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 강도의 소굴로 만드는 몰각한 목자들 (사 56, 9-12).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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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 강도의 소굴로 만드는 몰각한 목자들 (사 56, 9-12) 


안식일을 더럽히지 않는 손 깨끗한 자??? (사 56, 1- 8)
이사야 2017 2020. 7. 18. 13:42
18-95 안식일을 더럽히지 않는 손 깨끗한 자??? (사 56, 1- 8) 

(사 56:9, 개역) 『들의 짐승들아 삼림 중의 짐승들아 다 와서 삼키라』
(사 56:10, 개역) 『그 파수꾼들은 소경이요 다 무지하며 벙어리 개라 능히 짖지 못하며 다 꿈꾸는 자요 누운 자요 잠자기를 좋아하는 자니』
(사 56:11, 개역) 『이 개들은 탐욕이 심하여 족한 줄을 알지 못하는 자요 그들은 몰각한 목자들이라 다 자기 길로 돌이키며 어디 있는 자이든지 자기 이만 도모하며』
(사 56:12, 개역) 『피차 이르기를 오라 내가 포도주를 가져오리라 우리가 독주를 잔뜩 먹자 내일도 오늘 같이 또 크게 넘치리라 하느니라』

(사 56:9, 새번역) 『들짐승들아, 와서 나의 백성을 잡아먹어라. 숲 속의 짐승들아, 와서 나의 백성을 삼켜라.』
(사 56:10, 새번역) 『백성을 지키는 파수꾼이라는 것들은 눈이 멀어서 살피지도 못한다. 지도자가 되어 망을 보라고 하였더니, 벙어리 개가 되어서 야수가 와도 짖지도 못한다. 기껏 한다는 것이 꿈이나 꾸고, 늘어지게 누워서 잠자기나 좋아한다.』
(사 56:11, 새번역) 『지도자라는 것들은 굶주린 개처럼 그렇게 먹고도 만족할 줄을 모른다. 백성을 지키는 지도자가 되어서도 분별력이 없다. 모두들 저 좋을 대로만 하고 저마다 제 배만 채운다.』
(사 56:12, 새번역) 『그 도적들이 입은 살아서 "오너라, ㉠우리가 술을 가져 올 터이니, 독한 것으로 취하도록 마시자. 내일도 오늘처럼 마시자. 아니, 더 실컷 마시자" 하는구나. / ㉠사해 사본과 시리아어역과 불가타와 타르굼을 따름. 마소라 본문에는 '내가'』
(마 21:13, 새번역)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성경에 기록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고 불릴 것이다' 하였다. 그런데 너희는 그것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 ㉥사 56:7 ㉦렘 7:11』
(막 11:17, 새번역) 『예수께서는 가르치시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기록한 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불릴 것이다' 하지 않았느냐? 그런데 너희는 그 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 ㉤사 56:7 ㉥렘 7:11』
(눅 19:46, 새번역)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성경에 기록하기를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될 것이다' 하였다. 그런데 너희는 그것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 ㉢사 56:7 ㉣렘 7:11』


에스겔서의 주제는 새성전입니다.

이 새성전을 말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강도의 소굴로 만드는 육의 소욕들의 내막을 알아야 합니다,

그 차이로써 새성전이 증거되거든요

사람의 손으로 짖는 성전이 왜 거짓임을 말이죠

바로 그런 의미에서 이사야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 지도자들이
왜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즉 에스겔의 주제가 새성전이라는 새마음과 인자 라는 인물이듯이
그것을 이사야서 식으로 표현하자면 바로 새 일입니다.

이 새 일을 펼치심에 있어서
개같은 이방나라는
이스라엘 속에 있는 소위 영적지도자들 곧 목자들 이라는 개들을 삼키고자
이방나라가 동원이 된다는 겁니다.

개같은 이방나라가 이스라엘 지도자인 개를 처리하는 ~~~

결국 약속의 땅은 인간 좋으라고 주신 땅이 아니다 말이죠
주님 좋으라 라고 주셨던 땅입니다.
그 땅에 부합된 인간
곧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용서 받은 그 믿음으로 사는 인간을
주님이 원하시는 인간이였다 말이죠

심지도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거두는 그런 희한한 땅
마치 비유의 땅
부활의 땅
계시의 땅 이듯이 말이죠

2019.05.05 [부활의 골짜기]에 대한 경고 (사 22, 1-25)
2018.08.10 환상의 골짜기 예루살렘에 대한 경고, 통곡하는 선지자 (사 22; 1-25)

그런데 소위 이스라엘의 영적 지도자 라는 자들이
소위 개같은 이방인과 다를바 없는 개 노릇을 하는
하나님의 약속의 의미를 거부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엉뚱한 길로 인도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사고방식이 백성들에게 주입이 되기에

거짓 목자들과 백성들은 마치 조건을 갖추는 식으로 따지게 됩니다.
좋은 환경을 주시면 하나님을 잘 섬기겠다 라고 말이죠

결국 그들이 지금 형편이 어려운게 아니라
도리어 너무 너무 풍족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있는 겁니다.

즉 지난 주에 말씀 내용인 이사야서 말씀과 대조를 이룹니다.

이방인이 하나님을 믿는데 있어서 언제든지 버림받게 될 것이다 라고 생각지 말라 라고 하십니다.
또 고자라고 마른나무라고 말하지 말라
주의 성산은 바로 천국을 위하여 고자된 자에게 오히려 버림이 되지 않는
영원한 약속이 만민이 기도하는 집으로 일컬음을 받기 때문에

안식일은 곧 성전 즉 기도하는 집에서
더러움이 거룩으로 전이가 되는 이동이 되는
희생제사가 펼쳐지기 때문에 그렇다 라는 겁니다.
이 용서를 쳐다보라꼬
장대 높이 달린 인자를 쳐다보라고
새언약
곧 하나님의 죽음을 쳐다보라꼬
이방인을 모으시는데 있어서

지지난 주에
바벨론 포로 속에서 기쁨으로 나오고 (때려죽어도 그럴 리가 없다 하나님이 그럴리 없다, 절대로 이스라엘 망할리 없다 라는 속에서)
은혜로 평안히 평화의 도시 예루살렘으로 인도함을 받게 될 것이다 라는(때려죽어도 안 돌아갈란다 ~~~ 라는 속에서)

이 새 일에
이방인은 혜택을 입게 되는 배려를 받는데

오히려 이스라엘은 거꾸로 이 약속을 개무시 해 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이 이스라엘 지도자들을 개들이 물어뜯도록 개 취급해 버리시겠다고
예언하시는 말씀입니다.

마치 예수님을 개무시했던 유대인들이
성전이 무너지고 지금까지도 니느웨 백성과 같은 이방인에게 심판을 받듯이 말이죠
그래도 완악한 수건을 벗지 않는다 말이죠

본인들이 심판해야할 이방인이
도리어 이스라엘을 심판하고

본인들이 이 언약에 무릎 꿇고 경배해야할 이스라엘 자리를 이방인이 차지하고
도리어 이스라엘은 바깥에 내어 쫓겨나서 이를 갈게 되는 식이다 라는 거죠

(사 56:7, 개역) 『내가 그를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은 나의 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
(사 56:8, 개역) 『이스라엘의 쫓겨난 자를 모으는 주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이미 모은 본 백성 외에 또 모아 그에게 속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만민이 기도하는 집인 하나님의 집에서 두 사람이 기도하는데
한 사람 바리새인은 자기의 의를 쌓은 것을 외치고 있는 반면에

세리는 긍휼을 바라는 겁니다.
즉 쫓겨남이 마땅한 죄인임을 알기에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시는 심판의 주를 목격하고 있는 반면에

바리새인의 기도는 오늘 본문의 이스라엘 영적 지도자들처럼
배불러 터져서
결코 가난하고 어려운 환경이라서 말씀을 못 지키는 거부가 아니라
도리어 너무 너무 잘 지켜서
너무 너무 부요한 가운데 배불러 터저셔

그들은 영적지도자들인 자신들에게 잘 바치면
너희들도 복 받는다 라고 백성들을 가르치고 있으니

그 상전을 예수님께서 엎어버리고
양 소 비둘기 등등 제물이 될 짐승들을 내어 쫒고자 채찍을 휘두르시어야만 했다 말이죠

(요 2:15, 개역)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어 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요 2:13, 개역)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더니』
(요 2:14, 개역)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의 앉은 것을 보시고』
(요 2:15, 개역)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어 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요 2:16, 개역)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요 2:17, 개역)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개 같은 목자
곧 신약에서는 강도의 소굴로 만든 제사장들은
잘 바치는 자는(번제와 제사) 잘 믿을 수 있다
잘 믿는 자는 잘 바침으로써 복받는자가 될 수가 있다

괜히 부자청년이 바리새인의 배경 속에서 나온게 아니다 라고 했죠
그래서 바리새인 이라는 독사의 자식들을 염두하고서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 구멍에 들어가는 것 보다 더 어렵다 라고 하신 겁니다.
부자가 된 것을 복받은 자로 보는 의식을 바리새인들과 같은 사고방식에서 나온 것이다 라는 겁니다.

그럼 부자 라고 무조건 지옥가고
가난하면 무조건 천국인가? 

마음이 가난한 자는
가난한 자들이 더더욱 무시하거든요 
그런 자들이 부자가 되고자 하듯이
늘 부자를 꿈꿔요

보세요 바리새인이 십의 일조 이레에 두 번 금식 저 세리처럼 삥듣지 않기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이 보살펴 준 덕분이다 라고 기도하잖아요
하나님 덕분이라고

이게 바로 오늘 본문에서 지적하고 있는 이스라엘 선생 지도자
소위 영적 지도자들의 사고방식이다는 겁니다.
이렇게 계속적으로 좋은 환경을 주시면 더더욱 잘 섬기겠다 라고

이건 이스라엘이 아니라
모든 민족들의 종교에서 늘 튀어나오는 중언부언의 기도 아니냐 말이죠

그럼 반대로 세리의 기도를 보자 말이죠

세리의 기도는 오히려 이사야의 탄식과 같습니다.
앞의 글 에스겔이 탄식 하잖아요

(겔 21:4, 개역) 『내가 의인과 악인을 네게서 끊을터이므로 내 칼을 집에서 빼어 무릇 혈기 있는 자를 남에서 북까지 치리니』
(겔 21:5, 개역) 『무릇 혈기 있는 자는 나 여호와가 내 칼을 집에서 빼어낸 줄을 알지라 칼이 다시 꽂혀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다 하라』
(겔 21:6, 개역) 『인자야 너는 탄식하되 허리가 끊어지는듯이 그들의 목전에서 슬피 탄식하라』
(겔 21:7, 개역) 『그들이 네게 묻기를 네가 어찌하여 탄식하느냐 하거든 대답하기를 소문을 인함이라 재앙이 오나니 각 마음이 녹으며 모든 손이 약하여지며 각 영이 쇠하며 모든 무릎이 물과 같이 약하리라 보라 재앙이 오나니 정녕 이루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라』

바로 이 탄식을 세리는 오히려 만민이 기도하는 하나님의 집에서 합니다.
고개도 못 들고 탄식해요 글쎄

바리새인은 이 에스겔 21장 말씀처럼
의인 됨을 갖추었고
악인 됨은 저 놈 세리입니다 저는 아님을 하나님께 감사하다 라고 하는데
바로 그런 바리새인 개인의 선악기준 의인과 악인
축복 받음과 저 저주 받은 세리 됨 이라는
그런 축복 저주가

이 탄식 앞에서 무슨 소용이 있냐 말이죠

세리는 이런 이스라엘 영적 지도자들의 의인됨을 못 갖추어서 탄식하는게 아닙니다.
의인도 악인도 모조리 다 심판하시는 이 여호와의 칼의 의미를 제대로 알았기 때문에 탄식한다 말이죠

아무리 봐도 약속의 땅에 걸맞지 않는
심판 받아 마땅한 죄인이라는 것에 탄식하는 겁니다.

왜 나는 주님이 원하시는 인간이 못 되는가에 대한 탄식 말이죠

바리새인이나 오늘 본문의 이스라엘 영적 지도자와 완전 정반대의 사고방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자가 세리에게 나타났거든요
새성전을 보게 되니까

비로소 화로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구나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라고

비로소 심판의 주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이 모욕적인 구원을 펼치시는 십자가의 죽음 곧 새로움을 봤기에
그 앞에서 이전 것은 다 지나가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나 배불러 터진 구원을 추구하고 있는 바리새인이나
오늘 본문의 이스라엘 영적 지도자들은
앞의 내용에서는 이스라엘 장로죠
소위 마을 대표 이장
동네 반장
이들의 관심사는
자신들의 손을 깨끗하게 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깨끗한 손 안 더럽힐려고 몸의 더러운 발은 안 씻기겠데요 글쎄

자 그러다 보니 부요하면 부요할수록 더더욱 하나님을 버리고
하나님의 자리에 대체상품 곧 하나님과 우상을 섞어버린
선악을 섬기고 주장하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부요함이 선이 되어버렸고(부자청년)
가난함은 
무시받는 꺼리는죽은자와 같이 됨을 졸지에 악이 되어버렸기에
하나님으로부터 저주 받았다 라고 보는 겁니다.

이런 미신이 지금도 역시나 한국교회를 이루고 있으니
악마 집단입니다.

그러니 총명한 자는 짐승의 수를 세어라 라고 하십니다

(계 13:16, 개역) 『저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빈궁한 자나 자유한 자나 종들로 그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계 13:17, 개역)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이 표는 곧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라』
(계 13:18, 개역) 『지혜가 여기 있으니 총명 있는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 보라 그 수는 사람의 수니 육백육십육이니라』

즉 666 육의 충만입니다
육체(사람의 수)로만 가득한 세상이다는 거죠
땅땅땅 세 번 완벽한 충만 이다는 겁니다.

상대적으로 14만 4천은
바로 이 새로운 새 일
하나님의 죽음인 십자가의 피 흘리심 속에서 나온 자이다는 겁니다.

죽이셨다가 다시 살리신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은
이 하나님의 의 에 의해 태어난 자
십자가의 죽음으로 인해 태어난 자가
동서남북 333 333 333 333 12지파 12지파 12 곱하기 12
그래서 14만 4천 인데
숫자 개념이 아닙니다.
새찬양자의 동서남북 방향으로 충만하다는 겁니다.
새노래의 충만성
마치 페인트 칠이 동서남북 온 우주를 도배한다 라고

누가?
벙어리의 기도가 온 우주에 올라가서
골방에서 기도함이 하늘 끝까지 들리듯이

이 주의 이름이 온 세계에 퍼짐으로써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는다 라는 겁니다.
그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 바로 한 인물
예수님입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개같은 영적 지도자는
눈에 보이는 성전에 더더욱 집착하도록 할 수 밖에 없고
그러니 배불러 터져서
강도의 소굴을 만들고 있고

반면에
예수님이라는 초라한 성전은
개같은 이방인 까지도 와서
주의 이름에 무릎꿇고 경배하고 모든 입술로 주를 찬양하더라 말이죠
초라한데?

저런 배불러 터진 구원이 아닌데

하나님이 그를 죽이시기로 작정한 이 기쁜소식을 듣고
열국이 무릎을 꿇는데
마치 사도행전의 이데오피아 내시가
이사야 53장의 이 고난 받는 종이 누구냐 라고 묻고
주를 영접하듯이 

주님이 먼저 에디오피아 내시를 영접하니까
그 증상으로 나타나니(나타난 증상이란 에디오피아 내시가 주님을 영접하는 증상
왜? 주님이 먼저 내시를 영접하셨기에 그러니 에디오피아 내시가 하나의 비유 덩어리가 된 거죠)
도리어 빌립 사도가 믿어야 할 판국에 놓여진 겁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영적 지도자들은 도리어 성전 있음이
그들에게 올무가 된 겁니다.

성전에 바치기만 하면
자신들의 부요함이 더더욱 넘칠수 밖에요

마치 이것은 율법을 지키면 지킬수록
나 라는 자아가 더더욱 삭제됨을 마땅히 여김이 아니라
도리어 나 라는 자아를 더더욱 높이게 되는 식이 되듯이 말이죠

여기에 주님이 가만히 계실 분이 아닌 겁니다.
경제도 날리고
종교(교회, 성전)도 날리고
정치(권력 곧 국가)도 날리시면서 까지

약속의 땅에 딱 맞는 인간을 만드시는 겁니다.

그래서 기쁜소식
곧 바벨론 포로가 되었다가 탈출하도록 되어 있고 곧 잃어버림이고
다시 평안히 주의 이름을 위해 다시 살아나야만 하는 평안히 인도함을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온다 라는 이 기쁜소식 

새 일을 펼치시겠다 라고 참선지자 이사야 에스겔 등등이 외치는 겁니다.

전혀 안 기쁘죠
기쁜소식이 아니라 나쁜소식입니다.
특히 누구에게
이스라엘 지도자에게
아니 이 강도의 소굴을 날려버리겠데요
교회를 날려버리겠데요

그러니 이스라엘을 억수로 걱정해서가 아니라
자기 돈 자기 부요함 자기가 말씀 지켜서 의를 쌓은 것이 날라갈까봐
거짓선지자를 비롯해서
성전에 비밀의 방을 만들어 우상까지 세워서
내 돈 
내 재산
내 명예
내 목숨
내 구원이 날라가지 않도록 해 달라고

더더욱 번제와 제사를 펼치더라 라는 겁니다.
굿 판을 벌려요 글쎄

썩 물러가라
기쁜소식이라는 복음은
우리에게 나쁜소식이다 라고 잡귀야 물러가라 라고 하듯이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자야 또 너냐
부정적이고 삐딱한 알아듣지 못하는 모호한 말로 비유를 말하는 자 또 너냐 라고
잡귀야 물러가라 라고
그들은 술판을 벌리는 겁니다.

이대로 라고 건배 하면서 말이죠

바로 이런 개들을 이방나라를 동원해서
개들(이스라엘 목자)을 개(이방나라)가 찢어버리도록 만드시겠따 라고 하시는 겁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말씀하시느냐
성전을 헐라 내가 삼일 만에 짖겠다 라고 하시는 겁니다.

캬 인간의 아킬레스 치명적인 약점을 건드린 겁니다

즉 마귀를 건드렸다 말이죠
바로 예수님이 복음 증거 첫 번째 하신 일이 바로
마귀에게 시험 받는 것인데

경제 종교 정치
결국 힘이거든요
이 아킬레스를 건드렸어요
경제 강도의 소굴 돈 빼앗는 놈들이다는 거죠
종교 하나님을 이용해서 말이죠
정치 그래서 그저 힘을 모아서 하나님과 같이 될려는 것 밖에 없어요

이 세가지가 모여 집약이 된
강도의 소굴이 된 성전을 헐라 라고 하시니까

돌아버리는 겁니다.
온갖 종교적인 거룩을 위장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 했다는 둥
성전 모독
자칭 하나님의 아들 이라는 죄목

세가지 죄목이 따로 따로가 아니라 역여져 있습니다
반란죄 가이사에게 세금 거부는 돈이라는 경제와 반란죄라는 정치가 역여져 있고
자칭 하나님의 아들 신성모독죄 참람죄는 종교 문제이자
자신들의 설자리가 날라갈 판이니 역시나 정치적으로 빌라도에게 판결을 내려달라는 겁니다.
종교 문제는 자기들 문제인데 왜? 자기 손에 피 묻히기 싫어서 말이죠
또 세 번째 성전 모독죄 이게 제일 하이라이트입니다.
뭐 하나님 뭐 반란죄는 억지성으로 함정을 파서 모함해서 역어야 할 문제이겠지만

성전 모독죄는 자기들이 그럴 필요가 없어요
예수님이 아예 대 놓고서 자기 무덤 자기가 파듯이 대 놓고서
죄를 저질러 주고 있으니
바랬던 바 중에 바랬던 거죠
마치 안식일 날만 골라서 병고쳐 주고 있으니
얼마나 다행이냐 말이죠

이 눈에 보이는 성전을 건드린 것은
오늘날 교회죠

눈에 안 보이는 하나님 건드린 것 보다
이것은 연기를 좀 해야 돼요
참람한 말을 들었다 라고
옷을
가만히 있는 옷을 괜히 찢는
회개 하는 척을
육체를 찢는듯한 그런 퍼포먼스 연기를 펼쳐야 하지만

성전을 헐라는
알아서 죄를 지어주고 있으니

자신들이 연기를 할 필요가 없는 겁니다
꼬투리 잡을려고 파 헤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명확한 증거로 알아서 나오더라 말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 자신은 자신이 성전 됨을
인간의 손으로 짖는 성전 보다 더 또렷함에 있어서
부정의 부정

그림자가 보다 더 모르도록 비유가 된 자기 자신의 성전 됨을

이 새로움을
이 하나님의 죽음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누가 속임수로 꾀냐 라고

인간 상대 하지 않고
지금 모든 인간들이 달려들고 있는 판국인데
마귀만을 상대로만 일하시고 있다 라는 겁니다.

이 새 일을
이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심을

인간들이 자기 의를 쌓는 그 우상짖에
또렷하게 밝히 보여주심으로써

이 하나님의 심판이 옳았다 라고
외치는 새노래를 부르는 자를 새롭게 만들어 내시는 겁니다.

그래서 먼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겁니다.

얼마나 많은 허다한 무리가 이 십자가의 죽음에서 태어나서
새 노래를 부르는지

예수님의 운명 속에 참예된 자로써 말이죠

지난 주에 이방인에게는 절대로 끊어지지 않겠다 라고 하시고
오늘 본문 이스라엘 목자는 반드시 끊어버리겠다 라고 하시면서

먼저 된 자 나중 되고
나중 된자 먼저 되게 하시는

창녀 세리 강도가 먼저 천국에 들어가게 하시는
이 비유를 이 비밀을
이 모욕적인 구원

이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새 일을 다 이루어 놓았다 라고 선언 하시고
들어가시는 겁니다
직접 홀로 다 이루시는
이 의가 아니였으면 우리는 벌써 소돔 고모라 였기에

벌벌벌 떨면서 두려움과 떨림으로
간담이 녹으면서
이 십자가의 죽음이 옳았다 라고 

허걱!! 헉!!! 놀라 양동이를 내팽개치고
경끼가 일어나며
깜짝 깜짝 놀라면서

이 심판의 주를 누리는 겁니다.

그 정도로 이 새 일을 새 마음을 밀어붙이시는 겁니다.
여기에 밀려짐을 당하는 기뻐하심을 입은 자들이(왜? 기쁜소식의 증상물이기에)
그 증상물로써
저들과의 차이로써 나타나는 겁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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