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의가 영원히 있고 그 뿔이 영화로이 들리리로다 (시편 112)

 

성령의 은사 라는 풍성한 초과잉의 사랑

 

 

(112:9, 개역) 저가 재물을 흩어 빈궁한 자에게 주었으니 그 의가 영원히 있고 그 뿔이 영화로이 들리리로다

(112:10, 개역) 악인은 이를 보고 한하여 이를 갈면서 소멸하리니 악인의 소욕은 멸망하리로다

 

(고후 9:9, 새번역) 이것은 성경에 기록한 바 "그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뿌려 주셨으니, 그의 의가 영원히 있다" 한 것과 같습니다. / 112:9(칠십인역)

(고후 9:9, 현대어)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 `하나님은 가난한 이들에게 아낌없이 주신다. 그분의 자비는 영원하시다.' (. 70인역 시112:9)

 

(112:1, 개역) 할렐루야,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112:2, 개역) 그 후손이 땅에서 강성함이여 정직자의 후대가 복이 있으리로다

(112:3, 개역) 부요와 재물이 그 집에 있음이여 그 의가 영원히 있으리로다

(112:4, 개역) 정직한 자에게는 흑암 중에 빛이 일어나나니 그는 어질고 자비하고 의로운 자로다

(112:5, 개역) 은혜를 베풀며 꾸이는 자는 잘 되나니 그 일을 공의로 하리로다

(112:6, 개역) 저가 영영히 요동치 아니함이여 의인은 영원히 기념하게 되리로다

(112:7, 개역) 그는 흉한 소식을 두려워 아니함이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그 마음을 굳게 정하였도다

(112:8, 개역) 그 마음이 견고하여 두려워 아니할 것이라 그 대적의 받는 보응을 필경 보리로다

(112:9, 개역) 저가 재물을 흩어 빈궁한 자에게 주었으니 그 의가 영원히 있고 그 뿔이 영화로이 들리리로다

(112:10, 개역) 악인은 이를 보고 한하여 이를 갈면서 소멸하리니 악인의 소욕은 멸망하리로다

 

(112:9, 새번역) 그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넉넉하게 나누어주니, 그의 의로움은 영원히 기억되고, 그는 영광을 받으며 높아질 것이다.

(112:10, 새번역) 악인은 이것을 보고 화가 나서, 이를 갈다가 사라질 것이다. 악인의 욕망은 헛되이 꺾일 것이다. / 또는 '증오의 눈으로 나를 노려 보다가'

 

(112:9, 공동) 그는 너그러워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니, 그 의로운 행실은 영원히 기억되고, 사람들이 그 영광스런 모습을 우러르리라. / 히브리어 본문: "그의 뿔이 영광 속에 크리라."

(112:10, 공동) 이를 보고 악인은 속이 뒤틀려 이를 갈면서 사라져가리라. 악인들의 소원은 물거품이 되리라.

 

 

잔치 중에 가장 큰 잔치 곧 최고의 잔치는 바로 혼인잔치입니다.

이 혼인잔치는 곧 천국잔치라는 것을 성경은 매우 매우 강조를 합니다.

 

예수님이 어떤 임금의 아들을 위해 혼인잔치를 베푸는 그 비유

곧 하나님나라에 대한 비유를 언급하시면서

 

그 어떤 종교에서도 나타나지 않는 원수에 대한 보응으로써 혼인잔치를 언급하신다는 겁니다.

 

즉 아들을 위한 혼인잔치에 아무도 기뻐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 이게 복음입니다.

아무도 기뻐하지 않는 복된 기쁜소식

 

자 그럼 큰일 났습니다.

아무도 기뻐하지 않는 복음 곧 천국을 어떻게? 무슨 수로? 이 잔치를 열겠냐 말이죠.

 

이것은 하나님 본인의 이야기입니다.

아무도 안 기뻐하고

아무도 오지 않는 이 가장 큰 잔치를 어떻게 가장 화려하고 가장 호화스럽고 찬란하게 펼치느냐 하는 점입니다.

 

트럼프의 취임식에 가수 연예인들에게 축하노래를 부탁했는데 아무도 안하겠다고

싫어 싫단말이야 라고 다들 거부해 버리는 겁니다.

 

트럼프가 화가 나야 하는데

체통을 지켜야 하니까

간따나 미움 받는 복음 기쁜소식 아니 대통령이라서

여기 저기서 시위를 하고

한국처럼 촛불시위로 사퇴하세요 ~~~ 라고 부르짖는 판국에

 

축하곡을 최순실송 큰일났네 다 죽었어 라고 부를수도 없고

 

그렇다고 버럭 화를 낼수도 없고

대인배인척 넘어가버리지만

 

진짜 기쁜소식인 복음은 그렇지 않습니다.

 

화를 제대로 내는 겁니다.

여기에 본심이 있는거다 말이죠.

 

화 낸다고 하니까 누가 생각나는고 하니

버럭 고함을 질러서 심장 약한 제가 얼굴이 빨갛게 변하니까

성경에 있는 가인을 빗대어서 안색이 변했다고

정죄를 하면서 버럭 화를 내더라 말이죠.

자기 마누라에게도 고래 고래 고함질러서 얼굴이 빨개졌던데
마누라도 가인으로 몰아 버릴 모양새 였더라 말이죠.

 

그런 식으로 본심이 드러나더라 말이죠.

 

마귀의 특징이 항상 성경을 인용해서 뒤집어 씌우는데

그 정도로 성경을 너무 잘 아니까 그런거다 말이죠.

 

법을 모르면 차라리 나을텐데

법을 너무 잘 아니까

법의 빈틈이 너무 너무 많이 보이니

법이 그만 강자에게는 약한척하고

법이 약자에게는 깡패짖을 하더라 말이죠.
법을 그런 식으로 이용하는 겁니다. 김기춘 처럼 말이죠
.

 

그런데 복음은 그야 말로 기쁜소식으로써 얼마나 나쁜지

복음은 법과 정반대 이다 말이죠.

 

촛불시위를 보세요

법에 대항하겠다고
이에는 이

눈에는 눈

그렇게도 법의 편에서서 찍소리 못하고 아부를 떨던 국민들이

하나 둘 씩 졸지에 수가 늘어나 버리니까

아 이제 법에 대항할 만한 정의의 숫자가 되었다고

그제서야 덤비는 겁니다.

그 동안의 희생당한 자는 눈꼽만치도 안 쳐다 보던 자들이

이제 자기에게 바짝 법의 권력의 칼날이 가까이 오게 되니까
비로소 뭉쳐서

법보다 우위의 숫자가 되니까 말이죠.

그래놓고 법적이다고 법으로 법을 심판하겠다고 하더라 말이죠.

 

그런데 성경은 다릅니다.

법으로 하지 않습니다.

촛불시위의 수많은 숫자로 하지 않습니다.

딸랑 혼자 합니다.

법으로 하지 그럼 뭐로 하냐?

사랑으로 합니다.

 

법은 놀랍게도 덜 폭력적입니다.

제대로 폭력적인 것은 사랑 뿐입니다.

 

사랑은 딸랑 혼자서 원수의 뿌리까지 다 뽑아버립니다.

그 정도의 충분한 사랑이 아니면

정의라고 할수 없다 말이죠.

 

오늘 제목의 부제가 초과잉적 사랑입니다.

사랑이 어느 정도로 초과잉적이냐 하면

마귀가 항상 동원이 되는 입장에서

마귀가 배아파 죽어야 그게 초과잉적이다는 겁니다.
성령의 은사의 특징이 풍성함입니다. 사랑의 풍성함.
얼마나 넘치고 넘쳤으면 마귀가 아무리 정죄를 해도 먹혀 들지 않도록
그제서야 시기를 하고 배 아파 죽을 정도로 차고도 넘치는 겁니다.

그 정도로 초과잉적인데

그 마귀의 상대적인 자가

그 초과잉적인 사랑에 의해서 죽었다가 살아나는 체험을 하도록 되어 있을 정도여야

마귀가 배 아파 죽습니다.

 

그 경우는 딱 한 경우 바로 결혼 혼인 뿐입니다. 사랑이지요.

흔히 기독교를 아가페라고 우기는데

모든 종교가 다 아가페를 주장해서 희생을 강요하다 보니 사기꾼들인줄 모르는 겁니다.

위에서 본심을 말했잖아요

돈에 대해서 수셔버리면 버럭 화를 내더라 말이죠.

결국 모든 종교가 아가페를 주장하는 이유는 돈 때문이다 말이죠.

그러니 기독교를 아가페라고 주장하는 놈들은

돈 때문에 그렇게 주장하는 겁니다.

오늘 돈 문제가 역시나 나오기 때문에 이렇게 언급하는 겁니다.

 

그럼 기독교는 뭐냐? 에로스입니다. 에로스라고 하니까

에로 비디오처럼 음란마귀만을 생각하는데

정반대로 결혼을 말하고 있습니다.

남녀간의 사랑을 말하고 있다 말이죠.

신랑과 신부의 사랑

 

그렇게 사랑이 성사 될려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는

이것이 예수님이 직접 증거하신 하나님 나라 비유의 모든 내용이 바로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는 의미 이다 말이죠.

 

그것이 오늘 본문에

그의 의가 영원히 있고 그의 뿔이 영화롭게 들리리라 라는 표현입니다.

그렇게 될 때

계시록을 우리가 지금 살펴보듯이

사랑의 초과잉성이 나타나는 겁니다.

어떻게?

주의 오른팔에 신부된 교회가 붙잡힌 바 되고

그것으로 끝나는게 아니라

주의 발등상에 원수 마귀가 놓여지는 겁니다.

문제는 그런 신부된 교회가 전혀 예상 못했던 아무도 눈치 못 챘던 비밀로써의 교회 입니다.
탕자였고, 화장빨로 창녀짖을한 다말이였고, 거짓말을 한 기생 라합이였고, 사기꾼 야곱이였고,
성추행 강간범 다윗이였고, 매국노 세리였습니다.
즉 아무도 예상 못했던 자였다는 겁니다.

상대적인 마귀도 마찬가지 입니다.
아버지 말씀을 단 한번도 어긴적 없는 맏아들이였고, 어릴적 부터 율법을 다 지켜온 부자청년이였고,
십의 이조 이레에 두번 금식 토색하지 않는 삶을 하나님께 바친 바리새인이였으니
아무도 저 사람이 마귀인줄 전혀 몰랐다 할 정도로 누가 봐도 가장 믿음 좋은 자가
주의 발등상에 놓인 원수로써 놓여지는 겁니다.

 

이 두 지점 이 두 꼭지점이 명확하게 드러나는데 있어서

이 두 꼭지점을 잇는 그 사이 변에서

그 간극에서

바로 그의 뿔이, 그의 의가 등장한다 말이죠.

 

그러니 인간들이 기껏 부르짖는 빛을 어둠을 이길수 없다

어머 실수

어둠은 빛을 이길수 없다 라는 것을 주장할 뿐이다 말이죠.
의인은 없으며 사람은 날때 부터 악하지 선하지 않다고 하는데
그런 악한 인간이 자기 보다 더 악한 자를 보고
어둠은 빛을 이길수 없다고 노래 부르고 있으니
웃끼고 있는 겁니다.


그들 역시나 국가 라는 짐승을 숭배하기는 마찬가지이거든요.

왜냐하면 국가시스템은 희생을 강요하니까

 

국가에 나를 위해 무얼 해달라고 하지 말고 내가 국가를 위해 할 수 있는 지를 찾으십시요.(And so, my fellow Americans: ask not what your country can do for youask what you can for your country.)”
라는 존 F. 케네디의 취임 연설에서도 나타나듯이

 

그 당시 냉전 시대의 상황에서도 희생 강요

지금까지도 자유무역주의 시대에서도 희생강요

앞으로 미래에도 밑도 끝도 없는 모호하고 의문의 희생강요이다 말이죠.

그들 국가 자체가 청교도 시스템이니까 말입니다.

 

아가페를 강요하니까 말이죠

국가 조차도 종교시스템이다는 겁니다.

 

그러나 초과잉성인 사랑은 그런 흐릿하고 의문의 모호한 짖 안합니다.

 

또렷하고 명료하게 밝히 보여줍니다.

그것이 바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봐라입니다.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은바 되어 봐라입니다.

모든 육체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겁니다.

 

진짜 의 라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겁니다.

이것이 율법 외에 한 의입니다.

외부에서 오는 겁니다.
거룩이라는 의는 법에서 율법에서 오지 않거든요.

 

시편 112편을 신약 고린도 후서 99절에서 언급했습니다.

고린도 후서 9장을 흔히 연보에 대한 헌금 설교로 인용하는데

그거 사기치는 겁니다.

 

고린도후서 9장은 연보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기에

거기서 등장하는 가난한 자에 대한 구제를 언급하는데 있어서

가난이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가난이 아니라

초과잉적 사랑의 대상으로써 동원이 되는 가난한 자 이다는 겁니다.

 

즉 그의 의의 영원히 있음과 그의 뿔의 영화로우심의 대상이 바로 가난한 자이고

곧 신부된 교회죠.

그 상대적인 원수가 이 가난한자에게 베푸는 에로스 사랑 곧 결혼에

반발하는 자로써 동원이 되는 배 아파 죽는 마귀이다는 겁니다.

 

마귀가 시기 하지 않는 신부된 교회가 아니면 그것은 가짜 신부이다는 거죠.

 

그 시기심을 드러내는 혼인잔치가 아니면 가짜 혼인잔치인 가짜 천국이다는 겁니다.

 

그 천국에는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데 이 보좌가 바로 이 에로스 사랑

혼인의 사랑 곧 십자가 사랑을 기준으로 해서

 

거부하고 반발하는 세력에 대한 명료한 심판을 퍼붓는 것이 바로

비거룩을 공격하는 보좌이다는 겁니다.

마침 계시록 4장을 준비하는 가운데 4장의 출발이 보좌이다 말이죠.

앞의 글 시편 122편 하나님의 보좌인 다윗의 집의 보좌에 대해서도 나오지만

이 다윗의 집의 보좌에서만 에로스 사랑 곧 십자가의 사랑이 나오고

이 창조의 근본인 십자가 사랑을 근거로 인해서

천국을 이루심과 동시에 지옥도 완성하신다는 겁니다.

 

율법을 기준으로 천국과 지옥을 완성함이 아니라

율법의 완성인 사랑을 기준으로 해서 말이죠.

인간에게 주어진 율법은 늘 모호하고 의문뿐이라서 희생을 강요한다 말이죠.

 

그래서 시편 112편은 다윗이 왜 이 기준을 통해서 이스라엘 심판을 하는지를 제대로 보여주는 겁니다.

 

마침 어머니께서 이런 질문을 하십니다.

에이 시편만 모세의 출애굽을 강조하는게 아니라

구약 전체가 다 그렇더라 라고

제가 하도 시편에서 다윗이 출애굽하자 라고 강조하더라 라고 하니까

그런 질문을 하시더라 말이죠.

 

어머니 그게 아닙니다. 모세의 출애굽이 아니라 그냥 출애굽이고요

다윗이 강조하는 출애굽은

어머니 생각해 보세요 애굽이 있냐 말이죠.

애굽은 출애굽때 이미 망했어요 그런데 애굽이 있어야

출 나가야 할 것 아닙니까?

애굽이 없는데 어떻게 나갑니까?

 

원수가 없어요.

마귀가 안 보여요

신부된 교회만 은밀하게 숨기심 뿐만 아니라 그래서 예상 못한 구스여인이 모세의 아내였듯이
마귀 또한 숨겨진 원인 없는 결과입니다. 아무도 전혀 예상 못한 자가 마귀였다는 거죠.

 

그런데 마귀의 세가지 시험 이후에 마귀가 등장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마귀만을 상대로 일하시더라 말이죠.

도대체 마귀가 어디 있냐 말이죠. 안 보이는데
안보이는데 어떻게 출마귀 출애굽을 하며
마귀를 조심할수 있겠냐 말이죠.

물론 우리는 바리새인과 유대인이 그렇다고 하겠지요.
이미 답을 봐 버린 상태이지만
그 당시의 예수님의 경고를 듣는 사람은 도리어 누가 마귀로 보이겠냐 말이죠.

어떻게 유대인 속에서 어떻게 일일이 가려낼수 있는 안목이 있겠냐 말이죠.

 

더 놀라운 점은 다윗이 왕입니다. 그냥 왕이 아니라 이스라엘 왕입니다.

그런데 출애굽을 자꾸 주장해요

나갈 때 나가더라도 누울자리 보고 나가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무조건 나가제요 글쎄

다윗 왕 눈에만 명료하게 애굽이 보이는 겁니다.

딴 사람 눈에는 안 보여요

오로지 다윗의 집의 보좌에 사로잡힌 신랑에게 초과잉적인 사랑을 받아버린

다윗의 눈에만 애굽이 보여요

그런데 그게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모순인고 하니

이스라엘 왕 다윗이 글쎄 출애굽하자 출이스라엘 하자 라고 한다 말이죠.

너가 이스라엘 왕이면 이 이스라엘을 제대로 다스리고 제대로 치리해서

애굽이 되지 않게 하면 되지 않겠냐 말이죠.

 

아 글쎄 그거 다윗이 다 해봤다 말이죠.

씨알도 안 먹혀 든다는 겁니다.

 

그래서 다윗은 잃어버림 당하자 라고 외치는 겁니다.

? 그의 뿔이 들렸으니까, 그의 머리가 들리셨으니까

 

여기에 이 노선을 따라서 참선지자는 이스라엘 멸망 곧 이스라엘의 잃어버림을 주장하고

반대로 거짓선지자는 절대로 이스라엘은 멸망할 리가 없다

하나님이 보호하사 이스라엘 만세다 라고 부르짖는다 말이죠.

 

그런데 구원의 뿔은 이스라엘을 빵구멍 뻥뻥 뚤어서 바벨론 포로가 되게 해서

잃어버림을 당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그런데 이것이 구원이라고 예레미야는 이스라엘 안 망할때는 망해야 한다고
울보 선지자였다가
(회개 금식 눈물 기도 이 4종 세트로 아무리 아이를 살려달라고 해도 아이를 살릴수 없는 다윗)


이스라엘 정작 망해 버리니까 희죽 희죽 웃는 희죽선지자 이더라 말이죠
.

(먹고 마시고 춤추고 자신의 4종 세트가 먹혀들지 않았음을 기뻐하며 이미 용서 받은 것에 신나게 먹고 마시고 춤추며 구원받았다고 기뻐하는 다윗,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며 세리와 죄인의 친구인 예수)

 

그래서 잃어버림 당하니까 되찾게 된다고 포로되어 잡혀갈 때 예레미야는 춤추면서

되돌아 올길을 표시해 두라고 한다 말이죠.

 

사자 입 속으로 들어가서 사자가 앙 하고 깨물어 버리니까

이스라엘이 찢겨졌으니 다시 싸매주듯이

이 두 꼭지점을 찍는 겁니다.

그렇게 되니 정작 사자의 그 무시 무시한 이빨이 다 와장창창 깨부셔지는 겁니다.

마치 만화 같은 장면처럼 말이죠.
사자는 음음음 거린다 말이죠 어흥 하고 싶어도 이빨이 다 빠져 쪽팔려서 어흥 우렁차게 포효를 못하는 겁니다.

그 정도로 성령의 은사의 목적인 사랑이 풍성하다는 겁니다.

죽어도 산다는 겁니다.
 

그렇게 이스라엘은 야들 야들하게 되고

? 초과잉적 사랑 때문에 그 완악한 이스라엘이 수건이 벗겨져서 야들 야들 부드럽게 되고

그 부드러운 고기를 먹겠다고 달려들던 원수 마귀는 좋다 싶어서 한꺼번에 삼켜 갈기 갈기 찢어 먹을 줄 알았는데
갑자기 할머니 입모양처럼 이빨이 다 빠져서 씹지를 못하게 되더라 말이죠
.
비로소 이스라엘이 미끼가 되지
완악한 수건을 쓴 유대인은 딱딱해서 줘도 안 먹더라 말이죠.

 

괜히 깨물었어 내 이빨 ~~~~~~~

 

거기에다가 신부까지 되니까 배 아파 죽는 거다 말이죠.

 

이것이 혼인잔치의 하이라이트 이다는 겁니다.

이 정도가 되어야 사랑이라고 의라고 정의라고 구원이라고 이름 붙일수 있다 말이죠.

 

결국 살벌하기 짝이 없는 혼인잔치다 말이죠.

그야 말로 임재범의 전쟁같은 사랑 난 위험하니까 사랑 하니까 아 아아아 악 ~~~

 

악 소리 날 정도로 초과잉적인데

사랑도 없이

정의도 없으면서

어줍짢은 촛불시위하겠다고

또 그걸 막겠다고 맞불집회 까지 하는

둘 다 똑같은 놈들끼리 하는 이런 모든 것들이

우리의 눈을 흐리게 하는 짖이다는 겁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아가페를 주장하니까 그런거다 말이죠.

누구의 희생이 옳았냐 라고 서로가 그 희생한 노동의 댓가성이 고작 이거냐 라고

이것도 나라냐 자괴감이 들어서 울분에 못 참아 한풀이를 하고 있더라 말이죠

 

인간의 모든 제사 곧 예배는 한 풀이 이다 말이죠.
기도 찬양 설교 충성 봉사 말씀지키기 모조리 다 한풀이일 뿐이다 말이죠. 복수심.

 

그런 의문의 제사를 왜 드리냐 말이죠

 

명료하고 또렷한 더 나은 제사를 못 봤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보고 그런 것을 보면 배설물 똥내가 나는 것을 보고 얼른 냅따 버릴뿐입니다.

바로 십자가에서 단번에 다 드런 제사만이

유일한 초과잉적 사랑이다는 겁니다.

 

자기 목숨을 아낌없이 다 내어준 희생의 아가페가 아니라

자기 목숨을 아낌없이 다 내어준 마귀보란 듯이 배아파 죽게 하는

에로스 사랑만이 신랑이 신부 삼고자

잃어버렸다가 다시 살아나는

이 죽었다가 다시 되찾는

그의 의의 영원하심과 그의 뿔이 영화롭게 들리심이다는 겁니다.

영화 영광 하니까 실로암 소경이 생각 아니 날수가 없다 말이죠.

 

이 에로스 사랑을 확정하기 위해서 들리리라 라는 겁니다.

든다 라는 것은 우리의 시선에 아무리 봐도 낮았는데 갑자기 최고로 높아진다는 겁니다.
그럼 상대적으로 높다고 자부했던 것들이 갑자기 다 낮게 보인다 말이죠.
쥐뿔도 아닌 것들이 그 동안 높다고 갑질을 한 것이 드러난거다 말이죠.

죽기를 무서워 평생 종노릇했는데 의가 왕노릇하게 되니까
그딴 죽음이 시시해 보이는 겁니다,

왜? 진짜 제대로 높아진 그 뿔이 높이 들리심을 봐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고후 9장의 가난은 바로 우리가 생각하는 소유물의 적은 가난이 아니라

사랑의 풍성함에 증상물로써의 가난 곧 이스라엘이다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가장 미약했던 자들인데

사랑의 대상물이 되었다는 거죠.

신랑의 신부가 되었다는 의미로써 가난인데
바로 이스라엘의 처음모습인 첫사랑의 대상물인 이스라엘의 모습이였던 겁니다. 긍휼의 대상 말이죠.

여기에 반드시 동원이 되는 원수가 이 가난한 미천하고 미약한 가장 비천한 피조물인 인간이

최고의 피조물인 천사인 자신을 재치고 편애로써 예수님의 신부가 된다는

그 비밀 곧 혼인에 대한 비밀에 반발하여서 반란을 일으켰듯이

이스라엘이 바로 가난 곧 풍성한 사랑의 대상물이다는 뜻으로써의 가난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고후 9장의 결론은 성령의 은사란 곧 사랑의 풍성함이다는 겁니다.

어느 정도로 풍성하냐

죽은자도 살리는 풍성함인데

이것이 방금 예배 시작 때 어머니께서 찬송가 은혜가 풍성한 하나님은 을 부르기 전에

기도하신 내용처럼

그가 매 맞으심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을 정도로 풍성함이다는 겁니다.

 

얼마나 이 풍성함을 모독했으면

고후 9장을 많이 심으면 많이 거두게 된다고

헌금 많이 내라고 사기를 치냐 말이죠.

 

고후 9장은 성령의 은사의 특징인 풍성한 사랑이다는 겁니다.

 

주여 성령의 은사들을 오늘도 내리어 주소서

성령의 뜨거운 불길로써 오늘도 충만케 하소서

 

어느 정도로 풍성하냐 하면 성령(은사)은 마치 머리에 얹져진 숯불처럼

 

(12:20, 개역)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12:14, 개역)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12:15, 개역)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

(12:16, 개역) 서로 마음을 같이 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말라

(12:17, 개역)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12:18, 개역)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12:19, 개역)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12:20, 개역)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12:21, 개역)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김효은 집사님이 이 내용이 뭐냐고 질문했었는데

다시 생각해 보니 더 풍성하더라 말이죠.

 

머리에 숯불을 얹져 놓으면 얼굴이 빨개 달아오르는 겁니다.

그 정도로 사랑이 풍성해서

우리는 그를 싫어했지만 그는 우리의 어두운 눈을 고치셨다는 겁니다.

우리는 그를 흠모할 만한 모양이 없다고 고개를 돌렸지만

그는 우리의 질고를 지고 대신 우리의 죄악을 그 저주를 감당하셨다는 겁니다.

이것이 아가페가 아니라 에로스이다는 겁니다.

그 정도로 사랑이 풍성하기 때문에

은사 곧 성령의 은사는 우리를 부끄 부꾸 얼굴이 발그래 하게 만들어 버리는

그 정도로 풍성한 보편적 구체적 사랑이다는 겁니다.

원수도 할 말 없게 유구무언하게 만들어 버리는 

더 이상 반박할 수 없도록 하는

도리어 얼굴이 벌겋게 달아 오르게 만들어 버린다는 겁니다.

반박하면 반박할수록 누워서 침뱉기 식으로 되어버리니 자기만 손해 당하는 식이 된다는 거죠.

 

그 성령의 은사

가난한 자에게도 풍성하게 베풀어지는 그 은사가

어떤 기준에서 나오는가?

 

바로 그의 의의 영원하심과 그의 뿔이 영광으로 들려질 때 라는 겁니다.

 

그 대표성이 가난한 자인 곧 창세전에 생명책에 기록된 이름인 실로암 소경이

날 때부터 가난한 자 곧 소경이였는데

이 죽은 자를 이 잃어버린 자를 예수님은 찾는데

고맙게도 바리새인들이 이 잃어버린자를 데리고 와서 테스트를 해 주는 겁니다.

참 고맙죠.

이 사람의 죄가 부모죄 입니까 자기 죄 입니까?

인간의 법의 수준이 이 정도 밖에 안되는 겁니다.

 

말씀을 지키고 실천하는 인간들은 사랑은 당최 모르는 딱딱한 놈들입니다.

그래서 그 법의 맹점을 알고 자기는 일단 방어하고자

법으로 정죄 밖에 다른 길이 없이 살아가는

그야말로 척박하고 메마른 땅과 같은 자들이다는 겁니다.

 

그런 놈이 놀랍게도 이 소경이 날 때부터 소경인데

단 한번도 빛을 보지 못했는데 어두움 속에서만 살았는데

그래서 죄인인데 상대적으로 나는 의인인데 빛을 볼 줄 아는데

이 사람의 죄는 자기 죄 때문입니까? 부모 죄 때문입니까?

닭이 먼저 입니까? 달걀이 먼저 입니까?

부모 된 닭들이 AI로 다 죽어서 달걀 값이 다 올라갔는데

부모 탓 입니까? 자기 탓입니까?

 

동문서답하듯이 이 사람이 소경 됨은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함이다 라고

그의 뿔이 높이 들리리라 라고 하신다 말이죠.

즉 잃어버린자 드디어 찾아내는 그의 뿔이 나타나서

빵꾸멍을 뻥뻥뻥 뚫는다 라는 겁니다.

 

정작 빵꾸멍이 뻥뻥뻥 뚫히지 않는 자들

즉 나는 볼 줄 안다 라고 하는 자들

나는 정의를 외칠줄 알고 실천할 줄 안다고 하는 촛불시위자들

나는 말씀을 실천할 줄 안다고 하는 자들이

과연 빵구멍이 뻥뻥 뚫히겠냐 말이죠.

 

어두움이 뻥뻥뻥 뚫혀야지만 빛을 볼 줄 알 것 아니겠습니까?

빵꾸멍이 뚫힌적이 없는데 어떻게 본다고 우기냐 말이죠.

 

차라리 소경이였더면 내가 뚫어졌을텐데

이미 본다고 하니 소경이다는 겁니다.

 

즉 성령의 은사의 풍성함 앞에서도 머리에 숯불을 얹져놓은 것처럼

화끈 거리지 않는겁니다.

 

화로다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구나

숯불이 내 입을 다 지져버렸구나

찢으신 이도 여호와요 도로 낫게 하신이도 여호와이시구나

 

이것이 제대로 빵구멍이 뻥뻥뻥 뚫힌자이다는 겁니다.

그 빵구멍을 자랑하는 자들이 특이하게도 이스라엘인데

언제 그 구멍을 다 메꾸어 버린 겁니다.

 

양말에 빵구멍이 나면 다들 감추잖아요.

 

나 양말에 빵꾸멍 낫지롱 이라고 자랑하는 자는 그리스도인 밖에 없다 말이죠.

 

그 빵꾸멍을 자랑할려고

 

누가 가징? 저요 저요 맹구처럼 책상 위로 올라가서 저요 저요 선생님이라고 외치는 자는

성령 받은 자 밖에 없다 라는 겁니다.

 

선생님 오셨군요 성령님 오셨군요. 라고 말이죠.

 

그의 뿔이 들려져서

그 뿔에 빵구멍이 나버려서

너무 너무 풍성하기 짝이 없는 사랑에 용서 받아서

이 사랑에 빵구멍이 나 버린 그 자체를

이런 나같은 원수도 용서하는 사랑이라고 자랑하고 돌아다는 겁니다.

이것이 많이 사랑하는 자는 많이 탕감받은자이다는

많이 심은 자는 많이 거둔다는 의미인데

돈 내라 라는 식으로 설교를 하니

얼마나 고마운지 본색을 드러내 주니까

그것이 사기꾼이구나 라고 알수 있도록 하시는데

그것에 속아 넘어가는 자들은 결국 같은 욕심 때문에 남아있는 거지요.

 

그래서 왕이면서 이스라엘 왕이면서 이스라엘을 탈출하자고 외치는 겁니다.

물론 그 외침은 때려죽어도 이스라엘은 탈출할 마음이 없다 라는 것을 반증해 주는 거지요.

그럼 허구에 외치는 허망한 소리냐

전혀 손해 안 보십니다.

역시 참 고맙게도 이스라엘 쫄딱 망합니다.

드디어 참선지자들은 이스라엘이 이제 비로소 잃어버린 자가 되었다는 겁니다.

드리어 소경이 되었다는 겁니다.

소경이 되었기에 고침을 베푸시는 주의 뿔이 들리심의 사건을 맞이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겁니다.

모세 뿐만 아니라 참선지자들도 특히 참선지자들의 외침의 기준이 되는

다윗의 시편도 결국 주여 빨리 죽어주시옵소서 라는 말을 잇는 식으로

별세해 달라는 겁니다.

 

주여 빨리 주의 뿔을 드시옵소서 빨리 당신의 뿔이 들리도록 해 주옵소서 라는 겁니다.

 

성경 전체는 결국 이 이야기 밖에 없습니다.

창세전에 생명책에 기록된 유일한 것은 십자가의 사랑 밖에 없습니다.

 

다른 것은 모호하고 의문의 반복일 뿐입니다.

이 구원 사건만을 반복하고 증폭 시키는 겁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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