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공평한 여호와 (111)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


 

(18:25, 개역) 그런데 너희는 이르기를 주의 길이 공평치 않다 하는도다 이스라엘 족속아 들을지어다 내 길이 어찌 공평치 아니하냐 너희 길이 공평치 않은 것이 아니냐

(18:29, 개역) 그런데 이스라엘 족속은 이르기를 주의 길이 공평치 않다 하는도다 이스라엘 족속아 나의 길이 어찌 공평치 아니하냐 너희 길이 공평치 않은 것이 아니냐

 

(9:23, 개역) 예수께서 그 직원의 집에 가사 피리 부는 자들과 훤화하는 무리를 보시고

(9:24, 개역) 가라사대 물러가라 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저들이 비웃더라

(9:25, 개역) 무리를 내어 보낸 후에 예수께서 들어가사 소녀의 손을 잡으시매 일어나는지라

(9:26, 개역) 그 소문이 그 온 땅에 퍼지더라

(9:27, 개역)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가실새 두 소경이 따라오며 소리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더니

(9:28, 개역) 예수께서 집에 들어가시매 소경들이 나아오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대답하되 주여 그러하오이다 하니

(9:29, 개역) 이에 예수께서 저희 눈을 만지시며 가라사대 너희 믿음대로 되라 하신대

(9:30, 개역) 그 눈들이 밝아진지라 예수께서 엄히 경계하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알게 하지 말라 하셨으나

(9:31, 개역) 저희가 나가서 예수의 소문을 그 온 땅에 전파하니라

(9:32, 개역) 저희가 나갈 때에 귀신 들려 벙어리 된 자를 예수께 데려오니

(9:33, 개역) 귀신이 쫓겨나고 벙어리가 말하거늘 무리가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스라엘 가운데서 이런 일을 본 때가 없다 하되

(9:34, 개역) 바리새인들은 가로되 저가 귀신의 왕을 빙자하여 귀신을 쫓아낸다 하더라

 

(111:1, 개역) 할렐루야 내가 정직한 자의 회와 공회 중에서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리로다

(111:2, 개역) 여호와의 행사가 크시니 이를 즐거워하는 자가 다 연구하는도다

(111:3, 개역) 그 행사가 존귀하고 엄위하며 그 의가 영원히 있도다

(111:4, 개역) 그 기이한 일을 사람으로 기억케 하셨으니 여호와는 은혜로우시고 자비하시도다

(111:5, 개역)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양식을 주시며 그 언약을 영원히 기억하시리로다

(111:6, 개역) 저가 자기 백성에게 열방을 기업으로 주사 그 행사의 능을 저희에게 보이셨도다

(111:7, 개역) 그 손의 행사는 진실과 공의며 그 법도는 다 확실하니

(111:8, 개역) 영원 무궁히 정하신 바요 진실과 정의로 행하신 바로다

(111:9, 개역) 여호와께서 그 백성에게 구속을 베푸시며 그 언약을 영원히 세우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고 지존하시도다

(111:10, 개역) 여호와를 경외함이 곧 지혜의 근본이라 그 계명을 지키는 자는 다 좋은 지각이 있나니 여호와를 찬송함이 영원히 있으리로다

 

 

공평하신 하나님 이라고 하면 이 시와 노래가 생각납니다.

 

송명희 시인의 나

 

나 가진 재물 없으나

나 남이 가진 지식 없으나

나 남에게 있는 건강 있지 않으나

 

나 남이 없는 것 있으니

나 남이 못 본 것을 보았고

나 남이 듣지 못한 음성 들었고,

나 남이 받지 못한 사랑받았고,

나 남이 모르는 것 깨달았네.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가진 것 나 없지만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없는 것 갖게 하셨네.

 

 

곧 공평하신 하나님을 가졌다는 겁니다.

 

그런데 남들은 그렇게 안 봅니다.

중증 뇌성 마비 장애인으로 태어났는데

공평하다니요?

 

공평하신 하나님이라고 말하고 있는 당신 송명희 시인에게는 그럴지 모르나

우리가 보기에는 적어도 당신 송명희 한테는 하나님은 공평한게 아니라

불공평하다고 다들 본다는 겁니다.

 

아무리 아이구 장애인 시인이 저렇게 하나님으로부터 사랑받아서 그렇게 말하니

마음적으로 위로를 삼아 다행이구나

삐딱하지 않아 참 좋구나

세상 불평하면서 살지 않아서 좋구나

그러니 사고 칠 일이 없겠구나

 

라고 좋게 좋게 생각하지만

 

솔직히 마음 한 구석에서는

저렇게 태어났는데 공평하다니 말이 돼?


그래서 자기자식이 태어나면 손가락 먼저 세고

발가락 먼저 세아리고

혹시 장애가 있지 않는가

제일 먼저 살펴 본다 말이죠.

아무리 공평하신 하나님 이라고 찬양을 백날 불러도 말이죠.

이게 나쁘다는 말이 아닙니다.

어쩔수 없어요.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남의 모순을 잘 보겠지만

우리 자체의 모순은 잘 못본다는 겁니다.

그러니 남의 눈의 티가 크게 보일 뿐인지

나의 눈의 들보는 보일 리가 없다는 겁니다.

이 모순성을 가지고서 주님은 일하신다는 겁니다.

즉 주님은 이 불공평하심을 가지고 일하신다는 겁니다.

부정의 부정이다는 거죠.

 

왜 초반부터 이렇게 불공평한 하나님 이라는 내용으로 전개하느냐 하면은

어제 아침에 어머니께서 에스겔서을 읽으시다가 이렇게 말씀하시는 겁니다.

 

~~~ 인간들 참 대단하다!

대들기를 악착같이 대들기를 하는데

어떻게 해서든 대들어서라도 이길려고 하는데

 

여기에 더 대단한 분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인데

하나님은 더 악착같이 안 질려고! 빠득 빠득 오히려 끝까지 이겨묵을려고 한다고

 

참 둘 다 대단하다고 막웃으시더라 말이죠.

 

왜요? 뭐 또 보셨는데요?

아니 인간들이 불공평하다고 말도 안된다고 하나님께 따지는데

그 이유인즉슨

하나님의 법인 율법을 지금까지 지키다가 딱 하나 못 지키면 지옥 보내버리고

반대로 여태까지 단 한번도 안 지키다가 이제 돌이켜 하나님의 법을 지키면

천국 보내겠다고 하니

 

당연히 인간들이 말도 안된다고 불공평하다고! 이런 편파판정이 어디있냐고 따지기를 하는데

 

여기에 주님이 한 발짝도 양보를 하지 않더라 라는 겁니다.

 

아 그래요?

그건 이런 의미입니다.

 

인간은 율법을 지킬때에 시간과 공간으로 구원을 추구합니다.

그러니 시간순서대로 1 2 3 4 순으로 가는 겁니다.

 

구원을 보는 시선도 그런 식이니까요

 

그런데 주님이 말씀하시는 구원은 그런 구원이 아니다는 겁니다.

 

세상 끝에서 거꾸로 오는 구원이다 말이죠.

그러니 단 한 개도 율법 지킨 적이 없어도

또 주님이 누구인지도 몰라도

또 단 한번도 주의 이름을 부른적이 없어도

단 한번도 교회 다닌 적이 없어도

주님이 사랑하시면 구원이 되는 그런 구원을 고집하시는 겁니다.

 

그러니 이사야선지자처럼 임마누엘

곧 너희의 하나님과 나의 하나님은 다르다

하나님은 나와 함께 하지 너희와 함께 하지 않는다 라고

이것이 이름 이다고 했지요.

 

이것이 신약에서는 이렇습니다.

거의 다 신약 전체가 그런 내용인데

 

농부가 아침부터 저녁까지 12시간 다 일했는데

밭 주인이 놀고 있는 사람을 데리고 와서 일을 시켜서

딸랑 30분 딸랑 1시간 딸랑 2 시간 일한 사람에게

일삯을 주니까

(마 20:1, 개역)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 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으니』

(마 20:8, 개역) 『저물매 포도원 주인이 청지기에게 이르되 품꾼들을 불러 나중 온 자로부터 시작하여 먼저 온 자까지 삯을 주라 하니』


혼자 설레발 치면서 하루 일삯을 다 받으니 좋아라고

그럼 나는 도대체 몇배를 받는거니

나는 오늘 왜이리 기분이 좋은거니


혼자 중얼거리면서 딸랑
30분 일한 사람도 12시간 일한 값을 주니

10배 정도는 받는 계산을 지혼자 좋아라고 하는 겁니다.

10배는 너무 많으니까 적어도 아주 적게 쳐도 두 배 이상은 줄꺼다 상상했던 거죠.

상상입니다.

그런데 두배는커녕 약속했던 그대로 주니까

갑자기 선한 주인이 아니라 악한 주인이다고

불공평하다고 시위를 한다 말이죠.


이런 편파판정이 세상에 어디있냐 말이죠.
 

결국 선한 주님의 선하심이란

곧 공평하심이란

불공평을 들추어내는 것이 공평이다는 겁니다.

선 이란 악을 들추어내는 겁니다.

나의 불공평을 들추어내기 위해서 불공평으로 오신 겁니다.
그래야 완악한 수건이 벗겨질것 아니냐 말이죠.
 

오늘날 현대인들이 오히려 왜 신은 악을 허용하는가에 대한 스스로의 물음에 답을 찾고자 하고 있다 말이죠.

답은 간단합니다. 선을 선 되게 하기 위해서 악을 허용하는 겁니다.

이것이 1234 순으로 해석할 수 밖에 없는 시선에서는 불공평하다 말이죠.
그런데 인간이 도저히 할수 없는 해석인 4321 순으로 종말에서 끝에서
다 이루었다에서 거꾸로 소급해서 쳐들어오는 해석에서는 이것보다 더 나은 공평이 없다 말이죠.

그러면 이것은 슬픈 일이 아니라 오히려 기쁜 소식인 겁니다.

악을 풀어버린다는 것은

선한 자의 선하심을 오히려 더 또렷하게 한다는 거죠.
오로지 예수님만이 선하다 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의 조치가 오히려 기쁜게 아니라 더더욱 반발성이 강한

불공평하다고 인간은 외치는 겁니다.

 

이런 시선이 바로 인간이 원하는 구원방식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구원은 거꾸로 오는 식입니다.

불공평하다고 외치는 그들의 불공평함을 들추어내는 불공평으로써의 공평이요 선하심으로써
우리의 악함을 들추어내시는 악으로써의 선하심으로써

공평함을, 선하심을 나타내더라 말이죠.

 

거꾸로 오는 겁니다. 사건으로 오시는 겁니다.

 

이것이 왜 중요하고

저 에스겔 내용이 시편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 말이죠.

시편의 새노래는 사건입니다.

사건 곧 충돌입니다.

다윗은 1234로 율법을 보는 시선을 가지다가

자기의 모순에 빠졌습니다.

그래서 율법 4배나 갚도록 하라 라는 판결에

자기가 자기의 판결에 걸려들게 됩니다.
판결자가!! 재판장이!! 왕이!!

자기 구원에 자기가 찔려 버린 겁니다.

 

앞의 글 니골라당에서

제가 적고도 제가 놀란 표현이 바로 앞 부분에 나오는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다 로 자기가 자기를 찌르는 구원이 되는 줄 모르게 되는 겁니다

 

입니다

 

지금 이 순간 제가 저를 찌르고 있지요 ㅋㅋㅋㅋ
그 정도로 우리가 백날 바른 구원관을 가졌다고 우겨도 순 엉터리이다는 겁니다.

 

내가 내 구원에 대해서 손대고 손질하고 숙제하듯이 한다는 것이

자기가 자기 구원을 방해하는 식이다 말이죠.

그게 1234 순서대로입니다. 원인 있는 결과를 만들어 내겠다는 거죠.

그런데 원인이 있으면 결과는 없게 됩니다.

이것이 선악입니다. 생명이 아니다 말이죠.

그러니 뭘 해도 주님의 일은 다 불공평 하게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생명으로 안 보고 선악으로 보니까 말이죠.

 

반대로 주님은 구원은 거꾸로 세상 끝에서 곧 종말

곧 심판

곧 죽음에서 출발합니다. 끝에서 출발합니다.

거꾸로 소급해서 54321 이런 식으로 옵니다.

시간과 공간에 갇혀버린 인간에게서 저런 종말의 영의 해석을 불가능하다는 겁니다.
그 불가능성이 덮쳐버린 겁니다.

다윗은 왕의 자리에서 예수님의 때를 본게 아니라
죄인의 자리에서
율법의 4배나 갚으라 탕탕탕 그놈이 바로 너야 너
오히려 죄인 중의 괴수의 자리에서 예수님의 때를 본 겁니다.
다 이루었다는 봤다 말이죠.

그래서 남들이 불공평하다고 외치는 여태껏 단 한번도 율법 지킨적이 없다가 돌이켜 말씀을 지키게 되니
천국 보내겠다고 하신 주님이 불공평하다 세상에 저런 반칙이 어디있냐 라고

우리가 투덜 거리던 그 반칙의 자리에 막상 우리가, 다윗이 놓이게 되니
왕이 아닌 그 범죄자의 자리에 놓이게 되니

이것 보다 더 좋을 수가 없는 겁니다. 여디디야 여디디야 여디디야 꼬끼오 꼬끼오 꼬끼오

주님이 마련하신 용서가 미리 준비가 되어서
너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세번 물으시는 그 음성 보다 더 공평한 음성이 어디 있냐 말이죠.

 

그 끝이 처음과 나중 되신 주님이 나중의 끝에서 오시니까

그 나중되신 주님만 명료하니까

우리는 사라질 것들이다 말이죠.

없어져야 할 것들이다 말이죠.

그 끝에서 오신 분만 명료하고 그 분 외에는 모호한 것들이요 의문의 반복일 뿐이다 말이죠.

그것이 바로 나중 되신 분이 끝에서 오심을 봤기 때문에

다윗은 완료된 주님의 십자가 사랑을 봐 버렸고

다윗은 새이스라엘의 완료를 봐 버렸기 때문에

더 이상 눈에 보이는 이스라엘에 연연하지 않고

사울왕처럼 이스라엘의 왕으로써 이스라엘 왕 답게 되어야 한다는

그런 압박감과 책임감을 더 이상 같지 않게 되는

더 이상 숙제가 없는 인간이 되어버린 겁니다.

그래서 다윗은 저 분만을 외치더라 말이죠.

아브라함이 예수님의 때를 보고 기뻐했듯이

다윗 또한 예수님의 때를 보고 기뻐하는 삶만 누리는 겁니다.

 

그럼 우리는 다윗은 과거요 우리는 현대이고 그 중간에 예수님이니까

우리는 예수님을 과거로 보고

과거의 예수님 때를 보고 기뻐하는 겁니까?

아니지요

여전히 미래의 예수님의 때를 보고 기뻐하는 겁니다.

그 미래가 소급해서 현재를 구성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과거에 둘 것은 예수님이 아니라 우리입니다.

우리 자신을 늘 과거에 두어버리면

뭘 해도 죄 밖에 없다 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겁니다.

곧 미래완료는 예수님 뿐임을 보게 된다는 거죠.

물론 불가능한 소리입니다.

제 말은 우리 자신을 자꾸 미래적으로 볼게 아니다 말이죠.

이전 것은 지나갔다 말이죠. 나 라는 존재 곧 자아는 지나가버린 겁니다.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곧 예수님의 미래완료 뿐이다 다 이루었도다 뿐이다는 겁니다.

그럼 현재를 구성하는 것은 다 이루었다가 구성하는 삶 뿐이다 말이죠.

 

그럼 선이 넘쳐야 하는데 왜 사회는 악으로 가득차고 점점 더 심해지고

점점 더 희망이 없어지느냐 라고 묻죠

 

자 그러니 불공평하다는 겁니다. 악을 허용하는 하나님이다 라고

그게 무슨 놈의 선이냐 라고

 

그런데 바로 그렇게 말하는 자의 불공평함을 들추어내니까

불공평하다고 불평하는 속내를 들추어내니까

그게 공평하다는 겁니다.

 

두 시선 자체가 그 어떤 접촉점이 없습니다.

 

문제는 이런 다윗의 시선을 그대로 이어받아서

에스겔 선지자가 다윗언약대로 선포하는 겁니다.

참선지자가 그렇게 증거하고

 

반대로 거짓선지자는 하나님은 눈에 보이는 이 이스라엘 민족의 편이다 라고 외칩니다.

 

두 사람이 성전에서 기도합니다.

 

말씀을 지켰다고 십의 이조 그리고 이레에 두 번 금식 그리고 저 세리처럼 토색하지 않게, 새리와 같지 않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반대로 세리는 끝을 봐버리니까

종말의 성령이 임해서 기도하게 되니까

뭘 해도 죄 뿐이기에 그저 용서해달라는 심판을 봐 버린 겁니다.

그러니 그 앞에서 말씀을 지켜온 것들을 끄집어 낼수 있는 것들이 아예 있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물론 원래 없었지만 더더욱 없다 말이죠.

 

율법의 완성인 사랑이 없기에 그 없다 라는 것을 직시 한 겁니다.

그러니 뭘 해도 저주 받아 마땅한 심판당해야 할 입장 뿐임을 보게 된 겁니다.

그러니 불공평하다고 따질 입장 조차도 없는

그럴 겨를도 없는 그 심판 그 자체를 본 겁니다.

 

인간은 구원의 방법론과 구원의 조건을 갖춘 것으로 접촉을 시도하지만

정작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철저하게 율법을 기준으로 해서 인간을 대하겠다는 겁니다.

 

이것이 인간 쪽에서는 불공평 하다고 말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아니 그렇게 어릴적부터 율법을 지켜왔는데 딱 하나 전재산을 가난한 자에게 주어라 그거 하나를 못 지키게 되니까

에스겔 18장을 근거로 하면 지옥 갈 수밖에 없다 말이죠.

부자청년이 이 에스겔 18장을 몰랐을까요?

너무 너무 잘 아니까 근심하고 등돌려 가는 겁니다.

 

그러나 세리는 에스겔 18장에 이런 내용이 있는 줄도 모를 겁니다.

세금 갈취해서 로마에 바치기 바쁘니

언제 말씀을 읽겠냐 말이죠

완전히 뼛속부터 친로마 인데

매국노 인데

민족을 배신 하는 자 인데

무엇이 그 세리 속에서 새로움이 나오겠습니까?

그런데 웬걸

정작 바리새인에게 없던

부자청년에게 없던

그 새로움이 민족의 배신자에게서 나오는 겁니다.

 

주여 제발 긍휼이 여겨주옵소서 라고 말이죠.

 

세리 이 양반은 졸지에 생명을 봐버렸어요

생명나무 되신 예수님 말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이든 부자청년이든 율법 아무리 지켜도 이상하게 예수님을 못 봐요

생명을 못 봐요

오히려 선악나무만 또렷하게 볼 뿐이지

생명나무를 못 본다 말이죠.

 

선악나무는 의사를 못 봅니다.

? 자기가 건강하다고 보니까 말이죠.

 

의사는 누구 눈에만 보입니까?

환자 눈에만 보입니다.

 

생명은 누구 눈에만 보입니까?

사망의 그늘에 폭 삭 주저앉은 자에게만 보이는 겁니다.

 

사망의 그늘에 앉은 적이 없는데 어떻게 생명을 보겠냐 말이죠.

그러니 여호와께서 사망의 그늘에 폭삭 주저 앉은 자를 천국 보내겠다고 하니까

 

반발 하는 겁니다.

불공평 하다고 말이죠.

 

딸랑 30분 일했는데 왜 천국 보내냐고

그럼 난 처음부터 와서 끝까지 일했는데 10시간 다 채웠는데

왜 똑같이 취급하냐고 말이죠.

이게 무슨 놈의 선이냐 라고

선악에서는 생명이 안 보이는 겁니다.

자신이 사망이라고 여긴 적이 없으니 말이죠.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쥐고 계신 분이

생명이다 말이죠.

 

열쇠를 쥐고 있는 분에게 당신은 악한 주인이다고 따지는 겁니다.

아니 키가 누구에게 있는데 따지냐 말이죠.

키 가

 

꽃놀이패 라는 프로그램을 보면 참으로 은혜를 받는데 ㅋㅋㅋㅋ

키 열쇠를 쥐게 되면

아무리 형님이고 뭐도 나발이고 무조건 아부를 해야 합니다.

불공평하다는둥 모순이 된다는 둥

부조리 하다는 둥

거리끼는 십자가 걸림돌이 된다고 치우고 싶다고 짜증을 내겠다는 둥

백날 우겨도

수건을 벗고

 

교복을 벗고 처음으로 만난 당신 ~~~~~~~~~~

 

무조건 아부 해야 한다 말이죠.

 

성경말씀은 무지 무지 차갑습니다.

이건 아부 정도가 아닙니다.

아부 저리가라 할 정도이다 말이죠.

목숨이 오락 가락 한다 말이죠.

 

무조건 살려 주세요 라고 바지자락 붙잡고 살려달라고 외쳐야 할 정도입니다.

허리가 뿌사 질 정도로 야곱이 살려달라 했잖습니까?

아침부터 펑펑 울면서

한 주먹 꺼리도 안되는 죽은 사울 집안의 아무 권력도 없는 한 사람의 저주를 듣고

다윗은 여호와 하나님께 아침부터 살려 달라고 펑펑 울면서 외친다 말이죠.

 

다윗의 자손이 저를 불쌍히 여겨 주소서 라고

문둥병자 소경이 고래 고래 고함을 칩니다.

안 살려주면 저 죽습니다 라고 외친다 말이죠.

얼마나 다급한지 모릅니다.

제자들은 짜증나죠

인파들이 몰려와서 예수님의 보디가드 역할 할려고 하니 신경이 날카로와 진다 말이죠.

 

(9:27, 개역)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가실새 두 소경이 따라오며 소리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더니

(15:22, 개역)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질러 가로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 하되

(20:30, 개역) 소경 둘이 길 가에 앉았다가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함을 듣고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니

(20:31, 개역) 무리가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더욱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지라

(21:9, 개역)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질러 가로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21:15, 개역)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의 하시는 이상한 일과 또 성전에서 소리질러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 아이들을 보고 분하여

 

왜 고래 고래 고함을 지르면서까지 다윗의 자손이여 라고 부르짖는 겁니까?

이것이 부르짖음의 전쟁입니다.

저쪽 들이랍시고 부르짖는 거다 말이죠.

 

즉 나는 환자입니다.

드디어 의사를 만났다는 겁니다.

당신이 의사 맞지요

당신은 의사입니다 라고 고래 고래 외치는 겁니다.

 

누구 들이랍시고? 바리새인 저 건강하다고 우기면서

의사가 필요없다고 하는 자들 들으랍시고 고래 고래 고함치는 겁니다.

 

나는 사망입니다. 당신은 생명입니다.

당신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쥐고 있는 생명이십니다 라고 외치는 겁니다.

 

다윗이 그렇게 외쳤거든요.

이것을 이어받아서 참선지자가 외치는 겁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잃어버린 경험을 갖게 할려고

이스라엘 쫄딱 망하게 합니다.

그런데 참선지자는 드디어 구원받았다고 외치는 겁니다.

수건 벗겨졌다고 외치는 겁니다.

춤을 추면서(예레미야) 너희들은 이제 돌아온단다 표시 해 둬라 헨델과 그레텔

 

결국 참선지자는

부자청년이나 바리새인처럼 십의 이조 이레에 두 번 금식 하는 인간 만들려고 하는게 아니라

 

오히려 그들이 때려죽어도 싫은 세리 같게 만들어서

도저히 율법을 지킬수 없는 바벨론 속으로 집어넣습니다.

사망 속에 집어넣습니다.

 

자 그럼 예수님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쥐고 있는 분으로 보일까요?

이상하게 사망 속에 놓여지게 되니까

내가 율법 지키냐 안지키냐의 여부가 아니라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쥐고 있는 예수님의 의해서만

그 처음과 나중 되신 생명나무 되신 예수님에 의해서만 구원이 됨을 보게 된다 말이죠.

그렇게 되니 오히려 자기가 세리처럼 주여 저를 불쌍히 여겨주소서 라고 해야할 수 밖에 없는 판국이 되는 겁니다.

 

이것 보다 공평한 공평이 어디있습니까?

불공평의 눈에만 보이는 불공평이어야 그게 공평이다는 겁니다.

 

그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쥐고 있는 분이

자물쇠를 열쇠로 따고 문을 여시는 분이

내가 당해야 할 심판을 대신 받음으로써 보여주신 생명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마귀가 아무리 예수님의 세 번 부인했다고 집요하게 죄책감을 부어도

너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는 그 부드러운 음성을 듣는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기 위해

죽음 속으로 뛰어든

사망 속으로 뛰어든

그 예수님이 너무 너무 고마워헛

마귀의 소송이 두렵지 않는 겁니다.

예수님의 피 흘리신 그 사랑이 더 크게 보이는 겁니다.

 

자 우리의 모순을 깨뜨리기 위해

주님은 모순으로 오시는 겁니다.

십자가의 죽음 보다 더 모순 되는게 어디있겠습니까?

모순 된 나를 대신 해서 십자가에 대신 달려 다 이루셨다는 율법의 완성

이 십자가 보다 더 모순 된 모순이 어디있냐 말이죠.

모순을 깨뜨리는 모순이다는 겁니다.

부정을 깨뜨리는 부정이다는 겁니다.

 

이 부정이 나를 유일하게 살리는 부정이다고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고 고래 고래 부르짖는 겁니다.

 

얌전한척 하는 양들은 그게 짜증나는 겁니다. 그래서 염소로 들통나는 겁니다.

 

고래 고래 고함을 치는 이들은 오로지 나 죽습니다 빨리 살려주세요 라고

자기 밖에 모르는 외침으로 오히려 염소인줄 알았는데 양으로 밝혀지게 됩니다.

 

팔이 어긎맞게 되는 상황의 종말이

그 끝이 소급해서 이 현재를 이루는 겁니다.

 

오늘 시편 111편에 나오는 여호와의 공의 정의로움 은혜로우심 자비 등등의 표현들은

사실상 인간들이 싫어하는 내용입니다.

인간 상대 하지 않고

오로지 언약만 상대하고

오로지 공의만 상대하고

오로지 정의만 상대하고

오로지 은혜와 자비만 상대하겠다는 겁니다.

 

반면에 인간이 쥐고 있는 히든카드는 그저 꽝 카드 밖에 없습니다.

그것도 모르고 번제와 제사만을 고집하겠다고 우기는 겁니다.

 

그거 안 통합니다.

주님은 오로지 은혜와 자비만 원하심에 있어서

너무 너무 차갑에 일체 양보함이 없으심입니다.

 

의사는 차가운 칼로 우리의 배를 가릅니다.

차갑게 나의 배를 가르지 않는 여호와는 가짜 여호와입니다.

 

철저하게 환자 취급하고

철저하게 죄인 취급하고

철저하게 사망 취급합니다.

 

맞습니다 저 개 맞습니다.

그러나 주여 개도 주인의 밥상에서 떨어진 부스러기를 먹지 않습니다.

당신의 자비와 은혜가 아니면 저는 살아도 산게 아닌 겁니다.

 

그야말로 귀신 들린 딸 아니였다면 도저히 만날 수 없었던 의사를 드디어 만난 겁니다.

 

그 의사는 차가운 칼로 매쓰 칼로 수술을 합니다.

드디어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았다고 말이죠.

 

(15:22, 개역)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질러 가로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 하되

(15:23, 개역)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

(15:24,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

(15:25, 개역)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15:26, 개역) 대답하여 가라사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15:27, 개역) 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15:28, 개역)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다윗의 자손이여 저를 수술해 주옵소서

오늘 수술 안해 주시면 저 죽습니다.

이미 죽은지 사흘이나 지났습니다.

주여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쥐고 있는 생명이시여

어서 문을 열어 주옵소서

저 이 사망인 나를 고쳐주소서 라고 고래 고래 외치는 자로 만드시는

환자로 만드시는

그 의사가 바로 오늘 나오는 불공평하기 짝이 없는

부조리하고 편파(불공평)적인 그 사랑이

불의한, 불공평한 나 보다 더 나은 불의한 십자가의 용서로

다 이루었다고 선언해 버리신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쥐고 계신

 

다윗의 자손이여 저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라고 외칠 수밖에 없는

 

그 사형장인 십자가에서 비로소 만나게 된 예수님이라는 것을

 

공의로우신 여호와임을 다윗은 외치고 있습니다.

 

(18:1, 개역)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18:2, 개역) 너희가 이스라엘 땅에 대한 속담에 이르기를 아비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아들의 이가 시다고 함은 어찜이뇨

(18:3, 개역)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너희가 이스라엘 가운데서 다시는 이 속담을 쓰지 못하게 되리라

(18:4, 개역) 모든 영혼이 다 내게 속한지라 아비의 영혼이 내게 속함 같이 아들의 영혼도 내게 속하였나니 범죄하는 그 영혼이 죽으리라

(18:5, 개역) 사람이 만일 의로워서 법과 의를 따라 행하며

(18:6, 개역) 산 위에서 제물을 먹지 아니하며 이스라엘 족속의 우상에게 눈을 들지 아니하며 이웃의 아내를 더럽히지 아니하며 월경 중에 있는 여인을 가까이 하지 아니하며

(18:7, 개역) 사람을 학대하지 아니하며 빚진 자의 전당물을 도로 주며 억탈하지 아니하며 주린 자에게 식물을 주며 벗은 자에게 옷을 입히며

(18:8, 개역) 변을 위하여 꾸이지 아니하며 이식을 받지 아니하며 스스로 손을 금하여 죄악을 짓지 아니하며 사람 사람 사이에 진실히 판단하며

(18:9, 개역) 내 율례를 좇으며 내 규례를 지켜 진실히 행할진대 그는 의인이니 정녕 살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18:10, 개역) 가령 그가 아들을 낳았다 하자 그 아들이 이 모든 선은 하나도 행치 아니하고 이 악 중 하나를 범하여 강포하거나 살인하거나

(18:11, 개역) 산 위에서 제물을 먹거나 이웃의 아내를 더럽히거나

(18:12, 개역)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학대하거나 억탈하거나 빚진 자의 전당물을 도로 주지 아니하거나 우상에게 눈을 들거나 가증한 일을 행하거나

(18:13, 개역) 변을 위하여 꾸이거나 이식을 받거나 할진대 그가 살겠느냐 살지 못하리니 이 모든 가증한 일을 행하였은즉 정녕 죽을지라 자기의 피가 자기에게 돌아가리라

(18:14, 개역) 또 가령 그가 아들을 낳았다 하자 그 아들이 그 아비의 행한 모든 죄를 보고 두려워하여 그대로 행하지 아니하고

(18:15, 개역) 산 위에서 제물을 먹지도 아니하며 이스라엘 족속의 우상에게 눈을 들지도 아니하며 이웃의 아내를 더럽히지도 아니하며

(18:16, 개역) 사람을 학대하지도 아니하며 전당을 잡지도 아니하며 억탈하지도 아니하고 주린 자에게 식물을 주며 벗은 자에게 옷을 입히며

(18:17, 개역) 손을 금하여 가난한 자를 압제하지 아니하며 변이나 이식을 취하지 아니하여 내 규례를 지키며 내 율례를 행할진대 이 사람은 그 아비의 죄악으로 인하여 죽지 아니하고 정녕 살겠고

(18:18, 개역) 그 아비는 심히 포학하여 그 동족을 억탈하고 민간에 불선을 행하였으므로 그는 그 죄악으로 인하여 죽으리라

(18:19, 개역) 그런데 너희는 이르기를 아들이 어찌 아비의 죄를 담당치 않겠느뇨 하는도다 아들이 법과 의를 행하며 내 모든 율례를 지켜 행하였으면 그는 정녕 살려니와

(18:20, 개역)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을지라 아들은 아비의 죄악을 담당치 아니할 것이요 아비는 아들의 죄악을 담당치 아니하리니 의인의 의도 자기에게로 돌아가고 악인의 악도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18:21, 개역) 그러나 악인이 만일 그 행한 모든 죄에서 돌이켜 떠나 내 모든 율례를 지키고 법과 의를 행하면 정녕 살고 죽지 아니할 것이라

(18:22, 개역) 그 범죄한 것이 하나도 기억함이 되지 아니하리니 그 행한 의로 인하여 살리라

(18:23, 개역)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어찌 악인의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랴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서 사는 것을 어찌 기뻐하지 아니하겠느냐

(18:24, 개역) 만일 의인이 돌이켜 그 의에서 떠나서 범죄하고 악인의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대로 행하면 살겠느냐 그 행한 의로운 일은 하나도 기억함이 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그 범한 허물과 그 지은 죄로 인하여 죽으리라

(18:25, 개역) 그런데 너희는 이르기를 주의 길이 공평치 않다 하는도다 이스라엘 족속아 들을지어다 내 길이 어찌 공평치 아니하냐 너희 길이 공평치 않은 것이 아니냐

(18:26, 개역) 만일 의인이 그 의를 떠나 죄악을 행하고 인하여 죽으면 그 행한 죄악으로 인하여 죽는 것이요

(18:27, 개역) 만일 악인이 그 행한 악을 떠나 법과 의를 행하면 그 영혼을 보전하리라

(18:28, 개역) 그가 스스로 헤아리고 그 행한 모든 죄악에서 돌이켜 떠났으니 정녕 살고 죽지 아니하리라

(18:29, 개역) 그런데 이스라엘 족속은 이르기를 주의 길이 공평치 않다 하는도다 이스라엘 족속아 나의 길이 어찌 공평치 아니하냐 너희 길이 공평치 않은 것이 아니냐

(18:30, 개역)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국문할지니라 너희는 돌이켜 회개하고 모든 죄에서 떠날지어다 그리한즉 죄악이 너희를 패망케 아니하리라

(18:31, 개역) 너희는 범한 모든 죄악을 버리고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할지어다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어찌하여 죽고자 하느냐

(18:32, 개역)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죽는 자의 죽는 것은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노니 너희는 스스로 돌이키고 살지니라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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