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판 속에서 새노래를 부르는 자들 (시편 149)


 

(149:1, 개역) 할렐루야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며 성도의 회중에서 찬양할지어다

(149:2, 개역) 이스라엘은 자기를 지으신 자로 인하여 즐거워하며 시온의 자민은 저희의 왕으로 인하여 즐거워 할지어다

(149:3, 개역) 춤 추며 그의 이름을 찬양하며 소고와 수금으로 그를 찬양할지어다

(149:4, 개역)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을 기뻐하시며 겸손한 자를 구원으로 아름답게 하심이로다

(149:5, 개역) 성도들은 영광 중에 즐거워하며 저희 침상에서 기쁨으로 노래할지어다

(149:6, 개역) 그 입에는 하나님의 존영이요 그 수중에는 두 날 가진 칼이로다

(149:7, 개역) 이것으로 열방에 보수하며 민족들을 벌하며

(149:8, 개역) 저희 왕들은 사슬로, 저희 귀인은 철고랑으로 결박하고

(149:9, 개역) 기록한 판단대로 저희에게 시행할지로다 이런 영광은 그 모든 성도에게 있도다 할렐루야

 

 

(149:1, 새번역) 『㉠할렐루야. 새 노래로 주님께 노래하며, 성도의 회중 앞에서 찬양하여라. / 또는 '주님을 찬송하여라'

(149:2, 새번역) 이스라엘아, 창조주를 모시고 기뻐하여라. 시온의 주민아, 너희의 임금님을 모시고 큰소리로 즐거워하여라.

(149:3, 새번역) 춤을 추면서 그 이름을 찬양하여라. 소구 치고 수금을 타면서 노래하여라.

(149:4, 새번역) 주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보시고 기뻐하신다. 눌림받는 약한 사람에게 승리의 영광을 안겨 주신다.

(149:5, 새번역) 성도들아, 이 영광을 크게 기뻐하여라. 잠자리에 들어서도 기뻐하며 노래하여라.

(149:6, 새번역) 성도들의 입에는 하나님께 드릴 찬양이 가득하고, 그 손에는 두 날을 가진 칼이 들려 있어,

(149:7, 새번역) 뭇 나라에게 복수하고, 뭇 민족을 철저히 심판한다.

(149:8, 새번역) 그들의 왕들을 족쇄로 채우고, 고관들을 쇠사슬로 묶어서,

(149:9, 새번역) 기록된 판결문대로 처형할 것이니, 이 영광은 모든 성도들의 것이다. 할렐루야. / 또는 '주님을 찬송하여라'

 

 

새노래란 주의 인자하심을 말합니다. 곧 십자가라는 예수님의 죽으심이요

다시 3일만에 다시 살아나심입니다.

 

이 노래를 이 새노래를 우리는 당연히 이스라엘 곧 유대인들이 부를줄 알 것이다 라고 생각했는데

 

이상합니다. 유대인들이 새노래를 부를줄 모른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더 웃끼는 것은 즉 이것도 말도 안되는데 더더욱 말도 안되는 것은

주의 이름을 부른적도 없는 자들에게 부르심바 되겠다는 겁니다.

 

유대인도 안 되는 판국에 어떻게 개같은 이방인이 말이죠.

 

맞습니다. 저 개 맞습니다 맞고요

그러나 개도 주인의 밥상에서 떨어진 긍휼을 먹고 살지 않습니까 라고 노래를 하니

 

어찌 칭찬을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유대인에게서도 찾지 못한 믿음인데 말이죠.

 

결국 믿음이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노래하는 겁니다.

그 긍휼만이 그 십자가의 용서만이 이 귀신들린 나의 딸을 나을수 있게 하니까 말이죠.

 

 

(15:21, 개역)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15:22, 개역)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질러 가로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 하되

(15:23, 개역)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

(15:24,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

(15:25, 개역)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15:26, 개역) 대답하여 가라사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15:27, 개역) 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15:28, 개역)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즉 노래 한 적 없던 주의 이름을 노래 한 번도 한 적이 없는 자들에게서

반드시 주의 이름을 노래 할 수 밖에 없도록 하겠다는 겁니다. (65: 1)

 

자 그럼 이 새노래 라는 것은 도대체 뭘까요?

우리가 가요나 팝이나 동요처럼 악보나 시를 통한 그런 노래일까요?

 

그렇다면 노래는 저런 웃끼는 말도 안되는 일을 벌리질 못한다 말이죠.

노래는 어디까지나 말 되는 것만 하도록 되어 있다 말이죠.

그렇기 때문에 새노래는 아무나 못 부른다는 겁니다.

 

오죽하면 자기나라 자기 민족의 신을 노래 부르는 것이 얼마나 당연한데

정작 유대인들은 새노래를 못 부르도록 되어 있고

전혀 주의 이름을 부른 적도 없는 자가 이 새노래를 부르도록 되어 있다니

이런 역전의 현상을 일으키는 새노래를 누가 부를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걸림돌이라서 새노래를 거부하고요

헬라인 이방인에게는 어리석고 미련해서 못 부르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헬라인 지식인에게는 이 십자가는

난 미련합니다 난 가짜입니다. 난 거짓입니다. 난 바보입니다 라는 가사와 같다 말이죠.

왜냐하면 지혜를 추구하는 자들에서는 이 새노래가 전혀 정반대의 목적과 방향을 추구하고 있거든요.

마치 여리고성 사람들에게 있어서 밑에 하루에 한 바퀴씩 돌면서 부르는 노래처럼 들린다 말이죠.

난 죄인입니다. 난 광야에서 여호와 하나님께 원망한 자입니다.

그 증거가 세가지 물증으로써 이 법궤 속에 담겨져 있습니다.

예수님의 몸에 담겨져 있습니다 라고 부르는 것과 같으니까

 

무슨 놈의 노래가 저런 내용의 가사로 되어 있냐 말이죠.

무슨 소리인지 무슨 논리인지 전혀 말 되는 소리가 하나도 없으니 말이죠.

그런 미련하고 어리석은 십자가를 노래한다는 자체가 거부할 수 밖에 없는 걸림돌 자체다 말이죠.

 

(65:1, 개역) 나는 나를 구하지 아니하던 자에게 물음을 받았으며 나를 찾지 아니하던 자에게 찾아냄이 되었으며 내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던 나라에게 내가 여기 있노라 내가 여기 있노라 하였노라

 

(65:1, 새번역) "나는 내 백성의 기도에 응답할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내 백성은 아직도 내게 요청하지 않았다. 누구든지 나를 찾으면, 언제든지 만나려고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아무도 나를 찾지 않았다. 내 이름을 부르지도 않던 나라에게, 나는 '보아라, 나 여기 있다. 보아라, 나 여기 있다' 하고 말하였다.

 

(10:20, 개역) 또한 이사야가 매우 담대하여 이르되 내가 구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찾은 바 되고 내게 문의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나타났노라 하였고

(10:20, 새번역) 또한 이사야는 매우 담대하게 이렇게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나를 찾지 않는 사람들을 내가 만나 주고, 나를 구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내가 나타났다." / 65:1(칠십인역)

 

 

유대인 앞에서 이방인은 이미 심판받은 자들이다 말이죠.

율법을 모르니 지킬리도 없잖습니까?

거룩과 거리가 머니까 더러움 그 자체요 심판받아 마땅한 자입니다.

 

그런 유대인 목전에서 심판받아 마땅한 개같은 이방인이 십자가 라는 걸림돌을 노래한다니

유대인이 과연 찬양에 동참한 이방인을 죄인 하나 돌아왔다고

천사들처럼 기뻐할까요?

 

아니면 분노할까요?

 

탕자가 돌아온다는 자체가 맏아들에게는 말이 안됩니다.

거기에다가 초과잉적인 오바

곧 금가락지 신발 좋은 옷을 입혀 살진소를 잡아 잔치를 벌립니다.

이건 뭐 누구 보라꼬 벌리는 겁니다.

 

정작 심판받아 마땅한 탕자 아니냐 말이죠.

왜 이 심판받아 마땅한 이방인이

이스라엘 유대인 보는 앞에서 새노래를 부를까요?

그럼 이스라엘 유대인이 새노래를 부르던가? 정작 못부른다 말이죠.

 

처음자리 처음사랑을 발로 차버렸는데 어떻게 그 분노 속에서 새 노래를 부를수 있겠냐 말이죠.

상한심령을 거부하는데

인애와 자비를 거부하는데

그저 내세울 것은 번제와 제사

아버지 말씀을 단 한번도 어긴적 없다는 그것만 내세울뿐이지

아버지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온 탕자를 받아주는 그 사랑은 거부하더라 말이죠.

 

그러니 정작 심판 속에 있던 자가 새노래를 부르고

심판 바깥에 있던 자는 새노래를 부르지 못한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누구와의 관계 때문이다 말이죠.

행함이 아니라 역사가 아니라

바로 예수님과 함께 심판 속에서 불 속에서 새노래를 부르고

정작 누구와 함께 함이 없이 홀로 기존의 노래를

행하듯이 지키듯이 번제와 제사를 지키면 되는 줄로 알고 노래를 부르니

정작 새노래를 못 부르고 거부하는 겁니다.

차라리 노래를 부르지 말았더면

말씀을 지키지 말았더면

말씀을 나 보다 더 잘 지키는 분을 봤을텐데 말이죠.

 

앞의 시편 148편에서 호흡이 있는 자 마다 주를 찬양한다고 했습니다.

모든 열방의 왕도 말이죠.

이것은 새언약을 중심으로 재편성 되기 때문에

새노래를 말하기 위해서 새노래의 자작극으로

모든 피조물들이 동원이 됩니다.

심지어 마귀 조차도 말이죠.

열방의 왕도 말이죠.

그런데 오늘 시편 149편에서는 그 열방의 왕이 멸망당한다고 했습니다.

 

(149:7, 개역) 이것으로 열방에 보수하며 민족들을 벌하며

(149:8, 개역) 저희 왕들은 사슬로, 저희 귀인은 철고랑으로 결박하고

(149:9, 개역) 기록한 판단대로 저희에게 시행할지로다 이런 영광은 그 모든 성도에게 있도다 할렐루야

 

그것도 새노래를 부르는 성도들에 의해서 말이죠.

마치 여리고성 사람들이 이스라엘이 부는 나팔 소리에 와르를 무너져 깔려 죽듯이 말이죠.

 

자 그럼 이 새노래는 참으로 신기한 것이

하루에 한 바퀴씩 6일 동안 돌면서

나는 주님을 원망한 자입니다.

백번 만번 망해도 마땅한 자입니다 라고 노래 부른다 말이죠. 뺑뺑이 돌면서

 

이 모습을 보는 여리고성 사람들은 저 모습 저 새노래를 듣고

나의 심판으로 여기면서 들어야만 하는 판국이다 말이죠.

그런데 누가 저런 노래를 듣고 나의 심판 받아 마땅함을 알겠냐 말이죠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그 십자가의 사건을 통해서

모든 인간들이 남녀노소 심지어 예수님의 제자들도 모든 인간들이 다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라 라고 했을때에

누가 저 십자가의 죽음을 보고

예수님의 죽음을 보고 나의 죽음으로 여기겠냐 말이죠.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저주 받아 마땅한 자 임을 알겠냐 말이죠.

 

그것을 모르게 되면 그 죽음이 그 저주와 그 심판이 결국 내가 당해야 한다는

이 말도 안되는 십자가라는 새노래이다는 겁니다.

처음자리를 모르면 말이죠.

누워서 침뱉는 거다 말이죠

 

십자가의 용서를 발로 차 버리는 식이다는 겁니다.

그것이 일만달란트 탕감 비유에서도 나오잖아요.

 

그러니 이것은 헬라인이 보기에 어리석고 미련한 지혜가 아니라

오히려 헬라인들이 찾고 찾던 그야말로 최고의 지혜인데

본인들이 스스로 발로 차 버리는 식이 되는 겁니다.

 

왜 새노래가 심판 속에서 외쳐져야만 하는 것일까요?

 

기존의 것들이 다 의문이다는 것을 모르면

즉 심판 받아 마땅한 허물어져야만 하는

함량 미달의 666 곧 육체의 숫자 사람의 숫자

짐승의 수인줄 모르면

 

심판받아 마땅해서 긍휼을

십자가의 용서를 구할수 없게 된다 말이죠.

 

여전히 의문의 반복을 마침도 없이 다람쥐 챗바퀴 돌 듯이 반복할 뿐이다 말이죠.

 

그러니 정작 십자가의 용서는 곧 새노래인 주의 인자하심은

심판 속에서 펼쳐지는 겁니다.

구원이 전쟁 속에서 펼쳐지듯이 말이죠.

화평은 평화는 전쟁의 종식으로 이루어지듯이 말이죠.

 

그 심판

곧 끝을 미리 앞당겨서 보자 말이죠.

과연 심판 속에서 이 아무도 배울수 없는

유대인도 못 부르는 이 새노래를 부를수 있는지를 말이죠.

 

루터로 인해 1517년에 종교개혁이 일어났는데

그 뒤 독일에서 1524년에 농민전쟁이 1526년까지 벌어진다 말이죠.

 

종교개혁의 영향으로 사회의 부패세력에 대항하는 농민들의 반란이였는데

농민들이 루터를 끌여들여서 같이 혁명운동을 했다 말이죠.

아 그런데 나중에는 루터가 처음에는 돕더니 나중에는 빠지는 겁니다.

 

카톨릭의 부패에는 강렬하게 저항했지만 세상의 부패에는 소극적이더라 말이죠.

그 이유는 가장 큰 지지자였던 프리드리히 라는 사람이

농민 착취자의 전형적인 모습이라서 카톨릭과 싸우는데 있어서

혼자 힘으로는 개혁운동을 이끌어가기가 힘들었다 말이죠.

 

아무튼 농민들은 카톨릭과도 싸우면서 종교개혁에 찬성했었다 말이죠.

소위 신학논쟁전쟁에서 졸지에 사회개혁운동이 끼어들게 된거다 말이죠.

 

그래서 나중엔 루터가 농민들로 이루어진 살인과 도적 떼를 반대하며라는 소책자를 내면서

이 농민들을 귀족들과 함께 진압했고 뮌처를 처형했다 말이죠.

세상권력도 하나님이 허락했으니 반대하지 말라는 로마서 13장을 근거로 해서 말이죠.

 

오늘날로 치면 촛불 시위에 반대했다 말이죠.

 

그러나 농민들은 토마스 뮌처 라는 과격개혁주의를 따르면서

시편 149편을 구호로 해서 카톨릭과 싸웠고


카톨릭도 100년 뒤 30년 전쟁때 개신교와의 전쟁에서
시편 149편을 구호로 해서 이들 농민들과 싸웠듯이 개신교와도 이 구호로 전쟁 했다 말이죠.

 

결과적으로 농민들이 13만명, 10만에서 15만명이 전쟁으로 또 전쟁 후에 처형으로 죽었다 말이죠.

 

30년 전쟁때는 양쪽 가톨릭 국가와 개신교 국가 둘다 망해서 협상했다 라고 하더라 말이죠.

 

 

저는 이 내용에 대해서 전혀 몰랐는데

20살 때 쯤인가 안식교 다니는 청년이 갑자기 이 루터의 이중적인 모습을 가지고서

덤비더라 말이죠.

내가 뭘 아남

예수님을 안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막 씩씩 거리면서 달려들더라 말이죠.

 

왜 농민들을 학살했냐 라고 나 한테 막 따지던데

즉 자기는 이단이 아니다

너희 개신교 루터 쪽은 이단 아니냐 라고 따졌던 거죠.

칼빈도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냐 말이죠

자기 신학에 반대하면 다 죽이니까 말이죠

 

문제는 그런다고 안식교가 이단에서 벗어날수가 있겠냐 말이죠.

둘 다 이단인데 셋 다 이단인데 칼빈 루터 안식교 모두다 말이죠.

이단 아닌 놈이 어디있냐 말이죠.

문제는 이단인게 문제가 아니라

이단 중의 이단이 못 되는게 문제인데 말이죠.

 

아무튼 시편 149편을 이용해서 자기 정당화 하면서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데 사용하더라 말이죠.

 

(149:6, 개역) 그 입에는 하나님의 존영이요 그 수중에는 두 날 가진 칼이로다

 

칼을 정당화 하면서 말이죠.

 

30년 전쟁이든 농민전쟁이든 결국 칼로 흥한자 칼로 망하잖아요

왜 이 말씀은 다들 숨기시남???

 

현장에서 간음 하다 잡힌 여인을 돌삐 들어서 쳐 죽일려고 하는 자들과 뭐가 다르냐 말이죠.

 

그렇게 되면 새노래는 그럼 뭐가 되냐 말이죠

그것도 심판 속에서 새노래인데

심판 바깥에서

자기가 심판을 행하는 자로써 새노래를 부른다고 하게 되니

그럴꺼 같으면 예수님이 십자가를지지 않고

십자가에 못 박으라 라고 외친 자들을 한 순간에 다 죽여야 되지 않냐 말이죠.

촛불 시위를 하는 자의 편에 서야 할 것 아니냐 말이죠.

 

이게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 라는 새노래

곧 주의 인자하심과 무슨 상관이 있냐 말이죠.

 

제 말은 그 속에서 정답이 없어요

뭘 해도 가짜요 다 엉터리 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런 것과 무관하게 새노래는 이미 불리워 졌고

완성 되었기에

새삼스럽게 완성 시킬려고

시편149편을 구호로 내세울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말씀이 주체이지

내가 말씀을 차용할 수 없다 말이죠.

 

그런 점에서 종교개혁은 인간이 이룬 행함이요 역사이지

복음과 무관하다 말이죠.

 

엉터리 카톨릭에 대항하여 싸웠다고

곧바로 바른 신앙이 되는게 아니잖아요

 

예수님 외에는 다 거짓입니다.

저도 거짓이고요

나의 죄를 대신 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은 자가

루터도 칼빈도 교회도 심지어 사도바울도 아니거든요.

 

그저 이단이라는 손가락질을 피하기 위한 트릭 속임수일 뿐이다 말이죠.

 

진짜 이단 중의 이단은 십자가를 증거하는 새노래를 부르는 자입니다.

이 새노래를 부르는 자는

아마 루터든 칼빈이든 안식교든 카톨릭이든 개신교든 다 죽일려고 달려들꺼다 말이죠.

그것도 시편 149편을 인용하면서 말이죠.

 

심판 속에서 마땅히 저주 받아야 함을 모르는 자들의 정치일 뿐이다 말이죠.

 

뭐 촛불 시위 하는 것이 교회로써의 의무가 아니냐 라굽쇼?

똑같은 마귀입니다.

 

어두움을 선으로 물리치자구요?

선은커녕 둘 다 어두움입니다.

박그네는 세상권력인 로마에 해당 되구요

촛불시위하는 가룟유다 독립운동가는 마귀자식 바리새인이 해당됩니다.

문재인도 그렇구요.

 

모조리 다 함량 미달인 짐승의 수 666입니다.

어딜 감히 선하다고 우기냐 말이죠.

한 참 모자른데

뭘 해도 의문의 제사이다 말이죠.

 

그럼 새노래는 심판의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 속에서 부르는 노래입니다.

어린양에 속한 자이지

칼빈 루터 개신교 에 속한 자가 아닙니다.

안식교 카톨릭 각종 이단들 신흥세력과 전혀 무관한 자만이

십사만 사천명 곧 새노래를 부르는 어린양에 속한 자입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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