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불륜이 나 보다 옳도다 (시편 98편)
불륜(스캔달-걸림돌)을 자랑하다.
(창 38:26, 개역) 『유다가 그것들을 알아보고 가로되 그는 나보다 옳도다 내가 그를 내 아들 셀라에게 주지 아니하였음이로다 하고 다시는 그를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더라』
고개를 돌려버린다는 것은
아주 적극적인 거부감을 나타내는 겁니다.
장대 높이 구리놋뱀을 달아서 쳐다 보면 낫는다고 하니
고개를 돌릴수가 없어 죽어도 쳐다 볼수 없다고 거부했습니다.
결국 십자가란 인간이 쳐다볼수 없는 걸림돌을 말하는 겁니다.
좋아할 것 같으면 다들 쳐다볼 수밖에 없죠.
그런데
그런데
도저히 도저히 쳐다 볼수가 없기 때문에
거부감이 너무 너무 심하기 때문에
도저히 가까이 할수 없어서
싫고 싫고 싫어서 멀리해 버리는 겁니다.
단절의 간극이 멀어지고 또 멀어지고 또 멀어질 수밖에 없는 겁니다.
멀리 멀리 도망치듯이 말이죠.
그런데 그 거리끼는 것을 자랑한다굽쇼?
뭐 노래까정 부른다고?
얼마나 신이 났으면 노래까정?
그것은 보통 즐겁지 않으면 노래로 나오지 않는다 말이죠.
무지 무지 자랑스럽고 기쁨이 되지 않으면 노래가 될 턱이 없다 말이죠.
아무튼 싫고 싫어 너무 싫어서 멀리 멀리 도망쳤다 말이죠.
맏아들이든 둘째 아들이든 마찬가지입니다.
문제는 누가 돌아오느냐 하는 거죠.
둘 다 강도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누가 뉘우치고 되돌아오느냐 라는 겁니다.
회개란 반성이 아닙니다. 뉘우친다고 해서 회개가 아니다 말이죠.
회개란 저 쪽의 대상물이 되는 겁니다.
되돌아오는 자 곧 회개는 저쪽에서 땡기는 자만이 되돌아 올수가 있는 겁니다.
누가 땡기느냐? 왜? 뭣땜시 땡기느냐가 명료하게 밝혀지지 않으면
밑빠진 장독대에 물 붓기인 겁니다.
첫 번째 사람은(개방과 가능성이 있는) 뉘우치고 돌와올수가 없습니다.
저쪽에서 대상물로 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두 번째 사람은(누가 봐도 연결이 되면 안되는 관계인 단절 그 자체) 반드시 뉘우칠 수밖에 없도록
저쪽에서 대상물로 삼아 버렸다는 겁니다.
이게 회개입니다.
자 그럼 첫 번째 사람은 누구인고 하니
유다의 아들 오난입니다.
그런 두 번째 사람은 누구인고 하니 바로 두구두구두구두구두구
시아버지 유다 그 자신입니다.
며느리 다말의 대상물은 오난도 아닌 막내도 아닌
시아버지 유다입니다.
이것이 신약에서는 첫째아들인 유대인이고
둘째 아들인 이방인입니다.
팔이 다시 한번 더 어긋맞게 된 겁니다.
그러니 사랑은 포착 불가능 합니다.
의도적으로 회개하는 쪽을 내 쪽에서 선택해서 그 자리에 놓을수 없습니다.
사랑이 나를 대상물로 삼아야 회개하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그러니 십자가는 오히려 이 거부감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시는 겁니다.
1차 거름망에 다 걸려서 다 걸러지는 겁니다.
빛이 왔는데 빛이 자기백성으로부터 영접을 받기는커녕
어두움을 사랑하다 보니 영접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혼인잔치의 임금은
즉 천국 잔치의 임금은
곧 십자가 잔치의 임금은
이 십자가를 거부한 자들을 다 죽여버리는
잔치 아닌 심판의 날을 퍼붓습니다.
그렇다고 아들을 위한 잔치가 전혀 손해보거나 훼손 훼방되는 일이 없이
잔치 날에 손님이 가득하게 됩니다.
그 초대의 대상들이 바로
누구든지 예상했던 빛의 자기백성이 아니라
오히려 빛의 자녀라고 우겼던 자들에 의해서
더럽다고 취급받던
개같은 이방인 여자 며느리 다말과 같은 자들이
이 혼인잔치에
십자가 잔치에
피 잔치에 참여하게 되는 겁니다.
물론 피 발리지 않은
예복을 입지 않는
그리스도의 새옷 곧 피옷을 입지 않은 자는
초대 받고 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탈락 당하는 겁니다.
이 얼마나 살벌하기 짝이 없는 잔치냐 말이죠.
왜 이렇게 살벌할까요?
그것은 살벌해서가 아니라
사랑이 없는데 사랑이 있는 척하기 때문에
두려워 해서 그런 겁니다.
사실상 살벌한게 아니라 오히려 우와 감격이 물밀 듯이 밀려와야 합니다.
얼마나 기존의 구원이 또는 천국이 얼마나 어설펐으면
한번 거름망에 걸려내더니
그렇게 선민이라는 유대인은 다 탈락 당하는 겁니다.
그 남은 자리 빈자리를 이방인이 채우는데
천국을 여전히 호구 같이 보고 있는 이방인이
예복도 갈아입지 않고 자기의 세계를 고수한다면
이것은 유대인처럼 수건을 벗지 않고 완악한 모습과 다를바 없다 말이죠.
그러니 시원하게 갈끔하게 제대로 명료하고 또렷함이 정말 제대로 나타난 증거가 아니냐 말이죠.
그렇다면 이 상황이 살벌한게 아니라
오히려 달려가서 발에 뽀뽀하고 껴안고 왜 이제야 오셨나요 라고
기쁘기 짝이 없어 폴짝 폴짝 뛰어야 할 판국인 겁니다.
왜냐하면 흐릿하고 모호하고 의문의 것들이 마치 자기들이 옳다는 냥
터주대감 자리 차지하고 있으니 얼마나 웃끼냐 말이죠.
어설프기 짝이 없으면서
거룩한척 하면서 대장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 의문의 자리가 그렇게 좋아요?
내가 그렇게 좋아요?
모호한 주제에 권력 좀 쥐었다고 허세를 부리니 비웃을수 밖에요.
그게 싫어서 눈에 확 띄니까
내가 그렇게 좋아요 !!!
사라질 영광이 사라진다는 것 보다
사라지지 않도록 하겠다고 붙잡는 그 수건 쓰는 완악한 모습은
오히려 또렷하고 명료하고 완료를 안쳐다 보겠다는 심뽀인 거다 말이죠.
자기가 어설프게 알고 있는 그 약속 보다 (내 눈에 들보 보다)
개같은 이방여자 땜에 우리 약속의 집안이 무너질 판국이다고 보고 있는 (남의 눈의 티를 보는)
정작 그 며느리 다말이 몰고온 약속의 세계가
훨씬 더 낫다는 겁니다.
그 앞에서 목숨 걸지도 않고 과거의 유산 속에서 수건을 섰던 시아버지 유다는
보기좋게 홀라당 수건이 벗겨지는 겁니다.
이게 마음판의 할례이지
딴게 회개가 아닙니다.
이 며느리 다말 사건 덕분에
요셉의 십자가 수수께끼를 풀수가 있었습니다.
풀어서 푼게 아니라
십자가 속에 빨려 들어가
십자가의 대상물이 된 겁니다.
수수께끼를 풀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전 재산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줄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본인이 가난한 자임을 알면 됩니다.
밑빠진 장독대에 물 붓지 말라 말이죠.
그냥 그 장독대 강물에 던져 버리면 됩니다.
그렇게 의문의 뫼비우스의 띠는 마침이 되는 겁니다.
매듭은 그렇게 풀리는 겁니다.
십자가가 회개케
뉘위쳐 돌아오게 만든
되찾아낸 것이니
잃어버린 자를 되찾았으니
부활하기 싫어도 부활 할 수밖에 없습니다.
부활의 대상물이 되었으니 말이죠.
그래서 터져 나오는 외침이 새노래입니다.
내가 부정하다고 했던 그가 나 보다 더 옳았다고 말이죠.
이 원인 없는 결과인 새노래가 덮쳐져서 벌어지는 사건이
다말 사건이다 말이죠.
무조건 예가 되고 아니라 함이 없도록 되어 있는 새노래인
십자가의 다 이루심의 사건 말이죠.
우리가 생각하고 원하는 예가 아닙니다.
우리는 시아버지 유다처럼 어설프기 짝이 없는 약속관을
조상으로부터 부여받았다고 우길 뿐입니다.
모태신앙이라는 것이 바로 그런 종교용어로써 말이죠.
그러나 회개란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는
임의로 부는 바람처럼 벌어지는 사건입니다.
그러니 잃어버린 자를 되찾는 이 부활이라는 회개는
찾고자 하는 자의 의지로 인한 대상물이지
내 쪽에서의 반성이 될 수가 없는 겁니다.
그 정도로 며느리 다말은
죽은 이 시아버지 유다 약속 가문을
죽여서 다시 살리는 겁니다.
그러니 시아버지 유다는 저 여자 때문에 우리 집안 망할 판국이다는 두려움에
방어기제가 작동할 수 밖에 없는 거죠
그 정도로 약속을 어설프게 본 겁니다.
약속이 망할 리가 있겠냐 말이죠.
자기가 망할까 걱정한 것이지
오히려 자기가 죽일려고 했던 불속에 집어넣은 그 죄인이
오히려 자기를 구원하고 살려내는 그 약속의 가문을 다시 살리는 여인이였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족보에 들어가는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는
하늘에서 뚝 떨어진 천사였다는 겁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그를 오해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요?
내가 싫어하는 요소를 다 갖추고 역사속에 등장하는 것일까요?
더럽죠. 아름다운 풍채 없죠. 질고 곧 병든 모습이지요. 얼굴은 태양빛에 거슬려 새까맣죠
한마디로 저주 받은 자 이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시선이 시아버지 유다가 개같은 이방인 여자 며느리 다말을 보고 있는
같은 시선입니다.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근본도 없고
족보가 없으니 근본이 없는 거죠.
그런데 왜 이 여인이
왜 예수님이 그런 몰골을 하는 것일까요?
회개 곧 예수님의 대상물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진짜 시선을 되찾게 하고자 하는 겁니다.
왜 그런 몰골일까?
사실은 너가 가짜이다는 겁니다.
너가 아름답지 못하다는 겁니다. 아무리 꾸며서 아무리 아름답게 했다손 치더라도
남들은 다 속여도 예수님은 못 속인다는 거죠.
부자가 사실상 가난한 자였다는 것이 드러나듯이
내가 뱀이다는 것을
예수님이 모세가 장대 높이 구리놋뱀을 든 것 같이
예수님이 들리시는 겁니다.
차마 못 보는 겁니다.
뱀을 어떻게 봐요
내 모습을 어떻게 보냐 말이죠.
내가 뱀인데 예수님을 뱀으로 몰아서 죽여버렸으니
내가 개같은 이방인인데 나는 약속의 사람인데
저 며느리 다말을 뱀으로 몰아서 마녀로 몰아서 마녀사냥하고
개같은 이방인 더럽고 더러운 사망의 그늘에 폭삭 주저 앉은 자라고 죽여버렸는데
정작 그녀가 나 보다 옳은
나를 도리어 살리는 구원자 였다는 겁니다.
그러니 회개란 단독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관계성의 개념입니다.
가정부는 자기가 일하느냐 안하느냐 로 사례비를 받으면 끝나는 세계입니다.
회개를 그렇게 할까요?
그러나 아내는 남편이라는 관계 속에서만 아내입니다.
즉 사랑의 관계입니다.
그러니 회개란 이 사랑을 쳐다보게 하기 위한 목적인데
회개의 달인들은 이 장대 높이 달린 인자의 들리심을 쳐다보지 않는 겁니다.
그의 머리드심을
나와 무슨 상관이냐? 여호와가 누군데? 난 그 딴 신 모르는데?
라고 말했던 애굽왕 바로의 말과 같은 겁니다.
뭐 어쩔수 없지요
오히려 고맙죠
졸지에 전쟁이 벌어지게 되었으니 말이죠.
그래? 나 몰라? 그럼 내가 누구인지 제대로 알려줄게 기~~다~~려~~봐!!!(우비소녀)
참 우비소녀도 참 오래되어버린 개그가 되었네요.
그러니 이 전쟁이 벌어지는 사건을 통해서 빨리 빨리
이행 이동을 해야지요
자기 자리를 사수할게 아니라
어차피 전쟁 자체가 그런 자리를 새판 짜기로 엎어버리기 때문에
빨리 이동해서 새롭게 마련된 자리에서 회개의 대상물이 되어야 한다 말이죠.
버텨본들 소용없다 말이죠.
그러니 예수님이 왔다는 말은
즉 빛이 왔다는 말은
빛으로써 빛의 자녀로써 예수님을 영접할게 아니라
비로소 저 같은 어두움을 비추시러 오셨나요? 라고
빛이 비추이는 대상물이 되는 자리에 놓여지는 것이 지혜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런데 뭐 이미 이런 말 자체가 불가능한 이유가
그런 지혜는 없으니 그런 이동을 할 리가 없다 말이죠.
그렇기 때문에
이래나 저래나 그 어떤 길도 없으니
주여 불쌍히 여겨주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라는 말할 수 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빛이 왔다고 스토리가 빛의 자녀가 영접하겠냐 말이죠.
빛이 왔기 때문에 빛의 자녀는 영접하지 않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그럼 빛은 새로 비추이는 빛이요
그 새로 비추임에 혜택을 받는 자는
새로
새로운 판 짜임에서 나타나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기존의 판이 이 새로운 판에 개입이 불가능하게 되는
단절이다는 겁니다.
새노래라는 의미는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마음판의 할례라는 의미도
기존의 손 할례는 개입할 수 없는 새로운 판이다는 거죠.
새 술은 새 부대인 겁니다.
그럼 기존의 것을 가지고 와서 억지로 붙일려고 하는 시도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럼 새 부대에 헌 술을 넣으면
둘 다 망치는 거죠.
진짜 새 부대라면 둘 다 보존하게 하는 겁니다.
(마 9:17, 개역)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
(막 2:22, 개역)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리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하시니라』
(눅 5:38, 개역)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
핵심은 바로 이겁니다. 둘 다 보존케 하는 그 간극을 유지하는 것이
새노래이다는 겁니다.
그 간극도 우리가 유지하는게 아니라
새노래가 유지하는 거죠.
그러니 회개는
곧 뉘우침은
곧 되돌아옴은
곧 되찾음은
성령의 대상물에게만 해당됩니다.
회개 하고 싶다고 해서 회개 되는게 아닙니다.
부활이라는 인물이 되찾아내는 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되찾음이라는 회개인 겁니다.
그러니 십자가를 자랑하지 않고 배기겠냐 말이죠.
더럽고 어설프고 흐릿한 어두운 시아버지 유다 보다
더 더럽고 더 어설픈 개같은 이방인고 아비도 어미도 근본도 없는 족보 짤린
죽은자 인 이 며느리 다말이 더욱더 더러움에도
간따나 미운데 더 미운 남의 아이까지 임신을 했으니
마귀도 이런 마귀가 없는 거죠.
그런데 그 마귀가
그 뱀이 나 보다 옳도다?
이런 십자가가 벌리는 지헤를 경험하고
이 십자가를 자랑할 수 있겠냐 말이죠.
여타부타 따질 필여 없이 신나게 자랑이 나오면 새노래요
뭔가 어설프게 머뭇 머뭇 거리면서 유구무언이면
이 예복이 기쁘지 않기에 갈아 입지 못하는 겁니다.
기존의 것을 여전히 고수하고 사수하겠다는 겁니다.
명료하고 또렷한 사랑이 왔음에도 불구하고
사라질 영광을 붙잡는 완악한 유대인의 수건 씀과 뭐가 다르냐 말이죠.
그러나 이런 완악한 자도
새노래가 덮치면
십자가를 자랑하는 그 피가 발려지면
언제그랬는냥
제가 주님을 사랑한다고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원인 없는 결과를 누리는 겁니다.
이것이 새노래가 벌리는 사건은
매일 매일 우리 속에 침투해서 터트리는 피 폭탄입니다.
그 피 범벅에 기뻐하는 자가 이 불륜의 십자가를 자랑하는 겁니다.
그 어떤 누구도 자력으로 도저히 자랑할수 없는
다들 고개돌리는 싫어버린바 된 십자가를
우리는 신나게 기뻐 춤추고 마시고 노래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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