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화과 나무의 저주일찌라도 난 여호와로 is 뭔들 기뻐하리라 (시편 97편)

 

지구가 저주받을지라도 난 사과나무를 심겠다 


(합 3:15, 개역) 『주께서 말을 타시고 바다 곧 큰 물의 파도를 밟으셨나이다』

(합 3:16, 개역)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인하여 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 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내 뼈에 썩이는 것이 들어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


(합 3:17, 개역)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합 3:18, 개역)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합 3:19, 개역)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 노래는 영장을 위하여 내 수금에 맞춘 것이니라』


(마 21:9, 개역)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질러 가로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마 21:10, 개역)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온 성이 소동하여 가로되 이는 누구뇨 하거늘』

(마 21:11, 개역) 『무리가 가로되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 하니라』

(마 21:12, 개역)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자를 내어 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고』

(마 21:13, 개역) 『저희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

(마 21:14, 개역) 『소경과 저는 자들이 성전에서 예수께 나아오매 고쳐 주시니』

(마 21:15, 개역)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의 하시는 이상한 일과 또 성전에서 소리질러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 아이들을 보고 분하여』

(마 21:16, 개역) 『예수께 말하되 저희의 하는 말을 듣느뇨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렇다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케 하셨나이다 함을 너희가 읽어 본 일이 없느냐 하시고』

(마 21:17, 개역) 『그들을 떠나 성 밖으로 베다니에 가서 거기서 유하시니라』

(마 21:18, 개역) 『이른 아침에 성으로 들어오실 때에 시장하신지라』

(마 21:19, 개역) 『길 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사 잎사귀 밖에 아무 것도 얻지 못하시고 나무에게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게 열매가 맺지 못하리라 하시니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지라』

(마 21:20, 개역) 『제자들이 보고 이상히 여겨 가로되 무화과나무가 어찌하여 곧 말랐나이까』

(마 21:21,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치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지우라 하여도 될 것이요』

(마 21:22, 개역)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

(마 21:23, 개역)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 가르치실새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나아와 가로되 네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뇨 또 누가 이 권세를 주었느뇨』

(마 21:24,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너희가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르리라』

(마 21:25, 개역) 『요한의 침례가 어디로서 왔느냐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 저희가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로서라 하면 어찌하여 저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요』

(마 21:26, 개역) 『만일 사람에게로서라 하면 모든 사람이 요한을 선지자로 여기니 백성이 무섭다 하여』

(마 21:27, 개역) 『예수께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 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지구가 저주받을지라도 난 사과나무를 심겠다 라고 마틴 루터가 일기장인가
? 하여튼 기록했다고 하더군요.
그것을 다시 스피노자가 인용했죠. 

(범신론자로 오해 받는데 사실은 리좀사유자 즉 창조 긍정 생명철학자 이지요. 어차피 성화론자이기는 하지만)

 

자 그럼 오늘 제목에도 언급했듯이

무화과 나무의 저주 속으로 들어가 봅시다.

시편 97편의 시대적 상황은.
나라가 쫄딱 망한 상태입니다. 그리고 백성들은 뿔뿔히 흩어지고 바벨론으로 포로 당해 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뭐가 기뻐서 이 기쁨의 노래를 하는 것일까요?

나만 남았습니다. 다 죽고 나만 남았습니다. 내 열심이 특심인데 겨우 나만 살아 남았습니다.

그런데 7천명이 남았다는 소식에 기쁘지 않고 못배게 됩니다. 이게 기쁨입니다. 복음입니다.
원인 없는 결과 말입니다.


때가 되지도 않았는데 열매를 내라는 명령에 결국 열매를 내지 못했습니다.

 

자 그러면 드디어 예수가 미쳤구나 라는 반응이 나오게 됩니다.

그런 반응을 반드시 유발케 해서 그런 시선을 다 끌어모은 가운데서

무화과 나무가 말라 비틀어 죽게 만들어 버립니다.

 

날씨가 갑자기 기상이변으로 변하지 않고서는 일어날 수 없는 상황입니다.

사람이 의도적으로 손대지 않은 이상 말이죠.

 

즉 두 번의 말도 안되는 불가능한 상황이 되었습니다.

이중적으로 중첩이 되어 있다는 거죠.

 

우리는 첫 번째의 상황에 예수님은 뭔가 착각한거 아닌가 하는 모순을 발견하게 됩니다.

부정이지요.

부조리입니다.

(율법도 사실상 부조리입니다. 애초부터 지킬수 없는데 준 겁니다. 그럼 처음부터 이 무화과 나무는 우리이다는 거죠. 그것이 과연 기쁘냐 하는 문제입니다. 누가 무화과 나무의 저주를 보고 기뻐하겠냐 말이죠.)

 

그런데 두 번째 상황에서 진짜로 나무가 말라 죽음으로써

그 부정을 다시 부정으로 뒤잎어버렸습니다.

처음에는 오독, 그 다음은 정독이 된 셈이지요.

 

결국 예수님이 틀린게 아니라 옳았다가 되는 것이고

자연스럽게 상대적인 모든 인간의 판단은 곧 뒤짚어져서 틀리게 되었습니다.

 

우와 이렇게 가만히 있다가 뒤통수를 얻어맞는 식으로

모든 인간이 말려들게 된 겁니다.

나 혼자만 남았나이다. 내 열심이 특심인데 말이야 ~~~

그런데 7천명이 남았다 말이죠.
오독한 겁니다. 정독이 오게 되니 말이죠.
부끄 부끄 ~~~


결국 그 어떤 인간도 율법과 양심에서 벗어날 인간이 없도록 갇혀버렸다 라는 겁니다.

 

어떻게 예수님의 틀린 발언이 어떻게 맞게 되었고

어떻게 인간의 판단이 옳았는데 어떻게 틀리게 된 것일까요?


있는 자는 더 받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 마저도 빼앗기는 것일까요?
 

죄란 무엇입니까? 원수성, 대적하는 완악이 무엇이겠습니까?

의문의 것을 붙잡는 겁니다. 마침이 없는 것을 붙잡는 겁니다. 완료가 없어요. 의문의 반복입니다.

이것을 허상 우상이라고 합니다. 헛된 것을 붙잡는 마음이 우상입니다. 탐심이 우상이다 말이죠.
약속을 거부하는 겁니다. 다 이루었다는 거부하는 겁니다.

 

이 무화과 나무 저주 사건은

사실상 어떤 사건의 중간 사이에 낑겨 있습니다.

즉 그 사건이 간극 속에 놓여져 있습니다.

 

먼저 위의 사건은 예수님이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 입성함으로 호산나 찬양으로 소동이 벌어집니다. 그리고서는 강도의 소굴이라고 성전을 청소하십니다.

 

그리고 아래의 사건은 무슨 권세로 가르치냐 라고 유대지도자들과의 충돌입니다.

세례요한을 왜 죽였는지 말해주지 않으면 나도 안 알려주겠다고 합니다.

그리고서는 회개를 선포한 세례요한의 노선을 따라 회개의 열매를 촉구합니다.

이 두 위 아래 사건의 중간에 낑겨 있다 말이죠.
놀라운 점은 이 중간 사이에 누가 있는가 하면 무화과 나무만 있는게 아닙니다.

제자도 있습니다. 더 나은 놀라운 점은 예수님도 함께 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야말로 태풍의 눈이지요.
이 관계성이 놓여져 있다는 자체가
이미 다 이루었다 안에서 이루어지는 겁니다. 벌어지는 사건입니다.
오히려 이 중간에 놓여지지 않는 자들이 
곧 불 바깥이 지옥이 되는 겁니다.

 

도끼가 나무에 놓여져 있으니 열매 맺지 못한 나무는 찍어버려라 라는 세례요한이라는 선지자 노선으로써 예수님은 아주 아주 도발적으로 시비를 거시는 겁니다.

 

왜 내 아들 아벨을 죽였느냐? 왜 나의 아들 세례요한을 죽였느냐 라고 말이죠.

 

이것은 마치

제가 요즘 권력에 대해서 좀 살펴 보고 있는데

계속해서 떠나지 않는 생각이 바로

 

권력은 모든 권력은 잉여이다는 겁니다.

 

그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기드온 전쟁입니다.

 

전쟁에서 이길려면 그 당시 시대적인 상황에서 가장 강력한 무기를 소지하게 되면 전쟁의 승리가 유리하게 작용케 됩니다.

 

그런데 가장 강력한 무기를 소지했음에도 졌다 라는 것은

이것은 그 시대 역사의 상황에서 벗어난 초월적인 의미가 되는 거죠.

 

즉 가장 강력한 권력 자체가 잉여입니다.

그런데 그 잉여에 더 나은 잉여가 시대를 초월해

시간을 초월해

역사를 초월해서 들어오게 된다면

물론 이런 경우는 이스라엘 속에서만 있었을 뿐입니다.

다른 역사에서는 없습니다.

 

좀 어렵게 느껴지신다면 영화 하나를 소개하자면

천군 이라는 한국영화가 있는데

북한군과 남한군이 아마 대립된 상황에서 갑자기 과거의 청년 이순신 때로 타임머신 탄 냥

과거로 가게 되어서 둘이 힘을 합쳐서 일본 왜군과 싸운다는 내용이지 싶은데

대충 봤었고 자세한 내용은 오래전에 봐서 다 까먹어 기억이 나지 않는데

 

아무튼 그 당시 상황에서 최고의 무기를 소지한 왜군에게

미래에서 온 무기가 졸지에 주인공이듯이 잉여가 주인공이듯이

잉여의 잉여

잉여 보다 더 나은 잉여로써 등장하더라 말이죠.

 

그럼 기드온 전쟁에 대비해 보면

더 나은 잉여가 바로 항아리 횃불 그리고 나팔

이것이 기드온군사가 지닌 무기 전부이다 말이죠.

그래놓고 거짓말을 합니다, 기드온의 칼이여 라고 외치는 겁니다.

칼이 없어요

그런데 칼이 있다고 외칩니다. 신약으로 따지면 이것이 행함이 있는 믿음이 되는 겁니다.

칼이 없는데 그 칼 보다 더 나은 칼이 기드온의 칼이고 여호와의 칼이다 말이죠.

그런데 막상 칼 없다 말이죠.

그 거짓말에 의해 미디안 군사가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겁니다.

 

제가 계속 생각이 몇주동안 맴돌면서 놀란 점이

 

잉여란 그 잉여라는 권력을 더 많은 숫자 수효를 가지고 늘림으로써 더욱더 강해지는게 아니라

오히려 그것은 더더욱 쇠약해 지는 것이고

여기에다가 엎친데 덮친격으로 가지고 있는 잉여의 수를 줄이면 줄일수록 더더욱 강해진다는

 

약할때에 강함이다는 믿음의 원리가

이스라엘을 쥐고서 이 전쟁에 붙이시는 겁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인간이 전쟁을 하는게 아닙니다.

천국의 전쟁을 하는 자들이다는 거죠.

 

그러니 역사의 법칙으로 하는게 아니다 말이죠.

오히려 역사의 끝에서 소급해서 벌리시는 종말 전쟁을 벌리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칼을 쥐는게 아니라 거꾸로 아무것도 없음을 쥐고 있는 겁니다.

 

한 쪽 군대는 최고의 장수 골리앗을 그 대표성으로 앞장세웁니다.

 

그런데 다른 한 쪽의 군대는 어린아이 젖먹이를 그 대표성으로 앞장세웁니다.

 

누가 더 나은 잉여이냐 라는 겁니다.

 

제사 보다 더 나은 제사 이냐 라는 거죠.

누가 봐도 가인의 제사가 더 낫다 말이죠. 골리앗이거든요.

그런데 바로 그것을 뒤짚는 더 나은 잉여가 있다 라는 것을

주님은 소개해 주고 싶어 안달이 난 겁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피 용서인 사랑입니다.

 

번제와 제사는 권력이 됩니다.

그러나 인애와 자비는 권력을 넘어뜨리는 더 나은 잉여임에도 불구하고 철저하게 무능합니다.

 

그 무능이 세상의 그 어떤 권력 보다 가장 힘 센 잉여인 젖먹이요 무능이요

어린아이 꼬마 다윗으로써 골리앗과 배치되는 겁니다.

 

이것이 믿음의 세계가 역사의 사고방식과 대조를 이루는 식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거꾸로 봐야 합니다.

스데반 집사가 주여 저들을 용서하옵소서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 라고 외친 그 이유는

저들이 스데반 집사를 죽인게 아니라

강하니까 약한 자를 죽이는 자연법칙처럼 스데반 집사가 죽은게 아니라

도리어 스데반을 죽인 그 자들이 사실상 죽은 것이다 말이죠.

죽은 자 였음을 티를 팍팍 내었던 것이 살인이라는 겁니다.

 

어찌되었든 저찌 되었든 스데반은 죽어버렸으니 사실상 저 쪽이 강한거 아니냐

그렇다면 스데반의 입에서 저들을 용서 해 주옵소서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 라는 소리가 나오지 않도록 했어야 했다 말이죠.

얼마나 약했으면 그 강하고도 강한 소리를 막지를 못했냐 말이죠.

 

그러니 사실상 약한 쪽이 살인을 해 버리는 겁니다.

강하다면 뭐가 아쉬워서 살인을 할 이유가 없는 겁니다.

부족한게 없는데 왜 살인을 하겠냐 말이죠.

 

이 원리를 다시 역으로 적용하는 방식이 다윗에게

완악한 다윗에게

율법대로 4배나 갚으라 라는 수건을 벗지 않는 다윗에게

 

그 다윗의 손에 죽는

죽임을 당하는 다윗 보다 더 강한

약해빠진 다윗보다 더 강한 3명의 인물들이 다윗의 손에 죽임을 당해 줍니다.

다윗이 죽인게 아니라 이 세명이 죽은자가 되어 준다는 거죠.

얼마나 강했으면 그럴까 말이죠.

 

예수님이 저들이 예수님을 죽이는게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 내어주시는 겁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오늘 시편 97편에 나오는 핵심의미인 바로 기쁨 의 의미 가

 

바로 예수님 자신이 직접 스스로 목숨을 버릴때에

아이씨 억울하다 내주고 싶지 않은데 어쩔수 없군 이 아니라

기쁨으로써 내어준다는 겁니다.

스데반의 얼굴이 천사 같더라 말이죠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즉 잃어버림과 되찾음이라는 믿음의 세계를 얼른 빨리 다급하게 보여주고 싶었다 말이죠.

 

잃어버리지 않았는데 어떻게 되찾겠냐 말이죠. 이것이 부활이거든요.

부활이란 죽었다가 살아나는 소생이 아니라

단절이기에 그 단절의 의미를 더더욱 극대화 시키는 더 나은 단절로써의 부활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성전의 두 사람의 기도 내용이 왜 중요한고 하니

천국을 말하고자 함이다는 겁니다.

한 사람은 뭐했고 뭐했고 등등 잃어버림이 없다 말이죠.

그러니 되찾을게 없다는 겁니다.

 

그러나 한 사람은 철저하게 단절 되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긍휼만을 바라보는 겁니다.

자기 쪽에는 아무것도 없어서

마치 잃어버린 버림받은 고아이니

율법 자체가 적용 할 수 없는 자신의 비거룩성을 실토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율법의 완성인 사랑이 바로 이 사람에게 딱 맞게 된다는 거죠.

기쁨은 이렇게 십의 이조를 내고 이레에 두 번 금식해서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감사하고 기뻐하는 자에게 기쁨이 오는게 아니라

부활이 오는게 아니라

 

우는 자에게 기쁨이 오는 겁니다.

잃어버린 자에게 되찾음의 부활이 오는 겁니다.

 

한 쪽은 기쁨을 대상화 했고

다른 한 쪽은 정반대로 기쁨의 대상물이 된 겁니다.

 

한 쪽은 율법을 자기가 지키는 목표물로써 그것을 대상화해서 숙제하듯이 숙제를 해서 숙제한 것을 내어 놓는데

 

다른 한 쪽은 율법의 완성인 사랑이 그 사람을 대상물로써 삼아서 사랑을 베푸는 겁니다. 인애와 자비를 베풀어 주는 겁니다. 즉 베품을 당하는 것이 이 세리 쪽이다는 거죠.

 

그럼 천국 비유이기에 천국이 쳐들어와서 사람들의 대상물로써 천국은 그런 일을 하겠냐 말이죠.

자기 천국 가는 조건만 갖추면 되지 남이야 우찌되든 말든 말이죠.

이것이 인간에 의해 조작된 인간의 대상물이 된 천국이고

 

진짜 천국은 천국 자기가 쳐들어와서 전혀 전혀 천국갈 조건이 아예 없는 놈만 골라서

천국 자신의 대상물로 삼아버리는 겁니다.

이렇게 가장 나쁜놈도 천국 가다니 라는 말도 안돼를 선포하는 식으로

인간들의 천국법칙을 깨뜨리는 식이다는 거죠.

 

아이쿠 말이 한참 옆으로 샜는데

다시 무화과 나무 이야기로 되돌아 와서

이렇게 두 사건의 중간에 낑긴 무화과 나무를 우리가 다시 보자 말이죠

 

예수님이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는 이유는 바로 같은 원리입니다.

잉여의 원리 말이죠. 더 나은 잉여

 

진짜 강함은 섰는자에게 베풀어지는게 아니라

넘어진 자에게 베풀어지는 겁니다.

 

먼저 된자가 아닌

나중 된 자가 말이죠.

 

팔이 어긋맞게 말이죠.

 

그럼 그것을 미리 계산해서 내 쪽에서 나 그럼 나는 구원받는 쪽에 설래 라고 아무리 해도

무조건 반대를 위한 반대

부정의 부정으로써 작용되는 것이기에

나의 대상물로 삼을 수 없게 되는 겁니다. 즉 대비를 할수 없다는 거죠.

만약 미리 대비를 한다는 것은

이 잃어버림이 없이 되찾는 식이 되니까

되찾는 것도 아니게 되는 겁니다.

 

그럼 이것은 하나도 안 기쁜 거죠.

 

복음이 아니다는 겁니다.

 

복음이라면

 

율법의 완성인 사랑이라면

 

율법을 지킨, 번제와 제사를 드린 자가 아니라

도저히 율법을 못 지키는, 그것도 단 한 개도 못 지키는 현실, 그저 그저 인애와 자비만을 바라고 제발 제발 용서해달라는 이 심판성을 직시하는자

종말성을 직시하는자

무화과 나무의 저주를 보고 기뻐하는자

아 맞아 바로 이거야

드디어 모호한 것이 마침이 되는 또렷함이 왔구나를 눈치채는자

의문의 것을 드디어 찢어버리는 명료함이 왔다 라는 것을 눈 띄임 당한자가

 

기쁨이 덮쳐져서 기쁘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스데반이 천사의 얼굴처럼

나 드디어 간다 잘있어라

모호하고 흐릿하고 의문의 반복에서 드디어 벗어났다

육의 장막에서 드디어 벗어났다

아이구 답답했는데 그 두꺼운 모피 인육으로 만든 껍데기 뒤짚어 쓰고서

뭐하나 또렷함이 없이 의문을 짖만 쳇바퀴 돌 듯이 살았는데

 

예수님 땜에 드디어 나는 탈출이다 라고

신나게 기뻐하면서 가는 겁니다.

 

죽임을 당해서 가는게 아니라 말이죠.

 

이 상황을 죽든 죽지 않든 상관없이 누리는 자가 있는데

바로 선악의 법칙이라는 모호한 쳇바퀴에서 벗어난 자가 바로

다윗이 밧세바를 취하고서 졸지에 율법의 완성의 사랑의 대상물이 되어버림을 당함으로써 누리게 됩니다.

즉 여디디야의 대상물이 된 다윗입니다.

 

이것이 또 신약에서는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베드로가 그런 기쁨을

그런 완료된 사랑을 누리게 되는 율법의 완성인 사랑의 대상물이 되었을때에

 

베드로는 예수님의 너가 나를 사랑하느냐의 물음에

참으로 뻔뻔스럽기 그지 없이 네 제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라고 외치게 되는 겁니다.

뭘 믿고 저렇게 겁도 없이 외칠까요?

마주하고 있는 예수님의 얼굴이 베드로를 그렇게 만들어 버린 겁니다.

그 얼굴 보고 뿅 갔죠 뭐

 

니 날 사랑하제?

 

네 네 암요

 

예수님 is 뭔들! 사랑하지 않겠습까?

 

그야말로 사랑의 빚진자로써 일만달란트 보다 더 큰 빚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일만만만만 ...... 달란트 빚진자로써

주님은 베드로를 더더욱 사랑하심이 드러나는 순간이다는 겁니다.

 

베드로 부럽지 않나요? 일만달란트도 몇십만년 걸리는 빚인데

더 큰 빚을 진 자를 믿음의 세계에서는 더 부러워 하는 희한한 나라가 바로 천국나라입니다.

 

아 나도 예수님 세 번 부인할껄 ~~~~~

 

이미 봐 버린 것은 따라하기 라는 흉내내는 내 숙제가 되는 행함이겠지만

걱정 마세요

 

우리는 늘 주님을 배반하고 있는 늘 상 뭘해도 죄만 짖고 사는 자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매일 매일 예수님의 피가 발리우는

매일 매일 일만달란트 빚지고 있는 부자들입니다.

 

이런 부자 있으면 나와 보라 말이죠.

 

여러분 부자 ~~~~ 되셨음을 누리세요

 

썩을 것을 땅에 쌓아둔 자들은 거지입니다.

이미 여러분은 거지나사로로 태어난 자들입니다.

아브라함 품에 안길 정도이니까 말이죠.

 

부자 보세요 지옥에서 물 한 방울이 없을 정도로 가난하다 말이죠.

결국 이 땅에서 약한 것이 싫어서 부자되었던 겁니다.

약한 것이 두렵고 겁나고 무섭거든요.

 

그런데 오히려 약한 것이 더 믿음직 스럽고, 제일 강하며, 겁도 없이 뻔뻔스럽게

마이너스 통장 일만만만만 ... 달란트를 자랑하고 돌아다니는 겁니다.

 

흙수저 보다 더 기쁜 더 나은 기쁨의 십자가 수저를 물고 태어난 자들이다는 겁니다.

아니 기쁠수가 없어요.

 

시편 97편은 바벨론 포로 속에서 기쁘게 찬양하고 있습니다.

다니엘의 세친구가 불 속에서 누구와 더불어 춤추고 노래하듯이 말입니다.

불 바깥이 도리어 불안해 잠을 못잡니다.

 

선지자는 그런 이유로 돌격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신체에 빵구멍을 뚫고자 마치 천국이 우리의 가슴에 뻥뻥 구멍 뚫듯이

자꾸 자꾸 강해져라 라고 약하게 만들어 버리는 겁니다.

뭐를 하든지 다 실패케 만들고

뭐를 해도 다 의미 없게 만들어 버리는 겁니다.

 

(고후 13:9, 개역) 우리가 약할 때에 너희의 강한 것을 기뻐하고 또 이것을 위하여 구하니 곧 너희의 온전하게 되는 것이라

 

왜 하필이면 사탄의 가시를 주십니까?

 

왜 하필이면 접니까? 왜 이런 일을 격게 하십니까?

케 보이

아무리 따져도 대답이 없습니다.

 

대답 없는 너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아버지여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아무런 말이 없습니다.

 

아무 말도 없으면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 알아라 말이죠.

 

아 나를 사랑하신다는 말이군요. 알았습니다

 

왜 기도 응답이 없을까요?

이미 다 주었거든요.

 

기도하다가 깜짝 놀라요

옆에서 내 보다 더 억울하다고 외치는 성령의 탄식 성령의 눈물을 본다 말이죠.

 

아이고 나는 매일 매일 일만달란트 탕감해 주고 있는데

이 놈은 엉뚱한 기도 하고 있습니다 라고

기쁨으로 알려주신다 말이죠.

 

그러니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다 이루었다에서 태어났는데

뭔들 감사치 못할게 뭐가 있냐 말이죠

 

곧 모든 권력은 잉여인데

 

심지어 마귀가 주님으로 부여 받은 그 권력 조차도

마귀 지는 모르지만

알려고도 하지 않고

모른척 하겠지만

 

바로 십자가의 영광을 위해서 동원이 되는 보충물이 되는 겁니다.

 

(13:1, 개역)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

(13:2, 개역)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리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림이니 거스리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

(13:3, 개역) 관원들은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나니 네가 권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려느냐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그에게 칭찬을 받으리라

 

그러니 사드 반대 라고 대들지 말고

마치 이것은 밤새도록 허깨비 붙잡고 점봇대 붙잡고 왜 길을 막냐고 밤새도록 씨름 하는 것과 같으니

말라꼬 헛된 안개랑 붙잡고 씨름하냐 말이죠.

그냥 나 보다 세다 싶으면 무조건 굽신 굽신 거려라 말이죠.

그 권세자에게 굽신거리는 것이 아니라

그 권세자에게 권세를 준 여호와께 굽신 거리면 되는 겁니다.

 

그러니 스데반은 기쁜 겁니다.

저들이 죽일려고 달려드는 그 힘 조차도 주님이 허락하셨으니 말이죠.

 

다윗이 자기를 욕하는 사울 집안의 사람의 비난에

다윗쪽의 장수가 저 놈 당장 목을 쳐서 가지고 오겠다고 하는 것에

놔 두어라 그것 조차도 주님이 하신 일인줄 누가 알겠느냐 라고

지금 기쁨을 누리기 바쁜 판국에

쓸데 없이 의문을 붙잡고 씨름할 필요가 없다고 하는 겁니다.

 

우리는 매일 매일 일만달란트라는 빚을 누리기에 바쁩니다.

질식할 정도로 돈다발에 묻혀서 살고 있습니다.

 

죄값을 대신 치른 그 피 값에 묻혀서 살고 있다는 겁니다.

도대체 나의 죄를 찾고 싶어도 찾을수가 없습니다.

너무 너무 많이 쏟아져서 저 밑바닥에 갈수가 없을 정도로 오히려

쏟아지는 피 값에 의해 위로 상승하고 있으니 밑으로 내려갈수 없는 인생인 겁니다.

 

남들이 그렇게 부러워하는 하늘에서 돈다발이 안떨어지나 라는 일이

우리에게는 매일 매시간 매분 매초 마다 수시로 벌어지고 있습니다.

 

안 깔려 죽는 것이 이상할 정도입니다.

 

미국 에니메이션 하늘에서 음식이 내려 와요 ~~~

라는 제목처럼

 

하늘에서 십자가의 피가, 사랑의 빚이, 피 값이, 일만달란트 용서가 내려와요 ~~~

천국에서 막 쏘아 대는 겁니다.

이 땅에서 천국을 안 누리고는 못배기는 겁니다.

슬픔도 굶주림도 목마름도 없는 천국에서 쏘아대는 일만달란트 빚

그 사랑의 빚

 

그러니 우리가 슬픔을 당할 때, 병들어 고통을 당할 때, 버림을 당할 때, 굶주림을, 목마름을 당할 때

아무런 대답이 없거든 사랑하는 줄 알고 기쁘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겁니다.

아 드디어 델꼬 가실 모양이구나

 

무화과 나무의 저주를 보고

드디어 의문의 마침이 왔구나를 보게 되니 얼마나 기쁘냐 말이죠.

또렷함이 왔는데

밝히 보이는 [다 이루었다]가 왔는데

 

상대적인 것을 봐야지요.

무화과 나무 자체를 보고 두려워 하는 이유는

자기도 그 꼴 날까봐 두려워하는데

상대적인 인물인 예수님 보다

자기가 더 크게 보이니까 쓸데 없이 걱정한다 말이죠.

 

예수님이 예수님 자신을 세 번 부인한 베드로에게

너 자신을 봐라 니 꼬라지를 알아라 했으면 큰일 났겠죠.

그러나 예수님은 베드로야 너 너 자신을 보지마

날 봐

날 보라니깐

 

너 날 사랑하제????

 

이 관계성이 또렷함이지

쓸데없이 독자적인 나무만 쳐다보면

예수님이 뭐가 되냐 말이죠.

예수님이 말라 죽게 했으니

나무가 주체가 아니라

예수님이 주체이니 또렷한 분의 등장 때문에 얼마나 기쁘냐 말이죠.

 

저주받은 나무만 쳐다본다면

곧 나만 크게 보인다는 것 뿐이다는 거죠.

왜 그런 의문의 반복인 나를 뭐 볼게 있따고~~~~~

 

여호와로 기뻐한다는 것은

나로 인해 기뻐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좀 내가 보기에도 내가 대견스러운 짖하면 나를 자꾸 스다듬듯이 강아지 마냥 자꾸 쳐다보고

내가 보기에도 싫을 정도로 마음에 들지 않는 짖, 또는 실수, 또는 실패 등을 하면 아예 쳐다도 안봐 ~~

 

그것을 하루에도 몇 번씩 오락 가락 왔다리 갔다리 하는

그런 의문의 반복을 한 나를 왜 믿냐 말이죠.

믿을 구석이 있어야 믿을만 하지

 

여호와로 기뻐한다는 것은

또렷한 것은 예수님 뿐이다는 겁니다.

인간의 믿음도 다 엉터리요

뭔들 is 엉터리 아닌게 없으니

주님만 옳으면 됐다는 겁니다.

그 옳음을 나에게 억지로 끌어당겨올 필요가 없을 정도로 옳은 겁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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