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축하라 여호와의 종들아 (시편 134편) 

 

찬송 부르게 지음 받은 이스라엘

 


(
43:21, 개역)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134:1, 개역)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밤에 여호와의 집에 섰는 여호와의 모든 종들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134:2, 개역) 성소를 향하여 너희 손을 들고 여호와를 송축하라

(134:3, 개역)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실지어다

(43:1, 개역)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43:2, 개역)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43:3, 개역)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요 네 구원자임이라 내가 애굽을 너의 속량물로, 구스와 스바를 너의 대신으로 주었노라

(43:4, 개역) 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고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사람들을 주어 너를 바꾸며 백성들로 네 생명을 대신하리니

(43:5, 개역)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네 자손을 동방에서부터 오게 하며 서방에서부터 너를 모을 것이며

(43:6, 개역) 내가 북방에게 이르기를 놓으라 남방에게 이르기를 구류하지 말라 내 아들들을 원방에서 이끌며 내 딸들을 땅 끝에서 오게 하라

(43:7, 개역) 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느니라

(43:8, 개역) 눈이 있어도 소경이요 귀가 있어도 귀머거리인 백성을 이끌어 내라

(43:9, 개역) 열방은 모였으며 민족들이 회집하였은들 그들 중에 누가 능히 이 일을 고하며 이전 일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냐 그들로 증인을 세워서 자기의 옳음을 나타내어 듣는 자들로 옳다 말하게 하라

(43:10, 개역)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는 나의 증인, 나의 종으로 택함을 입었나니 이는 너희로 나를 알고 믿으며 내가 그인줄 깨닫게 하려 함이라 나의 전에 지음을 받은 신이 없었느니라 나의 후에도 없으리라

(43:11, 개역) 나 곧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구원자가 없느니라

(43:12, 개역) 내가 고하였으며 구원하였으며 보였고 너희 중에 다른 신이 없었나니 그러므로 너희는 나의 증인이요 나는 하나님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43:13, 개역) 과연 태초부터 나는 그니 내 손에서 능히 건질 자가 없도다 내가 행하리니 누가 막으리요

(43:14, 개역) 너희의 구속자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위하여 내가 바벨론에 보내어 모든 갈대아 사람으로 자기들의 연락하던 배를 타고 도망하여 내려가게 하리라

(43:15, 개역) 나는 여호와 너희의 거룩한 자요 이스라엘의 창조자요 너희 왕이니라

(43:16, 개역) 바다 가운데 길을, 큰 물 가운데 첩경을 내고

(43:17, 개역) 병거와 말과 군대의 용사를 이끌어 내어서 그들로 일시에 엎드러져 일지 못하고 소멸하기를 꺼져가는 등불 같게 한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43:18, 개역)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적 일을 생각하지 말라

(43:19, 개역)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정녕히 내가 광야에 길과 사막에 강을 내리니

(43:20, 개역) 장차 들짐승 곧 시랑과 및 타조도 나를 존경할 것은 내가 광야에 물들을, 사막에 강들을 내어 내 백성, 나의 택한 자로 마시게 할 것임이라

(43:21, 개역)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43:22, 개역) 그러나 야곱아 너는 나를 부르지 아니하였고 이스라엘아 너는 나를 괴로워하였으며

(43:23, 개역) 네 번제의 양을 내게로 가져 오지 아니하였고 네 제물로 나를 공경하지 아니하였느니라 나는 예물로 인하여 너를 수고롭게 아니하였고 유향으로 인하여 너를 괴롭게 아니하였거늘

(43:24, 개역) 너는 나를 위하여 돈으로 향품을 사지 아니하며 희생의 기름으로 나를 흡족케 아니하고 네 죄 짐으로 나를 수고롭게 하며 네 악으로 나를 괴롭게 하였느니라

(43:25, 개역)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43:26, 개역) 너는 나로 기억이 나게 하고 서로 변론하자 너는 네 일을 말하여 의를 나타내라

(43:27, 개역) 네 시조가 범죄하였고 너의 교사들이 나를 배역하였나니

(43:28, 개역) 그러므로 내가 성소의 어른들로 욕을 보게 하며 야곱으로 저주를 입게 하며 이스라엘로 비방거리가 되게 하리라

 

 

특이한 점이 밤에 라고 때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밤 하면 무엇이 생각납니까?

시편에서 밤 하면 주의 성실함이 생각나지요?

 

밤 마다 주의 성실하심이

아침에는 주의 인자하심이

 

그래서 시편 초반에서 중반으로 갈때에

주의 성실하심을 자주 언급했습니다.

 

(36:5, 개역)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하늘에 있고 주의 성실하심이 공중에 사무쳤으며

(40:10, 개역) 내가 주의 의를 내 심중에 숨기지 아니하고 주의 성실과 구원을 선포하였으며 내가 주의 인자와 진리를 대회 중에서 은휘치 아니하였나이다

(54:5, 개역) 주께서 내 원수에게 악으로 갚으시리니 주의 성실하심으로 저희를 멸하소서

(71:22, 개역)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또 비파로 주를 찬양하며 주의 성실을 찬양하리이다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주여 내가 수금으로 주를 찬양하리이다

(88:11, 개역) 주의 인자하심을 무덤에서, 주의 성실하심을 멸망 중에서 선포할 수 있으리이까

(89:1, 개역) [에스라인 에단의 마스길] 내가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영원히 노래하며 주의 성실하심을 내 입으로 대대에 알게 하리이다

 

 

주의 인자하심은 요즘 들어 자주 했지요?

즉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음인 바로 주의 긍휼하심이다 말이죠.

 

이것이 밤을 거쳐서 새벽을 맞이하는 아침의 노래가 주의 인자하심이다면

밤은? 바로 출애굽 전쟁에서 주의 성실하심이 무엇을 퍼붓는다?

바로 앞의 글

열가지 재앙을 때려붓듯이

바로 일곱 나팔을 때려붓는다

모조리 다 잃어버림을 당하는 겁니다.

화로다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구나 말이죠

 

이것이 주의 성실하심으로

곧 다들 무시하는 천사들의 활동으로 인해

밤에 퍼붓는 겁니다.

이 밤을 통과하지 못하는 자는

주의 인자하심이라는 배려가 없어서 새벽을 맞이 하지 못하는 것이고

밤을 통과하는 자는 믿음이 좋거나 말씀을 지켜서가 아니라

주님이 대신 피 흘리심 때문에

그 희생으로 인해 통과해서 아침을 맞는 겁니다.

 

유월절 어린양의 피 발림으로써 말이죠.

 

그럼 밤에 곧 종말때에

주의 성실하심으로 인해

일곱 천사들이 퍼붓는 그 심판 속에서

 

그 감히 도저히 노래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무화과 나뭇잎이 마르고

포도 열매가 없고

감람나무 열매 그치고

논밭에 식물이 없어도

우리에 양떼가 없어도

외양간 송아지 없어도

 

난 여호와로 즐거워 하리

난 구원의 하나님을 인해 기뻐하리라 라고

 

이 불가능한

단절의 노래를 아니 부를 수 없는 이유는

 

존재가 아니라

그 심판 속에서 살아남는 자가 되는 존재가 아니라

 

이미 존재하기 이전에 기능 자체가

태어나기도 전에

창세전에

찬양하는 기능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오히려 종말 속에서 더더욱 송축 할 수밖에 없는

아니 외치고는 못 배기는 기능이다는 겁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입니다.

그러니 이스라엘은 묵시적인 기능입니다.

육적인 존재가 아니라 말이죠.

찬양하기 위해서 태어난 겁니다.

 

(43:21, 개역)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너는 내 것이다 말이죠.

 

그러니 이 찬양은 단순히 노래가 아니라

묵시적인 의미입니다.

 

곧 무엇을 노래하는가?

어떤 사건을 노래하는 그 사건내용

즉 역사를 불태우는 그 사건을 노래하는 겁니다.

바로 주의 인자하심이라는 간극을 노래하는 거죠.

 

그러니 밤에 주의 성실하심으로 애굽을 불태우는 사건이 벌어짐을 노래하는 겁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주의 이름을 찬양합니다.

성소 곧 예수님이시지요.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아닙니까?

이것을 자꾸 유명한 목사들의 설교를 봐도 해석을 봐도

다들 자기 발걸음으로 계단 올라가는 식으로 올라가는 것으로 보는데

그게 아니라

성전 자체가 예수님이고요

내가 예수님에게 가는게 아니라

예수님이 나에게 와서

나를 스캔하듯이 쭈우욱 통과함으로써

그 문이

그 문 되신 예수님이 이동함으로써

그 문에 들어간다고 표현한 겁니다.

즉 이것도 존재로 보면 안되고

기능으로 보아야 합니다.

 

존재로 보면 내가 성전을 내 발걸음으로 계단 올라가듯이 올라가는게 아니라

정반대로 나는 꽁꽁꽁 탈탈 털려버려서

흑암의 백성으로써 사망의 그늘에 폭삭 주저앉은 앉은뱅이와 같은데도 불구하고

문이 나에게 다가와서

나를 그 문이 통과함으로써

문에 들어갔다고 쳐 버리는 겁니다.

맞습니다. 편파판정이지요.

부조리입니다.

나는 앉은뱅이라서 올라갈수가 없는데

문이 스캐너처럼 나를 통과해서

일방적으로 통과 합격이라고 통보를 해 버리는 반칙을 불륜을 벌리는 겁니다.

 

그래서 찬양하는 겁니다.

 

그러니 찬양은 우리가 십의 이조를 드리고

이레도 두 번 금식하고

저 세리처럼 토색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아버지 말씀을 단 한번도 어긴적이 없는 탕자의 형인 맏아들처럼 살아서가 아니라

또 어릴적부터 율법을 다 지켰던 부자청년처럼 부족한 것 있으면 말씀만 하소서 당장 지키겠습니다 라고 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역설적이게도 그들은 찬양하는 자가 아니다 말이죠.

 

찬양자는 오히려 탕자 였다 말이죠.

 

? 그들 존재에서 나오는 찬양은 은사가 아니다 말이죠.

무시하지 않아요

오히려 진짜 찬양이 덮쳐진 자는 무시받는 자입니다.

? 무시 받는가?

무시 받으면 그럼 모조리 다 찬양자 인가?

아니지요 그것도 존재로 보는 겁니다.

 

무시한 바로 애굽군사와 애굽왕이 바로 여호와는 누군데?

난 그런 이름 들어본적 없는데 라고

여호와의 이름 때문에 발생한 묵시적인 의미이다 말이죠.

역사가 아닙니다.

존재가 아니다 말이죠.

 

신이란 신은 다 허용하는 애굽이다 말이죠.

 

그런데 여호와라는 이름은 덜커덕 하고 걸려버리는 겁니다.

 

인간이 수용할수 있는 이름이 아니다 말이죠.

인간은 만반의 준비 자세로

신이란 신은 다 모신다 말이죠.

존재이거든요.

우상이란 우상은 다 섬겨요

 

그런데 여호와는 인간 쪽에서 수용하니 마니가 아니라

여호와께서 벌리시는 사건 땜에

도저히 수용 자체가 안되는 겁니다.

역사가 묵시를 수용할려고 하니

역사가 찢어진다 말이죠.

 

안 찢어질려고 믿는 것이 신 아니냐 말이죠.

그런데 그 어떤 신도 인간이 받아들이면 찢어진 적이 없는데

유독 이 여호와라는 새 이름은 담을 부대가 없다 말이죠.

담을 역사가 없어요.

 

다 찢어집니다.

 

감당이 불감당 이다 말이죠.

 

그래서 새술은 새부대에 담는데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만 이 이름을 담는 그릇이 되는 겁니다.

주님 쪽에서 취사선택한 그릇이지

내가 되고파서 달음박질해서 되는 그릇이 아니다 말이죠.

 

제가 경험해 본 모든 교회가 자꾸 인간 쪽에서 선택한 그릇이 되자 라는 사상인

마귀 사상만을 전하는 것이 오늘날 교회가 되고 말았다 말이죠.

역사 속의 교회들은 다 그런 식입니다.

 

사단의 회입니다.

 

그런데 묵시의 교회는 주님 쪽에서 귀히 쓸 그릇 천히 쓸 그릇으로 나누심으로써

담는 그릇이기 때문에

그것이 변질 변동이 된 적이 없었다 말이죠.

 

그러니 아니 찬양할수 없다 말이죠.

 

아니(부정) 찬양할수 없다(부정) 말이죠.

 

부정의 부정인 겁니다.

 

그러니 우리는 역사 속의 가짜교회를 거침으로 인해서

주님이 따로 세운 꼬불쳐 놓은 뒤로 빼돌린 일곱교회가

저들과의 차이성으로써 주님이 직접 세우고 있다는 것을 보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 종말에 곧 밤에

주의 성실하심으로써

진노를 퍼부음 속에서

진노가 묻지 않는

사망이 묻지 않는

그들이 잘나서가 아니라

왜 진노가 묻지 않는가 봤더니

부정의 부정

 

진노 라는 부정이 묻지 않는 더 나은 부정이 이미 발려있는 겁니다.

바로 예수님이 대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

곧 진짜 죽음이 발려있는 겁니다.

 

정녕죽으리라

 

(2:17, 개역)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인간은 단 한번도 죽은 적이 없다 말이죠

그렇다고 불멸의 존재이다는 말이 아니라

생명이 없는 겁니다.

그저 좀비일 뿐이다 말이죠.

진짜 생명이라면 독자적인게 아니거든요.

그런데 존재가 되어버렸으니

독자적인 존재로 숨만 그냥 헐떡 거릴 뿐인 겁니다

참 생명이라면 소통 교통이 된다 말이죠.

니 목숨 내 목숨 니 죽음 내 죽음 이래 된다 말이죠.

 

(고전 15:45, 개역)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나니

 

그런데 함께 죽고 함께 사는 것이 없으니

그저 모든 아담은 산 영일 뿐이다 말이죠.

살려주는 영이 아니다 라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인해

모든 인간은 비로소 그때 다 죽은 것이다 말이죠.

 

진짜 죽음이 온 겁니다.

정녕 죽으리라 라는 심판을

제대로 된 심판을 주님이 대신 받으셨다 말이죠.

 

그러니 죽어서 천국 이냐 지옥이냐가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인해 천국을 이미 누리는 찬양이 덮쳐진 자냐

십자가에 의해 지옥이 결정된 지옥이 땡기는 자냐 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갈라지는 겁니다.

죽어서 심판대에 가서 판결되는게 아니라 말이죠.

 

그러니 예수님과 함께 죽는 진짜 정녕 죽으리라를 봐야 합니다.

내 죽음은 백날 죽어본들 정녕 죽으리라 라는 심판을 제대로 받은게 아니다 말이죠.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직접 버림 받는 그 잃어버림을

그 하나님의 저주인 십자가를

우리가 직접 받은 적이 없다 말이죠.

제대로 심판 받은적이 없어요.

 

받아 마땅한데 안 퍼부어요

 

왜냐하면 죽은 시체에게 심판을 퍼부어 본들

그게 무슨 심판이라는 기능 곧 의미가 되냐 말이죠.

살아있은 자에게 부어지는 심판이어야 진짜 심판의 의미가 되는 겁니다.

진짜 살아있는 자가 누구입니까?

모든 인간은 첫사람 아담으로 인해 이미 사망 속에 들어갔으니

심판을 붓고 싶어도 심판의 기능이 의미가 없어요.

이미 타 버린 시체에게 불을 붙이는 꼴이다 말이죠.

진짜 살아있는 유일한 한 분에게 심판을 부어야 그것이 진짜 제대로 된 심판

곧 정녕 죽으리라 라는 겁니다.

 

우리에게는 해당이 안됩니다.

산 적 조차도 없었는데요 뭘

 

그럼 산 적 조차도 없는 심판 조차도 퍼부을 가치가 없는 자를

어떻게 찬양자 까지식이나 새로 만드시는 겁니까?

그것이 출애굽의 심판 밤에 퍼붓는 재앙을 통해서 보자 말이죠.

 

그 밤에 아이들의 울음 소리가 들려옵니다.

그러자 아이가 갑자기 울음소리가 그치고

어미와 아비의 울음 소리가 덮치는 겁니다.

지옥이 따로 없습니다.

장자가 다 죽더라 말이죠.

 

그런데 이런 지옥 속에서

천국처럼 찬양의 소리가 들려옵니다.

그들이 찬영 잘하는 가수라서가 아닙니다.

심지어 벙어리 임에도 불구하고 찬양이 하늘 우주까지 퍼지더라 말이죠.

아니 왜?

문설주에 흠없는 어린양의 피가 발려서입니다.

 

그 피를 보고 천사들이 넘어가버리는 겁니다.

 

이 사건을 왜 보여주시는 것일까요?

 

이 장면을 다시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는 사건으로 겹쳐서 보자 말이죠.

베드로는 자기가 직접 노래 불러서 찬양하고 싶었다 말이죠.

그래서 절대로 주님 십자가 지시면 안된다 라고 했던 겁니다.

그런데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뜨릴려고 하는도다

사람의 일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는구나

 

그 하나님의 일이 바로

너 베드로 조차도

문설주에 흠없는 어린양의 피가 발리지 않으면 안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화목제물 되셔서 피를 흘리실려고 하는데

안된다고 하니 사람의 초코파이 정만 생각 한다고 책망하신다 말이죠.

 

그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피 흘리셔서

베드로에게 발랐더니만

 

베드로가 감히 그 속에서

그 심판 속에서

마귀에게 붙잡혀와서 도저히 고개도 못드는

화로다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구나

꼬끼오 꼬끼오 꼬끼오 그 속에서

불가능한 찬양을 하는 겁니다.

이것이 베드로의 솜씨가 아닌

오히려 베드로는 정작 찬양 한번 못해본 거죠.

주님의 십자가의 피 솜씨로써

그 불가능한 상황 속에서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잘 아십니다 라고

세 번 씩이나 찬양을 하더라 말이죠.

이것이 찬양이 덮쳐진

찬양으로 태어난 자 이다 말이죠.

 

죄는 골프 친다고 죄가 되는 것이 아닌

죄가 인간을 다루듯이

찬양을 인간이 부를수 있다고 해서 찬양이 아니라

정반대로 찬양이 인간을 다루니까

찬양자로 태어나는 겁니다.

묵시맨 이다 말이죠.

역사맨이 아니라

 

그래서 부르게 된 찬양입니다.

찬양으로 인해 새롭게 태어난 자이기에

감히 바로 옆에는 지옥처럼 울고불고 하는데

오히려 자신들은 찬양에 의해 태어났기 때문에

그 상황 속에서 뻔뻔스럽게 너끈히 찬양하더라 말이죠.

 

그 생지옥에서

말이죠.

 

신나게 어린양의 피를 찬양하는 겁니다.

 

?

 

(43:21, 개역)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여호와를 위하여 새로 지음받은 주의 찬송을 부르게 하기 위함이기에

내가 내 것이 아니라

나는 여호와의 것으로 태어났기에 말이죠.

예수님의 것으로 태어난 예수님의 것이기 때문에

다들 울고불고 하는 그 속에서

찬양을 하는 겁니다.

 

그러니 찬양은 그야말로 엽기적인 겁니다.

행함이 있는 믿음은

성화론자들이 말하는 그런 사기치는 내용이 아닙니다.

행함이 있는 믿음은

반대를 위한 반대

부정의 부정처럼

 

남들 다 생지옥을 격고 있을때에

혼자 천국을 신나게 누리고 있는 겁니다.

 

이것을 차이라고 합니다.

동일성이 아니라

하나가 아니라

여럿 곧 차이 곧 무시받는 튀는 행동이 되는 겁니다.

죽을려고 환장한

이질적인 것은 집단에서 배제 되거든요.

역사는 묵시를 배척하고

묵시는 역사를 배격한다 말이죠.

 

서로의 소욕을 못하도록 합니다.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 신약에서는 새이스라엘 곧 일곱교회

곧 예수 안에 있는 자 이다는 겁니다.

자기가 예수 안에 들어가고 싶어서가 아니라

주님이 일방적으로 사랑하신 자입니다.

 

그러니 말도 안되는

남들 다 생지옥 격을때에

자기 혼자 천국을 누리면서 어린양을 찬양하는 겁니다.

 

마치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해 놓고서는

찬양은커녕 죄책감에 가룟유다처럼 자살을 천번 만번해도 모자랄 판국에

도리어 뻔뻔스럽게 찬양 아니하고는 못 배기는

베드로의 기능인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이 더 잘 아시면서 왜 저러실까앙 ~~

이라고 노래하는 겁니다.

이것이 행함이 있는 믿음이다 말이죠.

즉 예수님이 피 바른 피의 효과로써

베드로는 그 피로 인한 증상물인 겁니다.

피를 발랐으니

피 바른 효과가 바로 찬양입니다.

 

감기 걸리면 감기는 눈에 안보이는데

그 증상물인 콧물이 찔찔 나오는 것을 통해서

아 감기 걸렸군 이라고 알 듯이

 

피가 발린 자는

즉 행함이 있는 믿음으로 거짓말로 이스라엘을 정탐군을 숨겨주고

피가 발린 자는 즉 행함이 있는 믿음이 들어간 자는

그 증상으로 아들 이삭을 바치더라 말이죠.

 

그러니 아무도 아들 바치는게 아닙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독생자 아들을 화목제물로 삼으신

너희가 사랑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사랑함으로 내어주신 겁니다.

그 아들 또한 이삭 곧 이스마엘이 아니다 말이죠.

오늘날 이거 흉내낸다고 다들 이삭은 없으니까 바칠수도 없으니

행함이 있는 믿음 있는 티를 낼려고 성화론자들이 이스마엘을 바치는 식으로

행하더라 말이죠.

 

아니 그렇게 자칭 똑똑하고 공부 많이 했고 학력을 자랑하는 그런 놈들이

왜 그런 멍청한 짖을 하면서까지

오히려 그 바보 같은 짖을 한 것을 자랑하더라 말이죠.

강도가 강도짖을 자랑하듯이 말이죠.

 

대학 나온게 아깝다 말이죠.

 

그러니 차라리 그들과 복음 나눌빠에

물론 나눌려고 하지도 않을뿐더러 그저 한 수 가르칠려고 할 뿐이니

대화 자체가 안되니

차라리 교회 밖의 사람들이 더 잘 통하더라 말이죠.

 

강도의 소굴이 아닌 교회가 없어요.

만약 그런 교회 있으면 제발 좀 알려달라 말이죠.

 

없어요

존재하지 않아요

그러니 아예 기대하지 말고

어차피 존재는 없으니

기능을 보자 말이죠.

 

교회란 즉 예수님의 이 피를 찬양하는 겁니다.

 

마치 누구처럼

강도의 소굴에서 상을 엎어버리고 양과 비둘기를 쫏아내는 예수님처럼 말이죠.

 

그러니 눈에 보이는 교회에서 이런 행동 해보세요

행함이 있는 믿음을 펼쳐보라 말이죠.

어딜 감히 하나님의 기도하는 집에서

예수님의 피만을 찬양하지 않고

인간의 성화됨을 자랑하냐 말이죠.

 

결국 예수님이 쫏겨나고

예수님이 죽임을 당하시는 겁니다.

 

이런 우리의 모습

예수님을 쫏아내고

강도의 소굴을 사수할려고

성전을 헐고 사흘만에 짖는자여 라고 예수님을 비아냥거리면서

조롱했던 우리의 모습을 까발려 주는 이 예수님을 찬양할 수 있겠냐 말이죠.

 

이 불가능한 찬양을

부으셔서

우리가 이 찬양에서 태어나서

이 십자가에서 태어나서

감히 뻔뻔스럽게

제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라고

 

남들은 생지옥을 격고 있는 가운데서

장자의 재앙 속에서

심판 속에서도 불구하고

 

감히 찬양하는 겁니다.

 

아랑곳 하지 않고 뻔뻔스럽기 짝이 없이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잘 아십니다 라고 말이죠.

 

오로지 십자가의 피만 밝히 보이는 피를 향해 서서

손을 높이 들고 주를 찬양 하는 겁니다.

 

여디디야 여디디여 여디디야 라는 선물 보따리를 풀면서 노래하는 겁니다.

 

 

송축하라 여호와의 종들아

주님 집에 거하는 자들아

성소 향해 손을 들고서

찬양하라 찬양하라 라고 말이죠.

 

 

이미 주님의 사랑은 넉넉하게 다 이루었기에
마음 푹 놓고서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더 잘아십니다 라고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지 3초도 되지 않고서도

뻔뻔스럽고 당당하게 전혀 주눅들 필요 없이 외치는 겁니다.

 

참으로 뻔뻔스럽기 짝이 없는 찬양을 말이죠.

 

(21:15, 개역)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21:16, 개역) 또 두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양을 치라 하시고

(21:17, 개역) 세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

 

 

이 간극(3일의) 이 저들에게 없는

밤 마다 주의 성실하심으로 인해 홈패임을 당한

십자가의 흔적, 그 틈, 그 간극에서 태어난 찬양자 입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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