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지자의 노래와 붙이시는 전쟁 (시편 108)

 

사람의 구원이 헛됨을 외치는 광야의 소리(선지자) 다윗

 

 

(108:10, 공동) 누가 나를 에돔까지 모실 것인가? 누가 나를 그 견고한 성으로 인도할 것인가?"

(108:11, 공동) 하느님, 이렇게 말씀하신 당신께서 어찌하여 우리를 버리십니까? 어찌하여 우리의 군대와 함께 나아가지 아니하십니까?

(108:12, 공동) 어서 이 곤경에서 우리를 도와주소서. 사람의 도움은 아무것도 아니옵니다.

(108:13, 공동) 하느님과 함께라면 우리는 용맹하리니, 하느님께서 원수들을 짓밟으시리라.

 

(108:12, 새번역) 사람의 도움은 헛되니 어서, 우리를 도우셔서, 이 원수들을 물리쳐 주십시오.

(108:12, 공동) 어서 이 곤경에서 우리를 도와주소서. 사람의 도움은 아무것도 아니옵니다.

(108:12, 쉬운) 원수로부터 우리를 도와 주소서. 사람의 도움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108:12, 우리말) 이 고통 속에서 우리를 도우소서. 사람의 도움은 아무 소용없습니다.

(108:12, 킹흠정) 우리에게 도움을 주사 고난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사람의 도움은 헛되나이다.

(108:12, 한글킹) 고난에서 우리를 구하소서. 인간의 도움은 헛됨이니이다.

(108:12, 현대인) 우리를 도와 대적을 치게 하소서. 사람의 도움은 쓸모가 없습니다.

(108:12, 현대어) 우리를 도와 원수를 치게 하소서. 인간의 도움이란 덧없습니다.

(108:12, 가톨릭) 저희를 적에게서 구원하소서. 사람의 구원은 헛됩니다.

 

(108:1, 개역) [다윗의 찬송 시] 하나님이여 내 마음을 정하였사오니 내가 노래하며 내 심령으로 찬양하리로다

(108:2, 개역)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108:3, 개역) 여호와여 내가 만민 중에서 주께 감사하고 열방 중에서 주를 찬양하오리니

(108:4, 개역) 대저 주의 인자하심이 하늘 위에 광대하시며 주의 진실은 궁창에 미치나이다

(108:5, 개역)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이 온 세계 위에 높으시기를 원하나이다

(108:6, 개역) 주의 사랑하는 자를 건지시기 위하여 우리에게 응답하사 오른손으로 구원하소서

(108:7, 개역) 하나님이 그 거룩하심으로 말씀하시되 내가 뛰놀리라 내가 세겜을 나누며 숙곳 골짜기를 척량하리라

(108:8, 개역) 길르앗이 내 것이요 므낫세도 내 것이며 에브라임은 내 머리의 보호자요 유다는 나의 홀이며

(108:9, 개역) 모압은 내 목욕통이라 에돔에는 내 신을 던질지며 블레셋 위에서 내가 외치리라 하셨도다

(108:10, 개역) 누가 나를 이끌어 견고한 성에 들이며 누가 나를 에돔에 인도할꼬

(108:11, 개역)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셨나이까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 군대와 함께 나아가지 아니하시나이다

(108:12, 개역) 우리를 도와 대적을 치게 하소서 사람의 구원은 헛됨이니이다

(108:13, 개역)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용감히 행하리니 저는 우리의 대적을 밟으실 자이심이로다

 

(108:1, 새번역) 하나님, 나는 내 마음을 정했습니다. 진실로 나는 내 마음을 확실히 정했습니다. 내가 가락에 맞추어서 노래를 부르렵니다. 내 영혼아, 깨어나라. / 히브리어 사본과 칠십인역과 시리아어역을 따름. 마소라 본문에는 이 구절이 없음 57:8 비교. ; '내 영혼도 노래를 부르렵니다'

(108:2, 새번역) 거문고야, 수금아, 깨어나라. 내가 새벽을 깨우련다.

(108:3, 새번역) 주님, 내가 만민 가운데서 주님께 감사드리며, 뭇 나라 가운데서 노래 불러 주님을 찬양하렵니다.

(108:4, 새번역) 주님의 한결같은 그 사랑, 하늘보다 더 높고, 주님의 진실하심, 구름에까지 닿습니다.

(108:5, 새번역) 하나님, 주님, 하늘보다 더 높이 높임을 받으시고, 주님의 영광 온 땅 위에 떨치십시오.

(108:6, 새번역) 주님의 오른손을 내미셔서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을 구원하여 주십시오. 나에게 응답하여 주십시오.

(108:7, 새번역) 하나님께서 그 성소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크게 기뻐하련다. 내가 세겜을 나누고, 숙곳 골짜기를 측량하련다. / 또는 '그의 거룩하심으로'

(108:8, 새번역) 길르앗도 나의 것이요, 므낫세도 나의 것이다. 에브라임은 나의 머리에 쓰는 투구요, 유다는 나의 통치 지팡이이다.

(108:9, 새번역) 그러나 모압은 나의 세숫대야로 삼고, 에돔에는 나의 신을 벗어 던져 그것이 내 소유임을 밝히련다. 블레셋을 격파하고 승전가를 부르련다."

(108:10, 새번역) 누가 나를 견고한 성으로 데리고 가며, 누가 나를 에돔에까지 인도합니까?

(108:11, 새번역) , 하나님, 우리를 정말로 내버리신 것입니까? , 하나님, 주님께서 우리 군대와 함께 나아가지 않으시렵니까?

(108:12, 새번역) 사람의 도움은 헛되니 어서, 우리를 도우셔서, 이 원수들을 물리쳐 주십시오.

(108:13, 새번역)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 우리는 승리를 얻을 것이다. 그분이 우리의 원수들을 짓밟을 것이다.

 

 

인간의 도움이 헛되다 라고 다윗이 말하는 이유는

자신이 인간으로써의 한계점을 찍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의 도움은 여기서 멈춰버린다는 겁니다.

더 이상 더 깊은 더 깊이 더 들어가지 못한다는 겁니다.

 

1급 살인자로써 다윗은 3명 우리야 장군, 밧세바. 이름없는 아기를 연타석으로 죽음으로 몰고 갔습니다.

 

마치 베드로처럼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완벽한 죄인이다는 겁니다.

 

이제 베드로든 다윗이든 완악해지고 싶어도 완악해질수 없는

수건을 아무리 덮어쓰고 싶어도 수건을 저절로 벗겨지는

그 어떤 것도 가릴수 없는 맨얼굴의 인간이 되어버렸다는 겁니다.

누구든지 무시해도 상관 없을 정도로 수건이 벗겨진 자이다는 겁니다.

 

백날 가려본들 무화과나뭇잎은 금방 썩어 낙엽처럼 되어버리는 겁니다.

 

자 이런 자로써 동시에 다윗은 유일하게 인간의 왕은 구원자가 아니다 라는 고백을 하는 자인 겁니다. 곧 사람의 구원은 헛되다 라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주변의 이방나라의 왕제도를 이방나라로부터 수입해 와서

섬기는 왕을 바랬지만

그 어떤 인간 왕도 섬기는 왕 곧 구원을 이룰자는 없다고 고백한 유일한 이스라엘 왕이 다윗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왕관을 내려놓지요.

 

왕관 내려놓자 마자 이스라엘 국가는 해체작업에 놓이게 됩니다.

내려놓은 왕관을 차지하고자 솔로몬 왕 이후의 왕들은 발악하는 에돔(애굽)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주게 됩니다.

 

다윗은 정작 수건(왕관)을 벗어버렸는데

그 수건(왕관)을 광채나기 때문에 서로가 차지할려다가

그 배설물을 서로 차지하고자 성전중심의 피 비린내 나는 내부전쟁이 벌어지게 됩니다.

완악함을 그대로 보여주는 애굽(에둠)의 모습인 원수로 드러나는 겁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해체를 본격화 시켜주는 알리바이로 작용케 되는 겁니다
.


즉 영화의 한 장면처럼

특히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에 나오는 장면처럼

빛나는 보물을 차지하고자 가까이 가면 갈수록

주변은 허물어지면서 땅이 꺼져 내려앉는것처럼 말입니다.

결국 사람이 보물을 찾는게 아니라, 차지하는게 아니라,
보물이 사람을 찾는 식입니다.
사람의 도움을 전혀 필요치 않는 보물이 주인공으로써 말이죠.

 

결국 다윗은

주님께서 다윗 그 자체를 귀하게 여기시고자

이스라엘 왕 직분도 아니요

수건을 쓴 그 수건도 아니요.

아무것도 그 중간에 걸친 것이 없이

맨얼굴 맨몸으로 발가벗겨진 채로 주님은 다윗을 그모습 그대로 대하고자 하는데

 

다윗은 덕지 덕지 뭐 그리 치장을 하는지

수건도 써야 하고

왕다움도 갖추어야 하고

뭐가 그리 조건이 많은지 갖출게 한두가지가 아니다 말이죠.

 

그런데 그런거 갖추다가 탕자처럼 완전 빈털터리가 되고나서야

아무것도 필요 없음을 그저 얼굴, 맨얼굴로만으로도 충분한

또렷함을 보게 되니

 

오히려 세 번 부인한, 세 명을 우연을 가장한 미필적 고의 사건이

감사하게 다가오게 되는 겁니다.

수건을 벗기시니 말이죠.

 

자 비로소 이제 실상을 보게 되는 겁니다.

누가 나를 도울자인가를?

그래서 최전방에 누가 나를 위해 싸우는지를 보게 되는 실상을 보여주시는 겁니다.

맨얼굴이 되어서야

아 원수와 싸우는 저분이 이런 사건을 터트리시는 이유를 알게 된 겁니다.

그래서 다윗은 출애굽전쟁을 요청합니다. 구원전쟁을 요청하는 겁니다.

 

이것이 붙이시는 전쟁입니다.

 

누가 나를 저 에돔(애굽)에 보낼런고?

 

주여 저요 저요 저요 제가 가겠나이다

 

맹구가 일어나서 손을 번쩍 드는 식으로 딴 사람은 아무도 못 들게 하는 겁니다.

 

(6:8, 개역)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 때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6:1, 개역) 웃시야 왕의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6:2, 개역) 스랍들은 모셔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그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그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6:3, 개역) 서로 창화하여 가로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6:4, 개역) 이같이 창화하는 자의 소리로 인하여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집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6:5, 개역)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6:6, 개역) 때에 그 스랍의 하나가 화저로 단에서 취한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6:7, 개역) 그것을 내 입에 대며 가로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6:8, 개역)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 때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6:9, 개역)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6:10, 개역)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6:11, 개역) 내가 가로되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대답하시되 성읍들은 황폐하여 거민이 없으며 가옥들에는 사람이 없고 이 토지가 전폐하게 되며

(6:12, 개역) 사람들이 여호와께 멀리 옮기워서 이 땅 가운데 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니라

(6:13, 개역)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오히려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삼키운바 될 것이나 밤나무,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자 그런 의미에서 시편 108편은 두 시편 57편과 60편을 동시에 하나의 사건으로 놓고 보면

 

사울왕에게 쫏겨다니면서 늘 죽음 속에 놓여졌습니다.

그래서 외쳤던 노래가 시편 57편입니다.

 

오 주여 나의 마음이 주께로 정해졌으니 나는 주 찬양 하리라

깨어라 나의 영혼아 비파와 수금 들어라 이 새벽에 내가 찬양 하리라 ~~~

 

그런데 역설적으로 시편 60편은 다윗이 왕이 되어서 이방나라를 치는 배경입니다.

 

이것을 시간적인 차이를 무시하고 한 직선에 놓아 평면 위에 올려보자 말이죠.


즉 이 두 사건을 한 직선 위에 올려놓으면

한 쪽에서는 다윗은 쫏겨나는 현상이지만

다른 한 쪽에서는 다윗이 이방을 치는 장면이 되는 겁니다.

 

물론 실지로 다윗은 이방나라로 피신을 해서 이방나라를 도와 전쟁을 승리로 이긴적이 있습니다.

 

그렇게 해본들 정작 이스라엘에서는 도망자 신세 피신자 신세이다는 거죠.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인간 취급 안해주지만

이방에서는 존경을 받는다 말이죠.

 

(13:54, 개역) 고향으로 돌아가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저희가 놀라 가로되 이 사람의 이 지혜와 이런 능력이 어디서 났느뇨

(13:57, 개역) 예수를 배척한지라 예수께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 하시고

(6:1, 개역)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사 고향으로 가시니 제자들도 좇으니라

(6:4, 개역)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 하시며

(4:23, 개역)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반드시 의원아 너를 고치라 하는 속담을 인증하여 내게 말하기를 우리의 들은 바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네 고향 여기서도 행하라 하리라

(4:24, 개역) 또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

(4:44, 개역) 친히 증거하시기를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 하시고

 

즉 다른 말로 선지자는 경계인이다는 겁니다.

자기 영역이 없다는 겁니다.

사울왕도 선지자냐 라는 속담이 이스라엘에게 있는데

자기 영역이 없어야 할 선지자가 자기 영역이 있기에 과연 선지자냐 라는 겁니다.

 

(삼상 10:11, 개역) 전에 사울을 알던 모든 사람이 사울의 선지자들과 함께 예언함을 보고 서로 이르되 기스의 아들의 당한 일이 무엇이뇨 사울도 선지자들 중에 있느냐 하고

(삼상 10:12, 개역) 그곳의 어떤 사람은 말하여 이르되 그들의 아비가 누구냐 한지라 그러므로 속담이 되어 가로되 사울도 선지자들 중에 있느냐 하더라

 

그렇기 때문에 선지자는 사람의 도움이 헛됨을 외치는 자입니다.

 

사람 곧 인간은 다른사람의 도움이 있어야만이 경계인에서 벗어나 도록 되어 있습니다.

예를들면 난민자가 난민 신청 서류를 작성해서 공무원이 그 서류를 처리해주어야만 정착인이 되도록 되어 있다 말이죠. 공무원의 도움이 필요하다 말이죠. 그래서 사람의 도움이 없으면 국적 취득을 못합니다.

 

결국 사람의 도움이 없으면 여기에도 속하지 못하고

저기에도 속하지 못하도록 되어있다는 겁니다.

 

어떻게 해서든 빨리 사람의 도움이 나타나서

떠돌이 신세에서 벗어나 정착민이 되는 것이

사람의 삶의 목표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선지자는 오히려 정반대의 삶을 살도록 되어 있습니다.

오히려 정착민인 토박이로써 분명한 출생지와 가문 등등이 분명히 있어도

 

오히려 더 쫏겨나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거기에 태어났다 하더라도 말이죠. 곧 고향이지요.

 

소속이 또렷함에도 불구하고 국적없는 무국적의 무소속인 붕떠버린 인간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결국 선지자가 원해서가 아니라

선지자의 기능 자체가

그 선지자 그 자체가 여기가 고향이라고 해도

본향은 아니다 라고 외치는 소리, 스피커 가 되는 겁니다.

 

광야의 소리

 

(3:3, 개역) 저는 선지자 이사야로 말씀하신 자라 일렀으되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하였느니라

(1:3, 개역)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기록된 것과 같이

(3:4, 개역) 선지자 이사야의 책에 쓴 바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1:23, 개역) 가로되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하니라

 

이것을 보여주는 것이 선지자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선지자는 고향에서 쫏겨나야만 하는 겁니다.

 

소리가 되라는 거죠. 소리. 음파.

 

선지자 되고 싶어서 선지자가 되는게 아니다는 거죠.

대부분의 거짓선지자는 정착인입니다.

자기 영역이 또렷하게 있습니다.

머리 둘곳이 있다 말이죠.

고향에서 존경받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그 고향이 해체되어야 할 것과

본향이 따로 있음을 외칠수가 없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다윗은 선지자로써 고향에서 외면받는 자입니다.

이것을 그대로 같은 노선에 예수님이 의도적으로 고향에 가는 이유입니다.

 

인정받고자? 아니지요.

 

그럼 인정 받는 곳 곧 존경받는 곳으로 가면 될 것 아니냐 말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향에 가시는 이유는

 

(6:1, 개역)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사 고향으로 가시니 제자들도 좇으니라

(6:2, 개역) 안식일이 되어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많은 사람이 듣고 놀라 가로되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뇨 이 사람의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됨이뇨

(6:3, 개역)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6:4, 개역)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 하시며

(6:5, 개역)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인에게 안수하여 고치실 뿐이었고

(6:6, 개역) 저희의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 이에 모든 촌에 두루 다니시며 가르치시더라

 

그 고향을 해체시키기 위함이다는 겁니다.

그래야 본향을 사모할 것 아니겠냐 말이죠.

 

즉 눈에 보이는 성전을 깨지 않으면

참성전을 못보는 이유인 겁니다.

 

그래서 선지자란 눈에 보이는 고향을 해체시키는 본향을 사모케 하도록 하는 자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 스스로 선지자 라고 우기는 놈들을 보면

대부분 교회를 소유한 놈들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자기 밥풀떼기를 자기가 해체시키겠냐 말이죠?

자기 밥벌이로 만들려고 자기영역화 시켰는데

해체가 왠 말이냐 말이죠.

 

또 이것을 의도적으로 갖출려고 일부러 해체시킬려는 제스쳐를 취하는 놈들이 너무 많아요.

그러면 두배로 돌아오는 원리를 알고

우리 목사님은 십일조로 형성된 월급을 도리어 십일조로 모조리 다 바치더라

이것이 그만 겸손한 목사로 소문이 나서

몇배나 십일조 하는 효과가 나타나니

다른 교회 목사들처럼 욕심이 없어서 다행이다 라고 다들 속아넘어가더라 말이죠.

 

그런데 그게 나중에는 더 부담이 되어서

자기들 스스로에게 무거운 짐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바로 집 앞의 교회가 20년 전에 그랬다 말이죠.

 

그러니 의도적으로 선지자 될려고 해체하거나

또는 자기영역을 없애버릴려고 하거나

고향에서 쫏겨나고자 인정 안받을려고 하는 짖을 의도적으로 한다고

경계인이 일부러 된다고 해서 선지자가 되는게 아니다 말이죠.

 

이들 선지자도 전혀 예상 못했다는 겁니다.

다윗이 왕이 되면 사울왕처럼 이스라엘 왕 답게 할려고 마음먹지

 

누가 밧세바를 취하고

누가 우리야 장군 고의적으로 죽이고

누가 이름 없는 아이를 죽게 방치하는

무능하기 짝이 없는 왕이 될줄 누가 알았겠냐 말이죠.

 

자기의 회개

자기의 눈물

자기의 금식

자기의 기도가

 

이런 사람의 도움이 아무 쓸모짝도 없음을

남이 아닌 자기가 직접 격었지 않냐 말이죠.

 

그래서 먹고 마시고 춤추고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고

 

왕이시여 슬픔이 너무 커서 혹시 정신적으로 헷까닥 하신거 아닙니까?

 

아니다 나는 멀쩡하다

 

그럼 왜?

 

사람의 구원은 헛도다 라고

 

그 유명한 고백이 나오는 겁니다.

 

그야말로 선지자로써

제대로 또렷한 것을 봐 버렸기 때문에

이제 눈에 보이는 것들이 이 실상 앞에 무너져야 할 것들임을

해체되어야 할 것들임을 보게 되는 겁니다.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누가 꾀냐 말이죠.

 

사람의 도움? 그거 다 허상이다는 겁니다.

실상 앞에서 사라지고 없어지는 안개 곧 수건이다는 겁니다.

수건 벗어라 말이죠.

가면 벗어라 말이죠.

 


또렷한 실상 앞에서 감히 의문의 것을 붙잡는다는 것이 얼마나 허망함을 아느냐

바로 이것을 외치는 자가 선지자이기 때문에

고향에 들어가는 겁니다.

당연히 인정 받을려고? 아니지요. 고향 해체시킬려고 말이죠.

실상이 떳으니 허상아 물러나라 라는 겁니다.

 

99명의 동네 사람이 한 사람을 왕따 시킬 것 뻔한데

그 한 사람이 왕따 뻔히 당할 줄 알면서도

피하지 않고 그 속으로 들어가는 이유는

 

왕따 안받고자 인정받고자 함이 아니라

도리어 그 99명을 왕따 시키고자 들어간다 말이죠.

 

그 구조 판을 엎어버릴려고 들어간다 라는 겁니다.

원수의 성문으로 원수의 성문 뚜껑을 열러 간다는 겁니다.

 

또렷한 십자가가 있기 때문이다는 겁니다.

 

어딜 감히 십자가 밝히 보이는데

의문의 사망이 왕노릇하고 있는건데?

진짜 왕 맞어 라고 머리 들이 미는 겁니다.

그래서 발생한 사건이 십자가 사건이다 말이죠.

다 이루었다

사망이 아무것도 아닌게 왕노릇하고 있는 것을 못보겠다는 겁니다.

의문의 것이 왕노릇하는 꼴을 못보겠다고

그래서 고향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이것을 잉여라고 합니다. 잉여

 

(6:4, 개역)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 하시며

(6:5, 개역)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인에게 안수하여 고치실 뿐이었고

(6:6, 개역) 저희의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 이에 모든 촌에 두루 다니시며 가르치시더라

 

아무런 권능을 행할 수가 없기 때문에

믿음이 먹혀들지가 않는 겁니다.

 

말씀이 먹혀 들지 않아요.

당연하지요 말씀이 가득하다고 여기는 자들에게 어떻게 새로운 말씀이 들어가겠습니까?

 

헌술은 헌 부대에. 새술은 새부대 담아야

터지지 않으니 말이죠.

 

십자가는 선지자로써 교회라는 고향에서 인정받지 못합니다.

교회에서 쫏겨나는 십자가입니다.

십자가가 교회에서 배척받는 이유인 겁니다.

 

예수님은 교회에서 배척받아 죽으셨거든요.

 

이것이 바로 실상입니다.

이 실상을 보여주기 위해서

선지자는 고향에

인정받지 못하는 고향에 들어가는 겁니다.

 

누구 말 마따나 설교를 왜 하느냐 하면

지옥 보내기 위해서 설교 한다는 것처럼 말이죠.

 

자 왜 다윗이 사람의 구원이 왜 헛됨을 외쳤는지

그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즉 다른 말로 하면

원인 있는 결과가 헛되다는 겁니다.

 

원인 없는 결과만을 외친다는 겁니다.

그래서 원인 있는 결과가 헛되다를 외쳐야만 하는 겁니다.

 

눈에 보이는 것들을 다 헛되다 라고 말이죠.

특히 교회를 말입니다.

 

이것은 곧 주의 오른손을 외침과 같습니다.

즉 도움은 어디서 오는가?

구원은 어디서 오는가?

 

원수와 싸우는 그 분만이 진정한 도울자 이다는 겁니다.

 

멜기세덱이 그래서 오른 손 하면 나와야 하는 이유입니다.

 

아브라함은 도대체 이 전쟁

조카 롯을 구하고자 들어간 곳에

하필이면 저거들끼리의 전쟁에 낑기게 되었는데

 

즉 예수님이 조카 롯인 우리 죄인을 구하고자 소돔에 어쩔수 없이 들어가게 되었는데

저거들끼리 전쟁을 하고 있더라 말이죠.

눈에 보이는 전쟁은

저 유대인 쪽과 저 로마쪽이 서로 전쟁을 하더라 말이죠.

그 속에서 롯을 구하는 전쟁을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돌아오는 길에 도대체 어떻게 해서 이겨서 구원받았지?

아브라함 자기도 모르는 겁니다.

원인 없는 결과이기에

 

그런데 소돔왕이 아브라함을 영접하면서 당신 때문에 이겼다고 하니까

무슨 소리냐 나 아니오 라고 와쳤다 말이죠.

소돔왕은 당신이 원인이다 원인 있는 결과가 아니냐 라고 한다 말이죠.

원인 있는 결과를 추구하는 왕의 환대를 거절하고서

 

그럼 도대체 누구 때문에 이 전쟁에서 승리했지?

내가 롯과 함께 구원받았지?

 

그 놈 소돔왕 때문에

힌트를 삼은 것이

 

바로 원인 없는 결과를 더더욱 구체화 시키는 것이 바로

멜기세덱

아비도 없고 족보도 없는

원인 없는 결과로써의 인물

 

이 분이 오른팔로 그 속에서 건졌다 라는 겁니다.

원수와 싸우는 샬롬왕이다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윗은

바울이 비로소 알았던 것처럼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죄사람을 받은 자의 행복에 대해서

다윗이 아브라함을 언급했듯이

원인 없는 결과로써 말이죠

그것을 다시 바울 자기도 지도 같은 노선에서 그것이 덮쳐져서

원인 없는 결과가 덮쳐져서 누리게 되니

로마서 4장에 기록했듯이

 

똑같이

다윗이 그 아브라함이 누린 것처럼

같은 선상에서 멜기세덱에 대해서 누려서

시편 110편에서 고백하듯이

사도바울이 히브리서에서 멜기세덱을 언급하는 겁니다.

해석되어져서가 아니라

그렇게 되면 원인 있는 결과이고

원인 없는 결과가 덮쳐져서

누리게 되니까 그 내용을 적었다 말이죠.

성령으로 말입니다.

 

그러니 이 싸움은 붙이신 전쟁이다는 겁니다.

 

고향에 왜 들어가는 겁니까? 맞습니다. 붙이신 전쟁이다는 겁니다.

 

(14:18, 개역)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14:20, 개역)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

(110:4, 개역)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치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5:6, 개역) 또한 이와 같이 다른 데 말씀하시되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이라 하셨으니

(5:10, 개역)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았느니라

(5:11, 개역)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너희의 듣는 것이 둔하므로 해석하기 어려우니라

(6:20, 개역)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가셨느니라

(7:1, 개역) 이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 여러 임금을 쳐서 죽이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 복을 빈 자라

(7:6, 개역) 레위 족보에 들지 아니한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고 그 얻은 자를 위하여 복을 빌었나니

(7:10, 개역) 이는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만날 때에 레위는 아직 자기 조상의 허리에 있었음이니라

(7:11, 개역) 레위 계통의 제사 직분으로 말미암아 온전함을 얻을 수 있었으면 (백성이 그 아래서 율법을 받았으니) 어찌하여 아론의 반차를 좇지 않고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별다른 한 제사장을 세울 필요가 있느뇨

(7:15, 개역) 멜기세덱과 같은 별다른 한 제사장이 일어난 것을 보니 더욱 분명하도다

(7:17, 개역) 증거하기를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이라 하였도다


(14:11, 개역) 네 왕이 소돔과 고모라의 모든 재물과 양식을 빼앗아 가고

(14:12, 개역) 소돔에 거하는 아브람의 조카 롯도 사로잡고 그 재물까지 노략하여 갔더라

(14:13, 개역) 도망한 자가 와서 히브리 사람 아브람에게 고하니 때에 아브람이 아모리 족속 마므레의 상수리 수풀 근처에 거하였더라 마므레는 에스골의 형제요 또 아넬의 형제라 이들은 아브람과 동맹한 자더라

(14:14, 개역) 아브람이 그 조카의 사로잡혔음을 듣고 집에서 길리고 연습한 자 삼백십팔 인을 거느리고 단까지 쫓아가서

(14:15, 개역) 그 가신을 나누어 밤을 타서 그들을 쳐서 파하고 다메섹 좌편 호바까지 쫓아가서

(14:16, 개역) 모든 빼앗겼던 재물과 자기 조카 롯과 그 재물과 또 부녀와 인민을 다 찾아왔더라

(14:17, 개역) 아브람이 그돌라오멜과 그와 함께 한 왕들을 파하고 돌아올 때에 소돔 왕이 사웨 골짜기 곧 왕곡에 나와 그를 영접하였고

(14:18, 개역)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14:19, 개역)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14:20, 개역)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

(14:21, 개역) 소돔 왕이 아브람에게 이르되 사람은 내게 보내고 물품은 네가 취하라

(14:22, 개역) 아브람이 소돔 왕에게 이르되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여호와께 내가 손을 들어 맹세하노니

(14:23, 개역) 네 말이 내가 아브람으로 치부케 하였다 할까 하여 네게 속한 것은 무론 한 실이나 신들메라도 내가 취하지 아니하리라

 

 

누가 붙였냐 말이죠?

피하는게 아니라

도망치는게 아니라

전쟁을 붙이는 겁니다.

 

저들 전쟁 속에 붙여서 전혀 다른 전쟁을 하고 있는 겁니다.

전쟁 속의 전쟁 말입니다.

 

그래서 누가 붙였냐?

붙였다는 것은 이미 이겼기에

원인 없는 결과를 누리도록 붙이는 겁니다.

 

아브라함을 영접하는 자가 이미 이긴 전쟁을 누리도록

즉 주의 오른팔에 놓여졌음을

상대적으로 원수는 그의 발등상에 놓여졌음을

이것이 실상이였음을

 

아 그래서 이 분이 붙였구나 라고

아브라함은 자기를 영접하는 그분케 십일의 일 곧 하늘에 속했다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는 하늘에 속한 자라고

구별된 분임을 고백하는 겁니다.

당신은 하늘의 대제사장이다는 거죠.

 

사람의 도움이 아니다는 겁니다.

번제가 제사가 아니다는 겁니다.

 

인애와 자비다 라는 겁니다.

 

실상 만이 제대로 된 원수 문제를 해결하니까 말이죠.

원수 문제 죄문제는 번제와 제사라는 의문의 반복으로는 해결이 안됩니다.

인애와 자비만이 또렷하게 해결하니까

이 전쟁의 승리

진정한 안식은

원인 없는 결과로써

멜기세덱 하늘의 대제사장 으로 인한 승리이다는 겁니다.

눈에 보이는 원인이 아니다였다는 거죠.

자기영역이 없는 분의 결과 때문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시편 109편 앞편에서도 물론 나왔겠지만

이후로도

원수 대적 발등상 오른편 오른팔 오른손 등등의 의미가 나오면

멜기세덱을 다윗은 염두하고 있다 라는 것을

 

결국 다윗은 아브라함처럼

중간에 낑긴 경계인처럼

곧 선지자로써

 

저거들끼리의 자기 영역과 소유 싸움의 전쟁 속에서

전쟁 속에 다른 전쟁

전혀 다른 전쟁을 누리고 있는 겁니다.

 

이것이 십자가가 우리를 사람의 도움이 필요없이

사람의 구원이 헛됨을 외치면서

전혀 다른 도움, 전혀 다른 구원을 펼치시는 이유인 겁니다.

 

인간이 원하는 구원이 아니라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그런 꾀를 부리는 구원이 아닌

의문의 반복이 아닌, 완악한 마음으로 수건을 쓰는 그런 구원, 그런 선택 선민사상이 아닌

 

명료하게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

주님의 인애와 자비만을 나타내는

그 구원을 보이시는 겁니다.

 

사망과 죽음의 열쇠를 가진 분이 이런 전쟁을 붙이시는 겁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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