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의 해와 달들아! 소리 높여 찬양하여라! (시편 148)


 

(148:1, 개역) 할렐루야 하늘에서 여호와를 찬양하며 높은 데서 찬양할지어다

(148:2, 개역) 그의 모든 사자여 찬양하며 모든 군대여 찬양할지어다

(148:3, 개역) 해와 달아 찬양하며 광명한 별들아 찬양할지어다

(148:4, 개역) 하늘의 하늘도 찬양하며 하늘 위에 있는 물들도 찬양할지어다

(148:5, 개역) 그것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할 것은 저가 명하시매 지음을 받았음이로다

(148:6, 개역) 저가 또 그것들을 영영히 세우시고 폐치 못할 명을 정하셨도다

(148:7, 개역) 너희 용들과 바다여 땅에서 여호와를 찬양하라

(148:8, 개역) 불과 우박과 눈과 안개와 그 말씀을 좇는 광풍이며

(148:9, 개역) 산들과 모든 작은 산과 과목과 모든 백향목이며

(148:10, 개역) 짐승과 모든 가축과 기는 것과 나는 새며

(148:11, 개역) 세상의 왕들과 모든 백성과 방백과 땅의 모든 사사며

(148:12, 개역) 청년 남자와 처녀와 노인과 아이들아

(148:13, 개역) 다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할지어다 그 이름이 홀로 높으시며 그 영광이 천지에 뛰어나심이로다

(148:14, 개역) 저가 그 백성의 뿔을 높이셨으니 저는 모든 성도 곧 저를 친근히 하는 이스라엘 자손의 찬양거리로다 할렐루야

 

 

(148:1, 새번역) 『㉠할렐루야. 하늘에서 주님을 찬양하여라. 높은 곳에서 주님을 찬양하여라. / 또는 '주님을 찬송하여라'

(148:2, 새번역) 주님의 모든 천사들아, 주님을 찬양하여라. 주님의 모든 군대야, 주님을 찬양하여라.

(148:3, 새번역) 해와 달아, 주님을 찬양하여라. 빛나는 별들아, 모두 다 주님을 찬양하여라.

(148:4, 새번역) 하늘 위의 하늘아, 주님을 찬양하여라. 하늘 위에 있는 물아, 주님을 찬양하여라.

(148:5, 새번역) 너희가 주님의 명을 따라서 창조되었으니, 너희는 그 이름을 찬양하여라.

(148:6, 새번역) 너희가 앉을 영원한 자리를 정하여 주시고, 지켜야 할 법칙을 주셨다.

(148:7, 새번역) 온 땅아, 주님을 찬양하여라. 바다의 괴물들과 바다의 심연아,

(148:8, 새번역) 불과 우박, 눈과 서리, 그분이 명하신 대로 따르는 세찬 바람아,

(148:9, 새번역) 모든 산과 언덕들, 모든 과일나무와 백향목들아,

(148:10, 새번역) 모든 들짐승과 가축들, 기어다니는 것과 날아다니는 새들아,

(148:11, 새번역) 세상의 모든 임금과 백성들, 세상의 모든 고관과 재판관들아,

(148:12, 새번역) 총각과 처녀, 노인과 아이들아,

(148:13, 새번역) 모두 주님의 이름을 찬양하여라. 그 이름만이 홀로 높고 높다. 그 위엄이 땅과 하늘에 가득하다.

(148:14, 새번역) 주님이 그의 백성을 강하게 하셨으니, 찬양은 주님의 모든 성도들과, 주님을 가까이 모시는 백성들과, 이스라엘 백성이, 마땅히 드려야 할 일이다. 할렐루야. / 또는 '그의 백성을 위하여 뿔을 높이셨으니' 또는 '주님을 찬송하여라'

 

 

 

찬양이라는 의미를 복음이라고 한번 생각해 봅시다

복음 곧 기쁜소식

왜 기쁜소식일까요?

이것은 전쟁도 하기 전에 이미 승리하고 들어가기 때문에

조건이 맞아서 기쁜게 아니라

원인 없는 결과로써 무조건 기쁠 수밖에 없는 소식이라서

승리하고 그 결과만으로 들어가는 전쟁이라서 그렇습니다.

만약 전쟁에서 승리해서 기쁘면 그것은 기쁜소식 곧 복음이 아닙니다.

곧 찬양이 아닙니다

전쟁을 하고 그 전쟁을 승리해야만 하기에 그 원인에 따른 결과라서 그렇습니다.

 

찬양이란 원인 자체가 없습니다.

결과란 원인이 없기 떄문에 주어지는 겁니다.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없게 되고

의문의 반복이 되는

소위 역사 시공간이라는 의미가 되는 겁니다.

 

기쁜소식은 시공간이라는 역사가 필요가 없습니다.

묵시입니다.

오히려 역사 속에 묵시가 쳐들어 오는 방식입니다.

천국은 침노 당한다 말이죠.

 

계시록 13,4장에서 666의 상대적인 의미가 바로 일곱입니다.

일곱 재앙은 미흡한 것을 차단하는 기능입니다.

완벽한 거룩이 아니면 단절됩니다.

그러니 그 어떤 누구도 심판에서 벗어날자가 없습니다.

그 심판이 바로 일곱입니다.

완벽한 거룩이기에

심판으로써 부정함을 제거하는 거죠.

그러니 원인 없는 결과로써 부정함을 제거받은 곧 심판 받은 자가

666의 짐승의 수 곧 사람의 수의 상대적인 십사만사천명입니다.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이라는 심판을 받은 자 들입니다.

 

그러니 이것은 원인 없는 결과로써

이 중간의 모순을 이을 연결점이 없는 겁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구나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심판을 제대로 본 거다 말이죠.

그런데 갑자기 원인 없는 결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결코 정죄함이 없다 라고

갑자기 찬양을 합니다.

아니

심판 받았다 해 놓고서는

모순 되게 찬양 합니다.

 

찬양이란

곧 우리가 지금 계시록 찬양자로 태어난 자들에게 대해서 한참 살펴보고 있는데

찬양자란 원인 없는 결과로써의 찬양자가 된 거지

찬양을 잘해서 노래 잘 불러서 그런 원인에 따라 찬양을 하는게 아니다는 겁니다.

 

그 어떤 경우도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구나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라는 심판에서

 

모순 되게 갑자기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결코 정죄함이 없노라

이전 것은 지나 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라고

 

이 중간의 간극을 이어줄 그 어떤 것도 없다는 겁니다.

이게 바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시공간이라는 역사에서 이해불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화론은 사기치는 거죠.

막 따라할려고 인간의 노동 곧 시공간을 개입시킬려고 한다 말이죠

그러면 그럴수록

 

맏아들에게 탕자를 용서하는 금가락지 곧 십자가는

더더욱 거리끼는 걸림돌로 작용하게 됩니다.

 

십자가는 탕자보다 오히려 맏아들에게 더 크게 작용한다 말이죠.

금가락지 좋은 옷 새신발 그리고 살진소를 잡아 잔치를 베품에 있어서

반드시 원수의 목전에서 펼쳐지게 되니 말이죠.

반드시 이 십자가에 반응하도록 마귀는 그 기능을 그 역할을 나타내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이 금가락지인 십자가의 용서에 말이죠.

그것이 바로 오늘 나오는 찬양이라는 겁니다.

 

노래가 아니다 말이죠. kpop 이 아니예요

사건입니다.

인간의 노래는 두 패로 못 나눕니다.

노래가 무슨 두 패로 나눕니까

그것도 천국과 지옥으로 나누겠냐 말이죠.

 

오늘 나오는 찬양은 바로 천국과 지옥으로 나누는 사건을 말하는 겁니다.

전쟁에서의 승리를 미리 부르는 것이 찬양입니다.

이미 승리했다를 선언하는 사건이다는 겁니다.

이 찬양으로 인해 두 패로

그것도 천국과 지옥으로 가른다는 겁니다.

 

이 십자가로 말이죠.

 

시므온이 찬양을 합니다.

아기 예수님을 안고 높이 들어서

이 아기로 인해 이스라엘의 흥함과 패함을 가르는 비방받는 표적이 된다고 말이죠.

 

아니 왜 비방하겠습니까?

말도 안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말이죠.

천국과 지옥으로 가르는 기준이

이미 인간 속에 있다 말이죠.

그 인간 속에 있는 것을 대표성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유대인입니다.

 

유대인은 말씀을 실천하냐 못하냐 로 천국과 지옥으로 가른다고 본 겁니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마귀가 유대인을 장악한 방식이다 말이죠.

종교죠 바로 666입니다.

백날 말씀 실천해 보세요 함량미달되지 않고 초과 하는가?

 

모든 종교는 바로 666입니다.

말씀 곧 교리죠 교리 플러스 실천이다 말이죠,

이게 역사다 말이죠,

원인에 따른 결과를 도출하겠다는 방식입니다.

시편을 달달 외운 유대인들이 그래서

다윗이 시편에서 말한 예수님을 못 보는 이유입니다.

원인 없는 결과로써의 시편이요 찬양인데

찬양을 원인 있는 결과로 만들려고 하니까

의문의 반복 뿐이라서 예수님이 안 보인다 말이죠.

오히려 예수님을 죽이는 셈이 되더라 말이죠.

? 한 입으로 찬양과 저주가 나오는 육체인줄 모르는 겁니다.

육체로 실천하면 된다고 본 거죠

 

그 육체 없이 다 이룬 의가 있다 말이죠 율법의 완성인 사랑이 있다 말이죠.

오로지 영으로써 말이죠.

 

그것이 바로 역사 곧 시공간이 개입 없이 이룬 원인 없는 결과

곧 찬양이 뭔고 하니 바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외치신 예수님입니다.

육체 없이 태어난 분

아빠 없이

엄마 없이 태어난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이 족보도 없이 태어난 이 완벽한 거룩이 아니면

다 함량미달인 666일 뿐인 육체일 뿐이다는 겁니다.

 

괜히 말씀을 지키게 되니까

예수님과 경쟁하게 된다 말이죠.

나는 그런 의도가 없었다는 둥 해도 소용이 없어요

? 뭘 해도 가인의 제사 밖에 안되기에

아벨의 제사인 예수님의 제사 곧 십자가를 무시하는 셈이기에
또 아벨을 죽이게 되니까 말이죠.

 

시편을 달달 외우고 시편대로 사니까

시편대로 오신 예수님을 죽이는 겁니다.

? 금가락지에 돌아버리거든요

금가락지 아니면 안 돕니다.

인간은 안 미쳐요

지극히 정상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지극히 정상인 사람도 금가락지 곧 십자가요 곧 이미 완료된 찬양에

인간은 돌아버리는 겁니다. 갑자기 마귀로 돌변해 버리는 겁니다.

 

왜냐하면 찬양 중심으로 복음 중심으로 십자가 중심으로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원인 없는 결과 중심으로 돌아간다 말이죠.

 

그러니 일곱 교회는 무조건 원인 없는 결과로 주의 오른손에 사로잡혔기에

찬양자로써 십사만사천명이 군대로써 놓여지게 되면

 

상대적으로 주의 발등상에 놓여진 원수는

지옥에서 끌어당기는 자 답게

666이라는 함량미달에 목숨걸 수밖에 없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이것이 이 두 패로 가르는 중간에 있는 주의 인자하심이다 말이죠.

찬양이다 말이죠.

 

그러니 양 쪽 두 패는 모두다 주님을 찬양하는 일에 동원이 됩니다.

즉 마귀도 주를 찬양하는 부정적인 도구로써 동원이 됩니다.

모든 피조물에 마귀도 포함된다 말이죠.

 

그러니 찬양이란 사건으로써

주님 자신의 이름을 찬양하기 위한 자작극이다는 겁니다.

주님 자신의 이름을 높이기 위한 자작극 자작사건이다 말이죠.

그러니 마귀는 주를 찬양하는 십자가 사건에 무조건

진노의 자식으로써 동원이 되고

일곱교회인 새이스라엘은 긍휼의 자식으로써 동원이 되는 겁니다.

 

야곱은 사랑하기로 태어나기 전부터 작정이 되었고

에서는 미움받기로 태어나기 전부터 작정이 되었듯이 말이죠.

 

이것이 십자가 라는 다 이루었다 라는 완료가

곧 찬양이라는 완료가

원인 없는 완료가

원인 없는 다 이루었다가

이 두 패를 미리 가르고 시작하는 겁니다.

태어나기도 전에 말이죠.

창세전에 생명책에 이미 기록된 대로 말이죠.

 

그러니 존재가 먼저가 아니다 말이죠.

기능이 먼저입니다.

기능이 뭡니까? 원인 없는 결과입니다.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용서받은 자의 행복에 대해서 다윗이

아브라함 곧 믿음의 조상을 보고 아하 이거구나 라고 외쳤는데

그것을 다시 잉여증폭처럼 전염이 되어서

사도바울 본인이 그 다윗의 고백을 보고 아하 이거구나 라고 외치고

그것을 본 우리 주의 자녀들이 아하 이거구나 라고

무한증대 무한반복으로써 원인 없는 결과를 누리는 겁니다.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말이죠.

 

자 그렇기에 찬양자로 태어난 자는 아니 기쁘고는 못배기는 거죠.

행복의 조건이 갖추어져서 행복한게 아니라

이미 행복한 자로 태어났기에 행복하다고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데 행복하데요 글쎄

? 십자가 상에서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 라고 외쳤거든요.

 

이 찬양을

글쎄 이 새노래를 아무도 못 배우고 아무도 못 부르는데

그 불가능한 새노래가 덮쳐져서

감히 못부르고 못배루는 그 새노래를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부르게 되더라 말이죠.

 

그게 바로 십자가의 용서를 외치는 자입니다.

 

맏아들은 때려죽어도 이 십자가를 노래 못 불러요

찬양 못합니다.

 

오로지 탕자만이 이 새노래를 부르도록 되어 있어요

그것도 원수의 목전에서

맏아들 보란 듯이 말이죠.

아니 왜?

금가락지의 기능이 그렇거든요.

십자가의 기능이 그래요

새노래의 기능이 그렇거든요.

오늘 나오는 찬양이 그렇다 말이죠.

 

그러니 이 찬양 곧 이 새노래는 원수 앞에서 부르도록 되어 있다 말이죠.

 

원수 앞에서

 

하늘의 새와 달들아 소리 높여 찬양하여라

나팔소리 비파와 수금으로 춤추며 찬양하여라

 

마치 모세가 애굽왕 바로 앞에서

주님을 찬양할란다 내 백성 내놔라 라고 외치는 듯이 보입니다.

호흡이 있는 자는 주님을 찬양해야 한다 내 백성 내놔라 라고

애굽왕에게 원수에게 외친다 말이죠.

 

뭐 신을 찬양한다고? 아 그래

여기 노래방 시설 끝내주게 잘 되어 있어

마음껏 찬양해!

 

맞습니다

오늘 중요한 부분이 바로 이겁니다

 

찬양이 양쪽 다 한다는 겁니다.

원수도 하나님을 찬양하고

모세도 주님을 찬양하고

 

뭐가 문제되냐 말이죠.

 

같은 찬양인데 말이죠

 

어차피 유대인이나 예수님이나 하나님을 찬양할려고 한다 말이죠.

뭐가 문제냐 말이죠

같은 찬양인데

 

자 그럼 전쟁 또는 싸움이 일어날 이유가 전혀 없다 말이죠

 

아 그런데 예수님이 그리고 모세가 같은 찬양이 아니다 라고 합니다

한 쪽은 원인 있는 결과로써의 찬양을 주장하고

다른 한 쪽은 원인 없는 결과로써의 찬양인 십자가만을 곧 주의 살과 피만을 주장한다는 점에서

졸지에 천국과 지옥의 전쟁이 되고 만다 말이죠.

 

누가 더 나은 찬양

더 나은 제사냐 라는 겁니다.

 

인간은 자꾸 별차이 없다고 구분 구별 차별 분리를 거부하는 식이고

주님 쪽은 자꾸 차이를 낼려고 한다는 겁니다.

 

차이가 나야 한 쪽이 다른 한 쪽에게 무릎을 꿇는 평화가 성립이 된다 말이죠.

이것이 평화의 복음이다 말이죠.

 

(2:10, 개역)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2:11, 개역)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2:12, 개역)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2:13, 개역) 홀연히 허다한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2:14, 개역)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자만이 평화이다는 겁니다.

곧 심판을 받은 자 만이

주님의 전쟁에서 박살이 나서 항복한 자만이 평화로다 라는 겁니다.

전쟁을 당한자 곧 십자가의 다 이루심의 심판을 당한자 말이죠.

 

아무나 기뻐하심을 입은게 아니죠

평화를 누리는게 아닙니다.

긍휼을 얻는게 아닙니다.

 

미흡한 함량미달의 666에 빠진

십의 이조 이레에 두 번 금식 저 세리처럼 토색하지 않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삶은

평화를 못 얻었고 긍휼을 못 얻은 진노의 그릇으로 드러납니다.

곧 성전에 두 사람의 기도중 한사람인 바리새인의 기도죠

 

기도라고 해서 다 같은 기도가 아니다는 겁니다.

오늘 찬양이라고 해서 다 같은 찬양이 아니듯이

 

그런데 매국노 세리는 오로지 주님의 긍휼만을 바라는 겁니다.

아니왜? 심판의 전쟁을 보았기 때문이다 말이죠.

일곱을 본 겁니다.

이 완벽한 거룩 앞에서

화로다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구나

이스라엘 속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보게 되었으니 난 끝장났구나 라고

세리가 하나님의 영광 곧 천사가 여섯날개로도 가릴수 없는 그 영광 앞에서 타 죽어야 함을 마땅한 그 완벽한 거룩 앞에서 오로지 긍휼만을 바랄 수밖에 없다 말이죠.

 

그러니 누가 찬양자로 태어난 자이겠습니까?

 

(18:10, 개역)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18:11, 개역)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8:12, 개역)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18:13, 개역)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18:14, 개역)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 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의 평상시 제자들에게 질문하는 식으로 하면

누가 의로운 자이냐

누가 기도의 사람으로 태어난 자이냐

누가 찬양자로 태어난 자이냐 라고 물으면

 

누구라고 여러분 대답하실 겁니까?

긍휼을 바라는 자입니다 라고 여러분 답하실 것 아니겠습니까?

 

그럼 오늘 시편 148편에서 누가 찬양자로 태어난 자 이겠습니까 라고 물으면

찬양 하기를 누가 잘 지키냐 말고

찬양지키기 말고

 

누가 태어날 때부터 찬양자로 사랑받기로 작정된 자가 누구입니까 라고 물으면

누구라고 대답하실 겁니까?

 

네 맞습니다 호흡이 있는 자입니다.

호흡을 곧 생명을

숨을 누가 주었냐 말이죠.

 

십의 이조 드린 자가 찬양자로 태어났을까요?

이레에 두 번 금식하는 자가 찬양자로 태어났을까요?

 

왜 호흡을 주셨을까요?

십의 이조 드리라꼬?

그렇다면 그것은 맏아들이 달인입니다.

부자청년이 달인이다 말이죠.

 

이레에 두 번 금식하라고 호흡을 주셨을까요?

그것은 바리새인과 율법사 그리고 서기관처럼 그런 계명 큰 계명 두 계명을 지키는 달인들이

그거 잘 합니다.

 

오히려 그들이 원수로 여기는 선한 사마리아인이 주님을 찬양하는 자로 태어났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시니까

아니 유대인도 아닌 개같은 이방인을 두둔하는 예수님을 과연 가만히 둘까요?

찬양지키는 자는 이 예수님의 원인 없는 결과라는 찬양사건을

곧 탕자에게 금가락지를 주시는 그 걸림돌인 십자가의 용서를

맹렬하게 거부합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에 대한 평가를 유대인들이 맹렬하게 거부하듯이 말이죠.

맏아들은 그 십자가 그 찬양을 거부합니다.

 

자 그렇다면 이 다윗의 찬양을 그들은 뭣도 모르고 따라하는 겁니다.

찬양사건 곧 십자가사건 새노래 사건에 말려들도록 말이죠.

십자가의 자작극에 말려드는 겁니다.

 

한 쪽은 진노의 그릇으로

다른 한 쪽은 긍휼의 그릇으로 말이죠.

 

찬양하기가 아닌

다 이루었다 라고 외치는 십자가가 외치는 찬양이 덮쳐진자는

평생을 단 한번도 노래 부른적 없던 벙어리일지라도

 

바로 원수 앞에서

맏아들 앞에서

십자가를

새노래를

우물가의 여인처럼

내 죄를 용서하는 이 십자가를 보라 라고

찬양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찬양자로 태어났기에

 

호흡을

생명을

자기가 이끌어가서 호흡해서가 아니라

 

외부에서 주신 긍휼히 여겨주심

불쌍히 여겨주심 때문에

 

죽었다가 다시 3일 만에 숨을 호흡을 불어 넣어주신 그 긍휼로 찬양하는 겁니다.

 

그런데 저들은 찬양할 줄 안다고 하니 한 입에서 찬양과 저주가 동시에 나는 겁니다.

숨 쉴줄 안다고 하니

소경이 아니다 볼 줄 안다고 하니 못 보는 소경이라서

고쳐줄 자가 없어서 찬양을 못하는 겁니다.

 

모든 피조물이 주님의 십자가로써 새롭게 찬양을 부여받았습니다.

호흡을 새로 받았다 말이죠

 

이제 모든 피조물은 이 새노래 새찬양 곧 십자가를 중심으로 움직이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 십자가로 평화를 입었거든요.

 

이 십자가로 인해 호흡을 부여받지 못한 자는 이 십자가를 찬양할수 없도록 되어 있는

거리끼는 걸림돌에 넘어지도록 되어 있습니다.

 

마치 찬양하기를 지키는 달인인 유대인이 예수님을 저주하듯이

거리끼는 걸림돌에 넘어지는 겁니다

 

이것이 십자가로 인해 두 패로 가른 찬양으로 가른 다 이루심입니다.

 

십자가의 피 용서로 긍휼히 여기심을 받은 자는 곧 새노래로 다시 태어난

호흡을

숨을

생명을 부여받은

기뻐하심을 입은 자의 찬양입니다.

 

자신이 호흡을 해와서가 아닌

생명의 숨을 이어와서가 아닌

항상 기뻐할려고 지킨 것이 아닌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그저 외부에서 주어진 선물로써

마음껏 십자가를 노래하는 겁니다.

 

이 눈에 아무 증거 아니보여도

그 어떤 무기도 없이

원수의 목전에서 오로지 이 십자가의 용서만을 찬양하면서

모세의 노래, 어린양의 노래를 부르면서 말이죠.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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