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머리를 드시리로다 (시편 110편)
멜기세덱의 반차를 쫏아 ~~ 그리고 잃어버린 것을 되찾는 부활(그의 머리를 드심)
(시 110:1, 개역) 『[다윗의 시]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
(시 110:2, 개역)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주의 권능의 홀을 내어 보내시리니 주는 원수 중에서 다스리소서』
(시 110:3, 개역)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
(시 110:4, 개역)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치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시 110:5, 개역) 『주의 우편에 계신 주께서 그 노하시는 날에 열왕을 쳐서 파하실 것이라』
(시 110:6, 개역) 『열방 중에 판단하여 시체로 가득하게 하시고 여러 나라의 머리를 쳐서 파하시며』
(시 110:7, 개역) 『길가의 시냇물을 마시고 인하여 그 머리를 드시리로다』
(마 22:44, 새번역) 『㉧'주님께서 내 주께 말씀하셨다.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굴복시킬 때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어라」'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된 일이냐? / ㉧시 110:1』
(막 12:36, 새번역) 『다윗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친히 이렇게 말하였다. ㉪'주님께서 내 주께 말씀하셨다.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굴복시킬 때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어라.」' / ㉪시 110:1』
(눅 20:42, 새번역) 『다윗이 친히 시편에서 말하기를 ㉦'주님께서 내 주께 말씀하셨다. / ㉦시 110:1』
(행 2:35, 새번역) 『㉫'주님께서 내 주님께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굴복시키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어라 하셨습니다.' / ㉫시 110:1(칠십인역)』
(히 1:13, 새번역) 『그런데 하나님께서 천사 가운데서 누구에게 ㉧"내가 네 원수들을 네 발 아래에 굴복시킬 때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어라" 하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까? / ㉧시 110:1(칠십인역)』
(히 5:6, 새번역) 『또 다른 곳에서 ㉡"너는 멜기세덱의 계통을 따라 임명받은 영원한 제사장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 ㉡시 110:4』
(히 7:17, 새번역) 『그를 두고서 말하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계통을 따라서, 영원히 제사장이다" 한 증언이 있습니다. / ㉤시 110:4』
(히 7:21, 새번역) 『그러나 예수께서는 자기에게 말씀하시는 분의 맹세로 제사장이 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맹세하셨으니, 주님은 마음을 바꾸지 않으실 것이다. 너는 영원히 제사장이다" 하셨습니다. / ㉥시 110:4』
(히 10:12, 새번역)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죄를 사하시려고, ㉤단 한 번의 영원히 유효한 제사를 드리신 뒤에 ㉥하나님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 ㉣그, '이분께서는' ㉤또는 '오직 한 번 제사를 드리신 뒤에 영원히' ㉥시 110:1』
(히 10:13, 새번역) 『그리고서 그는 ㉦그의 원수들이 그의 발 아래에 굴복할 때까지 기다리고 계십니다. / ㉦시 110:1』
아마 신약에서 시편 110편 1절이 많이 인용이 되는 것 같더군요
결국 이 원수 문제가 제대로 또렷하게 해결되는
다 이루었다 라는 의미로써 신약에서 인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우리의 현실에서는 이 다 이루었다가 여전히 미완료요
이미와 아직이라는 모호성에 잡혀있는 듯 보입니다.
왜냐하면 믿음의 세계가 아니라 육의 세계에 발 딛고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 보니 이것을 이용하는 마귀들의 작당이 벌어집니다.
이 이미와 아직으로 다 이루었다를 가리는 식으로 말이죠.
이미와 아직이 오히려 구체화 되어있고
다 이루었다 라는 것은 모호성으로 만드는 마귀들의 활동 말입니다.
왜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가? 그것은 바로
놀랍게도 자기자신을 죄인으로
전혀 가망없는 죄인으로 보는게 아니라
즉 원수로 보는게 아니라
즉 죽은 자로 보는게 아니라
조금이라고 가망성이 있는 의인 되기 라는 희망을 걸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니 십자가는 거리끼는 걸림돌이 되고
모호한 번제와 제사를 여전히 반복하는
의문의 수건을 벗지 않는 모습으로 완고하게 행동하고 있는 겁니다.
행하고 실천하면 할수록 그렇게 실천한 자아는 더욱더 완악하게 자리 잡게 됩니다.
많은 교회를 통해서 교회 다니는 사람을 보면 정말로 완악하기 짝이 없습니다.
특히 눈에 보이는 사람이나 교회조직이 사람들에게 자리 잡게 되면
그것을 사수하기 위해서 더더욱 완악한 모습에 몸서리칠 정도로 완고하다는 겁니다.
기본적으로 장로들은 대부분 그러합니다.
유교와 기독교를 짬뽕 시킨 자들의 대표성을 보여줍니다.
과거에 유교를 사수하기 위해서 상투를 짜른 자식에게 죽으라고 할 정도로 말이죠.
번제와 제사만 지킬줄 알았지 그 속의 알맹이 사랑은 없는 겁니다.
인애와 자비는 없다 말이죠.
반면에 목사 중심의 교회를 보면 상당히 활동적이기는 하나
그 껍데기를 한꺼플 벗겨보면
그 원동력은 자본이라는 돈이 중심이 되어 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목회자가 젊은 사고방식이라서가 아니라 말이죠.
돈만 빼버리면 마치 빵빵한 풍선이 바람 빠진냥 무기력하기 짝이 없는 실상을 보게 되는 겁니다.
허깨비 풍선만 요란하게 나풀 나풀 거렸던 겁니다.
꽹과리처럼 요란하게 말이죠.
그러나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니 성령으로 인한 교회가 아니다는 겁니다.
주의 오른손에 사로잡힌 교회가 아니다는 거죠.
바리새인을 그래서 돈을 사랑하는 자 라고 예수님이 욕하셨고
그들은 열정적으로 교인 하나 얻기 위해 바다 육지를 두루 다니면서
소경이 소경의 길로 인도한다고 했습니다.
(마 15:14, 개역) 『그냥 두어라 저희는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하신대』
(마 23:15, 개역)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마 23:15, 새번역)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아!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개종자 한 사람을 만들려고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하나가 생기면, 그를 너희보다 배나 더 못된 ㉦지옥의 자식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 ㉦그, '게헨나'』
그 정도로 열정적이다는 거죠.
이것 보다 또렷한게 어디 있겠냐 라는 거죠.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라고 나 라는 존재를 의심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내 열정이 이렇게 나를 또렷하게 하는데 이것 보다 더 또렷한게 어디 있겠냐 라는 거죠.
그런데 여기에 자기 목숨을 버려서 죄인을 위하여 버리신다 말이죠.
존재가 사라졌어요.
데카르트처럼 존재가 또렷해 지는게 아니라
또렷하다고 우기는 나의 존재성이 졸지에
그 앞에서 뻔데기 앞에서 주름 잡은 꼴이 된 겁니다.
또렷 보다 더 또렷한 더 나은 또렷함 앞에
졸지에 나의 또렷은 흐릿함의 모호함이요 의문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분명 나의 열정으로 나는 또렷해 졌는데
나의 실천으로 나는 또렷했는데
그런 나를 호모하고 의문으로 만들어 버리는
더 나은 또렷함이 등장해 버린 겁니다.
바리새인 보다 더 또렷함이 나타났다는 겁니다.
(마 5:20, 개역)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이것 때문에 졸지에 원수가 거꾸로 소급해서 규정이 되어버린 겁니다.
그것을 다윗이 고백하는 겁니다.
원수는 나 다윗입니다.
왜? 나 보다 더 또렷한 분이 등장해 버림으로써
이제 인간 중에는 왕이 없습니다.
왕 다운 왕은 없습니다.
왕 꼬라지들이 다 거기서 거기인 도찐개찐일 뿐입니다.
그 어떤 인간도 또렷한 자는 없고 졸지에 의문덩어리일 뿐이다는 겁니다.
그럼 누가 왕인데?
멜기세덱의 반차 곧 허리에서 난 자만이 진짜 왕이다는 겁니다.
그 나머지는 다 가짜이다는 겁니다.
심지어 유다 지파에서도 왕이 나오지 않는다는 겁니다.
오로지 멜기세덱 지파에 도리어 접붙임 당해야만 한다는 겁니다.
그 멜기세덱이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는데
어떻게 왕의 반차에 올라올수 있겠냐 말이죠.
왕이란 원수를 멸하고 그 원수의 손에서 구원하는 자가 왕이다 말이죠.
그런데 심지어 다윗 조차도 원수로써 원수가 되어서 원수에게 사로잡힐 뿐이지
누가 구원해 주어야 할 대상물이지
다윗이 구원자가 못 된다는 겁니다.
유다지파에서도 왕이 나오지 못한다는 겁니다.
도리어 누가 구원해 주지 않으면 물에 빠져 익사하는
지옥에서 빠져나올수 없는 자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주의 오른손인 멜기세덱 지파에서 원수를 발등상위에 놓게 되는 겁니다.
이 땅에서 아비도 있고 어미도 있고 족보도 있는 자는
구원자가 될 수가 없다는 겁니다.
왕이 될 수가 없다는 겁니다.
오히려 원수요
원수에게 사로잡힌 자인 포로요 죄인이요 노예요 환자이다는 겁니다.
에이 그럼 아무도 구원을 받을 수 없겠네???
내 말이 ~~~
네 바로 그겁니다.
우리는 성경책에서 예수님만 한 말만 빨간색으로 읽을게 아니라
제자들이 한 말도 빨간색으로
성경 전체가 빨간색으로 읽어야 한다는 겁니다.
아무도 구원 받을 수 없겠네
도대체 그럼 누가 구원 받겠는가? 라고 한 것이
제자들이 예수님이 벌린 사건을 만날 때 마다 내놓은 반응입니다.
곧 우리들의 반응입니다.
(마 19:25, 개역) 『제자들이 듣고 심히 놀라 가로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막 10:26, 개역) 『제자들이 심히 놀라 서로 말하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하니』
(눅 18:26, 개역) 『듣는 자들이 가로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나이까』
그럼 누가 구원 받겠노
참으로 어렵도다 ~~~
단절성을 직시하게 되는 겁니다.
(마 19:26, 개역)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
(막 10:27, 개역)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눅 18:27, 개역) 『가라사대 무릇 사람의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
너희는 못하나 주님은 하신다 말이죠.
즉 단절을 통해서 하시는 겁니다.
(슐라이어 마허에서 반틸 다시 폴틸리히 다시 가다머 다시 도날드 거스리
이 노무 도날드 거스리를 모르면 개혁주의를 모르는 것이다 라고 공갈 협박을 하는데
정작 자유주의신학을 배격하는 정통이라고 우겨놓고서는
양식비평을 하는 거스리를 수용하더라 말이죠.
자기들 마음대로 법지키라고 규칙을 만들고서는 그 법의 예외 조항으로
거스리를 예외로 두니 얼마나 모순 되냐 말이죠.
이런 신학자들은 결국 접촉점을 통해서 주님께 나아갈수 있다고 본 겁니다.
그러나 다윗은 정작 그 접촉점을 시도하다가 박살났습니다.
오히려 아무것도 없이 박살난 그 자체가 구원이였다 말이죠.
왜 쓸데 없이 구원의 접촉점 바벨탑 장치를 만드냐 말이죠.
개방이라는 둥 가능성이라는 둥
우리도 거지 나사로가 되면 천국 갈수 있다는 둥,
심지어 죄인 되기도 실천 운동을 해요
이미 죄인으로 태어났는데 뭘 또 죄인되기운동을 해????)
반면에 인간은 접촉점(개방,가능성)을 가지고서 일하는 사람의(마귀) 일만 생각할 줄 알았지
하나님의 일은 생각지 않는 겁니다.
그럼 하나님의 일이 뭡니까?
(마 16:23, 개역)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하나님의 일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토록 만들어서
마귀에게 잡혀 오도록 하시는 겁니다.
그래놓고 베드로를 잡아온 마귀에게 베드로를 마귀보란 듯이 용서하고 사랑해 버리시는 겁니다.
맏아들 보란 듯이 막나니 탕자를 용서해 버리는 겁니다.
그때에 맏아들은 곧 마귀는 예수님의 개입 곧 십자가의 개입
번제와 제사를 원치 않고 인애와 자비를 원하시는
다 이루었다의 개입을 거부하는
그래서 전 재산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주지 못했다고
사랑 없는 율법만 지켰다고 등돌리고 돌아서는
여전히 완악해서 다 이루었다를 원치 않는
마귀 보란 듯이 펼쳐지는 베드로에 대한 무조건적인 용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는 그 부드러운 음성의 개입을
마귀는 싫어하는게 그 마귀가 곧 완악한 인간들이
수건쓴 인간들이 듣기 싫어하는 이 목자의 음성의 개입을 통해
원수와 주의 오른팔의 대립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일이다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예수님을 배반한 원수 베드로를 잡았다고 좋아라 하는 진짜 원수 마귀를
들추어내심으로써 주의 오른팔을 나타내시는 것을 하나님의 일이다고 하는 겁니다.
다시 좀 더 복잡하게 이야기 하면
오늘 본문 1절에 나오는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에서 보듯이
주께서 내 주께 말씀하신다는 겁니다.
유일신 사상은 엉터리죠
다신교 민족들도 많지만 유일신 민족도 많습니다.
둘 다 엉터리 이다는 겁니다.
한 개 라는 존재 개념
마찬가지로 두 개 라는 존재개념은 인간이 자기 존재를 투사해서 파악하는 겁니다
나는 나예요 상관 말아요요요 청바지 입고서 회사에 가도
그러니까 하나님을 한 분으로 본다는 것은
나는 나 이지 너가 될수 없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 이런 자들에게는 하나님은 한 분이신 하나가 아닌 셈입니다.
하나 라는 한 개를 주장한다는 자체가 하나가 아니다는 겁니다.
너와 나는 하나가 아니라 너는 너고 나는 나 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상관하지 말라 간섭하지 말라는 겁니다. 이게 무슨 하나 입니까?
이게 무슨 놈의 한 분 유일신 사상입니까?
관계성이 없는 거죠.
한 분 이라는 단어로 성경 검색해 봤습니다
(마 19:17,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막 2:7, 개역)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참람하도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막 10:18, 개역)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막 12:32, 개역) 『서기관이 가로되 선생님이여 옳소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그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신 말씀이 참이니이다』
(눅 18:19, 개역)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요 8:41, 개역) 『너희는 너희 아비의 행사를 하는도다 대답하되 우리가 음란한 데서 나지 아니하였고 아버지는 한 분뿐이시니 곧 하나님이시로다』
(롬 3:30, 개역)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는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롬 5:17, 개역)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고전 8:4, 개역) 『그러므로 우상의 제물 먹는 일에 대하여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는 줄 아노라』
(딤전 2:5, 개역)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딤전 6:15, 개역) 『기약이 이르면 하나님이 그의 나타나심을 보이시리니 하나님은 복되시고 홀로 한 분이신 능하신 자이며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시요』
(약 2:19, 개역)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결국 한 분이라는 말입니까? 두 분이라는 말입니까?
한 분 이지요. 그러나 두 분이다 말이죠. ㅋㅋㅋㅋ
헷갈리죠.
유일신 사상이 왜 엉터리인고 하니
바리새인의 해석이 왜 엉터리인고 하니
문자로 봐서 그런 겁니다. 역사로 봤다 말이죠.
묵시로 즉 성령으로 못 본 겁니다.
다시 말해서 접촉점으로 본 겁니다.
가능성과 개방성으로 본 겁니다.
그런데 단절로써는 못 본 겁니다.
즉 오늘 제목을 그 머리를 들리라 라고 했습니다.
그 머리를 드는 것을 보는 자는 죽은자입니다.
죽은자만이 부활을 보는 겁니다.
왜? 살아있는데 어떻게 부활하냐 말이죠
아무도 그것은 부활이다고 안 봅니다.
죽었는데 부활이 덮치니 다시 살게 되고
끊어졌는데 부활이 덮치니 연결이 되고
땡 탈락 불합격 이었는데 부활이 덮치니 딩동뎅 합격 무시험 합격이 되더라 말이죠
이것을 부활이라고 표현한다 말이죠.
앞과 뒤가 서로 모순 되는 겁니다. 그 어떤 연결점이 없는 단절성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부활은 원인 없는 결과인데
모든 종교의 부활이 심지어 유대교 바리새인 조차도
오늘날 현대교회도 부활을 원인 있는 결과로 해석하는 엉터리 해석을 하는 이유는
죽은자로써가 아니라, 살아있는 자아를 더더욱 확장하는 차원에서 부활을 보는 겁니다.
그러니 부활이 인물이 될수가 없는 거죠.
자기가 성취해서 소유하는 개념으로 보는 겁니다.
믿음도 그런 식으로 보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벌써 눈치 채신분 있지요?
인간들이 주장하는 [하나] 라는 것은 곧 동일성, 일치성, 합일사상은 접촉점을 찾아내겠다는 [사람의 일]이다는 겁니다,
베드로가 사람의 일만 생각하다가 사탄아 라고 욕먹었고
다윗이 율법 네 배나 갚으라 라고 하다가 니가 그 범인이다 너나 잘하세요 라고 지적받은 겁니다.
즉 기여이 원인 있는 결과로써의 구원을 받겠다고 그 구원에 그 [한 분 하나님]에 접촉을 시도하는 겁니다.
그래서 거지나사로-되기 운동을 펼치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은 원인 없는 결과입니다. 여전히 단절 되어 있습니다.
비밀이 풀리지 않습니다. 비밀 그 자체로 담겨져 버립니다.
비밀을 푸는게 아니라 그 비밀 속에 빨려 들어가 버림을 당하는 겁니다.
비밀 속에 거하게 되는 겁니다. 예수 라는 이름 속에 거한다 말이죠.
이번에는 하나요 라는 단어로 검색해 봤습니다.
(고전 10:17, 개역)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예함이라』
(엡 4:4, 새번역)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요, 성령도 하나입니다. 이와 같이 여러분도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그 부르심의 목표인 소망도 하나였습니다.』
(엡 4:5, 새번역) 『주님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 ㉠또는 '침례'』
(엡 4:1, 개역)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엡 4:2, 개역)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엡 4:3, 개역)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엡 4:4, 개역)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엡 4:5, 개역)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침례도 하나이요』
(엡 4:6, 개역)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엡 4:7, 개역)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엡 4:8, 개역)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엡 4:9, 개역) 『올라가셨다 하였은즉 땅 아랫 곳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
(엡 4:10, 개역) 『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케 하려 하심이니라』
(엡 4:11, 개역)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엡 4:12, 개역)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엡 4:13, 개역)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엡 4:14, 개역)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엡 4:15, 개역)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자 성화론자들이나 유일신 사상을 주장하는 자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요
성령도 하나요
주님도 한 분이시오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라고 했는데
이 많은 하나 에 당신이 한 것이 무엇이 있는지요?
그리스도 몸 하나 임에 당신이 한 일은?
성령이 하나 임에 당신이 한 것은?
주님이 한 분 이심에 당신이 한 것은? 유일신 주장한 것 입니까!!!
또 믿음도 하나 라고 했는데 이렇게 수많은 파가 생기고 있는데 당신이 한 것?
세례도 하나 인데 왜 침례가 있고, 약식이 있고 왜 이렇게 많은지?
이유는 딱 하나입니다. 인간은 때려죽어도 하나가 안된다는 겁니다.
같은 교회 다녀도 결국 하나 아닙니다.
다 달라요
백날 수단과 방법 다 동원해 보세요 되는가?
안된다 말이죠
뭘해도 안되요
물론 완벽하지는 않지만 자꾸 시도해 보고, 또 그렇게 하다 보면 될 것이다 라는 희망과 가능성을 가지고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위에서 언급한 접촉점을 주장하는 도날드 거스리 라는 자들이다 말이죠.
그럼 왜 안되는데?
인간은 배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단절 말이죠.
그래서 상대적인 성령이 활동하는 겁니다.
즉 성령이라고 하면 인간은 빼버리겠다는 의미입니다.
성령이 어떤 일을 하게 하느냐 하면 하나되었음을 누리게 하는 겁니다.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저절로 하나가 벌써 이미 되었뿌쎠를 누리게 하는 겁니다.
일한자에게는 그 일 한것에 대한 보상으로써 삯을 주어야 하는데
만약 바로 못 주면 빚이 되고 빚을 갚아야 하는 의무가 되는데
(맏아들에게 아버지는 새신발 금가락지 살진 송아지 고기가 졸지에 빚이 되고 말았어요
아버지에게 빚진게 아니라 맏아들에게 졸지에 빚졌다 말이죠.
이게 수건을 벗지 않는 완악한 유대인이라는 겁니다. 자꾸 빚 갚을려고 한다 말이죠.)
일하지 않는 자에게 일을 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의롭다 라고 하면
의롭게 여기신 분의 믿음으로 인해 믿음이 의로 여김을 받게 된다 말이죠.
(원인 없는 결과 로써의 의로움이요 믿음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논리적으로 말도 안되는 모순입니다,
일을 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의롭다 하냐 말이죠.
그것은 그 뒤에 나옵니다. 의롭다고 하신 분의 의롭다고 일방적으로 편파해석하는 그 믿음을 믿는 겁니다.
그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는 셈이니 말이죠. 이것을 다윗이 기뻐한 겁니다. 미래에서 덮쳐졌다는 겁니다.)
(롬 4:1, 개역)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된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롬 4:2, 개역)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롬 4:3, 개역)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
(롬 4:4, 개역)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롬 4:5, 개역)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롬 4:6, 개역)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 바』
(롬 4:7, 개역)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롬 4:8, 개역)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롬 4:9, 개역) 『그런즉 이 행복이 할례자에게뇨 혹 무할례자에게도뇨 대저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하노라』
(롬 4:10, 개역) 『그런즉 이를 어떻게 여기셨느뇨 할례시냐 무할례시냐 할례시가 아니라 무할례시니라』
(롬 4:11, 개역) 『저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저희로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롬 4:12, 개역) 『또한 할례자의 조상이 되었나니 곧 할례 받을 자에게뿐 아니라 우리 조상 아브라함의 무할례시에 가졌던 믿음의 자취를 좇는 자들에게도니라』
(롬 4:13, 개역)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후사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탕자는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졸지에 다 받았으니 주시는 분에 의해서 그냥 의로 여김을 받아 버린 겁니다.
탕자는 불가항력적 은혜 속에 잠식 되어 버립니다.
이것이 바로 머리를 든다 라는 구원의 의미인 부활의 의미입니다.
부활은 죽은 자에게만 해당 됩니다.
구원은 죄인에게만 해당 되요
의사는 환자에게만 해당 되요
구원과 죄인은 앞 뒤가 안맞는 언발란스 한 모순이요 부조리 입니다 스캔달 불륜이다 말이죠.
그러니 부활도 스캔달이다 말이죠,
어떻게 잃어버린 자에게만 되 찾음이 되느냐 말이죠,
안 잃어버린 99마리가 부활에 해당 되어야 하는데
왜 잃어버린 양 한마리가 부활에 해당되느냐 말이죠.
이것이 목자의 음성이다는 겁니다. 그의 머리를 드시는 분 때문이다는 겁니다.
결과를 봐야지 원인을 보면
원인이 없다는 겁니다. 결과 뿐입니다.
오히려 원인을 갖추면 결과가 없어요
그 머리를 드심은 잃어버린 자에게만 해당되는 되찾음 이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모든 천국의 비유는 잃어버린 자 되찾기입니다.
주님 쪽에서의 찾아내심인데
인간 쪽에서 주님 찾기가 아니다 말이죠.
바로 여기서 원수가 등장하는 겁니다.
왜 잃어버렸는가에 대한 독박을 쓰는 자가 이 놈 때문이다 라는
뒤짚어 씌움을 당하는 자로써 동원이 되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마귀는 불안한 겁니다.
왜 벌써 오셨냐고 아직 때가 되지 않았는데 왜 먼저 왔냐고 따지는 겁니다.
(마 8:28, 개역) 『또 예수께서 건너편 가다라 지방에 가시매 귀신 들린 자 둘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니 저희는 심히 사나와 아무도 그 길로 지나갈 수 없을 만하더라』
(마 8:29, 개역) 『이에 저희가 소리질러 가로되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 하더니』
(마 8:30, 개역) 『마침 멀리서 많은 돼지 떼가 먹고 있는지라』
(마 8:31, 개역) 『귀신들이 예수께 간구하여 가로되 만일 우리를 쫓아 내실진대 돼지 떼에 들여 보내소서 한대』
(마 8:32, 개역) 『저희더러 가라 하시니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는지라 온 떼가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 들어가서 물에서 몰사하거늘』
그리고서는 마귀는 오히려 자기가 하나님의 원수를 찾아냅니다.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베드로를 잡는 이유입니다.
솔로몬 재판에서 범인이 범인을 잡아 법원에 고소했기 때문에
이 원수의 장난이 시골 촌 구석에서 왕의 중앙 자리로
주의 발등상으로 올라가는 겁니다.
아무도 못 푸는 전국적인 난제가 되었다 말이죠.
반드시 솔로몬 왕에게만 풀리는 숙제이기에 아무도 못 풀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그러니 솔로몬 왕의 자리에 까지 올라가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원수는 주의 발등상에 놓여지게 되는 겁니다.
가장 끝까지 올라가는 겁니다.
욥기에서 마귀와 내기하시는 이유가 바로
원수 보고 원수 잡아오라는 겁니다.
그러니 마귀는 뭘 해도 지도록 되어 있고
주님은 뭘 해도 다 이루었다가 되는 겁니다.
다시 정리해 보면
주님 쪽에서의 찾아내심인데
인간 쪽에서 주님 찾기가 아니다 말이죠.
실로암 소경 사건에서도 누가 날 고쳤지요 라고 바리새인이 도리어 너 예수가 고쳤어 라고
난 모세 제자이지롱 너 예수 제자이지? 쨔샤 찌그러져 어딜 감히 흙수저가 금수저에게 덤벼 라고
답을 알려주듯이
마귀는 아무도 못 풀게 한 수수께끼를(원수가 원수를 잡은)
예수님에게 까지 이 문제를 높이 높이 올리는 겁니다.
아무도 못 푸는 십자가 라는 스캔들 수수께끼
결국 마귀는 주님이 되찾으러 왔다 라는 그 개입을 거부하는 겁니다.
다 이루었다의 개입을 거부하는 것이 마귀의 일입니다.
십자가 지러 왔다는 것을 베드로는 인간적인 정으로 막아선 겁니다.
그 정이 또렷하던가요? 아니면 작심 3초 곧 바로 세번 부인하던가요?
의문의 흐릿함으로 가로막는 사람의 일만 생각한 겁니다.
하나님의 일은 그 정반대인 또렷한 다 이루었다를 이루심입니다.
그러니 마귀는 이 하나님의 일 곧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을
예수님의 믿음을 이루심을 거부하는 겁니다.
맏아들이 잃어버렸다 되찾은 아버지의 용서가 개입하는 것을 거부하는 겁니다.
그러니 원수는 오로지 예수님의 원수이지 인간의 원수가 아니다 말이죠.
원수 마귀는 원수란 하나님의 원수이다를 주장하고 있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원수가 아닌 예수님 자신의 원수를 주장하고 있다 말이죠.
(시 110:1, 개역) 『[다윗의 시]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네 원수] 곧 [네=너의] 는 예수님입니다.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래서
두 주님입니다.
주께서 내 주께
주님이 두 분이시다 말이죠.
(마 22:44, 개역)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
(마 22:44, 새번역) 『㉧'주님께서 내 주께 말씀하셨다.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굴복시킬 때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어라」'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된 일이냐? / ㉧시 110:1』
(막 12:36, 개역)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친히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발 아래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니라』
(막 12:36, 새번역) 『다윗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친히 이렇게 말하였다. ㉪'주님께서 내 주께 말씀하셨다.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굴복시킬 때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어라.」' / ㉪시 110:1』
(눅 20:42, 개역) 『시편에 다윗이 친히 말하였으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눅 20:42, 새번역) 『다윗이 친히 시편에서 말하기를 ㉦'주님께서 내 주께 말씀하셨다. / ㉦시 110:1』
나타난 하나님과 숨은 하나님으로 두 주님이다는 겁니다.
원수 담당은 나타난 하나님이 아니라
숨은 하나님 담당입니다.
그러니 숨은 하나님의 원수이다 라는 겁니다.
아무도 원치 않는 하나님인 예수님의 원수이다는 겁니다.
다들 원하는 하나님은 고개를 돌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숨은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싫어버린바 되었기 때문에 다들 고개를 돌려 버립니다.
싫어버린바 되었다고 말이죠.
왜 이런 차이를 보일까요?
이유 없습니다.
마귀를 원수 삼은 분은
자신의 긍휼을 나타내시는 예수님이지
하나님이 아니다는 겁니다.
마귀 곧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을 모세의 제자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제자이다는 겁니다.
즉 때려죽어도 하나님의 제자이지, 예수의 제자는 아니다는 겁니다.
그랬다가는 자신들의 조직이 와해 되는 겁니다.
조직이 우선이지 예수님이 우선이 되지 않습니다.
자 그렇기 때문에 인간 쪽에서 하나님을 믿겠다 라는 것은 다 엉터리이다는 겁니다.
어떤 기자가 무신론자인 이스라엘 총리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을 믿습니까 라고 말이죠.
그 여총리의 대답이
나는 유대 민족을 믿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신을 믿습니다 라고 대답했다는 겁니다.
곧 유대민족에게 이 땅을 허락한 자는 신이다는 거죠.
땅을 되찾은 이스라엘 첫 총리(우리로 치면 대통령)의 대답입니다.
자 이런식으로 신의 뜻에 거스르는 자는 신의 원수가 된다는 식이 유대인의 해석인 겁니다.
조직과 하나님의 뜻을 동일시 했고 그 증거가 당신들 기자의 눈에 보이는 유대공동체 나라 라는 겁니다.
그 공동체를 천국으로 봐 버린 겁니다. 곧 하나님이요 하나님 나라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 땅을 지키기 위해서 사수하기 위해서 완악해져야만 하는 겁니다.
졸지에 선물이 아니라 번제와 제사가 되어버렸기에
주종 관계가 되어버려써 후세대에까지 그 무거운 짐을 짐 지우는 겁니다.
죽기를 무서워 평생 종 노릇하는 것 처럼 말입니다.
(히 2:15, 개역)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
그렇기 때문에 그 땅을 되찾는 전쟁을 주님이 하시는게 아니라
자기들이 하는 겁니다.
그래서 의문의 반복만 하는 겁니다.
또렷한 평화가 없이 마침이 없이 안식의 쉼도 없이
무거운 짐을 자손 대대로 물려주는 겁니다.
졸지에 행함이 되어버려서 역사가 되어버려서
빚이 되어 버리는 겁니다. 무거운 짐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가룟유다의 후예들인 겁니다.
밑도 끝도 없는 독립운동을 계속하는 겁니다.
거기에 하나님까지 동원 시키는 겁니다.
주변 나라들은 하나님의 원수이자,
자기들의 원수가 되어버린 거죠.
땅 회복 운동을 방해하니까
거기에 예수도 자기들의 원수가 된 겁니다.
도와주기는 커녕 방해하더라 말이죠. 그래서 가룟유다가 팔아버린 겁니다.
지금도 똑같습니다.
영화 회복 (2009년) 이라는 다큐 형식의 영화를 보면 한 유대인이 어떻게 유일신을 안 믿고 삼위일체를 믿냐고
이단들이다고 어떻게 그럴수가 있냐고 억수로 억울해 하는 표정을 하더라 말이죠.
물론 삼위일체도 엉터리 이긴 마찬가지 이지만 말입니다.
그 억울해 하는 모습이 완악한 모습으로써 수건을 벗지 않는 이유인 겁니다.
마침 검색이 되길래 올려봅니다.
다윗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예수님의 원수입니다.
예수님 자신의 피 흘리심에
그리고 자기 백성을 되찾으심에 있어서
마귀의 예수님에 대한 거부를 겨냥한 겁니다.
마귀는 하나님에 대해 거부하지 않지요.
자기가 그 가짜 하나님을 심어버렸고
그런 가짜 하나님에 잠식 당한 것이 유대인이니까 말이죠.
그러니 십자가에서 태어날 이유가 없는 겁니다.
예수님의 피 흘리심에서 다시 태어날 이유가 없는 겁니다.
자기들만의 부활이 따로 있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과도 부활 논쟁을 벌리는 겁니다.
부활의 주인에게 말이죠.
다시 태어난다는 말이
니고데모에게 어려운 이유는
(요 3:4, 개역) 『니고데모가 가로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
(요 3:9, 개역) 『니고데모가 대답하여 가로되 어찌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
유대인의 해석, 바리새인의 해석, 개혁주의 성화론자들의 해석처럼
역사적 해석(원인에 따른 결과) 등등은
그 접촉점이 가능성으로 다가와야 하는데 불가능성의 단절로써 다가오니
기존의 해석법과 틀리게 되더라 말이죠.
(요 3:5,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요 3:6, 개역)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요 3:7, 개역)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요 3:8, 개역)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요 3:9, 개역) 『니고데모가 대답하여 가로되 어찌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
(요 3:10,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일을 알지 못하느냐』
(요 3:11, 개역)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거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 증거를 받지 아니하는도다』
(요 3:12, 개역)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요 3:13, 개역)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요 3:14, 개역)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요 3:15, 개역)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 3:16, 개역)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 3:17, 개역)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요 3:18, 개역)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요 3:19, 개역)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요 3:20, 개역)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요 3:21, 개역) 『진리를 쫓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예수님의 답은 간단합니다.
예수님 자신이 들려야 한다는 겁니다.
장대 나무 위에 높이 들려야 한다는 겁니다.
쳐다보면 낫는다는 겁니다.
그러니 유대인이나 바리새인이나 오늘날 개혁주의 성화론자들의 해석은
접촉점 찾기에 몰두하는 입장에서
그런 인자의 들리심은 거리끼는 걸림돌이 되는 겁니다.
그럼 내가 뱀이라는 말이가? 라는 꺼리끼는 지혜에 무릎 꿇어서 긍휼을 바래야 하기 때문입니다.
인간 쪽이 아닌 예수님 쪽에서 예수님 자신이 들림으로써
상대적으로 원수가 드러나는데
그렇게 접촉점 찾고자 밤에 몰래 예수님을 찾아오는 이 행위 자체가 원수 짖이 된다는 겁니다.
그럼 그 원수짖을 밝혀 주심에 감사하면 될 것을
내가 뱀 맞습니다 주여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라고 해야 할 것을
부자청년처럼 아 다른건 다 지켜도 이것만큼은 도저히 못 지키겠다고 등돌리고 돌아서 가버리거나
아니면 예수님이 인자는 높이 들려야 한다는 그 말에 거슬려서 본색을 드러내는 화를 낸다거나
그 말 때문에 싫어하거나 라는 이 모든 것들이
육의 소욕으로써 성령의 소욕에 원수짖이 됨에 있어서
이 원수성이 드러나는 겁니다.
광야에서 불뱀에게 물려 죽게 된 시급한 판국에
뭐 불뱀 쳐다 보라고?
나 보고 내가 불뱀이다는 것을 인정하라꼬?
내가 예수님의 원수임을
예수님을 쳐다보지 않고자 하는 완악한 자임을 회개하라꼬?
장난하냐? 빨리 약이나 달란 말이야! 이상한 짖 자꾸 하지 말고!!!!
그러니 마귀가 마귀를 잡아오듯이
뱀이 뱀을 쳐다 보듯이
이것이 십자가 지혜인데
다시 역으로 원수가 원수를 잡아오지 않고는 못배기도록 베드로를 잡아오는 겁니다.
당연히 이런 마귀짖으로 인해 왕의 재판의 자리에 까지 올라가야 겠지요.
바로 십자가의 자리라는 지혜의 자리에 까지 올라가야 하는 겁니다.
예수님은 기다렸다는 듯이 어서 마귀야 베드로 빨리 데리고 와라
이 십자가의 다 이루었다 라는 혜택을 마귀 너 보는 앞에서
베드로에게 빨리 빨리 너무 너무 기쁘게 해 주고 싶다는 겁니다.
이 십자가의 혜택을
솔로몬 왕의 지혜의 혜택을 누리게 해 주고파서 말이죠.
마귀가 바보가 아닙니다. 승산이 있다는 것을 믿숩니다 믿고 있기에
고소를 하고 송사를 해서
재판의 자리에 지혜의 자리에 까지 기여이 올려보냅니다.
과연 그럼 원수 마귀가 송사한 대로 재판 결과를 발표할 까요?
아니면 반칙으로써 용서하실까요?
과연 어떻게 하면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신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레 둘때까지 내 우편에 앉는
(마 22:44, 개역)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
(막 12:36, 개역)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친히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발 아래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니라』
(눅 20:42, 개역) 『시편에 다윗이 친히 말하였으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이 [주께서 내 주께]가 이루어지겠습니까?
이것은 십자가의 지혜 밖에 없습니다.
다 이루심 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다윗은 끝에서 세상 끝에서 종말에서 다 이루었다는 보고서 이스라엘 속에서
이 찬양을 하는 겁니다.
뭘 해도 다 이루었다 라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해체 되어 사라져오 다 이루었다는 겁니다.
예수 안에 또렷히 있다 말이죠.
자 이렇게 원수 문제는 오직 십자가에서 해결 됩니다.
앞글의 시편 97편을 다룬 글 다윗의 저주의 시에서
너희의 하나님과 내(이사야 단 한 명) 하나님은 다르다 라는 임마누엘 전쟁을 벌리고 있다 말이죠.
그래서 저희와 너희로 갈라서게 하는 거룩한 전쟁입니다.
앞의 너희의 하나님 곧 이사야 시대의 이스라엘이 믿는 하나님은 존재론적 하나님인 겁니다.
그리고 내 하나님 곧 이사야의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이다는 겁니다.
이름은 아무것도 없어요. 그냥 빈공터입니다. 존재가 아닙니다. 이름 뿐입니다.
아무것도 없다 이름 뿐이다는 겁니다.
결국 여호와께서 내 주께 말씀하시기를
주께서 내 주께 말씀하시기를
(시 110:1, 개역) 『[다윗의 시]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
내가 (여호와가) 네 (여호와의 이름) 원수로 네(여호와의 이름)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여호와의 이름은) 내 (여호와) 우편에 앉으라 하셨다 라는 겁니다.
그 여호와의 이름이 뭡니까?
하나님의 이름이 뭡니까?
바로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 절대로 거뜰또 보도 않는
고개를 돌려 버리는 예수님이다는 겁니다.
결국 예수님이 즉 숨은 하나님이 등장하면
그야말로 투명인간 취급 받는 것과 같습니다.
숨어있는 자 취급받습니다.
뭐 인자를 쳐다보면 낫는다고? 지금 장난 하냐?
그러니 니고데모에게 거듭난다는 말이
실천과 행함으로 접촉시도 할려는 자들에게는 씨알도 안 먹히는 말입니다.
뭐요? 어머니 뱃속에 이 늙은 몸이 다시 들어갔다 나와야 한다구요?
다시 태어나야 한다 굽쇼~~~~~
과연 그게 가능하다는 겁니까?
즉 이 말은 그 동안 가능한 것만 골라서 해왔다는 것이 들통난 겁니다.
존재는 곧 나는 존재인 하나님에게 존재로써 접촉하면 된다 말이죠.
순 엉터리이지만 그런 해석이
문자를 붙잡고 역사를 붙잡은 해석이 정통이라고 우기면서 내려왔다 말이죠.
그래서 그 해석법에 의해서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즉 이것은 가인의 해석인 겁니다.
제사를 드리면 된다고 접촉점이 생긴다고 본 겁니다.
그러나 번제와 제사를 원치 않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몰랐죠.
그러니 엉뚱한 하나님 붙잡고 그것을 곧 번제와 제사를 원하는 하나님이라고 주장했으니
그 역사적 해석인 가인의 해석법이 지금까지 내려오는 겁니다.
그 가인의 후예가 지금의 이스라엘이요 물론 그들은 주변 나라의 민족을 이스마엘 후예라고
자신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우기지만 말이죠.
여기에 한국교회 또한 가인의 후예로 자리잡은 겁니다.
그러나 성령이 임의로 부는 바람처럼 원인 없는 결과로써
여호와의 이름이 곧 예수님이 바로 그런 원수를 해결함으로써
비로소 십자가에서 부활이 되는 겁니다.
아니 십자가로 들어가지 않는데 어떻게 부활이 됩니까?
그의 머리 드심이 없이
인자가 장대 높이 들려야 함이 없이
어떻게 되찾냐 말이죠.
원수문제는 원수를 거치지 않고서
접촉점을 찾고자 하는 구원의 문인 바벨탑을 추구하는 것이 원수인 겁니다.
내가 예수님의 원수인 인자를 쳐다보지 않는
불뱀에게 물린 불뱀이다 말이죠.
갇혀버린 겁니다.
그래놓고 포로된 적 없다고
갇힌적 없다고
억눌린 적 없다고 그래서 희년선포가 하나도 안 기쁜 겁니다.
왜? 딴 사람은 몰라도 예수 라는 자가 선포하니까 싫은 겁니다.
자 이렇게
예수님의 원수
하나님의 이름의 원수
여호와의 이름의 원수를 거쳐서
(물론 그의 머리를 든다고 했을때에
시편에서의 통상적인 표면적 의미의 원수는 애굽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 애굽은 이제 과거에 해체가 되었다 말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굽은 운운한다는 것은 그 애굽이 바로 이스라엘 속에서
이스라엘의 사고방식 자체가 애굽이 되었다는 것에서
구원전쟁을 벌리신다는 겁니다.
그것도 오로지 다윗 한 명만 외치는 겁니다.
이것을 다시 잇는 자들이 바로 참선지자 입니다. 이스라엘과 싸워요!)
그러면 그의 머리 드심은
누구에게만 기쁜 소식이겠습니까?
주여! 바로 제가 불뱀에게 물린 자 맞습니다. 불쌍히 여겨 주소서 라는 자에게만
장대 높이 달린 인자의 들리심이 기쁜 소식이 되는 겁니다.
곧 잃어버린 자입니다.
고아 과부 나그네
이들에게만 희년 기쁜소식이 되는 겁니다. 복음 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중에서 아무도 안 기뻐 해 !!
오직 다윗만이
범죄한 다윗만이 혼자 기뻐!!
미래 완료를 다 봐버린 상태에서
원수를 보니
여호와의 이름의 원수이고
예수님의 원수이고
이 다 이루었다
십자가에서 모든 허물을 다 사하셨다 라는 것에 시비를 거는 자가
바로 예수님의 원수라는 입장에서
미래 완료를 다 봐버렸고
다 이루셨다는 다 봐버렸고
그래서 눈에 보이는 이스라엘에 연연하지 않고
원수 문제를 해결했다는 차원에서 이스라엘의 해체를 선언하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두 동강 난다 말이죠,
너희와 저희로 갈라지고
내 하나님과 너거들 하나님과 다르다 라는
하나님은 나와 함께 하시지 너거들과 함께 하지 않는다고 임마누엘을 선포 하는 겁니다.
구원 전쟁
이 임마누엘은 누구에게만 들리는가?
잃어버린 양 한 마리에게만 들려지고
99마리 양에게는 들리지 않는 목자의 음성이다는 거죠.
희년은 고아 과부 나그네 라는 잃어버린 자에게만 의미 있다는 겁니다.
왜? 되찾는 전쟁을 벌리시는 이름 전쟁이니까 말이죠.
하나님을 이미 벌써 믿고 있는 자들에게는
뭐 우짜라꼬? 이름이 뭐!!
여호와의 이름이 누구관데 내가 나의 노에들을 왜? 보내주겠냐! 뭣 땀시!! 라는
애굽왕 바로왕
곧
마귀라는 세상왕에 대한 예수님의 일방적인 전쟁 선포인 겁니다.
아니 나에게 물어보고 전쟁 준비를 해야 전쟁에 들어갈 것인데
나에게 물어본적도 없이 전쟁이 벌어지면 우짜란 말이냐 라고
우리 쪽에서 뭔가를 준비해야하는냥 바리새인의 해석법이 자꾸 떠올라
사람의 일만 생각하겠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김의 전쟁
예수님의 전쟁으로써 하나님의 일을 혼자 다 처리하시는 겁니다.
그러니 이 시가 얼마나 고맙고 감사하고 기쁜지 모릅니다.
이 여호와의 이름 전쟁 선포가 아니면
계속해서 호모하고 흐릿한 의문 속에 쳇바퀴 돌 듯이 살테니 말이죠.
마치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후 성전에서 가르치시면서
희년을 선포하는 그 기쁨과 같은 식입니다.
그 선포에 너 무슨 자격으로 가르치냐 라고 원수들이 바로 대립을 보여주는 겁니다.
다윗이 이스라엘 중심에서 여호와의 이름 전쟁을 선포하는 겁니다.
이 보다 기쁜 소식 있으면 나와보라 말이죠.
잃어버린 자를 되 찾겠다는 부활을 선포하시는 겁니다.
오로지 죽은 자에게만 해당 되는 부활이기에
그의 머리 들리심은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되찾는 목자로써
멜기세덱이 롯 같은 우리를 되 찾고자 전쟁에 뛰어드시는 겁니다.
오히려 롯 보다 아브라함이 기뻐 찬양해 멜기세덱의 영접을 받았듯이
예수님께서 다 이루었다고 감사의 찬양을 외치듯이
다윗은 감사의 찬양을 구원의 이름인 예수님께 드리고 있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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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것은 모조리 다 선물이다 ~~~
죄인 1 : 세상에 나쁜 개는 없다.
세상에 나쁜 자식은 없다.
그런 선물을 못 보고 자기가 주인 행세를 하다 보면
잉여라는 선물은 더 이상 선물이 아닌 노예가 되는 짐이 되는 겁니다.
노예는 빚으로만(돈 주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는) 형성되는 관계인 거죠.
(가정부와 아내의 차이)
괜히 다른 혹부리 영감은 혹을 떼는게 아니라
혹을 하나 더 달게 되는 된 겁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모조리 다 선물이다 ~~~
(롬 4:1, 개역)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된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롬 4:2, 개역)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롬 4:3, 개역)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
(롬 4:4, 개역)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롬 4:5, 개역)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롬 4:6, 개역)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 바』
(롬 4:7, 개역)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롬 4:8, 개역)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롬 4:9, 개역) 『그런즉 이 행복이 할례자에게뇨 혹 무할례자에게도뇨 대저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하노라』
죄인 3
세상은 노예 이기를 스스로 작정하고 나서기 때문에
잉여 세계는 무가치 하고 눈에 들 수가 없죠
누가 힘을 거부 할까요???
맞습니다. 아무도 거부 못합니다. 그러니 즐기시면 됩니다.
그럼 누가 구원 얻겠습니까? 아무도 못 얻지!! 라는 것이
예수님의 제자들의 한결같은 반응이였습니다.
그러니까 힘으로 볼게 아니라 잉여 곧 선물로 봐야 합니다.
힘으로 보면 주종 관계가 생깁니다.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가는 거죠.
나를 위한 자가 아니면 다 짤라내고 거부하게 되는 거죠 나의 유익 중심으로
그러나 잉여로 보면 저런 못난 자식도 나의 귀한 혹이 되는 겁니다.
그 혹(부조리)이 선물인데
괜히 혹을 억지로 뗄려다가 혹 하나를 더 붙이는 꼴인 거죠.
더 나은 부조리가 있으니까 그대여 걱정 하지 말아요 우리 함께 노래 합시다 ~~~ 어이 ~~
지금 당장 로또 사서 당첨되어 힘을 모아야지가 아니라
어이구 이런 선물을 또 주시고
안주셔도 되는데 기여이 주시는 분이 계시구나 라고
매일 매일 선물 푸는 즐거움만 누릴 뿐인 거죠.
뭐든지 "예"가 되는 거죠. 아니오 함이 없이 ~~~
(고후 1:18, 개역) 『하나님은 미쁘시니라 우리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예 하고 아니라 함이 없노라』
(고후 1:19, 개역) 『우리 곧 나와 실루아노와 디모데로 말미암아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였으니 저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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