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태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하리라 (시편 128)


(128:1, 개역)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도에 행하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128:2, 개역)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

(128:3, 개역) 네 집 내실에 있는 네 아내는 결실한 포도나무 같으며 네 상에 둘린 자식은 어린 감람나무 같으리로다

(128:4, 개역)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이같이 복을 얻으리로다

(128:5, 개역)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실지어다 너는 평생에 예루살렘의 복을 보며

(128:6, 개역) 네 자식의 자식을 볼지어다 이스라엘에게 평강이 있을지로다


(23:26, 개역) 저희가 예수를 끌고 갈 때에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이 시골로서 오는 것을 잡아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를 좇게 하더라

(23:27, 개역) 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 오는지라

(23:28, 개역)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23:29, 개역) 보라 날이 이르면 사람이 말하기를 수태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하리라

(23:30, 개역) 그 때에 사람이 산들을 대하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며 작은 산들을 대하여 우리를 덮으라 하리라

(23:31, 개역) 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 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 하시니라



종말때에는 모든 가치관이 전도 됩니다. 뒤집어져서 전복됩니다.

즉 다들 부러워 하던 복있는 사람이 종말때에는 저주의 사람이 되고

다들 저주의 사람이라고 손가락질 해서 왕따 당하던 사람이 복의 사람이 되는

팔을 어긋맞게 되는 상황이 되는 겁니다.

 

마치 교회 다니던 사람이 종말때에는 강도의 소굴을 다녔던 것이 드러나고

강도 취급 받던 자들이 종말때에는 천국에 먼저 가게 되더라 말이죠.

 

창기와 세리(매국노 배신자)가 먼저 천국에 간다 말이죠.

 

(21:31, 개역) 그 둘 중에 누가 아비의 뜻대로 하였느뇨 가로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분명 시편 128편에 의하면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복을 받아

자식의 자식을 얻는다 말이죠.

 

그런데 신약에서는 정반대로

여호와를 경외하지 않던 개같은 이방인이 구원받고

수태치 못한 자와 세리 창기들이 먼저 천국에 가게 되니

이거 어찌된 일일까요?

 

정작 여호와를 경외했던 유대인들은 왜 사단의 회로써 지옥에 가게 되는 것일까요?

 

분명 어렵고 불가능한 해석불가의 내용이지만

정작 예수님의 활동

곧 인간의 활동이 아니라

예수님의 활동을 통해서 보시면 무지 무지 쉽습니다.

 

어떻게?

분명 여호와를 경외했던 유대인인데

그래서 어릴적부터 율법을 다 지켜왔다 말이죠

누가? 유대인 부자청년이 말이죠.

그런데 혹시 부족한 것 있으면 말씀만 하소서 당장 지키겠다고

예수님 앞에서 자신만만했다 말이죠.

? 그 동안 지켰으니까

지키는 것에는 자신만만 할 수 밖에요.

무엇을 지켰냐?

여호와를 경외했음을 말이죠.

 

그런데 예수님의 입장에서는

부자청년이 말하는 여호와가 그 여호와가 아니다는 겁니다.

그럼 누구? 마귀다 라는 겁니다.

그래서 그거 알려줄려고

그럼 전 재산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라 라고 했습니다.

? 여호와를 경외했다고 하니까

그래서 어릴적부터 다 지켰다고 했으니까

왜 어릴적부터 다 지켰을까요?

여호와를 경외하니까 말이죠.

 

그럼 지켜야 할 것 아닙니까?

그런데 갑자기 아이고 배야 라고 배가 아픈겁니다.

율법은 지키라고 준게 아니라

갇혔다 라는 것을 알려주고자 준 것이다 말이죠.

그러니 예수님은 오로지 마귀만을 상대하시는 이유가

그래서 부자청년을 상대하시는 겁니다.

마귀를 섬겨 놓고서 여호와를 경외했다니 웃끼는 소리다 말이죠.

 

시편을 달달 외웠다면

시편 속의 원수가 누구인가를 봐야 하는데

원수 문제를 빼놓고서 보니까

그 원수를 경외하더라 말이죠.

 

분명 다윗은 이 원수 문제를 거쳐서 시편을 기록했거든요.

그런데 정작 유대인들은 이런 다윗이 말한바의 취지를 다 무시하고

시편대로 지켜버리니까

시편 자체가 율법이 되어버렸지

시편이 말하고자 한 오직 예수님은 전혀 안 보이는 겁니다.

시편 백날 들따 봐도 예수님이 안나와요

그런데 시편 기자인 다윗은 예수님만 기록했다 말이죠.

 

도대체 왜 이런 문제가 생기는 것일까요?

 

그래서 예수님이 복음전파를 증거하기 전에

마귀의 세가지 시험을 거치시는 이유는

마귀가 유대인 곧 모든 인간의 대표성이지요.

모든 인간과 세상을 장악한 것을 들추어내어놓고

복음을 시작하는 겁니다.

 

그러니 주님은 인간이 아무리 시편을 날고 기고 해서 다 지켰다고 해도

마귀에게 장악당한 자로 보고 있는 겁니다.

인간을 말이지요.

인간은 그런 예수님의 시선에 반발합니다.

우리를 무시하지 말라고 말이죠.

그러나 예수님은 모든 인간은 마귀에게 이미 갇혀있는 상황으로 보시기 때문에

복음의 시작이 바로

갇힌 자를 끄집어내는

포로된 자를 자유케 하는

억눌린자를 놓아주시는

 

마귀에게 빼앗는 전쟁을 홀로 시작하시는 겁니다.

 

그럼 그런 예수님의 활동이 의미가 있다면

나는 갇힌 상태이다는 것을 예수님의 활동을 통해서 알게 된다 말이죠.

 

그런데 그 앞에서 나는 건강한 자입니다. 의인입니다.

나는 어릴적부터 율법 다 지켰습니다 라고 우기고

십의 이조 이레에 두 번 금식했다고 우기는 것은

 

나는 절대로 마귀에게

또는 죄 에게 갇힌 바 없다고 주장하는 셈과 동시에

 

나는 의사 필요 없는 건강한 자

나는 구원자가 필요 없는 의인 이렇게 되니

 

누구를 무시하는 겁니까?

의사 되신 예수님을 무시하고(환자를 치료하는)

구원자 되신 예수님을 무시하는 것이다 말이죠.(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음을 무시하는)

그런데 오늘날도 마찬가지 이다 말이죠.

예수님의 기능 때문에 우리는 늘 죄인인데

성화론이니 뭐니 개혁주의니 뭐니 하면서

졸지에 죄인이 없어요 죄인

환자가 없다 말이죠.

 

그럼 예수님은 뭐가 되냐 말이죠

 

다행이 교회 바깥에 너무 너무 많더라 말이죠.

유대인 바깥에 너무 너무 많더라 말이죠.

 

분명 예수님은 유대인 외에는 보내심을 받지 않았다 말이죠.

그런데 유대인이 없어요.

자칭 유대인은 많으나 사단의 회일 뿐이고

주님이 찾으시는 잃어버린 양 이 없더라 말이죠.

 

유대인은 곧 잃어버린 양의 기능이어야 하는데

유대인 존재들만 가득할 뿐이지

기능은 없고 껍데기만 유대인들 새때까리 이더라 말이죠.

 

그러니 그런 가짜 유대인들이 늘 내세우는 것이

십의 이조를 드렸다는 둥

이레에 두 번 금식했다는 둥

그딴거 주장하더라 말이죠.

성화론자들이 쪽팔려서 십의 이조를 해야하고

이레에 두 번 금식해야 하고

막살지 않아야 하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우기더라 말이죠.

 

그런데 왜 앉은뱅이 귀머거리 문둥병자를 왜 고치지 못할까요?

멀리서 말고 가까운 이웃의 장애인을 왜 못 고칠까요?

그거 하나만으로도 가짜다 말이죠.

못 고치면 다행이게요?

정반대로 정죄를 합니다.

저들은 저주를 받아서 라고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기껏 말씀 지킨 결과의 고백이 이것이 인간의 속내이다 말이죠.

저 세리 매국노와 같지 않음을 감사한다고

저 딴나라당 친일파와 같지 않음을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저 순실이당 최순실과 같지 않음을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주님 보시기에 다 최순실인뎅?

 

그 어떤 누구도

종말 속에서

자신의 의로 살아남을 수 있는 자는 없다 말이죠.

다들 모래 위에 짖는 집을 지어놓고서

반석이라고

여호와이시다고

경외했다고 우기던데

종말에 바벨론 속에 집어 넣으니

 

다들 그 저주에서 한 발치도 벗어날 자가 아무도 없더라 말이죠.

 

그래서 주님께서 잃어버린 자를 찾으러 왔는데

아무도 없어

유대인 외에는 보내심을 받지 않았는데

유대인이 없다 말이죠.

 

우야다가 길을 잘못 들어서 이방인의 지역에 가다가

거기서 귀신들린 딸의 어미를 보고

드디어 찾던 유대인을 곧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았더라 말이죠.

천군 천사들이 난리가 났다 말이죠.

빵빠레를 울리면서 퍼레이드를 벌린다 말이죠.

 

99마리 양을 버리고

잃어버린 양 한 마리 찾은

그 잃어버린 양 한 마리의 고백이 뭔고 하니

 

주여 저 개 맞습니다. 그러나 개도 주인의 밥상에서 떨어진 부스러기를 먹지 않습니까

불쌍히 여겨 주소서 라고 하더라 말이죠.

 

아니 유대인에게서 나와야 할 고백이

오늘날 교회 다니는 사람에게서 나와야 할 고백이

정작 아무도 교회 다니는 사람에게서는 안 나오고

 

길을 잘못 들어서 절대로 교회 구역에 얼씬도 못하도록 경계치여진 자인

교회 밖의 도저히 갱생불가인 쓰레기 같은 인간이

 

교회 다니는 인간들 속에서 나올수 없는 고백을 하더라 말이죠.

 

주여 저 쓰레기 맞습니다.

그러나 그 쓰레기도 주님이 먹이시지 않습니까?

불쌍히 여겨주소서 라고 말이죠.

 

유쾌한 정숙씨가 배고프다고 외친 여인에게 왜 배고프냐고 밥 먹고 가라고 해서

같이 밥 먹으러 집에 들어가자 했다 말이죠.

 

배부른 아흔 아홉의 양에게는 유쾌한 정숙씨가 필요 없다 말이죠.

유쾌한 정숙씨는 오로지 잃어버린 양 한 마리에게만 필요 하다 말이죠.

그래서 유쾌함이라는 기능이

잃어버린 양 외에는 보냄을 받지 않았다 말이죠. 누구?

99마리에게는 필요 없는 유쾌함이다 말이죠.

 

국민 취급도 못받는

백성 취급도 못받는

그런 자를 위해서

유대인의 왕은 왔는데

유대인들은 그를 죽이는 겁니다.

 

결국 종말 자체가 인물 곧 왕이다 말이죠.

종말이 오면 진짜 실상이 제대로 보이는 겁니다.

그 동안 복된자라고 여겨졌던 자들이 저주의 사람이였고

그 동안 저주의 사람으로 취급받던 자들이 복된 자

 

곧 수태치 못한 자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라고

누가 이야기하냐 하면

그 동안 자신들이 유대인이라고 복 받은 자라고 여겼는데 알고보니 저주받았다고

아이고 오히려 너희 저주 받은 자가 복 받은 자네 라고

구체적 보편성의 현실을 외치더라 말이죠.

 

그것만 외치는게 아닙니다.

나는 이렇게 저주 받는구나 라고 외치는데

그 내용이 산들이 우리 위에 무너지고 작은산들이 우리를 덮어버릴 것이다 라고

그들 스스로가 자기가 당할 저주를 스스로 말하게 된다 라는 겁니다.

 

(23:30, 개역) 그 때에 사람이 산들을 대하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며 작은 산들을 대하여 우리를 덮으라 하리라

(23:31, 개역) 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 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 하시니라

 

자 이것은 흔히 종말을 다룬 영화를 보면 어떻게 해서든 살아 볼려고

남을 죽여서라도 자기가 살려고 한다 말이죠.

? 기능성을 조금이라도 있다고 보고 희망을 가지니까 말이죠.

 

그런데 성경의 종말은 그게 종말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저주가 덮쳐진다고

아예 희망은커녕 절망 뿐인

종말이 이런거란다 라고 스스로 종말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니 종말을 다룬 영화 속의 재난과는 족히 비교도 안된다 말이죠.

 

아무리 재난이 닥쳐도 영화는 스크린을 찢고서 영화를 보는 자신에게 덮쳐지지 않는다 말이죠.

 

실제로 일어났다고 하던데

영화관에서 영화가 총을 쏘고 막 죽이는 장면이 나왔다 말이죠.

그런데 그때 타이밍에 맞게 누가 영화관에서 총을 쏴서 막 죽이더라 말이죠.

 

그러니 사람들은 그 총소리와 영화 속의 총소리와 같으니까

아무도 피하질 않는다 말이죠.

 

그럼 어떻게 되겠습니까?

고대로 산들이 자기 머리 위에 무너지고

고대로 작은 산들이 자기에게 덮치는 겁니다.

 

총알들이 자신에게 박혀도

피하지를 못하고

아 나는 총을 맞았구나 라고

그 때 사람들이 다들 그렇게 말을 한다 말이죠.

뻔히 피할수 있는 상황인줄 알았는데

다 알고도 뻔히 그대로 당하는 것을

자기 스스로 자기 폰으로 리얼 생방을 하더라 말이죠.

 

그것처럼 끔찍한게 어디있겠냐 말이죠.

 

즉 이것은 이것과 같다 말이죠.

분명 종말을 피할려고 어릴적부터 여호와를 경외하면서 율법을 다 지켜왔다 말이죠.

그런데 예수님 앞에서 무엇이 더 부족한지 말씀만 하시라 당장 지키겠습니다

아 그래? 그럼 전 재산을 가난한 자에게 다 나누어 주어라

 

라고 예수님은 너 총 맞은 자야

넌 강도 만난 자야

내가 선한 사마리아인이야 라고 이야기 하시는데

 

아 그럼 난 강도 만난 자이구나

이래 생각하면 되는데

예수님의 취지를 문자 그대로 말씀 그대로 지킬려고 하다 보니

그 버릇에 자기가 쳐놓은 올무에 자기가 걸려들더라 말이죠.

자기가 자기 스스로를 저주해 왔던 겁니다.

 

본인은 그게 복이였다고 본 거죠.

주님은 죄 아래 가두기 위함인데

그럼 죄인입니다

주여 불쌍히 여겨주소서 라고

 

유대인만 알아 먹는 이 표현을

자기 스스로가 욕하고 저주했던 개같은 이방인이 알아 먹는 식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니까

 

아 도저히 못 하겠다고 등 돌리고 돌아서는 겁니다.

아니 그 부자청년만 그럴까요?

그 한 사람은 유대인 대표성입니다.

유대인 모두다 그런 사고방식임이 들통난 겁니다.

 

그럼 유대인은 모든 인간의 대표성이니

모든 인간이 다 그런 입장인 겁니다.

 

그럼 누가 구원 얻겠냐 라고

제자들이 한 말이 맞다니깐요.

 

아무도 없지 않느냐 말이죠.

그런데 있더라 말이죠.

주님이 방금 막 쪄낸 찐빵이 있더라 말이죠.

말씀으로 인해 방금 어머니 뱃속에 들어갔다가 나온 사람이 있더라 말이죠.

 

율법을 지키고

말씀을 지키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서는

도저히 말도 안되는 불가능한 일이

어머니 뱃속에 들어갔다 나와야 하냐 라고 말도 안되는 말이다고 보고 있는 자들에게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

 

예수님에게서는 나타나더라 말이죠.

 

그들은 실천 안하면 안나타나는 줄 아는 율법 세계에서

실천하지 않아도 나온 은혜의 세계를 주님은 참으로 뻔뻔스럽게 보여주시더라 말이죠.

 

그게 바로 반칙이다 말이죠 반칙

 

전 재산을 가난한 자에게 나누워 줄 필요가 없어요.

?

아무도 부자가 없다 말이죠.

유일한 부요하신 분은

곧 주시는 분은 딱 한 분 뿐이다 말이죠.

 

그래서 불쌍히 여겨주소서

즉 한 푼 줍쇼 나는 받기만 할 뿐입니다 라고

저는 가난한 자입니다 라고 하면 되는

아주 쉬운 문제를

 

뭐가 어려워서 등돌리고 도저히 못 푸는 숙제이다 라고 돌아서서 가냐 말이죠.

 

부자 라는 것 손 놓으면 본인이 가난한 자인데

어릴적부터 율법 다 지켰다 라는 것을 손 놓으면

본인이 율법의 완성이신 예수님으로부터

율법의 완성인 사랑 곧 긍휼을 얻는 자가 되는데

 

주님은 받으시는 분이 아니라

주시는 분인데

 

자꾸 뭘 드렸다 라고 우기니까

손 놓지 못하니까

 

받으면 될 문제를

자기가 드릴려고

지킬려고

경외할려고 하니

 

완전 웃끼는 짖을 하더라 말이죠.

 

그런데 이런 진짜 웃싸꺼리를

교회 다니는 사람들을 보면 기도 안차요.

 

주님 보시기에 다 최순실이요 박그네요 창녀요 세리인데

다들 마귀가 구성한 세계를 추구하다 보니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하니

그 하나님이 결국 마귀가 구성한 세계에서의 하나님이기에

마귀를 보고 감사하데 글쎄

 

차라리 주여 이 마귀에게서 저는 도저히 못 벗어납니다 해야 할 판국이다 말이죠.

 

베드로 보세요 사단아 물러가라 너는 사람의 일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는다 라고 욕먹잖아요

 

사도바울 보세요 죽자고 예수쟁이들 다 죽이겠다고 덤벼들었다 말이죠.

 

그런 자도 안되는 판국인데

철저하게 갇혀서 마귀에서 못 벗어나는 판국인데

 

우리까짓꺼 아무것도 아니잖아요.

 

그런데 뭐 성화 하면 된다고?

그거 돈 노리는 겁니다.

 

삥뜯을려고 똥파리들이 날라들잖아요

돈 없으면 절대로 안 날라와요.

 

그러니 애초부터 차라리 주여 저는 수태치 못하는 자입니다.

해산하지 못한 배 일 뿐입니다.

단 한번도 젖을 물려 본적이 없는 자 일 뿐이다 라고

 

제가 저주 받은 자입니다.

오직 당신만이 복된 분입니다 라고 해야 할 판국 아니냐 말이죠.

 

당신 만이 주인이시오

저는 개 맞으니 주인의 밥상에서 떨어진 부스러기를 먹지 않습니까 라고 해야할

유대인이어야 하는데

 

개같은 이방인이 그 말을 하고

정작 유대인들은 개같은 이방인 짖만 골라서 하더라 말이죠.

 

팔을 어긋맞게 뒤 바뀌는 겁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애초부터 99마리 양을 버리고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으시는 겁니다.

 

여기서 991은 묵시의 숫자화입니다.

즉 상대적인 역사의 숫자개념을 의도적으로 차이내면서 말이죠.

도저히 우리는 99를 무시할수 없고 1은 무시해도 상관이 없는데

예수님은 오히려 우리가 도저히 무시할수 없는 99은 아주 당연히 무시해 버리고

1은 절대로 도저히 무시하지 않으시는 겁니다.

 

누가 전 재산을 무시해서 다 가난한 자에게 주겠습니까?

991에게 마땅히 주겠습니까?

 

우리는 정반대로 199에게 줄려고 한다 말이죠.

 

그래서 율법 네 배나 갚으라 라고 외치는 겁니다. 누가? 다윗이 말이죠.

그것이 바로 가난한 자의 유일한 한 마리 딸같이 여기는 양 한 마리를 빼앗아

부자가 자기의 살진 양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손님에게 대접했다 말이죠.

 

율밥 지키는 곧 말씀 지키는 자의 모습이 바로 이거다 라는 겁니다.

 

다윗이 이것을 거쳐 봤거든요.

 

어떤 신학자는 그 손님이 마귀라고 했다 말이죠.

마귀라는 손님을 대접할려고 가난한 자의 유일한 전 재산인 양 한 마리를 빼앗아서 대접한 겁니다.

 

다윗 니가 율법 4배나 갚으라 라고 하는 그 사고방식이 바로

여호와를 경외해서 율법 4배나 갚으라가 아니라

마귀를 경외해서 율법 4배나 갚으라 라고 외치는 것이다 라고

지적 받는 겁니다.

 

바로 그런 세계에서 빼내실려고 주님께서 오셨다는 겁니다.

그러니 다윗은 다른 여호와를 봐야 할 판국이다 말이죠.

전혀 다른

마치 베드로가 물 위를 걸었을때의 예수님과

물에 빠져 죽게 되었을때에 건져주신 예수님을 달리 보듯이

 

내 쪽으로 끌어들일수 없는 전혀 낯선 예수님을

주여 당신 도대체 누구십니까?

내가 알던 그분 아닌 것 같은데요?

라고 마귀를 거쳐서

죽음을 거쳐서

죄를 거쳐서 보게 되는 예수님은

전혀 다른 예수님이시듯이

 

다윗은 비로소 예수님의 때를 바라보더라 말이죠.

즉 이 말은 자기는 된다 안된다?

자기는 구제불능이다는 겁니다.

 

즉 개 맞습니다 개

쓰레기 맞습니다 쓰레기

부스러기 맞습니다 부스러기

 

이것은 잃어버린 양을 찾는 예수님을 만났을때에 나오는 고백이지

 

겸손해서 자기를 낮추어서가 아니다 말이죠.

그것은 독자적인 것이고

존재이고

 

기능은 예수님이라는 인물을 만나지 못하면 절대로 나올수 없는

예수님이 의사이기에 나는 환자입니다 라는 관계성의 언어이다는 겁니다.

기능이다 말이죠.

의사라는 기능 때문에 나타나는 증상물이 환자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다윗은 이 시편을 이 시편 128편을 예수님을 보고 외치는 고백인데

유대인은 지킬려고 하니

율법 4배나 갚으라 라는 사고방식에서 보게 되니

 

예수님을

시편 그대로 오신 예수님을 영접할 수가 있을까요?

 

당연히 영접 못하는 겁니다.

 

도저히 안되요

 

중간에 막힌 담이 있는 겁니다.

지키면 지킬수록 담벼락이 허물어지는 평화가 아니라

 

오히려 더더욱 높이 세워지는 꼴이다 말이죠.

 

마귀가 중간에 가로막고 있는 겁니다.

 

그 마귀를 넘어서 오시는 방식이 바로

율법 외에 한 의가 나타나심인데

그 의로움이 바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이다 말이죠.

 

바리새인을 넘어서 오시는 겁니다.

? 바리새인 보다 낫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가거든요.

마귀 보다 나아야 천국에 갈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말씀을 지키면 지킬수록 마귀가 더 높이 가로막는데?

내 스스로가 마귀에게 장악당하다 보니 중간에 막힌 담을 더더욱 높이 세워요

지도 담을 못 넘어가고 남도 담을 못 넘어오는 겁니다

 

유대인이 쳐놓은 경계선이 마치 트럼프가 쳐놓을려는 멕시코 담벼락처럼

너도 넘어갈 생각 말고

나도 넘어갈 생각 안하겠다는 완악한 수건을 벗지 않더라 말이죠.

 

아 그런데

율법의 완성인 사랑은 막 타넘어요

 

율법 아래에 갇힌 자는 타넘지를 못하는 자유가 없는데

자기가 자기 스스로 옭아매는 옥죄처럼 자기 스스로의 꾀에 걸려 올무에 걸려들었는데

 

율법의 완성인 사랑은 자유자재로 담을 타넘더라 말이죠.

그래서 아예 못 타넘도록 더 높이 막 세우는데

그것도 아랑곳 하지 않고 막 타넘으니까

아예 죽여버리는 겁니다.

죽으면 죽음에서 못 일어날줄 알았는데

죽음도 막 타넘더라 말이죠.

 

음부의 권세가 이기질 못하더라 말이죠.

 

자 누가 진짜 복있는 자 입니까?

 

예수님을 수태치 못하게 만들어 버리겠다고 했는데

예수님의 자녀가 왜이리 많은지?

 

맞습니다 구체적 보편성입니다.

 

예수님을 해산하지 못한 배로 만들어 버리겠다고 죽여버렸는데

오히려 한 알의 밀알이 떨어져 죽게 되니 많은 열매를 맺더라 말이죠.

 

(12:24, 개역)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행하고 실천하고 지키는 세계에서는 있을 수 없는 정반대의 일이죠.

 

예수님이 젖 한번 물려서 우리를 먹이지 못하고 죽으심을 당해 버렸지만

오히려 예수님의 말씀이 다가와 우리는 단 한번도 지킨적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를 늘 먹이시더라 말이죠.

말씀이 우리를 인도해요

어두운 밤 길을 스마트폰의 손전등과 같다 말이죠.

얼마나 밝은지 눈이 부셔요 눈이 부셔

뿌쎠 뿌셔

 

햋빛 보다 더 밝다 말이죠.

 

이렇게 십자가가 또렷하게 밝히 보이는데

누가 꾀면서 다른 길이 있다고 우기냐 말이죠.

뭐 성화론? 개혁주의

여러분 이거 다 거짓말인 거 아시죠 ~~~ ㅋㅋ

 

그것들은 나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은적이 없다 말이죠.

 

내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은 분만 쳐다 보자 말이죠.

 

그분이 종말이 그 자체입니다.

 

끝을 미리 앞당겨서 사는 겁니다.

 

 

자 이렇다 보니 저들은 돈이 안 나올까봐 싶어서

죄 죄 죄 고만좀 캐라 라고 하는 겁니다.

 

죄를 존재로 본 겁니다.

그러니 죄인이라는 존재가 될까봐
의인이라는 존재가 못 될까봐

교회라는 존재가 운영이 안될까봐
회원들이 다 나가버릴까봐

믿음이 없으니까 전전긍긍하는 겁니다.

 

어디까지나 기능인데 말이죠.

 

그래서 희망을 주고 가능성을 주고 개방적인 소통이 되어야

장사가 되는데

 

절망을 주고 종말이를 주면

돈 나올 구석이 어디있냐 말이죠.

 

그러니 돈 줄 생각 말고

돈 받을 생각만 하세요

예수님은 내 죄 값을 대신 치르신 겁니다.

주시는 분이시지 받는 분이 아니십니다.

 

내 대신 십자가에 죽지 않은 것에 눈 돌리지 마세요

 

늑대가 마귀가 후 불면 다 날라가는 모래 위에 지은 집입니다.

 

자식이란 종말 속에서 등장합니다.

 

아무리 후 하고 불어도 끄떡없는 반석이요 기업입니다.

 

다윗이 왜 다윗의 자손에서 주여 아버지여 라고 했습니까?

죽었다가 삼일 만에 살아난 자손 만이 유일한 기업이기 때문에 반석이기 때문입니다.

 

요셉을 그래서 은 30냥에 팔려 죽이시는 겁니다.

다시 살아나서 죽은 형제들을 살리기 위해서 말이죠.

주여 아버지여 라고

야곱이라는 아버지를 살리는 자식 곧 아버지입니다.

아버지가 자식에게 어떻게 아버지여 라고 할 수 있냐 말이죠.

 

그것은 후 불면 압니다.

다 날라가거든요.

종말이다 말이죠.

 

그러니 말씀 지킬 생각 마세요 후 불면 다 날라갈 뿐입니다.

제발 다 날라가서 후 불어도 끄떡 없는

자식과 같은 기업

기업과 같은 자식 곧 후손에게 아버지여 라고 불러라 말이죠.

그가 바로 선지자이신 예수님입니다.

 

괜히 여호와를 경외했다고 우겨본들

여호와의 도를 행했다고 우겨본들

후 불면 다 날라가는 것인데

왜 자꾸 지켰다고 우기냐 말이죠. 순 엉터리인데

그래서 완악해 질 뿐입니다.

 

그러니 정반대로

말씀이 어떻게 나를

오늘도 어떻게 나를 다루는지를 누리시길 바랍니다.

 

뭘 해도 다 죄 뿐이기에

 

뭘 해도 감사요 기쁨이요 찬송 뿐입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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