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41. 인간의 반세겔 지킴 vs 인자의 반세겔 완료 (마 17장 22-27절)

지키는 법만 끌어모으는 종교 vs 넉넉한 자유를 누리는 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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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17:22, 개역) 『갈릴리에 모일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
(마 17:23, 개역) 『죽임을 당하고 제 삼 일에 살아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심히 근심하더라』
(마 17:24, 개역) 『가버나움에 이르니 반 세겔 받는 자들이 베드로에게 나아와 가로되 너의 선생이 반 세겔을 내지 아니하느냐』
(마 17:25, 개역) 『가로되 내신다 하고 집에 들어가니 예수께서 먼저 가라사대 시몬아 네 생각은 어떠하뇨 세상 임금들이 뉘게 관세와 정세를 받느냐 자기 아들에게냐 타인에게냐』
(마 17:26, 개역) 『베드로가 가로되 타인에게니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러하면 아들들은 세를 면하리라』
(마 17:27, 개역) 『그러나 우리가 저희로 오해케 하지 않기 위하여 네가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오르는 고기를 가져 입을 열면 돈 한 세겔을 얻을 것이니 가져다가 나와 너를 위하여 주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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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마태복음 17장 24-27절
제목 : 인자와 성전세
일시 : 2004년 8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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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강-마17장,24-27(인자와,성전세)-mat040815

인자와  성전세

2004년 8월 15일                          본문 말씀: 마태복음 17:24-27

17:24 가버나움에 이르니 반  세겔 받는 자들이 베드로에게 나아와  가로되 너의 선생이 반 세겔을 내지 아니하느냐17:25 가로되 내신다 하고 집에 들어가니 예수께서 먼저 가라사대 시몬아 네 생각은 어떠하뇨 세상임금들이 뉘게 관세와 정세를 받느냐 자기 아들에게냐 타인에게냐17:26 베드로가 가로되 타인에게니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러하면 아들들은 세를 면하리라17:27 그러나 우리가 저희로 오해케 하지  않기 위하여 네가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오르는 고기를 가져 입을 열면 돈 한 세겔을 얻을 것이니 가져다가 나와 너를 위하여 주라 하시니라


예수님의 죽으심은 장난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재미 삼아 십자가 지신 것이 아닙니다. 너무나도 당연하고 마땅한 현실이기에 지신 것입니다. 하지만 그 현실은 역시 너무나도 큰 괴로움을 예수님을 안겨 줍니다.

그래서 한 때는, 그 뜻이 자기를 비켜 가기를 요청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에게 주어진 이러한 심각성을 오늘날 우리는 얼마나 동감하고 있습니까? 왜 예수님은 이토록 힘든 십자가를 거부하지 않았던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십자가가 진리가 되기 때문입니다. 

진리란 그 어떤 것에도 양보 할 수 없는 절대적 요소가 그 안에 담겨 있습니다. 진리이기에, 현실 중에서 진짜 현실 그 자체이기에 예수님은 그 현실성을 위하여 다른 현실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요한복음 14:10-11에 보면,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예수님의 모든 일은, 스스로 알아서 현실을 대처해서 나온 일들이 아니라 아예 현실 그 자체가 되는 하나님의 뜻이 예수님 안에 계신 하나님에 의해서 수행되고 있다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무엇이 참된 하나님의 뜻이고 현실이냐를 알고 싶다면, 예수님이 무슨 행동을 했고, 예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셨는가만 봐야 한다는 겁니다. 예수님 바깥에는 그 어떤 하나님의 뜻도 없습니다. 

신비롭고 멋진 경건한 꿈을 꾸더라도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그런데 현혹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이란 예수님의 비켜가서 생성되는 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만 나타납니다.


그것만이 진리가 되고 실제 현실이 될 뿐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 외치기를, "다 이루었다!"고 하셨습니다. 이 외침은 예수님만이 해야 하지 우리 인간은 할 수 없습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이 원하는 현실을 온전히 다 이루어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바로 이런 우리 인간의 허약함을 함께 보여주시는 십자가입니다. 사실 십자가 매달린 채 극도의 저주와 괴로움과 징벌을 받아야 마땅한 자는 예수님이 아니라 우리들입니다. 아무리 신비롭고 화려한 꿈을 백 번씩이 꾸었다 할지라도 하나님 보시기에 그저 십자가에 달린 채 저주받아야 마땅한 죄인에 불과할 존재입니다. 

그렇다면 왜 십자가 이 전에 여러 가지 예수님의 행적과 말씀들이 나와있는 겁니까? 십자가가 진정 하나님의 뜻이라면 처음부터, "자 이것이 십자가이다. 날 믿으라" 하면 그만이 아니겠어요? 

왜 산상설교나 오병이어 등의 기적들이 그 앞서 있어야 하는 겁니까? 그것은 십자가란, 인간의 죄 때문에 발생된 사태이기에 인간의 죄가 어떤 식으로 발휘되는지를 노출시키지 않고서는 의미 없는 현실이 되기 때문입니다. 

즉 죄의 끝도 십자가이요 의의 시작도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이 남기신 모든 말씀과 행동들은 모두 사전에 십자가 의의를 보여주는 차원에서 생긴 일들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과 주고  받는 논쟁과 다툼과 대화에서는 인간들이 스스로도 알지 못하는 죄들이 유감 없이 폭로됩니다. 

오늘 본문도 예외가 아닙니다. 예수님 무리에 대해서 성전 세를 달라고 요청하는 세력들이 있었습니다. 이들과 예수님과의 만남에서 또다시 십자가의 의의가 미리 살아나게 됩니다. 즉 인간의 죄가 무엇이며 그 죄는 누구에 의해서만 해소되는지를 말입니다. 

성전 세란 출애굽기 30:13-16에 나와 있는 대로 그 어떤 사람도 예외 없이 20세 이상 성인이라면 다 동참해야 되는 생명의 속전입니다. "무릇 계수 중에 드는 자마다 성소에 세겔대로 반 세겔을 낼찌니 한 세겔은 이십 게라라 그 반 세겔을 여호와께 드릴지며 무릇 계수 중에 드는 자 곧 이십세 이상 된 자가 여호와께 드리되 너희의 생명을 속하기 위하여 여호와께 드릴 때에 부자라고 반 세겔에서 더 내지 말고 가난한 자라고 덜 내지 말지며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서 속전을 취하여 회막의 봉사에 쓰라 이것이 여호와 앞에서 이스라엘 자손의 기념이 되어서 너희의 생명을 속하리라" 

즉 결코 가난한 자라고해서 봐주는 것도 없고 부한 자라고해서 더 많이 내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누구든지 거룩한 하나님 앞에서 모두 죄 사함을 받아야 지만 구원이 되는 동일한 처지에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성전세가 곧 생명의 속전이 된다는 말은 성전 세를 거두어 성전을 유지해야만 그 안에서 속죄 효과가 발생되어 그로 인하여 생명이 보존된다는 말이 됩니다. 열왕기상 8:50에 보면, "주께 범죄한 백성을 용서하시며 주께 범한 그 모든 허물을 사하시고 저희를 사로잡아 간 자의 앞에서 저희로 불쌍히 여김을 얻게 하사 그 사람들로 저희를 불쌍히 여기게 하옵소서"라고 되어 있습니다. 

성전이 이런 속죄의 기능을 하기 위해 있는 겁니다. 따라서 이 속죄 기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제사 드리는 자나 성전 건립 및 유지와 보수에 비용이 들게 마련입니다. 만약 성전세를 내지 않는 자가 있다면 이는 하나님의 속죄의 효과를 거부해 버리는 몸짓이라고 간주해도 마땅한 일입니다. 

그런데 이 거룩한 말씀대로 시행하고자 성전 세를 받으려 온 사람에 대해서 왜 예수님은 성전 세를 곱게 내는 것입니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성전 세를 낼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지금 예수님은 아직도 십자가도 지기 전입니다. 따라서 인간의 죄성이 착실히 폭로가 되는 단계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자신을 죄인이라고 하면서도 그 죄인들은 모여서 나름대로 죄관을 따로 만들어놓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문자 적으로 성경을 보는 태도입니다. 성전 건축에 협조 안 하면 하나님의 용서하심을 안 받겠다고 나서는 것과 같다고 몰아붙이게 됩니다. 그런데 인간들의 이러한 '성전세' 해석이 잘못된 이유는, 마치 말씀의 완성자가 자기 자신일 양 곡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준수하는 분은 따로 계십니다. 그 분은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그 분은 이렇게 외쳤습니다. "다 이루었다!"고 말입니다. 이것은 성전세 율법의 확실한 성취이기도 합니다. 그렇게되면 속죄가 자기 백성에게는 가능합니다. 

유대인들의 잘못은, 정말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지 못하고 단지 아들이 되어보고자 열심히 율법을 지킨다는데 있습니다. 거기에 비해 예수님은 진짜로 아예 하나님의 아들 되시는 분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만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다른 그 어떤 이도 아들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아드님 되시는 분이 해야하고 마무리해야 할 일 중의 하나가, 자기가 선택한 백성에 한해서는 무상으로 천국의 모든 복된 상태를 누릴 수 있도록 구원을 해야한다는 일이 들어있습니다. 

그 어떤 인간이 성전 세를 제사장에게 바쳤다고 해서 구원될 수 있는 것도 아니요 하나님의 아들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아들은 어떤 사람이 되는 겁니까? 오로지 예수님께서 자신이 행하신 일의 결과로 인해 얻어진 것을 선물로 주는 그 사람만 하나님의 아들이 됩니다. 

그러니까 성전 세 바친다고 해서 구원받아 하나님의 아들 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성전 세를 다 바치고 "다 이루었다!"고 외칠 수 있는 자에게 속한 사람만 하나님의 아들이다는 말입니다. 일단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더 이상 성전 세를 바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받아들여야 마땅한 사람입니다. 이 사실을 베드로가 미쳐 몰랐습니다. 그는 그저 외부의 강한 권세자가 그런 소리를 하니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고분고분 했을 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런 베드로를 통해서 인간의 죄를 찾아내시고 지적하고 가르치시는 겁니다. 그 가르치는 방법은 또 다른 사람이 아닌 물고기를 통해서 하십니다. 너무나도 고분고분 시키는 대로 충성하는 물고기가 오늘 본문에 등장합니다. 

베드로는 낚시를 해서 첫 번째 낚인 고기의 입을 열었습니다. 거기에 보니 예수님과 베드로 즉 2인분의 성전세가 담겨 있었습니다. 이로서 인간들의 성전 세 징수는 하나님의 뜻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점이 여실하게 드러났습니다. 

예수님은 성전 세 요구를 묵살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율법을 부수는 식으로 완성시키는 분이 아니라 온전케 하심으로서 더 이상 율법이 필요치 않는 방식으로 완성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친히 성전이시며, 예수님이 속전이 되셔서 이 사실 예수님 안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는 자만이 진정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은 진지하고 심각하게 십자가 지시고, 말씀하시고, 하셨는데 우리는 혹시 장난삼아 비현실적인 감각으로 신앙생활하고 있지는 않는지요. 부디 예수님의 다 이루심을 평생토록 평안한 마음으로 기뻐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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