 볼지어다 이들은 악인이라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 하도다

(73:13, 개역) 내가 내 마음을 정히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

(73:14, 개역) 나는 종일 재앙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책을 보았도다

(73:15, 개역) 내가 만일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이렇게 말하리라 하였더면 주의 아들들의 시대를 대하여 궤휼을 행하였으리이다

(73:16, 개역) 내가 어찌면 이를 알까 하여 생각한즉 내게 심히 곤란하더니

(73:17, 개역)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저희 결국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73:18, 개역) 주께서 참으로 저희를 미끄러운 곳에 두시며 파멸에 던지시니

(73:19, 개역) 저희가 어찌 그리 졸지에 황폐되었는가 놀람으로 전멸하였나이다

(73:20, 개역) 주여 사람이 깬 후에는 꿈을 무시함 같이 주께서 깨신 후에 저희 형상을 멸시하시리이다

(73:21, 개역) 내 마음이 산란하며 내 심장이 찔렸나이다

(73:22, 개역) 내가 이같이 우매 무지하니 주의 앞에 짐승이오나

(73:23, 개역) 내가 항상 주와 함께하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

(73:24, 개역)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

(73:25, 개역)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나의 사모할 자 없나이다

(73:26, 개역) 내 육체와 마음은 쇠잔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

(73:27, 개역) 대저 주를 멀리하는 자는 망하리니 음녀 같이 주를 떠난 자를 주께서 다 멸하셨나이다

(73:28, 개역)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사를 전파하리이다

 

다윗의 집의 보좌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왜 이렇게 악이 형통하는지를 몰랐는데

다윗의 자손이라는 보좌 곧 피난처가 등장함으로써

그 성전에 올라감으로써 비로소 이제는 알게 되었다는 겁니다.

 

오늘 시편 123편을 긍휼과 멸시라는 제목으로 잡았는데

역시나 시편 73편도 긍휼과 멸시가 한 세트로 등장합니다.

 

먼저 긍휼과 멸시 라고 했을때에

긍휼을 받는 자와 멸시를 받는자로 구분함에 있어서

먼저 전제를 깔아야 하는 것이 뭔고 하니

긍휼 받는 자가 옳았거나 선하거나 제대로 된 바른 자가 아니다는 것을 먼저 전제를 해야 합니다.

 

앞의 글 시편 113편에서도 언급했듯이

의사 되신 예수님을 위한 환자됨이지

환자 자체가 되는 것이 중요한게 아닙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위하여 죄인이 될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자의적인 죄인은 엉터리이기에

주님이 의도적으로 만드시는 그런 죄인 됨은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하겠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위해서 죄인이 기꺼이 되는 것에

억지가 아닌 너무 너무 기쁜 나머지

주님의 긍휼의 대상이 되었다는 사실에 사단의 가시 조차도 은혜로 여길정도로 넘치는 사랑에

몸둘바를 몰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 그런 입장에서 죄인됨 곧 긍휼의 대상이 됨은 또는 멸시의 대상이 됨은

결국 긍휼 받은 자와 멸시 받는 자는

인간의 시선에서는 그 어떤 차이나 구분이 없는 겁니다.

인간은 파악할 수가 없기에 모른다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최순실과 한국에서 가장 위대한 영웅이 누굽니까 아 이순신장군으로 하죠

이 최순실과 이순신과의 차이점이 인간의 시선에서는 없다 라는 겁니다.

구별성이 없다는 거죠.

왜냐 둘 다 죽는다는 입장에 볼 때 둘 다 죄인이다는 겁니다.

거룩이 없습니다. 죽기 떄문에 즉 더럽다는 겁니다.

아마 종교성이 강한 청소년들에게 이순신을 영웅이 아닌 일반인으로 취급하면 덤벼들겠지만 말이죠.

아이들이나 청소년들에게는 슈퍼맨 스파이더맨 아이언 맨 욕하면 막 덤비도록 되어 있습니다.

 

지금 한국인 대다수의 어른들은 최순실에 대해서 청소아줌마처럼 염병하네 라고 다 욕합니다.

? 정의롭지 못해서? 선하지 못해서? 나쁜 사람이라서? 우주가 도와주지 않는 사람이라서?

아닙니다.

그건 다 핑계이고요

 

염병하네 라고 욕하는 이유는

이유 없이 무조건 나 보다 잘남을 누려서입니다.

그것 외에는 없습니다.

 

껍데기를 까 보니 나 보다 나쁜 놈인데 그 동안 상대적인 나는 적어도 염병한 자 보다 조금이라도 바르게 살려고 하는데 나쁜놈인 나보다 훨씬 부요함을 누린 것에 대한 분노인 겁니다.

 

뭐 악하고 나쁘고 악독하고 지독하고 도둑년이고 여러사람 죽이고 남의 손자들 다 괴롭히고

세월호 다 빠져 죽게하고 그래서 욕하는게 아니다 말이죠.

이건 다 핑계이고요

 

하여튼 나보다 잘 되는 꼴이 싫어서 염병하네 라고 청소아줌마처럼 다들 욕하는 겁니다.

 

그러니 오늘 본문에서 긍휼을 여김받는 자가 잘 나서 정의로와서 선해서 긍휼받는게 아니라

멸시 받는 자와 전혀 다를바 없는

그 어떤 차이점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긍휼을 받는다는 점에서

원인 없는 결과이고

 

여기에 동시에 멸시받는 자 또한 한 세트로 등장함에 있어서

 

이 사람이 나쁜사람이고 악독하고 해서 멸시받는게 아니라

그럴 것 같으면 시편 73편 같은 외침은 없어야지요

오히려 좋은 사람 착한 사람 이웃을 위해 한 평생 바치는 사람

가난한 자를 위한 고아의 아버지, 과부의 남편, 난민의 구원자 일찌라도

멸시 받는 자 곧 지옥 갈자이라는 점에서

이유 없이 원인 없는 결과이다는 겁니다.

 

맞습니다. 눈치 채셨지요

에서는 미워하고 야곱은 사랑했다 라는 겁니다.

 

 

(1:2, 개역)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1:3, 개역)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그의 산들을 황무케 하였고 그의 산업을 광야의 시랑에게 붙였느니라

 

(9:13, 개역)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9:11, 개역)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9:12, 개역)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9:13, 개역)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9:14, 개역)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9:15, 개역)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9:16, 개역)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에서가 나쁜놈이던가요? 오히려 야곱이 사기꾼이지요.

에서는 멸시하고 야곱은 긍휼히 여겼다 라는 것이 한 세트를 구성하는 것이

복음 곧 약속이요 언약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가 아무리 수준 높은 시선을 가진다고 해도

그 어떤 이유로도 왜 저 사람이 긍휼 받은 자인지

왜 이 사람이 멸시를 받는 자인지를 알길이 없습니다.

 

나 멸시 받는 자 될래

나 긍휼히 여김을 받는 자 될래

둘다 아무리 달음박질 해 보세요 되나?

원인 없는 결과입니다.

 

그 당시 최고의 수준의 성화된 사람들도 예수님을 멸시해 버렸다 말이죠.

예수님도 멸시 받는 이 세상에서

우릿꺼 까지야 천번 만번 멸시 받는 것은 지극히 당연합니다.

예수님을 죽인 세상이니까 말이죠.

 

예수님을 위해서 죄인 취급 당하고 마귀 취급 당해 죽는다고 아쉬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마귀로 몰아서 십자가에 못 박은 세상이니까 말이죠.

 

자 그런 입장에서 긍휼이란 그야 말로 말도 안되는 것입니다.

긍휼 받는다는 것은

그야말로 베드로의 고백처럼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당신 같은 거룩한 분이 감히 저 같은 더러운 인간과 함께 하시면 안됩니다 라는 겁니다.

 

이 정도의 고백이 나올정도로 거룩함인데 곧 거룩 그 자체이신 분인데
그냥 거룩이 아니라

숭고함이다는 겁니다.

숭고함이란 거룩은 거룩인데 불편하기 짝이 없는 거룩입니다.

쉽게 말해서 이사야가 하나님의 영광을 봐 버렸는데

천사들도 여섯 날개를 가려야 할 판국으로 타죽어 마땅하기 짝이 없는 영광의 거룩이니

 

화로다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구나를 외칠 수밖에 없고

긍휼히 여겨 달라고

제발 살려 달라고

잘못할 것이 없다손 치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영광의 거룩 앞에서 무조건 잘못했습니다

타죽어야만 하는

뭘 해도 잘 못했습니다 라고 외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숭고하기 짝이 없는 불편한 거룩이다는 겁니다.

 

24장로가 자기 쪽으로 끌어 당길수 없는 면류관이라서
도로 반납할 정도로 그 정도로 너무 너무 영광 스럽다는 겁니다.

아니 수건을 벗지 않는 모세가

하물며 사라질 영광도 너무나도 영광스러워서 안 벗을려고 하듯이

그것 보다 더 나은 사라지지 않는 영광은 안벗고파서가 아니라

도리어 벗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

벗으면 굴욕 당할 것 뻔히 알면서도

그것 보다 더 초과잉적인 영광이기에 차라리 굴욕이 더 나을 정도로

 

화로다 화로다 나여 내가 이스라엘 중에 거하면서 주의 영광을 봐 버렸넹

마 차라리 죽는게 더 나은 영광일지 모르겠구나 마

할정도로 숭고한 영광인데

 

(6:1, 개역) 웃시야 왕의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6:2, 개역) 스랍들은 모셔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그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그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6:3, 개역) 서로 창화하여 가로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6:4, 개역) 이같이 창화하는 자의 소리로 인하여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집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6:5, 개역)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6:6, 개역) 때에 그 스랍의 하나가 화저로 단에서 취한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6:7, 개역) 그것을 내 입에 대며 가로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6:8, 개역)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 때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6:9, 개역)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6:10, 개역)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오늘날 성화론자들의 거룩 꼬라지를 보면

숭고하지도 못해요

불편한 거룩이 아니다는 겁니다.

(12:20, 공동) 그러니 "원수가 배고파하면 먹을 것을 주고 목말라하면 마실 것을 주십시오. 그렇게 하면 그의 머리에 숯불을 쌓아놓는 셈이 될 것입니다." / 잠언 25:21-22.

(12:20, 한글킹) 그러므로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만일 그가 목마르거든 마실 것을 주라. 이렇게 함으로써 네가 그의 머리에 숯불을 쌓을 것이라.

(25:22, 현대인) 그러면 네 원수는 머리에 숯불을 놓은 것같이 부끄러워 견딜 수 없을 것이며 너는 여호와께 상을 받을 것이다.

(12:20, 현대인) `네 원수가 굶주리거든 먹을 것을 주고 목말라하거든 마실 것을 주어라. 그러면 네 원수는 머리에 숯불을 놓은 것같이 부끄러워 견딜 수 없을 것이다.' 라는 말씀도 있습니다.

 

머리에 숯불을 얹져 놓은 것처럼 부끄 부끄 럽게 하지 못하고
(왜냐하면 엉터리 이웃 엉터리 원수를 설정해서 이웃사랑 원수 사랑을 실천해 기념비가 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도리어 되도 않는 배설물을 머리에 얹져서 (완악한 수건을 벗지 못하고)

마치 치매걸린 환자처럼 자기들 똥을 남들에게까지 바를려고 하니

일만달란트 탕감 받고도 자기 돈 띠 먹은 자 정죄를 하는 모습을 친구들이 보고 민망해 한 것처럼

그 정도의 일만달란트 라는 숭고한 용서의 거룩도 못 누리면서

자꾸 성화를 주장하고 자랑하더라 말이죠.

남을 78번 용서 하겠다는 심뽀인 완악함을 추구하더라 말입니다.

교회다니는 사람들을 보면 그래서 싫어요

똥내가 너무 나요

! 교회 다니는 자들이 아니라 강도의 소굴에 다니는 자들 말이죠.

 

아 똥내 ~~~ 똥냄새 코를 막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말이죠.

 

자기 하나 거룩하면 된다는 이기적인 인간들이다는 거죠.

이웃설정을 자기 편한대로 하고 이웃사랑실천했다고 우기는 정신병자들이다 말이죠.

 

아무튼 긍휼을 받은자가 오늘날 저런 교회에서 주장하는 그런 자들이 긍휼받은자가 아니라

전혀 인간의 시선에서 나올수 없는 뜻밖의 사람이 긍휼의 대상자로써 등장할때에

동시에 인간의 시선에서 전혀 나올수 없는 뜻밖의 사람이 멸시의 대상자로써 함께 등장함으로써

한 세트를 이룬다는 겁니다.

 

앞의 글에서도 언급했듯이

긍휼이 누구에게 나타나는고 하니

복음이 사렙다 여인 과부 한 과부에게만

문둥병자 나아만 장군 한 문둥병자에게만 나타나는 겁니다.

 

왜 이렇게 인간의 판단 시선을 피하는 식이냐 하면

인간에게는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율법의 완성인 사랑이 없다는 말은

죽고자 함이 아니라 살고자 함이기에

죽음 같은 사랑은 애초부터 없습니다.

 

즉 이 말은 창세전에 생명책에 기록된 것에 애초부터 관심 없다는 뜻이고

그 말은 곧 자기 자신 밖에 관심 없는 겁니다.

이것을 순순히 인정하자 말이죠.

날 때부터 악한데 무슨 선이 있다고

어둠은 빛을 이길수 없다고 구라를 치냐 말이죠.

아무리 이순신이 죽고자 하면 살것이고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다 라고 외쳐도

자기 자신 밖에 모르는 이순신 이다는 겁니다.

예수님을 위해서 의인이 될게 아니라 죄인이 되어야 했어야 한다 말이죠.

 

창세전에 생명책에 기록된 유일한 것은 바로 십자가의 피 용서의 복음 뿐이기에 그런 겁니다.

 

이것을 기준으로 세상을 심판하는 겁니다.

세상을 제대로 심판하지 못하는 것을 가지고서

판단하는 것은 엉터리 기준으로 정죄하는 겁니다.

 

심판의 대상이 도리어 심판자를 심판하고 있어요 글쎄 ~~~

 

그래서 이 멸시가 한 세트로 등장함에 있어서

최순실처럼 재산을 불법으로 쌓아서 멸시받는게 아니라

창세전의 생명책에 기록된 십자가의 피 용서의 복음에 대한 적개심을 가지기 때문에

멸시하는 기준에 걸려 넘어지는 겁니다.

 

민주주의적인 특검이 아니라서 억울하게 멸시받는게 아니라 말이죠.

 

결국 긍휼과 멸시는 둘 다 말도 안되는 것이어야 합니다.

탕자 보세요

탕자가 긍휼 받았다고 성경에 문자적으로 쓰여져서 안그런척 하지만

실제로 교회 다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긍휼에 반발하는 모습을

한 두 번 본게 아닙니다.

탕자를 거부하는 교회들이니

강도의 소굴 맞지요.

맏아들로만 가득찬 교회이니 말이죠.

아버지 말씀을 단 한번도 어긴적 없는 맏아들 교회

 

그래서 솔직하게 나온 교리가 있잖아요

부끄러운 구원이라고

그 부끄러운 구원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등장한 것이

이것이 성화론 아닙니까

그냥 성화론이라고 하지 말고 인도교 라고 하면 될 것을

기여이 기독교라는 이름으로 기생할려고 하니

계시록에 나오는 유대인의 모임과 같은 사단의 회이다는 겁니다.

 

그러나 이들도 반드시 나와 주어야

탕자교회와 한 세트가 되는 겁니다.

 

계시록 일곱 교회를 살펴보면서

반드시 탕자교회와 맏아들교회

곧 야곱교회와 에서교회가 한 세트를 이루듯이 말이죠.

 

탕자만 말도 안되는게 아닙니다.

다윗이 우리야 장군을 고의적으로 죽이고도 다윗의 자손으로 예수님이 오지 않습니까?

이게 말이 되냐 말이죠.

얼마나 숭고한 곧 불편한 거룩입니까?

나 예수로 인하여 실족치 않는 자는 복이 있도다 말이죠.

 

이뿐이겠습니까?

맏아들 보세요

아버지 말씀을 단 한번도 어긴적이 없는 맏아들인데

멸시받는 자로써 등장합니다.

지옥 갈 자 말이죠.

 

즉 이 두 사람 탕자 맏아들이 중요한게 아닙니다

미워하기로 작정된 형 에서

사랑하기로 작정된 동생 야곱이 중요한게 아닙니다.

이 둘을 가르는 기준은 천국 곧 예수님 나라가 중요해서 이다는 겁니다.

만만하게 보지 말라는 겁니다.

 

뭐 교회 열심히 다니고 충성 봉사하고 말씀 지키고

나쁜짖 안하고 그렇게 성화된 삶을 살면 천국 갈수 있다굽쇼

얼마나 천국을 얍잡아 봤으면 그러겠냐 말이죠.

그런 사고방식은 모든 종교에서 다 있지요.

 

천국은 그렇게 쉬운 곳이 아니다는 겁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겁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자들이 대부분이라서

그런 놈들을 지옥 보낼려고 말이죠.

 

혼인잔치 비유가 그래서 숭고한 천국 비유인 겁니다.

두 패로 가르지 않으면 가짜 천국입니다.

성전에 올라가게 되니까 실상이 벌어지는 겁니다.

 

천국만 세워지는게 아니지요.

그 천국을 거부하는 지옥도 동시에 세워지고 완성 되는 겁니다.

이것이 사랑이 완성된 에로스가 완성됨으로써

그 사랑을 거부하는 멸시받아야 할 자들이 가야만 하는 지옥의 완성입니다.

 

그것 때문에

정작 이 땅에서는 거꾸로 긍휼을 받아야 할 자들이

이유 없이 이 땅에서는 예수님처럼 멸시 받도록 되어 있습니다.

 

멸시를 받는 예수님과 그의 자녀들이 긍휼 속에 곧 약속 속에 들어가는 겁니다.

 

 

참 웃끼는 영화 하나 봤는데요

코메디 장르도 아닌데도 말이죠.

SF공상 과학 영화인 닥터 스트레인지 라는 현대 히어로 영웅 물인데

일종의 슈퍼맨과 같은 영웅영화인데

 

항상 악당이 등장함에 있어서 이 악당들이 얼마나 멍청한지

시간의 마술에 걸려서 그만 무릎 꿇는 악당 곧 지옥 대왕을 보고

저게 무슨 놈의 악당이냐 라고 동네 양아치 보다 못하다고 비웃었다 말이죠.

 

그런점에서 인간을 구원하겠다고 나서는 그런 구원자로부터 구원을 구원해야할 판국인

그 구원자 영웅들이 사실상 마귀들이지요. 바리새인들 사단의 회 어벤져스 말이죠.

 

무슨 놈의 마귀가 공간과 시간에 걸려 넘어지냐 말이죠.

또 무슨 놈의 영웅들이 시 공간을 사수할려고 그렇게 발악이냐 말이죠.

소위 역사(시공간 곧 인간의 몸)를 차지, 보호, 사수하기 위한 땅 따먹기 게임이다는 겁니다.

 

누가 인간의 몸(정신과 신체)을 장악할 것인가?

누가 인간을 지키고 보호하고 구원할 것인가?

 

거기에 인간은 나의 정신과 신체를 장악해 주세요 나의 주인이 되어주세요 라고

외치는 앵벌이들 뿐이고요.

 

여기에 그 어떤 인간도 벗어날수가 없기 때문에

저런 공상과학영화를 통해서 구원자를 바라고 심지어 구원자가 되는

영웅 히어로를 꿈꾸는 겁니다.

그 정도로 갇혀 있다는 증거이다는 거죠.

 

멸시를 받고 있다는 증거이고

죽기를 무서워 사망이 왕노릇하는 것에 대한

종노릇하고 있다는 증거가

저런 꿈을 꾸는 겁니다.

(2:9, 개역)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간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을 인하여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2:10, 개역) 만물이 인하고 만물이 말미암은 자에게는 많은 아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저희 구원의 주를 고난으로 말미암아 온전케 하심이 합당하도다

(2:11, 개역)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2:12, 개역) 이르시되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내가 주를 교회 중에서 찬송하리라 하셨으며

(2:13, 개역) 또 다시 내가 그를 의지하리라 하시고 또 다시 볼지어다 나와 및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녀라 하셨으니

(2:14, 개역)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2:15, 개역)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

(2:16, 개역) 이는 실로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2:17, 개역) 그러므로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하려 하심이라

(2:18, 개역)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된 천사도 흠모하는 자의 모습인 긍휼을 바라보는게 아니라

멸시받는자인 어벤져스 영웅 히어로를 부러워 하는 겁니다.

 

왜냐? 멸시 받는 자를 부러워 하는 이유는

독자적인 존재가 되고 싶어서 인 겁니다.

아무에게도 간섭 받지 않는 영웅 히어로 슈퍼맨이 되고픈 거죠

 

마침 작년이였던가요? 슈퍼맨과 베트맨 원더우먼 나오는 영화

영화판은 못 보고 감독판이라서 평점이 더 높더라고 하던데

막상 보니 이거 뭐 성경을 그대로 베꼈던군요

모든 헐리우드 영화는 성경컴플렉스이다 보니 원 ㅋㅋㅋ

배트맨은 베드로 이고 수퍼맨은 예수고 고층 빌딩에서 뛰어내리는 장면도 나오고

두 사람의 어머니

마리아 아베 마리아 거친 파도따윈 상관없이 마리아 ~~~

물론 너무 성경 그대로 베끼면 돈 장사 못하게 되니까

두 영웅의 어머니 이름을 마사 곧 나사로 여동생 마리아의 언니 마사(마르다)로 해서

극적인 화해로

심지어 마지막 장면에 마귀와 싸워 죽은 슈퍼맨의 부활을 암시하고
후속작에 나타날 영웅들은 예수의 제자들처럼 슈퍼맨의 제자들로 등장하겠지요.

 

이렇게 인간의 욕망인 꿈속에서 이런 영웅들 독자적인 영웅들이 되고 싶어 하지

꿈에서도 설마 이렇게 되면 안돼 라고 하겠냐 말이죠.

 

어떻게?

앞의 시편 121편에서도 나왔듯이


찬양도 있죠 이런 노래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천지 지으신 여호와 나의 왕이여 영원 무궁히 지키시리로다

 

아니 자기가 영웅처럼 슈퍼맨이 되어버리면

누가 나를 지켜달라고 도움을 요청할 필요가 없이

그냥 자신이 직접 해결해 버리면 된다 말이죠.

 

누가 이런 꿈을 꾸는 자가 어디있냐 말이죠.

그런데 다윗이 이런 노래를 부른다는 것은

성령을 받은 자 만이 이런 노래를 부리고

꿈꾸고 환상으로 나타나는 겁니다.

 

이것이 긍휼히 여기심을 받은 자의 꿈과 환상인 성령을 선물 받은자이고

 

반면에 우리가 죽었다 깨어나도 부러워 미쳐 죽는

멸시 받은 자의 꿈과 환상은 마귀 들린자로써

늘 그 어떤 도움이 필요치 않는 독자적인 존재

신적인 존재 곧 슈퍼맨

오히려 남의 도움이 없이 독자적으로 해결하는 만능맨이 되고파서

우리의 꿈과 환상으로 자꾸 나타나는 겁니다.

결국 멸시받는 증거로써 갇혀 있다는 증거죠.

 

이것이 비로소 성전에 올라갈 때 곧 예수님의 등장으로써

오히려 그 영화 저스트 리그의 시작이 아니라

진짜 복음의 시작이

 

주의 이름 곧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오는가

그 주의 이름으로 인해

긍휼과 멸시로 두 패로 갈라지지

 

배트맨 슈퍼맨 저스트 리그의 시작으로 두 패로 갈라지지 않습니다.

 

천국과 지옥으로 갈라지지 않고

그 자체가 지옥인 겁니다.

 

저들 영웅들은 나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진 적이 없습니다.

 

영웅들은 너의 문제는 너가 직접 해결하라 일 뿐입니다.

그러니 사랑이 아니라 행함인 거죠.

사랑이 아니라 육체의 법일 뿐입니다.

 

영웅 보다 더 뛰어난 천사들이 왜 자시 보다 못한 죄인을 부러워 합니까?

긍휼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함께 능욕을 받음에 부러워 하는 겁니다.

 

영웅들은 이 긍휼히 여김을 받는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는 주의 이름이 필요치 않기에

영웅으로써의 고난 직접 난제를 해결하는데서의 고독을 고난이라고 우겨서

사람들의 인기를 얻어내지만

그래서 나약한 인간들에게 너도 이길수 있다는 힘과 용기를 주겠지만

그런 육체의 잠재적 능력을 응원하겠지만

너는 할수 있다고 박수를 쳐 주지만

 

정작 사랑이 아닌 울리는 꽹과리

의문의 제사를 반복하는

수천년간의 했던 소리 반복하는 모든 종교의 중언부언을 외칠 뿐이다 말이죠.

현대판 현대인의 종교인 겁니다.

과학 공상 과학인 종교인 거다 말이죠.

 

마귀의 세가지 시험

뛰어 내려라 그러면 우주가 나서서 너를 도와줄꺼다

그러니 너는 종교를 믿고 내 말을 들어라 라는 거죠.

 

종교란 결국 신을 믿는게 아니라 그 신도 결국 인간의 손에서 지어진 피조물일 뿐인데

인간 자신의 믿음을 믿는 것이 종교이다는 거죠. 신은 인간의 시다바리로 등장하는 투사물

자신을 투영한 자기가 신이기에

결국 믿을 것은 니 밖에 없다는 거죠.

 

그러니 그런 엉터리에게서 긍휼과 멸시가 어떻게 갈라지겠냐 말이죠.

물에 물탄 듯 언제 그랬냐 라는 듯이 긍휼과 멸시가 그때 그때 달라요가 될테니 말이죠.

 

그렇게 되면 도움을 바랄 필요가 없게 되는 겁니다.

 

바로 그런 의문의 반복인 뭘 해도 다 거짓임을 아는 자만이 도움을 바라고 긍휼을 바라는 겁니다.

십의 이조 이레에 두 번 금식 그렇게 거룩하다고 들이대는 것 조차도

의문의 반복일 뿐인 거짓이기에

그런 것들이 나의 죄를 대신해서 심판 받은 적이 없는 거룩들이기에

진짜 거룩에게 긍휼을 바라는 겁니다.

그것이 성전에 올라갈때에 벌어지는 거죠.

예수 안에서 벌어지는 사건인 십자가입니다.

 

이 십자가에서 긍휼과 멸시가 드러납니다.

 

십자가 상의 두 강도 중에 한 강도는

당신의 나라에 저를 기억해 달라고 도움을 요청합니다.

 

그러나 한 쪽 강도는

너도 죽는 판국이고 나도 죽는 판국인데

무슨 놈의 도움?

죽는 마당에 이상한 소리 오냐 오늘 밤 너와 내가 낙원에 있으리라 그런 소리 하지 말라

도움은 무슨 도움

 

이렇게 갈라지는 것이 바로 성전에 올라갈 때

때가 되신 예수님 처음과 나중되신 예수님으로 인해

곧 참성전이신 예수님으로부터 두 패가 갈라지는 겁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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