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수의 목전에서 베푸시는 십자가의 피 흘리심 (시편 141)

14-141 원수의 목전에서 베푸시는 십자가의 피 흘리심 (시편 141편).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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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5, 개역)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23:5, 새번역) 주님께서는, 내 원수들이 보는 앞에서 내게 잔칫상을 차려 주시고, 내 머리에 기름 부으시어 나를 귀한 손님으로 맞아 주시니, 내 잔이 넘칩니다.

(23:5, 공동) 원수들 보라는 듯 상을 차려주시고, 기름 부어 내 머리에 발라주시니, 내 잔이 넘치옵니다.

(23:5, 쉬운) 주님께서 원수들이 보는 앞에서 내게 식탁을 차려 주십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내 머리 위에 향기로운 기름을 바르시며 내 잔이 넘치도록 가득 채워 주십니다.

(23:5, 킹흠정) 주께서 내 원수들의 얼굴 앞에서 내 앞에 상을 차리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시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23:5, 현대인) 주께서 내 원수들이 보는 가운데 나를 위해 잔치를 베푸시고 나를 귀한 손님으로 맞아 주셨으니 내 잔이 넘치는구나.

(23:5, 현대어) 원수들 두 눈 뜨고 쳐다보는데 보란듯 이것 앞에 잔칫상 차려 주시고 귀한 손님 대접하듯 기름 발라주시며 잔이 흘러 넘치라 하고 부어 주시네.

 

 

(141:1, 개역) [다윗의 시] 여호와여 제가 주를 불렀사오니 속히 내게 임하소서 내가 주께 부르짖을 때에 내 음성에 귀를 기울이소서

(141:2, 개역)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분향함과 같이 되며 나의 손드는 것이 저녁 제사 같이 되게 하소서

(141:3, 개역) 여호와여 내 입 앞에 파수꾼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

(141:4, 개역) 내 마음이 악한 일에 기울어 죄악을 행하는 자와 함께 악을 행치 말게 하시며 저희 진수를 먹지 말게 하소서

(141:5, 개역) 의인이 나를 칠지라도 은혜로 여기며 책망할지라도 머리의 기름 같이 여겨서 내 머리가 이를 거절치 아니할지라 저희의 재난 중에라도 내가 항상 기도하리로다

(141:6, 개역) 저희의 관장들이 바위 곁에 내려 던지웠도다 내 말이 달므로 무리가 들으리로다

(141:7, 개역) 사람이 밭 갈아 흙을 부스러뜨림 같이 우리의 해골이 음부 문에 흩어졌도다

(141:8, 개역) 주 여호와여 내 눈이 주께 향하며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내 영혼을 빈궁한 대로 버려두지 마옵소서

(141:9, 개역) 나를 지키사 저희가 나를 잡으려고 놓은 올무와 행악자의 함정에서 벗어나게 하옵소서

(141:10, 개역) 악인은 자기 그물에 걸리게 하시고 나는 온전히 면하게 하소서

 

 

(23:1, 개역) [다윗의 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3:2, 개역)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23:3, 개역)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23:4, 개역)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23:5, 개역)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23:6, 개역)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참이상합니다
. 시편 147편에서도 그렇듯이

성령이 임하면 곧 완료가 임하게 되면 부르짖게 됩니다.

즉 성령이 임하지 않으면 부르짖지 않게 된다는 겁니다.

완료가 임하지 않으면 안 부르짖는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완료도 우리가 보기에는 전혀 완료스럽지 않습니다.

부르짖는다는 것 자체가 뭔가 결핍적인 요소가 있기 때문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것이 완료래요 글쎄

전혀 완료스럽지 않은데 말이죠.

 

왜 이런 시차가 생기는고 하니

우리는 존재라서 이 벌어지는 사건을 이해할 수가 없는 겁니다.

즉 존재와 사건을 따로 따로

존재가 사건을 상대적인 대상물로 파악해서

해석하는 주체로써 존재가 사건을 대상물로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정작 완료인 사건은 바로 그렇게 해석하고 있는 존재를 쥐락펴락 다루고 있는 겁니다.

대상물이 뒤바뀐거죠.

주체는 존재가 아니라 사건이 주체로써 존재를 다루고 있는 겁니다.

 

자 여기서 우리는 뭘 해도 가짜이고 뭘해도 죄인 이유인겁니다.

죄가 곧 사건이 우리를 다루고 있는 겁니다.

바로 그런 부정한 죄 보다 더 부정한 완료가

이 죄라는 기능과 싸우고 있는 기능으로써 더 낫다 라는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결국 두 기능의 싸움에 존재는 새우등으로 끼여 있는 겁니다.

두 주인, 두 기능의 싸움에 중간에서 말이죠.

 

결국 이 사건의 등장으로 인해 우리는 하나의 숨어있는 기능을 보게 됩니다.

바로 원수입니다.

 

결국 성령 곧 완료가 무엇을 들추어내기 위해서 이런 사건을 벌리느냐

이런 부르짖음을 벌리느냐 하는 점입니다.

 

마리아가 한나와 같은 기도를 했을때에

부르짖을 때에

이미 게임은 오바 끝났습니다.

 

즉 부르짖음은 관계성입니다.

성령의 놀라운 탄식은 바로 이 관계성을 보여줍니다.

이 관계가 이미 게임오버로써 완료성을 보여줍니다.

전쟁에 나팔을 불고 전쟁 속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이것은 곧 전쟁이 이미 끝났다 라는 선언입니다.

 

아니 전쟁을 시작하기도 전에 말인가요?

네 바로 그겁니다.

 

시작 하지도 않았는데 말이죠.

계시록 보세요

아 참 나 기가막힙니다.

대부분의 계시록 해석자들은

이 사건들이 언제 벌어지냐 로 해석하는데 급급합니다.

그러다 보니

졸지에 이건 뭐 공포물이 되어버린 겁니다.

 

세계뉴스에서 무슨 전쟁이나 벌이지거나

아주 큰 자연재해가 벌어지면

자꾸 계시록을 그때서야 펴거나 생각 한다 말이죠.

종말이 가까웠다는 둥

그러니 계시록을 아예 무시하는 해석들만 하는 식입니다.

 

종말이 가까이 온게 아니라

이미 종말입니다.

계시록의 내용은 이미 다 이루어졌다 말이죠.

십자가상에서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고 선언했다 말이죠.

그럼 우리는 그 다 이루심을 누리도록 되어 있을 뿐이니

이 신나는 계시록의 나팔소리 곧 승리의 완료를 기뻐 춤출 뿐이다 말이죠.

 

그러니 완료로 보이지 않는자는 이 요한계시록은 그야말로 공포죠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푸시는 십자가의 승리를 누리지 못하는 것이 된다 말이죠.

 

이 모든 것이 원수를 겨냥한 것이다 말이죠.

승리라는 표현이 주님과 신부된 교회의 관계성에서만 벌어지는게 아닙니다.

반드시 원수 앞에서 펼쳐지는 승리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것은 이미 완료로써 벌어지는 겁니다.

즉 성령으로써만 벌어지는 일이다는 겁니다.

인간의 일 사람의 일이 아니다 말이죠.

뭔가 부족한 것처럼 사람에게 받는게 아닙니다.

오히려 주시는 분입니다. 그것도 넉넉하게, 20%(구약적인 표현으로 하면) 더 낫게 말이죠.

인간의 일은 인간이 개입하게 되면 늘 함량미달이다 말이죠.

그래서 의문으로 남게 됩니다.

계시록을 해석하는 자들이 다 함량미달인 이유입니다.

그냥 해석 포기하란 말이죠.

 

그런데 완료가 덮쳐진 자는 계시록을 해석하는게 아니라 누리도록 되어 있다 말이죠.

불 속에서 예수님과 덩실 덩실 춤추듯이 말이죠.

이것을 해석할려고 한다면 불에 타버려서 튕겨납니다.

불 속에서 남아서 춤을 못 춰요.

불이 가만히 두질 않거든요.

 

누가 가시떨기 나무에 불 붙도록 했습니까?

가시떨기 나무와 같은 모세가 무슨 수로 타버리지 않고 불 붙은 관계성을 유지할수 있냐 말이죠.

그게 바로 긍휼입니다.

그 긍휼이

그 십자가의 피 흘리심이

아니 탕자같은 우리를 조용히 창고에 가서 금가락지 살진소 좋은 옷 신발을 입히는게 아닙니다.

즉 탕자에게서의 이 초과잉인 금가락지 좋은옷 신발 살진소를 잡는 잔치는

탕자 개인만을 위한게 아니라

바로 원수를 위한 것이다 말이죠.

금가락지 좋은 옷 신발 살진소는 오로지 원수를 위한 것이다 말이죠.

원수 만이 안돼 ~~~~~~~~~ 라고 발악하면서

숨어있는 정체를 드러내면서 튀어나오는 겁니다.

아니 너 거기에 숨어있었어? 라고 말이죠.

 

원수는 무엇이 자기에게 이익이 되고 손해가 되는지를 너무 너무 잘 아는

선악의 달인입니다.

 

오로지 선악은 예수님만 알도록 되어 있는데

괜히 선악을 알아서 말이죠.

 

그래서 개작두를 대령하라 라고 했을때에

물개박수를 치면서 실소하는 겁니다.

웃음을 감출수가 없어요 글쎄

부정의 부정이지요.

 

또 금가락지를 대령하라 라고 했을때도

분노를 감출수가 없더라 말이죠

괜히 그들이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돌삐로 쳐 줄일려고 한게 아니다 말이죠.

 

제가 말씀을 지키지 마세요 위험합니다 라고 하니까

평상시 말씀을 안 지키는 자들은 물개박수를 치고요

평상시 말씀을 지킬려고 애를 쓴 사람들은 돌삐를 들려고 한다 말이죠.

 

그런데 뒤에 예수님을 죽이도록 되어 있습니다 라고 하니까

멈칫하는 겁니다.

말씀을 지키지 마세요 가 중요한게 아니라 예수님을 죽이도록 되어 있습니다 라고 하면

역시나 두 가지의 반응이 나타나는 겁니다.

평상시 말씀을 안 지키는 자들은 물개박수를 쳤듯이

도대체 이 말씀 안지키는 것과 예수님의 죽음이 무슨 상관이냐 라는 거죠

또 평상시 말씀을 잘 지킬려고 애를 쓴 사람들이 돌삐를 들어 쳐 죽일려고 하다가

? 예수님을 죽인다고? 그래 예수가 마침 옆으로 지나가고 있네

과연 이 여인을 어떻게 심판하는지 두고보자 라고 시험하는 겁니다.

 

이게 존재 예요 존재

항상 모든 것은 내가 주체가 된다고 여기는

당위(기능)에게 말려들도록 되어 있는 존재 말이죠

 

그러니 육 곧 존재는 곧 항상 미완료 항상 의문의 반복 항상 미흡한 함량미달은

반드시 이 영의 일 곧 완료 항상 초과잉 넉넉함 항상 다 이루었다에

말려들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육이니까 어쩔수 없어요.

 

그러니 나팔을 불때에

오늘 시편 141편처럼 기도 부르짖을때에

이미 완료된 채로 부르짖은 겁니다.

완료의 증상이 바로 놀라운 탄식이거든요. 성령의 일이다 말이죠.

이미 전쟁의 승리로 말이죠.

 

자 그렇게 되니 평상시에 보이지 않던 제 3의 인물이 등장합니다.

아니 글쎄 금가락지에 환장하더라 말이죠

 

? 자기가 선 함이니까

 

선해야 된다는 그 강박관념 말이죠.

 

얼마나 선하지 못했으면 선해야 된다고 거룩해야 된다는 강박에 빠질까요?

오죽하면 광명한 천사이겠냐 말이죠.

 

그리고 이 3의 인물인 원수는

아니 글쎄 남의 악함에 그렇게 예민하게 굽니다.

그리니 베드로야 너는 닭 울기 전에 나를 세 번 부인할 것이다 라는 소리를

베드로 보다 더 빨리 간파한다 말이죠.

얼마나 베드로가 세 번 부인하길 기다렸겠습니까?

 

그게 글쎄 베드로에게 한 이야기가 아니라 마귀 너 너 그래 너 에게 한 소리다 말이죠.

안 잡고는 못 배기도록 미치거든요.

이 베드로가 세 번 부인한다는 소리를 글쎄 예수님을부터 들었을때에

마귀는 이 보다 더 좋을 순 없다고 그야말로 기쁜소식이다는 거죠.

물개 박수 치고 난리입니다 난리

 

결국 사랑이란 아가페가 아니라 에로스 이다는 겁니다.

이 에로스 드디어 마귀가 쟁취하게 될수 있게 되었다 말이죠.

피조물 제 일 순위였던 타락한 천사가

저 가장 피조물 중에 제일 끝빠리 제일 깜디 중에 깜디였던 저 구스여인과 같은

제일 마지막 피조물에게 이 에로스의 자리

사랑의 자리를

신부의 자리를 빼앗겼으니

이거 어디가겠냐 말이죠.

그래서 드디어 잡았다 말이죠.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한다고 했던 그 베드로

저 아무것도 아닌 저 베드로에게 너무 일방적으로 초과잉적인 것을 베풀 때 마다

얼마나 원수 마귀는 벼르고 벼루었냐 말이죠.

참고 참고 무지 무지 참았던 그 고생의 댓가가

오늘 드디어 다 보상받을 수 있다 말이죠.

그러니 냅따 예수님께서 흘려주신 정보

너가 오늘밤 닭 울기전에 나를 세 번 부인할 것이다 라고

다 듣끼도록 하신 그 말씀에

드디어 원수 마귀가 그 신부의 자리 에로스의 자리를 차지하고자

베드로를 덥썩 무는 겁니다.

 

그런데 웬걸 원수의 밥상에서 더 나은 밥상을 차리셨으니 말이죠.

이 피 발린 신부의 옷은 마귀가 때려죽어도 거부하는 겁니다.

줘도 못 입어요

베드로를 오히려 입혀준 꼴이 된 겁니다.

오냐 고맙다 마귀야 베드로 잡아왔구나

안그래도 이 놈 베드로를 찾고자 했는데 말이죠.

그래 이 새하얀 신부의 옷을 입으렴

대제사장 옷 에봇을 더렵혔다고

냅따 잡아 왔더니만

새옷을 갈아 입혀줄줄 몰랐다 말이죠.

 

그 새옷

그 금가락지

누구 껍니까?

원수 마귀꺼 아닙니까?

그런데 왜 저 탕자에게 주냐 말이죠.

돌아버리는 겁니다.

 

복음은 바로 이 에로스

춘향전

변사또의 잔칫상에서 베풀어지는 더 나은 십자가 피 잔치 사랑가 아가서 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춘향이의 미모 또는 얼룩은 그야말로 미끼가 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이 더 나은 사랑가 아가서를 보여주기 위한 기능이였으니 말이죠.

그러니 그 미모 그 아름다운 미모 또는 얼룩 점은

이미 완료된 승리로써 전쟁 곧 사건 속에 집어넣는 겁니다.

낭군의 사랑을 나타내고자 말이죠.

신랑 되신 예수님의 자기 목숨까지 내어주시는 그 십자가의 사랑을

원수의 잔치상 위에서 베풀어지고자 말이죠.

 

그런데 마귀는 이것을 못하도록 되어 있거든요.

사랑을 못하도록 되어 있는 가정부일 뿐이다는 겁니다.

금가락지에만 환장하는 기능이다 말이죠

 

그러니 마귀는 죽지 않고 하자는 겁니다.

신랑께서 죽으면 안된다는 겁니다.

그 대신 신부를 죽이자 라는 겁니다.

그리고 자기는 안 죽고 저 미워죽는 미오구 미운 오리 구스여인 만 죽이자 라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온유는 자기가 죽겠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 구스여인을 살리겠다는 겁니다.

여기에 원수 마귀는 그런 신부의 자리도 싫을 뿐 아니라

줘도 안 먹겠다고 할 뿐만 아니라

도저히 그 신랑의 사랑을 이해할 수가 없어서

거부하도록 되어 있는 구체적 보편성에 항복하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어떻게 그 높으신 장원급제한 이도령이

이 천한 계집 춘향이 하나 건질려고 이 변두리까지 오는데에 있어서

도저히 납득이 안되는 겁니다. 납득이 ~~~~ 혀 낼름 낼름하는 납득이 ~~~

저 웃끼는 기생 주제에 춘향이는 오로지 자기 낭군 하나 믿고 기다리는 것 도 이해가 안가고 말이죠.

 

그런데 더 웃끼는 것은 그 이해 안되는 것을 다 들 이해 되는데

변사또 곧 원수 마귀 지 혼자 몰라요

왜냐하면 그 납득이 안되고 그 이해가 안되는 것을

냅뚜면 될 것을

결국 기여이 자기가 이어주고 있어요 글쎄

자기가 이어줘놓고 뭐가 납득이 뭐가 이해가 안되냐 말이죠

다들 이해하는 구체적 보편성인데

정작 본인만 모른다 말이죠.

 

이게 바로 관계입니다. 에로스입니다.

관계는

남들은 다 아는데 혼자 모르고

남들은 다 모르는데 혼자 아는 겁니다.

 

이것이 십자가 사랑의 비밀입니다.

그래서 원수의 밥상에서 펼쳐지는 겁니다.

더 나은 잔칫상으로써 말이죠.

남들은 다 아는데 혼자 모르는 구체적 보편성

남들은 다 모르는데 혼자만 아는 춘향이 혼자만 아는 십자가의 지혜 말이죠.

 

 

원수의 목전에서 베푸시는 긍휼 (시편 141편).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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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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