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로 씨앗을 뿌리는 자 기쁨으로 단을 거두리로다 (시편 126편)
애통하는 자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요
애통한 자 될 생각 말고 유일하게 애통하신 분이신 예수님만 바라보기
대신 매 맞음으로써 우리가 나음을 입었기에
(마 5:1, 개역)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마 5:2, 개역) 『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
(마 5:3, 개역)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마 5:4, 개역)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마 5:5, 개역)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마 5:6, 개역)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마 5:7, 개역)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 5:8, 개역)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마 5:9, 개역)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마 5:10, 개역)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마 5:11, 개역)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마 5:12, 개역)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시 126:1, 개역)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리실 때에 우리가 꿈꾸는 것 같았도다』
(시 126:2, 개역)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열방 중에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저희를 위하여 대사를 행하셨다 하였도다』
(시 126:3, 개역) 『여호와를 위하여 대사를 행하셨으니 우리는 기쁘도다』
(시 126:4, 개역) 『여호와여 우리의 포로를 남방 시내들 같이 돌리소서』
(시 126:5, 개역)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시 126:6, 개역)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먼저 마태복음 5장의 팔복은 4장의 예수님께서 마귀의 시험을 이기심으로써 주어진 겁니다.
즉 인간은 그 어떤 인간도 애통한적 없고
의에 주린 적 없고
온유한 적 없고
화평케 한 적 없고
마음이 가난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팔복이 사실상 해당 되지 않는다 말이죠.
갑자기 팔복 하니까 유행했던 영상이 생각나죠?
그래서 검색해 봤습니다.
유튜브에 과연 남아 있는지
지금 보니까 딱 인간극장 스타일이네요
그러고 보니 옆에 또 다른 영상에 그 인간극장 감독이 맞다고 하네요
그럼 불교의 그 사람 누구였더라? 그렇게 산에서 내려와서 세상에 들어가고 싶어 했는데
티비에 나온다고 돈이 많이 생겼을꺼라 생각해 결국 아버지가 살해 당했던가?
아무튼 영자씨는 결국 산 속으로 들어가 비구니가 되는 영원히 나오지 않았죠.
그럼 영자씨가 팔복 맨발의 목사 할아버지 보다 더 마음이 가난한 것이 된 것입니까?
아니지요.
그 팔복도 순 엉터리죠.
그래서 구약에서 과연 심령이 가난한 자가 무엇인지를 봐야 합니다.
그 사람이 바로 다윗입니다.
다윗이 밧세바를 취한 후에
고의적으로 미필적 고의로 철저하게 우리야 장군을 계획적으로 최전방에 나가 죽게 만들고
우연을 가장한 미필적 고의 사건으로 돌려 버리고 난 뒤에
깔끔하게 덮어버린줄 알았는데
완벽하게 살인 사건을 은폐시킨줄 알았는데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았지만
그런 말씀이 있다손 치더라도 완벽하게 사건을 덮어버리면 된다고 자부했는데
그 자부심 자체를 건드리시고자
나단 선지자를 통해서 가난한 자의 딸같이 여기는 양을 빼앗아
마귀에게 대접한 그 부자를 당장 잡아서
율법대로 4배나 갚도록 하라 라고
정의심을 발동케 만들어서
그 완전범죄 자체를 스스로 재판케 만들어 버리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무시받는 주의 인자하심이라는 간극이라고 했습니다.
다윗 본인은 이 간극이 안 보여서 없다고 여겼겠죠.
잠시 지금 제가 다윗 개인을 다루는게 아닙니다.
이 사건은 이스라엘 전체 사건으로 확대되는 경험입니다.
그리고 성도에게도까지 확대되는 사건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데 아주 뿌듯해 했습니다.
그런데 보이지 않는 간극을 무시함으로써
스스로를 재판하는 오류에 말려들게 됩니다.
율법의 네 배나 갚아라 땅땅땅
법 법 법 자체가 자기가 자기를 판결하는 겁니다.
남을 일곱번 용서하는데 있어서 그 일곱에 배에 배를 곱에 곱을 더하는 것이
너가 너를 용서해야할 판국이다는 겁니다. 7에 70번 말이죠.
그러니
율법을 지키라고 준게 아닙니다.
율법은 지키는게 아니라
죄 아래 가두기 위해 주어진 겁니다.
그래서 누가 나를 용서하지 라고 그 인물을 보는 기능이지
이름이지
존재가 아닙니다.
율법을 지키기만 바빳지
율법 대로 4 배나 갚아라
왜? 나는 이스라엘의 왕이니까 왕 답게 왕으로써 판결함이 마땅하다 말이죠.
그런데 율법의 기능을 다윗이 무시한 겁니다.
율법의 기능은 죄 아래 가두기 위한 기능이다 말이죠.
율법 지키는 나를 쳐다보고 단도리하고 나를 살펴보는 존재가 아니라
누구 라는 이름을 쳐다보기 위한 기능이다 말이죠. 먼저 있었던 기능.
즉 다윗이 아무리 왕이라고 우겨도 법을 판결하는 재판관이라고 우겨도
그 왕을 그 재판관을 꽁꽁꽁 묶어버린, 갇아버린, 쇠창살 철창에 가두어버린
왕이라도 안 봐주는 가두는 기능이 먼저 있는데
자꾸 왕의 존재를 우기더라 말이죠.
그럼 왕이면 왕일수록 더더욱 이 율법의 기능이
다윗 왕 머리 위에서 펼쳐지지
다윗이 율법 위에서 율법 머리 꼭대기 위에서 놀수가 없다 말이죠.
다른 나라 왕은 이 간극이 안보이지만
주님은 다윗에게 이 간극을 마치 야곱의 허리를 쳐서 그 틈의 간극 사이로 이스라엘을 나오도록 하듯이
다윗에게 이 율법의 기능을 보여주십니다.
율법의 완성은 사랑이지 (간극: 주의 인자하심)
율법을 지키는 존재가 아니라고 (번제와 제사를 원치 않음, 남을 7번 용서해라 탕탕탕)
존재는 율법에 의해 다루어질 뿐이지
인간이 율법을 지킬수 있는냥 다루어지지 않는 도저히 불가능한
지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사기치는 짖이다 말이죠
그러니 오히려 더 잘된 겁니다.
왕이니까 율법 아래 갇혀진 것을 더더욱 잘 보여주는 겁니다.
왕 마저도 철저하게 갇혀 있다는 것을 보여주게 되니
다들 무시하겠죠.
뭐 니가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메시아라꼬
그럼 너가 너 자신을 구원해 보시지?
성전을 사흘만에 짖는 자여? 뭐하고 있니? 구원해 보라니깐?
이것이 사흘의 간극을 무시하는 겁니다.
그들에게는 부서지지도 않았고 다시 세워지지도 않기 때문에 말이죠.
율법 네 배나 갚아라
참으로 기가막히게 율법의 기능을 무시하는 거죠.
팔복 할아버지 영상이 팔복을 무시하는 것처럼 말이죠.
팔복의 기능을 무시해요 철저하게 말이죠.
졸지에 윤리책으로 만들어 버려요
특히 성화론자들을 접해보면
이건 뭐 예수님의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을 이용해서 자기를 위한 우상을 섬기는
자기 우상화에 빠진 자
곧 사단의 회이다 말이죠.
그럼 마음이 가난한 자는 뭐다?
율법의 기능을 무시했던 자신을 제대로 보고
그 율법의 기능에 의해서
자신 속에 정직한 영이 없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구나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나는 철저하게 갇혔구나 라고
단절을 느끼는자
화로다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구나
이스라엘 회중에 거하면서도
거룩이 있는 줄 알았는데
거룩이 있기는커녕
이 영광을 감당할 수가 없어서
타 죽어 마땅함을 보게 되는구나
그 정도로 족히 비교도 안되는 영광 앞에
타 죽어야 함을 직시 한다 말이죠.
이것이 마음이 가난한 자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 이다 말이죠.
소유물이나 재산을 말하는게 아닙닌다.
나를 제대로 심판하는 진짜 거룩을 만났구나
그래서 거룩 지키겠다고 쪼물딱 쪼물딱 거리는 장난짖을
진짜 거룩 앞에서 홀라당 손 놓아 버리게 되더라 말이죠.
가짜 거룩을 잡고서 지키고 있으니 말이죠.
위에서 내려오는 헐몬산에서 내려오는 이슬로 촉촉이 적셔지는 영생이지
유대인들처럼 사마리아 구역을 피해서 삥 둘러가는
또는 강도만난 자의 시체를 만질수 없어서
제사장도 레위인도 삥 둘러 가는 그런 거룩과 족히 비교할 수도 없는 거룩이다 말이죠.
그러니 율법 지켰다는 자체가 율법의 기능을 무시한 처사이다 말이죠.
율법의 기능은 죄 아래 가두기 위함인데
율법 지켰다고 하니
스스로 그 자체로 자신을 심판해 버리는 식이다 말이죠.
도장 도장끈 지팡이의 주인을 심판함으로써 스스로 그 물건의 주인인 자신을 심판하듯이
십자가 라는 간극은 우리 스스로의 죄악을 십자가를 통해서
스스로 들통내는 식이다 말이죠.
그러니 정직한 영이 없음이 스스로 증언하는 셈인데
그래서 애통한 자 될려고 하지 말라 말이죠.
왜냐하면 애통한 자는 딱 한 분이다 말이죠.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될려고 말라 말이죠.
온유한 자 될려고 하지 마세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자 되지 마세요
결국 예수님을 만난 자는 그런 소리를 안하는데
예수님을 무시하는 자는 어떻게 해서든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될려고 한다 말이죠.
간극도 못 보여주는데
나의 눈물 나의 회개 나의 기도 나의 금식이 아이를 살릴수 있더냐?
만약 살릴수만 있다면 내가 벌써 했다는 겁니다.
결국 내가 아이를 살릴게 아니라
도리어 살아있다고 우기는 죽은 나 다윗을
이름없이 죽은 산 아이가 나를 살리더라 말이죠.
이것이 바로 간극이다는 겁니다.
남 7번 살릴려고 할게 아니라
너나 7에 70번 살려주심을 받아야 할 판국이다는 겁니다.
오히려 완악한 수건을 벗지 않음으로써
그 수건 자체가 정직한 영이 있다고 우기는 꼴이다 말이죠.
아버지 말씀을 단 한번도 어긴적이 없다고 괜히 우기는 바람에
탕자를 때려죽어도 수용 못하겠다고 금가락지 살진소 좋은 옷을 무시해서 걸려 넘어지는 겁니다.
이 간극에 걸려 넘어지더라 말이죠.
(눅 15:20, 개역)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 돌아 가니라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눅 15:21, 개역) 『아들이 가로되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하나』
(눅 15:22, 개역)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눅 15:23, 개역)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눅 15:24, 개역)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
(눅 15:25, 개역)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웠을 때에 풍류와 춤추는 소리를 듣고』
(눅 15:26, 개역)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눅 15:27, 개역)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그의 건강한 몸을 다시 맞아 들이게 됨을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눅 15:28, 개역) 『저가 노하여 들어가기를 즐겨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눅 15:29, 개역) 『아버지께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눅 15:30, 개역)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눅 15:31, 개역)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눅 15:32, 개역)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그러니 뭐 율법 네 배나 갚아? 그것이 율법이 맞다고? 그것이 율법 대로 바르게 하는 것이라고?
바로 이런 다윗이 완전히 박살이 나도록 하는
위에서 내려오는 거룩
기름
아름다움
이슬에 의해서
깨개깽 박살이 나는 것을 심령이 가난한 자라고 하는 겁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 되자가 아니라
심령이 가난한 자로 새로 태어나게 하는 간극입니다.
즉 아버지 말씀을 단 한번도 어긴적 없는 맏아들이 아니라
탕자로 태어나게 하는 간극입니다.
니느웨 백성이였다는 겁니다. 회개라는 간극을 보여주거든요.
어딜 감히 그따위 족히 비교도 안되는 것을
위의 것을 무시하고
되도 않는 의문의 반복인 땅의 그것들을 들이대냐 말이죠.
위에서 내려오는 거룩을 왜 무시하고
땅에서 쪼물딱 거리는 거룩을 칭칭 감을려고 하냐 말이죠.
위의 것을 사모하라 말이죠.
(골 3:1, 개역)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골 3:2, 개역)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골 3:3, 개역)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그러니 율법의 존재가 아닌 율법의 기능인 죄 아래 갇혔음을
스스로 드러내는 셈이다 말입니다.
존재는 기능을 무시하도록 되어 있어요 왜냐? 존재를 위하기 때문이다 말이죠.
역시나 기능은 존재를 해체시킵니다. 회개죠. 회개는 기능이지 존재로 가져다가 붙여넣기를 할 수 없어요.
부자청년이 말씀 어릴적부터 다 지켰다고 하는 것 자체가
말씀을 단 한번도 지킨적이 없음을 들통나는 것이다 말이죠.
주께서 원하시는 제사는 번제와 제사가 아니라 그건 존재고. 남을 7번 8번 용서하는 자가 될려는 존재 의문의 존재이고.
주님이 원하시는 제사는 인애와 자비 곧 기능이다는 겁니다. 제가 7에 70번 용서 받아야 하는 그 가난한 자 이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전 재산을 바치지 않으면 구원 받을 수 없는 자이다는 겁니다.
자기 목숨까지 아끼지 내어주시어야만 할 정도이다 말이죠.
그러니 우리는 그야말로 뻔뻔스러운 복음, 무시받는 복음만을 증거할 수 밖에 없다 말이죠.
화목 제물을 증거하는 찬양자로 태어나야 하는 겁니다.
그러니 부자청년이 어릴적 부터 말씀을 다 지켰다는 것은
기능을 무시한 겁니다. 간극을 말이죠.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지 못하고
완악한 수건을 벗지 않고 그냥 등 돌리고 돌아서는 모습과 같다 말이죠.
그런데 다윗은 다윗이 스스로 심령이 가난한게 아니라
정직한 영이 없다는 것을 통해서
자복하고 회개하는 마음인
상한 심령을 부으심을 받아서
나는 광야에서 여호와를 열 번씩이나 원망한 자입니다 라고
그 증거 세가지를 담은 언약궤를 어깨에 매고 여리고성을 뺑뺑이 도는 것과 같다 말이죠.
성 캐슬 이란 것은 일종의 남근이다 말이죠.
이 남근을 짤라내는 할례하는 방식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졸지에 성을 짖듯이 여리고성이 되어버리니
정직한 영이 없음을 모르고 무시하게 되면
이 여리고성을 단단하게 세우듯이
예루살렘 성을 남근처럼 세운다 말이죠.
이것이 예루살렘이 포위된 상태
죄 아래 가두어진 상태이다는 겁니다.
그럼 다윗 개인의 경험이 아니라
이스라엘 전체의 경험이 되고
신약의 성도 곧 성령의 전인 주의 신부의 경험이 되듯이
오늘 시편 126편에서 바벨론 포로가 되어 돌아오는 길에
꿈만 같도다 라고
용서함 받았다고 뿌뿌뿌 나팔 불어서
여리고성 남근을 부셔 버리는 겁니다.
요나의 표적 외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는데
오늘날 교회가 다 남근이라는 악한 세대가 요구하는 기적을 기도하고 있는 겁니다.
인간들은 자꾸 남근 곧 힘의 기적
우상의 기적을 바라는 악한 세대가 요구하는 기적을 바라고 있다 말이죠.
오늘날 교회가 기도하는 내용들이 다 이런 내용이다 말이죠.
어쩔수 없어요 본능이기 때문에 말린다고 될 문제도 아닙니다.
안 그런 인간이 없다 말이죠.
다윗 조차도 율법 네 배나 갚으라 라고
권력의 힘을 세우더라 말이죠.
왜 성화론자들이 율법을 지킬려고 하느냐?
성화 되고자 말씀을 지키고 행할려고 하느냐?
힘 없으면 무시 받거든요.
그게 두려운 겁니다.
즉 반작용이다 말이죠.
이 반작용은 결국 복수심이다는 겁니다. 한 풀이
원한을 가져서 나의 한을 풀려고 하는 것이다 말이죠.
그러니 인간의 믿음은 복수심이다는 겁니다.
한 풀이 이다는 거죠.
구원되어서 나를 무시한 놈들에게 다 복수하겠다는 것이
인간의 믿음이다 말이죠.
땅에서 쭈물딱 쭈물딱 조립하는 것이다 말이죠.
그런데 위에서 내려오는 아름다움은 바로 그런 자들에게
무시받는 모습으로만 오는 아름다움이요
이슬같은 청년이 그 무시받는 성령의 일로써 나타난다 말이죠.
다윗에게서는 누굽니까?
오로지 여호와의 거룩한 전쟁만 생각했던 우리야 장군이죠.
그래서 그 기간에는 아내와의 동침도 하지 않았다 말이죠.
그 동침하지 않은 것을 다윗은 노리고 정작 본인은 동침한다 말이죠.
왜? 율법 지키는 것이 결국 힘이 되거든요.
그 힘자랑 곧 나를 무시하는 놈 다 짖밟아 버리겠다가 되는 겁니다.
율법 안 지켰으면 안그래요
인간은 율법이든 양심이든 모조리 죄 아래 가두기위한
한풀이 원한풀이 복수심을 키우는 것이다 말이죠.
결국 인간은 뭘 해도 모조리 다 복수심입니다.
뭘 해도 다 죄요 원수짖 빡에 못해요
어딜 감히 팔복을 저기에다가 끌여당겨서 같다 붙여넣기 하느냐 말이죠.
그 짖 하다가 다윗이 박살이 난 겁니다.
정반대로 말씀이 나를 말씀 속에 같다 붙여넣기를 하는 겁니다.
다윗을 그렇게 붙여넣기를 하니까
아무리 들따 봐도 정직한 영이 없어서
비로소 웁니다.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
상한심령이 되는 겁니다.
왜?
정직한 영이 없어서
성령이 없어서 말이죠.
없을 뿐만 아니라
계속해서 무시하는 마음 뿐이더라 말이죠.
죄책감은 양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복수심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말이죠.
아이 씨
들통나지 않을 수 있었는데 들켜버렸네
아 재수 없게 씨리
이것이 죄책감이니 결국 복수심이요 반작용이다는 겁니다.
안 들켰다면 넘어갈수가 있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졸지에 빼도 박도 못하게 걸려서
수갑을 차게 되었으니
잡혀서 죄값을 치러야 한다는 겁니다.
그것이 억울하다는 거죠.
여전히 의문의 제사를 반복하는 겁니다.
주님은 번제와 제사를 원치 않고
인애와 자비를 원하신다 말이죠.
즉 오히려 들킨 것이 차라리 고맙고 감사하다는 겁니다.
정직한 영이 없음이 들통나야지
안 그러면 정직한 영이 있는 듯이 자꾸 흉내를 낸다 말이죠.
그런 연기의 달인들이 바로 사단의 회인 바리새인이요 유대인이요.
오늘날 성화론자들이다 말이죠.
정직한 영이 없는데 자꾸 있는 듯이 연기를 하는데
뭐 이웃을 사랑해?
뭐 거지 나사로처럼 되자?
자꾸 그 연기에 자기가 매료가 되어 자기가 넘어가요.
혼자 지옥가면 되는데 꼭 다 같이 끌고갈려고
자기도 천국 안가고 남도 천국 못가도록 가로막아 삥이나 뜯는 양아치 짖을 하더라 말이죠
그것도 그냥 거룩이 아니라 사람들 중에 가장 큰 거룩으로 포장한 가면을 쓰고 말이죠.
안 속아 넘어가는 자들이 없어
다 속아 넘어가
끼리 끼리 모인다고 어쩜 그리 다 속아 넘어가는지 원
하늘에서 직접 내려온 거룩이 아니라
인간들의 애씀과 노력과 말씀실천으로 만든 거룩은
도리어 하늘에서 내려운 거룩을 죽여버립니다.
왜? 위에서 말했죠. 인간의 믿음은 복수심이다고
한풀이 이다고
나를 무시했던 놈들 다 복수하겠다고
이것이 인간이 드리는 번제와 제사이다 말이죠.
그것을 다윗이 율법 네배가 갚도록 하라 라고 좋아라 한다 말이죠.
그것을 박살 내는 겁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제사는 번제와 제사가 아니라
인애와 자비이다 말이죠.
다윗 너가 직접 이 인애와 자비를 한번 당해봐라 라는 겁니다.
즉 무시받아 봐라 말이죠.
어떤 무시? 무시 받는 성령이 없는 그 비참한 현실을 보라는 겁니다.
즉 정직한 영이 없으면 무시받기는커녕 오히려 모든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사는 현실이
정작 비참한 현실이다는 것을 말이죠.
그러니 성령의 일은 항상 무시받는 식으로 주어지는 겁니다.
선지자는 한마디로 말해서 무시 받는자이다 말이죠.
고향에서 절대로 아무도 영접하지 않습니다.
쫏겨나고 버림받는다 말이죠.
그래서 주님이 원하시는 제사는 상하고 통회하는 상한심령 곧 긍휼히 여겨달라고
7에 70번 용서 해달라고 기도하는 상한마음인 인애와 자비를 부어달라고
성령을 부어달라고
다윗은 그 다음에 신나게 무시받고
즐겁게 버림받고
기쁨으로 눈물을 흘리게 되는 겁니다.
이 다윗 개인의 경험이 이스라엘 전체와 확대가 되어서
바벨론 포로가 되어서
돌아올 때 기쁨으로 단을 거두는
꿈만 같도다를 저절로 외치게 되더라 말이죠.
바로 이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는 이 주의 인자하심이라는
창세전에 생명책에 기록된 이 간극을
남들은 볼수 없는 이 간극을 봄으로써
이 간극에서 태어난 자가 바로 이스라엘이듯이 말이죠.
그러니 다윗의 이런 경험은 개인의 경험이 아니라
이스라엘로 확대되듯이
안 그러면
이스라엘 전체가 이미 죽어버린
한 참 죽은 사울왕의 모습을 그대로 이어받아서
빠져나올길이 없다 말이죠.
이 죽은 사울왕의 모습과 같은 이스라엘은
자기들도 욕해서 비웃고 무시했던 그 다윗의 운명에 같다 붙여넣기를 해서
이제는 자기가 욕했던 그 다윗의 운명을 자신들의 운명으로 덮쳐져서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는
바벨론이라는 큰 물고기에 먹혀서 다시 되찾게 되는 요나의 표적을 누리게 됨으로써
이 간극을 보여줌으로써
내가 하나님을 사랑한게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셔서 화목제물로 삼았다는
하늘에서 내려온 아름다움인 거룩이
바로 인간들이 이미 가짜거룩으로 인해 하늘에서 내려온 거룩을 무시하고
정직한 영이 없다는 것을 무시하고
율법 네 배나 갚았다는 둥
어릴적부터 단 한번도 말씀 어긴적 없다는 둥
혹시 부족한 것 있으면 율법지키기에서 빠뜨린 것 있으면 말씀만 하소서
당장 지키겠습니다
아 그래? 너는 껍데기는 지키는데 달인인데 과연 속 알맹이는 제대로 지켰는지 보자
율법의 기능인 죄 아래 제대로 갇혀 있는지 보자
안 갇혔다고 우기더라 말이죠.
끝까지 우기면서 등돌리고 가버리는 겁니다.
갇혔음을 직시했다면
주여 불쌍히 여겨주소서
제가 그 가난한 자요
주여 제발 죽어주세요 주야 제발 별세해 주세요
주님의 목숨값 만이
저의 죄 값을 치를수가 있다고
그야말로 뻔뻔하기 그지 없는
그러니까 다윗의 경험
베드로의 꼬끼오 경험이
남이 아닌 주의 성도의 경험 곧
이것이 요나의 표적
곧 주의 인자하심이라는 간극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는 간극인데
자꾸 이 간극을 무시하니까
불쌍히 여겨달라고 고백하지도 못 할 뿐더라
오히려 그렇게 기도하는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하나님께 감사하다고
이 간극을 무시하게 되어서 주님께 감사하다고 외치는 식이다 말이죠.
괜히 안식일을 지키니까 안식의 주인을 죽이더라 말이죠
안식일 안 지켰으면 안 죽여요
오늘날 말씀을 지킨다고 우기니가
말씀을 무시하는 겁니다.
말씀이 벌리시는 사건은 전혀 눈에 안보이고
자기가 말씀을 행하는 것만 눈에 비닐씌여지듯이
안벗겨지는 겁니다.
육의 자랑이거든요.
그러니 성령의 소욕과 육의 소욕은 서로 서로가 무시해요
서로 거스리도록 한다 말이죠.
말씀을 지키는 자는 말씀이 내려 앉은 자를 거부하고
말씀이 내려 앉은 자는 말씀을 지키는 자들로부터 죽임을 당한다 말이죠.
그래서 젊은이는 환상을 본다 했지요.
막 죽어나가는 겁니다.
진짜 현실을 봤는데
자꾸 가짜 현실을 삯꾼들이 사기를 치니까
마리아가 하늘의 전쟁을 땅에 구체화 시키는 기도를 성령으로 인해 함으로써
전쟁을 하는 자들이 젊은이다 말이죠.
화평을 주러 온게 아니라 검을 주러 왔다 말이죠.
그리고 정작 늙은이는 이런 전쟁을 하는 아기를 죽은태에서 낳더라 말이죠.
그야 말로 둘다 말도 안되는 불가능한 일인데
다들 비웃을 수밖에 없는데
졸지에 아브라함이 낳은 자식이 군대가 되어
함 땅 애굽땅을 그 당시 최고의 강국
마치 최고의 성
최고의 남근 여리고성을
할례를 해서 깨부시는 식이다 말이죠.
힘의 기둥을 치는 겁니다.
돌 위에 돌이 하나도 남지 않도록 말이죠.
그러니 출애굽 전쟁은 이제 끝난게 아니라
오히려 이미 승리하고 들어가는 전쟁이기에
이미 승리한 전쟁인 십자가 전쟁은 더더욱 증폭이 되는 거다 말이죠.
이미 완료된 채로 말입니다.
미완성이 아니라
그러니 신천지였던가요?
교인 빼앗고자 교회 빼앗기를 신천지교인을 심어서 그렇게 침투한 교회를 빼앗는다고 하던데
그것은 결과적으로 돈을 노리는 것이다 말이죠.
기존 교단도 돈만 노리고 이런 신흥 이단도 돈만 노리는
돈만 생각하는 더러운 세상임을 보여주는 예다 말이죠.
세력확장인 여리고성이라는 우상 확대죠. 힘의 확대
그래야 인정받는
무시 받지 않고자
복수심을 펼치는 것이 인간의 거짓 믿음이지만
그런데 진짜 복음은 그 보다 더 심해요
아예 돌 위에 돌 하나도 남기지 않는 것이
예루살렘 성전 허물기 이다 말이죠.
빼앗을 필요가 없어요.
그냥 불 지르러 왔다 말이죠.
성령의 불 말이죠.
그러니 성령을 다들 무시하니
불은커녕 아무것도 벌어지지 않아요.
지금 계시록 일곱 번째 인 까지 했는데
그것이 묵시에서는 분주하게 바삐 벌어지지만
역사 속에서는 아무런 현상이 안 나타납니다.
뭐 히틀러가 등장함으로써 계시록에 나오는 것을
계산기 뚜뜨리는데
역사에서는 안 나타난다니깐요.
뭐 청색말이 나타나 4분의 1일 멸망시킨다고 하니까
어떤 해석은 이슬람 국가의 국기에 초록색 들어간 나라의 국토면적을 계산해 보니
전 세계의 4분의 1이였다나? 중동에서의 4분의 1 이였다나
하여튼 어떻게 해서든 억지를 써서라도 해석할려고 달려드는데
묵시의 숫자화는 무한대 개념이지 손가락으로 셈할수 있는 것이 안된다 말이죠.
그것이 바로 율법 4배나 갚으라 라는 다윗의 사고방식을
박살내는
너나 잘 하세요 라고
율법의 4배? 웃끼시네
너는 도리어 7에 70배 용서 받아야 할 다윗이라는 것을 들통내시는 겁니다.
이것이 구원이다 말이죠.
이것을 무시하지 않고
정직한 영을 무시하지 않고
상함심령을 무시하지 않고
오히려 기뻐하는
감사하는
이 7에 70번 용서 받아야 함이 기쁜소식이 되는
세 번의 꼬끼오
평상시 닭을 잡아먹을려고 하지
내 대신 울어주는
대신 눈물 흘리는 닭으로 안본다 말이죠.
그 닭의 울음이 나를 건지는 거다 말이죠.
그 세 번에 숫자 세 번이 아니라
묵시화 무한대이다는 겁니다.
탕탕탕 법정에서 방망이를 치잖아요
확정적이다 의견이 없다 아멘 이다 라는 겁니다.
무엇이? 무한대가 확정적이다는 겁니다.
7에 70이 490번이라는 뜻이 아니라
무한대의 용서이다는 겁니다.
일만달란트가 40조? 20조가 아니라
셈이 가능한게 아니라
셈이 불가능하다는 의미의
무한대의 값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것이 비유로 증거된다는 말은
영원한 간극을 벌리겠다는 겁니다.
그것도 무시받는 간극
무시 받는 일만달란트 용서로써 말이죠.
값은 값인데 값이 없는 값이다 말이죠.
오늘 무한도전에서 술래잡기는 술래잡기인데
술래가 없는 술래잡기이다 말이죠.
술래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의심과 불안이 점점점 피노키오의 코처럼 코가 길어지더라 말이죠.
이런 현재의 사회 현상을 거울 보여주듯이 보여주는 게임이였는데
숫자는 숫자인데 숫자 없는 숫자로써의 묵시화 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율법 지키면 지킬수록 도리어 말려들지요.
그 말려든 것 조차도 감사케 만드는 것인데
완악한 수건을 벗지 못하는 자는
끝까지 율법 지킨 것을 손 놓지 못하는 겁니다.
위에서 내려와야만 하는 거룩이 아니라
내가 강도만난 자의 시체를 피하고
부정을 피하고
사마리아 지역을 피해 삥둘러 가고
피하고 피하는 거룩이 아니라
선한 사마리아 사람은 바로 강도만난 자 에게서만 나타나는 자이다는 겁니다.
죄인에게서만의 구원자이고
환자에게서만의 의사이다는 겁니다.
율법에 갇힌 자에게서만이 율법의 완성인 사랑이 나타나지
부정이란 부정을 다 피해다니는 그런 사단의 회인 유대인이
과연 선한 자를 만날수가 있겠습니까?
구원자를 만날 수 있겠냐 말이죠.
의사를 만날 수 있겠냐 말이죠.
다들 본다고 우기고
소경 아니다고 우기고
건강하다고 우기고
죄인 아니다 의인이다 라고 우기는 판국에
과연 정직한 영이 없는데 있다고 우기니
상한심령 곧 눈물로 씨앗을 뿌리시는 예수님을 만나겠냐 말이죠.
만나봤자 경쟁자로 여겨서 죽일 수밖에 없다 말이죠.
그러니 마음이 가난한 자는
주여 불쌍히 여겨주소서
저는 죄인이로소이다
저에게는 정직한 영이 없습니다 라고
상한심령이 되는 자인데
졸지에 한국은 팔복 할배 목사가
성경말씀과 정반대인데
팔복이라고
심령이 가난한 자라고
맨발의 할아버지라고 우긴다 말이죠.
완악하기 짝이 없더라 말이죠
이 보다 더 심한 자를 만난적있다 말이죠.
저런 맨발의 할아버지 팔복 할배는 수준 낮은 성화론이다고 우기고
자신들은 수준 높은 성화론자라고 우기면서
가장 깨끗한 정통교단의 세속화를 막기 위해서
주야로 힘쓰고 있는 모습을 그 증거라고 내세울 때
우와 이런 사단의 회를 봤나 ~~~~
이건 뭐 강도만난 자를 시체 안 만지겠다고 피해가는 제사장 레위인 보다
더 심한 자들이더라 말이죠.
그런 강도의 소굴을 교회라고 우기니
안 그런 교회가 없어
다들 그렇게 주장하니
강도의 소굴에서 벗어날길이 없는
포위당한 예루살렘을 누가 건져내랴 말이죠.
오직 주의 인자하심 뿐이다는 겁니다.
곧 십자가의 피 흘리심 말입니다.
그래서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용서를 받은 자의 행복에 대해서
사도바울이 아브라함을 예로든 다윗의 고백을 외치면서
정작 사도바울 본인이 그런 경로로 구원받았다고
뻔뻔스럽기 짝이 없는 고백을 하더라 말이죠.
그 행복이 바로 오늘 나옵니다.
꿈만 같도다
마치 늙은이는 꿈을 꾸듯이
성령이 임하니까
평생을 불임여성처럼 살았는데
늙어 다 죽어가는 마당에
생명을 꽃피우는
아기를 생산 하더라 말이죠.
왜 멀쩡한 청년때에는 아기를 낳지 못하는 불임여성으로 만들어 버리고
정작 이제 죽어야지 하고 준비를 하는 늙은이에게 꿈을 줄까요?
아기를 생산케 할까요?
이것이 젊은이가 환상을 보는 이유인
바로
여종 남종 구분 없이 예언케 만드는 영을 부으시는
여호와 자신의 전쟁
곧 구원전쟁
출애굽 전쟁을 벌리심이다는 겁니다.
십자가 전쟁
왜 시편에서 다윗은 왜 그리 주구창창 출애굽사건을 계속해서 언급할까요?
마 좀 고만해라 마이 무따 아이가
왜 자꾸 무시받는 발언들만 할까요?
과거일 뿐인데
그런데 다윗에게는 환상으로 임했기에
꿈으로 나타났기에
과거가 아니라
미래 확정으로써의 미래완료로써
구원사건으로써 벌어지고 있다는 겁니다.
이 삽자가의 용서만이
즉 피흘리심 만이 기쁨으로 단을 거두시는
주님의 마음 곧 가난한 마음입니다.
밤마다 주의 성실하심으로 눈물을 흘리시고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으로 새벽을 깨우시는
이 간극을
이 무시받는 간극에서 우리가 태어나는 겁니다.
260장
거두리로다 거두리로다 기쁨으로 단을 거두리로다
거두리로다 거두리로다 기쁨으로 단을 거두리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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