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도 정의냐? 자괴감이 들어 ~~ (시편 111)

 

정의롭지 않은 비리의 여호와, 나쁜 여호와 (정의를 깨부수는 정의)

 


(
111:1, 개역) 할렐루야 내가 정직한 자의 회와 공회 중에서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리로다

(111:2, 개역) 여호와의 행사가 크시니 이를 즐거워하는 자가 다 연구하는도다

(111:3, 개역) 그 행사가 존귀하고 엄위하며 그 의가 영원히 있도다

(111:4, 개역) 그 기이한 일을 사람으로 기억케 하셨으니 여호와는 은혜로우시고 자비하시도다

(111:5, 개역)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양식을 주시며 그 언약을 영원히 기억하시리로다

(111:6, 개역) 저가 자기 백성에게 열방을 기업으로 주사 그 행사의 능을 저희에게 보이셨도다

(111:7, 개역) 그 손의 행사는 진실과 공의며 그 법도는 다 확실하니

(111:8, 개역) 영원 무궁히 정하신 바요 진실과 정의로 행하신 바로다

(111:9, 개역) 여호와께서 그 백성에게 구속을 베푸시며 그 언약을 영원히 세우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고 지존하시도다

(111:10, 개역) 여호와를 경외함이 곧 지혜의 근본이라 그 계명을 지키는 자는 다 좋은 지각이 있나니 여호와를 찬송함이 영원히 있으리로다

 

 

앞의 미리 적은 10월 쯤의 글은 불공평한 하나님이라고 제목을 달았습니다.

그때 마침 어머니께서 에스겔서에 기록된 하나님은 불공평하다고 외친자들에 대한 내용을 보시고

그 불공평을 힌트 삼아서 시편 111편을 적었는데요

http://crosslamb.tistory.com/1788

 

오늘은 부정한 하나님 정의롭지 않은 여호와 라는 제목으로 나누고자 합니다.

 

작년 10월쯤과 오늘 1월 사이에 뭐가 달라져서 보이게 되었는가?

그것은 좀더 표현을 깊게 할수 있어서 기쁨이 넘칩니다.

물론 같은 의미요 같은 내용입니다만 표현 자체가 조금 달라졌다는 자체가

개인적으로 아 이렇게 풍부하구나 라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저 혼자 만의 기쁨인 주관적인 생각이지

객관적으로 강요할 수는 없겠지요.

 

불공평함이나 정의롭지 않은 비리의 나쁜 하나님이 뭐가 다르겠냐 말이죠.

 

분명 공평하신 하나님이라고 노래하는 시편 111편인데 말이죠.

그런데 정의로운 하나님을 알려면

반드시 우리는 부정하고 비리의 나쁜 하나님을 거쳐야 한다는 겁니다.

 

이것이 솔직한 우리의 속내입니다.

안 그러면 우리는 우리 속에 있는 마귀를 들통내시는 주님의 일하심을 모른다 말이죠.
우리 속에 있는 마귀의 입장에서 나쁜 하나님이어야 진짜 하나님 

곧 구체적 보편성으로써의 여호와가 되니시까 말이죠.
바로 그런 나쁜 여호와로 부터 규정되는 마귀
곧 구체적 보편성으로써의 마귀이어야만 주님이 들추어내시는 마귀가 되니까 말이죠.
인간들이 조작한 마귀가 아니라 말이죠.

 

얼마전에 스쳐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는데

잘 까먹고 스쳐지나가는 것이 워낙 많아서 일일이 메모도 못할 정도로 지나가는데

붙잡을 수 없을 정도이더라 말이죠.

 

구체적 보편성으로써 진리 라는 표현을 썻는데

역시나 같은 의미로 구체적 보편성으로써의 악이 되어야 이것이 짝이 되는 한 세트를 이룬다 말이죠.

 

마치 에서는 미워하고 야곱은 사랑했다 라고 했는데

그것이 창세전에 미리 정해진 것인데

그냥 미움이 아니라

그냥 사랑이 아니라

구체적 보편성으로써 누구든지 인정하는 바가 된다는 겁니다.
곧 구체적 보편성으로써의 미움인 에서는 미워하고 이고
구체적 보편성으로써의 사랑인 야곱은 사랑했다 라는 겁니다.

 

즉 여기서 인정하는 바가 된다는 것은

동의를 바로 하는게 아니라

분명히 반대했고 그 반대에 최선봉에 섰는자였었는데

그 최고의 반대자가 오히려 최고의 찬성자로 돌아설 때

그때 구체적 보편성이라고 표현한다 말이죠.
사도바울이 그랬죠 누구십니까?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다.

 

그 가장 대표적인 자가 바로 시아버지 유다입니다.

가장 미워서 어떻게 해서든 꼬투리를 잡을려고 했다 말이죠.

이방여자였겠다

또 자기 장남에 차남까지 저 여자 하나 잘못 들어와서 이 약속의 가문이 무너질 판국인데

아버지로써 아들 죽는 꼴을 볼수가 있겠냐 말이죠.

노골적으로 죽일수도 없고

저 저주의 재수 없는 며느리를 어떻게 해서든 떨어뜨릴려고 할 정도로 미워 미워 죽습니다.

 

아 그런데 왠 은혜인지

마침 이 여인이 글쎄 배가 불러오는 것입니다.

 

처녀가 아이를 낳아도 할 말이 있다고 했던가요?

 

드디어 며느리 입으로 그 아이의 아빠가 누구인지 드디어 세상에 밝혀 보자 말이죠.

바로 이 시아버지 유다의 모습이 우리가 예수님을 죽일때의 모습입니다.

 

이 부분이 마치 성전 안에 두 사람의 기도 중에 한 사람인 바리새인의 기도가 생각 납니다.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

 

이 부분은 동시에 구약의 사울왕의 감사기도가 생각난다 말이죠.

제사장만 먹을 수 있는 진설병을 다윗이 그것도 쫏겨다니는 다윗이 드디어 먹었다니

오 하나님이시여 드디어 저의 편이 되어 주시는 군요.

네 네 암요 거룩하고 거룩한 하나님의 율법을 어긴 자들을 가만히 둘수 없지요.

네네 당장 이 부정함을 제가 제거해 버리겠습니다.

그래서 제사장을 중심으로 해서 그 동네 가족들 다 죽여버린다 말이죠.

그리고 다윗을 죽일수 있는 명분을 얻었으니

더더욱 미친 듯이 다윗을 죽이는데 매진한다 말이죠

 

그런데 그렇게 미워 죽일려고 달려들었던 그 당사자가

너는 나 보다 옳았다 라고 반드시 선언할 수 밖에 없도록 한다면

그것이 비로소 구체적 보편성으로써의 진리이자

오늘 표현의 정의가 된다 말이죠.
구체적 보편성으로써의 정의

 

공평함이 된다 말이죠.
구체적 보편성으로써의 공평

 

그러니 이런 과정을 거치지 않은 그냥 공평함, 정의, 진리, 기도, 등등은 가짜이다는 겁니다.
그것을 마귀가 놓칠리가 없지요. 마귀가 그렇게 주장하는 겁니다.

 

선을 인간들이 주장하는데 있어서 상대적인 악이 있다 말이죠.

요즘으로 치면 그 악은 박그네와 최순실이 악이고

선을 주장하는 촛불시위자들은 드디어 참고 참아서 드디어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한다는 결집이 드디어 성사가 되는구나 라고

이 비상식적인 자들을 몰아내자 라고 선으로 모였다고 정의를 구현하자고 외친다 말이죠.

 

그런데 그것은 같은 악이다 말이죠.

그냥 정의일뿐

 

주체로써의 [정의] 자체가 정의로 쳐 주지도 않는 정의일 뿐인데 인간들은 정의를 외치면서
분신까지 하면서 모든 시선을 집중시키더라 말이죠.
 즉 가짜이다는 겁니다.

 

진짜 정의는 정의 자체가 구체적 보편성으로써의 정의를 요구한다 말이죠.

그러니 충분한 악도 아닌 것에
괜히 쓸데 없이 충분한 정의도 아닌 것들이

저거들끼리 끼리 끼리 모여서 우리 집에 왜 왔니 왜 왔니 왜 왔니

그네언니 탄핵시키러 왔단다 왔단다 왔단다

장난 치고 있더라 말이죠. 그 게임에 말려든 겁니다.

악도 제대로 된 구체적 보편성으로써의 악 같지도 않고
정의도 되도 않는 저런 악에게 덤비겠다고 하는 정의니 허접하기 짝이 없는 정의로써
그저 서로 서열 싸움 힘 겨루기만 하고 있더라 말이죠.
땅 따먹기 말이죠. 영역 싸움
조폭들이 그렇잖아요.

 

성경은

그냥 거룩을 요구하는게 아니라

구체적 보편성으로써의 거룩을 요구한다 말이죠.

자기 혼자 거룩하고 깨끗한 거룩한 행실로 가득한 자는

부자청년처럼 아무리 어릴적부터 거룩한 율법인 하나님의 말씀을 지켰다고 해도

정작 그 진짜 본심은 거짓임이 예수님으로부터 들통나 버린 겁니다.

이게 진짜 거룩 곧 구체적 보편성으로써의 거룩입니다.

어릴적 부터 한번도 아버지 말씀을 어긴적 없는 그 가짜 거룩을
가짜라고 들통냄으로써 거룩이라고 들고 왔던 자가 졸지에 악마로 변해서
예수님을 등돌리고 돌아서는 모습

이것이 거룩이 덮쳐져서 비로소 전혀 아무도 눈치 못 챘던 실상이 드러나는 모습이다는 겁니다.

 

거룩하지도 않는데 거룩했다고 평생을 자기가 자기를 속여 살아왔던 것이

예수님으로부터 들통나 버렸습니다.
그 어떤 누구도 들통내지 못했는데 말이죠.

그것을 감사할수 있겠냐 말이죠. 들통내시는 주님을 말이죠.

그게 진짜 거룩인데

 

결국 구체적 보편성으로써의 거룩의 반대인 비거룩 곧 부정함이

오히려 부자청년이 어릴적부터 지켰왔다던 결과물이 된 겁니다.

부정한 것만 지켜왔다는 거죠.

 

그것도 그냥 부정이 아니라 구체적 보편성으로써의 부정함 말이죠.

누가 봐도 거룩한 자라고 부자청년에 대한 반기를 든적이 없는 자를
진짜 거룩은 이 가짜거룩을 들통냄으로써 진짜 거룩인 구체적 보편성으로써의 거룩이 되는 겁니다.
아무도 인정안함에도 불구하고 인정할 수 밖에 없도록 하는 거룩 말입니다.
물론 가짜 거룩도 구체적 보편성으로써의 가짜이어야 하지요.
누가 봐도 진짜인줄 알았는데 십자가에서 졸지에 가짜로 드러나는 겁니다.

 

또 역시나 그것이 사울왕이 다윗이 제사장만 먹을수 있는 진설병을 먹음으로써 드러나고

 

시아버지 유다가 며느리 다말의 아이를 그 어미와 함께 불태워 죽이고자 하는 그 순간에 드러나는 겁니다.

 

이 여인이 더러운 부정한 여자가 아니라

시아버지 유다가 더러운 부정한 자였다는 겁니다.

 

정작 약속의 가문은 유다가 잇는 것이 아니라

이런 부정한 시아버지 유다를 품어준 며느리이자 아내인 개같은 이방여자 다말이 이 유다를 품어서

약속의 가문에 들어가는 겁니다.


유다의 사고방식에서는 이방인인데 어떻게 약속을 잇겠냐 말이죠. 불가능하다 말이죠.
그러니 육의 혈통 밖의 생각을 못하는 겁니다.
만약 하게 되면 자신의 법의 규칙을 원리를 다 전복시켜야 하니까 말이죠. 


그러니 이 약속의 가문은 그냥 약속이 아니라

반드시 구체적 보편성으로써 이 약속으로써
우리가 가장 거부하는 그 속성을 드러냄으로써 약속이 구체적 보편성이 되지

그냥 약속을 믿숩니다 주여 라고 해서 약속이 아니다 말이죠.

절대 그건 약속이 될수 없어 라고 하는 그것으로 약속을 이루시는 겁니다.

 

우리 자신이야 말로 이 시아버지 유다처럼

이 다윗을 죽이고자 했던 사울왕처럼

이 약속을 어떻게 해서든 죽이고파서 미워서 달려들었든 그 분명한 증거를 나타냄으로써

꼬끼오 꼬끼오 꼬끼오를 통해서

구체적 보편성인 진리인 십자가를 영광스럽게 나타내시더라 말이죠.

 

그러니 이 십자가는 헬라인에게는 미련한 것이고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인데

구원을 얻은 우리에게는 영광이 되는 겁니다.

우리는 처음에는 오독했다 말이죠. 이 십자가를

그러니 이 십자가가 영광이 된다는 말은

곧 어떻게 하나님의 저주가 어떻게 영광이 되겠습니까?

그런데 주님은 하시더라 말이죠.

어떻게 우리가 거부했는데
그 거부한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머릿돌이 되는

십자가를 아무도 안 쳐다볼정도로 너무 너무 처참하고

싫어버린바 되고

아름답고 흠모할 모양이 하나도 없는데

이 십자가가 영광 스럽게 되는 것은

내 대신 지옥 불 속에 뛰어들어서 나를 건진 불에 타서 새까맣게 그을린 얼굴이니

 

이 얼굴을 어떻게 안 쳐다볼수가 있겠냐 말이죠.

이게 바로 아가페가 아니라 에로스이다는 겁니다. 결혼이다 말이죠. 곧 사랑입니다.

 

불에서 건지고자 타버린 얼굴인데 말이죠.
구스여인을 품고자 하는 온유의 얼굴이 다 타버린 얼굴이고
우리는 구스여인처럼 새깜디 였다는 겁니다.
그 두 얼굴이 얼굴과 얼굴을 마주보게 되는 겁니다. 에로스로써 사랑이 이루어지는 겁니다.
어느 누구도 끊을수 없는 사랑이지요.
끊을려다가 도리어 된탕 당하도록 되어 있는 구체적 보편성으로써의 사랑입니다.
그냥 사랑이 아니라 말이죠.

 

이것이 진짜 얼굴 곧 구체적 보편성으로써의 얼굴이다는 겁니다.

 

이 얼굴과 얼굴이 마주보는 겁니다.

 

안그러면 가짜 얼굴을 서로 마주보겠다고 화장빨에 다 속는다 말이죠.

 

왜 다말이 화장을 급하게 할까요?

왜 그런 창녀로 갑자기 변신하는 것일까요?

 

교회 잘 다니고

충성 봉사 하고

기도와 말씀 잘 지키는 나를
예수님은 창녀로 변하셔서

나를 넘어뜨려 실족케 하시는 겁니다.

 

이런 부정한 예수님이 다 있나?

이런 비리의 예수님이 다 있나?

이것도 정의냐 말이죠. 자괴감이 든다 말이죠.

 

왜 나의 아이를 세월호 바다에 빠뜨려 죽이나?

아이가 빠져 죽은게 아닙니다.

실로암 소경이 소경이 아닙니다.
구체적 보편성으로써의 소경은 바로 본다고 하는 자가 소경인 겁니다.

아이가 언제 죽었습니까? 죽지도 않았는데
죽었다고 한을 품고 시위를 하는 그 부모가 실상은 죽은 겁니다.

 

세상을 제대로 볼줄 모르는 소경인 나를

소경인 부모의 눈을 바로 뜨게 할려고

아이가 죽은게 아니라

너가 죽었다는 것을 밝히 보여주고자 하신 십자가이다는 겁니다.

 

그럼 이 십자가를 저주 해야지요.

얼마나 야속합니까

그럴 것 같으면 바로 나를 죽이지 왜 아이를 죽이냐 말이죠.

 

얼마나 비리의 예수님이고 얼마나 부정한 정의롭지 않은 예수님이냐 말이죠.

맞습니다. 바로 이런 예수님을 만나야 진짜 예수님을 만난 겁니다.

진짜 제대로 얼굴을 마주 보고 된 겁니다.

 

그 동안 예수는 가짜로 포장된 예수였지요

나를 위한 예수

그런 예수는 없습니다.

 

이렇게까지 주님이 하셔도 인간은 미친척 하지 않고

점잖은 이성적인 한 국가의 시민으로써

국가의 비리에 반대한다고

아주 아주 이성적으로 촛불시위를 하고

그것을 빌미로 주변의 인간들이 도와주겠다고 함께 투쟁하자고 나서는데

 

참 가관입니다.

 

그런다고 죽은 아이가 살아나냐 말이죠.

 

아니 무엇이 실재인지를 아직도 못 보냐 말이죠.

 

박그네가 죽인게 아닙니다.

그렇다고 박그네가 옳은 사람이라고 주장하는게 아니지요?

이 사람은 이 사람 욕심대로만 살뿐이고

역시나 부모는 부모의 욕심대로만 할 뿐이다 말이죠.

 

그런데 왜 속아서 주변인들이 꼬득이는 그 속임수에 놀아나서

왜 또 자신의 어두운 눈을 뜨게하고자 죽어가는 아이들의 목소리를 왜 못 듣고

엉뚱하게 의문의 모호한 정의를 외치는 놈들의 사기에 놀아나서

이 추운날 쓸데 없이 촛불 시위를 하냐 말이죠.

 

박그네 탄핵 되고 감옥가겠지요.

네 맞습니다. 갑니다

문제는 아이가 좋아라 하냐 말이죠.

살아 돌아오냐 말이죠.

뭐 앞으로 아이들이 안죽도록 하겠다?

그런 모호한 소리가 어디있습니까?

 

그 어떤 누구도 나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진적 없는 자들의 말을 왜 듣냐 말이죠.

그럼 너는

 

네 맞습니다. 저의 말도 듣지 마세요.

저는 그냥 저 혼자 미친놈처럼 떠들어 댈 뿐이니까 말이죠.

어차피 다 정의라는 이름으로

선함이라는 이름으로 사기를 칠 뿐인데

 

다만 저는 이 불공평한 여호와

비리의 정의롭지 않은 예수님을 소개하고 싶을 뿐이다 말이죠.

 

어떤 부모는 만약에 신이 있다면

신에게 딱 한 시간만 허락하셔서

그 빠져죽은 아이에게 따뜻한 밥 한 그릇만 주고 싶다고

그것만 허락 좀 해달라고

만약에 신이 있다면 제발 허락 좀 해 달라고 눈물을 흘리면서 부모가 외치더라 말이죠.

 

저도 그 말을 떠올릴 때 마다 눈물이 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 것은 제대로 알고 가야 합니다.

그런 신은 없으니까 말이죠.

없는 허깨비에게 허락해 달라고 한다면

야속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헛된 요청이다고 헛된 기도이다고 알려줘야만 합니다.

그러니 실상이 뭔지 모르니까

자꾸 그 망해가는 지옥에서

아이를 지옥에 불려들여서 밥 한 끼를 먹이고 싶다는 겁니다.

아이의 부모인냥 말이죠.

실상은 우리가 부모가 아니라

아이가 선지자로써의 부모였다는 겁니다.

자기처럼 떠나야 한다는 겁니다.

물론 자살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자살은 한을 품어서 자살하는 거지

왜 떠나야 하는 줄 모르는 거지요.

 

그러니 떠나야 하는 줄 모르기 때문에

떠나야 할 곳에 아이를 끌여들여서 밥 한끼를 먹이고 싶다는 겁니다.

만약 아이가 살아나서 어서 떠나자 내가 밥 살깨 라고 한다면 어떻게 하실껍니까?

 

따뜻한 밥 한 끼 못 먹여서 미안한 자신의 그런 아픈 마음이 중요한게 아니라

왜 아이가 이 세상의 실상을 보여주고자 한 꺼플 벗기고 논개처럼 갔는지에 대한 실상을 모르는 겁니다.

아마 모르고 부모도 죽겠지요

그렇게 자손을 낳고 낳고 낳다보면 한풀이의 한 만 가득 안고 왜 죽는지도 모르고 가는 겁니다.

알고 보니 그렇게 모인자들이 국가를 만들고 사회를 만들고 가정을 만드는

결국 서로가 서로를 빠뜨리면서 형성한 구조이다는 겁니다.

 

왜 죽어야만 하고 왜 살아야만 하고

왜 태어나야만 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원리는 모른채

그저 순서상 시간순으로 가면 덜 억울하고

빨리 시간을 재촉해서 가면 억울하고

그 억울함도 시간이 지나면 다 잊혀져서 다 잊어버리는 겁니다.

그럼 억울하니 마니 한 것도 다 한 때가 되는 부질없는 것이니

허상의 안개만 붙잡고 씨름한 거다 말이죠

 

뭐 하나 또렷하고 명확하게 나온게 있기는 있냐 말이죠.

그런데 뭘 책임지라고 하냐 말이죠.

 

방금 어머니랑 예배를 드리면서

이런 말씀을 나누었다 말이죠.

 

인간들은 비로 정의가 뭔지 제대로 충돌하게 됩니다.

어떻게?

자신의 정의가 아무 쓸모짝이 없는 쓰레기 정의인 것이 드러날 때 말이죠.

 

가령 정의롭다면 죽은 아이도 살려내는 정의어야 한다 말이죠.

그렇지 않다면 모호한 정의를 붙잡고 고래 고래 고함만 친거다 말이죠.

 

세상의 법이 그런 식입니다.

강자에게는 한 없이 약하기 짝이 없는 법이고 정의이고

약자에게는 이것은 뭐 하나님 보다 더 한 깡패같은 법이요 정의이다는 거죠.

검찰 보세요 모든 것이 검찰로부터 시작된 거다 말이죠.

그래서 자기가 자기에게 칼을 대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

법이 법 스스로를 짤라내야 할 정도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진짜 법은 진짜 정의는 정의를 치는 정의입니다.

정의를 부수는 정의가 진짜 정의이다는 거죠.

 

공평은 공평을 부수는 공평이 진짜 공평이다는 거죠.

계시록을 통해 일곱 교회를 살펴 봤듯이

교회란 교회를 부수는 교회가 진짜 교회이다는 겁니다.

 

이것이 구체적 보편성이다는 겁니다.

 

교회가 교회를 버렸는데 그 버린 교회가 머릿돌 되는 교회를 구체적 보편성으로써의 교회이다는 거죠.

네 맞습니다. 진짜 이스라엘은 예수님 밖에 없다 말이죠.

나머지는 다 가짜 성전이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다윗은 외칩니다. 정의를 누구를 보고

예수님을 보고

어떤 예수?

 

내가 우리야 장군을 고의적으로 죽이고 밧세바를 빼앗고 이름없는 아이를 살리지 못하는 기도 금식 눈물 회개를 했다고 우기는

그 모든 허물을 저 내가 싫어했던 예수님으로부터 빼앗겨서

그런 나를 부수고 나를 다시 세우는 예수님이 진짜 예수임을 보고 정의를 외친다 말이죠.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 시편 111편을 정의를 생각할 때 마다 예배때나

일상 속에서 외웠던 시편 111편을 써먹을줄 알았지

 

진짜 시편 111편이 걸어옴에 있어서 시편 111편 되신 예수님을 죽여버렸다 말이죠.

자신들의 손으로 말입니다.

이것이 진짜 시편 111편이 되는 겁니다.

구체적 보편성으로써의 시편 111편이다 말이죠.

 

안그러면 그냥 달달 외운 시편 111편일 뿐이고

정의는 그냥 책으로 배운 정의이지

실제적인 정의가 아닙니다.

실재적인 정의를 영화 보듯이 재미를 누리는 정의가 아니라

그 영화 스크린을 찢고 튀어나오는 괴물로서의 정의가 된다 말이죠.

 

그러니 오히려 시편 111편을 외우고 지키고 이런 정의를 기도한다는 자체가 뭔고 하니

절대로 영화 스크린을 찢고 이 일상 속으로 침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에 외우는 겁니다.

 

그러나 외울수 없는 시편 111편은 진짜 영화 스크린을 찢고서 현실 속으로 침범해서

나의 정의 나의 말씀지키기 모조리 다 깨 부수는 겁니다.

 

마치 세월호가 영화처럼 재난 영화가 아니라 실제적으로 영화 스크린을 찢고서

현실로 침범해서 나의 아이와 가족을 물에 빠뜨려 죽이는 괴물로써의 시편 111편이 되어야

진짜 시편 111편을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만나게 되는 겁니다.

 

그럴 때 평상시 생각했던 정의고 공평함이고 나발이고 뭐고

다 거짓으로 들통나는 겁니다.

부모? 가짜 부모였다는 것도 들통나는 거죠.
그것을 죽는 아이가 선지자로써 부모로써 부모를 깨는 겁니다.

 

바로 그런 진짜 시편 111편을 만나서 다윗은 외치는 겁니다.

그럼 오히려 시편 111편을 달달 외운 유대인이 이 시편 111편의 정의와

자신들이 지켜서 행해온 행함으로써의 정의와 부딧히게 된다 말이죠.

 

그렇게 되면 두 패로 갈라지게 되는 겁니다.

한 쪽 강도는 아무리 나쁜 짖을 했어도

당신의 나라에 저를 기억해 달라고 뻔뻔함이 가득한 미래완료 앞에서 긍휼을 바라게 되는

죄인입니다 라고 고백이 나오고

다른 한 쪽 강도는 아니 신이 정말로 있다면 왜 나를 강도로 태어나게 해서

이렇게 십자가에 사형시키는 삶을 살도록 했느냐

신이 있다면 나를 바른 길로 인도해야지

왜 이렇게 만들었냐 라고 자신의 경험 밖에 이야기 못하는 겁니다.

이 경험 절대 지울수 없다 말이죠.

 

그러나 다른 한 쪽 강도는 그런 경험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 경험을 깨는 새로운 경험

당신의 나라에 저를 기억해 달라고 뻔뻔스럽게 외칠 수밖에 없는

경험을 깨는 새로운 경험을 봐 버린 겁니다.

그러니 자신의 정의를 깨는 정의

자신의 공평함을 깨는 공평을 간구하는 거죠.

 

마치 부자청년이 거꾸로 주여 저는 어릴적부터 율법을 단 한 번도 어긴적이 없는데

어떻게 하면 이 경험을 모조리 다 깨버릴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예수님이 내 말이 ~~~

가난한 자에게 다 나누어 주어라 말이죠.

 

제가 가난한 자인데도

그래 그래 내 말이

너가 가난한 자이기에 내가 주었잖아

아 그럼 그 동안 주님이 저를 불쌍히 여겨주소서

저를 가난한 저를 긍휼히 베풀어 주셨군요

 

이렇게 대화가 되는 겁니다.

당신의 나라에 저를 기억해주소서 라는 대화가 된다 말이죠.

 

그렇지 않고 가난한자에게 전 재산을 나누어 주어라 라고 하니까

난 못하는데 덜커덕 막혀 버리는 겁니다.

대화가 안되요.

소통이 단절이 되는 겁니다.

부자인데 가난한자가 되면 안된다는 겁니다.

의인인데 죄인이 되면 안된다는 겁니다.

원래 천국갈자인데 당신의 나라에 저를 기억해 달라고 하는 지옥 백성이 되면 안된다는 겁니다.

당신의 나라에 저를 기억해 달라는 말은 의인이나 천국 갈자가 하는 말이 아니다 말이죠.

지옥에 마땅히 가야만 하는 자들이 불쌍히 여겨달라고 외치는 소리인데

어떻게 그런 말을 하냐 말이죠.

 

그러니 가난한 자에게 전 재산을 못 베푸는 겁니다.

긍휼을 받은적이 없는데 어떻게 긍휼을 간구하겠냐 말이죠.

 

많이 탕감 받은 자가 많이 사랑하거든요.

 

정의로운 자는 절대로 이 시편 111편의 정의를 모르도록 되어 있습니다.

정 알고싶으면 자신이 생각한 정의를 개나 줘 버려

배설물 똥덩어리 냄새가 지독해서 자신도 손사래를 쳐야 할 정도로

무지 무지 싫어해야만 한다 말이죠. 겸손 떠는 척 하는게 아니라

진짜 너무 너무 냄새가 나서 역겨워 할 정도로 근처로 오지 말라고 해야 한다 말이죠.

 

그런 자가 과연 있나 말이죠.

부자청년처럼 다들 부러워 하고 다들 바른 인간이 되었구나 라고 칭찬하고 있는데

주여 저에게 오지 마옵소서 저는 냄새나는 놈입니다.

저도 이 지옥에서 벗어나고 싶습니다. 저를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라고 하겠습니까?

아니면 주여 뭘 또 지킬까요? 부족한 것 있으면 지적해 주세요

제가 다 지켜버리겠습니다 라고 할까요?

 

그러니 오늘날 정의를 외치는 놈 치고

공평함 곧 평화를 외치는 놈 치고

정의를 제대로 말하는 자 없다 말이죠.

평화? 평강? 거짓선지자의 트래이드 마크로써의 구호 아닙니까?

 

차라리 참선지자처럼 평강을 외치는게 아니라 망해라 라고 외치세요

그럼 누구든지 죽일려고 달려들거다 말이죠.

 

다윗의 이 정의를 외침에 있어서 구약의 참선지자들이 바톤을 이어 받아서

정의를 외치는데 있어서 다 죽게 됩니다.

참 이상하지요.

이스라엘이 이 선지자들은 다 죽입니다.

이스라엘이 멍청난 자들입니까?

세계에서 가장 똑똑한 민족 아니냐 말이죠.

그런데 왜 참선지자는 다 죽여버리고

거짓선지자의 평강이라는 소리에 다 속아 넘어가냐 말이죠.

 

이 정의가 정의를 깨는 정의인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참선지자는 그래서 정의를 깨는 정의를 외칩니다.

거짓선지자는 정의는 깨어지면 안된다고 외칩니다.

 

그래서 오히려 부 정의 로운 참선지자를 다 죽여버린다 말이죠.

참 기가막히게 맞물려 있지요.

 

괜히 참선지자가 망하라고 외친게 아니지요.

실상 마치 만찢남 만화를 찢고 나온 남자 멋진 남자 라는 표현처럼

만화에서 책으로 배우는 정의가 아니라

그런 책을 찢고 나온

정의를 찢고 나온 정의를 외치기 때문에

버린 돌이 될 수밖에 없고

아벨부터 사가랴 까지 버린 돌 곧 죽을 수밖에 없는데

그렇게 버림받고 죽은 돌이였던 정의가 진짜 머릿돌 되는 정의이다는 겁니다.

이렇게 잃어버렸다가 되찾는 경험이 없는 정의는 가짜죠.

 

그런 가짜 정의에 속아서 촛불집회에 나가고

그것을 막겠다고 맞불 집회를 여는 교회도 악마들이다는 겁니다.

두 악마들이 서로 정의를 외침으로써 서열 전쟁을 벌리는데 있어서

그 서열이 얼마나 모호하냐 말이죠.

 

진짜 정의는 바로 그런 싸움에 괜히 끼어들어서

예수님이 죽는 그 죽는 정의가 진짜 정의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헬라인은 왜 죽는 정의를 쫏느냐 라고 힘 없는 정의는 미련하다고 외면하고

유대인은 거리끼는 걸림돌에 턱 하고 걸려 넘어지는 정의에 부딧혔고

구원은 얻은 우리에게는 이 버림받는 정의가 우리에게는 능력의 머릿돌 되는 정의가 되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정의를 하수 같이 세계 우주에 까지 뻗어나가는 진짜 정의이고

 

가짜 정의는 찔끔찔끔 자기 구역만 챙기는

그 찔끔 찔끔 주는 물로 사기를 치는

마치 매드맥스에서 물로써 사람을 장악하기 바쁜 그런 정의

그 정의를 깨뜨리는 정의가 진짜 정의로써

 

하수처럼 쏟아 부어서 모든 만물에 뿌리는 겁니다.

아예 흘러 흘러 넘치는 강이 되는 겁니다.

 

내게 강 같은 정의 가 되는 거죠.

 

그 정의를 외치는게 다윗인데

유대인은 이 시편을 달달 외우면서 엉뚱한 허상으로써의 찔끔 찔끔 정의를 지키니까

부자청년처럼 그런 깡패놈들이 생기는 겁니다.

아니 대부분이지요.

얼마나 하수처럼 흘러넘치지 못했으면 그딴거 자랑할까요?

오죽 넘치지 못했으면 가난한 자에게까지 흘러 넘치지 못하는 겁니다.

 

가짜 정의죠.

 

진짜 정의는 목마른 자는 다 마실수 있을 정도로 차고도 넘치는 정의입니다.

 

이것이 인간들이 들고온 정의를 깨뜨리는 정의입니다.

 

우물가의 여인이 유대인인 예수 당신이 어떻게 삥둘러 가지 않고

나에게 와서 물을 달라고 하느냐 말이죠.

 

주님이 진짜 생수이시기에

너의 물을 깨뜨린다는 겁니다.

너가 마시는 물은 다시 목 마르지만

내가 주는 물은 다시는 목 마르지 않는다 말이죠.

 

이 관계에

오히려 이 사마리아 구역을 삥 둘러서 다니는 유대인은 아예 배제가 되는 겁니다.

 

매드맥스 영화처럼 물 좀 있다고 사기치는 집단이다 말이죠.

 

아에 그런 놈 상대 하지 않고

개같은 이방인 여자에게

물을 달라고 하시면서

정작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영생수를 주시고자

그렇게 다가오시는 겁니다.

 

그 사마리아 우물가의 여인이 이 영생수를 마시면서 외치는 겁니다.

선지자가 나타났다

동네 사람들 나의 죄를 사하는 예수의 피 밖에 없네 영생수 예수님이 나타났어요

진짜 정의가 나타났어요

가짜 정의인 유대인이 아니라 그 유대인 속에서 진짜 유대인이 나타났어요 라고 외친다 말이죠.

 

그 여인이 미리 앞당겨 져서 다윗으로써 외치는 겁니다.

정의

의에 주리고 목마른 이 정의를 마시고서

예수님을 마시고서 다윗은 비로소 가짜 정의를 외치는 이스라엘 속에서

진짜 정의를 외치는 겁니다.

 

정의를 깨는 정의를 말이죠.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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