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와 저희 (시편 109)

 

너희와 저희로 가르는 시편의 저주 찬양 (시편 109)

 


(
1:20, 새번역) 시편에 기록하기를 '그의 거처가 폐허가 되게 하시고, 그 안에서 사는 사람이 없게 하십시오' 하였고, 또 말하기를 '그의 직분을 다른 사람이 차지하게 해 주십시오' 하였습니다. / 69:25 109:8

(11:9, 새번역) 다윗도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그들의 밥상이 그들에게 올무가 되고 덫이 되게 하여 주십시오. 그들이 걸려 넘어지고, 보복을 받게 하여 주십시오. / 69:22; 23

(15:3, 새번역) 그리스도께서도 자기에게 좋을 대로만 하지 않으셨습니다. 성경에 기록하기를 "주님을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떨어졌다" 한 것과 같습니다. / 69:9

 

(109:1, 개역) [다윗의 시, 영장으로 한 노래] 나의 찬송하는 하나님이여 잠잠하지 마옵소서

(109:2, 개역) 대저 저희가 악한 입과 궤사한 입을 열어 나를 치며 거짓된 혀로 내게 말하며

(109:3, 개역) 또 미워하는 말로 나를 두르고 무고히 나를 공격하였나이다

(109:4, 개역) 나는 사랑하나 저희는 도리어 나를 대적하니 나는 기도할 뿐이라

(109:5, 개역) 저희가 악으로 나의 선을 갚으며 미워함으로 나의 사랑을 갚았사오니

(109:6, 개역) 악인으로 저를 제어하게 하시며 대적으로 그 오른편에 서게 하소서

(109:7, 개역) 저가 판단을 받을 때에 죄를 지고 나오게 하시며 그 기도가 죄로 변케 하시며

(109:8, 개역) 그 년수를 단촉케 하시며 그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시며

(109:9, 개역) 그 자녀는 고아가 되고 그 아내는 과부가 되며

(109:10, 개역) 그 자녀가 유리 구걸하며 그 황폐한 집을 떠나 빌어먹게 하소서

(109:11, 개역) 고리대금하는 자로 저의 소유를 다 취하게 하시며 저의 수고한 것을 외인이 탈취하게 하시며

(109:12, 개역) 저에게 은혜를 계속할 자가 없게 하시며 그 고아를 연휼할 자도 없게 하시며

(109:13, 개역) 그 후사가 끊어지게 하시며 후대에 저희 이름이 도말되게 하소서

(109:14, 개역) 여호와는 그 열조의 죄악을 기억하시며 그 어미의 죄를 도말하지 마시고

(109:15, 개역) 그 죄악을 항상 여호와 앞에 있게 하사 저희 기념을 땅에서 끊으소서

(109:16, 개역) 저가 긍휼히 여길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가난하고 궁핍한 자와 마음이 상한 자를 핍박하여 죽이려 한 연고니이다

(109:17, 개역) 저가 저주하기를 좋아하더니 그것이 자기에게 임하고 축복하기를 기뻐 아니하더니 복이 저를 멀리 떠났으며

(109:18, 개역) 또 저주하기를 옷 입듯하더니 저주가 물 같이 그 내부에 들어가며 기름 같이 그 뼈에 들어갔나이다

(109:19, 개역) 저주가 그 입는 옷 같고 항상 띠는 띠와 같게 하소서

(109:20, 개역) 이는 대적 곧 내 영혼을 대적하여 악담하는 자가 여호와께 받는 보응이니이다

(109:21, 개역) 주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인하여 나를 선대하시며 주의 인자하심이 선함을 인하여 나를 건지소서

(109:22, 개역)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여 중심이 상함이니이다

(109:23, 개역) 나의 가는 것은 석양 그림자 같고 또 메뚜기 같이 불려가오며

(109:24, 개역) 금식함을 인하여 내 무릎은 약하고 내 육체는 수척하오며

(109:25, 개역) 나는 또 저희의 훼방거리라 저희가 나를 본즉 머리를 흔드나이다

(109:26, 개역)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도우시며 주의 인자하심을 좇아 나를 구원하소서

(109:27, 개역) 이것이 주의 손인 줄을 저희로 알게 하소서 여호와께서 이를 행하셨나이다

(109:28, 개역) 저희는 저주하여도 주는 내게 복을 주소서 저희는 일어날 때에 수치를 당할지라도 주의 종은 즐거워하리이다

(109:29, 개역) 나의 대적으로 욕을 옷입듯하게 하시며 자기 수치를 겉옷 같이 입게 하소서

(109:30, 개역) 내가 입으로 여호와께 크게 감사하며 무리 중에서 찬송하리니

(109:31, 개역) 저가 궁핍한 자의 우편에 서사 그 영혼을 판단하려 하는 자에게 구원하실 것임이로다

 

(13:8, 개역)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혹 백 배, 혹 육십 배, 혹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13:9, 개역)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13:10, 개역)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어찌하여 저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13:11, 개역)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 되었나니

(13:12, 개역)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13:13, 개역) 그러므로 내가 저희에게 비유로 말하기는 저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13:14, 개역)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13:15, 개역)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 함이라 하였느니라

(13:16, 개역)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13:17, 개역)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너희 보는 것들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였고 너희 듣는 것들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느니라

(13:18, 개역) 그런즉 씨 뿌리는 비유를 들으라

(13:19, 개역)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리는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가에 뿌리운 자요

 

 

언어라는 것은 곧 문자는 상대적인 것을 가지고 와야 설명이 됩니다.

즉 남자 문자 단어를 통해 남자 가 무슨 뜻이지 라는 것은

여자라는 단어를 가지고 와야 그 차이로 대조를 이루면서 이해가 됩니다.

이것은 아직까지 뇌과학에서 왜 그런지를 알수 없다고 합니다.

원인 없는 결과이다는 거죠.

남자는 왜 남자 가 되는지를 말이죠.


다만 여자 라는 의미를 가지고 옴으로써 그 차이로만 이해 되지

남자 라는 독자적인 의미에서는 알수 없다는 겁니다.

모든 언어를 선악적이다는 거죠. 율법적 또는 상징계라는 법적이다는 겁니다.

 

결국 약속이라는 것은 비언약적인 것을 가지고 비교를 해서 그 의미가 밝혀지게 되는 거죠.

마치 빛을 대 낮에 비추이면 그 차이성이 없어서 설명 불가이듯이 말이죠.

캄캄한 밤에 비추어야 누구든지 알아먹게 되는 겁니다.

 

자 그럼 찬양이란 노래하는 가수들을 오디션 프로그램에 참여케 해서

심사위원이 채점을 매겨서 잘 노래 부른 가수 중에 좀 더 더더 잘 부른 사람을 가려내는

그런 식의 노래를 찬양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찬양이란 약속입니다. 계시입니다.

자 그렇기 때문에 비언약적 속성을 가지고서 설명이 되는 겁니다.

비약속적인 존재들을 가지고서 아 찬양이란 이렇게 나누는 것이군요 라는 설명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제목을 너희와 저희로 두 패로 나누는 의미로써의 찬양이라는 겁니다.

시편은 너희와 저희로 나누는 겁니다. 약속이요 계시입니다.

거룩이란 나누는 것이거든요. 구별 차별 분리 분별 말이죠.

 

자 그런데 그 나누는 원리인 거룩의 표본 율법을 주게 되니

아니 이 유대인이 그 율법으로 자신을 할례하듯이 짤라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남을 칼로 잘라내듯이 나누는 기준으로 삼게 되는 겁니다.

 

그래놓고 비율법을 율법이라고 하는 겁니다.

거짓을 참이라고 하는 거짓을 사랑하고 있는 겁니다.

 

그 거짓이 바로 시편에서 누누이 고백했던

번제와 제사입니다.

곧 의문의 반복입니다.

그 거짓을 사랑하고

 

참된 인애와 자비는 싫어하는 겁니다.

이것이 거룩인데

오히려 이 거룩을 더럽다고 거부하는 거죠.

 

율법이 기준이 된게 아니라 율법을 지킨 내가 남을 짤라내는 기준이 졸지에 되고 말았다 말이죠. 내 속의 죄가 율법을 넘어서더라 말이죠.


결국 남을 짤라내었다 나 옳지요? 율법 제대로 적용한 나 옳았지요?

거기서 멈춰버리는 겁니다.
육의 자랑이 되어버리고 그 행함이 기념비가 되고 그 실천이 마일리지를 쌓게 되더라 말이죠. 나는 안 그러고 싶은데 내 속의 죄가 나를 넘어서는 겁니다.

나에 대해서만 집착하더라 말이죠.

내가 옳게 행동한거 맞기는 맞나? 혹 실수 했으면 어떻하지?

이것이 자기를 넘어서 남에게 까지 그 불안을 적용하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은 자기의 욕망이 없습니다.

모조리 타인의 욕망으로 살고 있습니다.

이것이 항아리 안에 갇혀 있는 구조에서 못 벗어나는 죄 아래 갇힌 모습이다는 겁니다.

 

(7:20, 개역)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7:21, 개역)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7:22, 개역)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7:23, 개역)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본인들이 왜 그들을 짤라낸지를 모르고

그 행함을 짤라낸 행함을 역시나 자랑하게 되는 겁니다.

자랑안했다고 우겨도, 입 꾹 다물고 자랑 안해야지 라고 허벅지를 꼬집으면서 억지로 참아도

그 행함을 지울길이 없다 말이죠.

긍휼을 바라지 않더라 말이죠.

자신에게서도 그렇고

남에게서도 그렇고 말이죠.

 

그래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구나 라고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였던 사도바울이 탄식하는 겁니다.

 

자신은 이래나 저래나 저주 마땅히 받을 자 이구나 라는 고백이다 말이죠.

 

어 그런데 갑자기 그 어떤 길도 없는 막다른 절벽에서

원인 없는 결과로써 예수 안에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일방적으로 쳐들어와서 선언해 버리니

졸지에 부활을 누리게 되는 겁니다.

방금까지 탄식하던 나는 사라지게 되고

부활한 나 바울을 부활한 예수님 때문에 졸지에 바울은 부활을 누리게 되는 겁니다.

새피조물이 되었다고 말이죠.

율법에 저촉 받지 않는 새피조물 말입니다.

 

그런데 다시 허물어 버린 의문의 증서를 다시 세워서

자기도 못 지키는 막살지 않기를 남에게 까지 짐을 지운다는 것

이것은 도대체 어디서 왔는가 하는 겁니다.

바로 문자요 육체요 행함인 시간과 공간인 역사에서 왔지

계시 찬양에서 온게 아니다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시편을 달달 외우지 않았겠냐 말이죠.

유대 민족이라는 항아리에서 타인의 욕망이니 같이 달달 외웠다 말이죠.

그런데 그는 찬양자가 될 수가 없었습니다.

외운다고 찬양자가 될 것 같으면 지나개나 다 하겠지요.

그런데 찬양은 인간의 입술에서 나오는게 아닙니다.

찬양의 입술에서 인간이 나오는 겁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예수님을 만나고서 불가능한 노래를 하게 됩니다.

예수 안에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말이죠.

 

그리고서는 이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누가 꾀냐

꾀는 자는 저주의 저주를 받을 지어다 라고 말이죠.

 

이것이 사도들의 특징입니다.

 

베드로가 시편 109편과 69편을 인용해서

자신의 상대적인 인물이였던 가룟유다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물론 상대적이였다는 것을 전혀 몰랐지요. 나중에 성령을 받고 보니 알게 된 겁니다.

탕자는 자신의 상대적인 인물로써 맏아들이 그 자리에 놓여질줄 몰랐지요.

약속이 배치하는 것은 아무도 알 길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것을 의식하고 행동한다는 자체가 있을 수 없을 테니 말이죠.

 

자신은 탕자로써 용서받았지만

상대적인 맏아들이였던 가룟유다는 버림을 받았다고 저주의 시인 시편 109편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시편 109편 자체를 해석못하는 오늘날의 성경박사들이나

그 당시 바리새인이나 도저히 알수 없는 판국에

더군다나 모르는데 더 모르도록 베드로가 이 시편 109편을 인용했다는 것은

일방적인 해석이지

객관적인 성경연구를 서로 교류해서 나온 것이 아니다 말이죠.

 

왜 일까요?

 

어떻게 찬양자가 저주의 시를 외치고 있는가 하는 점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겁니다.

 

오늘날 신학 박사들이나 그 당시 유대전통 성경연구자들이나

시편 109편을 해석을 못합니다.

 

원수가 누구인지에 대한 해석을 못해요

자 그렇다면 원수를 해석 못하면

예수님도 해석 못해요

못 알아 먹는다 말이죠.

 

그런데 은연 중에 자기를 건드리면 바로 이해가 0.3초 잠깐 되지요.

다시 이성적으로 파악할려고 하니

즉 원인 있는 결과로써 파악할려고 하니

행함으로 볼려고 하니

실천하고자 하니

막상 앞뒤가 맞지 않는다 말이죠.

 

자 그런 점에서 베드로나 사도바울은

여지 없이 이 저주의 시를 인용하듯이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 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성령 받은 자의 특징입니다.

 

곧 다윗은 여호와 하나님은 사랑을 했는데 그 사랑을 악으로 갚는 이스라엘 내부의 원수를 겨냥해서 저주를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 원수가 누구길래 다윗은 저주 할까요?

여기에서 원수에 대해서 해석 못하는 이유는 아주 간단 합니다.

항상 인간은 좋은 의미에는 자기를 포함시키고

항상 인간은 나쁜 의미에는 자기를 빼버리는

아주 아주 놀라운 트릭의 반칙을 쓴다는 겁니다.

 

여기에 다윗은 그 원수에 자신을 포함시켜서 저주한다는 겁니다.

 

이것은 상대적인 완료된 이스라엘의 완성을 이미 다 봐버렸기 때문에

역사적인 이스라엘 곧 눈에 보이는 이스라엘에 대한 저주를 여지 없이 퍼붓고 있는 겁니다.

 

결국 찬양도

계시도

거룩도

기도도

금식도

회개도

 

내 쪽에서 어떤 행함으로써 하는 독자적인 행동들이 아니라

 

상대방 보랍시고 하는 행함이 있는 믿음으로써 두 패로 쪼개기 위한 것이 바로

찬양이요 계시라는 사건이다는 겁니다.

 

두 패가 없으면 그 하나를 다시 둘로 쪼개는 마음판의 할례가 되는 것이지요.

 

계속 끊임없이 분절 분절 하는 겁니다.

2분의 1로 나누고 그것을 다시 분절 시켜서 다시 2분의 14분의 1로 나누고 다시 16분의 1로 나누고 보이지 않을 때 까지

없음에 도달할 때 까지

제로 영이 될 때까지 말이죠.

 

내가 거룩을 행하는게 아니라

거룩이 나를 끊임없이 분절 시키는 겁니다.

사라질때까지

나라는 것은 원래 없다 말이죠.

그런 자에게만 부활이 있는 겁니다.

부활이 뭡니까? 모든 종교에서 말하는 그런 부활은 없습니다.

 

부활이란

주여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라는 겁니다.

 

번제와 제사의 상대적인 인애와 자비가 부활인 겁니다.

 

그러면 부활 아닌 것이 반드시 대조적으로 옆에 나옵니다.

그 사람은 부활교리를 믿기 때문에 부활되어야 하기 때문에

이레에 두 번 금식하고 십의 이조를 드리면서

저 세리와 같이 토색하지 않고 금욕적이고 거룩한 경건의 삶을 살고자 노력했다고 하는데

 

바로 이것이 부활 아닌 자들의 특징이다는 겁니다.

 

결국 부활 조차도 역전으로써의 두 패로 가르는 사건인 겁니다.

약속이다 말이죠.

손가락 거는 그런 약속이 아니라

일방적인 선언이다는 겁니다.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데 너는 무조건 사랑하기로 작정 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사랑은 부활이다 말이죠.

부활이 뭡니까?

누가 봐도 저주 받았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을 뒤엎어버렸다는 것이 부활 아닙니까?

 

그 역전 전복을 오늘 다윗이 그대로 전하고 있습니다.

묵시이니까 말이죠. 역사가 아니니까 말이죠.

행함이 아니니까 말입니다. 믿음이니까 말입니다.

 

주님은 그들을 사랑했는데 저들은 오히려 악으로 갚는다는 겁니다.

대적하는 겁니다.

 

어쩌면 이것이 창조때의 천사들의 반란과 동일합니다.

그럼 창세기에 선악과는 왜 만들었을까요?

이 타락한 천사들을 잡기 위함 아니냐 말이죠.

그런데 거기에 동조하는 자들이 이들과 함께 대적하고 있는 겁니다.

원수죠.

 

그럼 다윗 또한 그 짖을 하다가 주님이 긍휼로써 역전 전복시켜서 빼내었습니다.

그래서 왜 저주를 마땅히 해야함을 아는 겁니다.

 

이 다윗의 찬양에

똑같이 사도바울도 또한 그 짖을 하다가 주님이 엎어버려서 그 속에 빼내었습니다.

자신이 전에 속했던 곳이 거룩이 아니라 똥떵어리 세계였기에

그 배설물을 저주 하기 시작합니다.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을 저주하고 죄인 중의 괴수가 되는 겁니다.

베드로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마귀한테 속아서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것에 대한 죄책감으로 똑같이 가룟유다처럼 자살할 수밖에 없는 그 속에 갇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 딴거 묻지도 따지지도 않으시고 그 속에서 빼내주셨습니다.

주님이 빼내주지 않았다면 그 율법의 세계 그 양심의 세계가 자살하도록 만들었다 말이죠.

이제 베드로는 아무도 해석못하는 시편 109편을 인용해서 가룟유다의 저주를 아주 뻔뻔스럽게 외치는 겁니다.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 지어다

 

죽어보세요 나 라는 것은 없어요

없는데 왜 나를 사랑하냐 말이죠.

모조리 다 자기를 사랑해서 자기를 기준으로 삼아 말씀을 지켜왔던 겁니다.

그런데 그것이 헛짓

의문의 반복

모호하고 흐릿함의 반복이다는 겁니다. 허무의 반복이다 말이죠.

 

그러나 죽었는데도 살아있는 분이 있다 말이죠.

그 분의 나 는 사라지지 않아요.

나는 나가 사라지지만

예수님의 나는 사라지지 않아요

죽여도 안사라져요

 

오히려 또렷하다 말이죠.

 

자 그렇다면 나의 부활따위는 없어요.

예수님의 부활 밖에 없어요.

없는 나를 찾지 말고

예수 안에서 새피조물인 나가 예수님의 긍휼로 즉 부활로 즉 불쌍히 여겨주심으로

즉 번제와 제사가 아닌 인애와 자비로 내가 예수 안에 있는 겁니다.

내가 생각한 내가 아닌 겁니다.

그 예수 안에 있는 나는 지금 나에게 이렇게 저주를 퍼붓습니다.

너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을 거야 라고 말이죠.

사도바울을 외침이요 사도베드로의 외침이요 선지자 다윗의 외침이요

바로 예수님의 음성이다는 겁니다.

 

자 그럼 다윗의 오늘 시편 109편을 그렇게 보자 말이죠.

예수 안에 있는 다윗이

그 당시 다윗에게 알려줍니다. 비유로써 말이죠. 비밀이다 말이죠. 계시이다는 겁니다.

 

뭐라꼬? 알려줍니까?

예수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써 완료된 다윗이

 

시편 109편 당시의 다윗에게 시간을 거꾸로 소급해서 역사의 끝에서 외칩니다.

 

다윗이 다윗에게 말입니다.

 

예수 안에 새피조물 된 다윗이(완료된 다 이루었도다를 누리게 된 다윗이)

 

다윗아 너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아

라고 말이죠.

 

그리고 그 계시를 다윗에게 들은 다윗은 시편 109편에서 다시 이스라엘에게 외칩니다.

이스라엘아 너희는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는다 라고 말이죠.

 

세상에나 이것처럼 사랑이 넘치는 표현이 어디있겠습니까?

 

자식에게 매를 대시는 아버지의 매질은

그야말로 사랑의 극치를 보여주는 겁니다.

사생아처럼 내어버려두지 않고 끝까지 사랑하신다는 증거로써

간섭하고 매질하고 한다 말이죠.

 

그런데 대적을 해요?

사생아처럼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는 겁니다.

이사야의 말씀이 성취되었다는 증거이기에

낙심할게 아니라 기뻐해야 합니다.

역시 말씀이 옳았지

인간의 역사는 옳지 않았어 라고 말이죠.

행함은 아니다는 겁니다.

 

대적이라고 해서 하나님에게 노골적으로 대드는게 아닙니다.

저 세리처럼 토색하지 않고 이레에 두 번 금식 십의 이조 드렸다고

하는 이것이 대적이다 말이죠.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인애와 자비인데

번제와 제사를 고집하겠다는 겁니다.

인애와 자비는 행할 수가 없어요. 왜 손해보는 짓을 하겠냐 말이죠.
그 정도로 계산이 빨랐던 겁니다.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가는 겁니다. 손해는커녕 이득인데 말이죠.
해도 해도 티도 안납니다. 인애와 자비는 행함으로 되지 않습니다.

믿음으로만 되는 겁니다.

그러나 번제와 제사는 계급이 되고 힘이 되고 마일리지로 순위가 올라가서 즉각적인 효과가 나타나니 금방 우위를 가려내더라 말이죠

 

괜히 유대인이 악한세대가 요구하는 기적을 바라고 바라고 또 기적 기적 타령을 했겠습니까?

유대민족은 기적으로 구성된 사회인데 ~~~ 모세의 기적 ~~~

 

상대적인 존재가 필요 없이

나만 혼자 열심히 해서 마일리지 쌓기만 하면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강도의 공든 탑이 된 겁니다

강도의 소굴 말입니다.

 

예수님이 인애와 자비인데

제사와 번제를 원치 않는데

과연 자비인 인애인 사랑인 예수님께서 그거 가만히 내버려 두시겠습니까?

공든탑을 확 허물어 버려야지요.

 

그것이 사랑이니까 말이죠.

 

그러나 그들은 내 믿음의 공든탑을 허물어버린다고 하나님의 저주를 퍼붓는 겁니다.

대적하고 달려들어서 죽여버리는 겁니다.

시편 109편을 인용해서 말이죠.

 

자 이렇게 너희와 저희가 가려지는 겁니다.

 

둘 다 시편 109편을 인용합니다.

 

원수에 대한 저주 말이죠.

 

그러나 한 쪽은 사적인 복수입니다. 물론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복수로써 예수님을 죽였지만 말이죠.

그 죄목이

내 공든탑을 무너뜨렸다고 말이죠.

이것이 완악함이다는 겁니다.

수건 벗겨주는 줄도 모르고 말이죠.

 

결국 찬양은 누구들으랍시고 부르는 겁니까?

상대적인 완악한 자 들으랍시고 부르는 겁니다.

 

 

찬양은 계시로써 찬양이 떳다 하면 완악함이 들추어지는 차이가 벌어지는 사건이 발생한다는 뜻입니다.

 

백날 기타치고 피아노 치면서 노래 부른다고 해서 완악함이 들추어지는게 아닙니다.

그건 노래이고 찬양은 계시입니다. 두 패로 나누는 겁니다.

홍해 가르듯이 두 패가 쭈우욱 갈라져요

한 쪽은 완악한 자로

다른 한 쪽은 긍휼을 바라는 자로 말이죠.

 

어린아이가 호산나 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양할지로다 라고 부르니까

 

누가 짜증을 내던가요?

 

바로 대제사장들 아닙니까?

 

자 그럴때에 찬양은 이렇게 말합니다.

찬양이 말을 해요

 

이들이 찬양하지 않으면 돌들이 소리 지르게 하겠다고?

 

(19:37, 개역) 이미 감람 산에서 내려가는 편까지 가까이 오시매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의 본 바 모든 능한 일을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

(19:38, 개역) 가로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

(19:39, 개역) 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하거늘

(19:40, 개역)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르리라 하시니라

 

(21:14, 개역) 소경과 저는 자들이 성전에서 예수께 나아오매 고쳐 주시니

(21:15, 개역)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의 하시는 이상한 일과 또 성전에서 소리질러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 아이들을 보고 분하여

(21:16, 개역) 예수께 말하되 저희의 하는 말을 듣느뇨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렇다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케 하셨나이다 함을 너희가 읽어 본 일이 없느냐 하시고

(21:17, 개역) 그들을 떠나 성 밖으로 베다니에 가서 거기서 유하시니라

 

 

자 율법이 시온에서 나오고 주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 나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자마자

이 예루살렘에 토착해 있던 자들이

졸지에 예수님의 침략에 의해서 소동이 벌어지는 겁니다.

 

천국은 침노당하나니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이다 말이죠.

 

(11:12, 개역) 침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예수님이 이 예루살렘을 침공하신 거다 말이죠.

 

안그러면 아무리 예루살렘에 살아도 다 지옥간다 말이죠.

그러니 사랑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자 그럼 이 예루살렘은 마치 가나안 민족의 여부스 민족의 성처럼

침략당하는 겁니다.

침략당하지 않으면

인애와 자비가 승리하는게 아니라

번제와 자비 곧 원인 있는 결과 또는 역사, 또는 시공간 또는 행함이

또는 의문의 반복이 승리할 것 아니겠냐 말이죠.

 

주님이 그 꼴을 보겠냐 말이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 자체가

이미 안 봐도 비디오인것처럼

이미 승리한 거니까

저들이 순순히 물러나지 않고 끝까지 발악하는 모습을 통해서

아 우리가 저렇게 완악했는데

그 목이 곧은 백성의 목을 꺽어주셨구나

휴 지옥 갈뻔 했네 ~~~ 라고 되는 겁니다.

 

그것을 우리는 봐야 합니다.

우리도 저렇게 완악했으니까 말이죠.

순 엉터리 배설물 역사해석으로 도배를 하고

실천을 하고 그것으로 버텼다 말이죠.

 

그거의 달인이 누구였냐 말이죠.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 사도바울 아니냐 말이죠.

그럼 사도바울은 사랑 받아서 빼내임을 받았다면

남을 이제 더 이상 저주 하지 않는 그런 삶을 사는 겁니까 아니면

도리어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서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라고 찬양해야 합니까?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누가 꾀더냐 라고 그 꾀는 누가 와 부딧혀야 합니까?

피해야 합니까?

 

당연히 부딧혀야 하지요.

자기처럼 꼬끄라져 말에서 떨어지도록

율법의 갑질에서 떨어뜨릴려고

자빠지도록 다리 걸어서 실족케 하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그게 약속이다 말이죠.

 

자 이런 분명한 십자가가 또렷하게 보이는데

 

그 또렷함에

완악한 유대인 곧 육적 이스라엘은

흐릿하고 모호한 의문의 제사를 반복하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대적하는 원수로 자리잡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저주를 해야죠

 

나는 착한 크리스챤이라서 그런 저주의 말을 못해요 라고 말하는데

그게 마귀자식입니다.

 

또렷한 십자가의 사랑이 밝히 보이는데

이 사랑에 대적하는 흐릿하고 모호한 것을 붙잡는 행함을 쫏는 자들이다는 거죠.

 

자기도 천국 안가고 남도 천국 못가도록 막고자 하는 자들이다는 겁니다.

 

가룟유다는 자기만의 천국이 따로 있었습니다.

로마로부터 해방되어 독립국으로써 이스라엘이 회복되는 꿈 말이죠.

거기에 예수님이 도움이 될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올시다 였지요.

 

그게 천국이면 예수님이 도와 주겠지요. 도와 주는게 아니라 아예 주도적인

해방군 지도자가 되겠지요.

그러나 그런 독립운동 자체가 마귀나라를 세우는 꼴이다 말이죠.

 

그럼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허무하게 죽어버렸다 말이죠.

십자가 아무리 쳐다 봐도 저주일 뿐이지

독립도 안하겠다

이스라엘 회복도 안하겠다

도대체 뭐냐 말이죠.

 

그러나 상대적으로 좋으신 분을 죽였다는 그 죄책감에서 벗어날길이 없는 겁니다.

아무도 안 도와줘요

예수님이 유일한데 자기가 팔아서 죽여버렸으니 말이죠.

없다 말이죠.

 

가룟유다의 잘못은 예수님이 없다고 본 겁니다.

사라졌다고 본 겁니다.

자기가 자살해서 사라지듯이 예수님도 자기처럼 띄엄 띄엄 봤다는 겁니다.

 

그러나 똑같이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베드로에게는

예수님이 일방적으로 나타났습니다.

사라지지 않아요

없어지지 않아요

그 자체가

긍휼이요 자비요 인애이였다는 겁니다.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베드로에게는 긍휼과 자비만 보일 뿐입니다.

죄책감 들 겨늘이 없어요.

자살할 근거가 사라졌어요.

이유 없이 사랑이 무조건 옳았기 때문에

이 사랑만 외칠 뿐이다는 겁니다.

 

그 베드로가 시편 109편을 인용해서 가룟유다에 대해 언급하는 겁니다.

상대적인 자기는 이유 없이 용서 받았다 라는 겁니다.

역시나 저주 또한 이유 없이 저주 받았다 라는 겁니다.

 

시편 109편을 인용한 자체가 이유 없고

원인 없는 결과로써 해석한 거다 말이죠.

 

그러나 오늘날 신학자나 유대전통해석인 바리새인은

자꾸 이유를 찾는다 말이죠. 그래야 그 원인을 찾아야

지옥가지 않는 조건

저주 받지 않는 조건을 갖출게 아니냐 말이죠.

누구 말 마따나 수학공식을 찾겠다 아니겠습니까?

 

그럼 그게 무슨 놈의 비밀이냐 말이죠.

 

씨뿌리는 비유를 통해서

 

있는 자는 더 받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 까지도 빼앗긴다 라고 했습니다.

 

자 그럼 이 공식에 아무리 그 어떤 행함과 실천을 대입시켜본들 답이 안 나온다 말이죠.

 

그냥 있는 자는 더 받고

그냥 없는 자는 그 있는 것 까지도 빼앗기구나 라고 믿으면 저절로 누리게 되더라 말이죠.

 

주여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저는 죄인입니다 라는 고백을

십자가의 피 흘리심 때문에

다 이루었다 때문에

그냥 믿게 되는 거지

 

그것을 내 신체에 내 몸에 실천케 만들어서 아무리 장착할려고 해도

가룟유다에게 말씀이 튕겨버리는 겁니다.

예수님이 가룟유다에게 튕겨나요

바리새인이 아무리 밤에 몰래 찾아와서 가까이 하고 싶어도

튕겨 나니까

가까이 하기에 너무 먼 당신 ~~~ 이 되는 겁니다.

 

아니 왜?

 

왜긴 왜 라니요?

 

자석처럼 서로 밀어내는 극이니까 말이죠.

 

그러나 아무리 개차반으로 살아도

탕자처럼 아무리 개판으로 살아도

예수님의 피는 이 탕자에서 찰떡 궁합

자석이 아무리 멀리 있어도 철썩 붙어버리는 겁니다.

 

여기에 반드시 사랑의 훼방꾼이 보충물로써 동원이 되듯이

원수마귀가 동원이 되는거다 말이죠.

 

어딜 감히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꾀더냐 라고

마귀 보란 듯이 펼쳐지는 십자가의 사랑에

사랑의 훼방꾼이 동원이 되어서

저주를 받는 겁니다.

 

그들은 반드시 쫄딱 망하도록

사망의 권세는 허물어져서 돌 위에 돌이 남지 않도록 완벽하게 허물어지는

 

아주 망해도 이래 망한자가 없을 정도로 망하라고 저주하는 겁니다.

 

(109:4, 개역) 나는 사랑하나 저희는 도리어 나를 대적하니 나는 기도할 뿐이라

(109:5, 개역) 저희가 악으로 나의 선을 갚으며 미워함으로 나의 사랑을 갚았사오니

(109:6, 개역) 악인으로 저를 제어하게 하시며 대적으로 그 오른편에 서게 하소서

(109:7, 개역) 저가 판단을 받을 때에 죄를 지고 나오게 하시며 그 기도가 죄로 변케 하시며

(109:8, 개역) 그 년수를 단촉케 하시며 그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시며

(109:9, 개역) 그 자녀는 고아가 되고 그 아내는 과부가 되며

(109:10, 개역) 그 자녀가 유리 구걸하며 그 황폐한 집을 떠나 빌어먹게 하소서

 

 

없는 자는 그 있는 것 마저도 빼앗겨야 한다는 말씀이 이루어지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마태복음에서는 완악한 유대인에게 해당되는 겁니다.

역사적으로 봐도 오늘날까지의 유대인을 보세요

세계에서 무신론자가 가장 많은 민족이 유대인입니다.

여호와 안 믿습니다.

물론 믿는다고 해도 엉터리죠. 수건을 벗을 마음이 추호도 없으니 말이죠.

그러니까 오히려 대적하고 있습니다.

여전히 지금까지도 말이죠.

 

철천지 원수인 사마리아인과 이방인에게 예수님이 행한 행동들은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납득이 ~~~

 

당연하지요 그들의 시선에서는 율법에 위배 되니까 말이죠.

 

탕자를 용서해 버리니까 맏아들은 대적자로 나서버리는 겁니다.

나는 행했고 저 놈은 단 한 개도 행한게 없는데 용서하다니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런데 맏아들이였던 사도바울이 대적자에서 탕자로 긍흉받는자로 바뀌니까

로마서 11장에서 다시 다윗이 언급한 저주를 인용하면서

 

비방을 유도하고 있는 겁니다.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주를 삼키듯이

주의 율법을 사모하는 그 열심이 주를 대적하는 겁니다.

 

(11:9, 새번역) 다윗도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그들의 밥상이 그들에게 올무가 되고 덫이 되게 하여 주십시오. 그들이 걸려 넘어지고, 보복을 받게 하여 주십시오. / 69:22; 23

(15:3, 새번역) 그리스도께서도 자기에게 좋을 대로만 하지 않으셨습니다. 성경에 기록하기를 "주님을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떨어졌다" 한 것과 같습니다. / 69:9

 

(2:17, 새번역) 제자들은 '주님의 집을 생각하는 열정이 나를 삼킬 것이다' 하고 기록한 성경 말씀을 기억하였다. / 69:9

 

결국 유대인들은 어쩔수 없이 수건을 쓸 수밖에 없었지만

할례자의 수종드시는 종으로써 선지자로써 오신 예수님의 섬김이 아니면

벗겨질수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종으로 오셔서 죽기까지 복종해도

십자가를 여전히 거부하는 겁니다.

그리고 역사와 문자와 그것을 소유해서 대신하는 겁니다.

 

사랑은 안 믿고

행함과 실천으로 완악함을 고수하면서 수건을 벗지 않을려고 한다고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 출신이 사도바울이 그 내막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럼 다윗은 어떻게 벗겨졌나요

3명의 쓰리 희생안타로 자신은 홈을 밟을 수밖에 없도록 등떠밀렸습니다.

데드 볼로 안타 한번 친적 없는데

예수님이 우리의 허물인 도장 도장끈 지팡이를 담보로 잡아서

세 번 부인함을 담보로 잡아서

너가 나를 사랑하느냐 로 물어주심 때문에

수건이 그 도저히 벗길래야 벗길수 없는 완고하고도 완고한 그 수건을

눈 녹듯이 녹이는 십자가의 사랑 때문에 드디어 벗기심으로 말미암아

 

주의 사랑을 신나게 전하고 있는 겁니다.

 

선지자 다윗은 신나게 자신의 완악한 수건을 벗기신 주님을 찬양하면서

이 완악한 수건 쓴자를 저주하고 있는 겁니다.

 

왜 예수님의 얼굴을 보지 않고

얼굴과 얼굴을 대하지 않고

 

광채나는 사라지는 영광을 붙잡는데 신경 쓰느냐 라고

예수님이 얼굴을 보니 엽겹거든요,

불에 타서 새카만 엽기적인 얼굴이라 토가 나온다 말이죠.

그런데 어쩝니까 너를 지옥 불에서 건질려다가 타버린 얼굴인데

 

자랑스럽지 않나요?

 

싫어버린 바 된 얼굴로 보이는 자는 자기의 광채나는 얼굴을 수건으로 가리고 있기 때문인 겁니다.

 

그 완악함을 깨고자 오늘도 주님은 우리를 간섭하시면서 매를 대시는 겁니다.

 

이 놀라운 사랑에 감격스러워 벅차올라 뜨거운 눈물을 흘리면 막노래 하고 막 찬양합시다.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 라고 말이죠.

 

지금도 예수 안에서 완료된 그리스도의 몸으로써 내가

지금 역사 라는 의문의 반복 속에 살고 있는 나에게 외칩니다.

 

예수님은 다른거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듯이

너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만 물으셨듯이

 

내가 나에게 외치는 겁니다.

너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저주 받는다고

 

다윗은 다윗에게 외칩니다.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 지어다 라고 말이죠.

 

(고전 16:22, 개역)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

 

(고전 16장은 그야말로 부정적인 의미들이 하나도 없습니다.
온통 사랑만이 만개하고 있습니다. 그 예수님의 사랑만을 나누는 마음들 뿐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좋은 분위기 속에서 편지로 문안하는 문안 인사가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가 편지 인사말이다 말이죠.

이것 역시 무슨 수로 해석하냐 말이죠.

그런데 다윗은 용감하게 자기가 자기에게 그 저주를 퍼붓고 있습니다.

이것이 완료된 예수 안에서 완료된 다윗이 다윗에게 퍼붓는 저주입니다.

원인 없는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인애와 자비만을 쳐다보라고 자기가 자기에게 외치는 당부죠.

다른 것 일체 쳐다보지 말고 오로지 십자가만 밝히 보이니까 말입니다.

천국에는 오로지 십자가의 영광만 빛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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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것도 없거든, 침묵 뿐어거든,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로 들어라


죄인 2

 

어제 오후 9:09 ·

 

영화 ''에서

새의 칩입 곧 순수한 우연의 개입은

언제든 상징적 체계를 혼란에 빠지게 할 수 있음을 보게 한다

언제든 파국으로 치닫게 할 수 있는 외상적 실재는

늘 우리를 불가하며 낯선 시각을 제공한다

거기서 "왜 나에게?"

"신이여 왜 나에게 이런 시련을?" 이렇게 묻지

신은 대답할까?

지진, 태풍, 해일, 홍수,

어제 생로병사 한 암환자가 이렇게 말하더라

"난 나쁜 짓도 안했고, 벌 받을 일도, 남에게 해 안 끼치고,,,"

욥도 그랬다

신은 이렇게 답했다

"넌 죽어도 싸!"

-삐딱하게 보기, 지젝- 보다가



김대식 그 나 라는 것이 사실상 없는 나 였던 거죠,

암이 걸릴수 밖에 없는 나쁜공기 항아리가 만들어낸 나이기 때문에 붙잡아도 붙잡아도 소용이 업는 겁니다.

오히려 원인 없는 나 라는 결과는 이미 예수 안에서 완성 되어 있기에

아이씨 괜히 의문의 나를 괜히 붙잡았는네
진작 손 놓을껄 이라고

부끄 부끄 하겠죠.

처음 부터 없었고
안개인 나를 괜히 잡을 것이 아니라

원인 있는 나란 없고

원인 없는 새로운 나 가 저 사랑 속에서 있다는 것

그것 때문에 실재계가 침입 하는 겁니다.

그 유명한 동화 자기를 잃어버린 사람 

https://www.youtube.com/watch?v=dTnG-KG4b1E

솔로몬의 재판도 같은 의미이고

들뢰즈 라캉 책? 에서 혹부리 영감 이라는 일본동화를 예로 든 것도 같은 원리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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