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에서 내려온 아름다움과 이슬(기름) (시편 133)

 

하나(동일성)에서 여럿(차이)으로

 


(
133:1, 개역) [다윗의 시 곧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133:2, 개역)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 옷깃까지 내림 같고

(133:3, 개역)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니 곧 영생이로다

 

 

(벧전 2:9, 개역)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10:15, 개역)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10:15, 새번역) 보내심을 받지 않았는데, 어떻게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 성경에 기록한 바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걸음이 얼마나 아름다우냐!" 한 것과 같습니다. / 52:7

(10:15, 공동) 전도자로서 파견받지 않고서 어떻게 전도를 할 수 있겠습니까?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하는 말이 바로 그 말씀입니다. / 이사 52:7(나훔 1:15 참조).

(10:15, 킹흠정) 보내어지지 아니하였으면 그들이 어찌 선포하리요? 이것은 기록된바, 화평의 복음을 선포하며 좋은 일들의 반가운 소식을 가져오는 자들의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함과 같으니라.

(10:15, 한글킹) 파송되지 아니하였는데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와 같이 "화평의 복음을 전하는 자들의 발과 좋은 일들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라고 하였느니라.

(10:15, 현대인) 또 보내심을 받지 않고 어떻게 전하겠습니까? 이것은 `기쁜 소식을 전하는 사람들의 발이 참으로 아름답구나!' 라고 한 성경 말씀과 같습니다.

(10:15, 현대어) 또 보내는 분이 없다면 누가 어떻게 가서 알릴 수 있겠습니까? 성경에 ) `하나님과 누리는 평화를 선포하고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라고 말한 것은 이 때문입니다. (. 52:7(참조,1:15))

 

 

(110:1, 개역) [다윗의 시]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

(110:2, 개역)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주의 권능의 홀을 내어 보내시리니 주는 원수 중에서 다스리소서

(110:3, 개역)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

(110:4, 개역)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치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110:5, 개역) 주의 우편에 계신 주께서 그 노하시는 날에 열왕을 쳐서 파하실 것이라

(110:6, 개역) 열방 중에 판단하여 시체로 가득하게 하시고 여러 나라의 머리를 쳐서 파하시며

(110:7, 개역) 길가의 시냇물을 마시고 인하여 그 머리를 드시리로다

 

 

오늘 짧은 시편 133편은 두 개 또는 세 개의 내용으로 요약할수 있는데

 

하나는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아름답다 이고
또 하나는 머리의 기름이 수염을 타고 내려와서 옷깃에 머물 듯이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처럼 주의 복이 여호와의 명하심으로

영생이 임한다 라는 겁니다.

 

 

(133:1, 개역) [다윗의 시 곧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133:2, 개역)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 옷깃까지 내림 같고

(133:3, 개역)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니 곧 영생이로다

 

마치 앞의 시편 125편에서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예루살렘을 두루 두루 거룩으로 평강으로 안위 애워 싸듯이 거룩을 입히시는
계시록의 일곱교회라는 신부에게 거룩한 흰 옷으로 꽃단장 시키듯이 말이죠.

어린양의 피로써 모든 허물을 다 덮어서 흰눈 같이 희게 말이죠.

 

여기서 헐몬 산은 이스라엘 북쪽에 있는 가장 높은 산인데

우리로 치면 백두산 또는 남한으로 치면 한라산인데
요단 강에 사해가 남쪽에 그리고 북쪽에 갈릴리 호수가 걸쳐있는데 갈릴리 호수 위로

그 위에 위치함에 있어서 쭈우욱 내려온다 말이죠.

요단강을 따라 올라가면 이 물의 출처가 바로 헐몬산 곧 사시사철 눈으로 덮여진 산이다 말이죠.

그 가장 높은 산에서 흘러내려온 물이 요단강을 이루면서 새벽에는 이슬이 촉촉이 젖힌다 말이죠.

 

그러니 이것은 거룩한 제사장으로써 아론이 언급이 된 겁니다.

거룩한 제사장이 기름 발리듯이 그 기름이 머리에 발려서 수염을 타고 내려와

헐몬산 흰눈이 녹아서 내려와 요단강을 풍요롭게 하듯이 내려와

옷깃에 머문다는 겁니다.

 

즉 이것이 거룩인데

 

이 거룩은 대부분 한국교회에서는 특히 성화론자들은

동일성으로 해석을 하다 보니

정반대의 해석이 되더라 말이죠.

그런 거룩이 아닙니다.

 

동일성이 아니라 차이성입니다.

간극이다 말이죠. 그 간극이 주의 인자하심이다고 했지요.

 

그런데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라고 했던 바리새인은

그 구별 구분 분리 분별 거룩이 간극으로써의 주의 인자하심으로써의 간극이 아니라

간극이 없는 거룩이다 말이죠.

그러니

거룩의 기능을 외치지 못하고

존재를 주장한다 말이죠. 그래서 동일성을 주장하는 겁니다.

완악한 수건을 못 벗는 필연성을 주장한다 말이죠.

우연성의 차이가 아니라 말이죠.

 

자 그렇기 때문에 오늘 아름다움이 뭔가에 대해서도 살펴봐야 하는데

이 아름다움이란 숭고한 아름다움 곧 불편한 아름다움입니다.

 

찬송가가 생각하는데

아름 답다 예수여 나의 좋은 친구

예수 공로 아니면 영원 형벌 받네

 

마지막 가사가 살벌하죠

영원 형벌 받네

 

취사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무조건이다는 겁니다.

이것을 무시 받는 아름다움이다 불편한 아름다움이다는 겁니다.

싫어버린바 된 고운 모양도 아름다움도 없는 풍채도 없는

흠모할 모양이 없는 불편한 아름다움이다는 겁니다.

 

바로 이것을 보여주는 것이 진짜 아름다움 이다는 겁니다. 거룩이다는 거죠.

 

우리에게는 전혀 아름답지 않죠

오히려 불편하죠

그래서 거룩이란 숭고함 곧 불편하다 불온하다 부조리하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부조리가 그 스캔들 불륜이 우리를 건지는 겁니다.

영원 형벌에서 말이죠.

 

왜냐하면 우리가 생각하는 아름다움이란 동일성인데

성경에서 말하는 아름다움이란 차이성이기 때문이다 말이죠.

 

그러니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아름답냐 라고 했을때에

그냥 연합이 아니라 그냥 동질성 동일성인 하나 됨이 아니라

 

정반대로 원수지간인데 도저히 하나될 방법이 없는데

도대체 뭔가가 개입하게 되니까 졸지에 언제 그랬냐는 둥 하나가 되어 버리는 겁니다.

 

즉 우리가 생각하는 연합 또는 하나 됨 또는 아름다움이란 동일성입니다.

남을 7번 용서하겠다는 것을 아름다움으로 착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시선에서는 예수님은 전혀 아름답지가 않고

풍채도 없고

고운 모양도 없고

싫어버린바 되었다 말이죠.

 

즉 이 말은 하나는 커녕 원수지간이다는 겁니다.

그런데 무슨 수로 하나가 되냐 말이죠.

 

중간에 막힌 담을 헐어서 평화가 되었다는 겁니다.

화평이 되었다는 겁니다.

결국 누가 희생했다는 겁니다.

그 죽음이 아름답다는 겁니다.

다들 무시했는 것이 바로 성령의 일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육의 시선에서는 전혀 아름답지 않는 저 십자가가

졸지에 아름다운 영광이 된 것은

우리가 어떻게 해서가 아닌

성령의 개입 곧 성령의 소욕에 의해서 십자가가 아름답다 라는 겁니다.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해야 아름답다고 보는데

우리가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사랑하사

화목제물을 주었다는 겁니다.

그 화목제물을 근거로만 하는 아름다움이다 말이죠.


그러니 원수됨을 거친 입장인 구체적 보편성으로써 아름다움이다는 겁니다.,

분명 싫어해서 고개를 돌렸는데

그래서 건축자들이 쓸모 없다고 버렸는데

그 버린 돌이 머릿돌이 되었을 때

 

아 그래서 이것이 진짜 아름답다 라는 겁니다.

 

마치 시아버지 유다가 어떻게 해서든 며느리 다말을 죽일려고 했는데

아뿔사 도장 도장끈 지팡이가 아기 아빠의 물건이요 라고 했을때에

머리를 띵 하고 얻어 맞은 것처럼

아뿔사 그가 나 보다 옳도다 라고

 

옳고 선하고 아름다움이 바로

동질성을 추구했던 시아버지 유다가 아니라

진짜 옳았고 선했고 아름다운 복음을 전하는 발걸음은 바로 며느리 다말이였다는 겁니다.

이런 자 만이 예수님의 족보에 들어가는 겁니다.

 

이것이 이제는 집단 단위로 벌어지는 것이 바로

출애굽 이듯이

특히 에스더 서에서 아름다움이 바로 죽으면 죽으리라 가 아름다움이다는 겁니다.

어떻게 죽음이 아름답냐 말이죠.

죽음은 어둡고 더럽고 차갑고 하나도 아름답지 않는 것인데 말이죠.

그러니 차이성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냥 죽음이 아니라 말이죠.

 

찬송가 1444

 

4

아름답다 예수여 나의 좋은 친구

예수 공로 아니면 영원 형벌 받네

 

1

예수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질 때

세상 죄를 지시고 고초 당하셨네

 

후렴 ; 예수님 예수님 나의 죄 위하여

보배 피를 흘리니 죄인 받으소서 아멘

 

 

나를 죄인 만들어서 십자가의 피로 모든 허물을 덮는 이 십자가만이 아름답다 라는 겁니다.

아무도 이 십자가를 아름답다 또는 지혜롭다 하지 않아요

즉 다들 무시한다 말이죠.

 

내가 만들어낸 아름다움을 무시하고

내가 무시하는 그 십자가만이 아름답다는 겁니다. 구체적 보편성의 아름다움이다는 겁니다.

잉여란 다들 고개를 돌려버린 그 얼룩이 진짜 아름다움이다는 거죠.

 

어리석고 미련한 지혜요

거리끼는 실족케 하는 걸림돌이다 라고 반드시 돌부리를 걸려낸다 말이죠.

건축자들이 쓸모 없다고 버린다 말이죠.

 

그런데 이것이 머릿돌 아름다운 돌인데

 

이 아름다움이 아름답지도 못한 우리에게

헐몬 산에서 눈이 녹아 물이 내려와서 촉촉이 젖히듯이

거룩한 제사장에게만 바르는 기름을

머리에서 수염을 타고 내려와 옷깃에 머물게 하듯이

우리에게 거룩을 입히고 두루 두루 덮어버려서

모든 허물을 다 덮어버리겠다는 겁니다.

 

그러니 성화론자들이 주장하는 거룩과는 질적으로 차이가 나지요.

 

그들의 성화는 곧 거룩은 무시 받지 않아요

불편함이 없어요. 오히려 인정 받아요.

흐뭇해요.

 

그러나 성령이라는 기름을 받은 자는

내가 무시했던 예수님이 나를 도리어 구원하시듯이

대신 죄값을 치르시고자 피를 흘리시듯이

아름다움이란 바로 내가 무시했던 그 예수님이 나 보다 옳았다고

 

내가 꾹 참고 무시받는 것을 억지로 꾹 참고 하는게 아니라

도리어 이 무시받음이라는 성령을 통해

너도 나처럼 같이 함께 예수 이름을 통해 신나게 무시 받자 라고

무시받음을 전하는 아름다운 발길의 선지자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너도 나도 같이 무시 받자가 아니라

너도 나도 무시했던 예수님을

이 세상에 얼마나 무시하는 가 라는 제대로 된 실상을 보자 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 우리가 무시했던 이 십자가가

거리끼를 걸리적 거리를 걸림돌을 빼는 세상

불편한 돌부리 땜에 걸려 넘어지는 자가 없도록 하는 세상

또 어리석고 미련한 지혜라고 무시하는 십자가를 쳐다보지 않는 세상에

 

이 십자가가 걸림돌은커녕 구원의 능력이고

이 십자가가 어리석고 미련하기는커녕

가장 높은 산에서 내려오는 진짜 복덩이 중에 복덩이인 하나님의 지혜이다고

신나게 신나게 외치는 겁니다.

 

이것이 복음 들고 산을 넘는 자들의 아름다운 발길

아름답고도 아름답도다

평화 전하며 복된 소식을 외치네

주 다스 리시네

 

우리가 싫어했던 그 복음을

머리에 기름 붓듯이 때려부어서

거룩으로 뒤범벅

십자가의 피로 뒤범벅 되게

머리에서 발끝까지 핫 이슈

내 모든 것 하나 하나 핫 이슈

이슈 곧 논점 뜨거운 블랙홀 모든 것을 다 빨아들이는 점

모두 다 테이크 콘트롤 즉 다 장악해 버리는 지배력이다 말이죠.

취사선택권을 주지 않아요

일방적으로 편파적인 독재적인 십자가이다는 겁니다. 배타적 십자가 이다 말이죠.

이 말은 상대적으로 모든 인간의 배타성을 지적하는 겁니다.

모든 인간의 배타성은 바로 남을 일곱 번 용서 89번 점점 늘어나고픈 그것이 바로 배타성이다 말이죠.

무엇을 거부합니까? 성령의 소욕을 거슬러 돌부리 걸러내듯이

오히려 770번 용서 받는 것을 무시하고 걸러낸다 말이죠.

 

모두 다 테이크 콘트롤 ~~~~

 

머리부터 발끝까지 Hot Issue ho!

내 모든 것 하나하나 Hot Issue

모두 다 Take control (모두 다 Take control)

난 항상 Hot it Hot it Hot it Hot it I I I I I I Issue

 

이것이 뜨거운 십자가의 사랑이다 말이죠.

아름다움이란 이 정도로 죽으면 죽으리라 할 정도로

모든 것을 장악한다 말이죠.

 

다른 이름으로는 구원이 없어요

위에서 내려오는 긍휼 밖에 없어요.

우리가 사랑하는 동질성이 아니다 말이죠.

 

모두 올 인 하게 되는

아니 하고는 못 배기는

당위라는 기능이지

존재가 아니다 말이죠.

동일성이 아니다 말이죠.

차이입니다 차이

이것이 거룩이다 말이죠.

성화론자들이 말하는 거룩은 바리새인의 주장이요

인도의 종교 모든 종교의 카스트 계급이론과 같다 말이죠.

 

그래서 바리새인 보다 낫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온다고 하시는 겁니다.

 

바리새인 보다 나을 인간이 없어요.

성화론자들 보다 더 나은 인간이 없어요.

그런 의인들을 무슨 수로 말이죠.

 

걱정 마세요 그래서 죄인을 부르러 오신 겁니다.

바리새인

성화론자들의 의를 뛰어넘어서 주님 쪽에서 넘어 오시는 겁니다.

 

어떻게?

헐몬산의 눈이 녹아서 요단강을 타고 영생의 물을 촉촉이 젖히듯이 말이죠.

 

유대인들은 삥둘러서 근처도 오지 않는데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 좀 달라고 주님 쪽에서 넘어오시는 겁니다.

바로 영생을 주시고자 말이죠.

 

그래야 물동이 던져서 동네사람들 동네사람들 제가 아름 다운 분을 만났어요

선지자를 만났어요 라고 동네방네 외칠 것 아니냐 말이죠.

 

성화론자들이 이런 천박하기 짝이 없는 행동을 할 리가 있겠습니까?

예루살렘 입성때에 시끄럽다고 아이들을 조용시키라고 오히려 따지잖아요.

 

이들이 소리 안 지르면 누가 소리 지릅니까?

소가 소리 지르냐 말이죠.

돌들이 소리 지르면 예루살렘 우찌 될까요?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고 다 허물어 지는 거죠.

그런 완악함을 주님께서 다 허무시는 겁니다.

 

어딜 감히 막힌 담을 더더욱 쌓냐 말이죠.

 

아름 다운 소식은 고맙게도

다 허물어 버립니다.

 

너와 나의 연결 고리

너와 나의 경계선을 다 허물어 버립니다.

 

자 이렇게 될 때

비로소 반발하는 자들이 등장하는데

이 허물어 버리는 아름다운 소식을 거부함으로써

경계를 허뭄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경계를 치는 자들이 생겨나 줌으로써

저와 나의 건널수 없는 강을

그들 스스로가 원한다고 맹글어 버리는

그래 너가 원하는대로 했뿌라 라고

이 둘 사이의 간극을 비로소 증거하더라 말이죠.

 

왜냐하면 처음부터 이 간극이 있었다 말이죠.

처음부터 주의 인자하심만이 기록되었다 말이죠.

이 주의 인자하심을 저들은 기여이 싫타고 돌아서더라 말이죠.

본인들이 스스로 원해요

왜 이 주의 인자하심을 원치 않을까요?

무시 받거든요.

 

끝까지 거리끼는 걸림돌이까 실족케 되니까 말이죠.

마치 부자청년에게서 말씀 어릴적부터 율법 지킨 것이 괜히 지키는 바람에

졸지에 전재산을 가난한 자에게 다 나누어 주라 라는 말씀을 못지키게 되니까

등돌리고 돌아서는 실족케 하는 말씀은 빼버리더라 말이죠.

불편한 말씀은 빼고

믿고픈 것만 넣고

행할 가능성 있는 것만 행하더라 말이죠.

이것이 기능 곧 성령을 받은 자가 아닌

존재이고

 

성령을 받은 자는 기능 곧 나 아니요 주님만이 저 같은 가난한 자를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아끼지 않고 다 내어주셨습니다.

저는 그 목숨을 그 피흘리심을 받아야 할 죄인입니다 라고

기능에 놓여지게 되는데

 

존재는 동일성을 추구해야 하니까

지키기 못하는 이상

계속 등돌리고 돌아서서 갈 뿐이다 말이죠.

 

점점 멀어지나봐 ~~~~

 

저와 나 사이에

곧 지옥간 부자와 선지자 아브라함 사이에

 

점점 점 블랙홀 구멍이 있는지를 모르는 겁니다.

지옥간 부자가 스스로 형성하는 거다 말이죠.

왜 십자가를 무시하니까 말이죠.

십자가를 자랑할 수가 없어요.

노래 할 수가 없어요.

인 맞지 않았거든요.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인 맞은자

곧 찬양자로 태어난 자가 십 사만 사천인데

 

본인이 십 사만 사천 명 속에 들어갈려고

여호와 증인처럼 말씀을 실천할려고 한다 말이죠.

성화론자들처럼 행함을 추구한다 말이죠.

어릴적부터 말씀을 지켰다고 우기니까

십 사만 사천에 아무리 해도 못 들어간다 말이죠

전 재산을 가난한 자에게 무슨 수로 나누어 줍니까?

 

이 말씀은 처음부터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다 예수님이 이룰 말씀인데

어딜 감히 인간이 지켜요

어떤 목사는 왜 성화론을 주장하냐 라고 하니까

쪽팔려서 한다는 겁니다.

? 아무것도 지킨 것이 없으면 쪽팔린다는 겁니다.

얼마나 주의 인자하심을 무시하는 목사냐 말이죠.

 

오히려 뻔뻔스럽기 짝이 없는 복음을 못 믿는 겁니다.

죄인을 부르러 오심이지

예수님 숙제이지

 

내 숙제

곧 의인 되기가 아니다 말이죠.

 

그러니 등돌리고 돌아서 가는 겁니다.

영원히 갈라서게 되는 거죠.

 

동일성이 아니라 차이인데

이 차이는 내가 어떻게 할수 없는

주님이 자신 스스로 피를 흘려서

피를 발라주는

율법 외에 한 의가 외부에서 나타남

외부에서 발라줌 밖에 없는데

자기가 자기 수고를 바르고 있으니

그것이 오히려 더 쪽팔리는 것 아니냐 말이죠.

 

그러니 시편 133편을 무시하는 겁니다.

위에서 내려오는 거룩인데

 

밑에서 쳐발라서 거룩으로 칭칭 감을려고 하니

됩니까?

 

머리에서 늘 끊임없이 내려오는 긍휼이어야 하는데

 

자기가 남을 789번 용서해서 의를 거룩을 쳐 바를려고 하니

그런 의문의 짖을 왜 하냐 말이죠.

 

그런데 놀랍게도 한국교회가 그런 마귀들이 다 장악하고 있는 겁니다.

예루살렘이 완전 포위 당했듯이 말이죠.

 

그럼 무슨 수로 이 포로됨에서 자유케 되나요?

이 억눌림 속에서 어떻게 해방 되나요?

불가능 합니다.

 

이런 삯꾼 목사들에게서 벗어날 방법이 없어요.

 

오로지 성령의 일 곧 무시받는 일인

예수님의 눈물 흘리심 뿐이다 말이죠.

눈물로 씨앗을 뿌리는 자 기쁨으로 단을 거두리도라 말이죠.

이것이 주의 인자하심 곧 이 간극에서
, 구멍 점, 핫 이슈-뜨거운 얼룩점에서, 모든 것을 장악하는 잉여점 얼룩에서 나오는 겁니다

 

약속하신 성령을 받게 되면 비로소 보입니다.

가장 높은 이스라엘 산 헐몬 산에서 눈이 녹아서 이슬이 맺혀 타고 내려오는

수염을 타고 내려오는 거룩한 제사장에게만 바르는 기름을

아론의 수염을 타고 내려와서 옷깃에 머물면 됩니다.

 

하늘 위에서 내려오지

되도 않는 땅에서 아무리 거룩을 행해서 기름 바르듯이
거룩을 쳐 발라서 의로움의 행함을 칭칭 감아 도배를 해본들

말짱 도루묵이다는 겁니다.

 

하늘 위에서 내려오네 그 사랑의 물결이 영원토록 내 영혼을 덮으소서 내 영혼에 평화가 넘쳐남은 주의 축복을 받음이라

 

469장입니다.

 

새벽 이슬 같은 청년들이 어디서 나옵니까?

 

(110:1, 개역) [다윗의 시]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

(110:2, 개역)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주의 권능의 홀을 내어 보내시리니 주는 원수 중에서 다스리소서

(110:3, 개역)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

(110:4, 개역)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치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110:5, 개역) 주의 우편에 계신 주께서 그 노하시는 날에 열왕을 쳐서 파하실 것이라

(110:6, 개역) 열방 중에 판단하여 시체로 가득하게 하시고 여러 나라의 머리를 쳐서 파하시며

(110:7, 개역) 길가의 시냇물을 마시고 인하여 그 머리를 드시리로다

 

 

주의 머리를 드심에서 나온다 말이죠.

곧 인자하심에서 나온다 곧 잃어버렸다 다시 되찾는

이 간극

3일이라는 간극

3은 무한대이지 셀수 있는 숫자가 아닌

무시받는 숫자이다는 겁니다.

일만달란트는 너무 커서 무시하고

내 돈 띠 먹은 놈 백 데나리온 300만원이 실질적이다 말이죠.

 

남을 용서하는 78번이 짭짤한 재미인데

770번 용서 받아야 한 판국이다 라고 하면

이건 뭐 붕뜨는 이야기다 말이죠.

 

어릴적부터 율법 다 지켰다는 부자청년이 그 종교취미 종교놀이에서 못 벗어난다 말이죠.

중독 되었어요

 

그 중독 곧 자기애의 중독에서 벗어나는 길은

 

전 재산 다 나누어 주라 라는

이건 뭐 황당하기 짝이 없는 도저히 측량이 안된다 말이죠.

안되니까 말라꼬 하냐 말이죠.

무슨 성과가 있어야 재미있는데

재미 하나도 없어

그냥 다 나누어주래

그럼 나는 뭐 되냐 말이죠.

 

그래서 성화론자들이

종교놀이에 빠져있는 겁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였는데

거기서 벗어나도록 빼내심이 바로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아름다운 발길의 선지자

곧 새벽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바로 위에서 내려오는 긍휼로써

도저히 빠져나올수 없는 마귀에게 장악당한 이 예루살렘을

주의 눈물로

무시 받는 이 간극으로

꼬끼오 꼬끼오 꼬끼오 대신 울어주는 닭 선지자 땜시

우리는 그 불가능한 남 7번 용서하기 라는 종교장난에서 벗어날수가 있다 말이죠.

물론 저들은 770번 용서 받기를 무시하는

 

서로의 소욕을 못하도록 한다 말이죠.

 

이것이 처음부터 갈려진 상태인 주의 인자하심이다는 겁니다.

이것만 아름다워요.

다른 것은 아름답지 않고 언젠가는 다 시들어버린다 말이죠.

 

그런데 영원히 아름다운 것은 다들 무시했던 이 간극

이 간극에서 주의 인자하심이 나온다 말이죠.

창세전에 유일하게 생명책에 기록된 어린양의 피 말이죠.

 

그래서 주님께서 십자가에 다 이루심으로 말미암아

그 혜택을 우리에게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데도 퍼부으심으로 인해

 

우리는 졸지에 왕같은 제사장이 되었고

거룩한 나라가 이미 되었고

그의 소유된 백성으로써 아름다운 소식을 선전하는 자가 되었뿟다 말이죠.

(벧전 2:9, 개역)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은 동일성이 아닌

차이성으로써

기능으로써

 

존재가 아닌

필연성이 아닌

 

기능으로써

우연성으로써

차이성으로써

 

이미 찬양자로 태어나 버린 겁니다.

어떤 찬양자?

770번 용서 받는 찬양자로 태어난 거다 말이죠.

많이 탕감 받았기에 많이 사랑 할 수밖에 없는

사랑 아니하고는 못 배기는

뜨거운 얼룩점에 그 간극에 모두 장악 당해버린

거룩한 나라, 왕같은 제사장, 그의 소유된 백성이다 말이죠.

여기서도 3이지요 즉 숫자가 아닌 무한대 이다는 겁니다.

영원성

 

그런데 저들은 이 영원성을 졸지에 지킬려고 하니까

770번 용서 받는 것을 무시할 수 밖에 없어요

서로의 소욕이 다르니까 거스리도록 한다 말이죠.

 

(5:17, 개역)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때려죽어도 남을 7번 용서해야 한데 글쎄 ~~~~

 

안 그러면 저들은 불안해 미쳐요

구원 못 될까 싶어서 말이죠.

자기 숙제를 매일 매일 해야돼

 

그러니 사단의 회 이지요.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님 앞에 나오는 도다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님 앞에 나오는 도다 ~~~~~~~~~~~~

 

가스펠 한 참 부를때에 몸에 배인 노래인데

마침 가스펠 놀이 끊을때쯤이라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님 앞에 나오는 도다

요 부분만 기억나고

 

뒷 부분의 가사를 몰라서 가사를 검색해 봤고

멜로디를 찾아 봤다 말이죠.

 

여기서 청년은

젊은 사람을 말하는게 아니라

나이 숫자와 무관하다고 했지요.

숫자를 깨는 의미입니다.

 

어떻게 뒷부분이 되는가 싶어 유튜브 동영상 검색하니까
놀라운 점을 발견했는데

아무도 늙으신 어르신 분들이 이 노래 부르는 영상이 없더라 말이죠.

 

모조리 청년들만 신나게 부른다 말이죠.

문자 그대로 말이죠.

나이드신 분들은 자기들 노래가 아니다는 듯이 영상이 아예 없어요.

여호수아서에서 여호수아를 모세 대신 그 자리에 역할자로 그 일을 맡기는데

왜냐하면 모세는 탈락 했으니 말이죠.

모세 대신 이다 말이죠.

모세가 탈락했다고 새로운 인물로써 세워진 여호수아가 아니라

모세의 기능은 계속 유지하는 자로써 여호수아가 세워지는데

그때 여호수아를 청년이라고 했다 말이죠.

그런데 나이가 50대 후반 이다 말이죠.

이게 무슨 청년입니다.

중장년이지

꼬마 할배 인데?

 

샤이 꼰대 다 말이죠.

 

꼰대는 어른 곧 선생이다 말이죠.

 

그런데 청년은 자신이 어른이 아니라

위에서부터 흘러내려온 물로써 촉촉이 젖심을 받아야만 하는 자이다는 겁니다.

어른으로부터 받아야만 하는 자 이다는 겁니다. 그것도 매일 매일 말이죠.

새벽 이슬처럼 말이죠.

 

그런데 땅에서 자기가 자기 의로 성화론자들처럼

여호와 증인처럼 십사만 사천에 들어갈려고

꼰대처럼 어른이 될려고

의인이 될려고 하니까

노래부르는 노인이 없다 말이죠.

 

결국 부자청년처럼 등돌리고 돌아서는 자가 아니라

그건 청년이 아니라 늙은이죠.

 

어른 짖 흉내내는

거룩을 흉내 내는 장난치는 종교놀이에 빠진자이고

그런 부자청년처럼 청년들이 새벽이슬 노래를 하더라 말이죠.

 

청년이란 위에서 촉촉하게 헐몬 산에서 내려오는 피 흘리심을 받아

거룩의 기름이 머리에서 수염을 타고 옷깃에 머무름 같이

새벽 이슬이 머무는

성령을 받은자

이 간극인 주의 인자하심을 받은자

그래서 함께 무시받는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된 자를 말한다 말이죠.

 

저번에도 이런 글을 적은 적 있는데

 

늙은이는 꿈을 꾸고

젊은이는 환상을 보고

 

(2:17, 새번역)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마지막 날에 나는 내 영을 모든 사람에게 부어 주겠다. 너희의 아들들과 너희의 딸들은 예언을 하고,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꿀 것이다. / 2:28-32(칠십인역)

 

(2:28, 개역)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2:29, 개역) 그 때에 내가 또 내 신으로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2:30, 개역) 내가 이적을 하늘과 땅에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라

(2:31, 개역)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 같이 변하려니와

(2:32, 개역)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

 

(2:27, 공동) 그제야 너희는 알리라.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있다는 것을. 너희 하느님은 이 야훼밖에 없다. 내 백성은 언제까지나 당당하리라."

(2:28, 공동) "그런 다음에 나는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주리니, 너희의 아들과 딸은 예언을 하리라. 늙은이들은 꿈을 꾸고,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리라.

(2:29, 공동) 그 날, 나는 남녀 종들에게도 나의 영을 부어주리라.

 

(2:8, 개역)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의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찜이뇨

(2:9, 개역) 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람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가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2:10, 개역) 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과

(2:11, 개역)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

(2:12, 개역) 다 놀라며 의혹하여 서로 가로되 이 어찐 일이냐 하며

(2:13, 개역) 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가로되 저희가 새 술이 취하였다 하더라

(2:14, 개역)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같이 서서 소리를 높여 가로되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아 이 일을 너희로 알게 할 것이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

(2:15, 개역) 때가 제삼시니 너희 생각과 같이 이 사람들이 취한 것이 아니라

(2:16, 개역) 이는 곧 선지자 요엘로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

(2:17, 개역)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2:18, 개역) 그 때에 내가 내 영으로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저희가 예언할 것이요

(2:19, 개역) 또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와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

(2:20, 개역)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

(2:21, 개역)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였느니라

 

 

오순절에 약속한 성령이 부어지니까

방언 즉 무시받는 소리를 하게 됨으로써 조롱을 받는다 말이죠.

이질적이고 차이나니까

동질성이라고는 눈꼽만치도 없으니까 말이죠.

소통이 안되고 단절이 되더라 말이죠.


(2:12, 개역) 다 놀라며 의혹하여 서로 가로되 이 어찐 일이냐 하며

(2:13, 개역) 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가로되 저희가 새 술이 취하였다 하더라

술 쳐 먹었군 ~~~~

 

연합이 안되요 하나가 안되요

성령으로 인해 차이가 생겨버리더라 말이죠.

이것이 아름다움입니다.

 

전혀 아름답지 않는데????

소통이 안되어서 연합을 커녕 불통과 분열이 일어나는데?

이게 무슨 하나가 되는 것이냐 말이죠?

 

그런데 이게 하나 됨 이다 말이죠.

차이성이지 동질성이 아니다 말이죠.

 

예수 안에서 말이죠.

성전에 들어감으로써 말이죠.

미래완료를 즉 다 이루심을 누리는 것이다 말이죠.

 

머리도 하나요 성령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다 말이죠.

 

(4:5, 개역)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바로 이것이 이슬이 가장 높은 산에서 내려와서 촉촉이 이슬맺듯이

덮어버리는 성령이라는 거룩을 입은 자를

청년이다 라고 합니다.

계시록에서는 예수님께서 주신의 영광을

그 피의 영광을 자랑하시고파서

신부에게 흰옷을 입혀 꽃단장 시키는

그 일곱 교회가 청년이듯이 말이죠.

 

그래서

늙은이는 꿈을 꾸고

젊은이는 환상을 본다고 했는데

 

저는 왠지 아무리 봐도 바뀐거 아닌가 했다 말이죠.

오래전부터 눈에 박혀버린 것인데

아무리 따져 봐도 뭔가 반대가 아닌가 하는 점이 계속 남았다 말이죠.

 

늙은이는 환상을 봐야죠. 눈의 기능이 떨어져 침침하니까 말이죠.

젊은이가 꿈을 꾸어야죠. 생생한 젊은이는 희망이니까 미래의 나무다 말이죠.

 

이것이 역사적인 안목이다 말이죠.

그런데 거꾸로입니다.

 

묵시에서는 뒤바뀌는 겁니다.

늙은이는 꿈을 꾸어요

즉 다 죽어가는 자는 미래의 청년과 같은 모습이다 말이죠.

백살 넘은 노인이 이삭을 막 놓고

엘리사벳 할머니는 세례요한을 잉태하더라 말이죠.

늙었는데

다 죽어가는데

육체가 거꾸로 반응하는 기능이다 말이죠.

 

그런데 정작 반대로

젊은이는 환상을 본데요 글쎄

아니 눈이 젊어서 생생한데 헷갈리게 눈에 두 개의 화면이 뜬다 말이죠.

화면이 겹쳐요 다른 화면이 막 나와요

따로 따로 나오면 티비보다가 옆에 스마트폰 짤영상을 보면 되는데

이 두 화면이 하나에 겹쳐져서 생겨버리면

두 개의 눈이 생기는 식이다 말이죠.

결국 환상이란 다른 세계를 이 눈에 보이는 세계에 침략해서

보이지 안는 세계를 보고 무시받는 짖만 골라 하는 것을 말압니다.

그러니 죽을 짖만 하는 거죠.

그래서 정작 젊은이는 막 죽어나간다 말이죠. 죽으면 죽으리라

그 아리따운 아름다운 젊은 여성이 젊은 여왕이

막 죽을려고
죽으면 죽으리라 라고 에스더가 외친다 말이죠.


이 젊음이 왜 죽음에 뛰어드냐 말이죠.

왜 어린양이 죽냐 말이죠.

늙은 양이 죽으면 안되냐 말이죠.

흠 없으면 죽으면 안되잖아요.

 

눈이 새 파랗게 좋은 기능을 하고 있는데 구지 환상을 볼 이유가 뭐가 있냐 말이죠.

하나라도 충분한데?

 

그런데 눈에 보이는 것은 다 가짜요 라고 외쳐야 하니까

다른 세계 곧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말해야 하니까 죽어날 수 밖에 없지요.

 

그것은 눈이 안 좋은 사람들이 환상을 보면 육체의 기능에 딱 맞다 말이죠.

다 늙어죽어가는 노인의 눈이 침침하니

늙은이에게 맞는 것이 환상 아니냐 말이죠.

 

아 그런데 이런 육체를 거스리고

성령의 기능은 거꾸로 기능한다는 겁니다.

성령의 소욕이 말이죠.

육의 소욕과 반대다 말이죠.

 

늙은이는 아기를 낳지 않나

소망이 끊어졌는데도 불구하고 말이죠.

백세를 넘어서 말이죠.

순풍 순풍 이다 말이죠.

 

젊은이는 이삭처럼 화목제물이 되는

죽으면 죽으리라 가 되더라 말이죠.

 

이것이 모든 사람들이 무시하는 성령의 일이다 말이죠.

육의 소욕을 거스리는 성령의 소욕이다 말이죠.

 

역사의 소욕과 묵시의 소욕의 반대를 보여주더라 말이죠.

무시 받는 묵시라는 기능 말입니다.

 

어머니께 이 내용을 설명하다가 어려워서

갑자기 쉬운 내용이 생각났는데

늙은 할머니 엘리사벳은 아이를 잉태한다 말이죠.

죽은 태인데?

이것이 늙은이는 꿈꾸고요

 

젊은이 처녀 시집도 가지 않은

남자도 모르는 동정녀 마리아가 아기 예수님을 임신함으로 인해서

성령을 통해 잉태함으로써

졸지에 율법을 쥔 남정네들로부터 돌삐 맞아 죽어야 할 판국인데

마리아가 환상을 통해서

하늘의 전쟁을 땅에 가시화 시키는데 있어서 성령으로 인한 기도를 하더라 말이죠.

 

그래서 이제는 심형래의 변방을 북소리처럼

예전에도 이런 예를 들어서 어머니께서 깔깔깔 웃으셨는데

심형래 혼자 도망치면서 뒤에 여러명이 쫏아오고 하는 장면이였는데

어느새 심형래가 여러명을 쫏아가고

돌삐를 든 머슴아들이 이 마리아로부터 도망치는 모습으로 역전되는

만화 같은 장면이 되더라 말이죠.

 

이것이 환상이 이 역사에 구체화 되는 모습이다 말이죠.

하늘의 전쟁을 땅에 가시화

하늘에서는 영광이요 땅에서는 평화 곧 전쟁의 마침이다 말이죠.

 

어디 이것 뿐이겠습니까?

성령이 부어지면

 

(2:16, 개역) 이는 곧 선지자 요엘로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

(2:17, 개역)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2:18, 개역) 그 때에 내가 내 영으로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저희가 예언할 것이요

(2:19, 개역) 또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와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

(2:20, 개역)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

(2:21, 개역)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였느니라

 

남종과 여종이 예언을 한다 말이죠.

점쟁이들이 점 치는 예언이 아니라

복음을 외치는 찬양자로 태어난다는 겁니다.

 

즉 종은 주인을 말하는 기능이다 말이죠.

그런데 인간 세상에 주인이 있다 말이죠.

결국 애굽왕 바로왕이다 말이죠.

 

그 주인을 거스리고 진짜 주인에게 예배드리고자 나온다고 하니까?

여호와가 누꼬? 들어본적 없는데 라고

졸지에 이름 전쟁이 벌어지게 되는

미끼 역할을 한다 말이죠.

구원 전쟁, 십자가 전쟁 유발자가 된다 말이죠.

 

내가 화평을 주러 온줄로 아느냐 나는 검을 주러 왔다

아비가 아들을

딸이 어미를 공격하는 서로 원수지간 만들고자 왔다 말이죠.

그러니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합당치 않다

나 보다 어미와 자식을 더 사랑하는 자는 합당치 않다고

진짜 제대로 된 진짜 주인

진짜 아비

진짜 가장 높은 곳 헐몬산에서 긍휼을 기름을 이슬을 촉촉이 젖혀서

영생을 주는 자가 누구냐 라는 배타성을 보여준다 말이죠.

 

이것을 문자 그대로 따라하는 신천지가 졸지에 가족들이 아무리 말려도 그 신천지에서 벗어날 수 없듯이 그렇게 써먹으라고 주시는 말씀이 아니라

 

정작 신천지들 무시받는 십자가 곧 성령을 거부하는

돈에 환장한 놈들이다 말이죠.

역시나 십 사만 사천 속에 들어갈려고 하는

인간의 노력 실천을 요구한다 말이죠.

과거에 신학교때 다락방이 신학교 한번 휩쓰니까

거기에 빠진 놈들이 무지 많았는데

그 정도로 청년들이 자신의 열정을 쏟아 붓고 싶은데

기존의 교단들은 마치 늙은사람들처럼

권태에 빠져있으니

톡 하고 다락방이 건드려 주니

청년들이 다 거기에 자신의 열정을 쏟아 부으니 얼마나 푹 빠지겠냐 말이죠.

특히 종교놀이

전도

이 전도 놀이에 빠지면 마약처럼 뿅 간다 말이죠.

거기서 무시 받으면 되는데

서로 인정받고 잘한다 잘한다 하니가

다락방이 대 히트를 치더라 말이죠.

신학교가 그 꼬라지 인데

일반 교회야 뭐 뻔하죠.

시간이 다 지나고 단 물이 다 빠지니까

금단자처럼 힘빠지기 전까지는 까불다가

힘이 다 빠지니까 그제서야 정신 차리던데

얼마든지 톡 하고 건드려 주는 이단들이 나타나면 또 뿅 가는 겁니다.

그게 무슨 성령의 일이냐 말이죠.

 

성령이 부으심은

주님 혼자 출애굽 전쟁을 벌리시는 겁니다.

그 완성된 다 이루심의 결과물을 부어주시는 겁니다.

그러니 사랑하지 않을수 없다 말이죠.

 

내가 주를 사랑하는지 주께서 더 잘 아십니다 라고

단물 다 빠지게 해서

뻔뻔스럽게 만드시는 겁니다.

이런 성령의 일을 우리는 개무시한다 말이죠.

그렇게 십자가는 어리석은 지혜로만 일하십니다.

 

 

아무튼 오늘 시편 133편을 통해서

이미 벌써 완성된 바를

다 이루셨기에

그 증상으로써 나타나는 현상들을 시편 기자가 외치는 겁니다.

 

물론 이 시편 133편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에서 다 이루심으로써

비로써 해석이 됩니다.

예수님이 오시지 않았다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지 않았다면 도저히 무슨 소리인지 모르는 내용입니다.

그 십자가에 다 이루심을 보고 기록한 것이다 말이죠.

 

저들이 비웃고 조롱하는 이 간극인 십자가의 피 흘리심이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영광이기에

찬양 아니할 수가 없는 겁니다.

이미 찬양자로 태어났기에

찬양하기가 아닌 찬양 지키기가 아닌

이미 벙어리일지라도 찬양자임을

곧 무시받는 이 십자가를 노래하는 자로 태어났음을 신나게 십자가의 용서를 노래하면서
주의 십자가의 보혈을 마음껏 자랑하는 겁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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