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짖는 비천한 왕을 세우는 십자가의 지혜 (시편 142)

 

상한심령으로 부르짖는 비천한 버림받는 왕을 세우는 십자가의 지혜

14-142 비천한 자를 왕으로 세우는 십자가의 지혜 (시편 142편).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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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2:1, 개역) [다윗이 굴에 있을 때에 지은 마스길] 내가 소리내어 여호와께 부르짖으며 소리내어 여호와께 간구하는도다

(142:2, 개역) 내가 내 원통함을 그 앞에 토하며 내 우환을 그 앞에 진술하는도다

(142:3, 개역) 내 심령이 속에서 상할 때에도 주께서 내 길을 아셨나이다 나의 행하는 길에 저희가 나를 잡으려고 올무를 숨겼나이다

(142:4, 개역) 내 우편을 살펴 보소서 나를 아는 자도 없고 피난처도 없고 내 영혼을 돌아보는 자도 없나이다

(142:5, 개역)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어 말하기를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생존 세계에서 나의 분깃이시라 하였나이다

(142:6, 개역)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소서 나는 심히 비천하니이다 나를 핍박하는 자에게서 건지소서 저희는 나보다 강하니이다

(142:7, 개역) 내 영혼을 옥에서 이끌어 내사 주의 이름을 감사케 하소서 주께서 나를 후대하시리니 의인이 나를 두르리이다

 

 

한 국가의 왕 곧 요즘으로 치면 대통령을 백성들이 세울때에 누구를 뽑겠습니까?

그야 똑똑하고 지혜롭고 용감하고 정의롭게 악에 굴복하지 않는 자를 왕으로 삼겠지요!

 

즉 이 말은 백성 곧 국민 하나 하나의 삶의 방향이 그렇게 목표점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기투사로써 자기투영으로써 그런 대통령을 뽑기를 원한다 말이죠.

 

왕이 그렇다면 신 또한 하나님 또한 그렇다는 겁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다윗은 그렇게 왕이 되지 않습니다.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왕으로써 사울왕을 바로 저런 조건으로써 뽑았다 말이죠.

 

그럼 도대체 다윗은 어떤 백성으로부터 왕으로 세워질까요?

 

참 희한합니다.

도저히 이해가 안되요

저 문안한 사울왕이라는 이스라엘 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따로 꼬불쳐 놓은 숨은 이스라엘 왕을 따로 뽑아요 글쎄

 

그것도 이스라엘 밖에서

 

완전 반칙이지요.

 

이스라엘 백성이 안 뽑았다는 겁니다.

 

이스라엘 바깥에서 뽑았다는 겁니다 글쎄

 

이건 뭐 쿠테타 세력도 아니 뭐

도대체 어떤 백성들로 인해서 다윗이 이스라엘 왕으로써

이스라엘 바깥에서 이스라엘 바깥 백성으로부터 왕으로 세워질까요?

 

마태복음 4장에 보면 너가 우리 이스라엘의 구원자가 되라 라고 마귀가 3가지 시험을 합니다.

왕이 되라 이말이죠.

 

그런데 그 3가지 시험 뒤에

누가 이 기쁜소식인 희년의 백성이 되느냐 로써

예수님 자신의 이스라엘 목자 되심을

백성 곧 양으로써 자신의 왕 됨을 그리고 그의 손의 양 그의 백성임을 이미 선언하고 들어가는고 하니

 

바로 흑암의 백성

사망의 음침한 그늘에 폭삭 주저 앉은자

그리고 개같은 이방인

곧 고아 과부 나그네

포로된자

갇힌자

억눌린 자에게만

그들의 왕이 될 것이며

그들만이 나의 백성

나의 구원의 혜택을 누리는 자라고 하신다 말이죠.

 

바로 이런 예수님의 왕 되심과 그의 백성의 관계가

오늘 본문에 다윗의 왕 됨과 다윗을 왕으로 세우는 백성 속에서 나타나더라 말이죠.

 

이미 이스라엘 왕인 사울왕이 멀쩡히 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죠.

 

앞의 글 시편 148편 찬양에서

두 찬양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미 사람들에게 외쳐지는 찬양이 멀쩡히 있음에도 불구하고

새노래 새찬양을 따로 세우듯이 말이죠.

 

호흡을 새로받고

숨을 새로받고

새로받아서 부르는 새노래로써의 십자가 말이죠

이 노래를 배울자가 부를자가 없기에

어린양에게 속한 십사만사천명 외에는 부를수가 없더라 말이죠.

 

따로 세우는 겁니다.

분명 앞에 있는데

왕이든 찬양이든 기도이든 뭐든 기존의 것이 분명 다 있는데

 

따로 그 기능을 새롭게 세우더라 말이죠.

 

자 그럴때에

사건이 발생하는 겁니다.

앞에서 자작극이라고 했지요.

결국 모든 것은 주의 이름으로

주의 십자가의 피로 모아지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곧 주의 인자하심만이 창세전에 생명책에 유일하게 기록된 것이다 말이죠.

그럼 사건을 터트려서 한 바퀴 돌리면 처음처럼 삔떼가 딱 맞아야 하는데

핀과 아구가 맞지 않더라 말이죠

마치 뚜껑마개와 입구가 맞아야 잘 잠겨지듯이

처음의 모습이 아니라 변형이 되면

뭔가 그 중간에 개입한 것으로 인해

처음자리가 아니였음이 드러나는 겁니다.

 

왜 이스라엘 왕

이스라엘 백성이 멀쩡히 있음에도 불구하고

 

따로 이스라엘 왕을 이스라엘 바깥에서 세우고

이스라엘 백성이 아닌 자들로부터 이스라엘 왕으로 세워져야 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이것은 뭐 당연히 앞의 이스라엘 왕 이스라엘 백성을 거부하고 짤라내고자 함이기에

뒤로 따로 빼돌려서 이스라엘의 왕을 뽑는 겁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로마도 아니고 애굽도 아닌 이스라엘 속에서

이스라엘 왕 되심을 외친 것과 같고

자신의 백성을 유대인 속에서 또 따로 뽑는 것과 같습니다.

 

참 희한하죠 딴데 가서 하면 안되냐 말이죠.

왜 구지 정중앙 한 복판에서 그러실까요?

그것도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마치 고지전을 벌리듯이 탈환하시면서 말이죠.

천국이 침노당하듯이 말이죠.

 

앞의 시편 148편처럼

찬양의 의미를 새롭게 탈환하듯이

빼앗는 방식으로 말이죠.

천국을 탈환 침략하듯이

이미 사울왕이 장악한 이스라엘 왕의 자리를

새로운 다윗이 왕으로써 새이스라엘의 왕으로써 왕 자리 왕의 의미를 탈환 하듯이 말입니다.

 

그것은 인간들이 아무리 해도 함량미달인 짐승의 수 사람의 수로써 이스라엘 왕의 자리를 장악한다고 손 치더라도

주님께서는 약속의 의미 곧 십자가의 의미를 담은 이스라엘 왕을 이미 완벽한 거룩으로 세웠다 말이죠.

이것이 처음자리인데

인간들이 이스라엘의 왕 자리를 육으로 육체로 장악하니까

이 처음자리의 모습이 아닌

이스라엘 국가가 졸지에 다른 이방나라의 국가와 별반 다를바 없는

약속과 무관한

언약인 십자가와 무관한 힘을 추구하는 이방나라와 다를바가 없는 모습이더라 말이죠.

 

이것을 주님께서 이스라엘 왕 되심으로써 가만히 두시겠냐 말이죠.

사울왕 자기 멋대로 이스라엘을 선악으로 꽉꽉 채울려고 하니까

가만히 두시겠냐 말이죠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를 사울왕 같은 자들이 자기 멋대로

십의 이조 이레에 두 번 금식 저 세리 매국노처럼 토색하지 않는 삶을 살게 해주신 하나님꼐 감사합니다 로 성전을 꽉꽉 채울려고 하더라 말이죠

 

이게 무슨 놈의 교회냐 말이죠 사단의 회 이지

성화론자, 개혁주의자, 다들 그런 식이더라 말이죠.

어딜 되도 않는 함량미달의 것인 짐승의 수로

사람의 수로

뭐 남을 7번 용서할까요 8번 용서할까요 그런 것을 교회에 채우냐 말이죠.

770번의 도리어 용서함을 받아야 하는 긍휼이 교회에 채워지지 않는 겁니다.

 

그러니 눈에 보이는 교회가 강도의 소굴이 될 수 밖에요

약대는 삼키고 하루살이는 걸러내는 겁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피 용서가 교회에 철철철 흘러넘치는게 아니라

무슨 놈의 조건이 그리 많은지

교리를 세우고 그 교리를 지켜 실천하는

그게 불교이거든요

짐승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세워지면 도망쳐야죠

그런데 다들 복받을 것이다고 다 최면 걸려 마약에 찌들어 버렸어 글쎄

 

사울왕이 그랬거든요

안식일날 일하는 것을 보고 돌삐 던지기 바쁘다 말이죠

 

(12:1, 개역) 그 때에 예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가실새 제자들이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 먹으니

(12:2, 개역) 바리새인들이 보고 예수께 고하되 보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

(12:3,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다윗이 자기와 그 함께 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12:4, 개역) 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자기나 그 함께한 자들이 먹지 못하는 진설병을 먹지 아니하였느냐

(12:5, 개역) 또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을 범하여도 죄가 없음을 너희가 율법에서 읽지 못하였느냐

(12:6, 개역)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12:7, 개역)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면 무죄한 자를 죄로 정치 아니하였으리라

(12:8, 개역)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니라

(12:9, 개역) 거기를 떠나 저희 회당에 들어가시니

(12:10, 개역) 한편 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를 송사하려 하여 물어 가로되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12:11,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붙잡아 내지 않겠느냐

(12:12, 개역)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하시고

(12:13, 개역) 이에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손을 내밀라 하시니 저가 내밀매 다른 손과 같이 회복되어 성하더라

(12:14, 개역)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꼬 의논하거늘

 

 

오히려 다윗은 사울왕 덕분에 그 차이로 그 구별로 그 구분으로

긍휼의 자리에 놓여질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차라리 심판의 자리에 놓여지면 긍휼을 쳐다보기라도 하지요

괜히 법을 지키니까 남을 심판하는 자리에 놓여지게 되는 겁니다.

 

법을 지킨다는 것은 사랑이 없다는 것이거든요

사랑이 있다면 법을 어기도록 되어 있어요

그래서 제사장이 제사장만 먹을 수 있는 진설병을 다윗과 아이돌에게 주었다 말이죠

일부러 뻔히 사울왕이 다 감시하는 그 목전에서 말이죠

목이 댕캉 날라가는 것은 뻔하다 말이죠

그 뿐이겠습니까? 가족 친척 주변인들 다 죽임을 당하는 겁니다.

사울왕이 가장 싫어하는 다윗에게 긍휼을 베풀었으니 말이죠

 

법을 지키면 안 죽어요

그러나 법 어기면 죽습니다.

사랑하면 죽어요

죽으면서까지 사랑하시고자

진설병 저리 가라 할 정도의

거룩한 떡

예수님 자신의 살과 피를 먹이시는 겁니다.

이거 불법이다 말이죠.

마귀가 베드로에게 새옷을 입히시는 예수님에게 반칙이다 라고

더 이상 상대를 안하는 겁니다.

베드로는 뭐 당연히 마귀에게 죽는 거죠 뭐

거꾸로 달리면서 까지 말이죠.

 

마귀가 싫어하는 예수님을 사랑하면 다 죽어요

사울왕이 싫어하는 다윗을 좋아하면 이스라엘에서 죽임을 당하도록 되어 있어요

 

자 이렇게 처음자리를 통해서 새이스라엘을 새롭게 만드시는 겁니다.

기존의 이스라엘을 고쳐서 수정 보완해서 회복시키는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형상 회복이라고 해서 사기를 치는 성화론자들 보면

딱 사울왕 같아요

자기들 율법 지킨것만 내세울줄 알았지

탕자에게 주어지는 금가락지를 보면 미쳐 환장해요 글쎄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 저 원수 같은 탕자에게 주어지는 긍휼 곧 십자가의 피

그 귀한 예수님의 목숨 값이 아무것도 아닌 자에게 주어지면 돌아버린다 말이죠.

제사장만 먹을 수 있는 진설병을 다윗에게 주다니

탕자에게 주다니

이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자를

다윗도 밉지만 법을 어겨가면서 까지 다윗에게 편드는 말리는 제사장이 더 미워

아주 아주 잔인하게 죽입니다.

? 법을 지켰기에 안전빵에 있으니

남을 잔인하게 죽이면 죽일수록 자신이 법 지킨 것이 더더욱 돋보이게 되니까 말이죠

 

법 지키면 남에게 때려죽어도 못 줘요

부자청년이 미쳤다고 전재산을 가난한 자에게 주냐 말이죠.

예수님은 바로 그것을 건드린 겁니다.

사랑이 없다 라는 것을 말이죠.

주냐 안주냐가 아니라

법을 지켰다 라는 것은 사랑이 때려죽어도 없다 라는 것을

666 짐승이다는 것을

이것만이 세상에 유통이 되고 매매 가 되요

소통이 된다 말이죠.

 

십자가의 용서는 소통이 안되고 단절 되거든요

이스라엘도 안되는 판국에

다윗 이라는 상품이 매매가 될까요?

다윗을 입에 꺼냈다가는 사울왕에게 죽임을 당합니다.

저 제사장처럼 말이죠.

 

오늘날도 마찬가지 이다 말이죠.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 용서를 교회에서 발설했다가는 죽임 당해요 글쎄

강도의 소굴이거든요.

 

뭐 그런 교회를 회개 시키겠다굽쇼?

예수님은 그렇게 하신 적이 없어요

그냥 죽임 당하면 되는 겁니다.

즉 이 처음자리를

주의 인자하심을 모든 인간들이 다 싫어하고

그 자리에 함량미달인 666 이라는 짐승 곧 국가죠 국가와 종교를 채워서

유통시키고 매매하는 겁니다.

즉 십자가 이야기 했다가는 분위기 다 깨뜨리고 썰렁하게 만들어

더 이상의 관계를 이어갈려고 하지 않는

알아서 다 짤라버리는 죽임 단절이 벌어진다 말이죠.

 

교회나 이스라엘이나 이방나라나 절간이나

결국 소통되는 것은 666 이다 말이죠

 

그러니 마귀가 3가지 시험을 하는데

너가 만약 하나님의 아들 곧 메시아 이다면

구원자요 이스라엘 왕이라면

유대인의 왕이라면

나도 이스라엘 왕인 것처럼

나도 유대인의 왕인것처럼

사울왕이 그랬듯이 이스라엘 왕처럼

이런 이런 왕으로써 백성에게 베풀어라 라고 조건을 내거는 겁니다.

 

예수님은 다 거부하시면서

비천하고 상한심령으로써 이 원수들로부터 건져달라고

엘리 엘리 라바사박다니 아버지여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라고

잃어버렸다가 다시 3일만에 되찾는 주의 인자하심이라는

처음자리

십자가의 자리를 만드시고 다 이루었다고 선언해서

이스라엘 왕의 역할을 다 하시고 올라가셨다 말이죠.

 

그리고 이 십자가의 자리에서

태어난 자들만 새이스라엘로 삼아서

주의 이름을 찬양케 만드신 겁니다.

이 백성은 바로 새노래 곧 십자가를 노래 하는

십사만사천으로써

주의 인애하시고 자비하심을 영원히 노래하도록 지음받은자 이기 때문이다 말이죠.

 

그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아멘 시편 136


비천한 자를 왕으로 세우는 십자가의 지혜 (시편 142편).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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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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