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시받는 “없는 길”로써의 예수라는 부활 길 (시편 125편)
(시 125:1, 개역)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여호와를 의뢰하는 자는 시온 산이 요동치 아니하고 영원히 있음 같도다』
(시 125:2, 개역) 『산들이 예루살렘을 두름과 같이 여호와께서 그 백성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두르시리로다』
(시 125:3, 개역) 『악인의 권세가 의인의 업에 미치지 못하리니 이는 의인으로 죄악에 손을 대지 않게 함이로다』
(시 125:4, 개역) 『여호와여 선인에게와 마음이 정직한 자에게 선을 행하소서』
(시 125:5, 개역) 『자기의 굽은 길로 치우치는 자를 여호와께서 죄악을 짓는 자와 함께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스라엘에게는 평강이 있을지어다』
얼마전에 부활절이라고 하던데
오래전부터 부활절이 언제인지도 이제는 모를 정도가 되었습니다.
얼마나 그 종교적 환경에서 벗어나는 것이 불가능한지를 또 새삼스럽게 느껴지네요.
부활절 지킨다는 자체가 예수님이 부활이심을 안 믿는 겁니다.
예수님은 부활 교리를 믿는자가 아닌
예수님이 부활이심을 믿는 자는 찾는데 있어서
아무도 없기 때문에
그 없는 길을 만들어내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믿는채 할게 아니라
지금 이 순간 그 “없는 길”을 만드신 분이 누구인가를 보는
그 인물이 곧 부활이요 길이요 생명이다는 겁니다.
결국 부활은 안 믿겨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믿겨지는 것은
그분 곧 믿음 되신 그분이 하신 일이지 인간이 믿은게 아니다는 겁니다.
그 분이 부활로써 그 분이 그 막힌 믿음을 뚫었다는 겁니다.
없던 길을 만들었다는 겁니다.
우리는 그저 인간이 만들어낸 조작된 부활을 믿는데 도가 틴 도사들이지만
주님은 인간이 도저히 믿을수 없는 없는 길로써 부활을 만드신 겁니다.
그러니 부활은 다시 사는게 아니라
죽여서 다시 사는 겁니다.
이 죽여서 다시 사는 없는 길로써의 부활을 모든 인간이 무시하거든요.
그 무시받는 부활 곧 없는 부활을 만드시는 겁니다.
결국 없는 길로써 예수님은 길이고
없는 부활로써 예수님은 부활이다는 겁니다.
없는 생명으로써 예수님은 생명이요
없는 진리로써 예수님은 진리이다는 겁니다.
그 앞에 우리는 부활교리 믿는다고 내세우는 꼴이 들통나야 하고
생명을 추구한다고 깝죽대는 꼴이 가짜 생명으로 들통나야 하고
그 앞에서 진리가 아닌 내 배를 위해서 예수님을 임금 삼고자 하는 것이 들통남에 있어서
진짜 예수님과의 독대에 놓여져야 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부활이란 교리도 아니요 실상이 되는 겁니다.
부활을 만났다고
말이죠.
그런 자는 나는 부활된다를 주장하지 않겠지요.
그런 가능성으로써의 부활을 지옥간 부자가 시도하고 있습니다.
여전히 거지나사로 라는 선지자를 무시하면서 말이져
그 무시하는 그 간극이 바로 부활입니다.
3일이라는 그 간극
너(지옥간 부자)와 나(아브라함과 아브라함 품에 있는 거지나사로) 사이에 있는 큰 구멍을
지옥간 부자는 없다고 없는 취급함에 있어서 아브라함은 간극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곧 창세전에 생명책에 유일하게 기록된 주의 인자하심입니다.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음 말이죠.
그래서 예수님이 마리아 오빠 나사로가 죽었을때에
거기 있지 않은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한다고 합니다.
(요 11:15, 개역)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 하신대』
(요 11:15, 새번역) 『내가 거기에 있지 않은 것이 너희를 위해서 도리어 잘 된 일이므로, 기쁘게 생각한다. 이 일로 말미암아 너희가 믿게 될 것이다. 그에게로 가자."』
(요 11:15, 공동) 『이제 그 일로 너희가 믿게 될 터이니 내가 거기 있지 않았던 것이 오히려 잘된 일이다. 그 곳으로 가자."』
(요 11:15, 킹흠정) 『내가 거기에 있지 아니하였던 것을 너희를 위해 기뻐하노니 이것은 너희가 믿게 하려 함이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에게로 가자, 하시매』
(요 11:15, 한글킹) 『너희를 위하여 내가 그 곳에 있지 아니하였음을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고 하시더라.』
(요 11:15, 현대인) 『너희를 위해 내가 거기 없었던 것을 나는 기뻐한다. 이것은 너희가 믿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이제 그에게로 가자.'』
(요 11:15, 현대어) 『내가 거기 있지 않았던 것은 너희를 위해 아주 잘된 일이다. 너희가 나를 믿을 수 있는 또 다른 계기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에게로 가자.'』
일부러 가지 않고 3일을 죽을때까지 기다렸다가
드디어 죽으니까 죽은 나사로에게 가시는 겁니다.
결국 부활을 만났다는 말은
없는 부활 속에서 말도 안되는 부활이라는 인물(간극)을 만나게 되는 것이지
그 앞에서 나는 엉터리 부활(부활교리, 지식)을 믿고
그것을 통해서 엉터리 천국에 갈려고 했던 것이
들통나는 사건으로서의 부활을 만났음을 직시하게 되는 겁니다.
오빠 살려내라고 멱살 잡고 일찍 왔으면 안 죽었을텐데 라고 마리아 마르다가 좀 빨리 오시지 라고 웁니다.
그리고 동네사람들은 나사로를 사랑했다메? 꼴 좋다 라고
상갓집의 전문 울음꾼처럼 나사로를 위해서 웁니다.
그것을 보시고 예수님이 우십니다.
바로 이것이 예루살렘이 포위된 모습
갇혀 있는 모습
마귀로부터 포로 당한 모습이라서 우시는 겁니다.
마치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가 포로될 줄도 모르고
바벨론 큰 물고기 입 속으로 들어가는 줄도 모르고
절대로 망할 리가 없다는 거짓선지자의 말을 듣고 있는 이스라엘을 보고 우는 것처럼 말이죠.
그런데 이제 그 포로됨에서 돌아오게 되니
꿈만 같도다 말이죠.
눈물로 씨앗을 뿌리는 자 기쁨으로 단을 거두는
구체적 보편성의 예루살렘 이스라엘을 주님이 거두시는 겁니다.
자신의 피를 흘르심으로 칭칭칭 감아서
거룩으로 도배를 해서 말이죠.
우리가 흘린 눈물 없습니다.
주님이 흘리신 눈물 피흘리심 이 기쁨으로 단을 거두듯이
예루살렘을 빼앗으시는 겁니다.
우신 그 당사자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간극을 일부러 만드시고자
그레서 선지자들이 이 간극 곧 요나의 표적을 벌렸듯이
그 노선으로 일부러 간극을 만드는 겁니다.
네 맞습니다. 무시하라꼬
무시 받기 위해서
시간적으로 거꾸로 3일이라는 간극을 벌리신 겁니다.
이것이 성령의 일이다는 겁니다.
인간이 죽어서 가는 천국은 없거든요
곧 인간이 죽어서 부활 되는 부활은 없다 말이죠.
천국은 주님이 직접 몰고오시는 겁니다.
부활은 예수님이 직접 벌리시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땅이 요동하게 됩니다.
돌들이 소리 지르게 됩니다.
이 때 마귀들이 칭칭 감아버린 포로된 예루살렘을 빼앗길까봐
예수님을 죽일까 의논하게 된다 말이죠.
(요 11:43, 개역)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요 11:44, 개역)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요 11:45, 개역) 『마리아에게 와서 예수의 하신 일을 본 많은 유대인이 저를 믿었으나』
(요 11:46, 개역) 『그 중에 어떤 자는 바리새인들에게 가서 예수의 하신 일을 고하니라』
(요 11:47, 개역) 『이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공회를 모으고 가로되 이 사람이 많은 표적을 행하니 우리가 어떻게 하겠느냐』
(요 11:48, 개역) 『만일 저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저를 믿을 것이요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 하니』
(요 11:49, 개역) 『그 중에 한 사람 그 해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저희에게 말하되 너희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도다』
(요 11:50, 개역)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지 아니하는도다 하였으니』
(요 11:51, 개역) 『이 말은 스스로 함이 아니요 그 해에 대제사장이므로 예수께서 그 민족을 위하시고』
(요 11:52, 개역) 『또 그 민족만 위할 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함이러라』
(요 11:53, 개역) 『이 날부터는 저희가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니라』
이것이 간극이 말하고자 함입니다.
즉 간극 자체가 이미 벌려놓고 쳐들어 오시는 겁니다.
이제 예루살렘은 예수님이 우심으로써
주의 인자하심으로 곧 십자가의 피 흘리심으로 예루살렘을 피로 칭칭 감으시는 겁니다.
(시 125:2, 개역) 『산들이 예루살렘을 두름과 같이 여호와께서 그 백성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두르시리로다』
(시 125:3, 개역) 『악인의 권세가 의인의 업에 미치지 못하리니 이는 의인으로 죄악에 손을 대지 않게 함이로다』
그래서 간극을 눈에 보이지 않는 간극을
무시 받는 간극을
없는 길로써의 부활을 보여주시는 겁니다.
내가 천국을 바리새인을 넘어서서 가는게 아니라
천국이 바리새인을 넘어서 넘어 오는 겁니다.
곧 마귀를 뛰어넘어서 말이죠.
그런 부활 그런 천국이 아니면 가짜이다는 겁니다.
오늘 시편125편에서 악인은 굽은 길을 간다고 했습니다.
(시 125:5, 개역) 『자기의 굽은 길로 치우치는 자를 여호와께서 죄악을 짓는 자와 함께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스라엘에게는 평강이 있을지어다』
(시 125:5, 새번역) 『주님, 비틀거리면서 굽은 길을 가는 자를 벌하실 때에, 악한 일을 하는 자도 함께 벌받게 해주십시오. 이스라엘에 평화가 깃들기를!』
(시 125:5, 현대어) 『치우쳐 굽은 길로 다니는 자는 못된 것들과 함께 메어치소서. 이스라엘에 평화가 있으라!』
왜냐하면 상대적으로 예루살렘과의 차이성을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그러니 악인이 독자적으로 굽은 길은 못 갑니다.
곧은길, 평탄한 길의 차이로써 굽은 길은 가는 겁니다.
결국 예루살렘은 이렇게 거룩으로 칭칭칭 감겨져서 주의 은혜로 두루쳐져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죽은 나사로 사건을 통해서 예루살렘이 오히려 이런 가짜 부활
거짓 악으로 칭칭 감겨져 있는 예루살렘을 보시고 우시는 겁니다.
우리가 운 적이 없습니다.
그 우신 예수님이 이 예루살렘의 문제를 해결하시는 겁니다.
(눅 19:36, 개역) 『가실 때에 저희가 자기의 겉옷을 길에 펴더라』
(눅 19:37, 개역) 『이미 감람 산에서 내려가는 편까지 가까이 오시매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의 본 바 모든 능한 일을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
(눅 19:38, 개역) 『가로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
(눅 19:39, 개역) 『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하거늘』
(눅 19:40, 개역)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르리라 하시니라』
(눅 19:41, 개역)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눅 19:42, 개역) 『가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눅 19:43, 개역)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눅 19:44, 개역)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권고 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눅 19:45, 개역) 『성전에 들어가사 장사하는 자들을 내어 쫓으시며』
어떻게?
의로 칭칭 감습니다.
곧 십자가의 피 용서인 주의 인자하심으로
이 간극으로 말이죠.
예루살렘을 빼앗고자
원수들이 예루살렘을 사면으로 가둔 상태를 쳐들어가서 빼앗는 침노하는 천국 곧 침노하는 예수님으로써 없는 길을 없는 부활을 만드시듯이
무시받는 찬양 무시받는 부활로써 쳐들어가서 예루살렘을 빼앗는 겁니다.
이스라엘은 전리품으로써 구원되듯이 되찾듯이 말이죠.
결국 우리는 예루살렘을 보시고 우시는 예수님의 시선을 따라
예루살렘이 악으로 포로 잡혀 있는 갇혀 있는 모습을 봐야 합니다.
오늘날 교회를 보고 그런 시선으로 우는 자는 없을 겁니다.
어떻게 하면 이 교회를 통해서 부활 곧 구원이 되기를 바란다 말이죠.
즉 평탄한 길을 가기를 바란다 말이죠.
그런 입장에서 예수님이 의도적으로
모든 인간들로부터 무시받는 없는 길로써의 부활 길을 만드시는 예수님을 이해할 길이 없을 겁니다.
일부러 3일 길을 지체하듯이 말이죠.
그런데 시편 125편에서 이것이 성전에 올라간 완료된 상태인데
완료로써 완료이기 때문에 벌리시는 사건이다는 겁니다.
그 이전에 성전에 올라가서 부르는 노래로써의 완성에 놓여지지 않을때에
악인이 너무 너무 너무 죽을때도 잘 죽고
굽은 길은커녕 평탄한 길로 평안하게 죽으니까
그만 실족하게 되어서
알아 눕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사촌이 땅사니까 배 아프듯이 말이죠.
(시 73:1, 개역) 『[아삽의 시]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시 73:2, 개역) 『나는 거의 실족할뻔 하였고 내 걸음이 미끄러질뻔 하였으니』
(시 73:3, 개역)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시하였음이로다』
(시 73:4, 개역) 『저희는 죽는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건강하며』
(시 73:5, 개역) 『타인과 같은 고난이 없고 타인과 같은 재앙도 없나니』
(시 73:6, 개역) 『그러므로 교만이 저희 목걸이요 강포가 저희의 입는 옷이며』
(시 73:7, 개역) 『살찜으로 저희 눈이 솟아나며 저희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지나며』
(시 73:8, 개역) 『저희는 능욕하며 악하게 압제하여 말하며 거만히 말하며』
(시 73:9, 개역) 『저희 입은 하늘에 두고 저희 혀는 땅에 두루 다니도다』
(시 73:10, 개역) 『그러므로 그 백성이 이리로 돌아와서 잔에 가득한 물을 다 마시며』
(시 73:11, 개역) 『말하기를 하나님이 어찌 알랴 지극히 높은 자에게 지식이 있으랴 하도다』
(시 73:12, 개역) 『볼지어다 이들은 악인이라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 하도다』
아 그렇게 실족해서 마음이 그만 곤고함에 빠졌는데
도대체 악인이 왜 이렇게 잘 되느냐에 대한 실망감에
과연 주님이 살아계신 것 맞나고 라고 따지고 싶을 정도로
그 정도로 낙심에 빠졌는데
도저히 희망이라고는 보이질 않았는데
아 그런데 주의 성소에 들어가게 되니까 그만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는 겁니다.
곧 오늘 시편 125편처럼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가 덮쳐지니까 말이죠.
성소에서 보니까 정작 악인이 하루 아침에 쫄딱 망하더라 말이죠.
(시 73:13, 개역) 『내가 내 마음을 정히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
(시 73:14, 개역) 『나는 종일 재앙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책을 보았도다』
(시 73:15, 개역) 『내가 만일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이렇게 말하리라 하였더면 주의 아들들의 시대를 대하여 궤휼을 행하였으리이다』
(시 73:16, 개역) 『내가 어찌면 이를 알까 하여 생각한즉 내게 심히 곤란하더니』
(시 73:17, 개역)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저희 결국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시 73:18, 개역) 『주께서 참으로 저희를 미끄러운 곳에 두시며 파멸에 던지시니』
(시 73:19, 개역) 『저희가 어찌 그리 졸지에 황폐되었는가 놀람으로 전멸하였나이다』
(시 73:20, 개역) 『주여 사람이 깬 후에는 꿈을 무시함 같이 주께서 깨신 후에 저희 형상을 멸시하시리이다』
(시 73:21, 개역) 『내 마음이 산란하며 내 심장이 찔렸나이다』
(시 73:22, 개역) 『내가 이같이 우매 무지하니 주의 앞에 짐승이오나』
(시 73:23, 개역) 『내가 항상 주와 함께하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
(시 73:24, 개역)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
(시 73:25, 개역)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나의 사모할 자 없나이다』
(시 73:26, 개역) 『내 육체와 마음은 쇠잔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
(시 73:27, 개역) 『대저 주를 멀리하는 자는 망하리니 음녀 같이 주를 떠난 자를 주께서 다 멸하셨나이다』
(시 73:28, 개역)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사를 전파하리이다』
그럼 이렇게 망할걸 왜 낙심케 만들도록 그렇게 악인이 잘 되었냐 라는 거죠.
바로 이것이 보이지 않는 길인 없는 길 없는 부활 무시 받는 부활을 만드심이다는 겁니다.
안 보이니까 그 없는 길을 다들 무시할 수 밖에 없는데
그 간극에서 여기서 바로 창세전에 생명책에 기록된 주의 인자하심이 나온다는 겁니다.
그러니 부활은 모든 종교에서 외치는 부활과 질적으로 다릅니다.
정반대의 부활이다 말이죠.
부활을 깨는 부활이다 말이죠.
이 간극에서 보자 말이죠.
악인 부자가 도리어 지옥에 가 있고
늘 개도 상처난 곳을 햘틀정도로 개무시 당했던 거지나사로가 아브라함 품에 있는 겁니다.
성소에서 보니 팔이 어긋맞게 되어 있는 겁니다.
사실 처음부터 이랬다는 겁니다.
창세전에 생명책에 기록된 주의 인자하심이라는 간극이 이렇게 처음부터 나기도 전에 이랬던 것을
우리는 이 간극을 못 보고 낙심했던 겁니다.
성전에 올라가서
곧 성소에 들어가서 보게 되니
이 간극 속에서 보게 되니
이 성령 안에서
예수안에서
십자가의 3일이라는 그 간극 속에서 보니
진짜 실상은 창세전에 생명책에 기록된 주의 인자하심은 바로 이랬다는 겁니다.
부자와 거지나사로는 처음부터 이렇게 나누어진 간극에 의해서 나타난 증상물이였다는 겁니다.
그러니 인간이 믿을 수 있는 부활은 간극이 없는 부활
무시 받지 않는 부활이거든요.
존경 받는 부활이다 말이죠.
다들 부활 서로 믿을려고 환장한다 말이죠.
그런데 예수님이 부활 되심에 있어서는 아무도 안 쳐다보고 다들 무시한다 말이죠.
그게 진짜 부활 곧 없는 부활로써 무시받는 부활이 진짜 부활이다 말이죠.
간극을 벌리니까 말이죠.
가짜 부활은 간극이 없어요.
누구든지 무시하는 이 간극 이 보이지 않는 없는 길이라는 간극을 만드시기 위함이다는 겁니다.
그것이 주의 성소에 들어가게 되니까 오히려 또렷하게 보였고
우리는 그것도 모르고 이 간극 이 없는 길이 안보인다고
안보이니까 엉뚱하게 악인이 잘 되는 것만 보고 배 아파 했다는 겁니다.
악인에게도 선인에게도 물을 주시듯이
광야에 왜 주께서 비를 내리시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보이지 않는 주님의 인자하심을 퍼붓기 위함이다는 거죠.
이것은 저들은 주님의 인자하심이 배경으로 깔려 있는 줄도 모르고 까불고
그 배경으로 깔려있는 것을 무시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나 성도들도 처음에는 오독해서
그 주의 인자하심 보다 이 간극 보다
악인이 잘 되는 것에만 낙망하다가
그야말로 예루살렘이 포로된 티를 팍팍 내다가
주님의 등장
성소의 등장
성소가 나에게 다가옴으로써 성전에 들어간 적이 없는데
문이 저절로 스캔하듯이 나를 통과함으로써
성전에 들어가게 되니
이것이 완료로써 벌어졌었어야만 했던 간극으로써 나타나는 부활
곧 없는 길로써의 부활이였다는 겁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예루살렘을 예수님이 빼앗는 겁니다.
누구로부터?
원수로부터
그러니 원수가 드러나지 않는 부활은 가짜인 겁니다.
그 원수가 이 부활을 무시하거든요.
자기들은 부활 교리 믿고
안식일 지키고 있는데
안식의 주인이 왔다고 하니 다들 비웃는 겁니다. 무시하는 겁니다.
그 원수로부터 빼앗음으로써
예루살렘이 포로됨에서 되찾은 바 되는 겁니다.
여기서 곧 잃어버림과 되찾음을 통해서
주의 인자하심이 바로 이 간극에서 무시하는 간극에서 나타난다는 겁니다.
그러니 개인 원수
앞의 글에서 다윗의 원수는 없다고 했습니다.
오로지 예수님의 원수이다고 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원수에 누구도 포함 된다?
다윗도 포함 됩니다.
함께 예수님을 죽이는데 다 동참했다 말이죠.
24장로도
12제자들도 모두다
모든 인간이 예외 없이 말이죠.
우리는 뭘 해도 다 죄 뿐이고
뭘해도 원수 짖 밖에 안합니다.
그러니 시편 자체에서는 원수가 누구인지를
아직도 성경박사들이 해석을 못합니다.
원수는 예수님이 오셔야 비로소 밝혀짐으로써
시편도 예수님이 오셔야 비로소 해석이 됩니다.
주의 오른팔이 등장해야
무시 받는 간극이 등장하고 곧 주의 인자하심이 등장하고
그로 인해 신랑의 거룩한 옷을 거룩한 피를 과시하고자 신부에게 까지 거룩한 흰옷(계시록)을 입혀 자신의 피를 자랑하듯이
반대로 악한 원수는 주의 발등상에 놓여지게 됨을
이 간극을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는 철저하게 감추어져 있는 겁니다.
그것을 미리 보고 다윗이 기뻐하는 겁니다.
원수로부터 벗어나게 해 주시고
거룩한 흰옷으로까지 입혀주심 말이죠.
스가랴서에 나오는 대제사장 여호수아에게 흰옷을 입히시듯이 말이죠.
이 간극을 마귀는 안 보이니까 무시할 수 밖에 없어서
원수가 예수님으로 인해 비로소 들추어지는 겁니다.
예수님이 오시지 않으면 원수가 드러나지 않을뿐더러
예루살렘은 여호와의 팔이 두루 두루 예워싸지 않고
마귀로부터 포로됨에서 벗어날수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불쌍히 여겨달라고 이 간극을 보는 자는
주의 인자하심을 보는 자는
불쌍히 여겨달라고 하는 판국인데,
정작 원수이면서도 원수 아닌척 하는 자들은
주여! 저는 십의 이조 드렸고 이레에 두 번 금식했고
어릴적부터 율법을 다 지켰고
아버지 말씀 단 한번도 어긴적 없다고 내세웠던 자들이
정작 원수로써 발등상에 놓여지고
주여 져야 말로 진짜 주님의 원수 밖에 안됩니다.
저는 이 사망의 몸에서 갇혀서 포로되어 곤고한 자일 뿐입니다.
불쌍히 여겨달라고 하는 자에게는 주의 오른팔 즉 보호하심
예루살렘을 두루 두루 주의 팔로써 안위 하듯 안고 보호하시듯이
저들 원수로부터 빼내시고 탈환 하시는 모습을
예루살렘을 보시고 입성 하시는
천국의 침노
예수님의 침노
예루살렘을 빼앗기 위한 예루살렘 침략을 보여주시는 겁니다.
이 간극을 본 자는 주를 노래하고 기뻐하면서 호산나 라고 이미 승리했음을 넉넉히 누리면서
들어가게 되고
이것에 반발하는 자는 이 주의 인자하심 곧 간극이 안 보이기 때문에
무시하고 비웃는 겁니다.
그럴때에
이제는 그 눈물을 주의 병에 담는 신나는 일에
곧 무시받는 일에 함께 기뻐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내가 흘린 눈물이 아닌 주님이 흘리신 눈물 말입니다.
다들 무시했던 그 눈물 말이죠.
우리는 모든 것이 뭘 해도 다 죄이지만
그 바탕에 깔린 그 배경에 깔린 것은 바로 주의 은혜
곧 악인에게도 선인에게도 비를 내리시는 그 은혜로써
이 세상을 운행하시고 있다는 것에서
낙망은커녕 오히려 기뻐하며
이 간극 곧 주의 인자하심을 신나게 누리고 기뻐하고 감사하며 노래부르는 겁니다.
이것이 근심 대신 희락을
재 대신 화관을
근심 대신 찬송의 옷을 입히듯이
예루살렘 곧 포위된 예루살렘을 거룩의 옷으로 칭칭감는 모습인 겁니다.
어떻게? 주님이 우심으로써 인해서
주님의 사람들이 무시하는 없는길을 내심으로써
죽음 속에서 생명의 길을 없는 그 부활길을 내심으로써 말이죠.
계시록에 나오는 주님이 거룩한 옷을 신부에게까지 입혀서
자신의 거룩을 자랑하듯이 말입니다.
일곱 교회에게 거룩한 옷을 입히시는 겁니다.
우리는 뭘 해도 죄 밖에 안나오지만
뭘 해도 꽃길로만 가도록 되어 있습니다.
반대로 악인은 뭘해도 흙길로만 가도록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중간 사이 간극에 바로 주님이 대신 흘리신 십자가의 피 용서
곧 주의 인자하심 때문에 이미 갈라져서 나타나는 증상인 겁니다.
서로가 서로의 길을 못 가도록 되어 있습니다.
누가 봐도 악인이 꽃길로 평탄한 길로 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성소에서 보니 즉 간극에서 보니까
그것이 지옥길이 땡기는 길이였고
누가 봐도 죽은자처럼 흙길로 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성소에서 보니 즉 간극에서 보니까
그것이 천국이 쳐들어와서 누리는 길이였다는 겁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꽃길 곧 십자가의 길 밖에 걸을 길이 없습니다.
그 없는 길을 우리는 룰루랄라 신나게 걷게 되는 겁니다.
바로 예수라는 길입니다.
인물이 길이 되는 것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없는 길을 우리는 걷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오늘 요한복음 11장 에서 또 누가복음 19장에서
바로 이 시편 125편의 예루살렘을 자신의 피로 침략해서
원수들에게 포로된 예루살렘을 빼앗아서
십자가의 피 용서로 칭칭 감는 겁니다.
그 십자가의 피 흘리심을 다들 무시했습니다.
그러나 구원 얻은 우리에게는 이 십자가가 자랑꺼리입니다.
이 간극이 오늘 요한복음 11장에서 없는 길로써의 부활로 곧 예수님 자신이 부활로써 증거 되고 있습니다.
다들 무시하는 부활입니다
마치 안식일 지키는 것이 안식의 주인을 무시했던 것처럼
부활교리 믿고 부활절을 지키는 것이 부활되신 예수님을 못 믿고 무시했던 것처럼 말이죠.
앞의 글에도 언급했지만 안 무시할 방법 있나요?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무시 받는 십자가를 우리는 감사하면서 증거하게 된 겁니다.
물론 주와 함께 이제는 같이 무시 받으면서 말이죠.
내가 과거에 무시했던 그 십자가를
그 부활을
그 3일이라는 간극을
없다고 없는 길을 무시했었는데
이제는 자랑하는 겁니다.
이 무시받는 십자가가 옳았다고 말이죠.
어머니께 시아버지가 무시했던 그 도장끈 지팡이 도장이 나를 구원하는 증거물이였던 것을 몰랐는데
며느리가 이게 뱃속의 아기 아빠꺼입니다.
남들은 몰라도 본인 당사자는 안다 말이죠.
이것이 구체적 보편성이다 말이죠.
내가 반발했는데 내가 이제는 그것을 자랑하는 진리
내가 무시했던 부활을 내가 이제는 자랑하는 부활이신 예수님을 자랑하는 것이
그것이 구체적 보편성으로써의 진리이다는 겁니다.
가장 반발했던 사도바울이 이제는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누가 꾀냐고 증거하는 자로써 말이죠.
그 사도바울을 바로 이 꼬끼오 꼬끼오 꼬끼오 라는 이 간극에서 태어났다 말이죠.
사도바울이 하나님의 저주라고 거부했던 그 십자가에서 말이죠.
희생안타 스데반 집사의 죽음을 통해서 말이죠.
그래서 이제 앞의 글에서 말했던 것처럼
사도바울이 로마에 죽을 것 뻔히 알면서도 갑니다.
안 죽고 남아서 널리 널리 복음을 퍼트리는 것이 더 효과적일까요?
아닙니다.
그것은 효과적이냐 덜 효과적이냐가 문제가 아니라
바로 이 간극 이 무시받는 간극을 만들기 위함이다 말이죠.
이것이 바로 주의 인자하심이라는 무시받는 없는 길로써의 간극부활입니다.
본인이 스데반 집사의 죽음에서 태어났듯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에서 태어났듯이
이제 바톤을 이어받아서
이 십자가의 노선에서 태어날 자들을 위해서 말이죠.
이 간극을 노래하는 겁니다. 무시받는 이 십자가를 오히려 기뻐 자랑하며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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